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2. 향기 영란
갓난 아기를 보거나 새끼 고양이를 볼 때면, 별스러운 다정함이 없는 사람이라도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 혹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나는 어떤 걸 걱정하는 축이냐면, 아기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상대가 우호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상에서 좌우된다. 나는 인상이 좋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 아기를 요리조리 잘 웃기고 얼르는 재주가 없어서 아기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는 어느정도 접는 편이다. 주변에서 보는 개와 고양이들에게서도 어떤 호의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는, 서로 데면데면한 대면이 내겐 익숙한 그림이다.
앞 동의 친구와 오랜만에 산책 겸 운동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친구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 결심을 이루는데 내가 딸려 들어가 다녀오는 중이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는 50여 미터도 남지 않은, 굴다리 앞 붕어빵 노점가게가 있는 지점이었다. 아주 어리지는 않지만 어린 티가 역력한 고양이가 다부진 울음을 울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지나가겠지 하고 무심하게 봤는데, 이런 웬걸, 내 쪽으로 다가와 내 다리로 엉겨 붙어 부비적거리는 것이었다. 큰 고양이였다면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공포심에 간이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을의 허리 쯤을 지나고 있는 계절의 저녁 8시 반은 거의 한밤중으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낯선 존재가 표하는 과한 애정(?)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동물을 싫어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가까울 일도 없는 내게 발목으로, 옷으로 닿는 고양이의 이물감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 감정은 점차 얼마나 절박하면 그리 호의적일 리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그토록 부벼댈 수 있을까 하는 애처로움으로 바뀌어갔다. 그 때서야 나는 나무 옆자리에 다리를 쭈그리고 앉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양이에게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 감정이 이동하는 순간 그 고양이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얹혀지고야 말았다.
고양이는 같이 간 친구에게도 적극적으로 접근했는데(고양이에게 자신을 거두어줄 사람이 꼭 나일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친구는 고양이라면 기겁을 하는지라 굴다리 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아닌 밤중에 나는 길가에서 내 다리와 엉덩이 밑을 파고 드는 고양이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에게 부탁해서 편의점에서 고양이가 먹을만한 것을 사 오라고 했고, 금방 일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아서 친구는 집으로 갔다. 나는 야무치게 울어대는 고양이를 먹이고, 또 쓰다듬으며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여차하면 엄마 집에 갖다 놓을 요량이었다.
“아이고, 촌에 고양이들이 을마나 텃새가 센데, 상대가 안되는 앵구들은 다 물리죽는다. 노다지 밖에서 사는 도독고양이들이 호랭이보다 더 싸납다이가. 옆집 새끼고양이도 세 마리나 물리 죽었다. 아직 어리서 집 안에서 키와야 하는데, 나는 정 딜이기가 무섭다. 저번에 미야 잊아묵고 나서 어중간하게 또 키우기가 마음이 안 서서... 고마 아파트 밑에다가 갖다 놔라. 한번씩 사료 챙겨주고...... 테리비에 나오던데, 그 통영에 고양이 모아놓은 섬이 있더만은, 여어도 거어 갖다놓을 고양이가 천지다.”
내 선택지 안에는 집 안에서 키우는 것은 없었다. 내 책임감 여부를 떠나서 나는 개나 고양이가 집 안에서 가두어 길러지는 것이 탐탁치가 않다. 그것은 질색하고 싫어할 남편의 의견과는 별개였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또 넘기려는 심뽀는 또 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는 넓은 밭과 숨을 수 있는 풀과 나무들,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낯선 세계에 발딛고 적응해 갈 시간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만큼의 몫은 이 세상에 떨어진 생명이 감당해야 할 분량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나와 고양이는 2~30분을 앉아 있었는데, 흰 트럭이 옆에 와서 섰다. 외국인 노동자로 보였는데 그는 차를 주차시켜두고 어딘가를 갔다. 차가 와서 대는 걸 보고는 잠시 경계를 하다말고 트럭 밑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면서 여전히 곁을 맴돌았다. 먹을거리를 주어도 먹는 양이 많지 않았고, 먹을 것보다 관심과 애정을 더 바라는 것이 보였다. 손을 대어보니 우둘투둘한 머리뼈가 만져졌고, 자꾸 쓰다듬으니 머리를 치켜 올렸다. 좀 더 강한 접촉을 바라기 때문이었을까? 어쩌자고 이 여린 생명은 나에게 무방비로 이렇게 기댄단 말인가.
외국인 노동자가 다시 와서 운전석에 올랐다. 차에 시동을 거는 요란한 소리에 놀란 고양이가 내게서 떨어져 붕어빵 노점상 아래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잠시 떨어진 시간이 제법 이어졌다. 나는 사알짝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잠시 동안의 인연이었지만, 한 생명을 거두는 무게와 그 무게를 지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을 떨쳐내기 어려웠던 것은 어린 고양이가 자신을 맡겨버리는 그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그랬을지에 대한 사실은 궁금하지 않다.
고양이에게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야생의 시간에서도 짝을 찾고, 새끼를 낳고, 그 중에서 몇 마리를 잃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고양이와의 어느정도 거리를 둔 우정을 나누고 싶긴 하지만(내 방식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 시간이 지금은 아니다. 나는 고양이의 생에서 조연으로 등장하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지금 그것은 욕심일 뿐이다. 불가능한 시간에 나타난 그 어린 고양이로 인해 심란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