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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탐구> 성리학의 전래와 발달
1. 성리학의 초기 수용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때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송(北宋)에서 성리학이 발흥할 무렵인 고려 인종 때의 전후(11∼12세기)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해 들여왔고, 김양감(金良鑑) · 윤언이(尹彦頤) 같은 대학자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송에 가는 한편, 중국 사신들이 고려에 빈번히 왔다.
중국에 유학 가는 고려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고려 시대 학자였던 최충(崔冲)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이 솔성(率性), 성명(誠明), 대중(大中) 등 성리학자들이 특별히 중시한 텍스트였던 ≪중용≫의 용어로 되어 있는 데서도 성리학의 전래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예종 때 왕의 임석 하에 거행되었던 중신들의 경전 강론의 분위기를 가리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가르침(敎)과 성명도덕(性命道德)의 도리(理)가 만당에 가득하였다"고 하는 기록(淸讌閣記)이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성리학은 중국에서 발흥·성장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安裕)은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따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 무렵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의 수도에 가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 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 왔다.
또한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 등을 전파함은 물론 과거 시험에서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은 피상적 차원을 넘어 성리학이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들처럼 성리학을 익혀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당시의 향리 출신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명적(正名的) 명분 의식에 기초하여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면서 배원친명(排元親明)의 외교정책, 정방제(政房制)의 폐지, 토지 제도의 개혁 등에 힘썼다.
2. 양반 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조선조를 개창하였던 당시 역성혁명의 주체는 대내적으로는 왕씨 정통의 문란을 비판하고 대외적으로는 배원친명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여기에서 성리학의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을 엿볼 수 있다.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일찍이 고려 초의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이색 등도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그것은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도전은 <불씨잡변 佛氏雜辨>·<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허구성·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의 비인륜성·반사회성 등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배척하였다.불교도 중에는 기(器)를 버리고 도(道)만을 추구하여 사회를 멀리하는 고고(枯槁)·응체(凝滯)의 폐단에 빠지거나, 도와 기의 의미적 층차를 무시하고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고자 하여 창광방자(猖狂放恣)의 폐단에 빠지는 부류가 있다고 꾸짖는다.
또한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하여 현실을 벗어나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성리학이야말로 이러한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여 사회 윤리를 강화하고 국가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그는 성리학을 가리켜 “옛사람들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국교인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으로서 국가의 통치 이념을 건립함에 따라 성리학은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불교에 대한 비판 보다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오경천견록≫은 오경(五經)에 주해를 단 것으로 중국 오징(吳澄)의 ≪주역찬언 周易纂言≫, 진호(陳澔)의 ≪예기집설 禮記集說≫ 등의 약점을 보완·극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체용관(體用觀)을 적용하여 오경 전체를 유기적인 관계로 파악하였다.
≪주역 周易≫과 ≪춘추 春秋≫를 각각 체[全體]와 용[大用]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시 詩≫·≪서 書≫·≪예기 禮記≫는 그 중간에서 정사(政事)·언정(言情)·행위를 다룬 서적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경 각권 또한 그 내용에 따라 체용을 갖춘 것으로 이해하였다. ≪주역≫에서는 이와 도, ≪춘추≫에서는 도와 권(權)이 각각 체와 용에 해당한다고 파악하였다.
권근의 성리학적 식견은 그의 창의적 저술인 ≪입학도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것은 ≪중용≫·≪대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 입문서로서 성리학의 중심 사상을 뽑아 작도(作圖)하고 개략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림(圖)의 위치 배열과 해설(說)에서 그의 성리학적 견해를 볼 수 있다.
권근은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인간(人)·심·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천인 합일이라는 유학적 이상을 심성의 수양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의 근원과 기의 근원을 대립적으로 배열하여 이로부터 순선무악(純善無惡)의 사단(四端)을 연역하고 기로부터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정을 연역하였으며 선하고 악한게 되는 계기를 의(意)의 기미(幾微)에 두었다. 또한 성(誠)·경(敬)·욕(欲)의 권역을 구분하여 성인과 중인의 갈래를 보이고, 중인도 기질을 변화시켜 경으로써 존양성찰(存養省察)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형질적 기와 본래적 이를 함께 갖추고 있으므로 이로써 동물적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의 이기 심성(理氣心性)론은 군주 및 지배층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인정(仁政)·왕도(王道)를 실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황·이이 등 일군의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3. 의리 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士林派) 성리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특히 사화가 많았던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는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의 의리관과 도학 정신은 도덕·정치·역사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慈)-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계통이 사림파의 계보로 공인되었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김숙자를 통해 이어졌다. 사림파 학자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많은 사화(士禍)를 받으면서도 성리학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였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절의를 밝혔고 김시습(金時習) 등의 많은 절사(節士)들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즈음하여 윤리 도덕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소학≫ 등이 널리 간행·반포되었다. 성리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던 ≪소학≫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등의 편으로 되어 있는 성리학적 율신(律身)·수기(修己)의 책이었다.
≪소학≫의 학습은 김굉필·남효온(南孝溫) 등 당시 사림파 학자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특히 평생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칭하였던 김굉필은 한시도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도 도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도(道), 즉 정(正)과 선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의리·공사(公私)의 구분을 확실히 함으로써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던 그는 의(義)와 공(公)에 입각하여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책으로 공부(貢賦)의 경감,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언로의 활성화, 소격서(昭格署)의 철폐, 사림의 사기진작, 공신호(功臣號)의 재정리 등을 시행하였다.
한편 조광조는 의와 공을 살리는 길을 선비(士)에게서 찾았고 선비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모범이 되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학 정신에 근본하여 국정 개혁에 힘쓰던 중 기묘사화를 만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公)과 의리를 지켰던 도학 정신은 길재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하나의 학통관을 형성하였고 한국 성리학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이기심성의 이론적 탐구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것은 16세기부터이다. 의리를 중시하던 이전의 성리학자들은 전기 사림파로, 이기심성(理氣心性)을 이론적으로 정밀화하였던 성리학자들은 후기 사림파로 분류할 수 있다.
16세기가 되면서 이기 문제의 본격적 논의가 이언적(李彦迪)과 서경덕(徐敬德)에서 시작된다. 이언적은 이와 기,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 도와 기(器)·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二而一, 一而二)인 관계로 합하여져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보편적 원리인 이를 구체적 기와 동시적으로 읽음으로써 이가 공허한 초월성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기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도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다’고 함으로써 이의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한편 자득(自得)의 방법으로 공부하였던 서경덕(徐敬德)은 기일원론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의 선차성을 부정하고 이는 기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세계는 담일무형(湛一無形)한 기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聚散)에 불과하지만 기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기불멸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기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이와 기로써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해석할 것인가라는 심성론적 연구로 이어졌고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논의의 발단은 이황이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 天命圖≫에 나와 있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는 내용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고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사단(四端 : 惻隱·羞惡·辭讓·是非의 情)을 이에 칠정(七情 : 喜·怒·哀·懼·愛·惡·欲)을 기)에 대응시켜 사단과 칠정의 근거를 분립시켰다(七對四).
그러나 기대승은 사단은 이에 칠정은 기에 분립할 수 없고 사단 역시 칠정에 포함되어 있다(七包四)는 통일된 해석을 제시하였다. 기대승은 이와 기의 합(合)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황 역시 기대승의 이기 구도에 동의했지만 인간의 선(善)한 감정(四端)이 발생하는 경로를 감정 일반(七情)의 발생 경로와 내용적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이 일치할 수 없었다.
이황은 나중에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 것(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와 기의 결합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 우선성에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분립시킨 것이다.
이이(李珥) 역시 이황의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에 비판적이었다. 이이는 이황의 사단과 칠정의 분립에 반대하고 칠정이 사단을 내포한다(七包四)고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에서도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氣發理乘)’는 것만을 옳다고 인정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이와 기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묘합(妙合)의 관계로 해석하였다. 이는 이이고 기는 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선후가 없고 사이가 없기 때문에 둘로 나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는 자신의 이기론을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총괄하고 있다. 즉 우주에는 하나의 동일한 이가 관통하여 있으면서도 서로 차이나는 기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사물들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각각 분리하여 논의할 수 있는 선택적 개념으로 보지 않고 동시적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5. 예학적 변용과 그 구현
이기심성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한창이던 16세기 말엽부터 예학(禮學) 역시 매우 고조되었다. 유학에서 분류하는 예의 종류는 300∼3000종이 있다고 할 만큼 잘 세분화되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학을 연구하여 각각의 상황에 합당한 인간의 행위 규범을 제정·준수하고자 하였다.
예의 준수는 성리학의 의리 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분별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예를 둘러싼 복상 문제(服喪問題)나 예송(禮訟)의 시비가 당쟁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예학은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胡亂) 등으로 문란해진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인간의 생활 양식을 제도화하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이었다. 불교의 비윤리성·반사회성을 비판하였던 성리학은 예를 통하여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형식화시킴으로써 성리학적 규범을 제시하였다. 특히 성리학이 관학화(官學化)된 이후로 예의 정립과 실천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려 말기에는 ≪가례 家禮≫의 시행을 적극 권장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 등이 간행되어 윤리적 실천 지침이 되었다. 또한 향교와 향약은 오륜(五倫)에 근거한 미풍양속을 전국으로 보급시켜 일반 서민 계층에서도 예가 준수될 수 있게 하였다.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예학에 대한 전문 서적을 내놓으면서부터 실용적 예절로만 행해지던 예가 학문적 연구 분야로 부상하였다. 예는 ‘보편적 이치가 구체로 드러난 형태(天理之節文)이며, 사람들이 따르고 지켜야 할 형식(人事之儀則)’이라는 성리학적 예 관념은 예학을 통하여 매우 세세한 일상사에서 구체화되었다.
정구는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를 지어 예를 종류 별로 정리하였고 김장생은 ≪의례문해 疑禮問解≫를 지어 처 부모의 칭호를 자칭·타칭의 경우에 각각 어떻게 불러야 옳은가 등등 예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성리학의 의리 관념은 예학의 정통성(正統性) 문제와 직결되었다. ≪의례≫나 ≪의례도≫에 근거하여 정통(正統)을 중요시하여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 계통을 바로하고자 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 조(趙)씨의 복(服)을 일 년[朞年]으로 할 것인지 삼 년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서인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남인이었던 윤휴(尹鑴)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효종을 가통(家統)으로 볼 것인지 왕통(王統)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정통성의 계열 분류를 놓고 발생했던 예송은 당쟁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지만 직접적으로는 성리학적 행위 규범을 해석하면서 나타났던 입장의 차이였다.
6. 인성·물성의 동이론
퇴계·율곡 이래 사단칠정의 논변이 1세기 정도 전개되었을 무렵 사람의 성(性)과 동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논변이 시작되었다. 보통 이것을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라고 부른다.
청풍(淸風)의 황강(黃江 : 堤川 寒水)에 살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인물성에 대한 논변이 발단되었다. 이간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하고 한원진은 다르다고 함으로써 서로 공박하였다.
이 논변이 전개될 당시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고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뒷날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렀다.
이간은 인간과 동물이 다섯 가지 온전한 덕성인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태극·천명·오상을 동일한 본체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동일한 오상을 갖는다고 보았다. 다만 인간과 동물은 기질적 차이 때문에 오상의 드러나는 정도가 다르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도 기품의 맑고 탁함(淸濁粹駁)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지만 마음이 발하지 않을 때의 기는 본질적으로 순선(純善)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편 한원진에 의하면 태극과 천명은 무제한○무시종의 보편타당한 본체여서 형기(形氣)를 초월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상은 사람의 형기 가운데 있는 기질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기질이 다르므로 기질에 내재한 본성 역시 다르다고 추론하였다.
이간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보면 만물이 동일하지만(一原)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偏全)의 차이가 생긴다(異體)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간이 일원이체(一原異體)의 입장에서 인물성을 이해하는 것과 달리 한원진은 이와 기질(氣質)이 교섭하는 세 가지 계층을 나누어 인물의 본성을 해석하였다.
이는 본래 하나이지만 형기를 초월한(超形氣) 태극의 층이 있고, 기질로부터 나오는(因氣質) 건순·오상의 층이 있고, 기질과 섞여 있는(雜氣質) 선악(善惡)의 성(性)에 해당하는 층이 있다고 하였다. 기질로부터 나오는 건순·오상의 층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의 성은 서로 다르고, 기질과 섞여 있는 층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 또는 동물과 동물의 특성이 다르다고 보았다.
이간과 한원진의 주장은 모두 이기론의 구도를 취하여 기질의 차이로써 존재의 차이를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통기국(理通氣局)의 구도에서 보면 이간은 이통(理通)의 측면에 일관되었고 한원진은 기국(氣局)의 측면에서 인물성의 다름을 논의하였다. 이들의 인물성론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자연계에까지 심화확대하였던 것이다. <백과사전의 내용들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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