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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존스턴 신비신학 사랑학 l 제1부 l 그리스도교 전통 03 이성 대 신비주의 03-01 조직화를 향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이나 바오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교리를 가르치려 하진 않았던 것이다. 박해자들에 대한 변론, 이단의 주장에 대한 변론 체계화 : 니케아, 에페소, 칼체돈 공의회 → 열광적인 지적 활동의 시기 → 스콜라 스콜라 신학의 발달 → 철학자와 신비신학자 충돌 |
0:43
윌리엄 존스턴 신부님의 신비 신학 오늘은 세 번째 장
이성 대 신비주의라고 하는 파트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직화를 향하여"라고 첫 번째로 이렇게 나오는데요
그리스도교가 그 첫 시작에서 조직적인 것이 아니었다가
점점 체계적으로 그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이나 바오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교리를 가르치려 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면서
그곳에 초대를 하시죠.
그리고
당신 스스로 사랑에 몸을 바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라고 하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죠.
이 복음 기쁜 소식을 사람들한테 전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이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무슨 체계적인 가르침을 처음에 전했던 것도 아니고
또 이후에 바오로를 포함한 다른 사도들 역시
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신지 체계적으로 알리거나
또 교리를 체계적으로 구성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바로
박해의 시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 박해의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리스도 신자들은 우리 스스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란 어떤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살을 붙어서 설명이 되기 시작을 하죠.
그리고 또 그 이후에 박해의 시기가 끝난 다음에는
다른 이민족들이 로마로 많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민족들의 여러 다양한 주장들 또
그거에 영향을 받은 여러 이단들이 등장을 하게 되죠.
하느님이 참 인간이었냐?,
하느님이 정말 참 하나님이었냐?
인성이 얼마만큼 있고 신성이 얼마만큼 있었고
성모님은 어떤 분이었냐? 뭐 이런 식으로
또 삼위일체는 어떻다라고 하는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이고
어떤 것은 교회에서 배척하는 이야기이다라고 하는
이런 것들을 이제 다듬기 시작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 나아 가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교리라고 하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을 하고
법이라고 하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을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점점 시간이 흐름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도
그리스도의 교리도, 그리스도교의 영성도
조금씩 조금씩 살을 붙이면서 체계와, 조직화되기 시작을 했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체계화의 대표적인 과정을 거친 것이 바로 공의회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세기 이후에 4세기 이후에
니케아 공의회, 에페소 공의회, 칼체돈 공의회 같은
이런 중요한 공의회들에서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주 체계적으로 설명이 되기 시작을 하죠.
그리고
이런 것은 대부분 이성의 활동에 의해서, 지적 활동에 의해서
이런 주장들이 공의회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 서방 그리스도교
(동방과 서방이 좀 많이 다르기는 한데)
서방 그리스도교는 그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지성 활동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왜냐면
박해자들이 있었고 이단들이 계속 생기고 그러니까
그거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어떠한 내용이다
라고 하는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지성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변론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서방 그리스도교는
주로 이성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콜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예전에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었고
지방에는 각 지방마다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었던 학교로서
향교나 아니면 서원들이 있었죠.
그것처럼 서방에도 스콜라, 스쿨 학교입니다.
학교가 있었고
나중에는 이것들이 대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죠.
이런 스콜라를 중심으로
이성적으로 지성을 활용을 해서 철학을 하고
또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성 중심으로 탐구를 했던 학교들이 쭉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이거를 스콜라학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학교 중심으로 이런 지성이 발달해 왔던 철학과
여러 가지 지성이 발달했던 이런 것을
스콜라학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런 스콜라에서, 각 대학에서 신학을 또 공부를 하고
아주 체계적으로 신학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스콜라 신학>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서방에서는 나중에 이런 스콜라 신학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종교가, 하느님의 교회에 가르침이
스콜라 신학을 중심으로 발달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성 중심으로 지적인 활동으로 교회에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철학자와 신비 신학자가 충돌한다.
그렇죠.
이렇게 이제 스콜라학
지성 중심의 이런 가르침이 체계화되고 널리 퍼지면서
철학은 그렇게 지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곳과 다르게 교회 안에서는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죠.
이성으로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교회의 전통적으로 쭉 내려왔던
앞선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비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동시에 존재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이 발전하면서 이성과
그다음에 영성 중심의 신비신학, 어떤 깨달음
하느님에 대한 어떤 신비로운 어떤 통교
이런 것들이 서로 이제 충돌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설명할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철학자와 신비 신학자가 충돌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당연히 생각할 수 있겠죠.
철학과 신학, 신비주의 신학의 어떤 충돌로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03-02 베르나르두스와 아벨라르두스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시도한 아벨라르두스 (1079-1142) 신학은 기도요 묵상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1090-1153) 하느님은 모든 개념과 논리를 넘어선 신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론적 사고를 떠나 말 없는 침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도의 목적 -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의지가 하나가 됨 |
7:50
여기에서 등장하는 게
아벨라르두스와 베르나르두스입니다.
아벨라르두스는 신앙과 이성의 결합을 시도한
스콜라학에 대표되는 사람이다라고
나중에 표현할 수가 있는데요,
이렇게 신앙을 이성으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차원에서
신앙을 설명하려고 노력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아벨라르두스라고 하는 사람을 뽑을 수 있고
같은 시기에 살았던 베르나르두스는
신학은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요 묵상이다.
기도 가운데, 묵상 가운데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성령께서 밝혀주시는
그런 내용들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신학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면서
서로 충돌을 하게 되죠.
이게 철학과 신비주의 신학의 충돌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베르나르도스는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개념과 논리를 넘어선 신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론적 사고를 떠나 말 없는 침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신비주의적인 (이성이 아닌) 침묵으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침묵으로 하느님과 결합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런 설명들을 이런 설명들을
이 베르나르도스가 집대성을 하게 되죠.
여기에서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도의 목적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의지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전해받을 수 있게 된다.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한번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라
라고 하는 것이 스콜라 신학이죠.
그쪽에서는 그거는 말이 안 된다.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런 것들이 설명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면서
신비주의적인 이런 설명들을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죠.
이런 양쪽 사람들의 주장들이 공존하던 그런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03-03 신비신학자 토마스 마퀴나스 토마스 이퀴나스 1224-1274 천사적 박사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신학과 아벨라르두스의 변증법을 결합시킴 "관상을 통해 얻은 것을 전하라." |
10:19
이성과 신앙이 충돌하던 때에
아주 놀라운 분 한 분이 등장을 하는데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이분이 1224년에 태어나시게 되는데요.
이분이 천사적 박사라고 하는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됩니다.
천사, 하늘에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천사들
그들이 하느님을 직접 배우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말을 듣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하느님 신비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전해 받고서
이것을 우리에게 글로 책으로 남겨 주었다라고 해서
천사적인 천사와 같은, 그런 박사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분에게서
베르나르두스의 신비신학, 그리고 아벨라루드스의 변증법.
스콜라학이 결합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학자였는데,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성 중심의 학자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은 것
그것을 체계화하여서 신학을 발전시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의 아주 위대한 신학대전이라고 하는 책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는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가르침이 이후
교회에 아주 중요한 가르침에 근거가 되게 됩니다.
뭐 이분의 가르침이
곧 교회의 가르침, 하느님의 가르침과 같다
라고 이렇게 표현할 정도로
그렇게 이후에
가톨릭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분이 되죠.
이분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관상을 통해 얻은 것을 전하여라."
그래서 이분은 공부하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
관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관상을 할 때엔
거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 신비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는 전해줄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기도는 곧 하느님에 대한 공부가 된다.
하느님을 공부하려면 관상하라.
그러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분은 당신이 관상했던 것
그것들을 아주 방대한 저서로 우리에게 남겨 주십니다. (12:43)
03-04 토마스의 형이상학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경우 본질과 존재는 서로 같다. 하느님을 그 단어가 가진 총체적인 의미로 보면 바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일한 존재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은 제자에게 말한다. (14세기) 모든 본질을 피하고 존재에 주의를 집중하라. 네가 무엇인지 또는 하느님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 다만 너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만 집중하라. 마음이 텅 비고 본질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을 때. 의지의 순수한 지향이라 일컫는 사랑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
12:44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렇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성경에서 끊임없이 말씀해 주시는데
그런데
하느님의 존재 방식과 우리의 존재 방식은 다르죠.
우리는 '존재자'라고 하는 시공간의 어떤 한 점을 차지하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하느님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느끼고 깨닫고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는 것이죠.
'하느님의 경우 본질과 존재는 서로 같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냐라고 하는 것이 그분의 존재를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이란 어떻다라고 하는 것과
나와 나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서로 같지가 않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다른 차원을 여기서 깨달을 수가 있죠.
'하느님은 그 단어가 가진 총체적인 의미로 보면
바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일한 존재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14:11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을 이어받아서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이죠,
여기에 근거해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돌아가신 지 한 백 년쯤 후에
영국에서 '무지의 구름'이라고 하는 책이 등장을 하게 되는데
이 무지의 구름은 어느 제자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든 본질을 피하고 존재에 집중하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함께 계신 하느님의 그 존재 자체에 나도 함께 있으려고 해라.
나머지 그분에 대해서 더 추구하려고 해 봤자
나의 한계, 나와는 다른 하느님의 자원 때문에
내가 하느님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의 존재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무엇인지 또는 하느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마라.
이성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죠
다만 너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만 집중하라.
'마음이 텅 비고 본질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을 때
의지의 순수한 지향이라고 일컫는 사랑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하느님의 존재,
우리가 우리 차원에서의 존재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하지만 우리가 알려고 하는 것
우리가 이 기도에서 추구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나와 함께 계신 하느님 그 하느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나의 이 지향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들 안에서의 사랑의 움직임'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 자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이 기도 시간,
이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에 하느님의 존재에 함께 하려고 하는 것
그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여기에만 집중하는 것
이거 이외에
다른 것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이제 신비주의가 이렇게 발달해 나아가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이런 식으로 이제 쭉 전해지게 되는 것이죠. (17:07)
03-05 공동본성으로 얻는 지식 • 두 종류의 지식 ▶ 학적 연구나 논리적 사고에 의한 지식 ▶ 공동본성에서 나오는 지식. •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체현되는 대상과 공통의 본성을 지닌다. • 사랑과 합일에서 오는 지식 |
17:12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을 이야기를 합니다.
학적 연구나 논리적 사고에 의한 지식이 존재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
공동본성에서 나오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해서
이 두 가지를 구분을 합니다.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
3단 논법에 의해서 논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어떤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알아낼 수 있는 지식이 있는데
그런 지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그것과 같은 본성이 된다면
나는 자연적으로 그것에 관해서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을 공동본성에서 나오는 지식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공동본성에서 나오는 지식.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체현되는 대상과
공통의 본성을 지닌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을 하면
그 사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연스럽게 저절로 알게 되고
그가 이런 생각을 한다, 그가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하는 것까지도 다 알아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것을 보고
공동본성을 가질 때 거기에서
그에 관해서 모든 것들을 저절로 알게 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랑과 합일에서 오는 지식이다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렇죠.
내가 그것을 사랑할 때,
인간이 아니어도
내가 어떤 나무를 사랑한다 꽃을 사랑한다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보게 되고
그래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사랑과 합일에서 오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표현을 할 수가 있겠죠. (19:06)
03-06 토마스 아퀴나스 - 사랑으로 얻는 지식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라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를 결합시킨다.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신학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퍼부어진다. 우리는 하느님과 합쳐지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된다. 이 사랑을 통해 최고 지혜가 우리에게 온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지의 존재이신 그분과 결합되어 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무지를 통한 앎" 어두운 밤 무지의 구름 사랑이 무아경을 만들어 낸다. 감각과 이성을 넘어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높은 지식으로 들어 올려져야 한다. |
19:07
자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여기에서
사랑으로 얻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얻는 지식'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
그렇죠.
우리가 기도를 하면 기도 중에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주어지는 것이죠.
우리는 그래서 기도 때
하느님의 사랑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라는
코린토 1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를 결합시킨다.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느님 사랑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요한 1서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래서 신학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압니다.
제가 신학생 때 들었던 이야기가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오늘 철학 시간이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철학자가 탐구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가능하겠지만
어쩌면 시골에서 사는 가난한 농부
또 학교도 다닌 적이 없는 글도 모르는 농부
하지만 매일 성당에 나가서 공소에 나아가서
아침저녁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오히려 더 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더 깊을 수 있다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표현을 했던 것이죠.
신학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퍼부어진다.
우리는 이제
이때 하느님과 합쳐 하느님과 한 몸이 된다.
이 사랑을 통해 최고 지혜가 우리에게 온다.
그렇죠.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이제 이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자신, 최고 지혜가 우리에게 온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겠죠.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지의 존재이신 그분과 결합되어 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그분을 알 수도 있고
또 그분에 의해서 우리는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와 그분이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이거를 모르겠느냐?
모르죠.
그런데 저절로 알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분에 의해서 이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성인은 이렇게 표현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무지를 통한 앎"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걸 다른 표현으로 '어두운 밤' 또는 '무지의 구름'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할 수도 있겠죠.
어두운 밤이나 무지의 구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 무지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방식을 뛰어넘는 성령을 통해서
당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당신 사랑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신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이 무아경을 만들어 낸다.
하느님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죠.
사랑할 때 사랑하는 대상만 나에게 존재하지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무아경을 만들어낸다.
감각과 이성을 넘어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높은 지식으로 들어 올려져야 한다.
우리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것
그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느님
그렇다면 우리의 지성으로 그분에게 다가갈 수 없다
더 높은 지식 하느님의 지식으로 그분을 알려고 해야 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넣어 주시는 지식 이외에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로서
철학적인 어떤 이성 중심의 그것으로 신학을 했던 것이 아니라
이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
하느님이 자기에게 넣어 주신 것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라고 하는
신비주의자로서 신학을 했다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아주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24:13)
03-07 토마스 아퀴나스 - 그리스도와 공동본성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연인 안에 있게 만들고, 역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연인 안에 있고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그에게 위안을 주는 대상이 된다. 한편 그 연인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며들어, 그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과 공동본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이 지식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많은 신비가들이 생각하거나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십자가 아래 무릎을 끓고 무지의 구름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침묵 속에서 항상 머물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무지의 구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발치의 사랑스럽게 앉아 있는 마리아의 응시가 그분의 인간성을 넘어서 그분의 신성에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분의 인성이라는 어두운 말씀에 둘러싸여 있는 그분의 신성이라는 최고 지혜를 주시했다." 중세의 서정시 < Jesus, Dulcis Memoria > 예수님에 대한 달콤 기억(생각) 마음의 진정한 기쁨을 주도다. 하지만 꿀과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욱 달콤한 것은 그의 존재.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보다 이보다 더 즐거운 노래는 없도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없도다.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은 없도다. 오 예수님,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시어 구하는 이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는가. 주님을 찾는 이에게 얼마나 좋으신가. 하지만 탐구하는 이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혀도 당신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어떠한 글도 당신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분을 체험한 이는 믿을 수 있도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오 예수님, 우리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우리 미래의 상급이 되는 분이시여, 영원무궁히 당신 안에 우리의 영광이 있기를. 아멘.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
24:14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공동본성도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이어지는 표현입니다.
요한 1서에 보면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모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연인 안에 있게 만들고
그 역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사람 안에 있죠.
그래서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표현한 것처럼
'내 안에 너 있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죠.
그 사람이 언제나 내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 안에 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이 나를 자기 안에 넣어 놓고 살아가는 것이죠.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늘 내 안에 나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연인 안에 있고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그에게 위안을 주는 대상이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늘 그 사람을 생각을 하기 때문에
좋은 것도 그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고
맛난 것도 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싶고
이 좋은 시간도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도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해주려고 하죠.
이게 바로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한편 그 연인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며들어
그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게 된다.
'내 안에 너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을 그대로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우리의 사랑의 차원에서도 이 말씀이 사실이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이 내 안에 있고 나도 하느님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것이죠.
존스턴 신부님은 이 차원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사랑과 공동본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이 지식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많은 신비가들이 생각하거나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무지의 구름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침묵 속에서 항상 머물러 있었는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죠!
관상 기도는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느님에 대해서 깨달으려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가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그분 당신 자신, 그분 당신 자신의 사랑
이것을 바라고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를 하느님 손에 온전히 내어 놓는 것 이외에
기도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차원으로
침묵 속에서 하느님 현존 안에 그저 머물러 있기만 하는 기도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 그들의 태도
이것들을 우리가 이제 이해할 수 있고
우리도 그런 차원에서 관상 기도를 해 나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존스턴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했던 겁니다.
그래서 <무지의 구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발치의 사랑스럽게 앉아 있는 마리아의 응시가
그분의 인간성을 넘어서 그분의 신성에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분의 인성이라는 어두운 말씀에 둘러싸여 있는
그분의 신성이라는 최고 지혜를 주시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저 하느님이 현존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느님만을 바라면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그런 관상 기도를 할 때엔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
그것들을 뛰어넘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존스턴 신부님께서 시 한 편을 인용을 하십니다.
한 구절만 인용을 하지만
그 전체 내용을 제가 한번 들려드려 보겠습니다.
누가 지었는지 정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또 연대도 정확하지 않지만
한 1000년에서 1200, 1300년 경에 만들어진 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수 돌체스 메모리아 (Jesus, Dulcis Memoria) '라고
'감미롭다, 달콤하다'라고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감미롭고 감미로운 메모리아, 감미로운 기억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달콤한 기억이다
라고 표현을 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시인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달콤한 기억'
근데 이 메모리라고 하는 것은
기억은 사실은 생각을 (그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이 단어로 이렇게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달콤 기억(생각)
마음의 진정한 기쁨을 주도다.
그분을 떠올리는 것 그분에 대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도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꿀과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욱 달콤한 것은 그분의 존재 자체이다.
현존이라고 표현할 수 있죠.
그분에 대한 기억도 좋지만
그분의 현존 자체가 우리에게 더 커다란 기쁨을 준다라고
이렇게 노래한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보다
이보다 더 즐거운 노래는 없도다.
이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은 없도다.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은 없도다.
하느님 당신 자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이 하느님의 현존이 가장 즐거운 노래에 최고의 기쁨이 된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 예수님, 회개하는 이의 희망이시여
구하는 이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는가
주님을 찾는 이에게 얼마나 좋으신가
하지만 이성으로 탐구하는
이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혀도 당신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어떠한 글도 당신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분을 체험한 이는 믿을 수 있도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오 예수님, 우리의 기쁨이 되어 주소서.
우리 미래의 상급이 되는 분이시여,
영원무궁히
당신 안에 우리 영광이 있기를.
그러면서
하느님 예수님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을 때
우리에게 참된 기쁨, 우리의 영원한 영광 그것이 가능하다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시를 이용했던 이유는
이 존스턴 신부님이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기억 - 생각에서 현존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가.
그래서 우리가 묵상하는 것, 생각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관상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더 커다란 참된 기쁨을 준다.
하느님과 함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에 들게 한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이성적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그러한 신앙
이거보다 오히려 관상하는 자의 기쁨
거기에로 우리가 초대받았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널리 알려야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표현,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여기에로 우리가 초대받았다라고 하는 것을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하느님을 느끼고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넣어 주시는 사랑으로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이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저절로 좀 깨달아라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해주신 한마디의 말 아빠 아버지라고
당신 자신이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다면
또 그분이 우리에게 기도로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라고
이렇게 들려주셨다면
거기에서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지 않는가
내가 그분의 자녀이고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니
그분이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이다라고 하는 것
이것을 저절로 깨달을 수 씻지 않겠느냐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죠.
그러니 아버지 앞에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33:23)
03-08 쇠퇴하는 신비신학 공동본성, 사랑으로 얻는 지식, 성령의 선물인 지혜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 늘 일치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스콜라철학) 질문과 삼단 논법과 세세한 구별로 여념이 없었다. 가톨릭 체제는 신비주의에 대해 신중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도 당연히... |
33:24
하지만 이후에
그리스도교에서 신비 신학은 점점 이제 쇠퇴해 나갑니다.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저절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또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죠.
또 성령의 선물로서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라고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죠.
이런 것들에 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즉 살아계신 하느님과 늘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된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가 초대받아 있다라고 하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우리에게 쭉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 즉
스콜라 철학은 질문과 3단 논법과 세세한 구별로 여념이 없었다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13세기를 살았던 분인데
그 당시 이후 서방 세계는 지성중심으로
아주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죠.
르네상스 시대가 바로 펼쳐지면서
사람의 능력, 사람이 알 수 있는 것
사람이 깨달아 나갈 수 있는 것
인간 표현
그리고 하느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어떤 것들이
점점 유럽 사회 전체를 휘감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성이 폭발적으로 아주 발전하게 되죠.
철학과 과학이 아주 극도로 발전하게 되면서
동시에 당연히 예술도 인간에 의한 기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런 것도 당연히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산업혁명을 맞이하게 되고
인간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대로 이렇게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이후에
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이
그 외에 가르침에 핵심으로 수백년을 이어 나가지만
하지만 사회의 전체
교회의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가르침의 내용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과 같은 신비주의적인
그런 차원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이성 중심의 신학으로 계속 발전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이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물론 그 안에 이제 15세기 16세기에
스페인의 대데레사 성녀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나타나면서
아주 신비주의적인 내용들을 꽃피우기도 하지만
하지만 전반적인 어떤 그리스도교 가톨릭은
그 신비주의를 중시하는 그런 것보다는
신비주의를 자꾸 이렇게 좀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오히려 이성 중심의 교회로 발전해 나아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이성과 신비주의가 어떤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대결 양상을 가졌었는데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서
둘이 하나로 잘 융합이 될 수 있는 거 같이 보였지만
이후에 점점 신비 신학이 쇠퇴해 가게 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직접 전해 받는 신비적인 기도
향심 기도 같은 관상기도 이런 것들이
교회에 주류로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네 이렇게 오늘
신비 신학에서 제3장 이성 대 신비주의라고 하는 단원
함께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