[김도영/정재현] 풋사과향 김대리 +
여주는 뱀처럼 차가운 피부를 타고 났다.
하지만 아직 그녀가 뱀이라는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여주는 하얀 얼굴에 다소 뾰족한 두상을 갖고 있다.
뾰족한 두상을 가진 뱀은 독을 품고 있으나
아직 그녀가 뱀이라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여주는 까맣고 긴 머리에 유연한 몸을 향유하며
동공은 점 하나를 찍어 놓은 듯
까만 눈동자보다 흰 자위가 차지하는 구역이 많지만
그녀가 뱀이라는 사실은 드러난 바 없다.
태초에 뱀은 하와에게 사과를 건네주었으나,
가장 먼저 사과를 탐한 자는 뱀이었으니.
여주와 도영은 매일 서로의 부서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었고, 도영은 자신도 모르게 홀려버린 듯 여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으며, 여주는 도영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어서 자꾸만 안달이 났다. 한 번만 깨물어볼 수 있냐고 물어봤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하겠지. 혼자선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실수인 척 도영의 어깨나 손목을 붙잡아 보았을 때, 여주는 제 맥박이 마구 뛰면서 마치 체온 조절용 약을 일주일 치를 털어 넣은 듯 온몸에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다행인 건, 도영 또한 여주와의 가까워진 거리가 싫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주에게 위기는 곧 찾아왔다. 여름이 다가오고 날이 더워질수록 회사에서 에어컨을 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주가 위치한 회계부의 자리마저 에어컨과 아주 가까운 자리였기 때문에, 여주는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아야 했고, 저도 모르게 체온이 떨어지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체온조절용 약을 분명 챙겨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씩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맞다보니 약으로 버티기가 어려웠다. 여주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고, 몸은 점점 굳어가는 것 같았다. 여주는 챙겨온 담요를 온몸에 둘러 최대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여주는 도망치듯 탕비실로 달아났다. 탕비실은 에어컨이 설치 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여주는 그곳에서 담요로 온몸을 싸맨 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따뜻한 물을 들이마셨다. 말 그대로 죽겠다, 싶은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 때, 탕비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점심 시간이라 회사 사람들이 모두 건물에서 나간 줄 알고서 방심하고 있던 여주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여주씨?"
도영은 담요를 덮고 누워 있던 여주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아픈 것 같아 안색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도영의 온기가 천천히 탕비실 공간을 채우면서 여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도영을 덥썩 끌어 안아버렸다. 도영의 체온이 여주에게 전해지면서 금세 여주는 기력을 찾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여주의 행동에 도영은 몸이 굳어서 가만히 서 있을 뿐, 어쩔 줄을 몰랐다. 밀어내지도 못했다. 못했다기 보다, 밀어내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괜찮은 거예요?"
"도영씨.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여주는 여전히 도영의 허리춤을 꽉 끌어 안고 있었다. 해를 듬뿍 받은 풋사과 향이 은은하게 풍기면서, 마치 맑은 날 봄의 햇살을 끌어안은 듯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기만, 온기만 전달 받고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여주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가까이에 있으니 풋사과 향이 더욱 진하게 풍겨나와서 그의 살결을 한 입 베어물더라도 기꺼이 낙원에서 추방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얼마 간 시간이 지나고 도영이 천천히 여주의 손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았을 때, 여주는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는 도영을 올려다 보는 눈빛이 꽤나 간절했다. 도영은 여주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더니, 자신과 달리 차가운 피부에 놀랐다. 아픈 줄 알았는데 열이 나는 건 아닌 것 같고. 근데 입술을 파랗게 질렸고. 영문을 알지 못해 궁금증어린 얼굴로 여주를 바라보자, 여주가 담요를 몸에 두르고는 말했다.
"냉방병 때문에. 에어컨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니까. 정신 못 차리겠는거 있죠."
"원래 몸이 이렇게 차가워요?"
도영이 여주의 이마를 손으로 천천히 짚으며 물었다. 여주는 그런 도영의 손목을 덥썩 잡고는 말했다.
"이것봐요. 저 수족냉증 있거든요. 그런데 찬 바람까지 쐬니까 죽겠는거예요."
여주는 죽을 뻔 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최대한 동정심을 얻을만한 얼굴로 도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여주의 눈을 보고 마치 무슨 최면이나 암시에 걸린 듯 멍해진 도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도영씨 아니었으면 죽을 뻔 했어요. 도영씨는 정말"
"............"
"따뜻해요."
여주는 작정이라도 한듯 눈웃음을 지으며 도영과 눈을 맞추었고, 도영은 제 몸을 제 손으로 감싸며, 그런 가? 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자신의 몸이 따뜻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얼굴로 시계를 본 도영은 이제 점심시간 끝나가요, 말하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여주 때문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까봐 걱정되던 차였다. 탕비실을 나서려던 도영의 손목을 붙잡고는 여주가 일부러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앞으로 자주, 도와줄 수 있어요?
"네...?"
도영이 당황하여, 여주가 하는 말의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곤 여주를 바라보자, 여주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예요."
여주의 장난에 도영은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여주의 어깨를 콩콩치며 아잇, 놀랐잖아요. 하고는 원망 섞인 소릴 내뱉는데, 여주는 자연스럽게 도영의 소매 끝을 잡고서 같이 탕비실을 나섰다. 오늘 오후까진 버티겠다, 속으로 생각하고서는 다시 자신의 부서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자의 부서로 돌아가는 길에, 도영의 풋사과향이 멀어지는 게 아쉽기만 했다.
아까 탕비실에서 도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 체온을 빌릴 순 없을 것 같고, 대신 쉬는 시간마다 옥상에 올라가 직접 여름의 햇볕을 맡는 것으로 대신했다. 더운 여름 날, 담배를 피러 옥상에 올라온 사람들은 파라솔이 펼쳐져 있는 그늘에 모여 있는데, 여주는 옥상의 햇볕이 쏟아지는 한 가운데로 걸어가 따뜻한 열기를 받으며 살겠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여주의 모습을 보고, 여주는 얼굴도 모르는 회사 사람들은 회계부 정주임은 소문대로 별나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대부분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뒤이어 여주도 옥상을 내려가려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까만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여주씨?"
여주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여주는 그리고는 넓은 야외라서 미처 맡아내지 못했던 수인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동물계 수인이면서 자신의 천적인 수리목의 독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여주를 물어 뼈채로 삼켜버릴 수도 있는, 까맣고 커다란 날개와 같은 팔힘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할머니께 전해들은 적이 있다. 살면서 맹금류는 될 수 있는 한 피하는 것이 좋다. 싸우려고도, 덤비려고도 하지 말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살아라. 눈에 띄면 도망치거나 숨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여주의 눈앞에 서 있는 걸 막상 보고 나니 여주는 몸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본능적으로 제 입에 독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어를 하기 위해. 독을 뱉고 죽는 한이 있어도 잡아 먹혀서 죽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점점 여주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여주는 옥상 난간까지 뒷걸음질치며 밀려났다. 대부분의 수인은 버려진 섬으로 추방당했는데. 수인은 이 세계에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하는 생각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자, 여주는 저도 모르게 겁에 질려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죽었다, 이대로 죽었다, 하는 생각에 눈을 꾹 감고 있는데, 옥상 문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열고 누군가 뛰어들어왔다.
"여주씨! 결재 받을 거 있는데, 왜 이렇게 늦어요!"
뛰어올라온듯 숨을 몰아쉰 도영이 떨고 있던 여주의 손을 힘을 주어 꽉 잡고는 재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여주를 끌고 내려왔다. 그 순간, 재현의 옆을 스쳐간 도영에게서, 재현은 또한 자연계 수인의 냄새를 맡았다. 사과향이 진하게 풍겼다. 그래서 정여주가 그렇게 안달을 냈구나. 재현은 한 번은 봐주겠다는 듯, 도영이 여주의 손을 잡고 달아나는 뒷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