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국의 남도의 산 이야기] 8. 파랑새를 찾아서
광주전남 초창기 인공암벽 시설과 인물들
전남 여수에는 특별한 치과의사 한 분이 계신다. 친분도 친분이지만 환자를 대하는 따뜻함에 반해 집과 거진 2시간 걸리는 꽤 먼 길이지만 치과는 꼭 그곳으로 간다. 치료를 위해 의사 선생님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1940년 가스통 레뷰파(Gaston Rebuffat)가 교육 훈련용으로 각목과 널판지를 이용한데서 유래한 인공암벽은 1988년 서울 서초동에 세워진 수직벽 ‘살레와 월(높이 4m*폭 5m)’이 한국 최초이다. 실내암장은 1989년 마산의 ‘악돌이(이근택)’가 처음이고 자연암벽에서 이뤄지던 암벽등반 대회가 인공암벽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부터다.
광주전남 최초의 인공암장 외벽은 1990년 전남의대산악회 이창진 등이 광주 학동의 전남대 의과대학 빈터에 세웠던 ‘파랑새’ 암장이다. 비슷한 시기 순천대(1989년), 여수 향암산악회(1992년), 목포대(1994년), 조선이공대(1994), 전남대(1996년?) 등 건물 한쪽 벽을 이용해 붙인 인공 외벽들이 여러 곳 있었으나 파랑새 암장은 약 5m(높이)×4m, 2m(폭, 2면)의 기역자로 꺾어진 미니 외벽(직벽)으로 무브(동작)를 연습할 수 있는 당시에는 꽤 획기적인 독립 인공암벽이었다.
내가 복학해 한창 운동하던 1992년, 본과 4학년으로 산에 갈 시간이 없어 수업 중 쉬는 시간마다 나와서 운동을 하던 이완선이라는 의대생이 있었다. 파랑새 암장에서 운동했던 사람들 중 최고의 실력자였는데 쉬는 시간 잠깐 나와서 문제 풀이 한번 보여주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신비의 인물이었다. 지금 내 입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의사 선생님이 바로 그때 그 사람이다.
내친김에 본인이 아는 한도 내에서 스포츠클라이밍의 초창기 인물들과 시설 족보를 좀 더듬어 보면, 광주전남 최초의 실내 인공암장은 1995년 순천시 저전동 지하 1층에 김태호가 설치한 ‘하늘벽(약 20평)’ 암장으로 최초의 상업적 회원제 암장이기도 하다. 전국의 스포츠클라이밍을 서울과 마산 세가 양분할 때 직장 관계로 10여 년을 창원에서 생활하며 마산 ‘악돌이’에서 운동을 했는데 그 시절 순천으로 돌아와 암장을 세운 김태호는 전남에서는 스포츠클라이밍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해 1995년 동강대학교산악회 주도로 학교 건물 내에 설치한 ‘동신암장(약 10평)’이 있다. 광주대(1994년)를 비롯해 주로 대학 산악부 동아리방 내에 견본 암벽처럼 만들었던 이전의 것들에 비해 동신암장은 전문성이나 개방성 면에서 보다 진일보한 실내암장이었다. 허민삼, 송수영, 박만열, 김정식, 서권한, 윤현승, 황평주 외 나중에 합류한 조계주, 이윤재 등 이곳을 중심으로 운동하던 사람들이 ‘광주클라이밍연합회’라는 모임을 결성해 무등산 선비바위 개척 등 활발한 등반 활동을 펼쳤다. 당시는 무등산 새인봉을 비롯해 영암 월출산, 순천 용서암장 등 모든 자연 암장에서 하드프리 등반이 활기를 띠던 시절이었다.
전남 서부권의 중심도시 목포에서는 나상근 외 동호인 여럿이 힘을 합쳐 1999년 해안동 여객선터미널 부근 3층 건물에 만든 실내암장이 처음이다. 이후 세무서 옆 구 무안동사무소 4층으로 옮겨갔다. 목포 최초의 유료 실내암장은 2006년 목포교육지원청 뒤편 정현진의 ‘아이언팜스’이다.
광주에서 최초의 유료 실내암장은 1998년 전봉호, 이윤재, 황평주 3명이 자금을 모아 무등경기장 옆에 개장한 ‘광주실내암벽’이다. 2000년부터 이윤재가 전봉호에게서 인수하며 황평주가 독립해 나갔다. 임동의 광주실내암벽은 2011년경 운암동 공구의 거리로 장소를 옮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광주실내암벽에 이어 2000년 양산동에 개장한 조계주의 ‘빛고을 실내암장’이 광주 제2호 유료 실내암장으로 지금은 광주 첨단지구로 옮겨 운영 중이다.
광주전남 최초의 국제대회 규격 인공암장 외벽은 2001년 광주광역시 서구에서 건설한 ‘상무인공암벽장(15m(높이)×15m(폭), 95~140°)’이다. 윤현승이 관리자로 채용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전남의 경우 2003년 2월 영암군산악회 전판성의 노력으로 영암군에서 월출산 입구인 개신리에 ‘영암암벽등반경기장(16m(높이)×50m(폭), 170평)’을 건설했다. 오옥현이 관리하다가 지금은 사정상 문을 닫고 있다. 목포시에서는 2012년 5월 ‘목포국제스포츠클라이밍센터(속도벽 3m×15.5m 2면, 난이도벽 5m×15.5m 4면, 실내 – 난이도벽 12m, 볼더링벽 6m 각각 3면)’를 세워 주충열이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다. 순천시는 2019년 8월 팔마체육관 안에 건립한 ‘팔마인공암벽장(속도벽 6m×15m 2면, 난이도벽 16m)’이 있다.
※ 연도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확인을 위해 몇 사람에게 전화로 물었으나 기억들이 불명확하다. 나중에 여러 자료를 검토해 살을 붙이자 라고 합의(?) 했다.
치과 치료가 끝나면 나는 기왕 여수까지 왔으니 그냥 돌아가기 섭섭한 마음에 고소동 벽화마을에 들러 커피 한잔을 꼭 마시고 온다. 저 멀리 돌산대교와 그 밑을 지나는 유람선, 하늘에 걸린 케이블카의 풍경은 참 한가롭고 예쁘다. 외가가 순천이라 바로 옆 동네 여수는 정서적으로 친근한 곳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소리 같겠지만 젊은 날 태백산맥 류의 이야기를 너무 읽은 탓일까? 한국의 대표 명산인 지리산을 오른 사람치고 그 유명한 빨치산을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이나 1948년 10월 여순사건의 진원지 여수하면 저절로 ‘빨치산’이 떠오른다. 좋든 싫든 뭐든지 반대편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산에 남으면 죽음뿐이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신념의 실천을 위해 끝까지 저항하는 그것을 나는 빨치산이라 쓰고 추상명사인 ‘이상향’, ‘신념’, ‘의지’로 읽는다.
어찌됐든 30년 전 더 큰 산을 꿈꾸며 파랑새 암장에서 놀았던 우리가 이렇게 배 나온 중년이 되어 서 있다.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알피니즘이라는 파랑새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알 수 없다. 내 어머니의 어린 시절 흑백사진 속 여수가 지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것처럼 미래의 등산도 예측을 초월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애쓰고 있는 일들이 다 부질없는 짓 같기도 하다.
아픈 시절에 사는 사람만 손해라는 생각에 시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역사라는 것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좌익이든 우익이든 75년 전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을 딛고 선 우리에게 그들의 삶은 모두 의미가 있다. 꿈을 가지고 자일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우리의 인생도 세월의 흐름에 덮여 어차피 묻혀버리고 말 것이지만 미래의 후손들에게 어깨를 내어줬다는 생각만으로 보람을 찾아야 할까.
우리가 살았던 산악인이라는 이름의 일반명사가 알피니즘이 사라져 버리는 미래가 되어 추상명사로 변해 버리는 슬픈 운명이 되지 않기를 역사에 빌어 본다.
갑자기 전인권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 세월이 그렇게 했다~ 나도 모르는 새~” 사람도 여수도.
스포츠로서 클라이밍의 미래는 당분간 맑음인 것 같은데 보존해야 할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어 버린 알피니즘은 계속 흐림이다.
## 전화참조: 이윤재, 박만열, 김태호, 신광철, 이완선, 송수영, 나상근, 최대중, 양홍식, 김영필, 이정현, 윤일환 / 황평주 – 기사 승인 이후 수정내용 통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