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佑昶 自書傳
나 심우창은 2004년 3월 21일 노량진 청화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강사, 엄마는 학생으로 컴퓨터 학원에서 처음 만난다. 엄마의 미모(?)에 아빠는 홀딱 반해 바로 사귀자고 하고 계속 엄마를 쫓아다닌다. 쫒아 다니며 귀찮게도 했지만 엄마에게 잘해주고 믿음을 주어 엄마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연애하던 중 같이 유람선을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결혼하자고 얘기하고, 엄마는 꾀를 내어 한강 다리 밑을 바로 지나가기 직전에 지하철 한 대가 지나가길래 ‘최소한 3분 뒤에나 오겠구나’ 해서 그럼 이 배가 다리 밑을 지나갈 때 지하철이 지나가면 결혼해 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한다. 바로 다리 밑을 지나가는데 반대편에서 지하철이 지나가서 그 상황이 너무 당황 스럽고 웃겨서 엄마는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아빠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양가 부모님의 축복 속에 2003년4월12일 강남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엄마는 어느 6월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친구들과 내린천 래프팅을 하러 떠난다. 래프팅 시작과 동시에 엄마는 물에 빠지고, 급류를 타고, 수십 미터 혹은 수백 미터를 떠내려간다. 물살이 워낙 세고, 물도 많고, 전날 74년생 여자 한명이 실종돼서, 실종자가 혼자 가기 외로워서 엄마를 데려 가려나 생각했다고 한다. 다행히 엄마는 잔잔한 물가로 그분(?)께 인도되어 구조되었고, 친구들과 만나 다시 래프팅을 해서 내려가는 중에 실종자가 발견되었다. 다음 날 출근한 엄마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내가 엄마를 살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혼 한지 2개월 만이라 처음에는 얼떨떨하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아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뭔가 되게 신기한 느낌과 기대감이 있었다고 한다.
나를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자손이 귀한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아주 좋아하셨다고 한다. 5개월 때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좋아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가 꿈을 꾸었는데 깜깜한 밤에 산꼭대기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유난히 반짝이는 큰 별 하나가 엄마를 향해 떨어져 눈이 부시고 깜짝 놀라 깬다. 태몽 같아서 그때는 결혼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이가 없는 둘째고모에게 만원을 주고 팔게 된다. 후에 엄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시 만원을 주고 가져왔다는 해프닝이 있었다.
엄마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다. 꽃게탕과 샐러드로 간신히 입덧을 달랬는데 나를 임신했을 때의 입덧은 입덧도 아니었다는 것을 동생 임신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입덧이 끝나고 임신5개월쯤 주로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 줄때 내가 많이 움직였다고 한다.
내가 태동을 할 때 엄마는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좋았다고 한다. 발로 차면 튀어나온 발을 아빠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발을 잡기도 하고 발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저 신기했다고 한다.
엄마는 모든 일에 있어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엄마가 좋아하던 운동도 그만두고, 태교를 위해 아빠와 함께 라마즈호흡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기들을 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신체적 변화로는 초기에 입덧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중후반으로 갈수록 몸이 무거워져 자다가도 다리에 쥐가 나고, 엎드려 자거나 똑바로 자는 것은 불가능 했다. 배에는 임신선이 생기고, 작은 배가 늘어나서 살이 트기도 했다. 조금만 먹어도 체한 것 같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고, 하루 세 번 가던 화장실도 열 번 넘게 다녔다고 한다.
아빠는 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함께 사러 다니고, 태교 동화책과 CD를 사서 많이 들려주고, 읽어주고, 계절마다 여행을 다녔다. 아빠가 출산 준비를 위해 라마즈 호흡을 배우러 함께 다녀준 것이 엄마는 가장 고마웠다고 한다.
저체중으로 나를 임신한 엄마는 15kg이나 체중이 증가했다. 막달 순산을 위해 매일저녁 가벼운 산책을 하며 나를 기다리던 2004년3월19일 늦은 밤. 아이가 나오기전 출산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이슬이 비치고 배가 살살 아파오자 걱정과 두려움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고 아침 일찍 준비해둔 출산준비물 가방을 챙겨 아빠와 산부인과로 간다. 병원에서 아이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집에 갔다가 10분 간격으로 진통이 오면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외할머니 댁으로 가서 가진통을 하다가 점점 진통이 강해져 외할머니, 아빠와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 입원하고 30시간동안 진진통을 겪으며 초죽음이 되어 가는데... 간호사가 내진을 하며 “1센티 열렸네요.” 하고 말하며 나갔는데 이때 아빠는 엄마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외할머니는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가족분만실을 나가시고,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때의 마음과 고통과 생각은 거의 대하소설로 써도 부족하다고 하신다. 수십 시간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한 엄마는 수술을 원했고 곁에서 지켜보던 아빠도 수술을 해달라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태어난3월21일은 윤달 2월1일로 엄마가 입원한 20일 토요일 윤달이 되기 전 거의 모든 산모가 수술로 아이를 출산하고 3월21일(윤달2월1일) 일요일 에는 마취과며 의사선생님이며 모두 9시가 넘어서 출근하여 엄마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술을 못했다고 한다.
입원하고 진통한지 33시간 만에 촉진제를 맞고 그 후 4시간을 더 진통 끝에 자연분만으로 오후 12시44분 몸무게 3.7kg 키 52cm. 우굴 쭈굴 엄마 반 아빠 반 닮은 심우창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다.
나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손 발 모두 있다는 것을 안 엄마 아빠는 크게 안도하고, 아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의 탯줄을 자르고, 나는 엄마의 가슴위에 올려져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선사 했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엄마에게 처음 들은 얘기는 ‘이 세상을 만나러 나오느라 애썼다.’ 라고 한다.
병실로 옮겨진 뒤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아빠는 화사한 꽃바구니를 들고 엄마 앞에 나타나신다. 또 출산한지 한 시간도 안돼서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친할머니 큰고모 고모부 사촌누나 작은고모 큰아빠 큰외삼촌이 나를 만나러 오신다. 출산하자마자 오셔서 엄마는 부끄럽고 힘이 많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가족들은 저마다 내의며 기저귀며 선물을 사오셨는데 그중 큰고모에게 받은 편지가 감동을 주었고,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나와 동생이 어렸을 때 처음 입었던 옷들을 아직도 몇 가지 갖고 있는데 직접 고르고 구입한 베넷저고리, 우주복, 돌 한복 등이다. 이번 자서전을 계기로 처음 보게 되었는데, 정말 작고 귀엽다. 엄마의 정성도 느낄 수 있는 시간 이였다,
외갓집에서 산후조리를 할 때 엄마는 심한 젓 몸살로 출산의 고통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사다주는 꽃과, 배냇짓을 하며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그 시간들을 견딘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자다가도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 가슴에 귀를 대기도 하고 코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하며 나의 생사여부를 계속 확인했다고 한다. 너무 조심스러워 입술에 뽀뽀도 안하고 볼에만 했는데 내가 태어난 지 3주째 되는 날 친할머니가 오셔서 내 입술에 뽀뽀를 하여 아직도 엄마는 먼저 입술에 뽀뽀 안 한 것을 한탄하며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제일먼저 입술에 뽀뽀먼저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는 믿거나 말거나 매우 순하고 잘 웃고 똑똑했다고 한다. 목가누기, 뒤집기, 기기, 앉기, 서기, 걷기, 뛰기 등 신체 발달도 평균보다 조금씩 모두 빨랐다고 한다. 엄마 생각에는 엄마는 잠깐 힘만 주었을 뿐 자연분만으로 나 스스로 머리를 써서 태어났고, 모유를 15개월 동안 먹어서 순하고 똑똑한 것 같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낳고 몸이 많이 안 좋아 힘이 들었지만, 엄마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분유를 먹지 않는 나에게 15개월 동안 젖을 먹였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 야채 죽 등 이유식을 날마다 다져서 직접 해먹이고, (동생은 이유식을 배달해 먹였다고 한다.) 나의 반찬거리는 생협에서 장을 보고, 우리 농산물 유기농 위주로만 까다롭게 먹였다고 한다. 또 아빠와 함께 즐기던 게임도 아빠는 계속 했지만 엄마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 아빠의 배위에서 잠자고 노는 것을 좋아했고, 발로 비행기를 태워주면 특히 더 좋아했다고 한다.
2005년3월19일 토요일 오후6시 개봉동 K컨벤션웨딩홀에서 나의 첫 생일 파티가 열린다.
해드폰을 끼고 찍은 돌 사진 대형 스크롤을 배경으로 스크린 양옆과 테이블에 보라색 펄 풍선으로 장식하고 돌상에는 각종 과일과 떡, 축하 케이크, 생일에 와주신분께 감사의 의미로 답례품까지 준비를 했다. 120석을 예약했는데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를 해 주셨다. 돌잔치의 하이라이트 돌잡이에서는 컴퓨터마우스를 잡아 제2의 빌게이츠를 희망하기도 한다. 한편 할머니께서는 돈을 잡지 않은 것이 조금 서운하셨는지 돈을 잡을 수 있게 유도하여 두 번째로는 돈을 잡았다고 한다.
내가 처음 밥을 먹은 시기는 돌 훨씬 이전 엄마 아빠가 식사할 때 밥을 몇 알 주면 주먹으로 밀어 넣어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돌 무렵 각종 채소와 소고기를 넣어 만든 볶음밥을 아주 좋아하고 잘 먹고 많이 먹었다. 볶음밥을 못하는 날은 미역국 된장국도 좋아해서 국에 말아 먹곤 했다. 엄마가 참기름을 발라 구워준 김과 생선을 밥보다 많이 먹기도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 조금 늦었는데 처음 한 말은 돌전에 당연히 엄마 아빠였고, 돌이 한참 지나 언제쯤 말을 하려나 기다리던 어느 날 밥을 먹다 ‘엄마 물 주세요.’를 완벽하게 말을 해서 엄마가 거의 울 뻔했다고 한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는 못했지만 두 돌 이후에는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 졌다.
내가 좋아한 장난감은 흔들 말, 반달지붕차도 있지만 첫 장난감 아닌 장난감은 내 발 이였다. 발을 만지고 놀고 발가락을 쪽쪽 빨기도 하고 심지어는 엄마 아빠의 발도 좋아라, 만지고 놀다가 빨려고 하다 지지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보행기를 탈 때 뒤로 먼저 탔는데 자전거도 처음 탈 때 페달을 뒤로 돌려 뒤로 탔다. 뒤로만 타던 어느 날 연습 끝에 앞으로 전진한 날 엄마 아빠가 기뻐하며 사진을 찍어 기념을 했다고 한다. 그 때가 3살 여름이었다.
나의 여행은 생후 4개월 무더운 여름 나의 기억에는 전혀 없는 엄마, 외할머니, 사촌형 이모할머니, 사촌이모와 제주도 여행이다, 여미지 식물원, 한라산, 우도에서 보트타기와 해수욕을 한 것이 나의 첫 여행이다. 그 후로도 엄마 아빠는 가끔 저녁을 먹다 갑자기 나를 담요에 둘둘 말아 무작정 떠나는데 눈떠보면 해남 땅 끝 마을이기도 했고, 속초 어느 바닷가이기도 했다. 또 벚꽃이 필 때 마다 여의도 윤중로로 벚꽃구경을 나서는가 하면 더운 날 한강 고수부지에 돗자리를 깔고 강바람을 쐬기도 하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읽어 주었던 책은 셀 수 없이 많다. 아빠는 반대를 하였지만 엄마는 매번 전집을 사들인다. 심지어 안 쓰는 가전제품이나 옷가지들을 주면 동화책을 주겠다는 사람에게 짝 잃은 귀고리, 휘어진 와이어목걸이, 끊어진 발찌 등 금붙이까지 내 놓았다고 한다(이후 금값이 폭등함.) 그렇게 사들인 창작동화 몬테소리 토들 피카소, 웅진 마술피리꼬마, 자연관찰, 수학동화 교구 베이비 몬테소리, 리틀 몬테소리, 빅 몬테소리, 한글만세 등 이 책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주셨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책은 전집이 아닌 엄마 배속에서 듣던 동화책 ‘알피, 잠 잘 시간이야’ ‘여우가 오리를 낳았어요’라고 한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동화를 듣고 자란 나는 4살 겨울 무렵 책을 혼자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5살 봄. 집에서 조금 떨어진 스포츠놀이학교인 난나 유아 스포츠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수영, 발레, 인라인, 사물놀이를 배우면서 학습은 조금, 운동은 많이 하는 재미난 유치원 생활을 했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큰 가방을 혼자 매고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등원할 때 정말 대견하고 감격스러웠다고 하신다. 가족들에게 유치원에서 필요한 수영복, 발레복과슈즈,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수영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나는 발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아 스포츠단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담임선생님이 결혼을 하셨는데 우리 반 친구들이 결혼식장에서 장미꽃을 들고 ‘흰 눈이 기쁨 되는 날’ 노래를 불러드렸던 것이 기억난다.
동네 친구이자 유치원 친구인 준우와 함께 유치원버스를 타고 함께 다니고 유치원 끝나고도 집 앞 놀이터에서 매일 간식을 먹으며 놀았다. 그 후로도 준우와 2년 동안 더 ECC 유치원과 태권도도 함께 다녔다. 또 나에게는 친한 친구가 한명 더 있는데 같은 동 18층에 사는 현빈 이다. 현빈이가 우리 집에 놀러오고 나도 놀러가고 상가 문방구, 떡볶이집도 함께 다니며 친하게 지내다가 양평으로 이사 오면서 떨어지게 되었지만 가끔 양평에 놀러오면 만날 수가 있는데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지금도 유치원 때를 생각하면 너무 좋았고,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웠던 것은 없고, 친구가 많이 있어서 그리고, 날 좋아하는 여자 친구들이 많아서 좋았다. 지금도 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TV에서 교실 벽과 문도 없고, 카펫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앉아 자유롭게 공부를 하는 영훈 초등학교가 나왔는데 부모님이 그때 이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7대1의 경쟁률을 뚫고 우리 유치원에서는 연식이와 나 둘이 영훈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식 날 나는 하늘색 와이셔츠와 교복 바지, 코트를 입고 부모님이 준비하신 꽃다발을 들고 할머니 엄마 아빠와 영훈 초등학교로 갔다. 체육관에서 오케스트라 부 형 누나들이 연주를 하며 환영해 주었다. 나를 위한 연주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체육관에서 입학식을 하고 운동장에서 6학년 형 누나들이 직접 만든 꽃 화분과 편지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1학년1반9번 이었는데 6학년1반9번 형에게 받은 것이다. 부모님에게도 꽃다발을, 오케스트라부 형, 누나들의 축하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대했는데 곳곳에서 삑 삑 소리가 나서 좀 웃겼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거니까 일단 기대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을 하였던 것 같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두 분이 계셨다. 첫인상이 인자하신 한국 담임 원상철 선생님, 조금 깐깐하실 것 같았던 영어 담임 Ms. Tara 선생님이었다. 두 분 다 첫 인상 만큼 1년 내내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시고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해 주시며 친절하게 수업을 해주셨다.
첫 수업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치원을 같이 나온 연식이, 서로 마음이 잘 맞아 좋아했던 이정석이라는 친구도 있다. 내가 먼저 전학가고, 정석이가 나중에 강남으로 전학 가서 EBS '공부의 배신'이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티비로 나마 보게 되었다. 또 나랑 같은 모범생?(자랑하자면 벌점이 가장 적었다) 김태리 와는 정말 친했는데 태리가 먼저 전학을 가 헤어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미술이 제일 좋았다. 왜냐하면 미술 선생님이 예쁘시고, 나에게 도예 왕 이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이다. 반면 싫어했던 과목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어려운 과목이 없었다.
첫 소풍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집 근처 북한산으로 소풍을 갔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산에 올라가는 길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숲길을 걷고 놀이터가 있어서 놀았었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는 a그룹 b그룹에서 모범생을 뽑아 새끼손가락을 석고 뜨기 해주셨는데 나와 태리였다. 가을에 손뜨개 수업에 엄마가 오셔서 아이들과 함께 손뜨개를 한 날 엄마가 있을 때 애국가를4절까지 부르는 시험을 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한해는 체육대회 한해는 축제를 한다. 내가 1학년 때는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부스를 돌아다니며 경기를 하고 비타민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들은 릴레이와 줄다리기를 하셨는데 엄마 아빠가 참가해서 너무 열심히 한 결과 아빠는 팔이 다 까지고 엄마는 삼일을 앓아 누우셨다.
거의 모든 종목에 다 참가 했다, 싫어한 종목은 없고, 박 터뜨리기를 신나게 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우리반에 승우라는 친구가 축구와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데 릴레이에서 마지막에 역전을 해서 청군이 이기게 되어 환호하고 옆에 친구를 끌어 안고 엄청나게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2009년 9월 7일 유치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 대신 외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서 산부인과 병실 밖에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병실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호기심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초조하게 동생을 기다렸다고 한다.
어른들은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서 좋아하셨는데 나는 어른들이 동생만 보고 예뻐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까맣고 우굴쭈굴 못생겼지만 그래도 기다리던 동생이어서 설레고 좋았고 예뻤다.
동생이 태어난 날 나는 병원에서 동생과 엄마를 보고 돌아와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일주일을 지내고 친할머니와 또 일주일을 지냈다. 할머니들과 지내면서 유치원이 끝나면 엄마와 동생이 있는 산후조리원에 가곤했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1학년 담임선생님만큼 자상하신 ‘이 재형’ 선생님, 록 스타 같이 생기신 Mr. 알바로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모두 친절하셨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 복이 많다.)
2학년 때 내 기억으로는 아주 많은 것을 했다. 나의 일생 중 가장 바쁘고 행복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꾸준히 태권도를 다녀 2012년 2월 국기원에서 2품을 따고 새로 받은 검정 띠가 생각난다. 이 때 관장님께서 검정 띠를 그냥 주시지 않고, 노래를 불러야 띠를 주셨기 때문에 노래를 하고 받았다. 지금도 관장님을 생각하면 우리 아빠처럼 재미있으시고, 태권도도 열심히 잘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또 반 친구 5명과 어린이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해서 2년 동안 다니게 된다. 이때 남자 둘 여자 넷 이였는데 여자 아이들의 수영실력이 훨씬 좋았었다.
또 엄마 친구가 추천해준 스피치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우리 집은 정릉인데 성북구에서 송파까지 토요일 수업이라 가는데 한 시간, 어떤 날은 두 시간,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세 시간이 걸려서 가기도 했다. 그만큼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여 1차, 2차 웅변대회를 끝내고 국제 웅변대회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최고상을 따고서야 나의 웅변생활 14개월을 마칠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이신 ‘편 사범’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만나 뵙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나의 집에는 1차 웅변대회 상 ‘메달’ 2차 웅변대회 상 ‘작은트로피’도 있지만, 국제 웅변대회에서 딴 크기가 거의 100cm 가까이 되는 트로피와, 그때 웅변대회가 아직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신명나는 문화학교’ 에서는 우리학교 친구 12명과 매월 첫째 주 일요일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역사 체험을 하게 된다. 가장 기억남은 것은 뽀로로 선생님과 다 같이 공주, 부여에 간 것이다.(3학년 때) 그곳 박물관도 가고 예쁜 기념품도 사고, 그곳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들이 좋았고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 같아서 더 좋았다. 부여 박물관에서는 백제의 완벽한 예술의 금동대향로를 보고 모조품을 기념품으로 사오기도 했다. 이 외에도 경복궁, 서대문 형무소, 국립중앙박물관, 몽촌토성, 강화... 을 탐방 했다
2학년 봄에는 나와 아주 친한 진우형의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그 당시 나는 비행기에 타면 추락하지는 않을까, 추락하면 어떻게 되나 등 온갖 걱정을 다 했다. 고소공포증이 나를 힘들게 했다. 무사히 도착한 우리 가족과 진우 형 가족은 제주도 소인국 테마파크에서 금귤을 살짝 따서 맛을 봤는데 귤이 너무 시어서 모두 웃긴 표정을 지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조립형 자동차를 사나 제주도 선인장 엿을 고르나 이것이 문제였는데, 결국 자동차를 샀지만 시식으로 먹어본 선인장 엿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학년 때는 체육대회 2학년 때는 축제가 열린다. 격 년 으로 번갈아가며 열리는데 2학년 때 서경대학교 강당에서 아주 신나는 축제가 열렸었다. 우리 반은 내가 추천한 레몬트리 라는 노래와 춤 또 하나 태극권을 선보였다. 이때 오빤 강남스타일 이라는 노래와 춤이 유행 이였는데 모두가 음악에 맞춰 신나게 뛰며 춤췄던 것이 생각난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영훈 초등학교에서 가장 예쁘시고 유쾌하신 김 영인 선생님, 외국인 선생님은 금발머리 Mr. Scott 선생님이셨다. 역시 품위 좋으신 김 영인 선생님은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좋으시고 친절하시다. 한마디로 천사 같으셨다. (Mr. Scott 선생님은 어떠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3학년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마술부에 들어가게 된 점이다. 눈속임 마술, 화분 마술, 바늘구멍에 두꺼운 끈이 들어가는 마술 등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나는 마술은 ‘뫼비우스의 지갑’ 이라는 마술이다. 이 마술은 면이 하나밖에 없는 뫼비우스의 끈을 활용한 지갑이 있고, 정말 신기한 건 이 지갑의 특성이다. 마술의 비법은... 비밀!
3학년 때도 신명나는 문화학교를 다녔다. 다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좀 더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신명나는 문화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매달 1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3학년때도 역시 태권도, 수영을 다니며 지민이와 미술을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또 수영은 친구 최 윌, 홍 다연, 우리부모님이 모두 한눈에 반한 오 아림 이라는 친구와 수영을 해 다이빙까지 완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수영을 할 수는 있지만 빨리는 나가지 못한다. 그 때는 어린이 수영장 얕은 물에서 했던 터라 깊은 물에서 다시 연습하고 싶다.
3학년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우리들은 개미들의 힘겨루기를 했는데 내가 주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달려 나가 줄을 잡고 끌어 친구들이 잡아 2번 연속 이겼는데 마지막 판에 다른 팀 아이들이 우리 팀 을 이기려고 모든 조가 달려들어 결국 지고 말았지만 이 게임으로 우리 청군이 이겨 200점을 따서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이어달리기도 우리 팀이 이겨서 우리가 최종승리를 거둬 좋았고 신나게 몸을 움직이며 놀아서 좋았다.
1 학년 때부터 3 학년 때까지 영훈 초에서 꼬박꼬박 키자니아를 다녔다. 라면 체험, 운전면허, 초콜릿, 정비소, 물, 등등 정말 많이 체험을 했다. 그동안 모은 키조를 가지고,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자상하신 신재현 선생님과 나를 매우 아껴 주셨던 Mr. Still 선생님이었다. 신재현 선생님은 스카우트 총대장이셨고, 동화작가여서 일기장도 직접 만들어 주셨다. Mr. Still 선생님은 여러 가지 게임과 놀이를 많이 시켜주셨다.
4학년 초에는 스카우트 모집을 했는데 모집 인원은 적고, 신청하는 수는 많아 투표를 했다. 나는 한방에 ‘축 당첨!’이라고 적혀 있는 종이를 뽑아 당첨됐지만 내 친한 친구들은 거의 다 떨어졌다. 그 친구들의 종이에는 ‘축 안타깝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스카우트 단원이 된 나는 2대 최 범언 대장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스카우트에서 야영도 갔었다. 프로그램 중에 래프팅 활동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우리팀이 앞서 나가다가 교관이 바뀌면서 뒤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교관님께서 오리 ‘꽥꽥’ 병아리 ‘삐악삐악’ 앗싸 ‘가오리’ 구호를 외치는 등 우리들을 매우 재미있게 해주셔서 늦게 도착해도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4학년이 돼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바로 전학을 오게 된 것이다. 영훈초에 있으려면 친할머니와 함께 있어야 해서 나는 전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헤어지니 정말 가슴 아팠다.
4학년 전학 오는 날... 운 좋게 현장학습을 갔다. 중미 산으로 갔는데 해설하는 아주머니가 설명을 재미없게 해서 좀 지루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물푸레 나무였다. 물푸레 나무를 꺾으면 속에서 푸른색이 나온다.
수입 초 담임 선생님은 정은미 선생님이다. 정은미 선생님은 예뻤고, 상냥 하셨고, 매력 있으셨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는 이지민이다. 이 친구랑 미술학원도 같이 다니고, 초등학교 시절 계속 같이 다녔기 때문이다. 지민이와 보드게임도 하고, 다양한 놀이를 했다. 이 친구와 마음이 잘 맞았던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편했다.
이 지민, 이 용우, 임 현진, 박 병건 등등 아주 많다. 왜냐하면 나와 친하고, 동창회까지 약속했기 때문이다. 병건이도 전학을 갔지만, 지금도 가끔 메일을 주고 받는다
가장 불편했던 친구는 노 지혜다. 마음이 조금 아픈 친구인데 선생님께 대들어서 그 당시에는 이해도 안가고 많이 불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친구가 빨리 나아지길 바란다.
수입초에 와서 적응하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왜냐하면 영훈초에 있는 친구들과도 헤어지고, 새 친구들을 보는 것이 어색하기도 서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이혜란 선생님이시다. 살짝 귀여우시고, 매우 친절하셨다.
내가 꿈에 그리고 그리던 야구를 5학년 4월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이 야구단에 들어서고부터 연습을 많이 하여 대회에도 출전하고 그랬다. 처음에는 유격수, 그 다음에는 2루수, 유격수, 2루수에 갔다가 마지막에 1루수라는 재능을 찾아 1루수의 자리를 지켜가며 꾸준히 노력해 대회에도 이기고 그랬다. 내가 제일 기억에 남았던 대회는 2경기 연속 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2경기를 연속으로 이겨서 극적으로 4강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께서 다 시간이 없으셔가지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도 보람 있는 경기였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홍 명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마음공부, 다큐 수업 등 나에겐 특별한 수업이었던 것 같다.
6학년 때 친구 경환이와 꿈의 학교를 도전하였다. 꿈의 리그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떨어졌던 안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 때는 넘나 슬펐다. 그래도 좋은 점은 면접 본 날 학교를 빠졌다는 점이다. ^^
수입초 졸업식 날엔 우리 부모님과 동생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커다란 꽃다발이 3개. 하나는 엄마 아빠가 졸업축하로 준비해 주셨고 하나는 그동안 수고해주신 담임선생님의 꽃다발이었고, 하나는 아침 일찍 김 가온 엄마께서 케이크와 함께 선물해주신 꽃다발이었다. 졸업식을 기념하여 ‘출발’ 이라는 곡을 부르고, 리코더로 가을의 듀오, I will 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졸업식 날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지만 정훈이에게 받은 부엉이인형이 가장 좋았다. 지금 내 책가방에 매달려 있다. 중학교에 같이 들어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헤어지는 친구들도 아쉬웠다.
나는 유전인가? 초등학생 때부터 키가 작았다. 반에서 거의 1번이었다. 처음에는 좀 서러웠지만 나중에는 극복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괜찮아 하며 지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는 양형우 이다. 영어 시간에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우리 둘이 같은 모둠이었는데 영단어 시합을 했을 때 2개 남기고 다 해서...(몰랐는데 반칙이었다.)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친해지면서 먹을 것도 나눠주고 그랬다. 나중에는 더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화장실에서 인성이라는 아이와 싸운 적이 있다. 그 아이가 먼저 때리긴 했지만 내가 만든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친하게 지냈다.
중학교 입학식 때는 오신 분이 없다.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 나의 입학을 축하해 주었고, 선물은 선생님들에게 꽃을 선물 받았다.
초등학교 때 헤어진 친구는 아주 많다. 영훈초에 있었던 많은 친구들과 전학으로 인해 헤어졌고, 수입초 에서도 세종으로 가는 친구 정지우, 마석으로 가는 친구 지환 정원, GVCS로 간 경환 어진 성호... 가 있다.
중학교 수련회 때 첫 날에는 입소식을 하고, 가방 검사를 했다. 가방 검사를 할 때 기분이 좀 언짢았다. 왜냐하면 나의 속옷까지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나 술 등을 검사하기 위해서 참아야 했다. 숙소에 있다가 가죽공예를 하고, 레크레이션을 했다. 여러 가지 퀴즈를 풀고 신나게 춤도 추고, 다양한 게임을 했다. 둘째 날 대부분의 아이들이 싫어하는 아침운동을 시작으로 아침을 먹고, 오리엔티어링, 글로벌수업을 하고, 저녁에 암벽타기를 해야 하는데 전부터 심장이 아파서(지금은 괜찮다.) 암벽 타기는 하지 못했다. 마지막 날 퇴소식을 하는데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급식도 맛이 없었고, 너무 군대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구들과 많이 친해져서 좋았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자유학기제이다. 이 자유학기제의 좋지 않은 점은 2학년 때 시험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것과, 2학년이 되면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세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지 않은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기 마련, 좋은 점은 나의 특기적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목요일 자유학기제로 하는 농구와 일요일에 배우는 농구로 나의 농구실력이 쑥쑥 늘어났고, 금요일마다 꾸준하게 배우는 클래식 기타도 있다. 클래식 기타... 처음 배울 때는 대충대충 했었는데 12월에 기타공연을 보고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것을 본 나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지금도 기타를 치고 있다. 현재 나가는 곡은 미뉴에트, 야상곡이고, 이것만 끝나면 사랑의 로망스를 할 것이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는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갈 갔다. 오사카 지역으로 갔는데 나의 첫 해외여행이다. 일본 전통음식과, 볼거리가 많은 여행이었다. 오사카 지역의 볼 여행거리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도톤보리’ 이다. 도톤보리는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 주오 구의 지명으로, 도톤보리 강의 약어이기도 하다. 도톤보리는 과거에는 극장이 밀집된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밤문화와 오락시설이 밀집된 지역으로 변모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고 한동안 나는 공부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시험기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은 그대로! 중3까지도 시험공부겠지만 나는 유럽에 가고 싶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의 첫 친구는 ‘최 현빈’ 이라는 아이이다. 내가 ecc를 다닐 때의 새싹 유치원에 다녔던 친구이다. 등교 버스시간이 비슷해서 거의 매일 만나는데 신기하게도 엄마와 친구 엄마의 나이가 같고, 아빠, 나와 현빈이의 나이가 같았다. 현빈이의 동생 현주가 있는데 내 동생과 한 살 차이다.
가장 좋은 친구 역시 최 현빈 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나랑 마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4학년 때 전학을 가게 돼서 지금은 자주 만나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좋아했던 아이가 있었다. *** 이다. 나의 이상형은 귀여운 여자이다
아직까지는 싫은 친구는 딱히 없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친구 성격은 자기만 아는 성격이다.
나에게 가장 고민스러운 일은 결정을 하는 것이다. 라면을 고르는 것도, 여행지로 어디를 갈지... 결정을 하는 것이 힘든 것 같다.
국토대장정 20km를 걷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중간 중간에 이벤트를 열고, 재미있었기는 했지만 다리가 아주 아팠다. 하지만 완주를 하고 나니 뿌듯했다.
친구랑 싸우는 일이 가장 후회됐다. 싸움이 크게 퍼지면 친구와 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좋은 경우에는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집에서든 어디에서든 요리를 하는 것이 좋다. 처음 6학년 때 야영에서 요리를 했는데 선생님들이 맛있다며 다 우리 테이블로 와서 먹어 기분이 좋고, 힘들게 요리를 한 것이 보람되었다. 그 계기로 내가 요리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싸우실 때가 가장 힘들다. 일단 싸우면 아무도 못 말린다. 동생은 울고, 나에게는 아주 힘들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금의 ‘공은지’ 담임선생님이 다시 담임이 되었다. 특히 선생님이 종례를 빨리 끝내주셔서 좋았다.
2학년 수련회는... 친구들과 야영장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메뉴를 직접 정해 요리를 하는 것이다. 첫째날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저녁은 우리는 부대찌개를 해 먹었다. 그리고 레크레에이션도 했다. 둘째 날 우리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줄잡고 강 건너기, 암벽타기등 훈련들도 했다. 저녁에는 볶음밥을 해 먹었고, 취침... 마지막 날 우리는 오리엔티어링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중학교 때 나와 평생을 함께 하는 친구 이도엽을 만났다. 왜냐하면 도엽이는 무얼 하든 다 맞는다. 나는 그의 무뚝뚝한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면서 어디든 함께하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 공부 방법은 하루에 수학 조금씩 꾸준히 풀기 이다. 하지만 논술캠프에 갔다 온 뒤로는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나는 여태 공부를 아주 하기 싫어해 13년을 망쳐왔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항상 운동을 하였다. 세상에는 공부보다 쉬운 것은 없다. 여러분도 그것을 깨우치기를 바란다.
가장 영향을 끼친 선생님은 없었고, 나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었던 분은 나의 1학년 담임선생님 공 은지 선생님이다. 가장 친절히 대해 주시고, 잘 가르쳐 주시고, 나에게 아주 좋으신 선생님이다.
3학년 최고학년이 되었다. 나는 전교 회장을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전교 부회장이 되기 위해 친구들에게 잘 대해주고, 또 영설문도 적어 연설도 멋지게 하였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박성빈, 안홍주, 김미서... 한동안 내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슬슬 조마조마하기 시작했다. 10 번째가 지나도 내 이름이 나오지 않자 나는 거의 포기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20번째 쯤 무대 앞에서 심우창! 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포기를 하지 않았다. 정말로 내 이름이 나온 뒤 10번 연속으로 내이름이 나와 나는 박성빈 이라는 아이와 1위를 왔다갔다. 차지하게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5표! 공교스럽게도 나와 박성빈은 43표였다. 첫 표 박성빈 두 번째 표 박성빈 ..........하아아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왔는데.... 순간 심우창이 두 번 불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드디어 마지막 한표! 바로 내가 되었다. 얼떨떨하기도 하였고, 기분도 좋았다. 3년간의 노력을 마침내 터뜨린 것이다. 3학년이 돼서 좋은점이 또 하나 생겼다. 내가 농구부 동아리를 창설하였다. 다. 처음에는 인원이 10명이었지만 2학기 때 신청한 사람 수가 30명이 되어서 10명씩 묶어 4조로 나누게 되었다. (물론 시간조종도 하였다.) 2개는 기초농구반 또 나머지 2개는 중급 농구반으로 정하였다. 나는 농구부 동아리 이름을 SKY BASKETBALL CLUB 라고 지었다. 서울, 고려, 연세 대학교에 갈 수 있는 공부도 잘하고, 농구고 잘하는 클럽이다. 이 농구부에 들어온 사람들은 농구를 잘하게 되었다. 내가 졸업하기 직전에는 기초 반, 초급 반, 중급 반, 상급 반으로 정확히 나뉘어지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후배들이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꽃다발을 주셨다. 선생님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친구들과도 (특히 도엽이) 해어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로 왔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양서고등학교에 왔다. 같이 온 친구들을 박성빈, 신수빈, 신지우, 양형우등의 친구가 왔지만 아쉽게도 도엽이와는 헤어졌고, 그 대신 더 많은 친구들을 얻게 되었다. 그 친구들과 영화관도 가고, 전철타고 서울도 갔다 오고, 매 주마다 번갈아가며 친구 집에 다 같이 모이기도 했다. 겨울에 그 친구들하고 지리산을 5박 6일동안 등반을 하였다. 나는 요리담당, 한 친구는 텐트 담당, 또 한 친구는 식재료담당, 도구담당, 침낭담당...을 정해서 지리산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도중 많이 지치고 다치기도 했지만 그날그날의 목표지점에 올라와 최종 목표지점까지 오르고, 그곳에서 약수도 먹고, 기념사진도 찰칵! 그리고 이 기억을 친구들과 함께 남겼다. 힘든 과정을 겪고 나니 좋았고, 친구들과 정상에 오르니 더 좋았다.
고등학교 때도 수련회를 갔다. 나와 친한 친구들과 같은 방을 썼고, 중학교 1학년 때의 수련원으로 가서 똑같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오리엔티어링을 할 때는 내가 해보아서 우리 팀이 1등을 하였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1회 무료 이용권을 받아 아이스크림도 먹고, 급식도 1등으로 먹었다. 중학교 때는 암벽을 못 타보았는데 이번에 타게 되어서 좋았다.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캠프였다.
고등학교 동아리는 밴드 동아리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보컬을 맡은 나는 매일 노래연습도 하고 그랬다. 우리 동아리에서 초대를 받아 무대에 선 추억도 있고, 선배들은 모두 좋은 선배였다.
고등학교 입시 후 함께 논 친구들은 도엽이, 도현이 이렇게 셋이 구리로 놀러갔다. 시장에서 떡볶이 뷔페에 가서 먹고,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고, 인형 뽑기도 하였다. 인형뽑기를 할 때 우리는 5000원씩만 쓰기로 하고 했다. 나는 윷놀이를 하였다. 2번은 조그마한 인형을 뽑고, 2번은 큰 인형을 뽑고, 한번은 최신형 아이폰을 뽑았다. 대박! 도현이는 피카츄 인형을 뽑았고, 도엽이는 아무것도 뽑지 못해 내가 도엽이에게는 큰 인형 하나, 도현이에게는 작은 인형 두 개를 선물했다.
고등학교의 학습계획은 잘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할 건 하고 놀자 였다. 내가 공부를 할 때 어려움을 느껴 학원도 다니고, 하루에 하는 공부 양을 늘렸더니 더 공부가 쉬워졌다.
짝사랑의 추억(부끄러워서 생략)
입시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공부가 어려웠고, 다 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다 끝내면 보람이 된다.
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농구와 요리를 하는 것이다. 요리를 하면 안정이 되고, 농구를 하면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니 성적도 오르고, 모든 시험에서도 95점 이상을 맞게 되었다. 언제 한번은 올백을 맞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부모님에게 용돈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수능 준비를 하느라고 고생을 조금 하였다. 친구들과 모여서 공부도 하고, 혼자 밤새며 공부도 하였다. 수능 전날 나는 불량식품들을 장사해도 될 정도로 불량식품을 한 트럭이나 선물 받았다. 일단 집에다 나두었고, 시험 날 시험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첫 문제부터 엉망이다 되었다. 두근거리며 시험장을 나오고, 다 잊고,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서 공포영화를 보았다. 보는 동안 심장이 쫄깃쫄깃했다. 다행스럽게도 수능 점수는 340점이 나왔고, 지원은 세종대, 경희대를 지원했다. 세종대는 떨어졌지만 경희대는 붙게 되었다. 모두들 축하해 주었고, 입학식 때 부모님에게 1,000,000원, 큰고모 1,000,000원, 작은고모 500,000원, 큰삼촌 1,000,000원, 큰아버지 500,000원 총 4,000,000원을 받았다.
대학에서 양서고 졸업 친구들 중 경희대 나온 친구들과, 선배와 같이 다녔고, 운 좋게도 진상선배나 인상 좋지 않은 친구들은 없었다.
대학에 들어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를 하였고, 나는 거의 책벌래가 되어있었다. 도서관에 어떤 책이 있는지 다 외울 정도였고, 그 책들을 2번 이상 읽었다. 나의 대학전공 활동은 조리. 서비스 경영학과이다. 평소 요리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은 기타 동아리활동에 가입했다. 가입한지 몇 주도 안돼서 내가 1학년 팀의 리드를 하게 되었다. 나도 잘하고, 친구들도 잘해 주어서 상장도 받은 추억이 있다.
대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고등학교 때 해어진 도엽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찼던 도엽이는 나와 같은 경희대학교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나를 처음 발견 한 사람은 도엽이다. 복도를 지나치다 한 사람이 나를 뒤쫓아 잡았는데 그 사람이 도엽이였다. 도엽이가 옆 반이어서 자주 같이 다녔다.
토요일 아침 나는 인사동에서 도엽이를 만났다. 같이 바뀐 전번도 나누고, 주소도 나눴다. 알고보니 도엽이도 한식 요리학과였다. 도엽이와 인사동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한창 얘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저녁 도엽이와 우리 집에 와(자취 집) 하룻밤을 잤다. 아침에 도엽이를 데려다주고 첫 만남을 끝냈다.
어느덧 대학교 최고학년인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이 되면서 나는 기타 동아리를 탈퇴하고, 요리 동아리를 창설하였다. 학교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고, 인원들도 내가 원하는 인원인 10명이 모여 요리 동아리를 실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토스트 같은 간편한 요리를 만들고, 점점 스파게티, 에그 타르트 같은 요리도 만들었다. 우리는 언제 일주일에 거쳐서 “SKK 요리 베틀”을 하게 되었다. 학교 대항전 세종대학교와 한다는 것만 듣고, 열심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심사위원은 경기대 요리부! 원래는 10명 출전이지만 우리는 딱 10명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나가게 되었다. 1차전 미션! 한식음식, 일식음식, 양식음식 1가지씩을 제한시간 안에 끝내라! 나는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복어요리는 지금 배우고 있다. 우리는 334로 파트를 나누고, 요리를 시작하였다. 잠시 후 한식 요리인 비빔밥, 일식 요리인 덴푸라 튀김과 라멘, 양식인 파스타를 만들었다. 경기대 요리부 학생들이 맛을 보더니 경희 1000점 만점에 996점, 세종 1000점 만점에 987점 우리가 이겼다. 2차전 세종 대 경기 우리가 심판을 보았다. 미션은 러시아 음식인 보르시와 흑빵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맛을 보니 세종이 더 맛있어서 세종 승! 이라고 외쳤다. 마지막 3라운드 경기 대 경희 미션은 한, 중, 일, 양, 복 까지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복어요리 자격증을 따서 복어요리를 하였다. 드디어 시합 종료 승자는 우리 팀이었다. 우리 학교는 상금 오천만원을 받고, 우리 동아리 회원들은 상장을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상장을 주면서 나에게는 50,000원, 다른 친구들에게는 20,000원씩 받았다.
대학교 졸업할 때쯤 나는 한 여자친구와 사귀게 되었다. 그 여자친구의 미모는 아주 아름다웠다. 여친과 영화도 보고, 같이 함께 다녔다. 하지만 나를 시기하던 친구가 오해를 만들어 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오해가 풀려 다시 사귀게 되었고, 점점 빠져들었다.
드디어 대학교 졸업식이다. 입학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그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 주소를 교환하고 해어지게 되었다. 안녕 경희대학교여... 나중에 다시 보기를... 대학을 졸업하고 도엽이랑 만나기로 했다. 도엽이와 만나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낯익은 사람을 보았다. 바로 현빈이었다. 현빈이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나는 현빈이가 고려대 졸업생이라는 것에 더더욱 놀랐다. 드디어 현빈이를 만났다. 현빈이는 어릴 적 꿈과 지금의 꿈이 일치했다. 바로 유튜브 크리에이터다.
이날부터 우리는 약속했다. 같이 동거하고 도엽이와 나는 레스토랑을 함께 차리고, 현빈이는 세계 유명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기로.
우리 셋은 다 같이 공군으로 갔다. 지옥의 1달 훈련을 마치고 도엽이는 2등 병, 현빈이도 2등병, 나는 취사병 되었다. 취사병이 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지만 밥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먹어서 좋았다. 시간을 맞춰야 하고, 여름에는 특히 땀이 비 오듯 흘러도 닦을 새도 없이 일을 하다보면 온몸에 땀띠가 나서 고생을 하기도 했다. 무척 힘들지만 대신 야전 훈련을 나가도 다른 전우들은 힘든 훈련을 하느라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우리는 식사 준비만 하면 돼서 좋았다. 상병이 되기 전까지는 요리는 못해보고 온갖 잡일들을 했다. 처음에는 설거지만 했다, 식판을 수 백 개씩 닦고 나면 팔이 후둘거려서 물을 마시려고 물 잔을 들면 물이 반만 남아있기도 했다. 양파 까는 일이 제일 싫었다. 200개씩 양파를 까고 나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옷 앞자락이 젖을 정도였다. 감자도 300개씩 까야 해서 감자를 까고 나면 손이 새까매져서 며칠씩 가서 겨우 지워지면 다시 감자를 까야 해서 손이 늘 새까맸다. 또 하지만 1년이 지난 뒤 취사 장교로 편하게 하고 있다.
군대 기간 24개월이 지나고 우리는 집을 한 체를 빌렸다. 방 3개 조그만 방 1개 화장실 2개, 부엌도 공간이 있었다. 방 3개는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조그마한 방을 현빈이 유튜브 크리에이터실로 만들었고, 현빈이는 청소당담, 도엽이와 나는 취사와 설거지를 나누어가지고 맡았다. 동거 시작! 우리 셋은 과외를 해서 돈 5,000,000씩을 벌고, 부모님들에게 각각 돈 15,000,000원을 빌렸다. 현빈이는 인테리어 집에 가서 유튜브 크리에이터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도엽이는 포장마차를 운영, 나는 푸드트럭을 차렸다. 현빈이는 돈을 벌기 위해 낮에는 과외를 하고, 밤에만 유튜브를 했다. 도엽이는 포장마차 분식집을 하였고, 나는 밤새 고민하다 도엽이가 좋아하는 타코야끼, 현빈이가 좋아하는 셔벗, 내가 좋아하는 솜사탕 푸드트럭을 하였다. 우리 셋은 다른 곳으로 배우러 갔다. 나는 먼저 일본으로 가서 타코야끼에 대한 기술부터 배웠고, 중국 유명한 솜사탕 집에서 대왕 꽃 솜사탕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셔벗 만드는 기술도 배웠다. 드디어 돌아가는 날 배운 내용을 기록한 비법수첩과 함께 공항으로 도착! 집에 와보니 도엽이와 현빈이가 먼저 와 있었다. 도엽이는 내일부터 장사 시작!, 현빈이는 지금 유튜브 영상 찍고 있고, 나는 내일 모래부터 장사 시작! 다음 날 도엽이는 장사를 시작했고, 현빈이는 과외 하러 떠났고, 나는 푸드트럭을 디자인하고, 솜사탕과 타코야끼를 만들어 보았다. 그것과 도엽이가 만들고 남은 떡볶이로 저녁을 먹었다. 드디어 다음 날! 첫 장사를 하러 서울 광화문 푸드존으로 갔다. 푸드존을 보고 나는 놀랐다. 왜냐하면 푸드 트레일러들이 아주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곳에 자리를 잡고, 복장도 잘 차려입고, 장사 시작! 가격은 타코야끼 8개 3,000원 셔벗 스몰 2,500원, 미디움 4,000원, 라지 5,000원, 솜사탕 대왕 꽃무늬 솜사탕 5,000원 오리 솜사탕 4,000원, 기본 2,500원 이렇게 준비를 하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첫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손님들이 오지 않아 0.1초의 시선을 잡기 위해 밖에다가 솜사탕을 걸고, 타코야끼도 한 판을 구웠다. 냄새와 화려한 솜사탕으로 0.1초 시선 잡기 성공! 드디어 첫 손님이 왔다. 어느새 내 트럭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어 당황하였다. 하지만 곧 침착하게 성공! 쉴 새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타코야끼 반죽이 바닥났고, 셔벗도 품절! 오후 9시 솜사탕까지 품절 첫 날부터 대박 날 줄은 몰랐다. 총 수익 백 오십 만원! 홀가분한 마음으로 첫 장사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도엽이와 현빈이 둘 다 와있었고, 저녁을 도엽이 떡볶이로 채우고, 현빈이가 나와 유튜브 찍자고 해서 같이 2VS2 게임을 하였다. 이렇게 마치고, 밤 11시에 취침! 나의 푸드트럭 운행 시간은 평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9시 까지이고, 주말에는 오후 10시 까지 이다. 처음 1주일은 장사가 잘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사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이 쌓이다 보니 나는 병이 들어 한 동안 장사를 하지 못하였다. 장사를 시작하기 전 날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장사가 안 되면 어떡하지? 잘 될까? 다음 날 나는 최대한 웃고, 손님들 특성에 잘 맞추어서 판매를 하였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하루 400만원~500만원까지 벌게 되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되자 나는 아~ 이렇게 행복하구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 꿈은 레스토랑을 차리는 것인데 지금이 행복하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나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했지? 한 거라고는 푸드트럭 밖에 없잖아! 이래서는 나의 꿈을 제대로 펼치기 어렵겠다고 생각해 푸드트럭 장사를 접고, 한 호텔 레스토랑에 취직을 했다. 나는 설거지와 온 잡일을 하면서 셰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좋았던 점은 경희대 나온 나의 친한 선배님도 이 레스토랑에 취직을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일 없는 휴일 날 아침을 하고, 쉬고 있는데 어떤 모르는 번호에 전화가 왔다. (딸깍) 여보세요? 형 나 성공했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형 나 준혁이! 박준혁!........!!! 순간 옛 기억이 났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준혁이를 만나고 우리의 전번을 교환했던 것! 우리의 꿈은 요리사! 준혁이가 분식집을 차린 것이다. 내가 지금 29세니까 준혁이는 26살에 분식집을 차렸다. 나는 침착하게 주소를 묻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낯익은 풍경... 이곳은 나의 고향 노량진이다. 얼마 만에 와보는지... 준혁이네 분식집 앞에 서니 간판 이름이 ‘심 가네분식’이었다.(ㅋㅋ)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었고, 정리도 깔끔히 되어있다. 일을 하고 있는 준혁이를 보았다. 만나자마자 나는 가게 이름을 왜 내 이름으로 했냐고 물었더니 나에게 가장 잘 대해주고, 같은 꿈이니까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일단 나는 치즈 라볶이 1인분 순대 1인분, 튀김은 포장으로 주문했다. 맛을 보니 나의 추억의 떡볶이였다. 순대도 맛있고 튀김은 집에가서 먹기로 했다. 약속한데로 50%할인 해준다 했지만 그냥 다 냈고, 나도 준혁이를 위해 스테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준혁이도 돈을 내고, 결국 셈셈... 우리끼리 주소를 교환하고, 나중에 가게 많이 올 테니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보니 현빈이가 보이지를 않았다. 도엽이에게 물어보니 현빈이가 부동산에 갔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현빈이가 돌아오자 왜 부동산에 갔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현빈이는 학원을 차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학원을 너 혼자 하냐고 물어봤더니 처음에는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빈이와 오랜만에 유튜브를 찍었다.
어느덧 30살이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휴일이라 현빈이랑 도엽이와 함께 sbs 방송국으로 갔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인형뽑기를 하는데 sbs 건물에 대형 인형뽑기 기계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 좋을 때 한번 이렇게 놀러왔다. 동전 교환을 한 후 대형 인형뽑기를 하는데 어디에선가 이쁘게 생긴 한 여자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아주 익숙한 얼굴을 띈 나의 영훈 초등학교 동창 *아*이 있었다. *아*도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안경을 벗자 단번에 알아냈다. 우리 둘은 점점 사이가 좋아지고, 나중에는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한 어느 날 우리는 한 카페에서 모이고, 내가 조심스레 결혼을 제안했다. *아*도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의사가 있었지만 이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여기는 결혼식장. 부모님과 나의 친구들, 도엽이와 현빈이도 일을 빠지고 결혼식을 축하하러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결혼식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리무진을 타고 나의 집으로 갔다. 도엽이와 현빈이는 대중교통...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집을 이사하자고 제안했다. 너희도 곧 결혼하고, 새로운 경험이니까.~ 도엽이와 현빈이 둘 다 찬성을 하였다. 드디어 집을 이사했다. 큰방 3개, 작은방 1개, 화장실 3개(큰 방마다 1개씩) 작은 방은 여전히 유튜브 크리에이터실, 큰방 중에서는 내가 제일 큰방을 가졌다. 이제 부모님께서 나에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모았던 돈을 주셨다. 그리고 금반지.~ 이제 나의 부인과 신혼여행을 떠난다.
여기는 인천 국제공항. 나는 나의 부인과 신혼여행을 떠나러 준비하고 있다. 비행기를 탑승하고 로마로 갔다. 이때부터 로마 풀코스 투어 시작! 로마 곳곳을 탐방하고, 콜로세움까지 탐방 완료! 어느덧 로마에서만 일주일을 지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해 보니 현빈이만 있었고 현빈이는 검은 양복을 입었다. 어디 나갈 것 같아서 현빈이에게 왜 양복을 입고 있냐 물어봤다. 현빈이가 도엽이 결혼식이라고 했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양복을 입고, 나의 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갔다. 중학교 때는 결혼 안하겠다고 한 도엽이인데... 결혼식장에 가니 오늘만큼은 도엽이가 멋있게 느껴졌다. 가장 놀랐던 점은 도엽이와 결혼한 사람이 양서고 후배였다는 사실!!! 그래도 도엽이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날 나는 도엽이의 행복한 얼굴을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32살 드디어 돈을 벌고 벌어서 작은 레스토랑을 하나 차리게 되었다. 이 때 나의 부인은 초등학교 때 꿈인 아나운서가 되어 있었다. 드디어 나의 꿈에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꿈을 이루긴 했어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식 허가를 받고 메뉴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 길목에서 단단히 막혀 버렸다. 메뉴를 무엇을 준비해야 되지? 내가 차리고 싶은 메뉴는 스테이크와 회전초밥이기도 하지만 그 둘은 너무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할 수도 없고,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나는 원래 선택을 잘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한참을 고민한 결과 나는 스테이크 집을 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스테이크가 더 만들기 쉽고, 고기는 잘 상하지 않지만, 생선은 잘 상하기 때문이다. 손님에게 최고급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싶어서 가격을 15,000원으로 하였다. 이제 고기를 구입할 차례다. 너무 좋은 것을 고르면 양이 적게 되니까 B등급으로 정하고, 양은 푸짐하게! 야채와 감자, 단 호박으로 샐러드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드디어 장사 첫 날! 도엽이와 가게로 출발했다. 우리 둘 다 요리사이기 때문에 자동 결재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도엽이는 셀러드를, 나는 스테이크를 구우며 몸을 풀었는데 첫 손님이 들어왔다. 첫 손님이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고 주문을 하였다. 나는 양주에 발효한 고기를 불판에 굽고, 고기를 잘라 다시 한 번 볶았다. 그리고 스스를 뿌리고, 샐러드까지 플레이팅 완료! 손님에게 건냈다. 손님은 먹더니 맛있다고 하고 싹싹 비웠다. 뒤이어 15명쯤 되는 단체 손님이 왔다. 다 주문을 하고 도엽이도 나를 도와 10분정도 걸려서 완성을 하였다. 여기서 돌발 상황이 일어났다. 한 손님이 들고 가다가 스테이크를 엎었다. 나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다시 만들고, 손님에게 드렸더니 손님이 미안해서 만 오천원을 더 주었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 총 번 돈이 2백만원 정도였다. 이렇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33살 드디어 첫 아이를 낳았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남자 사내아이가 나타났고, 이름을 비(裨)로 지었다. 이때 아내의 태몽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아내의 품속으로 들어오고, 아내의 방 안에 불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꿈이었다. 아내는 이 꿈을 지켜왔고, 아기를 낳자 비로소 나에게 얘기를 한 것이다. 비는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고생한 아내를 위해 나와 친척들이 편지와 돈을 주었다.
꾸준히 꾸준히 일을 하며 돈을 번 결과 현재 38살까지 벌어온 돈 중 순 이익이 30억이 나왔다. 도엽이와 나눠 가져 15억을 가지게 되었다. 도엽이는 15억으로 부모님께 5억을 드리고, 10억으로 자동차와 캠핑 트레일러를 샀다. 그리고 도엽이는 일주일 동안 아내와 캠핑을 한다고 하면서 집을 비웠다. 으아아아아!! 레스토랑 누가 지켜!!!! 나 혼자 힘든데에에... 방법은 하나! 현빈아 도와줘! 오늘만 레스토랑 하는 것 좀 도와조라!!! 마침 오는 과외가 없는 현빈이는 흔쾌히 허락했다. 현빈이가 도와준 덕분인지 오늘 레스토랑이 빠르게 순환 됐다. 하지만 그 다음 날부터 나 혼자 일을 하게 되었고, 그 때문인지 피로가 두 배가 몰려왔다. 결국 임시 휴업을 하고, 도엽이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도엽이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아내가 임신을 했다. 9개월 뒤 여자아이가 태어났고, 이름을 해복이라고 지었다. 해복... 4.5키로나 돼서 왠지 부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잘 키우도록 노력해야겠다.
43살 드디어 나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동안 돈을 계속 모아 큰 레스토랑을 차린 것이다. 레스토랑을 차렸으니 이제 매뉴를 준비! 어떤 것을 해야 할까? 조금 다양한 매뉴를 준비를 해보겠다. 저번에는 간단한 스테이크로 했으니 이번에는 한식, 양식, 중식, 일식요리 레스토랑을 해보겠다. 가게는 여러 전문 셰프들이 오픈 부엌식으로 요리를 하고, 주방은 항상 청결하게, 총 2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2층은 부엌으로 통해지는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볼 수도 있고, 자리는 항상 고급스럽게.~ 종업원들과 전문 셰프들도 취직 시켰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레스토랑 이름은 (四啓晣) 내가 회장, 도엽이가 사장을 하기로 했다. 가게 구조는 중앙 입구에 들어서면 주문 선택하는 기계가 있으면서 음식에 대한 설명, 손님들이 해주신 맛 평가도 적혀있다. 손님들이 최대한 고르기 쉽게 그림으로 표시했다. 계산과 함께 주문 버튼을 누르면 셰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음식이 다 되면 종업원이 가져다 주는 형식, 우리 레스토랑에 오신 손님들에게 음료수 서비스를 드리는 것이 우리 레스토랑의 장점이다. 이 지역에 그렇게 유명한 레스토랑이 없기 때문에 이곳이 나의 꿈의 정착지가 되었다. 장사시작의 의미로 모두들 기대에 부풀어 오르고, 시작하였다. 오픈하려고 가게 밖으로 나왔는데 나는 너무 놀랐다. 손님들이 벌써부터 줄을 서 있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고, 쉴틈없이 장사를 하였다. 이러다 첫날부터 노이로제 걸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점심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졌지만, 저녁 시간이 되자 벌써부터 손님들이 몰려오고 좌충우돌 첫 날이 끝났다. 이 결과 오늘 번 돈이 무려 700만원! 이 정도면 잘 되었지만, 나의 목표는 하루 2000만원 까지 가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이제 나는 하루하루가 빠듯했고, 매주 목요일만 쉬었다. 그 결과 크게 성공해서 블로그에 올려지고, 더더욱 유명해졌다.
45살 중학교 동창회에 갔는데, 나는 레스토랑으로 성공해서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키 작은 나의 키가 그때보다 많이 자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거인이 되었다는 느낌이 되었다. 이정훈의 키는 아직도 중학교 키였다. 중학교 때 자기가 키가 크다고 자랑했었는데... 너무 웃겼다. 친구도 없고 자신감이 없어 자신이 한 실수를 인정하지 못해 왕따를 당하던 정훈이였는데 정훈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영이는 아직도 상냥하고 예뻤다. 다영이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솔직히 공부에 관심을 잘 못 갖는 다영이가 의사가 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는데 다영이는 정말 유명한 피부과 전문의가 되어있었다. 수빈이는 속눈썹이 아직도 길고, 대형 변리사 사무소의 소장이 되어 있었다. 사실 주아는 반드시 원하는 대로 될 줄 알았다. 원하던 대로 경찰이 되었는데, 자기 엄마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고 경찰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있었다.
내가 50살 가까이 될 쯤 한 외국인이 우리 레스토랑으로 찾아왔다. 나는 뭔가 대단한 분이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손님에게 서비스와 친절함을 약간씩 더해주고 손님이 나갈 때 인사까지 하며 보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손님이 와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왜 몰려오지? 어쨌든 좋았다. 이유는 1주일쯤 뒤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 식당이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 같았지만 진짜였다. 이 기쁨을 도엽이와 함께 누리게 되었고, 너무 크게 성공해서 기쁨의 눈물까지 흘렸다. 이 날부터 나는 더욱 즐겁게 출근을 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미슐랭 3스타를 받고서 나는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루 2000만원을 번 것이다. 이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왔다. 다행이도 건물을 지을 때 크게 지었기 때문에 가게를 확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난 사람이 찾아왔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 그리고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모자를 쓰고 오신 80대 남성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생각했다. 김진민 간사님이다. 캠프에 와서 내가 나중에 레스토랑을 차리면 할인해 드린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 분은 정말로 찾아주었고, 나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공짜로 음식을 드렸다. 너무 감사하다. 간사님께서 내일 정희성 간사님도 데려 오시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정희성 간사님과 김진민 간사님 두 분이 왔고, 두 분은 돈을 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결국 받고 음료수를 드렸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레스토랑은 더더욱 유명해지고 나의 부인도 아나운서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우리의 현제 총 자산은 무려 200억이 넘는다. 이 돈으로 나의 부모님과 부인의 부모님에게 25억씩 드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레스토랑은 계속 도엽이에게 맡겼다. 레스토랑이 문을 닫으면 손님들은 어떡하라구... 나는 나의 부인과 아이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2박 3일동안 다녀왔다. 그곳에서 소인국 테마파크, 인형박물관 등에 다녀오고, 귤 서리도 해보았지만 너무 썼다... 다시 돌아온 후에 나는 다시 레스토랑 운영 시작! 아직도 우리의 가게는 유명하지만 나는 더욱 더 힘들고, 셰프들과 종업원들도 힘들기 때문에 1주일 동안 휴업을 하게 되었다. 현빈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현빈이도 큰 규모의 학원을 설립하고, 선생님들도 구하였다. 그 결과 현빈이의 학원에 다니는 학생 수는 40명 가까이 되고 현빈이도 값진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진다. 현빈이도 새로 샀고, 도엽이도 아이를 낳아 집을 이사하게 되었다. 나도 집을 새로 짓고, 우리는 해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매주 목요일마다 우리의 아지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솔직히 현빈이는 명동으로 이사를 갔고, 나와 도엽이는 바로 옆집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쭉 만나가며 자신의 할 일들을 하고 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내가 80살 때 북한과 평화통일을 하게 되었다.
이 긴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아들과 딸 이야기를 하겠다. 나의 아들은 생각보다 공부벌레여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서울대를 다니게 되었다. 서울 의대를 졸업한 뒤 의사를 하고, 대통령 주치의까지 해보다가 경기도에 대형 병원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딸은 통일 연합당에 들어가서 제 34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딸이 북한의 주석 김성은을 만나 서로 화해를 하고, 통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나의 자서전을 마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