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편에서ㆍ14
ㅡ꿈속의 고향 (2024년 4월 28일)
권 옥 희
내 꿈속의 고향은 언제나 나와 가까이 있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앞에 다가와 어릴 적의 소중한 날로 데려다 줬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계절마다 정다운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고 나와 친구들이 있고 마을사람들이 있었다. 봄이 오고 4월이 되면 그런 고향을 찾아 어김없이 임동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코로나로 멈춘지 벌써 4년이 되고 올해 5년이 되었다.
지극히 날씨도 좋았던 2019년 4월 21일 봄날. 1년에 한 번씩 고향 가는 즐거움을 주었던 총동창체육대회가 성대하게 열렸었다. 1년간 꽃보다 아기산이라는 단합된 이름을 가진 기중이 동생네 57ㆍ33회 주관기수들의 열성적인 대회
준비를 지켜보았던 터라 교문을 들어서서 <임동사람>이라는 현수막이 학교 외관에 걸린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었다.
맞다! 나도 올해 열다섯 번째 체육대회 행사에 참여하면서 주관기수로서 49회 류 현 동생이 후기를 쓸 때 빼고는 고향 갈 때마다 <물속 깊이 잠긴 그리움의 저 편에서>를 시리즈로 열세 편의 후기를 쓰고 신년하례식 후기를 쓰면서 <우리는 영원한 임동사람>이라고 제목을 쓴 적도 있었다. 고향이 물에 잠겼든 그 고향이 새롭게 재탄생했든 임동은 어디 가지 않고 늘 우리 마음 속에 있었다. 안태 고향은 내 태를 묻은 곳. 그곳에 누가 있든 없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꿈의 터전이다. 그때 57회 주관기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운동장을 들어서는 임동사람 선ㆍ후배들을 열렬히 맞아주었다.
신나고 즐겁게 총동창체육대회를 마치고 각자 헤어지며 내년에 또 보자고 했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1년이 지나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든 덜 먹든 선ㆍ후배들의 지혜가 자라고 꿈이 자라던 우리들의 임동초등학교, 그 운동장으로 다시 모일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내일을 모르는 게 우리 삶이 아니던가?
2020년 설 명절을 쇠는 중에 중국에서 발병하여 기세를 떨치기 시작하는 코로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여행객을 통해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할 땐 그냥 해마다 유행하는 독감처럼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니 했다. 그래서 은희와 함께 안동 옥례네 가서 통도사 홍매화도 보고 부산 태종대까지 여행도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1급 전염병으로 자리 잡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예방을 위해 강제적으로 주사도 맞고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면서 모든 학교는 문을 닫았고
아이들은 비대면 수업으로 친구들을 잃었다. 각종 모임도 차단되고 내게 논술 수업을 받던 아이들도 수업을 못하게 됐다.
매일같이 운동하러 드나들던 체육관도 문을 닫고 마음대로 어디를 가지도 못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고 명절에 부모 형제도 한꺼번에 못 만나서 꼭 만나려면 형제 많은 집들은 이틀 사흘거리로 만나야 했다. 부모가 코로나로 돌아가시면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요양원에 계시던 우리 엄마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도 잘 버텨주시더니 면회도 못하다가 유리벽 너머로 눈도 뜨지 않은 모습 한 번 보여주고는 끝내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홀로 먼 길을 떠나셔서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엎으며 모든 걸 스톱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꽃들이 환하게 핀 봄날에도 꽃놀이는커녕 출입을 금지하는 금줄이 쳐지고 어떤 곳은 꽃밭을 아예 갈아엎기도 했다. 우울과 무기력이 쌓이면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미스ㆍ미스터 트롯 방송을 보는 게 전부였다. 책도 안 읽어지고 글도 안 써졌다. 걷기운동도 귀찮았고 아예 밖에 나가는 게 싫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니 자꾸 살만 쪄서 뚱뚱한 돼지가 되어갔다.
잠깐인 줄 알았던 무의미한 시간이 3년을 넘기고 작년부터 마스크를 벗기 시작하면서 올해서야 코로나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바뀌었다. 세상을 휩쓸던 전염병에서 해방되었지만 이유 없이 겪어야 했던 불행한 환경이 만만찮아서 그런지 사람들과의 만남이 예전 같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연히 오고 가야 할 따뜻한 정이 사라진 것이다. 어떤 모임이든 비슷해서 코로나 이전 같은 관심도 없고 열정도 없었다. 집안에 갇혀 살면서 나도 모르게 삶이 시시하고 재미없고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임동 초등학교는 2022년에 오래된 역사와 함께 경향 각지에서 활약하는 훌륭한 인재 배출의 긍지를 가지면서 백주 년을 맞이했다.
총동창회 주관하에 동문들이 십시일반 동참해준 덕분에 학교 운동장 초입에 자랑스러운 백주 년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전국에서 손꼽는 숫자 안에 들 정도로 역사 깊은 우리 학교가 올해 신입생이 한 명도 없어 폐교 위기의 학교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보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그래서일까? 행사를 주관할 주관기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총동창회에서는 어떻게든 선ㆍ후배가 한 자리에 모이는 체육대회 전통만큼은 이어가야 된다는 의지로 꽃 피는 4월 마지막 주에 총동창체육대회를 연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멋지게 기념비를 세우고 남은 기금으로 대회를 여는만큼 성대하지는 않아도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축소된 작은 대회인들 어떠랴.
주관기수들이 없으니 예전처럼 마을 어른들도 모시고 모두가 함께 모여 시끌벅적하게 한마음 잔치를 치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윤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의지가 빛났다. 윤병진 총동창회장과 김익한 사무총장이 발 벗고 나서서 5년만에 약식으로나마 행사를 주관하니 선후배들 많이 참석해 달라는 공지를 보내왔다.
우리 잔치인데 우리가 안 모이면 잔치집 분위기를 누가 띄울 것인가. 그런데 행사 계획을 늦게 잡아서 이미 많은 기수들이 미리 약속된 4월 정기모임을 갖고 난 뒤라 동문들이 얼마나 모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행사를 벌여놓고 운동장이 썰렁하면 그것도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분담금을 많이 내면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곳에 가서 놀자는 등 말들이 많이 돌아서 속으로 걱정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열리는 행사이기에 행사를 진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겠다 싶었다.
우리 향우회에서는 고향에 편히 가자고 1박 2일 일정으로 버스 한 대를 빌렸지만 다들 따로 가는지 버스에는 스무 나무 명도 안 되게 타서 진짜 다리 쭉 벗고 편안하게 갔다. 그런데 시간 맞춰 집에서 나오면서 운동화를 신다가 휴대폰을 신발장 위에 놓고 온 줄 모르고 화곡역에 다 가서야 내 휴대폰! 하며 다시 헐레벌떡 뛰어갔다 오는 바람에 땀은 범벅이고 정신은 멘붕이 와서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군자역까지 아무리 빨리 가도 집에 갔다 온 시간만큼 지각인데 다른 분 지각일 땐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따라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고향 간다고 느긋하게 준비하며 들떴던 기분 망친 건 둘째치고 버스에 오르면서 류필휴 고문님과 선ㆍ후배들 볼 일이 걱정됐다. 생각만 해도 두통이 오고 가슴이 뛰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버스에 오르니 왜 늦었냐는 책망 대신 모두 반겨주신다. 에구, 한시름 놨다. 버스에는 뜻밖에도 좀처럼 뵐 수 없었던 43회 이전의 42회 선배님들이 네 분이나 타고 계셔서 놀랐다. 그것도 우리 새들 옆집에 사시던 김호기 오빠와 장터 살던 우리 동기 손도영의 오빠인 손충영 오빠가 타고 계셔서 무척 반가웠다. 은희 보고 저분이 호기 오빠고 또 저분은 도영이 오빠라고 했더니 자기도 몰라봤다면서 나중에야 인사를 했다. 네 살 위의 오빠여도 어렸을 때 오빠들과 함께 놀았듯 지금도 같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 못하겠다.
안동역 앞에 버스가 도착하자 1주일 뒤에 있을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 안동역 이름이 모디 684라는 명칭으로 바껴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저게 무슨 뜻일까? 하는 의문이 들고 왜 저런 생소한 이름을 붙였을까 하는 불만이 있었는데 모디는 모두라는 우리 안동 사투리고 684는 80년을 넘게 자리잡은 안동역의 번지수였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걸 가르쳐 주지 않으면 누가 아노~ 도심에 역사가 자리잡은 탓에 도시 발전을 저해시켰던 안동역사가 외곽으로 옮겨갔으니 철로도 거의 다 걷어냈고 새로운 문화플랫폼으로 자리잡을 (구)안동역사의 내일이 기대됐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다들 전야제 밤을 함께 보낼 동기들을 만나는 약속 장소로 흩어져 가고 우리는 길 건너 갈비촌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53회 기룡이 동생은 집안 일 때문에 전날 미리 내려가 있고 오늘 밤엔 한정식집을 통째로 빌려 친구들 모두의 합동 환갑잔치를 한다는데 얼마나 좋을까? 목소리 큰 기룡이와 종현이 두 동생들 노래하는 소리와 함께 오늘밤 그 동네가 시끌벅적 난리난 듯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색다르게 만남을 갖겠다고 오래된 고택에서 하룻밤 자며 이색적인 고택체험도 해보고 멀리 강구까지 가서 바다도 보고 대게도 먹는 즐거움을 가져보기도 했다. 안동 친구들이 일부러 영덕까지 가서 떠온 싱싱한 회와 옥례가 뜯어온 산나물 무침을 맛있게 먹으며 통째로 빌린 팬션에서 노래방 대신 장구 치고 젓가락 장단 두드리며 흥겹게 놀았던 추억도 있다. 늘 그런 즐거움이 주어지리라는 생각 때문에 그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참 좋았던 날들이고 다시 돌아가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었다. 오늘밤은 또 어떤 즐거움이 주어질지 사뭇 기대가 됐다.
매일 밴드 출석에 열심인 은덕이 동생이 한 시간 전부터 누나들 얼굴 보겠다고 기다린다고 해서 안동역 앞에서 사진도 못 찍고 부랴부랴 길을 건너가니 진짜로 기다리고 있어서 반갑게 얼싸안았다. 48회 동기들 모임 시간도 있는데 우릴 보겠다고 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것도 겨우 차 한잔 마시고 일어서면서 말이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운동장에 못 오니 오늘이라도 만나봐야 한다는 속 깊은 동생이었다.
재림갈비집에는 벌써 친구들이 와 있고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맛있게 났다. 오늘 과 내일까지 일정을 책임진다고 마음껏 먹고 놀으라는 대구의 남시택 전국회장 의 통넓은 마음 씀씀이에 감사하며 우리는 허리끈을 풀었다. 돼지갈비는 그렇다치고 안동 지킴이 옥례가 직접 뜯은 산나물 김치와 낮에 청량산에서 따온 엄나무순을 데쳐왔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갈비는 뒷전이고 다들 젓가락이 엄나무순으로 갔다.
친구 얼굴 마주보며 웃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겁고 이렇게 좋은데 왜 친구들은 예전 마음 같지 않을까. 벌써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만나면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까? 매번 사오십 명은 만나던 우리가 아니던가? 그것도 5년만에 만나는데 서른 명도 안 되는 친구가 모여서 남시택 전국회장도 아쉬워했다.
하긴 작년에 서울의 권택성 전국회장이 마흔 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부안 내소사와 채석강과 군산 선유도 여행을 시켜줘서 그리움은 덜었다. 또 가을엔 대구의 남시택 친구가 전국 회장이 되면서 역시 그 유명하다는 대구 팔공산 단풍구경을 시켜주었다. 만남은 늘 좋은 것이어서 아름답고도 머물고 싶은 추억을 우리는 많이 남겼다. 수학여행 간 아이들마냥 단체로 보라색 티셔츠를 맞춰입고 내소사 갈 때는 가수 김호중 팬들인가 봐 하는 말도 듣고 선생님들이 단체로 왔나 보다 하는 말을 듣고 혼자 웃었다.
그래서일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봐야 되는데 오지 않은 친구들의 안부를 염려하면서 우리는 맛있는 나물과 고기로 배부른 저녁을 먹고 노래방까지 가서 땀이 나도록 놀며 고향의 밤을 즐겼다. 오늘 안동에는 체육대회 행사가 우리 말고도 대여섯 군데나 있다고 했는데 곳곳이 우리처럼 좋은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햇살이 빛났다. 행사 성공의 절반은 날씨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좋은 봄날에 많은 선ㆍ후배들이 운동장을 채워서 작은 체육대회가 큰 체육대회로 성공을 거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임동으로 가는 길에 늘 그랬듯이 안동대학교 입구의 예쁜 꽃잔디도 보고 농업기술센터에도 들리고 이번엔 말로만 듣던 임동 의병의 산실 기산충의원에도 들리자고 했다.
아쉽게도 경북도립대학교와 통합을 앞둔 안동대 꽃잔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서 농업기술센터 정원과 식물원에서 사진도 찍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네잎클로버도 찾으며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오늘 이 순간의 추억쌓기에 열중했다. 수곡교를 건너 류필휴 고문님이 이사장으로 계시는 호국의 산실 기산충의원은 호수에서 불어오는 물바람과 함께 고즈넉했다.
근무하는 직원이 있으면 설명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휴일이라서 텅 빈 충의원을 뒤로 하고 탁 트인 호수 건너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임동의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은희가 대표로 방명록에 친구들 이름을 모두 서명하고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앞에서 임진왜란때 다섯 아들과 함께 내 한 몸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기봉 류복기 선생의 구국정신을 다시 새겨보았다. 의병의 날인 6월 1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류탁기 동생이 기산충의원을 중심으로 <임하호 호국둘레길>을 만들어 호국정신과 나라사랑도 키우고 주변의 고택체험과 아기산 등산 챗거리장터 부활 등으로 쇄락해가는 우리 임동도 살리는 관광사업을 안동시에 건의하며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진짜 호국 둘레길이 만들어져서 팬션도 짓고 사계절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호수와 함께 즐기면서 임동이 안동의 관광 중심지로 자리잡아 경제적 가치도 높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0시 조금 넘어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보라색 꽃등을 단 등꽃 향기가 먼저 반겨줬다. 운동회처럼 만국기도 하늘 아래 펄럭이고 마침 윤병진 회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고향 지킴이로 있으면서 백주 년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그렇고 체육대회 행사를 위해 회장과 임원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진행했을지 끝까지 맡은 일을 다 해내고자 하는 뚝심에 존경이 가면서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차기 총동창회 회장인 손광영 시의원은 취임식을 해야하는데 마침 해외에 출장 중이라 49회 동기회장인 김진기 회장이 대신 취임 인사말을 전했다. 오래도록 안동 태화동의 일꾼으로 업적을 빛낸 만큼 우리 임동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해주리라 믿는다.
이어진 축사로 박재석 교장 선생님은 이름만 남은 동부 대성 사월 길산 천전 계곡 초등학교를 품고 천여 명이 넘던 학생들이 지켜온 백 년 역사의 임동 초등학교가 이제는 전교생이 열다섯 명에, 올해는 신입생이 한 명도 없었다며 귀농하는 분들이 있으면 동문들이 적극 협조하고 아낌없는 지원을 부탁했는데 교장선생님으로서 그 심정이 어떨까 헤아려보게 됐다. 55회 동기인 송우섭 임동면장은 오늘 체육대회를 기점으로 동문들이 이 운동장에서 오래도록 만남의 장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류필휴 고문님은 5년만에 동문들을 만나 반갑다면서 6월 1일 기산충의원에서 열리는 의병의 날 행사에 동문들이 많이 참여해 주기를 부탁했다.
매번 운동장 가운데에 있던 우리 46회 부스는 40회를 시작으로 한쪽 귀퉁이에 있었다. 바로 옆은 52회, 그리고 43회와 42회가 나란히 있다. 50회 55회 60회 48회 등 선ㆍ후배들을 골고루 섞어 부스를 배치한 집행부 마음 씀씀이가 엿보였다. 몇 명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몰라도 우리 부스에는 놀랍게도 전야제 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언제나 빠지지 않는 안동 식혜 한 사발에 갑자기 몰려온 이른 더위도 한방에 날아갔다. 옆자리 후배들이 건네주는 문어 한 접시도 맛이 기막히다.
우리 숙자 미영 총무는 일꾼 아니랄까 봐 본부석에서 어른들 챙기기에 바쁘고 기룡이 동생은 집안 산소 이장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여전히 햇볕에 탄 얼굴로 운동장을 누비며 궂은 일 마다않고 열심이더니 심판까지 본다.
첫경기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데 다들 몸사리는지 인원이 모자라는지 줄다리기 출전한 팀이 53회와 56회 두 팀 뿐이다. 삼세판 경기에 첫판은 56회가 승리했다. 56회 인원이 한 명 더 많아 무효임에도 선배들이 승리로 인정해줬고 두 번째는 자리를 바꿔 후배들이 선배들에게 적당히 힘도 안 쓰고 져주는 아량도 베풀었다. 마지막 판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하는데 환갑이라는 나이 숫자는 어쩔 수 없어서 결국 조금 더 젊은 56회가 승리를 했다. 53회도 멋지고 56회 동생들도 멋졌다.
다음은 훌라후프 돌리기다. 여자의 전용물인 훌라후프를 43회 류연혁 선배님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돌리는데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못 하는 게 훌라후프 돌리기인데 다들 어찌 그리 유연하게 잘 돌리는지 그대로 놔두면 하루 종일 걸려도 버텨낼 것 같아 두 개를 돌리다가 그것도 승부가 안 날 것 같아 세 개를 동시에 돌리게 했을 때에야 역시 후라후프의 힘인지 뱃살이 하나도 없고 날씬한 57회 동생이 1등을 하고 53회 2등, 54회가 3등을 했다. 이렇틋 즐거운데 이순신 장군 동상이 혼자 지키는 학교, 아기산 신령님은 묵묵히 바라만 보고 계실건지 이 드넓은 운동장에 아이들 웃음소리 넘치게 해줄 수는 없는 건지 묻고 싶다.
점심으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노래자랑이 시작됐다. 안동시향우회 행사때도 와서 노래를 불러준 류다연 초대가수가 사회도 보고 노래도 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우리 은희의 쓰러집니다도 한몫을 하고 다들 신나게 기차놀이를 하며 운동장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재경에서 먼 길 왔다고 배려해 준 건지 노래자랑 1~2등을 김은희와 김종현이 차지했다. 작은 체육대회라더니 할 건 다하는데 권기창 시장님도 축하인사차 와 주셔서 우리 임동 아직 죽지 않았네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안동이 낳은 트로트 신동 서지유 군이 노래할 땐 여기저기서 용돈이 막 나온다.
마지막으로 재선에 당당히 승리한 김형동 안동국회의원도 와서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안동시향우회에서 얼굴 보다가 우릴 보고 놀라며 임동이였니껴? 하며 놀랐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올 때는 신나서 왔는데 갈 때는 자석에 붙들린 것 마냥 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아쉽다. 늙지 않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친구들과 학교 앞 계단에 쫄래기 앉아 단체사진을 찍고 서로 잘 가라며 인사를 했다. 우리 향우회 박성수 회장님 사모님은 오셨다가 흐드러진 등꽃 향기에 취해서 한참을 앉아계시다 가셨다는데 우리는 그 등나무 앞에서 등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추억도 재산이라서 언제나 만나면 그리운 추억을 만들고 그 추억을 찾아 돌아보는 시간은 늘 행복에 젖게 한다.
5년 만에 열린 총동창체육대회 행사에
운동장에 들어서면서 펄럭이는 만국기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또 1년을 기다려야 그 울렁거림을 맛 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총동창회서 기념비를 세우고 남은 기금으로 약식 행사를 주관했다쳐도 내년엔 행사를 진행할 주관기수 없이 어떻게 체육대회를 치를 것인가?
그런 면에서 어려운 환경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선ㆍ후배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려고 애쓴 총동창회 윤병진 회장 및 김익한 사무국장과 집행부 임원들께 감사한 마음 담은 박수를 보낸다. 잘한 일은 칭찬하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서 총동창회가 물에 잠긴 터를 버리고 전국에 흩어져 치열하게 살아가며 타향살이에 지친 동문들에게 언제나 돌아가면 반가운 사람 한둘은 만날 수 있는 꿈속의 고향이 아니라 현실의 정다운 고향이 되게 하는데 한몫 하면 좋겠다.
사진: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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