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부산(2)-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 여름 한나절 해운대는 뜨겁다. 젋은 연인이 품어대는 열기로 가득하다. 그 뜨거운 여름이 가고 남은 빈자리는 겨울 바다로 가득하다. 해운대는 부산 사람이라면 한번쯤 오간다. 버스표 두 장이면 족하다. 소주 한 병에다 새우깡 한 봉지면 시원한 바다 냄새와 툭 터진 동해를 보는 자체만 해도 근심은 저만치 간다. 젊은 시절 해운대는 부산 사람에게 근심을 풀어주는 바다이다.
해운대를 오고 간 숱한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사연은 여기 남아 전해진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조선호텔 가까이 이 사연을 담은 시비가 있다. 국민가수 조용필이 부른 국민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이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운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 다음은 “해운대 엘레지”이다. 가수 손인호가 불렀는데 『동백 아가씨』 이미자가 불러 인기를 더 많이 받은 노래이다. 노래말이 끝내 준다. 해운대에서 사랑의 맹세를 하고 해운대에서 이별한 연인이다. 십팔번으로 배울려고 한다. 폼 잡고 열심히 부르는데 『그때~그시절』 여기서 잘 올라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은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내가 운다"
동백섬 동백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선호텔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해운대를 구경한 다음 온천을 하고 며칠 묵는다. 조선호텔은 해운대 바다를 감상하며 아침 구름이 건너 달맞이고개로 슬금슬금 올라가는 기가 막힌 장관을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딱 버티고 있다. 무슨 연수회니 발표회니 하면서 오늘도 묵객이 한바탕 온 것 같구나.
조선변호사 시험이 아마 1947년도에 처음 치러진 것 같다〉
〈동백섬의 동백꽃〉 동백섬에 들어간다. 섬 지명은 동백섬인데 퇴적된 모래로 지금은 섬이 아니다. 인간이 이 섬에 들어오기 전에 동백이 지천으로 있었다. 동백꽃은 겨울에 더욱 새빨간 꽃으로 다가온다. 화려하기는 커녕 경상도 머스마 처럼 무뚝뚝하게 피었다가 동학 농민이 황토 마루에서 일본군의 총에 떨어지듯 뚝 떨어진다. 가수 송창식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꽃”이라고 한다. 절집 주위에 동백을 많이 심는다. 동백잎은 불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동백기름을 참빗으로 머리에 바르면 가르마가 잘 타진다. 고창의 선운사 동백은 정말 지천으로 핀다.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 서정주는 전북 고창사람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바로 노래와 시가 된다. 내가 보기에 윤선도 이래로 서정주가 우리말을 기가차게 표현한 최고의 시인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 동백섬의 최치원, 누리마루 동백섬을 한바퀴 도는데 삼십분 남짓 걸린다. 자주 가다보니 우리집 아이는 따라가지 않는다. 잔머리를 살짝 쓴다. APEC 회의장소인 누리마루에 로봇이 있다고 꼬드긴다. 아! 사람은 외로운 동물...
해운대 백사장이 여름날 뜨거운 태양 아래 젋은 연인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스무살 즈음 여름이라면 동백섬은 얇은 스카프를 두른 초로의 부인이 친구와 함께 잔잔한 이야기를 나누는 늦가을이다. 젊은 열기로 가득한 스무살의 해운대 백사장과 달리 동백섬은 마흔을 넘긴 최치원이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고 외로이 방랑한 우수 깊은 가을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 육두품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12살 때 당에 유학간다. 18살 어린 나이로 당의 빈공과에 수석 합격한다. 토벌군의 종사관으로 따라가 『토황소격문』이란 천하의 명문으로 반란군 대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앞날이 보장된 최치원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가 고향을 그리워 적은 시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외운다. 시험에 나오니까!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운 마음으로 읊조리니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 창 밖에 밤 깊도록 가을비 내리고 등불 앞에는 고향을 향한 마음만이 서성이네” 최치원 -가을 밤 비오는데- 최치원은 29세에 고향으로 귀국한다. 조국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이백년이 넘는다. 한 나라의 흥망은 이백년이 고비이며 위험하다. 긴장이 풀리고 빈부가 뚜렷해진다. 안으로 썩기 시작한다. 조선도 개국 이백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엉망진창의 진흙탕이다. 음주가무에 주지육림의 잔치가 경주 남산가 포석정에서 진골 귀족에게 일상의 일이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나라제도를 바꾸자는『시무10조』를 건의한다. 실현되지 않는다. 부패한 진골 그들의 잔치에 최치원은 환멸을 느끼며 속세를 떠난다. 부산의 해운대, 김해의 청룡대, 양산의 임영대, 마산의 월영대를 거쳐 지리산으로 가야산으로 들어가 도인이 되었는지 신선이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동백섬 정상에 그를 기리는 시비만 남아 있다.
(동백섬 누리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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