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아 27년 2 ] ; 중국 여행( 1994) 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로의 이주 (1996)
https://www.facebook.com/kimhyundong62/posts/3532248926834223 ( 사진)
어제 드론의 공격으로 비행기가 인천공항 주변을 40여분 돌다가, 김포로 다시 인천공항으로 옯겨 다니는 해프닝을 겪기는 했지만, 잘 도착하고, 지난 3월1일 러시아 입국때에 이어 한국에서도 2주간의 자가격리에 돌입 했습니다. 여러 동지들이 귀국을 환영하여 주어 힘이 납니다.
지금 부터 작성하는 글과 사진은 2020년 국정감사를 기해 2010년 좌우 연해주에서 한국의 동포 시민운동 단체들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2010년 당시의 한국의 외교부와 재외동포재단에 의해 심각한 훼손을 입었음을 상황으로 증명하기 위함이자, 앞으로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고 한반도와 러시아의 간의 민간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 일단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의존해 기록해 가겠지만 빠진 좋은 추억이 있으면 보태어 주기 바랍니다.
< 형 ! 중국이나 가봅시다>
1994년 당시 나는 강제징집으로 갔던 군 전역 이후 , 부천으로 직장을 잡고, 작은공장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활동을 하고 있었다. 소련의 해체등 세계의 변화 , 대통령 선거에서의 분역과 패배, 대기업 노조중심의 노동운동의 피로감으로 뭔가 새로운 모색의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 1994부천에서 같이 활동하던 후배 박종찬의 권유와 김태영의 100만원 무상대출로 난생 처음 40여일의 해외여행이자 중국 배낭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박종찬은 베이징에서 어학 연수 중 이었다. 그때 내나이 33살의 열혈 청년.
북경 인근으로 시작해서 내몽골 후하후토 초원과 다퉁, 광조우, 썬전과 홍콩 , 그리고 마지막은 연변과 백두산의 여정이었다 . 이 여행의 백미는 역시 백두산 이었으나 , 10월에 눈이 많이 와서 천지는 올라 가지 못하고, 영하5도 장백폭포 아래 물줄기에서 얼음을 깨고 바이주 한잔 하고 물에 뚸어 드는 걸로 감동을 대신했다. 무지 차거웠는데 뜨거웠다. 아직 그 느낌이 느껴진다
< 베이징 >
베이징 칭화대학 박후배 기숙사 방을 베이스캠프으로 사용 했는데, 기숙사에는 한국 유학생 뿐만 아니라 여러 유학생들이 잇엇고 북한 유학생들도 있었고 후배는 그들과 이미 꽤 친해있었다.
환영해 주는 한국 유학생들과의 신입 인사술을 거하게 하고 ,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냉면집으로 데려가더니 , 곧이어 이 북쪽 친구들이 들어왔다. 아마 김0대 유학생 친구들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냉면을 시켰는데, 이 친구들이 상위의 무슨 풀을 잔뜩 넣는다. 내눈을 보고 권유하길래 나도 따라서 넣고 한 젓가락 하는 순간 몰려온 향기와 속에서의 외침. 이름하여 샹차이. 이 친구들이 배를 잡고 웃으며 빨리 맥주로 입을 가시란다 건배 !! ㅎㅎ
아마, 유학생들 기숙사내에서 일본 유학생들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인데, 나이가 후배에 비해 댓살 어린 친구들이 ( 20대 중반 쯤) 박후배에게 " 형님 ! 명령만 내리시라우 확 그냥 까버릴테니까" 그때 중국에 있던 유학생들이 부러웠다. 지금도 많이 생각난다. 거침없이 대륙을 활보하면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나라 학생들과 교류하며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신기하기도 했고. 나도 조건이 된다면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이가 둘인 가장에 현장에서 떠날 수 없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길위에서 만난 동포>
연번은 광조우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짜 기차표를 사게 되었다. 부표( 기차안에서 표를 구매) 를 하고 38시간을 좌석없이 와야하는 시간이엇다. 거의 서서오거나 밤에는 화장실 입구 빈공간 바닥에 몸을 의지하며 2박3일을 버티는데, 승객들이 마지막 5시간 인가를 남기고는 거의 다 왔다고 내릴 준비를 한다. 우리 옆의 40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거의 만신창이 초죽음이 되었던 우리를 보고 우리말로 혹시 한국사람이냐 ? 무슨일이 있냐? 라고 묻더니 사정을 파악하고는 자리를 내어준다 맛이 안맞아 거의 굶던 우리에게 뭔가 먹을만한 것도 내어 주고..
그래서 마지막 몇시간 인가를 앉아서 왔다.
동포가 좋구나 !!
백두산 밑 이도백하에서 돈을 잃어 버려서 난감한 상황 이었다. 그냥 돌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할 상황에 깅위에 만난 웬 이도백하 우체국에 근무하는 조선족 여자분이 사정을 듣고는 그냥 돈을 내주었다. 그돈으로 장백폭포까지 백두산 여행을 잘 마쳤다. 물론 이후에 돈을 좀 보태서 보내 드렸지만 잊지못할 기억이 되어 버렸다
< 연변에서의 보름 >
심천과 광주를 통해 사회주의 중국의 놀라운 변화를 보고 , 내몽골 초원에서 대륙의 기운을 접하고 다퉁과 베이징에서 중국의 역사와 유적을 접했다. 좋은 신간들 이었다. 뭔가 답답한 마음이 풀리는거 같은 해방감 ! 하지만 이번 일정 마지막의 연변에서의 거의 보름간의 기간은 이후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30시간. 새벽에 연길에 내리니 배가 쓰리다. 이미 여행하면서 먹는 문제 때문에 이미 속이 많이 고생한 상황이었고, 이 기차 여행에서도 후배와 옆자리 조선족 동포와 백주로 이바구 풀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내린 상태였다. 심신이 기진 맥진인데 , 새벽 연길역에서는 " 여기는 연길역, 고향에 오셔서 환영한다" 는 우리말 안내와 여기저기서 토장국 냄새가 진동했다. 나가보니 00 숙박, 00 식당 다 우리말 간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 나중에 생각을 정리했는데, 그건 20세기의 발해였다.
반갑게 조선족 식당에서 토장국으로 허기를 채우고 후배 친척에게 소개 받은 한 조선족 어른 집으로 갔다. 거의 보름동안 그집에서 신세를 졌다. 매일 밤 신초향과 홍고량을 마시며 항일투쟁, 연변자치주, 3년 대재해, 문화 대혁명, 대한민국에 대한 궁금함, 북한 사정 등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묻고 들었다. 낮에는 그집 작은딸 연단의 안내로 두만강, 연변대학, 서시장, 용정, 일송정, 고구려, 발해, 공원, 박물관 등 연변을 구석을 흁고 다녔다.
도문 여행 때는 우리끼리 갔는데 , 도문 교육위 공산당 서기를 하면서 학교장을 맡고 계시던 후배의 중국어 과외 선생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 형님 집에서 1박2일 동안의 소개와 회포. 거침없던 성격의 채형님의 첫 일성은 ' 무슨일로 이구석까지 올라왔나? 니네 남조선 특무 (간첩) 아이야' 였다. 소위 홍위병 출신의 조선족 공산당 간부 였다. 이번에는 홍위병의 이야기를 또 밤새 마시고 듣고, 중국 공산당이 어떤 방식으로 술을 마시는지 이때 배웠다.
< 중국에서의 40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다른 우리에 대한 새로움과 충격과 감동 , 우물안 개구리라는 자각과 또 속았구나라는 81년 대학입학 때 보다 더 큰 충격. 핵심은 민족에 대한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느낌은 뜨겁다. 이때 부터 나에게 통일은 남북통일, 국토통일, 조국통일이 아니고 민족통일이었다. 나중에 그건 동북아코리안네트워크로 정리 된다 . 도저히 없었던 시간으로 할 수가 없다. 인생의 가징 귿은 동지인 아내와 상의하고 또 다른 우리 민족 공동체인 두만강위 연변으로의 이주를 꿈꾸기 시작했다.
1995년 서울에 유학와서 고생하던 허명철이라는 조선족 유학생 친구를 소개 받아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거의 영양실조로 쓰러지기 까지 하면서 공부하던 친구. 지식인 집안 이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고생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자식공부는 확실하게 시키던 집안의 차남. 지금은 연변대사회학과장인가 를 지낸다. 같이 지내면서 이주할 방안을 구체롸 시키고 , 주변을 설득하며 이주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주변 대부분은 대반대. 미쳤냐였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가 있었고 멈출수가 없다.
< 1996년 1월 16일 연길로 >
큰아이가 갓 9살, 작은 아이가 4살 . 우리 4식구는 손가방을 13개 인가로 나누어 메고, 들고 선양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며 엔지(연길)공항에 도착했다. 아마 영하 30도는 되는 날이었던 것 같다. 선양 공항에서 비행기를 환승 하는데 활주로를 뛰어야 한다. 눈은 흩 날리고, 눈앞에서 비행기가 지나가고, 시내버스 타듯 잡아탄 연길행 비행기는 플로펠러인데, 소리도 크지만 비행기안으로 구름이 들어온다. 큰 아이가 놀래서 며칠간 귀가 고생했던 것 같다. 하여간 연길에 도착하니 후배 박종찬과 연변대 교수로 부임한 허명철이 공항에서 기다린다.
드디어 연변이다. 만주다 !!!
이때 부터 1년간 평생에 느낄수 있는 가장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