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생몰년 |
자 |
호 |
본관 |
거주 |
비 고 |
강덕룡 (姜德龍) |
1560-1627 |
여중 (汝中) |
매촌 (梅村) |
진양 (晉陽) |
진주 (晉州) |
무과 창의 영남삼룡 장기현감 武科 倡義 嶺南三龍 長鬐縣監 |
권 도 (權 濤) |
1575-1644 |
정보 (淨甫) |
동계 (東溪) |
안동 (安東) |
단성 (丹城) |
한강․여헌문인 寒岡․旅軒門人 |
권 준 (權 濬) |
1578-1642 |
도보 (道甫) |
상암 (霜嵒) |
안동 (安東) |
단성 (丹城) |
한강 문인 寒岡 門人 |
문동도 (文東道) |
1646-1699 |
성원 (聖源) |
경암 (敬菴) |
남평 (南平) |
합천 (陜川) |
|
박 경 (朴 炅) |
1614-1643 |
회경 (晦卿) |
추간 (秋澗) |
고령 (高靈) |
합천 (陜川) |
무민당자 동계 문인 无悶堂子 桐溪 門人 |
박 만 (朴 曼) |
1610-1682 |
대경 (大卿) |
수졸재 (守拙齋) |
고령 (高靈) |
합천 (陜川) |
무민당자 동계 문인 无悶堂子 桐溪 門人 |
박 인 (朴 絪) |
1583-1640 |
백화 (伯和) |
무민당 (无悶堂) |
고령 (高靈) |
합천 (陜川) |
내암 문인 來庵 門人 |
배일장 (裵一長) |
1613-1677 |
자첨 (子詹) |
계헌 (戒軒) |
분성 (盆城) |
합천 (陜川) |
|
송정렴 (宋挺濂) |
1612-1684 |
계맹 (繼孟) |
존양재 (存養齋) |
은진 (恩津) |
삼가 (三嘉) |
동계․임곡 문인 桐溪․林谷 門人 |
심일삼 (沈日三) |
1615- ? |
성오 (省吾) |
월계 (月溪) |
청송 (靑松) |
합천 (陜川) |
무민당․동계 문인 无悶堂․桐溪 門人 |
여희필 (呂姬弼) |
1584-1645 |
가회 (嘉會) |
도암 (道巖) |
성산 (星山) |
금천 (金泉) |
감호자 鑑湖子 |
오 장 (吳 長) |
1565-1617 |
익승 (翼承) |
사호 (思湖) |
함양 (咸陽) |
산음 (山陰) |
덕계자 내암․한강 문인 德溪子 來庵․寒岡 門人 |
오익전 (吳益烇) |
1608-1670 |
자회 (子晦) |
|
고창 (高敞) |
고령 (高靈) |
여은질 여서오선기부 汝檼姪 女壻吳善基父 |
유 영 (柳 泳) |
1562-1639 |
언함 (彦涵) |
지지헌 (知止軒) |
진주 (晉州) |
합천 (陜川) |
오형제창의 五兄弟倡義 |
이경석 (李景奭) |
1595-1671 |
상보 (尙輔) |
백헌 (白軒) |
전주 (全州) |
광주 (廣州) |
사계 문인 관지영의정 沙溪 門人 官至領議政 |
이당규 (李堂揆) |
1625-1684 |
기중 (基仲) |
퇴촌 (退村) |
전주 (全州) |
경사 (京師) |
성구자 한사여서 聖求子 寒沙女壻 |
이민구 (李敏求) |
1589-1670 |
자시 (子時) |
동주 (東洲) |
전주 (全州) |
경사 (京師) |
성구제 聖求弟 |
이방익 (李邦益) |
1590-1638 |
사흥 (士興) |
|
전주 (全州) |
적성 (積城) |
지봉 문인 芝峯 門人 |
이성구 (李聖求) |
1584-1644 |
자이 (子異) |
분사 (分沙) |
전주 (全州) |
경사 (京師) |
지봉자 관지영의정 芝峯子 官至領議政 |
이언영 (李彦英) |
1568-1639 |
군현 (君顯) |
완석정 (浣石亭) |
벽진 (碧珍) |
성주 (星州) |
한강․내암 문인 寒岡․來庵 門人 |
이윤우 (李潤雨) |
1569-1634 |
무백 (茂伯) |
석담 (石潭) |
광주 (廣州) |
칠곡 (漆谷) |
한강 문인 寒岡 門人 |
이현룡 (李見龍) |
1580-1654 |
성백 (誠伯) |
죽포 (竹圃) |
성산 (星山) |
고령 (高靈) |
한강 문인 寒岡 門人 |
임여백 (林汝栢) |
1614-1685 |
필직 (必直) |
반구당 (反求堂) |
은진 (恩津) |
삼가 (三嘉) |
임곡자 林谷子 |
임진부 (林眞怤) |
1586-1657 |
낙옹 (樂翁) |
임곡 (林谷) |
은진 (恩津) |
삼가 (三嘉) |
입재․노파 문인 立齋․蘆坡 門人 |
장응일 (張應一) |
1599-1676 |
경숙 (經叔) |
청천당 (聽天堂) |
인동 (仁同) |
인동 (仁同) |
여헌계자 旅軒系子 |
정 온 (鄭 蘊) |
1569-1641 |
휘원 (輝遠) |
동계 (桐溪) |
초계 (草溪) |
안음 (安陰) |
내암․한강 문인 來庵․寒岡 門人 |
정 훤 (鄭 暄) |
1588-1647 |
언승 (彦昇) |
학포 (學圃) |
연일 (延日) |
합천 (陜川) |
내암 문인 來庵 門人 |
정동선 (鄭東善) |
1595- ? |
사원 (士元) |
|
장기 (長鬐) |
경사 (京師) |
|
정연서 (鄭延序) |
|
중절 (仲節) |
|
연일 (延日) |
진주 (晉州) |
학포자 學圃子 |
정태화 (鄭太和) |
1602-1673 |
유춘 (囿春) |
양파 (陽坡) |
동래 (東萊) |
|
관지영의정 官至領議政 |
조 경 (趙 絅) |
1586-1669 |
일장 (日章) |
용주 (龍洲) |
한양 (漢陽) |
거창 (居昌) |
월정․모계 문인 月汀․茅谿 門人 |
조 익 (趙 翼) |
1579-1655 |
비경 (飛卿) |
포저 (浦渚) |
풍양 (豊壤) |
|
월정․여헌 문인 月汀․旅軒 門人 |
조임도 (趙任道) |
1585-1664 |
덕용 (德勇) |
간송 (澗松) |
함안 (咸安) |
함안 (咸安) |
노파․여헌 문인 蘆坡․旅軒 門人 |
조정립 (曺挺立) |
1583-1660 |
이정 (以正) |
오계 (梧溪) |
창녕 (昌寧) |
합천 (陜川) |
내암 문인 來庵 門人 |
하 성 (河 惺) |
1571-1640 |
자경 (子敬) |
죽헌 (竹軒) |
진양 (晉陽) |
진주 (晉州) |
장수현감 진보계자 정연처남 長水縣監 晉寶系子 鄭沇妻男 |
하 진 (河 溍) |
1597-1658 |
진백 (晉伯) |
태계 (台溪) |
진양 (晉陽) |
진주 (晉州) |
부사 문인 浮査 門人 |
하홍도 (河弘度) |
1593-1666 |
중원 (重遠) |
겸재 (謙齋) |
진양 (晉陽) |
진주 (晉州) |
송정 문인 松亭 門人 |
한몽삼 (韓夢參) |
1589-1662 |
자변 (子變) |
조은 (釣隱) |
청주 (淸州) |
진주 (晉州) |
황암․여헌 문인 篁巖․旅軒 門人 |
황 뉴 (黃 紐) |
1578-1626 |
회보 (會甫) |
반간 (槃澗) |
장수 (長水) |
상주 (尙州) |
우복 문인 愚伏 門人 |
2.연보
구주 강대적 선생은 1594년(선조 27) 12월 17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678년(숙종 4) 3월 19일 향년 85세로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 임북마을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의 연보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 구주 강대적 선생 연보 >
| |||
연도 |
지간(연호) |
나이 |
내용 |
1594 |
갑오년(선조 27) 12월 17일 |
1세 |
●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에서 태어나다. 자가 학중(學仲)이고, 호는 구주(鷗洲)이다. 아버지는 당암 강익문이고, 어머니는 합천 이씨 봉사 득남의 딸이다. 형제는 셋인데, 맏형은 한사 강대수이고 막내아우는 경호 강대연이다. ● 구주 선생 집안은 대대로 진주에서 살다가 선생의 5대조 강승전(姜承顓:?~1490)공이 진주에서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로 이주하였고, 그 후 아버지 당암공이 합천 이씨와 결혼한 후 묘산면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고향인 임북리로 돌아와 이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
1600
|
경자년(선조 33) |
7세 |
● 7세에 학문을 시작, 할아버지 승지공 강세탁(承旨公 姜世倬:1546~1616)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까? 하니 승지공이 매우 기특히 여겨 장차 큰 인물임을 기약했다고 한다. |
1606 |
병오년(선조 39) |
13세 |
● 아버지 당암공이 증광시에 합격,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급제하다. |
1608 |
무신년(선조 41) |
15세 |
● 아버지 당암공이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다. |
1609 |
기유년(광해군 1) |
16세 |
● 아버지 당암공이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승진되다. |
1610 |
경술년(광해군 2) |
17세 |
● 맏형 한사 선생이 국자감의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다. ● 구주선생이 서울로 올라가 아버지 당암공을 뵙고 성균관에 머물면서 학업을 닦으니 명성과 칭찬이 자자했다. |
1612 |
임자년(광해군 4) |
19세 |
●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대로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경석(영의정), 조경(청백리), 정태화(영의정), 조익(영의정) 등 여러 유현들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 맏형 한사 선생이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다. |
1613 |
계축년(광해군 5) |
20세 |
● 선릉참봉(宣陵叅奉),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除授)되다. |
1614 |
갑인년(광해군 6) |
21세 |
● 광해난정(光海亂政)에 대옥사(大獄事)와 패륜행위(悖倫行爲)가 계속되자 아버지 당암공이 갑인봉사를 올린 동계 정온(鄭蘊)의 신구를 아뢰고 관직에서 물려나다.. 맏형 한사 선생역시 전은소(全恩蔬)를 올리고 정온(鄭蘊)을 구원하려다가 관직이 삭탈되다. ● 구주선생 또한 아버지와 형을 신구(伸救)하려다가 도리어 제원찰방(濟源察訪)으로 좌천되다.그러나 부임하지않고 관직을 그만 두다 |
1615 |
을묘년(광해군7)
|
22세 |
● 맏형 한사 선생이 회양(淮陽)으로 귀향가다. ● 아버지 당암공이 정온에 대한 구원의 소를 올리다가 무고(誣告)로 감옥가다. |
1616 |
병진년(광해군 8) |
23세 |
● 할아버지 승지(承旨)공이 별세하다. |
1617 |
정사년(광해군 9) |
24세 |
● (연대미상)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적은 맏형 한사 선생의 서신을 받다. |
1618 |
무오년(광해군 10) |
25세 |
● 강원도 회양에 유배된 맏형 한사 선생을 찾아갔으며, 이때 읊은 “맥추도회양"이란 시(詩)가 있다. |
1619 |
기미년(광해군 11) |
26세 |
● 묵헌 이분의 제문을 짓다. |
1623 |
계해년(인조 1) |
30세 |
● 인조반정에 의해 아버지 당암공과 맏형 한사공이 풀려나다. ● 이때 임금이 친히 비단 서첩(書帖)에 교서(敎書)를 내렸다. 그 내용은 “아버지는 9년 동안 옥에 갇혔으나 모든 절도가 어제와 같고, 아들은 10년 동안 회양(淮陽)으로 귀양 갔으나 삼강(三綱)이 끊이지 않았으니, 강익문(姜翼文)의 부자(父子)는 만고(萬古)에 우러러볼 사람이다.” ● "산사(山寺)"라는 제목의 시를 짓다. |
1626 |
병인년(인조 4) |
33세 |
● 반간(槃澗) 황뉴(黃紐)의 제문과 만시(挽詩)를 짓다. |
1627 |
정묘년(인조 5) |
34세 |
● 담양 부사로 부임하는 석담 이윤우를 전송하며 시를 짓다. |
1635 |
을해년(인조 13) 10월 |
42세 |
● 광주로 부임하는 상암 권준을 전송하며 시를 짓다. ● 월계(月溪) 심일삼(沈日三) 선생 부친(친구의 죽음)상에 상례를 다하다. |
1636 |
병자년(인조 14) |
43세 |
● 병자호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창의하다. ● 병란의 치욕을 당한 이후 벼슬에 뜻을 접고 시문에 전념하여 도연명의 시와 소옹의 시에 정취를 느껴 이들에 비견할 만한 시작(詩作)을 남겼다는 세평을 듣다. |
1637 |
정축년(인조 15) |
44세 |
● 합천군수 김선술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다. ●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자유 황호를 전송하며 시를 짓다. |
1638 |
무인년(인조 16) |
45세 |
● 도사 이방익의 만시를 짓다. |
1639 |
기묘년(인조 17) |
46세 |
● 지지헌 유영의 만시를 짓다. |
1640 |
경진년(인조 18) |
47세 |
● 장수현감 하성의 만시를 짓다. ● 무민당 박인의 만시를 짓다. ● (연대미상) 평소 절친한 교우관계를 맺고 있는 순찰사 정태화에게 전하는 글을 짓다 |
1641 |
신사년(인조 19) |
48세 |
● 정태화(영의정)의 서신(답장)을 받다. ● 납일을 맞아 지은 시가 있다. ● 맏형 한사 선생이 진주목사에 부임하다. |
1642 |
임오년(인조 20) |
49세 |
● 남원부사 정호인에게 시를 지어주다. |
1643 |
계미년(인조 21) |
50세 |
● 바다를 건너가는 승지 신유를 전송하며 시를 짓다. ● 추간 박경의 죽음을 원통해하며 시 2수를 짓다. |
1644 |
갑신년(인조 22) |
51세 |
● (건립년도미상)합천군 임북리에 구주정사를 짓다. ● 임북(林北)의 산수를 사랑하여, 물고기 잡고 낚시질하는 것으로 족히 어버이를 봉양하며 너그럽고 한가롭게 세상을 마칠 것이라 하여 두어 칸 집(구주정사:鷗洲精舍)을 지었다. 또 "자신잠(自新箴)"을 지어 때때로 보고 살폈다. 자신잠은 선생의 사상이요 철학이다. ● 산재(山齋)에 따로 방 하나를 꾸려 이름을 '일관정(一貫亭)'이라 하고 여러 학생들이 학업(學業)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다. 또 두어 걸음 밖의 '화곡재(禾谷齋)'와 '성재암(盛才菴)'에서는 매월 초하루를 정하여 강론(講論)하는 것을 규례(規例)로 삼았었고, 학생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시를 짓게 하여 정신적 세계를 높이 펼쳤다. 또한 선생은 교도(敎道)의 방법으로 문생들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속이면 하늘을 속이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라고 하여 교육의 기본방침을 선비정신에 두었다. ●충효와 덕행과 학식이 뛰어나 많은 선비들이 선생을 본보기로 삼았다. ● 횡당 경충록에 발문을 썼다. 횡당경충록(黌堂景忠錄)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지키다가 굴복하지 아니하고 순절한 훈련원정(訓鍊院正) 심자광(沈自光)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
1645 |
을유년(인조 23) |
52세 |
● 맏형 한사 선생이 신라 충신 죽죽장군의 비문을 짓다. 합천대야성에 비석과 비각이 있다. ● 국원 김정견의 만시를 짓다. ● 상사 여희필의 만시를 짓다. |
1647 |
정해년(인조 25) |
54세 |
● 학포 정훤의 만시를 짓다. |
1648 |
무자년(인조 26) |
55세 |
● 아버지 당암공(1568~1648)이 임북 정사에서 별세하다. 조정에서는 영국원종공신일등(寧國原從功臣一等)으로 봉작했다.(1648.05.29) ● 의령현감 윤순거에게 시를 지어주다. |
1650 |
경인년(효종 1) |
57세 |
● 내시교관에 제수 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
1651 |
신묘년(효종 2) |
58세 |
● 세마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
1652 |
임진년(효종 3) |
59세 |
● 임금님께 진언소(進言蔬)를 올렸다. 이는 유배된 효종(孝宗)의 이복동생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의 석방을 건의하면서 때마침 닥친 한발(旱魃)에 비유하여 역옥(逆獄)에 관한 사대부(士大夫)들의 처신을 지적한 인한재진언소(因旱災進言疏)로 유명하다. 글의 내용과 그에 상응하는 간결하고 뛰어난 문장력에 의해 임금이 두 아우를 풀려나게 하다. |
1653 |
계사년(효종 4) |
60세 |
● (부임연대미상) 금산군수 부임. 고향에서 친하게 지내던 거창출신 조경과 함께 금산에서 술을 권하는 시(詩)가 있고, 그 밖에 금산에서 지은 시 4수가 있다. ● 금산군수에 부임하면서 교유관계를 지니고 있던 거유들로 부터 축하시를 받다. 이는 이성구(병조판서, 영의정), 이경석(이조판서, 영의정), 정태화(도승지, 영의정), 이민구(도승지 예조참판), 조경(대제학, 형조판서), 조익(좌의정, 중추부영사), 이경여(경상도관찰사, 영의정), 전식(예조참판, 대사성) 등으로부터 축하시를 받다. |
1654 |
갑오년(효종 5) |
61세 |
● 군위 현감 이현룡의 만시를 짓다. ● 월계 심일삼과 경암 문동도로부터 수시(壽詩)를 받다. |
1655 |
을미년(효종 6) |
62세 |
● 막내아우 경호공(1606~1655)이 별세하다. |
1656 |
병신년(효종 7) |
63세 |
● 창원부사 곽홍지의 만시를 짓다. |
1658 |
무술년(효종 9) |
65세 |
● 맏형 한사공(1591~1658)이 별세하다. |
1659 |
기해년(효종 10) |
66세 |
● 아버지 당암공에 대한 천작 축하시를 짓다. ● 어머니 합천 이씨 (1572~1659) 별세하다. |
1664 |
갑진년(현종 5) |
71세 |
● 간송 조임도의 만시를 짓다. ● 부인 언안 김씨 (1603-1664) 별세하다. |
1676 |
병진년(숙종 2) |
83세 |
● 순천부사로 부임하는 송정렴에게 시를 지어 부치다. |
1677 |
정사년(숙종 3) |
84세 |
● 계헌 배일장의 만시를 짓다. |
1678 |
무오년(숙종 4) 3월 19일 |
85세 |
● 합천군 율곡면 임북리 자택에서 별세하다. ● 묘소는 합천군 율곡면 율진리 패금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 부인 연일 정씨 사이에 3남 2녀, 계배(繼配) 언양 김씨 사이에 3남 1녀의 자식을 두다. ● 선생이 별세한 후 관찰사(감사, 도백, 방백)가 학문과 효행을 조정에 보고하자 임금이 명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증직하다. |
1916 |
병진년
|
|
● 구주 선생 문집 목판 인쇄. ● 구주 선생 문집은 목판(木版) 4권 2책으로 간행(刊行)되었다. ● 문집의 내용은 서문에 이어 제1권에서는 시(詩) 134수가 수록되었고, 제2권에서는 소(疏) 1편, 계(啓) 2편, 서(書) 2편, 잡저(雜著) 3편, 잠(箴) 1편, 의표(擬表) 1편, 축문 2편, 제문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제1권에서는 유인들에게 받은 글 8편, 시 1편, 수시(壽詩) 2편, 만시(挽詩) 7편, 제문 3편이 수록되었으며, 부록 제2권에서는 언행략(言行略) 1편, 행장 2편, 묘갈명 1편, 묘지명 1편, 묘표(墓表) 1편과 권말에 문집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 문집의 편찬에 따른 글로서는 성주 암포(巖浦)에 우거하던 회당 장석영(1851~1929)으로부터 1916년 8월에 문집의 서문을 받았고, 성주 지촌(枝村)에 살고 있던 성재 정재기(1857~1919)로부터 1916년 10월에 문집의 발문을 받았다. 그리고 경북 칠곡에 거주한 농산 장승택(1838~1916)으로부터 행장을 받았으며, 단성 소남(召南)에 살았던 하봉 조호래(1854~1920)에게도 행장을 받았다. 또한 창녕에 살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심재 조긍섭(1873~1933)으로부터 묘갈명을 받았으며, 진주 수곡에 살던 회봉 하겸진(1870~1946)으로부터 묘지명을 받았다. 특히 청대 권상일(1679~1759)로 부터 묘표를 받은 바 있다. |
2012 |
임진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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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구주선생문집」 발간. ● 특히 당암집, 한사집의 국역본 발간에 이어 구주집, 경호집의 국역본이 발간됨으로서 4부자 문집(四父子文集)이 완역·발간되었다. |
(참고) 정확한 연도가 파악되지 않은 것은 연대미상(?)으로 표시하였음. |
Ⅴ.결론
지금까지 구주 강대적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고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국란 극복의 호국사상, 충효정신과 우애사상, 교육이념과 선비정신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리고 선생에 대하여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해 시문(詩文)을 주고받은 인물과 연보를 정리하여 본고에 수록하였다.
선생은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란 극복의 호국정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싸움에 나갔다.
선생은 타고난 바탕이 옥같이 깨끗하고 자질(資質)이 뛰어났으며 효도와 우애가 남달랐으며, 행동과 의리는 풍속의 모범이 되고, 문장은 족히 세상에 드리웠다. 그리고 대쪽 같은 선비정신으로 일생을 보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임금에게 진언할 수 없는 입장임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진언소를 올려 절도(絶島)에 귀양간 임금의 이복동생을 풀려나게 한 것은 충효와 우애를 대표하는 아주 유명한 상소이다
선생의 교육이념은 배우고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천하는 실천교육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연구는 일찍이 문리(文理)가 이루어져 제자백가(諸子白家)의 글을 진실로 잘 음미(吟味)하여 가슴속에 새겨두었고, 육경(六經)과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글에 더욱 독실하여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하여 깊이 스스로 얻었다.
또한 선생은 자신잠(自新箴)을 지어 날마다 이를 실천에 옮겼으며, 항상 경의(敬義), 삼성(三省), 사물(四勿), 무자기(無自欺), 신기독(愼其獨), 사무사(思無邪), 용잠구연(龍潛九淵), 봉상천인(鳳翔千仞), 천균기력(千鈞氣力), 만장광염(萬丈光焰) 등의 말을 아침 저녁으로 읊으며 선비로서 학자의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
이같이 옛 성인(聖人)의 글을 날마다 읽고, 하늘과 사람에대한 성명(性命)의 근원과 군자의 처세를 탐구하였다. 이에따라 수많은 유생(儒生)들이 모여들어 경서를 앞에 놓고 어려운 것을 물어왔으며 선생의 서재인 화곡재(禾谷齋)에는 인재(人材)가 무성하여 그 이름이 영남(嶺南)에 떨쳤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의 스승으로서 학맥의 띠를 차지했다
본 논문은 선생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그 일부의 연구에 불과하다. 구주선생문집의 발행이 선생의 사후 2백30여 년이 지난 1916년에 간행됨에 따라 그동안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소실된 것으로 여겨지며, 더구나 선생이 팔순이 넘도록 오래 장수하셨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친교한 선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라, 이 분들의 문헌을 통한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여타의 문집이나 잔존의 자료들을 찾아, 보다 더 상세히 연구해야 함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