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영천 임고의 선원마을을 찾았다
역시나 고목이 마을 앞에서 반긴다 먼저 함계정사를 찾았다 선원 마을은 조선 인조 때 호수 정세아의 장손인 정호례가 입향해 세거한 영천의 대표적인 동족마을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선생의 현손인 정석달(1660~1720) 선생이 숙종 28년(1702)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정자 건립을 시도 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를 지은 안락재로 시작한다.
그후 정조3년(1779) 선생의 손자 일찬(1724~1797)공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 하였다.
함계정사를 처음 세운 함계(涵溪) 정석달(鄭碩撻,1660∼1720)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 본관은 오천(烏川)이며, 충무위대호군(忠武衛大護軍) 정시심(時諶)의 맏아들로 태어 났으며,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에게서 수학하였다
인품과 덕망이 뛰어나 병와 이형상, 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 밀암 이재, 병애 조선장 등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일생을 성리학에 몰두하여 학문을 탐구하여 실천한 도학자이다
그는 마을에 강학을 위한 정자를 지으려 했다.
함계(涵 溪) 정석달(鄭碩達,1660~1720)이 만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함계정사기(涵溪精舍記)"에 보면, 1702년 43세되던 때에 함계정의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안락재(安樂齋)"라는 소재(小齋)를 건축하였고, 그 후로도 수삼차에 걸쳐 역사를 시작하였으나 빈번히 우환질고(憂患疾苦)로 정지 되었다고 자술하고 있다
또한 "함계정사기(涵溪精舍記)"의 말미에 보면, 그가 말년에 또 한 번 공사를 시작한 듯 하나 역시 끝을 맺지 못하고 타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함계공의 손자인 죽비(竹扉) 정일찬(鄭一鑽,1724~1797)의 행장에 보면, 1779년(정조 3년)에 함계공 만년의 소망을 준유의(遵遺意)하여, 함계지상에 양심당(養心堂) 즉 함계정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던 할아버지(함계 정석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손자인 죽비공이 1779년에 건립한 것을 알수 있다.
오른쪽의 큰 은행나무 앞, 함계정사 좌측 위쪽에는 송원재가 위치한다. 송원재는 선원마을 입구에 있는 함계정사 위쪽에 있는 재실로, 숙종 때 통덕랑에 오른 정중보(鄭重簠)를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정사 뒷편으로 가니 넓은 언덕 벌판이 펼쳐지고 그 한 가운데 소나무숲이 있어 가 보니 정중보의 묘지가 있다
봉분을 대단히 크게 조성해 놓았다
묘비는 이원조 찬 홍택주의 글씨로 되어있다 5대조 정세아 고조 정의번 증조 정호례로 보인다
홍택주 필법은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와 이홍장(李鴻章)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당시의 비판(碑版)은 홍택주의 손을 거친 것이 많았다.
묘지 인근 과수원이 많은 밭사이 농로를 산책하여 연정고택으로 돌아나왔다
이 지역은 높이 약 200m의 학산(鶴山)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산수가 너무 아름다워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하여 선원(仙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고면 선원마을. 마을의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이 흐르고, 북으로는 덕연리와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화북면과 접하고 있다.
이곳은 송원고택인것 같다
선원동의 남쪽 자호천 건너편 들판에 정(鄭), 김(金), 이(李) 삼씨(三氏)의 세 가구가 동네를 제일 먼저 형성했는데, 자연부락 명칭을 새각단이라 한다.
담 안쪽 토종닭들이 고택의 정취를 더한다
마을 뒷산 언덕이 고리모양으로 마을을 감고 있다고 하여 환고(還皐) 또는 대환(大還)이라 하는데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 ‘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 중에 속한다.
본래 영천군 환귀면의 지역으로서 선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환동을 병합하여 임고면에 편입되었다.
조상들 슬기가 굴뚝도 예사롭게 만들지 않았다 이곳은 교동고택인가?
조선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 입향한 정호례라는 선비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하여 선원이라 부른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으며 오천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
몇 해 전 태풍으로 일부분이 무너졌던 흙 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곳이 많고 동네 곳곳에 들어선 현대식 가옥들로 인해 옛 정취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지만 여전히 건재한 옛 고택들이 많아 그로 말미암아 무릉도원의 품격은 살아있다.
이곳은 국가민속문화재 107호인 연정고택(일명 정용준고택)이다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집은 1756년(영조 32)에 지었다고 전한다. 일심당(一心堂)은 그 때 붙여진 정침의 당호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곳간채 등이 직각으로 결합하여 □자집을 구성하였고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개울 옆의 연정(蓮亭)은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가에 뚝 떨어져 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고 대청이 4칸인데 안방의 뒤쪽에는 골방과 툇마루가 있고, 안방의 아래는 3칸 크기의 큰 부엌이 있다.
연정은 마당 밖을 굽어 흐르는 작은 계변에 있는데 건너편 급준한 언덕 위에 오래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조용히 소리 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계류는 부정형으로 크게 넓혀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의 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허물어져가는 대문과 연정으로 이어진 나무다리가 현대인의 각박함에 여유를 가지라는 충고를 하고 있어 더욱 운치있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네 개의 퇴기둥을 내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작은 계류를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준다. 이 집은 조선시대 향원(鄕園)유적으로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을 앞 쪽으로 나오니 또 다른 넓은 연못과 정사가 나타난다
이곳은 ‘동연정’이라는 정자인데, 조선 후기 학자 정백휴(鄭伯休)를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정백휴 손들은 일제강점기 박상진과 연계해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연꽃이 피는 여름에 특히 아름다운데 <그해 여름>이라는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했단다.
우리는 다시 함계정사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택과 현대식 집이 혼재된 사이 신식집 현관 측면 널어놓은 메주가 또 다른 시선을 갖게 한다
학파정은 고종 때 학자 학파 정치구가 19세기 말 그의 살림집 옆에 은거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정자 이름 학파란 학이 노니는 언덕이란 뜻이란다
학파 정치구는 조선후기부터 개항기까지 생존한 학자로 무분별한 서양 문물의 유입에 반대하고 민족주의를 주창했단다 그의 시문집으로 4권2책으로 된 학파유고가 남아있다
학파정 주변 산수가 너무 아름다워 선원이란 마을이름이 더욱 회자되었다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학파정 아래엔 도자기를 굽는 예술가 도곡 정점교 선생이 다완을 굽는 도곡요(송고헌고택)가 있어 현대인들이 도자기와 차의 아름다움과 매료에 빠지게 해준다
이렇게 고풍스럽고 기품이 넘치는 한옥마을을 탐방을 마치고 영원한 천국 동네 영천을 뒤로하며 다음 여정지 포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