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째 날(2014.11.9. 일)
• 고양관청길과 벽제관길
코스
용미3리-관청령-고읍마을-연산군시대금표비-대자산숲길-고양향교-벽제관지- 벽제천-제1대자교-벽제교-덕명교비-김지남묘-삼송역
현각이가 먼저 갔고 조금 있다가 출가하여 연신내역(6호선)에서 703버스를 타고 혜음령을 넘는 다 보통 고개로만 버스노선에 표시 되었으나 나중에 확인하니 혜음령이고 오늘은 헤음령을 넘는 것으로 알고 겁부터 먹었는데 관청령을 넘는 단 다
惠音嶺
고양동에서 광탄으로 넘는 고개로 국도 1호인 의주대로에서 중국으로 가는 연행 路程에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고 북방으로 귀양 가는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언제 다시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까” 하고 한숨으로 넘든 고개라면서 대동법을 시행한 金堉(1580~1658)은 혜음령이란 시를 남겼고 백사 李恒福(1556~1618)도 이 고개를 넘어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다 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惠音嶺- 金堉
북쪽에는 천마산이 장엄하고
남쪽에는 삼각산이 웅장하구나
고개위에 서서 옷깃 풀어 젖히니
개성과 한양사이 마음이 상쾌하여라
天眺天磨壯 南瞻三角雄 披襟一嶺上 快意兩都中
이항복은 혜음령을 넘고 철령을 넘으면서 시조를 남겼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 철령은 강원도 회양에서 함경도 안변으로 넘어가는 높은 재
김육은 내가 살고 있는 마포 출생으로 평택시에 대동법시행기념비와 가평에서도 10년을 살았기에 유허비 그리고 잠곡서원이 있고 또 전북 함라에 공덕비가 있으며 78세로 죽었으니 당시로서는 장수를 한 셈이다
용미3리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이미 반포 孫이 서성거리고 있다 용암사가 북쪽 방향으로 짐작되는데 쌍미륵은 보이지 않는 다 쌍미륵은 이정표 역할을 했다하니 지금은 그 때보다 숲이 욱어졌기 때문이다 트레킹 출발시간이 10시라서 9시25분에 도착하였기에 시간이 좀 있어서 용암사 방향으로 좀 걸어서 용미3교 까지 다녀왔다
10시에 시작한다더니 10분이 넘어가고 20분이 되어도 출발 신호가 없더니 파주문화원에서 오지 않아서 그렇단 다 에이그~ 문화원 사람들이 문화를 잊었군... 결국 25분이나 늦게 그들은 왔다-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라 마음속으로 시비를 걸었지만 경기문화원 아가씨가 미안하다면서 음료수를 돌렸다
용미리
살아서 사는 사람(40만)보다 죽어서 사는 사람(60만)이 더욱 많고 용암사 쌍석불이 수문장 노릇을 한 다 龍尾里의 머리는 한양이고 꼬리(尾)는 용미리란 다
10시40분
출발하려니 용미리는 선조 임금이 피난가면서 묵었던 행궁터 란 다 동쪽으로 산줄기가 보이는데 좌측은 혜음령이고 오른쪽 방향에 관청령이 있어서 잠시 후 입산하니 용미리계곡으로 약수터와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을 지나면 오르막으로 묘지가 나오면서 완만한 길을 따르니 관청령이다
관청령 관청령(관청재)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고읍마을과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을 관청고개라 부르는 것은 고개 아래 고읍마을에 옛 고양관아를 비롯한 주요한 관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古邑, 읍내, 관청재, 향교골 등 옛 관청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주로 혜음령이 옛길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관청고개 역시 고양과 파주를 오가는 중요한 도로였다. 한편 관청고개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이 ‘국사봉’ 인데 이곳에서 나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청령에서 내리막길은 낙엽이 덮여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했고 산자락에서 벗어나니 고읍리(고읍골)로 마을회관 앞에 고양문화원에서 30여명이 양쪽으로 도열했다가 경기옛길 릴레이 종주단을 힘찬 박수로 맞이했고 문화원장이 인사말로 의주길(관청고개)이야기. 대자동. 고읍마을과 고양군청의 역사를 들려준 뒤 기념촬영을 한 뒤 다시 걸으려니 온영군 묘소가 보였다
溫寧君 李裎(1407년-1453년)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과 신빈 信嬪 寧越辛氏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서자이다. 부인은 益山郡夫人 順天朴氏) 묘소와 제실을 지나니 연산군시대금표비가 보였는데 연산군의 사냥터로 일반인이 입산하면 죽였단 다 민초들의 안전이 아니라 특권 의식이다
연산군시대 금표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연산군이 유흥을 즐기는 곳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비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웠는데,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비문에는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고양군은 1504년(연산군 10) 왕의 유흥지가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고양군으로 복귀되었다. 이 금표비는 연산군의 폭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12시
고향문화원에서 점심식사로 “전주 철판 해물등갈비 찜” 집에다 점심상을 차렸다 반주가 없어 야속했지만 화장실을 들리니 전국 도시의 인구 20위까지 유인물에 고양시는 10위란 다 하기는 지금의 서울도 고양 땅이었으니까-
점심 식사시간으로 50분을 보내고 도로 따라 걸으려니 오르막길이고 언덕에 오르니 대자산으로 입산하니 밤나무단지. 푸르름의 숲. 호랑이 굴. 꽃의 숲 체험의 숲 방향지시표가 보이고 대자산 옆구리를 양호한 길로 돌도록 되어있다
∞ 大慈山
꿈과 희망의 관산동에 메조산 대자산근린공원으로 산은 덕양구 대자동과 고양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210m로 대자라는 명칭은 세종대왕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어린나이에 요절하자 태종대왕이 현 대자동에 대자사를 짓고 마을의 이름을 대자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세는 북쪽으로 파주시 남쪽으로는 통일로변 공릉천에 닿는 다 산자락에 최영장군묘 고양향교 성녕대군 경안군 임자묘등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고 바위가 적고 숲이 울창하며 완만하여 산책이나 문화유산 답사의 코스로 인기가 많다
고양향교 300m 남은 곳에 쉼터가 있어서 정자에 걸터앉으니 멀리 북한산 모습이 아름답게 시야에 잡힌 다- 관산동에 여생을 보내려고 아파트를 작만 하였다가 뜻하지 않은 일로 처분했지만 여행과 산행 파트너 윤 대감만은 관산동에 살고 있어서 메조산 대자산을 날마다 산책하고 있다 고양향교와 중미문화원을 스치고 벽제관터에 도착하여 휴식들을 했다
碧蹄館터(사적 제144호) 전경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벽제관은 처음 이곳에서 서북쪽 3km 가량 떨어진 이웃 고골(고읍)에 지어졌었으나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인조3년(1625) 당시 고양군의 관아를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이전하여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전쟁
때, 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 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건물은 중앙의 정청과 좌우의 익헌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벽제관터에서 고양동을 통과하려면 도로를 따라야하고 횡단보도를 건너서 703버스 노선을 만나고 다리를 건너 대로를 좌측으로 끼고 걷다가 벽제천을 끼고 걷다가 대로를 만나서 빈정교 왕복교를 건너 꺾으면 오금천11교가 나오면 덕명교비각이 있다 덕명교는 옛날에 오금천을 건너야하는 어려움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금을 하여 길손들에게 스스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기록에 이두문도 섞여 있다
개천 따라 걸으면 좌측으로 북한산이 가까이 다가오고 다시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묘지들이 많은데 역관 김지남묘도 있다
∞ 金指南(1654.효종 5∼?)
조선 후기의 譯官 본관은 牛峰 자는 季明 호는 廣川 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閔就道를 역관으로 수행했는데, 그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金指南墓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 195-5. 오금동 하촌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 묘역 일대에 우봉김씨 묘역 수십 기가 자리해 있으며 이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조 숙종대의 역관인 김지남의 묘소이다. 현재 김지남의 묘역에는 비갈이 1기 세워져 있으며, 비갈의 내용 중 김지남이 숙종대에 백두산에 올라 중국 청나라 사신들과 담판을 져서 그 영토를 명확히 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 홍순언-역관의 이야기
譯官 洪純彦은 王家의 世系를 辨誣하는 데 공이 있어 光國功臣으로 策勳하고 唐陵君을 봉했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순언은 이에 앞서 명나라 서울에 갔을 적에 養漢的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한 아름다운 창녀를 얻었었다. 양한적이란 창녀를 길러 값을 받는 칭호이다. 물어본즉 창녀는 본시 양갓집 여자로서 부모가 죽자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모실 길이 없으므로 스스로 몸을 팔아 이에 이르렀는데, 기실은 처녀로서 남자를 섬기지 않은 몸이라는 것이었다. 순언은 듣고서 측은히 여겨 마침내 돈을 내어 깨끗이 도와주고 관계를 맺지 아니하였었다. 그 뒤에 그녀는 尙書 石星의 寵姬가 되었는데 辨誣하러 갔을 적에 순언은 그녀를 인하여 힘을 입었었다. 임진왜란에 이르러 명 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석성의 힘이었는데 역시 그녀의 도움이었다고 한다.
묘지 뒤로 오르면 산길을 만나는데 고양누리길 북한산누리길과 한북정맥누리길이라고 행신 尹公이 안내를 하고 산길에서 벗어나면 고개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오면 삼송역이 있고 의주로 시작과 끝점으로 15시45분에 도착하여 3호선 전철을 타고 오다가 연신네전철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집에 돌아오니 16시50분으로 시작이 반이라더니 경기옛길 의주로가 끝났고 내일 부터는 삼남로 10코스 소사원길을 평택시부터 시작하여 남태령까지 걸어야할 터로 체력이 버텨줄 가- 마누라가 체력보강으로 막걸리에 삼겹살을 준비했구나! 끝
∞ 걷는 사람들을 위하여 고양시의 누리길
1. 북한산 누리길
2. 한북 누리길
3. 서삼릉 누리길
4. 행주 누리길
5. 행주산성역사 누리길
6. 고봉 누리길
7. 송강 누리길
8. 고양동 누리길
∞ 高陽市
1992년 2월에 시로 승격한 곳으로 서울특별시와 인접하여 근교농업이 활발하며, 주택지와 공업지대로서의 발전이 기대 된 다
고양시 산타령- 김보연(소리꾼의 꿈 날개를 달다
에헹 에헹 네홀레야 에헹 에헹 네홀레야 네나 나니가 산이 로구나
1. 이산 저산 양산 간에 울고 간다고 에루화 곡산이 로구나
2. 화란춘성 만화방창 때는 좋다고 에루화 춘산이 로구나
3. 삼각산 뻗어내려 한강수를 감돌아 에루화 덕양산 이로다
4. 천산 태산 멀다 해도 가고나 영절산은 에루화 북망산 이로다
정조대왕과 고양군
어가가 교외 길을 안온하게 돌아와
군재의 동쪽에 임해서 주필하였네
술동이에는 푸른 거품이 출렁이고
과녁판에는 붉은 곡이 걸려 있도다
일천 민가엔 밥 짓는 기미가 보이고
여러 진영엔 북 피리 소리 울리누나
한 번 즐김이 어찌 법도가 되었으랴
금년에 다행히 풍년을 만났음일세
穩旋郊駕路 臨蹕郡齋東 樽漾蟻浮綠 帿懸鵠中紅
千家烟火氣 列壘鼓笳風 一豫寧爲度 今年幸遇豐
弘齋全書 제6권 詩에 정조대왕은 高陽郡에 행차하여 儒臣들에게 무예를 시험하였다. 고양군에 射亭이 있으므로 御駕를 수행한 文武 近臣들과 함께 鵠을 쏘았으니 이는 곧 先朝 시대 성대한 행적의 일단을 계술한 것이라 기록이 없을 수 없으므로, 후일에 이것을 읊다. 이날 정조는 小鵠을 쏘아 다섯 번을 맞혔지만 나머지 신하중에 다섯 번을 맞힌 사람은 없었단 다
龍尾里
한양에서 北行 길은
북망산천 길
첫 번 째로
높은 고개
혜음령을 넘으면
살고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의
무덤이 더 많으니
사는 것 보다
죽은 것이 더 좋은 가
누가 말했나
死卽生
生卽死-라고
나도
혜음령을 넘어
용암사
쌍석불의 加護를 받자
斷限은
평생에
가슴에 묻어둔
그 여인의
相思曲을
이젠
듣을 수 없지만
아~ 열반은 좋은 거 2014년11월9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