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의 명시감상 96
----신현정의 [백경白鯨]에 대하여
고래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파이프에 갈매기를 꾹꾹 눌러 담아 피우는 그는
모자도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삼각 파도 모양의 넓은 모자였다
안경을 벗어 들더니 이 안경은 어떠냐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한쪽에는 구름이 다른 쪽에는 섬이 떠 있는 안경이었다
병 모가지를 쥐고 병째 한 입 쭈욱 들이켜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낙조落照처럼 독한 것이었다
작살도 맘에 들면 가지라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또 돛만 떼어갈 수 있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먼 바다도 불러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발치에 벗어놓은 검은 장화가 출렁거렸다
거기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얼 끄집어냈다
문어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신현정, [백경白鯨]({바보사막}, 창비 2008년) 전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욕망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노예는 언제, 어느 때나 주인의 명령에 복종을 하고, 그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오직 주인을 위한 삶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주인은 언제, 어느 때나 타인의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사물의 이름도 제멋대로 명명하고, 선악의 가치기준표도 제멋대로 명명한다. 주인에게 유익한 것은 선이 되고, 주인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악이 된다. 주인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선이 되고, 주인에게 나쁜 느낌을 주는 것은 악이 된다. 욕망은 주인이고, 인간은 그 욕망의 노예이다. 인간은 그의 일생내내 자기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욕망의 부림을 받게 된다. 욕망이 일을 하라고 하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욕망이 땅을 사라고 하면 땅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 욕망이 결혼을 하라고 하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욕망이 도둑질을 하라고 하면 이문열처럼, 표절의 대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욕망이 모든 원자재들을 매점매석하라고 하면 모든 원자재들을 매점매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욕망이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이종교배를 하라고 하면 인간의 윤리적 금기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욕망이 죄 많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검은 돈을 헌금하게 하라고 하면, 모든 사제들은 그 검은 돈의 헌금을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욕망이 더 많은 유전을 소유하고 싶어 하면 사담 후세인을 악마로 몰아 부치고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신은 죽었고 욕망은 신이 되었다. 전지전능한 욕망께서, ‘소유하라, 소유의 기쁨은 한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더 많은 축재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게 된다. 소유의 기쁨은 우리 주主 욕망의 기쁨이 되고, 우리 주主 욕망의 기쁨은 수많은 빈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의 기쁨이 된다. 욕망은 권력의 욕망이며, 권력의 욕망은 지배의 욕망이다. 지배의 욕망은 소유의 욕망이며, 소유의 욕망은 명예의 욕망이다. 명예의 욕망은 신의 욕망이며, 신의 욕망은 이 세계 전체를, 아니, 이 우주 전체를 소유하려는 욕망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욕망의 충신忠臣들이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형무소를 가고, 국회의원과 장, 차관이 되고, 또한, 대통령이 되고, 새로운 전쟁터와 우주개척의 대탐험을 떠나가게 된다. 사랑도 필요 없고, 이웃도 필요 없다. 부모형제도 필요 없고, 친구와 애인도 필요 없다. 욕망은 천의 얼굴을 가진 신이며, 그 신의 전지전능함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희, 비극을 연출해내기도 한다. 욕망이 울으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울고, 욕망이 웃으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웃는다. 욕망이 죽으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욕망이 낳으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 삼복 더위 속에서도 성교를 하게 된다.
인간의 철학은 주체의 철학이며, 이 주체의 철학은 타자의 주체성마저도 동일자의 논리로 재단해버린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임마뉴엘 레비나스의 이 진단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내가 아니고, 너도 네가 아니다. 너도 욕망의 노예이고, 나도 욕망의 노예이다. 주체가 없는 인간에게 주체라는 허상의 실체를 부여하고 그 야만적인 죄의 댓가를 물은 것은 진짜 범인을 잡지 못하고, 그 억울한 희생자만을 양산해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임마뉴엘 레비나스와 모든 윤리학자들 앞에서는 욕망이 죄인이지, 우리 인간들은 죄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도덕철학과 사법제도 위에 군림하고 있고, 어떠한 욕망도 그 무소불위의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오직 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처럼 도덕철학과 준엄한 사법제도의 철옹성 속에서도 오히려, 거꾸로, 더욱 더 증가하는 범죄인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욕망은 타인의 사유, 타인의 사상, 타인의 자유, 타인의 재산, 타인의 사랑, 타인의 행복 따위는 늘, 항상, 짓밟아버리고, 오직 동일자의 논리(욕망의 논리)로 재단해버리는 특권----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것이 그 특징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욕망과 인간의 싸움은 주인과 노예의 싸움이고, 그 주인과 노예의 싸움은 그 싸움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다. 욕망이 백전백승을 하고, 인간은 백전백패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그 욕망의 논리는 타자들, 사물들을 인정하지 않는 유아론적인 사고방식이며, 그 유아론적인 사고방식은 마치,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특권의식을 낳게 된다.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진시왕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삼성그룹의 이건회 회장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그러나 항상 역전이 가능한 지점이 있는 데,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욕망의 노예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으면 홀로 설 수 없는 어릿광대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그 정신분열증과 과대망상증에 의해서 공동체 사회는 와해되고, 무소유의 기쁨도 사라져가 버리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일까? 진정으로 모두가 다같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삶은 없는 것일까? 과거는 다만, 컴컴한 어둠 뿐이고, 현실은 괴롭고, 더 더군다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단 하나, 우리 인간들이 그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백전백패의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욕망과의 전면적인 싸움을 벌여보는 것 뿐이다. 모든 욕망의 기획과 전략들에 맞서서,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도 나의 것이 아니고, 수많은 저택들과 땅 한 평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또한, 너의 것도 아니고, 수많은 당신들의 것도 아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즉, 빈손으로 왔다고 빈손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잠시 쉬었다가 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채우고 쌓는 일보다는 버리고, 또, 버릴 줄 아는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 기독교, 자이나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인들이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무소유의 기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신현정 시인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립對立},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바보사막} 등이 있고, ‘서라벌문학상’과 ‘한국시협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신현정 시인은 내가 기획하고 출간했던 {자전거 도둑}을 통해서 일약 제일급의 시인으로 우뚝 선 시인이지만, 그의 {바보사막}은 {자전거 도둑}과 동일선상에서, 아니, 그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유희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유희란 놀이이며, 그 놀이는 목적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놀이의 세계는 축제이며, 바로 그 놀이의 장소에서는 남녀노소는 물론, 어떠한 계급차별이나 인간차별도 없게 된다. 너도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된다. 수많은 당신들은 우리들이 되고, 우리들은 수많은 당신들이 된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도 없고, 소유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다툼, 싸움, 분쟁의 여지가 없게 된다. 유희의 세계는 순수함의 세계이며, 자기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들이대면 그 유희의 세계는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너도, 나도, 수많은 당신들도 자기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 유희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유희가 유희로서 살아 있으려면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할 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호모 루덴스}의 저자인 호이징가나 {놀이와 인간}의 저자인 로제 카이와는 이 ‘놀이문화의 생산성’으로, 사회적인 법률, 제도, 예술, 종교마저도 설명한 바가 있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는 유희는 놀이문화의 생산성이 아니라, ‘예술의 장’, 또는 ‘축제의 장’으로서의 그 유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목적의 목적성,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무소유의 기쁨, 바로 이러한 것들이 신현정 시인의 {바보사막}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현정 시인의 시들 중의 시, 바로 그의 걸작품인 [백경白鯨]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허먼 멜빌은 미국의 소설가이며, 1851년에 그의 대표작인 {백경白鯨}을 출간한 바가 있다. 오늘날 {백경白鯨}은 장중하고 울림이 큰 해양소설이자 대서사시적인 걸작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러나 허먼 멜빌이 그 소설을 발표하였을 때는 그 이질적인 서술형태와 그 구조들 때문에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장----허만 멜빌의 사후 30년 만에 그 빛을 보게 되었다----되었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백경白鯨}은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게 한쪽의 다리를 잃어버린 에이헤브 선장의 복수담이며, 에이헤브 선장은 그 원한 맺힌 복수감정으로 그의 포경선을 이끌고 대서양을 떠나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그 거대한 흰 고래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그 거대한 흰 고래를 발견하게 되고, 장장 사흘 동안이나 밤과 낮으로 사투를 벌였지만, 그 거대한 흰 고래는 끝끝내 에이헤브 선장과 그 포경선마저도 침몰시켜버리고 만다. 백경이란 무엇이며, 에이헤브 선장은 왜, 그처럼 무모하고 불가능한 싸움을 벌여야만 되었던 것일까? 백경은 상상 속의 흰 고래이며,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래이다. 따라서 백경은 어떠한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힘의 상징이 되고, 포경선의 선장인 에이헤브는 그 사악한 힘과의 백전백패의 혈투를 벌이는 고귀하고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신현정 시인은 미국인들의 청교도적인 모험정신과 그 영웅담을 미화하기 위하여 이 {백경白鯨}을 썼단 말인가? 아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신현정 시인은 에이헤브 선장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그 ‘백경’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백경은 신비적이고 비의적인 존재가 되고, 에이헤브 선장은 온갖 욕망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가 된다. 백경은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에이헤브 선장은 미제국주의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반자연적인 존재가 된다.
신현정 시인의 유희의 세계는 순수함의 세계이고, 바로 그 순수함에 의해서 모든 가치관들을 전복시키는 방법적인 부정정신이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부정정신은 순수함의 세계, 또는 유희의 세계를 긍정하기 위한 부정정신이지, 부정을 하기 위한 부정정신이 아니다. 유희의 세계는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노동의 세계는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마저도 돈의 가치로 환산해버리고, 더 이상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유희의 세계는 무소유의 기쁨이 자라나는 세계이고, 노동의 세계는 소유의 기쁨(슬픔)이 자라나는 세계이다. 우선 신현정 시인은 “고래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파이프에 갈매기를 꾹꾹 눌러 담아 피우는 그는/ 모자도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삼각 파도 모양의 넓은 모자였다”라고 말하고, “안경을 벗어 들더니 이 안경은 어떠냐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한쪽에는 구름이 다른 쪽에는 섬이 떠 있는 안경이었다/ 병 모가지를 쥐고 병째 한 입 쭈욱 들이켜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낙조落照처럼 독한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또한, “작살도 맘에 들면 가지라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또 돛만 떼어갈 수 있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먼 바다도 불러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발치에 벗어놓은 검은 장화가 출렁거렸다/ 거기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얼 끄집어냈다/ 문어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라고 말한다.
왜, 그는 고래 중의 고래를 거절하고, 왜, 그는 모자 중의 모자를 거절하게 되었던 것일까? 왜, 또한, 그는 안경 중의 안경과 술 중의 술과 작살 중의 작살을 거절하고, 왜, 또한, 그는 돛 중의 돛과 바다 중의 바다인 먼 바다와 문어 중의 문어인 문어를 거절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것들이 욕망의 산물들이고, 바로 그 욕망의 산물들에 의해서 모든 다툼, 싸움,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래에 의해서 포경업이라는 싸움터가 형성되고, 모자에 의해서 가장 멋진 아름다움과 사회적인 지위가 형성된다. 안경에 의해서 시력의 교정과 눈의 보호라는 그 본래적인 기능과는 달리, 이 세상을 제멋대로 재단해버리는 사시와 편견이 생겨나고, 낙조처럼 독한 술에 의해서 모든 범죄가 생겨나고, 돛과 바다에 의해서 이 자연과 우주마저도 소유하려는 욕망이 생겨난다. 인간의 검은 장화는 그가 걸어가는 욕망의 어두운 이면을 가리키고, 검은 장화 속의 문어는 그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려는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상정하게 된다. 욕망은 악 중의 악이며, 그 욕망을 통제하려는 어떠한 노력마저도 모두가 다같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만다.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규제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도 미국의 산업구조와 미국인들의 생활양식, 그리고, 신흥공업국가들의 산업양식의 장벽에 부딪친 채, 엘리뇨와 라니냐는 물론, 온갖 이상기온 현상들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점점 더 속수무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다국적 자본가들은 그 무소불위의 힘을 간직한 채,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그 어떠한 정책도 단 번에 무력화시켜버리게 된다. 자본과 상품이 실시간대로 움직이며, 더욱 더 많은 이익을 낳고 있고, 이 더욱 더 많은 이익을 위하여 지구촌의 허파인 아마존의 밀림과 세계의 지붕인 히말리야의 자연까지도 파헤쳐지고 있는 것이다. 돈 많은 부자는 천사가 되고, 돈 없는 빈자는 악마가 된다. 돈 많은 부자는 일년에 수백 억씩 벌어들이지만, 돈 없는 빈자는 단 돈 1달러가 없어서 굶어 죽어가게 된다. 자본의 재앙은 도덕의 재앙을 부르고, 도덕의 재앙은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 속에 생태환경의 재앙을 낳는다. 자본은 너무나도 사악하고 교활하다. 자본은 욕망이며, 욕망은 자본이다. 욕망은 모든 인간들에게서 그 자유로운 삶을 박탈하고, 오직 그 욕망에게 봉사하는 노예로서 살아갈 것을 명령하게 된다. 욕망은 소유의 기쁨을 강조하고, 시인은 무소유의 기쁨을 강조한다.
유희의 세계는 순수함의 세계이고, 노동의 세계는 불순함의 세계이다. 순수함의 세계에서는 도덕이 자라나고, 불순함의 세계에서는 부도덕이 자라난다. 이때의 도덕은 문화인들의 도덕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도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희의 세계 속에서 자라나는 도덕, 그 때 묻지 않은 도덕 속에서 모든 비판정신이 생겨나고, 그 결과, 신현정 시인의 방법적인 부정정신이 생겨난다. 신현정 시인의 부정정신은 그의 장인정신의 소산이며, 어떠한 욕망과의 싸움에도 결코 그 꼬리를 내리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부정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고래 중의 고래를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삼각파도 모양의 넓은 모자를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쪽에는 구름이 다른 쪽에는 섬이 떠 있는 안경”을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낙조처럼 독한” 술을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명예와 명성 앞에서는 어떠한 비굴한 굴종도 거절할 수가 있지만, 눈 앞의 사소한 욕망을 위해서는 어떠한 비굴한 굴종마저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예와 명성은 쓰디 쓴 인고의 성채에 지나지 않지만, 때때로 비굴한 굴종은 마치, 솜사탕처럼, 너무나도 달콤하고, 또, 달콤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며, 어린 아이와도 같이 때 묻지 않은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현정 시인의 장인정신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더라도 그 유희의 세계를 지켜나가겠다는 긍정정신의 소산이며, 그 거대한 흰 고래는 그의 긍정정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모든 것을 다 잡을 수 있는 작살을 거절한다는 것, 머나 먼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돛을 거절한다는 것, 한 번 손아귀에 움켜쥐면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문어의 빨판을 거절한다는 것은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세계, 즉, 유희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어린 아이는 백경이 되고, 백경은 어린 아이가 된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시인은 어린 아이와도 같지만, 그러나 그 어린 아이의 부정정신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거대한 흰 고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어린 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시인은 거대한 고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도 무소유의 기쁨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고, 거대한 고래도 무소유의 기쁨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현정 시인의 시적 기법은 내가 내 식으로 불러본다면 ‘유희적인 기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기법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의 기법이며,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기법이다. 그는 그의 소망, 꿈,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 이전에, 우선 그 대상들과 함께 논다. 어린 아이와도 같은 문체, 동심이 묻어나는 때 묻지 않은 문체, 아무런 수사적 기교도 없이 그 대상들과 이야기 하며, 그 깊이 있는 주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문체, 모든 시행마다 한 행의 공간을 띄우고, 매우 이질적인 낯선 기법의 문체와 구조 등이 그의 개성과 독창성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신현정 시인의 유희의 세계는 백전백패의 운명 속에서도 그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하고 있는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조렇게 예쁜 엉덩이를 가진 것들을 보면
그 엉덩이에다
목숨 수壽자를 새겨주고 싶어진다
----신현정, [복숭아]({바보사막}) 전문
나는 신현정 시인의 [백경白鯨]에다가 ‘영원불멸의 명시’라는 이름을 새겨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