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동
가운뎃마을과 아랫마을의 첫글자를 따서 한자로 옮긴 것이 중하리 였는데 음이 변하여 중화리로 바뀌면서 동명이 제정되었다.
중화동은 조선 후기 때 경기도 양주군 남면 길완리 였는데 갑오개혁 때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 하리, 최촌 드응로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 양주군 구리면 중하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화동으로 개칭되면서 망우출장소 관할지역으로 되었다. 1988년 1월 1일 중랑구의 신설로 중랑구 중화동이 되었다.
중화동의 면적은 1,480,920m2로 중랑구 총면적의 8.2%에 해당되며 1993년 현재 거주인구는 66,392명으로 중랑구 전체인구의 44%이다. 비교적 인구밀도가 낮은 중화동은 동의 서쪽이 중랑천으로, 동북쪽은 봉화산 산기슭이 차지한다. 중화제1동이 기존부락 위에 형성된 마을인데 비해서 중화제2,3동은 비교적 나중에 생긴 마을이다. 따라서 취락지구가 도시계획에 의해 마련되었기 때문에 지번과 지적이 정리되어 있고 가로계획도 잘되어 있는 편이다.
중화동을 구성하고 있는 마을은 간데골 혹은 중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중리의 일부는 상봉동에 속하고 서쪽 일부가 중화동이 되는데 상리와 하리 사이에 끼어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서씨가 집단 거주하고 있으므로 서촌이라고도 부르는데 서녘 서를 써서 서촌이라고도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상봉동의 황촌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도 되는데 봉화산 기슭에 해당된다.
원래 가운데 중으로 사용하는 글자는 안쪽 구석진 쪽이란느 의미도 포함되는데 봉화산 자락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구석진 곳에 해당되므로 구석말이란느 또다른 이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중리, 간데말, 서촌, 서촌, 구석말을 모두 각각의ㅏ 동네로 혼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중화동의 또다른 부락은 하리인데 아랫말 혹은 구동네라고도 하고 최촌말이라고도 한다. 순조 때 해주 최씨들이 이곳에 들어와 자리잡으면서 최촌이라는 마을이 생겼다. 최씨들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까닭은 순조가 보위에 오른 다음 해인 1801년 정조 때부터 집권해오던 시파에게 보복하기 위해 사교금압이라는 명분으로 천주교신자 200여명을 학살하였는데 천주교신자가 많던 시파가 모두 숙청당하면서 부터이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이때부터 계속 진행되었는데 이런 탄압을 피해 시파 중 해주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솔을 이끌고 천주교 탄압을 피해 도망가서 정착한 곳이 양주 땅 봉화산 아래였다. 천주교의 탄압이 있을 때마다 교인들이 숨거나 피신했는데 양주 봉화산 아래 교인중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모여 살면서 일체 외부와 연락을 끊고 밭을 일구고 돼지르 치며 산다는 소문이 퍼지자 관아에서 포졸을 파견, 봉화산 일대를 수색토록 했으나 그들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책도 완화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 봉화산의 해주최씨들이 외부와 교류도 하였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에 최씨들이 모여산다 하여 최촌 혹은 최촌말, 최말로 불렀다. 동네가 커지고 외부사람들이 점차 많이 이주해오자 새로운 동네가 곁에 생겼고 이에 하리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동네, 옛동네라는 뜻으로 구동네, 구촌으로도 불렀다.
한자 훈이 변해 구촌 이 되었을 무렵의 하리에는 크고 작은 부락이 아홉개나 되어 옛동네라는 뜻인지 아홉부락이란느 뜻인지 서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까지 중화동 사람들의 주업은 배추농사와 미나리 재배였다. 중랑천변에 위치하므로 동일로 서쪽의 지형이 낮아서 자주 침수되기 때문에 미나리 재배에 적격이었다. 이곳의 미나리는 연하고 부드러운데다가 거머리가 없어서 매우 인기가 높았는데 대개 아침 일찍 미나리를 베어서 청량리시장까지 갖고 가면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중화동 미나리를 사려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중화동 303-10번지에 있는 성덕사는 1957년 대지 800평 위에 신설된 사찰이다. 이곳은 터가 세서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던 곳이었다. 구한말 봉화산 자락에 살고 있던 노부부가 겨울이 되자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갔는데 산중턱에 아이 키만큼 자란 나무가 빽빽하게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노인은 '저 나무 정도면 겨우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다 팔면 할멈이 원하는 남바우도 사다줄 수 있겠구나'며 부지런히 도끼질을 하였다. 노인이 찍어놓은 나무가 산비탈에 가지런히 쌓여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찍어놓고 다음 나무를 찍을 때 쯤이면 먼저 나무는 원래 자리에 그대로 서있곤 해서 해질녘까지 했는데도 사실상 땔나무는 한그루도 만들지 못한 셈이었다. '이제 마지막 나무를 찍는구나! 할멈이 기다릴텐데 빨리 끝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노인이 허리를 한번 펴고 힘껏 도끼질을 하였다. 드디어 마지막 나무가 '쿵'하고 쓰러지자 노인은 자기가 지금껏 해놓은 나무를 보기 위해 뒤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 많던 나무중 한그루도 누워있는 나무가 없이 원래대로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를 보자 노인은 혼비백산하여 '이것은 귀신붙은 자리임에 틀림없어. 이렇게 좋은 나무가 많이 있는데도 아직 아무도 해가지 않은 것은 귀신붙었기 때문이야., 나도 귀신에 홀린 것이 아닌지 몰라. 이러다 혹시 죽으면 어떻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식으로 정신없이 산을 내려 왔다. 온통 땀으로 젖은 몸에 상투까지 풀어헤친 노인이 마을에 도착하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노인은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곳의 나무에 귀신이 서려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던 마을 사람 몇명도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신이 당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때 탁발시주를 위해 마을에 들렀던 승려 한사람이 '그곳은 많은 사람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호열자가 나돌때 채 죽지않은 아이들까지도 한꺼번에 내다버려 공동묘지가 되었던 곳이니 치성을 드림으로써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어린 아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하는데 만일 이를 이행치 않으면 매년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승려의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그중 아이가 넷이나 있는 과부 한 사람이 '스님,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치성을 드려야 하느지요?' 라고 반문하였고, 이에 승려는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만든 인형에 아이옷을 입히고 등뒤에 아무개네집 누구, 나이 몇세, 남녀의 구별 및 신체적 특성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가 들었을 때는 절대 팥죽을 쑤어먹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과부는 액막이 댓가로 승려에게 쌀을 듬뿍 시주하였다. 승려가 떠나자 과분느 그가 시킨대로 매년 동구 밖 나무에 인형을 매달아서 화를 면했다. 같은 마을에 김씨성을 가진 고집스럽고 욕심장이인 부자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마을사람들에게 미신이고 헛된 짓이니 그말을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몇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여전히 과부는 아이 인형을 짚으로 만들어 나무에 달았다. 애동지가 들던 어느해, 마을사람들은 승려가 했던 이야기도 잊혀질 무렵이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동지팥죽을 쑤어 나누어 먹었으나 그 과부만큼은 쑤지도 않았고 이웃집에서 갖다주는 팥죽도 먹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하여 사방에서 각종 병충해가 봄부터 활개를 쳐서 여름엔 호여라, 장질부사와 같은 질병이 크게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특히 연약한 아이들의 생명은 더많이 빼앗겼따. 과부의 아이들은 건강하게 끄덕없이 여름철 질병도 물리쳤는데 마을사람들 모두의 기억 속에는 승려가 시켰던 금기사항도 사라지고 없었다. 과부의 아이들도 커서 출가를 하고 다시 아일르 낳게 되어도 여전히 과분느 손자들의 인형을 나무에 매달았고 애동지가 돌아오면 팥죽을 쑤지도 않을 뿐더러 먹지도 않았다. 과부의 나이가 칠십이 넘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머리 맡에 자식들과 손자, 증손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승려의 이야기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으므로 아이들이 탈없이 컸다는 것을 얘기하였다.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반드시 그렇게 지켜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과분느 죽었는데 그녀의 자손들 중에서는 짚인형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그녀의 유언을 무시해버린사람도 있어 그렇게 철저하게 지켜나가진 못했다.
광복이 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이곳에도 집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공사도중 서까래가 무너지거나 기둥이 내려앉아 공사를 하던 인부가 다치는 일이 많아 쉽게 집을 짓지 못하였다. 1957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성덕사라는 절을 지을 때에도 건축목재를 실어 나르던 황소가 죽었고 인부 여러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절이 건립된 다음부터는 마을에 액이 떠다니는 경우도 없었고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으니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드려주기 때문이라고 마을 토박이들은 말하고 있다.
중화동 92-1번지의 경동제일교회는 1904년에 설립되어 이 지역에서 1세기를 지켜오고 있다. 감리교선교사 하운셀(G.G.Hounsell)과 최성열이 공동으로 창립하여 봉화현교회로 출발하여 경동제일교회로 개명이 되었는데 중화동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곳이다.
한편 중화동 207-11번지 면적 46m2에 세웢니 한일철공소는 1963년 대장간으로 출발하여 1973년에 시대적 추세에 따라 철공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통적인 화로를 그대로 사용하여 쟁기, 괭이, 칼, 도끼날과 같은 농기구를 제작 판매하는데 잊혀져가고 있는 풍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손꼽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