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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며 서방교회에는 가톨릭과 개신교[13], 동방교회에는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14],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로 나뉜다. 이중 동서방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를 칼케돈파[15]로 오리엔트 정교회 및 네스토리우스파를 비칼케돈파[16]로 칭한다. 이외 종파로 그리스도아델피안[17],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메시아주의 유대교, 유니테리언 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현재의 주류 정통 기독교에서 교리적으로 한참 떨어진 종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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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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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최대의 종파다. 남유럽과 동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을 기독교의 원류로 더 쳐준다. 다만 현대의 세속화로 인해, 아래 개신교를 설명하면서 서술한 "스칸디나비아 등 이들 지역 상당수에서는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 유교같이 문화나 관습, 연례행사 등으로만 자리잡혔을 뿐 사실상 주류 종교로서의 위력은 떨어지고 세속화된 명목상의 신자들이 대다수인 편이라서 제대로 된 개신교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다."라는 관점은 이들 국가에도 적용되기에 이들 국가에서 가톨릭이 주류라 보기엔 힘들다.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복전쟁에 힘입어 남아메리카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18]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남태평양, 필리핀에서도 교세가 강하다. 단일종파로만 따지면 심지어 미국에서도 최대 종파이다.다만 주류는 아니고 히스패닉 계열의 꾸준한 증가로 최대종파가 된 것. 미국의 주류는 W.A.S.P로서 백인, 앵글로 색슨, 그리고 개신교도들이다. 미국 역사상 가톨릭 대통령은 딱 두 명뿐이었으며, 미국 건국 초기에는 가톨릭을 배척하는 법이 존재했으나 그 후 폐기되었을 정도로 비주류였다. 현재도 미국 가톨릭의 상당수가 히스패닉계, 라틴계다. 주류 백인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기독교의 불모지 중동에는 동방 가톨릭, 곧 동방 예법 가톨릭 교회들이 있으며 가령 레바논 그리스도인의 과반을 차지하는 마론 교회도 동방 가톨릭의 일원이다.
러시아나 동유럽 상당수 국가들, 에티오피아(오리엔트 정교회)는 정교회 혹은 비칼케돈 교회(오리엔트 정교회) 국가였고, 공산정권의 몰락 후 신자수도 늘어나고 정치적 영향력도 회복하고 있는 추세다. 기독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동방 예법의 교회들이[19] 현지 기독교의 큰 축을 담당한다. 대부분 20세기의 사회주의권이었던 러시아 및 동유럽의 주요종파였던 역사 때문에 아무래도 정교회는 구 공산국가에 많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일단 대체적으로 사실이나, 예외적 사례로 그리스, 키프로스, 중동 정교회권같은 경우나, 해외로 망명한 반공 러시아인들의 정교회처럼 공산권 밖의 정교회도 어느정도 있었다.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은 북유럽과 영국,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정도고, 개신교가 늘어나는 지역은 남미[20] 정도가 있다.[21] 한국이나 미국이 최대의 개신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한국은 20%밖에 안 되며 미국에서도 40% 대로 절반에 약간 못미친다. 뉴질랜드나 북유럽 같은 지역은 개신교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사실상 스칸디나비아 등 이들 지역 상당수에서는 기독교 문화가 우리나라 유교같이 문화나 관습, 연례행사 등으로만 자리잡혔을 뿐 사실상 주류 종교로서의 위력은 떨어지고 세속화된 명목상의 신자들이 대다수인 편이라서 제대로 된 개신교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렇게 전통적인 개신교 지역에서는 교세확장이 시원찮아진 반면, 중남미에서는 주류 가톨릭보다 훨씬 빨리 늘어나고 있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신자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종교규제에도 불구하고 비밀교회 가정교회 방식의 포교로 개신교의 세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22]
그 외에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서는 20세기부터 서구 방식의 교파 구분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신학이나 관습을 중시하는 토착민 중심의 독립교회나 교단들이 많이 생겼고 수적으로도 매우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단, 이들 아프리카의 기독교 독립교단들이 지닌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기존의 아프리카인들이 가지던 조상신 신앙이나 정령숭배 등을 끊어버리지 않고 기독교와 융합해서 믿거나, 외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를 지나치게 신봉하는 등의 이단시비가 있는 종파들도 상당히 있다.[23] 그러나 아프리카의 이런 혼합주의 이단들이 아프리카 기독교의 거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과장이 심한 견해이다.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주류 개신교 교단 인구들이 토착 독립교단들보다 훨씬 더 많으며 이러한 주류 교단들은 공식적으로 혼합주의, 정령신앙, 주술사상 등을 반대하고, 제대로 된 기독교신앙을 지닌 아프리카인들도 대단히 많다. 또 상당수 신자들이 아프리카 토착 가치관에 여전히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넓게보면 이런 현상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24]의 기독교'만' 특이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 러시아 정교회의 초창기 정착과정이나 중남미 가톨릭의 초기 역사, 이슬람권의 '민속 이슬람' 현상 등 보편종교의 전파로 문화 변동이 일어났던 많은 토착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기독교 전파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고, 또 다른 세계종교들과 비교해도 전례없이 광범위하게 선교, 이주, 역사적 전파가 이루어졌던 특성때문에 일반인들이 흔히 "여기엔 기독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 의외로 기독교가 퍼져있는 경우도 많다. 과거 중세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권인 중국까지 일찌감치 진출한 적도 있으며 대표적으로 중앙아시아권인 카자흐스탄 같은 지역은 전 국민의 4분의 1이상이 기독교(정교회) 신자이고, 불교권인 미얀마 북부나 히말라야 인근의 인도 북동부[25], 그리고 남부[26] 등지에도 기독교 소수민족들과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태평양권의 많은 열대 도서국가들(유명한 필리핀을 제외하고도, 가까이는 티모르, 파푸아 지역 등부터 투발루나 피지, 키리바시, 괌, 사이판, 통가, 타히티, 사모아 등)에도 원주민 기독교 신자들이 대단히 많다.
다만 현대에는 예전에 비해 기독교 신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으며(유럽,아시아) 유럽의 난민 증가와 무슬림과의 통혼, 저출산과 아시아의 박해중 순교와 동화, 피난중 배교, 낮은 출산율로 인해 빠르게 줄고 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지배되던 기원전 3-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왕의 폭정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하스몬 가문에 의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카베오 혁명 동안 '의인의 부활'이라는 개념도 유대교 일부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반란에서 승리한 하스몬 왕조는 유대인들의 특권과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지만,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는 권력 투쟁에 빠져있던 하스몬 왕조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탈취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하의 유대교는 랍비 사회가 되어 다양한 종파(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심당, 쿰란 공동체 등)로 분열되었고, 다양한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나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소동도 피웠으나 큰 영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세례자 요한은 곧 하느님이 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외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가속시키기 위해 세례를 통한 회개 운동을 일으켰으나 사형되었다.
다니엘 7:9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다니엘 7:13에서 언급되는 '인자[29] 같은 이'[30]는 에녹서에서 선재하며 하느님 옆에 계신 인간의 모습을 한 메시아 인자로, 그리고 에스라 4서에서 사람의 형상과 같은 이로 언급되는 것을 통해 저 두 가지 명칭이 메시아 교의로 소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같은 인자는 태초부터 있었고, 하늘로부터 임재하며, 하느님 옆에서 최후에 심판을 할 메시아로 그려지게 되었다. 메시아-인자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원후 1세기 전반에 유행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아우구스트 라이첸슈타인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 종파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할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메시아-인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또한 당대의 예언도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원래 고발자를 의미하는 일반명사 '사탄'은 스가랴 3과 욥 1-2에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천사로 등장했다. 역대상 21-22:1에서 사탄은 고유명사로 변화된 흔적이 생기지만, 여기서도 하느님의 천사로서 그려진다. 사탄이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로 표현되는 시작한 것은 영지주의의 잔재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키루스 칙령에 의해 풀려난 BC 6-4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영생관과 내세관이다.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셰올(שְׁאוֹל)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디테일한 배경이 아닌, 망자들이[31] 기거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즉 셰올은 죽음을 정의하는 공간적 개념의 영역이었지, 기독교 특유의 사후세계관은 아직 없었다. 당대의 내세관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구약의 천국은 이사야서[32]에서 말하는 낙원 외에는 비중있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으로 인해 의인의 부활 개념이 들어온 후, 자연스럽게 죽음과 부활 사이의 공백과 악인의 최후에 대한 의문이 자라났다.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33] 그의 영이 하데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며 스올은 하데스의 다른 이름으로 재해석되었다.[34] 죽은 영들은 지하에 갇힌다는 개념으로부터, 선한 영과 달리 악한 영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악마들이 지하에서 형벌을 받는 것에서 악마들이 지하를 지키는 것으로 변경되고, 이는 곧 메시아가 지하에 갇힌 영들을 해방시켜주어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여러 교의들의 형성이 초기 기독교의 탄생과 맞물리며 독특하고 창의적인 기독교 고유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1세기 유대인 남성인 예수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네 명의 형제들과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다.[37] 그가 태어난 나자렛은 별볼일 없는 마을로, 유대 지방에 속하면서도 이방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의 가정은 가난하고 소외된 집안이었으며, 그는 장인이 되었는데 이는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기도 했다. 예수의 성장 환경은 복음서상에 매우 단편적으로만 묘사되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텍스트상으로는 단지 유아 시절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으며(루가 2,21), 성장하면서 지혜도 자랐다(루가 2,40)는 식의 기본적인 정보를 전할 뿐이다.[38]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기점으로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을 서술하는데, 예수 역시도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지, 혹은 제자는 아니지만 세례자 운동을 수용하고 그와 관계를 맺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9] 아무튼 확실한 건,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예수 역시도 진심어린 공감을 보였으며, 예수 역시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요한 3,22) 다만 애초에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가 어떠했든 간에, 세례자 요한과는 구분되는 독립된 활동으로서 예수 운동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메시지는 자주 단순화되지만, 이는 근대 시민윤리적 운동이나 심리치료로 환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며,[40] 반(反)율법주의나 종교적 개인주의, 윤리적 이완주의는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물론 1세기 기독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고, 반율법주의자들도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오히려 유다인 사회에 예수의 메시지가 준 충격은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다. 간단히 산상설교를 예시로 들어보자:
여기서는 윤리적 이완주의도, 반율법주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보다 더 의로워지라고 요청하며, 결코 율법을 '더 널널하게'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43] 그리고 이런식으로 율법에 주석을 다는 것은 당대 율법학자들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준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말을 하는 방식에 있다. 위 발췌문에서, 예수는 마치 자신이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인 것처럼 말을 하였다. "X라고 이르러진 말씀을[44]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Y라고 말한다."라는 화법에서는 유다인 청중 누구나 예수가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즉 예수가 준 충격의 관건은 율법에 해석을 달았다던지[45] 율법을 이완시켰다던지[46] 하는 게 아니다. 시나이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의 여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최고의회 의원들은 바로 이것을 정확히 간파했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현대 유대교의 석학이자 랍비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도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한다. 뉴스너는 기독교에 매우 신사적인 랍비인데, 기독교 신앙에 존경을 표하면서도 자신이 유다교 신자로 남은 이유를 저서 "A Rabbi Talks with Jesus: An Intermillennial, Interfaith Exchange"에서 다음과 표현했다. 이 저서에서, 뉴스너는 자신이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AD 1세기로 되돌아가 예수와 직접 이야기도 해보고 따라도 가봤다고 가정한다. 그는 예수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다가 다른 유다인 동포와 함께 기도하고 토라 공부를 하기 위해 조그마한 어떤 도시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 도시의 어떤 랍비와 함께 예수에 관한 토론을 한다:
즉 예수는 구약의 믿음에서 그 무엇도 빼지 않았다. 유다인 사회에 예수가 준 충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며, 토라를 하느님의 위치에서 해석하는 예수의 권한이야말로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비슷하게, 예수의 성전 정화를 보자. 오늘날 이 사건은 "예수가 부패 성직자와 장사꾼들을 보고 분노한 사건" 정도로 단순화되지만[47] 핵심이 되던 쟁점은 '예수의 권한'이었다. 공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사아적 암시를 이미 하였다.[48] 그런데 바로 이 맥락에서[49] 예수는 마치 예루살렘의 왕권을 주장하듯이(!) 성전으로 향한다.
물론 예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오해를 낳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성과 성전에 대한 어떤 왕권을(그러나 정치적 왕권이라 할 수 없는 종말론적 왕권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째서 예수가 정치범에게나 선고되는 십자가형을 당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로마 공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신전 모독자'이자[51] 동시에 '도성 신전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하는 왕 사칭자'로 비추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