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은 점심밥을 챙겨먹을 여유가 없는 날이다. 유독 계획된 일정들이 빈틈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살고있는 실버타운에서 아침 스트레칭 시간을 마치면 라인댄스가 이어진다. 10시 50분에 댄스까지 마치면 11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하므로 운동복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땀에 흠뻑 젖은 채 현관문을 나선다. 11시 반에 시작하는 영어 클래스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래서 목요일이면 영어교재 가방과 댄스화 신주머니를 미리 챙겨 스트레칭 시작 5분 전에 방에서 내려간다. 이번 목요일에도 여전히 이 것 저 것 꼼꼼히 준비해 두었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엄마들과 갓 퇴직한 50대 남자 회원들 그리고 70을 넘긴 노장파는 나를 포함하여 남자 둘 여자 둘, 연령대가 다양하다.
쉬는 시간 없는 90분 동안의 영어로 말하기 놀이는 늘 즐겁다. 예고된 주제에 따라 토론하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이 발표되고 각자의 생각을 보태어 말을 이어나간다..유능한 선생님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각자의 수준에 맞게 발표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열명 내외의 학생들은 하나의 대가족처럼 어울리며 웃음꽃을 피운다. 끝나면 아쉬워하고 상기된 얼굴로 일어서 나가느라 소지품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오늘도 73세인 K님이 의자에 웃옷을 걸쳐둔 채 나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 나가던 내가 그를 불러 세웠다. 멋적은 표정으로 되돌아와 옷을 들고가는 그에게 " 한 번에 나가면 70이 아니죠."하며 쑥스러움을 지워주었다. 그도 맞장구친다. "맞아요. 휴대폰도 잘 놓고 다녀요."
그 말에 동조하며 웃을 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내 휴대폰이 책상 설합에서 잠자고 있다는 걸. 이웃 마을 문화센터에 라인댄스를 하러 10분 동안 걸어가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흥겹게 몸을 흔들어대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댄스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니 교통카드가 들어있는 휴대폰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제서야 영어교실 책상 설합에 놔두고 온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이 지어졌다. 제 물건도 못 챙기고 남의 옷을 챙겨준 내가 뭐 묻은 개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가까지는 애교에 불과했다. 터덜터덜 영어교실까지 다시 걸어가 휴대폰이 예상대로 책상 밑에 있음을 발견했을 때는 그래도 아직 치매는 아닌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곳을 즉시 기억해낸 자신이 기특했으므로.
정말 큰 문제는 집에 돌아온 다음에서야 감지되었다. 웬일인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원인을 더듬다가 책가방이 따라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머나, 책가방! 어디에 두고 왔지?' 혹시 휴대폰을 찾으러 가서 책상에 가방을 놓아두고 휴대폰만 들고 왔을까? 아냐 아냐,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무거운 가방이 내 손목에 걸려 있었어. 다른 한 손에는 계속 신주머니가 들려있었고. 그렇다면 버스에?' 맞다. 버스를 타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물건 값을 결재하느라 가방을 옆구리에 내려놓았지. 타고 온 버스는 03번 마을버스였어. 역 추적을 하며 곧바로 인터넷에 해당 버스 사무실을 검색하였다.
명기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는다. 영어교재와 과제물, 그리고 수필집 한 권이 들어 있을 뿐 카드나 지갑등이 들어있지 않으니 가방을 찾지 못한다 해도 큰 손실은 없다고 자위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전히 받지 않는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어쩌지?
결국 다시 집을 나서 03번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종점에 가면 사무실이 있을 것이고 분실물을 맡아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한 거다. 신호 대기 중에 기사에게 다가가 종점에 빨리 가려면 여기서 타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기사가 잠시 후에 종점에 가려는 까닭을 묻는다. 부끄럽지만 사실대로 밝히니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혹시 이 가방이 맞느냐며 사진을 보여준다. 분명 내 가방이다. 너무 반가워 " 네 맞아요, 그거예요."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기사가 설명한다.
" 30분쯤 전에 이 문자가 떴어요. 분실물이니 찾는 사람 있거든 알려주라고."
아, 세상에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 있다니......
대여섯 정거장을 지나 숲 속 빈터에 도착하니 이곳이 종점이라며 내리란다. 두 대의 빈 버스가 서 있기는 하나 사무실도 없는 벤치와 아이스박스 한개가 놓여있다. 키크고 잘 생긴 청년 한 명이 반갑게 웃으며 기사를 맞이한다. 고무밴드를 어깨에 두르고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데려간 기사는 아이스박스를 열더니 그 속에서 가방을 꺼내어 나에게 건넨다. 감동이란 게 이런 느낌이리라. 정말 고마운 일이다. 10분 뒤에 출발하는 차를 타고 나가라며 친절하게 웃어주는 기사에게 나는 연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칠칠맞게 물건을 두고내린 정신머리를 비아냥대며 농담 한마디 쯤 던질 수도 있으련만 두 사람 다 담담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고 받을 뿐 거친 말투 한마디도 없었다. 운전기사들은 직업상 대체로 드센 성격의 소유자일 거라는 나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청년 기사가 출발한다며 나에게 손짓한다. 그는 사근사근 자신들의 일상을 털어놓으며 하루 11시간 일해야 하는 고단함과 그에 따른 신체적 위해를 말하면서도 표정은 밝았다. 함께 일하는 기사가 일곱명이라는 것, 안경낀 아저씨가 가방을 챙겨왔다는 것 등, 늘어난 승객들로 가려져 나와 대화가 단절된 이후에도 그는 기사의 임무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버스에 오르는 승객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방을 맡아준 분에게 감사를 전해달라 부탁하고 버스에서 내려 집에 왔다.
기쁘다. 오늘 내가 저지른 망각증 환자 역할은 조금 쑥스러웠지만 무사히 원위치로 돌아온 가방에 기쁨이 따라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주 미미한데 반하여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고맙고 자랑스러워졌다. 거리에 나란히 정렬해 있는 자전거들을 보며 외국인들이 진기한 풍경이라 감탄한단다. 우리의 시민의식 수준이 어느새 세계적 자랑거리로 떠올랐음에 자부심을 느낀다. 오늘을 살맛나게 해준 강남 03버스 기사님께 감사 편지를 써서 음료수 한 박스라도 사들고 한번 더 종점행을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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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쓴 03 버스 기사님,
오늘(목요일) 오후 두시 반쯤 기사님께서 운전하신 버스에 탔던 사람입니다. 아들이 선물해 준 가방을 자리에 놓고 내려 잃어버렸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소지품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노인네의 정신없음을 비웃기는 커녕 오롯이 제 손에 돌아오도록 도와주시어 너무고맙고 감동스럽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남의 물건에 탐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도 믿게 되었습니다. 주인 잃은 가방을 챙겨 맡아주시고 동료기사들에게 알려 주인에게 돌아가게 해주신 그 마음에 감읍,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일하시는 기사님들도 모두 착한 신사들이신가봐요.
근무 여건이 많이 힘드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도 내색없이 마을 주민들을 위하여 봉사해주시는 기사님들의 노고에 재삼 감사드립니다. 장시간 앉아 운전하시려니 허리와 어깨등, 근육통에 시달리신다고도 들었습니다. 마땅히 쉬실 시간도 공간도 없어보여 안타까웠습니다. 부디 근무 환경과 여건이 개선되고 건강도 살필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마음같아서는 일곱 기사님들과 밥 한 끼라도 함께 하고 싶지만 한 자리에 모일 시간이 없음을 알므로 그저 말씀으로나마 제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 지키시어 행복한 마음으로 일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03번 버스 애용자 김종숙 올림
첫댓글 그레서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 하는 거죠. 하지만 이런 아름다움들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그래서 세상이 살만한 거고요.
네, 그런가봅니다.
뉴스에서 가끔 선행 사례를 보아왔지만 제가 직접 겪고보니 정말 감동스러웠습니다.
그 차만 보아도 반가워요. 내일 찾아가려구요.
선생님, 읽어주시고 댓글 써주시어 감사합니다.
저도 선행 파급자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