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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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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스크랩 직접 간추려본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생
상록수 추천 0 조회 32 14.11.15 16: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직접 간추려본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생
들꽃 | 조회 464 |추천 0 |2010.03.07. 04:51 http://cafe.daum.net/Eliyahu/8IRE/41 

 

 

 

 

 

 

 

 

 

 

 

 

 

 

 

양화진의 선교사열전을 몇 년 전에  읽고서 간추린 언더우드선교사의 일생입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1859년 영국런던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3살에 미국으로 아버지따라 이민갔습니다.

뉴욕대학에서 4년간 학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뉴부런스윅 신학교를

다시 졸업하고 목사안수받은 후 인도선교에 뜻을 두고

일년간 의학과 인도어를 공부하였는데 조선선교를 권하는 음성을 따라

1884년 조선선교사로 임명받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도착

다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부두에 상륙하였습니다.

 

온지 사흘만에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며

일년만에 전도할만큼 능숙해졌다고 합니다.

1886년에는 고아원과 고아학교를 창설하였고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습니다.

1889년에는 한국어 문법책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고

성서번역에 평생 수고하시며 순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문자에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한국성교회조직에 거액의 원조를 받아왔으며

1897년 그리스도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였는데

정부에서도 상당한 부수를 사들여갈 정도였습니다.

찬송가 150장을 번역, 책으로 엮어 1893년 간행하였습니다.

  

그는 황해도 장연과 송천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고

평양,강계를 거쳐 압록강오지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1889년 3월에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말과 가마로 서울부터

의주까지 여행을 하였고 일본,중국,러시아,시베리아 철도와

인도양배로 유럽각지를 순방,미대륙과 예루살렘 성지순례도

전도여행으로 했습니다.

미,캐나다의 장로교를 끌어들여 모금해왔고 선교사연합회를

조직하여 연합하여 활동했으며 YMCA를 세웠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때 고종을 보살폈고 1905년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겼을 때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선교사였습니다.

1915년부터 종로YMCA 지하실에서 연세대학의 기틀을 잡으려할때

일본어로만 강의를 해야했기에 58세의 나이로 조선에 온지 31년만인

1916년 10월 12일 일본어를 배우다 지쳐서 휴양차 미국에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부인 홀튼은 남편의 장례비용으로 협성보통학교와 성경구락부를 세웠습니다.

 

릴리어스 홀튼은 1888년에 조선에 여자의사로서 광혜원에

제 2대 부인과 과장으로 파송되어왔습니다.

당시 서양인을 양도깨비라 부르며 아이들 눈과 염통을 빼서

약을 만든다며 폭동과 테러가 있었던 때라 총각인 언더우드가

홀튼양을 호위해주다가 연정이 생겨 1889년 명성황후의 전폭적

후원으로 동료선교사의 축하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ㅎ

 

결혼 일년만에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을 낳았는데

그 위로 7세의 김규식을 양자로 입양하여 16세에 미국으로 대학을

보내었고 졸업 후 김규식은 YMCA간사와 경신학교교사를 지내다

언더우드의 비서이자 새문안 초대장로가 되었습니다.

원한경은 17세에 프랑스,스위스 등에 유학갔고 미국뉴욕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여 선교사의 자격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와

경신,연희전문에서 영어교사로 일하였습니다.

재한국 외국인 학교에 교사로 온 에델벤 와고너와 교사로서

만나다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 일본

시모노셰키까지 추적하여 사랑을 고백하였답니다. ㅎ

 

홀튼도 1921년 세상을 떠나고 원한경은 연희의 교장을 지냈으나

41년에 일제탄압으로 사퇴하고 외국인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44년에는 목사안수를 받고 45년 해방으로

통역관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가 연희대학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1949년 원한경의 부인이 공산당에게 피살되자 양화진에 묻고

미국으로 갔다가 1950년 전쟁 중인 한국의 부산으로 왔습니다.

여러 마음의 상처로 심장병이 악화되었는데 2월 18일에는

아펜젤러 등 미국친구들 한국지인들과 친목회를 가지고

이튿날 19일에는 세 아들을 데리고 부산동래 뒷산 경치를 즐기고

다음날 20일 영영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아래 글은 다른 곳에서 일부 퍼왔습니다.

출처:인암브리취러스코

 

스크랜톤 부인은 이화학당을 열었다. 4인교가 와닿더니 김씨 부인이라는 젊은 부인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해서 받아주었다. 김씨 부인에 이어 가난하여 어머니가 데려다 별단이를 맡기자 그녀가 이화의 첫 학생이 되었다. 당시는 서양 도깨비가 학교를 운영한다고 했기 때문에 여학생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다 명성황후 민비가 1886년 ‘이화’라는 학교명을 내려주고, 기수까지 보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수는 왕이 극히 신임하는 신하에게만 보내는 것이다. 왕이 보낸 기수가 스크랜톤을 호위하며 따라다니자 부모들이 안심하고 학생들을 이화학당에 많이 보냈다. 당시 외서감변 김윤식 선생이 스크랜톤 부인이 학생을 얻지 못해 개교휴업상태인 딱한 상정과 당시 한국인들이 그들을 가혹할 정도로 기피하는 어려운 사정을 고종황제와 황후께 말씀드리자 고종은 맥클레이에게 교육과 의료 사업을 허락한 것을 기억하고 황후를 통해 호의를 베풀었다. 


이화학당은 주일학교와 성경공부를 함께 했는데 1888년 35명 가량 참석했다. 스크랜톤 부인은 한국어가 서툴러서 한국인 남자 선생이 설교했다. 교회를 짓고 1895년 6월에 남대문 부근에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황결예(황메래?), 하란사씨의 도움으로 구약을 공부하고, 세례문답을 공부하게 했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서울과 수원으로 전도여행을 했는데 이경숙 선생이 중심이 되었다. 이경숙 선생은 한국인 최초의 여성교사였다. 39세의 과부였는데 한국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화학당의 선생이 되었다.


이경숙 선생은 수원, 장지내, 도고개, 오천, 해매, 택선, 여주, 이천 등 꽤 넓은 지역에 가마를 타거나 도보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누비며 전도했다. 나중에 김활란 박사를 통해 이대생의 전도여행은 전통이 되었다. 이들은 전도하면서 생활 계몽까지 함께 했다. 당시는 음식과 방이 너무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크랜톤 부인은 이경숙 선생과 함께 김사라, 정한나 등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등 기초적인 훈련을 시켜 이들을 전도부인의 일을 하게 했다. 이화 출신 중에 황메래는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최초의 여성의학박사 박에스더가 탄생했다. 김활란 박사는 여성 박사 1호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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