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규화 시인 대표시
우울한 대롱 외 2편
김 규 화
우울한 대롱 넣은 주사
누군가 내 팔에 꽂아 준다
몸에 고루고루
술기운 퍼지듯 아득하여
공중에 높다랗게 뜨는 나,
이따금 불만의 최루가스를
몸 밖으로 터뜨리려고
知覺이 안개를 헤치고
잠깐씩 나타났다 숨는다
우울이 으깨진 머릿속으로
저 아래 가려진 땅의
회색 구름,
속으로 ‘똑’ 하며 떨어진
다 쓴 주사기 한 대
안개를 헤치고 박살이 난다
바람칼
새는 바람을 두 날개로 자른다
새의 날개가 클수록
새가 빨리 날을수록
바람이 잘 잘린다,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새는 바람칼을 두 날개에 달고
어른을 자르고 아이들을 무등태운다
밤하늘에는 바람칼에 잘린 별들이
수두룩하게 박혀서
수인囚人의 눈빛으로 반짝이고 있지만
누가 수인의 뒤통수를 볼 수 있을까
얼음처럼 차가운 별의 뒤통수를
폭풍우 몰아치는 언덕에는
언제나 초가집 한 채
밤새도록 어린 나를 잠재우고 있는데
벤치
공원의 벤치가 하늘을 보고 심심하다
추워서 코를 싸매는 산보객들이 지나가면
앉으세요, 길죽스름한 나무 벤치가
뒤뚱거리며 저들끼리 몸에 몸을 포개어
피라미드를 쌓다가 다시 모래성처럼 쓰러지다가
체육선생의 구령에 맞추어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등받침까지 대놓고 앉으세요,
낙엽이 시나브로 앉았다 가고
눈보라가 앉다가 어디로인지 사라진다
벤치는 누구든지 보고 앉으세요,
가을부터 헤맨 맨드라미 꽃씨도 가벼운 몸 잠시 앉고
아랫도리를 몽땅 내놓은 소나무 하나가
새파란 머리를 하늘에 들어 올리고
바람이 미는대로 한 발짝씩 다가온다
겨울에도 윗도리만 걸치고 지내던 세 살짜리 조카는
두 다리를 맞부비며 가난을 견뎠지
6.25가 나고 피난민의 수레바퀴가 퉁퉁 부어 굴렀지
한겨울에는 늘 벤치가 많아
故 김규화(1940~2023) 전남 승주 출생. 《현대문학》에 『죽음의 序章』(1963), 『無爲』(1964), 『無心』(1966)으로 3회 추천 받아 등단. 시집 『이상한 기도』외. 시선집 『초록 징검다리』 외. 영시집 『Our Encounter』, 불어시집 『Notre Rencomtre』. 한국문학상 외 수상.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시문학》 발행인.
계획하는 길과 신의 의지
이상옥(시인)
베트남에서 김규화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새삼,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또 지구별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와서 한국이 아닌, 이곳 베트남에서 1년 이상 체류하게 될 줄이야 또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의지대로 사는 것 같아도 신의 의지가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신의 의지에 의해 운명적으로 엮어지는 사람의 인연, 그 중심에 문덕수 선생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국 베트남에서 생각해 본다. 사람은 각자의 인연의 끈에 이끌려 시공을 넘어, 때로는 한 생도 넘어 그리움을 찾아 헤매는 짐승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목장의 꿈을 꾸고 있었다. 푸른 초원 위에 말을 타고 소떼를 이끌고 다니는 목부가 되고자 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목장주가 되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지극히 낭만적인 꿈이었다. 어쩌면 그게 시인의 꿈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아무 세상 물정도 모르고 멋대로 판단하고 생각했다. 아무 규제도 없이 지금의 경상국립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에 입학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전공을 바꿔 목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굳이 농대를 나왔다는 것을 밝힐 필요도 이유도 없으므로 삭제된 이력 하나가 대학 학력이 됐다. 막상 농대 공부를 해보니,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낭만적인 목장의 꿈과는 거리가 멀고, 생화학 같은 잘 맞지 않는 학과목을 배우니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내게는 적응이 힘들었다.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학사경고도 받았던 것 같다. 학점도 제때 따지 못해 한 학기를 더해서 가을학기 졸업을 했다. 그래도 대학 졸업장이 있다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그 졸업장으로 82년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 전공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목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었지 신의 의지는 따로 있었다. 신은 사람의 의지를 넘어 때로 그 길을 180도로 바꾸어 버린다.
칼뱅의 예정론은 때로 유효하다. 칼뱅은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이 목적들 중의 어느 한 쪽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칼뱅의 이 같은 예정론은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스코투스, 위클리프, 루터, 부처 등의 예정론을 종합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정론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로 작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영벌을 받기로 작정됐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공로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오로지 신의 뜻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예정된 것이라니 더욱 그렇다. 예정론처럼 생이라는 것은 원래 아포리아다. 도대체 왜 지구별에 던져진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도 분단된 대한민국의 남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게 됐는지 모른다. 아포리아는 철학적 논제이다. 사물에 대해 명쾌한 해결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난관에 빠진 상태가 아포리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포리아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명제와는 상관 없이도 생의 실존에 처한 인간은 아포리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신의 의지를 끌어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홍익대 교육대학원에서 1982년 문덕수 선생과의 첫 만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20년에 문덕수 선생이 별세하셨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1989년 월간 ‘시문학’지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때 심사위원이 이원섭 선생과 문덕수 선생이었다. 당시 시인이라는 이름이 정신적 반지처럼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그 이름에 혹해서 시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철성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교무실로 한 통의 전보가 왔었다. 그것은 시문학 우수작품상 당선이라는 통보였다. 시문학지에 수십 편씩 계속 투고했는데, 마침내 당선 통보가 왔던 것이다. 목부가 꿈이었던 내가 시인이 된 것이다. 89년에 등단을 하고, 시를 더 심도 있게 공부해보자고 1990년에는 홍익대 대학원 현대문학 전공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 고성 철성고등학교 근무하며 무모하게 금요일 저녁 승용차로 김해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가서 하루 저녁을 자고 토요일 박사과정 수업을 받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초인적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신의 의지가 작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90년 2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3월에 진주교대에 출강을 했다. 한 학기 출강을 하고, 교장실에서 불러 갔더니 대학으로 가든지 아니면 학교에 충실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교사가 대학에 출강하는 일은 드물 때라서 학교에서 출강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수업하다가 대학 강단에서 자유롭게 수업하는 것이 적성이 맞는 것도 같고, 그것이 즐겁기도 해서 앞뒤 돌아볼 것도 없이 바로 사표를 제출하고 퇴직금으로 승용차를 바꿔 94년도 2학기부터 진주교대, 거제전문대를 필두로 창원대, 경남대, 심지어 강원도 태성전문대까지 시간강사로, 소위 보따리 장사를 1998년까지 했다. 99년 창신대에 문예창작과가 개설된 것도 신의 의지였던가. 교사를 사직하고 시간강사를 하며 계간 ‘경남문학’의 편집장도 하며 경남문단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창신대 문예창작과가 개설될 당시 경남지역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시인이 흔치 않았다. 운 좋게도 시론교수로 임용된 것은 문덕수 선생과의 인연에서 기인한 것임은 물론이다.
2000년에 창신대에 문덕수문학관을 개소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문덕수 선생이 홍익대를 정년 퇴임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갑상선암이 발병해서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문덕수 선생은 한국근현대문학 형성기의 주요 자료들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었다. 문덕수문학관은 장서가 2만여 권, 서화 260여 점, 도자기 수십여 점 등을 소장하고 있는 가운데 경매가 7천만 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던 백석의 시집 ‘사슴’을 비롯해 서정주의 ‘귀촉도’, 오장환의 ‘병든서울’, 정지용의 ‘백록담’,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설정식의 ‘종’ 등의 희귀본 500여 권과 역시 한국문학에 영향을 준 외국(일본, 영미 등) 원서도 다수가 있고 아울러 화가 박서보, 서예가 김충현 등의 값진 그림들도 있다.
문덕수 선생은 5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이고 한국모더니즘 시론을 정립한 학자며 국제펜클럽 회장 및 문예진흥원장을 지낸 문단지도자이다. 시인, 학자, 문단지도자로서 각각 세 분야에서 모두 일가를 이뤘다. 이는 한국문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문학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문덕수라는 문학적 브랜드 가치 또한 그만큼 빛나는 것이다.
2020년 별세한 문덕수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본격 조명하려는 일환으로 문덕수문학관 개관 23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는 문덕수문학관을 창신대학교 도서관 3층으로 이전한다. 현재의 문덕수문학관은 협소해서 불편한 점이 많다. 도서관 3층 통으로 이전해 문덕수문학관 컨퍼런스홀, 자료실, 희귀본실, 전시실, 사무실 등을 갖춰 올 10월에는 문덕수문학관 컨퍼런스홀에서 국제적인 행사도 계획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지난해 말에 김규화 선생님과 상의하는 차였는데, 김규화 선생님이 올 2월 12일 갑작스레 별세하신 것이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김규화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문덕수 선생이 생전에 사재를 출연하여 만든 사단법인 ‘심산문학진흥회’ 이사장을 김규화 선생님이 맡아서 문덕수 선생의 문학정신을 이어가고 후배 문인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는데, 그 자리는 아들인 문준동 교수가 맡게 됐다.
심산문학진흥회 이사회에서 처음으로 문준동 교수와 인사를 했다. 문덕수 선생과의 인연이 김규화 선생님에서 아드님인 신임 심산문학진흥회 이사장인 문준동 교수에게로까지 이어졌다. 문덕수문학관에 대해서 이제 문준동 교수와 의논하고 있다. 문덕수 김규화 두 분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문준동 교수와는 또 어떻게 꽃을 피우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문준동 교수를 본 첫인상은 매우 과묵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 같았다. 외모도 문덕수 김규화 두 분을 반반씩 닮았다. 문준동 교수와의 만남도 나의 의지를 넘어선 신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상옥 / 경남 고성 출생. 1989년 《시문학》 등단. 시집 『하늘 저울』 외. 편운문학상 외 수상. 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 베트남 메콩 대학교 교수.
부모님 회고록
문 준 동
가족이 부모님에 대해 기억을 잘하는 것은 맞지만, 그 기억에 대해 글을 쓰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조금은 아픈 기억도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시詩는 가족 이상의 전부와도 같아서, 오히려 시인들에게 부모님의 에피소드를 듣고 차곡차곡 추억을 쌓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신 저는 가벼운 일상을 기억해보려 합니다.
부모님께서 작고하신 뒤 당신들께서 가지셨던 기호, 취미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늦은 밤 책상에서 아버지의 여러 유품 중 가장 아끼는 만년필을 꺼내 컴퓨터 키보드를 옆으로 치우고 아무 글이나 써갑니다. 아버지의 작품은 모두 파란 잉크를 담은 만년필에서 나왔습니다. 수북이 쌓여 있던 빨간 200자 원고지는 언제부터 보기 힘들어졌는지 없는 게 아쉽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까지 사용하신 것 같은 ‘워터맨’ 만년필이 오른쪽으로 향할 때 항상 종이에 거칠게 걸리는 느낌이 났습니다. 만년필 동호인에게 의뢰하니 아버지가 펜을 왼쪽으로 45도 정도 회전시킨 상태에서 글을 쓰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회전시켜 잡고 쓰니, 특정 방향을 향할 때 거친 마찰이 없어졌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수리 없이 그대로 다시 가져왔습니다. 아버지도 아마 모르셨음 직한 버릇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건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종이와 대화하듯 사각거리는 소리와 느낌, 하나의 색으로 알록달록 시각화되어가는 글자들을 보며 무엇이 만들어지는 오감의 경험을 가지게 됩니다. 글이 쓰고 싶어집니다. 아버지도 이걸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만년필 대신 항상 값싼 볼펜을 쥐고, 모든 걸 수집하고 기록하셨습니다. 시상은 물론, 평범한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문헌 인용 기록(예를 들어 ‘자동문’은 편리함을 주었지만, 문을 여는 경험의 기회를 뺏어감), 신변잡기와 매일의 일상을 담은 노트가 수십 권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훌쩍 커버린 어린 손주의 글과 그림까지 사이사이 모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글을 읽고 쓰는 것 말고 조용한 취미가 하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집에는 전축과 먼지 쌓인 레코드판(LP)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누가 샀고 누가 듣는지도 모를 만큼 불용장비였고, 아마도 결혼하시기 전 여가를 보내는 취미였으나, 그 후로 잘 즐기시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번의 이사에도 전축은 없어졌으나 그 당시의 레코드판은 그대로 옮겨져 있어, 몇 년 전 간소한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역시 LP가 소리가 좋구나” 환하게 웃으시면서 음반과 음악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정말 박식하셨고,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이땐 젊으셨을 때 그 모습일 거로 생각합니다. 책상에는 좋아하시던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의 시디(CD)가 있었으나 거의 듣지 않으신 듯 깨끗했던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켓이 헤진 레코드판과 턴테이블은 이제 모두 저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비가 내리는 듯한 잡음도 들리고, 가끔 바늘이 음반의 소리골에서 튀기도 하지만 어머니와 평생 해온 음반이다 보니 이런 잡음도 아련하고 편안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 어떻게 잡음 없이 깨끗하고 굴곡 없을 수가 있겠어’ 저는 이렇게 일상 속에서 계신 듯 안 계신 듯 함께하는 기억에 대해 추적하며, 시간을 종종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문인께서 부모님에 대한 회고를 나누어 주십니다. 간단히 문자로, 지나가는 말씀으로 또 시집을 접어주시며. 이걸 가지고 부모님의 개인적인 일상뿐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삶도 알아가며, 다시 그분들의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이런 추모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건 유족으로서 큰 축복입니다. 《시와 경계》에 문인도 아닌 제가 소소한 일상의 회고 글을 남길 수 있는 것도 그러합니다. 부모님의 오랜 인생을 시詩를 매개로 공유해주신 분들에게 항상 감사드리며, 잡지에 실린 글들을 꼼꼼히 마음으로 읽고 공감하며 새기겠습니다.
문준동 국립공주대학교수. 응급의학전문의. 심산문학진흥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