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世祖(세조) 璘(린)
勇夫(용부)의 3남으로 1174년(명종 4년) 벼슬이 內侍執奏(내시집주)에 오르셨다. 이때부터 李氏(이씨)가 중앙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부인은 南平文氏(남평문씨)로 侍中(시중) 克謙(극겸)의 딸이시다.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에 탁월하셨다. 毅宗(의종) 24년(1170) 鄭仲夫(정중부) 李高(이고) 李義方(이의방)과 천인이 난을 일으켜(武臣;무신의 난) 왕과 세자를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득세하였다.
어느때 공의실수로 전쟁이 크게 패하니 당시 국법으로 극형에 처하게되자 부의대부(정승) 黃後議(황후의)가 왕에게 상소하여 극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황의후는 풍수 奇大克(기대극)의 말을 빌어 전주 기린산(건지산 왕자봉)이 이린의 후손에서 왕이 나올자리라고 하니 明宗(명종 19대 1170 ~ 1197)이 크게 노하여 李璘(이린) 일족을 죽이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함경북도 길성(길주)땅으로 부인 문씨와 3살된 陽武(양무)와 함께 유배되었다.
길성은 고려변방으로 오랑캐(여진족)의 침입이 잦았고 잦은 흉년과 臺諫(대간)들의 간혹한 탄압으로 慶山(경산)땅으로 옮겼으나 왕은 다시 安南(안남;전주)로 유배시켰다. 이 무렵 두형(준의, 의방)이 살해되었다. 4남 琚(거)도 변방으로 피하였을 것이다. 슬하에 陽武(양무)를 두셨다.
• 17世祖(세조) 陽武(양무)
3살 때 유배된 아버지 璘(린)을 따라 북쪽 함경북도 변방 길성과 경산을 거쳐 安南(안남;전주)에 다시와서 정착하였다. 벼슬이 上將軍(상장군)에 오르셨다.
말년에 아드님 安社(안사)를 따라 온씨족과 함께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고려 고종18년(1231) 돌아가셨다.
妣(비)는 李氏(이씨)로 상장군 康濟(강제)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1남 安社(안사) 2남 英弼(영필) 3남 英鎰(영일) 4남 英襲(영습)을 두셨다. 4남은 主簿同正(주부동정) 벼슬을 하였고 주부동정파의 파조이시다.
묘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백두대간의 두타산(1352m) 줄기아래 蘆洞山(노동산)의 申坐寅向(신좌인향)에 모시고 濬慶墓(준경묘)라 호칭하였다. 百牛金冠(백우금관)의 전설이 있는 조선 제일의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妣(비) 李氏(이씨)의 묘는 미로면 동산리 卯坐酉向(묘좌유향)에 계시며 永慶墓(영경묘)라 칭한다.
우리전주 이씨는 陽茂將軍(양무장군)에 이르러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 18世祖(세조) 穆祖大王(목조대왕) 安社(안사) ( ? ~1274)
諱(휘)는 安社(안사)이시고 고려 高宗(23代 1213~59 재위)때 전주에서 知宜州事(지의주사)벼슬을 하시어 선정을 베푸셨다. 元(원)나라에 가서는 현 연길(간도지방)에서 南京五千戶所(남경오천호소) 達魯花蚩(달로화치) 벼슬을 하셨다.
전주 滋滿洞(자만동;지금의 鉢山;발산․바래봉, 五木臺;오목대, 梨木臺;이목대, 향교가 있는 교동일대)에서 태어나시어 바래봉 숲속 호랑이와 격투를 하시며 자라셨다. 고려 元宗(원종 24대)15년 (1247) 3월 10일에 승하하셨다.
태조대왕이 穆祖(목조)로 추존하시고 26대 高宗(고종1864~1907재위) 광무 3년 (1899,고종36년) 11월 27일에는 강원도 삼척시 활기동에, 광무 4년 (1900) 정월 28일에는 전주 자만동에 각각 穆祖大王 舊居遺趾(목조대왕 구거유지) 여덟지를 고종 임금님이 친필로 새긴비와 비각을 세우시어 오늘에 전한다.
妣(비)는 平昌李氏(평창이씨)로 千牛衛長史(천우위장사) 公肅(공숙)의 따님이시다. 태조께서 孝妃(효비)로 추존하시고 태종께서 孝恭王后(효공왕후)로 높이셨다. 슬하에 자녀는 6남을 두셨다.
대왕의 陵號(능호)는 德陵(덕능)으로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에 계신다.
처음에는 慶興城(경흥성;두만강 하류 斡東;알동) 모셨으나 태종 10년(1410) 이곳인 함흥 서쪽 加平社(가평사) 癸坐(계좌)에 모시고 표석(비석)을 세웠다. 효공왕후의 능호는 安陵(안능)으로 대왕의 능소와 같은 언덕이며 역시 경흥성에서 이장하여왔다.
1男 : 安川大君(안천대군) 於仙(어선)
2男 : 安原大君(안원대군) 珍(진)
3男 : 安豊大君(안천대군) 精(정)
4男 : 翼祖大王(익조대왕) 行里(행리)
5男 : 安昌大君(안창대군) 梅拂(매불)
6男 : 安興大君(안흥대군) 球壽(구수)
後祠(후사)는 4남 익조대왕 行里(행리)이시다.
☞ 목조대왕의 끝없는 유랑의 길
安社(안사)는 전주의 명문거족으로 知宜州事(지의주사)가 되어 선정을 베푸셨다. 어느날 각도의 山城(산성)을 감독하는 山城別監(산성별감)이 전주에 왔는데 전주 知州事(지주사;목사의 소임을 하는 벼슬)가 안사께서 아끼시는 官妓(관기;기생)로 수청을 들게하여 불화가 생겼다.
주지사는 李씨묘(조경단;시조묘)의 흥왕정기설(興王精氣說)을 빌미로 李씨 가문을 멸족시키려 하니 安社께서는 노부모님을 모시고 170여호의 대부족을 거느리고 고려 高宗(고종 23대 1214~1260) 17년(1230)전주를 떠나셨다.
1세조 사공공께서 서기 800년경 터를 잡으신 이래 18세조 안사까지 430년간 살아오신 전주땅을 등지고 끝없는 유랑의 길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민 활기동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두타산 줄기아래 先山(선산)에 정착하셨다. 이듬해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준경묘와 영경묘에 모셨다.
그런데 전주의 지주사가 이곳 관동지방의 안렴사(安廉使)로 오게되어 또 화를 당할 것 같아 안사께서 다시 170여호의 부족을 이끌고 함경남도 원산근처 德源(덕원) 땅 남쪽 용주리로 옮기셨다. 이곳에서 아들 行里(행리)를 낳으셨다. 그러나 이곳도 관동지방 안렴사의 세력이 미치는 곳이어서 또 다시 함경북도 북단 두만강변 慶源(경원)땅 龍堂(용당)으로 가셔서 元(원)나라 女眞族(여진족)에 귀화하셨다. 이때가 고려 23대 고종 40년(1253) 무렵이다.
이때 고려의 상황은 무신정권의 횡포가 심하였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각처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나고 궁중에서는 무신들의 권력다툼으로 피로 물들어가고 뭉고군은 수차례 침입
20만명의 고려인을 포로로 끌고가는 등 나라꼴이 매우 처참하였다.
안사계서는 경원땅에서 다시 두만강 하류 慶興(경흥)에서 살으시다가 두만강을 건너 斡東(알동; 지금의 러시아)으로 가셨다. 이 곳에서 元(원)나라로부터 5천호를 다스리는 다로하치(達魯花赤)에 임명되셨다. 이 직책은 아들 行里(행리) 손자 子椿(자춘)까지 세습되었다. 안사께서는 이곳 경흥땅 斡東(알동)에서 1274년(고려 24대 원종) 승하하셨다. 墓(묘)는 알동에 계신다.
대 부족의 수호를 위하여 전주, 삼척(활기동), 덕원(용주리), 두만강변 경원(용당), 두만강 하류 경흥땅 알동까지 가셔서 꽃을 피우시니 정말로 위대하신 우리의 조상이다.
• 19世祖(세조) 翼祖大王(익조대왕) 行里(행리)
諱(휘)는 行里(행리)이시고 함경남도 원산근처 덕원땅 용주리 赤田社(적전사)에서 탄생하시고 함흥 귀주동(경흥)에소 돌아가셨다. 妃(비)는 登州崔氏(등주최씨) 基烈(기열)의 따님이시다. 내외분 翼祖大王(익조대왕)과 貞淑王后(정숙왕후)로 추존되셨다. 슬하에 8남 1녀를 두셨다.
1남 咸寧大君(함령대군) 安(안)
2남 咸昌大郡(함창대군) 長(장)
3남 咸原大郡(함원대군) 松(송)
4남 翼祖大王(익조대왕) 行里(행리) (도조대왕)
5남 咸川大郡(함천대군) 源(원)
6남 咸陵大郡(함릉대군) 古泰(고태)
7남 咸陽大郡(함양대군) 腆(전)
8남 咸城大郡(함성대군) 應臣(응신)
대왕의 묘는 智陵(지능)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석곡면 능하 壬坐(임좌)에 계시며 왕후의 묘는 淑陵(숙능)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癸坐(계좌)에 계시며 모두 표석(비석)이 있다.
행리께서도 긴 유랑생활을 하셨다. 斡東(알동) 千戶長(천호장)으로 계시는 동안 커진세력을 여진족 추장들이 시기하여 해치려하니 경흥에서 50리 떨어진 赤島(적도)로 피하셨다가 다시 선친의 고향인 덕원북쪽 赤田社(전전사;용주리)로 일족을 거느리고 오셨다. 알동백성들이 많이 따라왔다. 이곳에서 雙城(쌍성)지역 (함경남도 영흥 화주 화령) 君民(군민)을 다스리는 元(원)나라의 달로하치(지방장관)가 되셨다.
• 20世祖(세조) 度祖大王(도조대왕) 椿(춘) (~ 1342)
諱(휘)는 椿(춘)으로 행리의 4남이시다. 함흥 송두리에서 태어나시어 1342(고려 29대 충숙왕 3년)승하하셨다. 첫 휘는 善來(선래)이시고 몽고식 이름은 宵諺岾兒 (쏘안타므르)을 이시다. 元(원)나라로부터 선친의 관직인 斡東千戶當(알동천호당)을 이어 받았고 고려조에서는 贊成事(천성사) 벼슬을 하셨다.
妃(비)는 文川朴氏(문천박씨)이며 슬하에 5남 3녀를 두시고 後嗣(후사)는 2남 子春(자춘)이시다. 대왕의 능소는 義陵(의릉)으로 함흥동쪽 雲田社(운전사; 함경남도 흥남시 운흥리) 壬坐(임좌) 계시며 모두 표식이 있다.
1남 完昌大君(완창대군) 子興(자흥)
2남 桓祖大王(환조대왕) 子春(자춘)
3남 完原大君(완원대군) 子宣(자선)
4남 完川大君(완천대군) 平(평)
5남 完城大君(완성대군) 宗(종)
• 21世祖(세조) 桓祖大王(환조대왕 1315~1360)
諱(휘)는 子椿(춘)이시고 몽고식 이름은 吾魯思不花(오로사불화) 이시다. 고려 27대 충숙왕 2년(1315년) 함흥 귀주동(영흥 흑석리)에서 도조의 5남중 2남으로 태어나셨다.
元(원)나라 千戶(천호) 벼슬을 지내셨으며 고려의 원나라 雙城摠管府(쌍성총관부) 공략에 가세 국토회복에 공을 세워 공민왕 9년(1960)에 大中大夫 司僕卿(대중대부 사복경) 벼슬을 하시고 그뒤 또 判軍器 監事(판군기 감사)로 西江兵馬使(서강병마사)를 겸하셨다. 이어서 榮祿大夫 判將作 監司(영록대부 판장작 감사) 朔方道 東北面(삭방도 동북면;함경남북도) 萬戶兼 兵馬使(만호겸 병마사)를 지내시고 이곳에서 春秋(춘추) 46세로 승하하시고 門下侍中(문하시중) 벼슬을 증직받으셨다.
슬하에 세분의 부인께서 3남 1녀를 두셨다.
1남 完豊大君(완풍대군) 元桂(원계) - 韓山李氏(한산이씨) 소생
2남 太祖大王(태조대왕) 成桂(성계) - 永興崔氏(영흥최씨) 소생
3남 義安大君(의안대군) 和(화) - 定嬪金氏(정빈김씨) 소생
1녀 貞和公主(정화공주) 永興崔氏(영흥최씨) 소생
子春(자춘)께서는 桓祖(환조)로 추존되시고 부인 永興崔氏(영흥최씨) 는 懿蕙王侯(의혜왕후)로 추존되셨다. 陵(능)은 환조는 定陵(정릉) 妃(비)최씨는 和陵(화릉)이시다. 함경남도 흥남시 경흥동(귀주동)에 계신다.
쌍성은 본래 고려땅이었으나 고려 고종 45년(1258) 몽고군이 침입하자 趙暉(조휘) 卓靑(탁청) 등이 동북면(함경도) 병마사를 죽이고 鐵嶺(철령) 이북땅을 들고 몽고에 투항하니 몽고는 和州(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함경도를 다스려 조휘는 증손자까지 99년간 총관을 지냈다. 이에 환조께서 고려의 국토회복에 공을 세우시고 왜구의 침략도 격퇴하셨다.
☞ 전주이씨의 전주에서 함흥으로 이동경위
16세 린,17세 양무, 18세 안사, 19세 행리, 20세 춘, 21세 자춘
전주 전주생 전주생 덕원생 함흥송두동리생 함흥귀주동생
길성 삼척활기동 삼척활기동 경원 함흥귀주동
(유배) 경산 덕원 경흥
(유배)
전주 경원 알동
경흥 경흥적도
알동(귀화) 덕원적전사
경흥적도
함흥송두동리
함흥귀주동
(경흥리)
• 22世祖(세조) 太祖大王(태조대왕 1335~1408)
첫 諱(휘)는 成桂(성계) 字(자)는 仲潔(중결) 號(호)는 松軒(송헌)이시다.
즉위하신 후의 휘는 旦(단) 자는 君晋(군진)이시다. 고려 충숙왕 4년(1335년)함경남도 永興郡(영흥군) 順寧面(순영면) 黑石里(흑석리)에서 子春(자춘;환조)와 부인 登州崔氏(등주최씨)의 2남으로 탄생하셨다.
妃(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安邊韓氏(안변한씨)로 密直副使(밀직부사)韓卿(한경)의 따님이시다. 태조가 즉위하시기 1년전 슬하에 6남 2녀를 두시고 춘추 55세에 승하하셨다. 계비 神德王后(신덕왕후) 谷山康氏(곡산강씨)는 判三司(판삼사) 允成(윤성)의 따님으로 태조보다 21년 연하이시다.
부인에게서 8남 5녀를 두시고 1392 년 57세에 즉위 6년 2개월 재위하 시다가 64세에퇴위 춘추
74세로1408년에 승하하셨다. 陵號(능호)는 태조대왕 묘 <건 원 능> 健元陵(건원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평창동 東九陵(동구능)에 계시며 계비 강씨는 貞陵(정능)으로 서울 성북구 정능 2동 庚坐(경좌)에 계신다 國舅(국구) 康允成(강윤성)은 황해도 곡산의 대부호로서 태조대왕의 정치 및 재정․경제에 후원이 지대하였다.
잉태한지 14개월만에 태어나신 태조께서는 눈망울이 호랑이 눈과 같고 콧날은 오똑하였으며 장대하신 몸집에 왼쪽다리에는 73개의 사마귀와 발바닥에 王字(왕자)가 있어 하늘이 내린 신동이라고 칭송하였다. 無學大師(무학대사)도 쌀, 미역, 간장을 들고 찾아와 관상을 보고 임금이 되실분이니 잘 길르라고 당부하였다.
8세부터 成先生(성선생)에게 글을 밤을 세워 배우고 전쟁놀이, 성 쌓기, 龍床(용상)놀이 대장노릇을 하였다. 15세에 행리께서 정착하신 귀주동으로 이사하셔서 인근 성용봉 깊은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글을 읽고 馳馬臺(치마대)에서 무예를 닦고 八駿馬(팔준마)를 얻으셨다. 천문과 사물의 이치도 깊이 연구하시어 천하의 흥망성쇠를 짐작하였다.
17세때(1351, 고려 충정왕 3년) 침입한 오랑캐무리 冡可毒(몽가독)을 匡城(광성;경흥)에서 물리치셨다. 이 무렵 元(원)나라에서 귀화한 이두란(李豆蘭;퉁두란)을 산속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어서 조선왕조 개국에 큰 힘이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고려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공략할 때 쌍성의 천호인 아버지(자춘)을 도와 쌍성함락에 공을 세웠고 함경도 지방의 국토회복에 큰 공을 세워 공민왕 10년(1301)에 朔方道(삭방도) 萬戶(만호)겸 兵馬使(병마사)로 임명 함경도 일대의 군사권을 장악하셨다.
22세에 아버지를 따라 고려 조정에 들어가 임금님을 알현하고 나왔다.
원의 세력인 기철 일당을 토벌한 공로로 大中大夫 司僕卿(대중대부 사복경) 벼슬을 하시다 고려말기 외세침략의 전란을 통해 이성계 장군은 혁혁한 전공을 세우였다.
쌍성총관부의 공략(1361) 禿魯江(독로강; 강계지방)의 만호 朴儀(박의)의 반란(1361) 원나라 紅巾賊(홍건적)의 개성침입(1362) 원나라 나하추의 침입(1362) 역신 崔濡(최유)와 원군의 침입(1364) 東北面(동북면 함경남도)의 여진족 三善(삼선) 三介(삼개)의 반란 운봉 황산에 왜구(아지발도 16세) 침입(1380) 여진족 胡拔都(호발도)의 함흥침입(1382)등 전쟁에서 승리하여 확고부동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지위도 계속 상승하여 1362년 동북면 병마사 밀직부사, 1384년 동북면 도원수 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 1388년 수상격인 문하시중의 바로아래인 守門下侍中(수문하시중)이 되셨다.
禑王(우왕) 14년(1388) 고려의 明(명)나라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
장군은 四不可論(사불가론)을 내세워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압록강 하류 威化道(위화도)에서 함께 출진한 八道都統使(팔도도통사) 崔塋(최영)과 헤어져 左軍統制使(좌군통제사) 曺敏修(조민수)등과 1388년 5월 20일 回軍(회군) 開京(개경)에 입성하여 侍中(시중) 최영을 귀양보내고 우왕을 폐하고 昌王(창왕)을 옹립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창왕을 폐하고 恭讓王(공양왕)을 세워(1390) 領三司(영삼사)가 되시고(1390) 이듬해(1391) 三軍摠制使(삼군총제사)가 되어 田制改革(전제개혁)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고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하였다.
마침내 신진사대부 세력인 趙浚(조준), 鄭道傳(정도전), 南誾(남은), 李芳遠(이방원)과 신흥무인의 추대로 1392년 7월 太祖(태조)로서 왕위에 오르시고 국호를 朝鮮(조선)으로 정하고 朝鮮王朝(조선왕조)를 개국하셨다. 태조 3년 漢陽(한양)으로 천도하셨다. 官制(관제) 軍制(군제)등을 정비하고 정치․경제․사회․교육등 여러방면의 국가기틀을 마련하셨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7남 방번(芳蕃), 8남 芳碩(방석)을 잃으시자 재위 7년만에 2남 芳果(방과; 영안대군)인 定宗(정종)에게 양위 하시고 상왕으로 물러나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두아들(방번, 방석)의 명복을 빌었다. 1차 왕자의 난을 戊寅靖社(무인정사)라고 일컫는다.
1400년 蒡遠(방원;정안대군)이 太宗(태종)으로 즉위하자 太上王(태상왕)이 되시고 왕자들의 왕권 다툼에 상심하시어 1402년 동북면(함경도 함흥)에서 은거 생활을 하시었다. 태종이 함흥(고향)에 계신 태상왕을 모시러 보낸 差使(차사)들은 한결같이 송경으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咸興差使(함흥차사)]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자 태종은 부왕의 신변을 걱정하여 무학대사로 하여금 모셔오도록 하였다.
송경으로 환도한 이성계는 말년에 궁궐안에 적인전을 지어 精舍(정사)로 삼고 불교에 귀의 하셨다. 그러나 태종 8년(1408) 1월 태상왕은 갑자기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우셨다. 이어 그해 5월24일 창덕궁 廣延樓(광연루)에서 74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하신 삶을 마감하셨다. 하륜으로 하여금 길지를 물색케하여 경기도 구리시 평창동 健元陵(건원능)으로 유택을 정하였다.
태조왕의 건국이념인 三大國是(삼대국시)로 事大交隣(사대교린), 崇儒排佛(숭유배불), 農本民生(농본민생)으로 정하여 조선왕조의 근본정책으로 삼았으며 官制(관제) 田制(전제)등을 정비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큰 업적을 남기셨다.
☞ 장수를 왕으로 이끈 無學大師(무학대사)
無學(무학;1327~1405)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佛僧(불승)이다. 성은 朴(박)씨이고 법명은 自招(자초)이고 무학은 號(호)이다. 조선왕조 개국후에 王師(왕사)가 되었다. 元(원)나라 燕京(연경)에 유학 佛道(불도)를 닦았다. 천문지리 음양도참설(풍수지리)에 밝았다. 불교를 배척하는 性理學者(성리학자)들과 손을 잡고 함께 왕조를 건설하였다.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돌아다니며 地相(지상)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는데 찬성하였고 새왕궁 건설에도 적극참여하였다. 숭유배불의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가 끝남을 알고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 전념 양주군 회천읍 檜巖寺(회암사)에 머물다가 금강산 금장암으로가서 수행에 전념 1406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왕조 개국의 주체이면서도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은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鄭道傳(정도전)
정도전(1337~1398)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字(자)는 宗之(종지) 호는 三峰(삼봉) 시호는 文憲(문헌) 본관을 奉化(봉화)이다.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文科(문과)에 급제하여 禮曹正郞(예종정랑)에 오르다. 우왕때 李仁任(이인임) 등의 親元排明(친원배명) 정책을 반대하다가 나중에 유배되었다. 이성계의 천거로 成均館(성균관) 大司成(대사성)에 올라 그의 오른팔로 田制改革(전제개혁)을 단행토록 건의하였고 불교를 배척하였다. 曹敏修(조민수) 등 구세력을 탄핵 유배시키므로서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 이성계 장군에게 새로운 왕국건설의 당위성을 가르쳐드렸다.
공양왕을 추대하고 佐命功臣(좌명공신)에 奉化縣 忠義軍(봉화현 충의군)이 되고 동왕 2년(1390) 辨誣使(변무사)로 明(명)나라에 가서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입하려한다는 尹彛(윤이) 李初(이초)의 일을 변무하였다. 그뒤 正當文學(정당문학)으로 재직중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조선왕조 개국을 도와 개국공신 1등으로 門下侍郞 贊成事(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고 한양천도를 주장 실현케 하였다. 왕조건설의 기틀이 되는 朝鮮經國典(조선경국전)을 지어 바쳤다. 제1차 왕자의 난에 방번, 방석을 옹호한다는 혐의로 芳遠(방원)에게 참수되었다. 그는 儒學(유학)의 대가로 外交(외교) 性理學(성리학)등 다방면에 걸쳐 건국작업에 공헌하였고 斥佛崇儒(척불숭유)를 국시로 하여 儒學(유학)발전의 공적을 남겼다.
◎ 朝鮮經國典(조선경국전)
조선태조 3년(1394) 정도전이 지은책으로 周禮(주례)의 六典(육전)을 모범으로 하여 지은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이 되는 법전이다. 正寶位(정보위) 國號(국호) 定國本(정국본) 世系(세계) 敎書(교서)등으로 나뉘어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하고 그 당음에 治(치) 賦(부) 禮(예) 政(정) 憲(헌) 工(공) 등 六典(육전)을 따라 관장사무를 규정하였다.
☞ 태조대왕의 자녀
◎ 神懿王后(신의왕후) 韓氏(한씨)소생
1남 鎭安大君(진안대군) 芳雨(방우)
2남 永安大君(영안대군) 芳果(방과) 定宗(정종)
3남 益安大君(익안대군) 芳懿(방의)
4남 懷安大君(회안대군) 芳幹(방간)
5남 靖安大君(정안대군) 芳遠(방원) 太宗(태종)
6남 德安大君(덕안대군) 芳衍(방연)
1녀 慶愼公主(경신공주)
2녀 慶善公主(경선공주)
◎ 繼妃(계비) 神德王后(신덕왕후) 康氏(강씨) 소생
7남 撫安大君(무안대군) 芳蕃(방번)
8남 宜安大君(의안대군) 芳碩(방석)
3녀 慶順公主(경순공주)
◎ 후궁소생
1녀 宜寧翁主(의령옹주)
2녀 淑愼翁主(숙신옹주)
• 23世祖(세조) 太宗(태종 1367~1422)
태종께서는 고려 공민왕 16년(1367 함경남도 함흥시 귀주동 태조의 潛邸(잠저)에서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 安邊韓氏(안변한씨)의 5남으로 태어나셨다.
諱(휘) 芳遠(방원) 字(자)는 遺德(유덕) 君號(군호)는 靖安大君(정안대군)이시다. 定宗 2년(정종 1400년) 3대 太宗(태종) 임금님으로 즉위하시어 17년 10개월 재위하시고 태종 18년(1418) 퇴위하셨다.
妃(비)는 驪興閔氏(여흥민씨)로 고려조 門下政丞(문하정승) 文度 公 齊 (문도공 제)의 따님이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2) 태어나시 어 우왕8년 (1382) 출가하셨다. 태 종께서 즉위하시니 元敬王后(원경 왕후)로 피봉되셨다. 슬하에 4남 4 녀를 두시고 세종 2년(1420) 56세 태종대왕의 묘 (헌릉) 로 승하하셨다. 3남께서 세종 임금이 되셨다. 태종께서는 12명의 부인에게서 12남 17녀를 두셨다. 두분의 陵(능)은 獻陵(헌릉)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계시며 두분이 쌍봉으로 조성된 쌍능이시다.
1남 讓寧大君(양녕대군) 褆(제)
2남 孝寧大君(효령대군) 補(보)
3남 世宗(세종) 忠寧大君(충령대군) 祹(도)
4남 誠寧大君(성령대군) 종(종)
☞ 태종대왕의 업적
1. 六曹職階制(육조직계제)단행
1414년(태종 14년) 육조직계제를 단행 「왕 - 의정부 - 육조」체제이던 국정이 「왕 - 육조」로 바뀌면서 왕관과 중앙집권이 크게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었다.
六曹(육조)는 吏曹(이조;행정자치부) 戶曹(호조;재정경제부) 禮曺(예조;교육인적자원부,문화부) 兵曹(병조;국방부) 刑曹(형조;법무부) 工曹(공조;건설교통부)이며 육조장인 判書(판서)의 지위를 正三品(정삼품)에서 正二品(정이품)으로 높였다.
2. 거북선 개발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거북선에 관한기록(태종 13년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것을 보셨다)이 있다. 태종 15년 左代言(좌대언) 卓愼(탁신)의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수 없으니 결승의 약책이니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하는 상소의 기록이 있다. 왜구와의 수전대비 대마도 정벌등 왜구토벌 작전을 위한 준비책 이었을 것이다.
3. 신문고(申聞鼓)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수 있도록 한제도였다. 훈신과 재산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나라의 안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하려는 목표이다. 이 신문고는 태종 임금님의 정치상상의 일환으로 宋(송)나라의 동문고를 본떠 태종 1년(1401) 8월 시행된 제도이다.
3. 漢陽(한양)으로 다시천도
朝鮮王朝(조선왕조)는 건국초기에 수도를 3번 옮겼다.
태조 3년(1399) 開京(개경)의 기운이 다되었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정종(定宗) 1년1398)이 다시 개경으로 왕궁을 옮겨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개경을 심각하게 그리워 하였고 또「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경 천도이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임금이 世弟(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太宗(태종, 방원)이 등극하여 태종 5년(1404) 9월 景福宮(경복궁)의 준공으로 한양천도를 단행하셨다. 이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이 되어왔다.
이외에도 兵制(병제)를 정리하여 사병을 없애고 號牌法(호패법)을 실시 신분을 표시하고 16살 이상의 남자에게 긴 네모골의 패를 차게 하였으며 崇儒政策(숭유정책)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