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블로그에 있는 글을 번역기를 통해서 어렵사리 번역하여 게시해 봅니다.
2013.09.11일
한반도의 근대 견계사 (전편)
주제 : 식민지통치하의 견계사
[조선의 세퍼트견 발달은 정말로 빠른 템포로 눈 밝은 것이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 발달을 보인 데에는 좌기 제씨의 공적이나 크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인을 늑대, 늑대라고 놀란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호오 이것은 SV견(※독일 셰퍼드견 협회 등록견)이다. SV의 혈통서가 있는 개가 오자,
애견인들이 호기롭게 몰려와 혈통서와 개를 바라보며 거룩한 감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절은 지났다.
각처 곳곳에 세퍼트개가 충만해 왔다.
잇따라 우수견이 수입돼 SV 혈통서가 첨부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됐다. 당연한 성행이긴 하다.
평양 거주 일본 셰퍼드견협회 서울지부 서기산인(瑞気山人) 『조선의 S 견인』에서 1947년
오랫동안 양자 역사 논쟁의 장으로 여겨져 온 통치하의 견계사.
그 시대의 견계는 이랬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당시의 사료를 조사한 흔적조차 없습니다.
개에 대한 흥미나 애정도 없이 상대국을 때리는 소재로 개를 이용하는 사람들뿐이다.
우리들 애견가가 '외지 견계사' 편찬을 게을리 한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초 지식이 되는 교과서가 없기 때문에 축견사와 사상논쟁의 구별을 할 수 없는 무지한 아웃사이더가 설치고 다니는 거죠.
"당시 한반도에는 애완견, 사냥개, 군용견, 식용견이 대량으로 사육되고,
이를 통제하는 축견행정(광견병 대책 포함)이 정비되어 있어, 사육주를 지지하는 애완견 업계와
수의계로 구성된 근대 조선견계가 구축되어 있던 사실을 교과서화해야 합니다"
통치자측이었던 일본인의 손으로 말이야.
한반도의 근대 축견사도 복잡합니다.
·일반 서민이 기르던 조선 토종견
·일본인 정착민이 반입한 양견종
·제국군용견협회와 일본 셰퍼드견협회가 보급에 힘쓴 군용견종
·조선총독부의 토종견 보호
·조선총독부의 축견 행정 (들개 구제와 개 모피 자원화)
주변을 정리해 봅시다.
아이와 애견을 데리고 담소 중인 여성. 전쟁 전의 한반도에서
[중근세 조선 축견사]
일본견계와 조선견계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해 왔습니다.
대륙에서 건너온 야요이 개는 조몬 개와 교잡하여 현생 일본 개의 모습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에 온 백제인 중에는 천황을 모신 소데미츠(袖光)와 같은 '개 전문가'도 있었고요.
이들 조선 토종 견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 고유견은 청각후각이 모두 예민하여 발자국 소리에 의해 가족과 남과 괴이한 자를 판별하고
낯선 자를 보면 금세 주인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대문 안에서 금속성이 투철한 목소리로 포효하여
집을 잘 지키는 개 노릇을 한다. 아침, 낮, 저녁 경 등의 한때를 부락의 길목, 또는 논밭, 경등에
평소 많은 수의 역할을 한다.
사냥견의 경우에는 사냥감 탐색 포획에 있어 정확하고 행동은 민첩용감, 격투기술은 교묘하여
사냥감의 경근목을 걸어 물어 즉사시키는데, 결코 그 사냥감을 잡아먹지 않아서 사냥 견으로 우수하다.
대체로 총명하며 사육주 또는 그 가족의 것을 애모하며, 순종적이고 귀가성 발달했으며,
옛 주인, 옛날 살던 집을 잊지 않는다.
거친 식사를 감내하기 때문에 미식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또 분변은 반드시 집 밖에 누고
흙을 긁어서 덮는 습성이 있다. 수명은 13년을 사양한 예가 있다. 진도에선 10년 넘은 개는
고기를 먹는 욕심이 쌓여서 마침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믿고 10년을 기약해 죽이는 관습이 있다.
사육관리는 매우 간단하며, 특별한 개집을 주지 않고 모두 처마 밑, 마루 밑 등에 자유롭게 침소를 선택한다.
사료로서 잔반(주로 좁쌀), 잔재(육류는 불가)가 주어진다. 그러나 많게는 특별히 이것을 주지 않고 모두 스스로 찾아다니며 분변잔재물을 섭취하며 성장한다. 기존 개의 먹이 종류 및 분량에 대해 조회할 수 있는
답변은 제5표에 나타냈다. 이것을 보면 잔반이 많고 분량은 아침저녁으로 2회에 5합 내지 2되의 범위이다."
조선총독부 사료에서
조선총독부의 개 사육 현황은 상세하게 조사되어 현재로서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것은 진돗개 유형뿐만이 아닙니다. 남겨진 그림을 보면, 다양한 품종이 일찍부터 도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개들이 근세 일본에 수입되던 '당견' '방견(삽살개)'의 뿌리일지도 모르겠네요.
170에서 220년쯤 전에 그려진 조선의 개들. 이곳은 토종견종으로 목줄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와구지도』에서
페키니즈로 추측되던 개그림
※ 삽살개의 일종으로 추정되며 페키니즈와는 체격이나 체형이 많이 달라서 필자의 무지로 인한 기술로 생각됨.
250여 년 전에 그려진 김홍도 단원 그림 투견도. 마스티프 같은 개에요.
※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법을 보면 아마도 이후의 그림으로 생각되므로
이 그림을 가지고 250년 전에 마스티프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무리.
[근대 조선견계]
최초의 가축인 개는 인간 사회의 성쇠와 함께 해왔습니다. 그
래서 토종견의 보존은 '오래된 시대를 아는 단서'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견이 보호되어 온 것도 조몬 시대에 시작하는 '일본인과 개와의 관계'를 찾기 위한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서양견과의 교잡화로 소멸되기 시작한 일본견과 마찬가지로 조선 토종견도 근대화의 물결에 노출되었습니다.
먼저 메이지~다이쇼 시대 유행한 레저헌팅으로 한반도에는 포인터와 세터를 비롯한 대량의 양견이 반입됩니다.(※당시는 식민지하 이고 사냥을 천시하는 의식이 존재하여 극히 일부 개화파 부유층에서 서양개를 키웠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대량의 서양견이 반입되었다는 것은 일방적인 주장임)
근대화로 자연 파괴가 진행되는 일본에서도 좋은 사냥터를 찾는 일본인 사냥꾼들이 대거 원정.
수렵계를 시작으로 한일 견계의 교류는 활발해졌습니다.
섬나라 일본과 달리 국제화가 토종견에게 미친 영향도 컸을 것입니다. ※일본이 더 심했을 것은 자명한 것임
한반도에서 개 품평회가 시작되는 것은 뜻밖에도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인 다이쇼시대.
겨우 10년 정도의 지연밖에 없습니다.
다이쇼 11년 9월에 개최된 조선산업공진회 축견대회에는 60마리의 개가 출연하였고,
이미 "독일군용견(셰퍼드를 말하는 것)"도 참가하였습니다.
경기도 포천군에서 촬영된 조선의 개들. 1942년
※ 마지막 사진의 개는 콜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선시대 개 그림에도 유사한 개가 보이므로
토종견으로 볼 수도 있음
양견을 포함해 당시는 어떠한 품종이 유통되고 있었는가. 잉글리시 포인터 사냥개 에프군의 조선 애완견 상인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1930년의 광고에서
언뜻 구지라는 말이 있는 할아버지다. 이번 주인은 어딘지 모르게 친근한 듯, 한편으로는
또 다른 훈훈한 맛이 감수되었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에프야"라고 엄하게 명명해서
우리들의 성격이라든지 특징이라든지 무점을 알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스타일은 만족스럽다」라고 물었기 때문에, 조금 자신있는 콧대를 움직일 수 있으면
「그러나 저능해서는 처치가 나쁘다」라고 말했다.사실은 틀림없지만 얄궂은 아버지라고 감탄했다.
당분간은 여러가지 멘탈테스트가 되는 것 같아.
독일계 에스녀도 엽견으로는 척척 한 사람 몫의 기능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 2월부터 교미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닭장으로 만든 두 칸짜리 철망으로 된 안에
세파트와 우리들을 처넣어 엄중한 감독을 받게 된 것이다.
실용적인 독포와 내한력에 약하지만 수많은 특징있는 영포의 혼혈을 낳게 하여 시험하는 것이
남편의 고안인것 같다. 부모의 마음을 자식은 모른다던가, 에스는 우리들을 싫어하고 저급한 러시아견
벨군과 조선개 왈리를 기묘하게 환영한다. 그들의 질투심으로 일족의 원만은 적지 않게 상처를 입었다.
타카츠 신지 『엽견이 될 때까지』요리 1927년
1927년에는 조선 유일의 개잡지 '엽과 개'사가 주최하는 시정기념 조선박람회 축견전람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때는 많은 셰퍼드가 출진됩니다. 이후 조선 거주 일본인 사회에 셰퍼드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칭다오(靑島)와 내지(內地)로부터의 수입 마릿수도 증가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 셰퍼드 클럽'이, 이듬해 10월에는 '경성 셰퍼드 연구회'가 서울에서 발족했습니다.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개 유통도 꽤 활발했던 것 같습니다.
문
"일단 사육중인 강아지(생후 9주여 발육이 잘된것)를 조선편향 희망자에게 분양하여도 좋고,
얼마나 유약한 것이 과연 수송을 잘 견뎌야 하며, 만약 수송을 잘 견뎌야 한다면
어떤 주의와 방법으로 보내야 안전할까요?"
효고·H생
답
조선이라고 해도 상당히 넓기 때문에,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한 대답도 할 수 없습니다만,
장거리 수송은 3개월 이후로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보내기 전에는 식이를 특히 잘 해서
충분히 저항력을 높여 내는 것입니다. 수송 방법은 시간적으로 봐도 기차가 좋다고 생각해요.
KV·와다(1940년)
전쟁 중 한반도에서 사육되고 있던 복서. 다양한 서양견이 일본에서 도래했습니다(1940년 광고에서).
애완 동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애완견 행정도 정비되었습니다.
우선 축견 단속 규칙에 따라 축견(반려동물)과 들개를 구분하고, 들개 구제에 의한
광견병 대책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축견의 보호단속에 관한 것은 1933년 7월 함경북도령 제16호를 통해 축견단속규칙을 제정하고
축견에는 남편 사육자의 주소, 성명을 기입하는 목고리 또는 표찰을 머리에 붙이고 세시무르 일과
나리거르니부규정의 병용경환 또는 다표찰 등"
함북위 제288호 함북경찰부장
1933년 7월 29일
만주사변 이후, 군견보국 운동은 한반도나 대만 권역에도 확대. 군견자원 모체로서
재향군용견에 대한 보호책도 취했습니다.
"관하 각 경찰서장님
제국군용견협회 회장원 축견보호 건
"주제의 건에 관하여 제국군용견협회 회장요리 좌기노도리 신월아리탈니부동협회제정의
목걸이(별지참조)를 부착하고 있는 축견에 대하여는 그 훈련을 방해하고 또는 들개미 포살시
오입지를 포획하는가여사무지하물론 그밖에 관하여 특별히 보호하는 방법"
충청남도 경찰부장 충남위 제339호 1933년 8월 3일
[조회2계의 귀회들원견보호2관한건 양해.] 직접 관하에 하달보호방취계히신수백후조 차단급 회답후"
1933년 8월 5일 전라북도 경찰부장
부산 거리를 걷는 개
구체적인 사육 마릿수는 1980년의 통계에서는 다음과 같다.
"총독부 위생과가 올해 3월 말 현재 조사에 의하면 총두수 139만 147마리에 달하고, 함남의 22만 3450마리,
경북 20만 7천 4백 38마리가 많은 편이며, 가장 적은 것이 전북의 4만 5천 8백 65마리이다.
종류별로는 포인터2천5백82마리, 세트터천3백50마리, 일본종 6백48마리, 테리어2천4백43마리,
불독2백13마리, 기타 6백80마리, 나머지는 조선에서 온 종이다.
조선의 축견수에서
170여 년 전에 조선에서 그려진 [초구도]와, 쇼와 17년에 촬영된 조선의 잡종견의 비교.
수이 교잡종이 오랜 기간에 걸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우리 토종견인 바둑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
귀하게 여겨진 양견과 달리 조선 토종 견종은 방치되어 있습니다.
(방치 되었다기보다는 별다른 의식없이 그대로 사육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음)
"현재 조선에서 개 사육 목적은 번견, 식용, 오물청소, 사냥엽, 애완 등이며, 특히 오래된 이전에는
제사의 희생, 손님의 향응, 서중의 영양 등(조선에서는 일반적으로 삼복 특히 구력 6월 15일에
박살공식의 관례가 있다.구장으로 상미하다.대체로 황구가 환영한다)
이 주목적으로, 빈부의 구별 없이 거의 집집마다 사육되었다.
하지만 문화 교통의 개화에 따른 화수엽, 애완용 개가 점차 선내 각지로 이수입 분포하고,
재래종과의 사이에 자유번식이 행해진 결과 고유형질은 점차 사라져 갔다(『조선의 축견수』에서).
이들 토종견이 사라질 것을 우려해 1938년에 진돗개를 천연기념물 지정한 곳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지정했으므로 안심」이라고 생각했다면, 쇼와 14년에는 지스텐퍼의 대유행으로 5분의 1이 병사.
겨우 역병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면 더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축견연맹』에서 1932년
쇼와 18년의 진돗개 현지 조사에서는, 애완동물상의 구매에 의해서 섬 밖으로의 유출이 발각되었다.
심지어 섬 내로 이입된 서양견과 진돗개가 교잡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져 당국을 당황케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1940년 6월말 진도로 건너가 실사했다. 진돗개는 1940년 모리 박사에 의해 우수견으로
인정된 이후 1938년에는 진돗개보호회가 조직되어 모리 박사 집필의「진돗개」를 간행 배포하여
등록제로 선정했다. 도외 반출은 군수의 허가제(현재는 도지사)를 채택해 1932년 7월 현재
전체 진돗개 수 650마리 중 같은 해 11월 현재 등록된 개 313마리였다.
이외순계견의 보존번식에 대한 아무런 적극적 실시 없이, 셰퍼드, 셋터를 섬 안에 산견하여,
이미 그 개들 사이에 잡종형의 것도 상당 부분 볼 수 있었다. 가지 우량형의 섬 외 반출(무허가를 포함한다)
증가하여 당시의 실상을 그대로 방임하면 이 섬의 순계는 조만간 근절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유키히 1940년 8월 1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815호로 진돗개 보존이 강화되었지만,
그러나 운용 단속을 장려하여 적극적으로 증산할 수 없다"
카부라기토쿠지 쇼와18년
조선 고유견 1952년(※ 일본개의 모습을 보이고 있음)
한일 견계의 교류라고 하면 일본견과 조선 토종견의 교잡화에 대해서도 적어 둡시다.
현대의 '일본견계=일본열도의 개'라는 섬나라 시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근대 일본의 개는
외지를 포함해 교잡화가 진행된 시대입니다. 일본견과 서양견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차우차우나
조선의 누렁이가 일본개에 미친 영향도 직시해야 합니다(미카와잡견의 사기 소동 등도 있었고요).
격감하고 있던 일본 개를 부풀리기 위해 교배용으로 상당한 수의 차우차우와 조선 개가
일본 열도로 이입되었습니다. 차우차우 교잡견은 자세가 좋아지기 때문에 상품 가치도 매우 높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순일본개'라고 부르는 교잡견이 전국의 애완 동물 가게에 입고되었습니다.
전쟁 전에 악덕 브리더가 마구 팔아댄 차우차우 교잡 일본개는 전국에 정착.전후(前後)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피해를 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아래는 조선으로 이입된 기주견 기록입니다.
한반도로 들여온 기슈견 '미염'尾染
"미염은 대부분 이것과 동형, 사지는 내의 욕심으로는 귀가 나빴다. 이 개를 본 친구는 역시
귀가 안 좋지만 위에서부터 소장하고 싶어 하는 것을 갖고 싶다. 아무튼 필자도 요즘은
이 정도 개라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이것 또한 앞에 기록한 개상인이 데리고 갔다.
이 개는 곧바로 일보경성지부로 보내져 당시 서울에서의 최우수 암컷이라고 불렸다니
아쉽게도 도망쳐 달아난 아래 상이다. 본견 사진은 보여드릴 수 있어"
후루이치집 『개 찾기 만기』에서 1940년
물론 당시에도 무절제한 개의 이입은 금지. 가축전염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본해를 넘는 애완견은
엄격한 검역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래는 다이쇼 시대의 북-일간 사냥개 검역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 땅에 광견병 유행 때문에, 내지로 데리고 돌아가는 개는 하관검역소에 맡겨 두는 것이 좋고,
행복비 부산총포화약주식회사 단속 고바야시씨의 내한도 있었기 때문에, 내지에서 광견병 예방주사는
하고 있었지만, 증명서 지참을 잊었기 때문에, 이누조 미야무라씨에게 맡기고, 귀가 후
경찰 수의사의 증명을 얻어, 그의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간 후에도 파리호, 에이호에 대한 생각은 떨쳐지지 않아요.
하지만 앞으로 열흘이면 증명도 되고, 자연하관 검사도 통과할 거라고 생각해요."
치쿠젠 HA생 "바다를 넘어 울산으로"에서 다이쇼 12년
지역 고용인에게 업혀 영산강 상류의 황룡강을 도강하는 야마모토 에이노스케와 사냥개 벨
(다이쇼 9년 조선 출렵기에서)
[조선 셰퍼드계의 발전]
통치하의 한반도는 자연 파괴도 심하지 않았고, 내지에서 사냥을 하는 여행을 포함한 사냥개계는
활황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어 세력을 확대한 것이 군견보국운동의 시류를 탄 셰퍼드 단체입니다.
한반도에 저먼 셰퍼드가 반입된 시기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이쇼 11년 9월 조선산업공진회 축견대회에
나온 개체가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집니다.
서울케넬구락부(SKC) 멤버였던 하나부사 에이이치씨가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니,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경위를 살펴보겠습니다.
협찬회의 도움과 각 축견단체 공동주최인 장케에게 조선에서의 첫 번째 행사라고는 하나,
조선이 그 패권을 겨루고 출연하는 사람 60여두. 각각 그 특징을 발휘해 상당한 인기를 부르고 있었다.
장내 한 켠에 거칠면서도 딱딱하고 균형이 잡힌 선귀의, 누구에게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을 안광을 보이고
떨어져서 떨치는 『독일 군용견』『스미이가출진』의 팻말에 계류된 종류의 구별되지 않는 개가 있었다.
아마도 본견이 조선에서의 시에퍼드견의 원조라고 생각한다(경성케넬구락부하나부에이이치씨)."
두 번째 셰퍼드가 반입된 것은 타이쇼 13년경. 후지키 상점이 창고의 감시견으로서
산둥성 칭다오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직후에 병사했다고 한다).
쇼와 2년에는 전출의 하나후사씨가 3마리째를 외국인으로부터 양도받아 「당시 정확한
견종명을 알지 못하고, 여러 서점을 뒤진 결과 「울프·도그」라고 말하기로 해 두었다.
그 후 치바 보병학교 출신의 병정에게 늑대견이라는 말을 들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듬해, 일본에는 일본 셰퍼드 클럽(NSC)이 발족. 동시에 독일이리개, 독일양치기개, 울프도그,
알사시온 등으로 혼란스럽던 호칭도 '저먼 셰퍼드 도그'로 통일되었습니다.
그 직후부터 한반도에서도 셰퍼드가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조선 셰퍼드계의 여명기를
지탱한 곳도 독일 조차지였던 산둥성 칭다오였습니다
일본 셰퍼드계와 조선 셰퍼드계는 아오시마 셰퍼드계를 공통의 루트로 하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일부러 일본을 경유하는 것보다 강 건너 칭다오에서 셰퍼드를 수입하는 것이 빠르니까요.
'조선 셰퍼드 견계의 발전을 일본견계가 주도했다'와 같은 생각은 아마 잘못된 것일 겁니다.
셰퍼드 사육 붐이 일어난 것도 일본과 같은 1930년 전후부터.
1929년 10월 시정기념 조선박람회 축견전람회. 당시 조선 유일의 개 전문잡지 '엽과 개'사
주최 협찬회 후원으로 사흘에 걸쳐 개최되었다. 각 엽견의 소질은 현저하게 개량되어,
외국산 또는 그 직계와 상당히 유명한 케넬 출신의 개가 많았다.
늑대견도 지금은 세퍼드견으로 이름이 바뀌어, 시마다씨(릴리), 오오츠카씨(불명),
다니이씨(불명)의 세 마리 외에 동도에서 훈련 실연을 했다는 「로츠테르담」의 혈통서를 가진
「마츠쿠스호」도 출진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세퍼드 개의 유래가 희미하지만 일반적으로 인식되자,
호사가의 호기심과 우월감 때문에 일약 유행견으로 귀하게 여겨지게 되었고, 급히 개 브로커,
무허가축견상의 대두와 함께 칭다오의 편선마다 몇 마리 또는 십여 마리씩 수입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부사 에이치 씨).
1930년 3월에는 서울의 축견상과 칭다오의 브로커에 의해 '조선 셰퍼드 클럽'이 발족.
다음 달에는 셰퍼드 품평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조선세퍼드클럽 주최로 부 남대문초등학교에서 개최되며 도지사, 부윤, 기타 명사의 내방 있음.
칭다오에서 온 원정견 리타호(수입견으로 노리스 직계 단미대형암컷 니시와키씨 소유)의
돋보이는 훈련모습에는 만장 탄식을 머금고 구경했다.
이 여세를 틈타 며칠 후 형사범인의 추적을 맡았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은 웃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이소노 씨의 케넬에는 도쿄 카메타니 씨부터 흰색 치실, 칸사이에서 같은 흰색 지연, 그 외
아오시마 아 씨의 레오데하임 직계 아이가 20여 마리 사육되고 있었다(하나부사 에이이치 씨).
여기 조선 셰퍼드구락부에는 세인의 관심을 사지 못하여 용두사미로 끝났다고 합니다.
만주사변 직후인 쇼와 6년 10월에는 '경성 셰퍼드 연구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필자가 이미 NSC의 멤버였던 관계상, 필자를 중심으로 동호 아마추어 십여명에 의해 결성되어
훈련소를 마련하고, 카토 린조씨를 전문 훈련사로 세퍼드개의 연구와 훈련에,
여러 가지 소식이라든가 잡지에서 토의하고, 일본, 아오시마의 난쟁이와 관계있는 사람이라도 오면,
당장 좌담회를 여는 열심히 요즘의 애견가에는.
당시의 종견은 모리타씨의 호프 후온 요로우(아버지 레오 다하임, 어머니 벨라)상하이
이소노씨의 마쓰쿠스, 오스트리아산 리터호. 필자의 견사에는 강아지이면서도 졸프 아사히
(아버지 후올카 베른, 어머니 베야타 치야이나펄 SN44346)가 있고, SV혈통서는 조선에서 최초.
계속해서 외부로부터의 참가 단체도 잇따릅니다.
만주 사변을 기회로, 관동군의 군견 배치는 확대. 육군이라고 하는 「대기업 취직처」의 출현을
찬스로 파악한 셰퍼드 단체는, 적극적인 외지 및 만주국 진출을 도모합니다.
일본 견계에서 맨 먼저 시작한 곳이 일본 셰퍼드클럽(NSC) 서울지부였습니다.
세퍼드 광의 관점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며, 역시 훈련전문적인 남자입니다.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의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산을 뛰어다니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습니다.
이웃 들이 엄청 말을 많이 하지만, 어리석은 아내가 신경쓰는 것만으로도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5일 정도 전에 TSC 이사 사사키 씨의 보살핌으로 페츠켄의 아이가 왔습니다. 3개월짜리입니다.
이로써 암수 두마리가 되었습니다.지금부터 열심히 훈련을 마무리해서 내년 경기회는
도쿄까지 원정을 갈 생각입니다.도깨비가 웃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현지 멤버 일동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일본 셰퍼드 클럽 경성 지부 상광의신 『조선지부 통신』에서 쇼와 7년
같은 해 7월 21일 제국군용견협회(KV)도 조선지부를 설립했다.
이것은, 「내지의 NSC가 KV에 통합된 것 같다」라고 착각한 재서울의 NSC 멤버에 의한
용감무쌍한 것입니다(뭐, 조만간 NSC는 KV에 강제 합병됩니다만).
KV설립발기인중 조선을 대표해 야마다 사다스케씨 및 필자가 말석을 더럽히고 있는 관계상
전국 각지에 괴해 지부 인가를 받았다. 도쿄에서 군용견연맹과 동거하고 있는 NSC가 주체가 되어
KV가 결성된 것으로 믿고 NSC 지부를 해산하고 KV 지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던 것이다
(하나부사 에이이치 씨).
다음 8년 3월, 아오시마 셰퍼드 독 클럽(TSC)이 서울 지부를 설립.TSC의 조선 진출은
동양의 원산지 칭다오에서 강아지를 사들이는 편리와 사이비 브로커에 의한 피해자를 적지 않게
괴롭힐 목적으로 칭다오의 사사키, 이누이와 협상해 설치했다고 합니다
(해외 통신판매망을 악용해 삼류견을 팔아먹는 악덕 애완견이 대량발호하고 있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셰퍼드의 소개 창구로 TSC는 서울지부를 만든 셈이네요.
1933년 7월에는 이 곳의 등록견 8마리가 보병 제78연대에 헌납됩니다.
조달창구가 개설되면서 조선 셰퍼드들의 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TSC도, 1935년을 마지막으로 KV에 병탄되어 버립니다(KV 아오시마 지부로 재편).
서울의 공원에서 남편과 산책 중인 강아지.세터 아니면 리트리버인가요?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며 조선견계는 근대화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는 이 지역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의 근대 견계사 (후편)
주제 : 통치하의 견계사
"경성지부 관상회 개최가 거론되어 기운은 매우 농후해졌지만 조선의 겨울은 이르다.
오늘의 냉방에서는 잠깐 망설이기만 하면 언제나 있던 상태로 내년 봄 전에 힘을 쏟게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당분간 겨울잠을 자게 되니까 외롭기 짝이 없다. 봄 4월 지금부터 지부전이 기다려지는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정확한 세퍼트견 인식은 여섯자리? 특히 헤매는 것은 심사원에 의해 판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심사위원회의 충실과 통일은 각하의 급선무다. JSV와 KV와의 심사규격은 차이가 있는지 아닌지.
이것은 JSV견이다 이것은 KV견과 같이 출진자는 JSV와 KV에는 별도의 입상목적견을 필요로 한다.
S개가 JSV견 KV견과 전혀 별종이라면 어떻든 국가적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반 애호자를 망설이지 않는
판정을 하기 위해서라도 JSV와 KV의 합체는 물론 오매 애호자로 보았을 때 낭비를 제외한 점에서
보더라도 통제하국책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무슨 상관이든 간에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볼 수 있다. KV지에도 쓴 적이 있지만, 일부 위정자의 감상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회원을 희생시키는 일은 가혹하다.
근본 방침에 입각해야 한다. JSV와 KV에서는 그 규구의 차이는 나도 알 수 있다.
회원 각위도 JSV회원임을 자부한다. 그러나 군견보고국의 근본방침이 동일하다면
서로 양보해야하는 것이 있지않을까 하고 우고한다. 바보같다,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진다…….하지만 선결문제로서 심사위원만으로도 JSV, KV는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확히 S견을 인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따라서 S견 향상은 필연적이다.
모르는 놈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하면 그만이다. 통제경제 하물자 절약하는 판에 무슨 소용인가 마는
조선에서만도 그렇지 못할까
평양 거주 야생 『쓸데없는 만담』에서 1932년
처음에는 사이좋게 운영하던 JSV와 KV 조선지부도 전쟁 중에는 대립 관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내지견계의 영향으로 외지의 군견 보국 운동도 왜곡되게 되어 버렸습니다.
통치하의 개계가 발전한 것으로, 공적 기관에 의한 개의 배치도 확대. 한반도에서도 잇달아
군견이 출정해 일본의 전쟁과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조선견계는 인접한 만주국견계와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린과 랴오닝에는
만주군용견협회(MK)가 활동해 왔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견계와의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경계선도 지키고 있던 것도 개였습니다. 만조 국경지대에는 만주국 세관의 감시견이 붙어,
밀수업자나 마약 조직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그들 만주국의 경비견도, 중국의 칭다오 공안국으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습니다).
당시의 동북아 견계는 광역 네트워크를 통해 발전을 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역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특정 지역의 개업계 사정을 「미개했다」 「일본이 발전시켜 주었다」
등으로 착각 하는 것입니다.
대량의 기록이 있는 만주국측 세관 감시견에 대해 조선측 국경 경비견 사정은 불분명합니다.
사진은 순찰에서 귀환한 조선 국경경비대원을 마중 나온 시로군.
[조선 셰퍼드계 내분]
도쿄에서 설립된 KV는, 내지와 동시 병행으로 한반도나 대만에도 지부를 전개했습니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지부 사무실을 서울의 군사령부 내로 옮기고 5월 7일에는 KV조선지부를
발회하고 지부 제1회 군견전람회를 개최. 8월에는 조선지부 훈련소도 낙성되기도 하였구요.
1934년 6월에는 광주분회, 10월에는 원산 및 함남분회가 속속 설립되었고 11월에는 제2회 훈련경기회,
1935년 5월에는 제3회 전람회와 사업규모 확대.
"그대로 일본과 같이 한반도를 석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발족 2년이 지나자 KV조선지부에서는 멤버들에 의한 내분이 발발했다.
교제로 입회한 간부들이 개를 제쳐 두고 파벌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이 추태에 정나미가 떨어져 탈회자가 잇따랐습니다.
「쇼와 9년 5월, KV지부 설립 당시부터의 임원 사임. 경성연구회, NSC 지부, KV 지부 설립까지
일관할 수 있는 이상과 사도를 상계하는 철칙의 허리에 시종 S개의 건실한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불구, 지부장의 프로중심주의와 권력에 모이는 무연견 간사일에 0000석, 마침내 그 목적달성
곤란을 감지하고, 동지의 사임을 보게 되었다(서울·케락씨)
탈회자인 요코이, 오가사와라, 스기우라, 야마다, 츠네히로, 센무라, 타키구치, 타니오카,
하나후사 각씨는, 견계 재건을 도모하는 「서울의 10인조」를 자칭했습니다.
먼저 KV 임원을 사임한 이상파로 결성돼 불언실행, 군견보국의 실상을 들려는 동지들에게
일체의 선전을 삼가고, 자신을 비우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취지.
이 10인조는, 쇼와 10년에 「서울·케넬 클럽(SKC)」를 설립.이후, 내지의 축견 단체와 제휴를
도모하면서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군부로부터도 외면당한 KV조선지부는 훈련소를 폐쇄하게 됩니다. 철거지는 조선군 및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인수하여 1935년 11월에 조선경비견구사로 재시작했습니다.
"1935년 9월, KV지부 사무소를 군부에서 부청 내로 이전합니다. 마침내 군부의 지지를 잃고
KV지부는 군부를 몰아내고 필자 등의 땀과 열로 만든 훈련소를 폐쇄시켰습니다.(하나보 씨)
한반도에서 사육되던 일본 셰퍼드견협회 등록견.1940년의 광고에서
KV조선지부의 실패로 조선 셰퍼드계의 성장도 저해됩니다. SKC를 현지 시찰한 일본
셰퍼드견협회(JSV)의 나카지마 이사는 그 정체된 모습에 혹독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경성에 있는 시에퍼드의 우수한 것을 수십 마리 보여 주셨습니다. 수입견(독일산 삼세) 두 마리,
암수도 보았습니다. JSV전에 출연하면 어느 정도로 갈지 조금의 사양도 필요 없으니
연구참고를 위해 말해달라고 여러분의 요구를 강요했기에, 갈취당할 각오로 직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내지의 JSV전이라면 회의장 입구에서 출진을 거절하겠습니다. 한 마리의 수입견(우츠드계열의 수컷)은
확실히 V상급에서 종견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 마리의 엘리츠히 계열의 임브리딩은
극도로 엘리츠히 계열의 장단을 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 대부분의 개는 박살조입니다 (반립치노 도망을 치고 허리 운운했습니다. 우치, 즉 도쿄,
오사카보다는 5년 반 정도 늦었습니다. 수캐의 대부분이 암캐를 닮아서 중성인 것들만 많아요.
그리고 뒷다리 비절이 두드러지게 나빠서, 따라서 전신이 형태를 이루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처럼 내 눈에 비친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저는 제 명견을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도중에 오사카에서 이치가쿠쇼를 방문하여 카를 미유러 군
(※재일독일인.하쿠린 셰퍼드 견협회의 공인 핸들러) 도쿄에 오기 일주일 전,
6월 10일 견담을 해서 쿠르드, 오덴, 돌프, 마시야 등의 것을 세계적인 명견을 보고,
모치즈키 씨의 올팔, 안힐데, 겔라, 스즈키 씨의 크로틸데, 미야카와 씨의 오딘의 후태의 암컷,
치수, 홀카, 베티나 등의 우수한 명견도 '크로틸데, 미야카와 씨의 오딘의 후태의 암컷에서 '우수'입니다.'
흑랑장 『여보의 나라로 여행하여』에서 쇼와 9년
일본견계 인의 막말에 분발하는가 했더니 서울 개계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나카지마씨 귀경(※경성의 의미), 여러분 집합석상에서 경성견계의 보고 유지후유기절
경성의 S개는 박살낼 만한 것이 많다라는 예의 구로라쿠쇼 일류의 신랄한 비판 황공하여,
밉게도 내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하신 이이기로서는 일화지후를 용서한다.」
요코이 증지 SKC 회장으로부터의 소식
쇼봉~
제국군용견협회 조선지부 제7회전 1932년 4월 9일
[조선 셰퍼드계 재편]
여러 지장들을 극복하며 조선견계는 근대화에 매진하겠습니다.
1936년 4월, NSC 소멸로부터의 재기동을 완수한 JSV는 외지에 진출. SKC 요코이 증지가
회장 겸 JSV 서울지부를 출범시켜 한반도 활동에 나섭니다.
KV의 내분에 곤란을 겪고 있던 일본 육군은, SKC와 JSV에 재건을 의뢰했습니다.군부 및 양 단체는
소동의 원인이 된 KV 간부를 해임 추방하고, 요코이 지부장을 보내 재시작을 도모합니다.
1936년 8월 KV 지부 사무소 재이전 및 지부장 경질.
지부장 사이토 큐타로
사무소 후나이 아이쿠초 곡물조합 내
1934년 말부터 임원 중의 마찰이 점점 심각해져 프로를 같이 하면서 언제 끊어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져, 일반적으로는 그 존재를 잊을 수 없어, 전 천4백 명의 회원에게 총회의
통지를 발송하면서, 출석자 근소하게 두세 명에 지나지 않는 참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1년간 묵시하고 군부는 정화 숙청에 나서 대승적 견지에서 애견가들의 후원을
구하는 의미에서 지부의 고문인 SKC의 맹주 JSV 지부장 요코이만큼 필자에게 처치에 관한
의논이 있었다(하나보씨).
이렇게 해서 SKC가 JSV와 KV를 통솔하는 기묘한 구도의 조선 셰퍼드계가 탄생했습니다.
안에서는 의리 없는 도그파이트를 펼쳤던 두 사람도 서울에서는 사이좋게 활동하고 있었지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조선 셰퍼드 역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이리하여 반도견계는 명랑해지고, 도쿄를 비롯한 각지에, 또는 잡지의 논단에, 그 불통제와
비상도를 떠들썩하게 KV, JSV합체문제도 독차지조선에서는 KV, JSV의 동일지부장, 동일간사로
사실상 합동실현하며, 개계 트러블의 소인을 제외한 것은 독차지견계.
KV, JSV 각 본부의 기존 왕래를 떠나서 지금 만약 전국 각 지부가 사실상 합동 또는 이와 비슷한
형태를 보일 경우 본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식자의 판단에 맡기기 나름이다.
하나부사 에이이치 '각지 시에퍼드계'에서 1947년
불필요한 항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조선 셰퍼드계는 급속히 재흥. 여러 단체를 통해
반려견들에게도 사육 훈련 노하우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매사냥개의 노하우를 일본에 전수했듯이 한반도는 원래 사역견 훈련에 능한 지역.
애견가가 증가함에 따라 우수한 핸들러와 애견 보이(사육 위탁 아르바이트)의
현지 고용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昭和 13년의 촬영
[한반도의 군견보국운동]
일본군에게 셰퍼드 사육이 보급된 한반도는 군견의 일대 조달지가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경기대회나 구매회도 활발히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1947년 4월 18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지부 제5차전의 모습.
남대문초등학교 교정이 회장이었어요.
출진견 계류소
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출진견들
서울 같은 심사 풍경
한반도에서 출정한 군견들은 전쟁터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무용전이 활발히 보도된
일본이나 대만과 달리 그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
조선 제4회전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조선지부 전람회 입상견 기념촬영
昭和 11년
-
조선 제4회전
이 전람회에서 심사를 받는 도베르만
- 조선 제4회전
마찬가지로 에어데일의 심사중.
[조선지역 견피 이용]
통치하의 조선견계에 대해서, 근년 분규하고 있는 것이 「개털 공출」입니다.
진돗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한편, 조선총독부는 들개 구제와 불요견 수매를 통한
광견병 대책에 힘썼습니다.
이것은 광견병이나 야견교상 피해로부터 지역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며, 일본 본토의
행정 기관의 축견 단속과 같은 것. 광견병 대책사나 축견행정사로서 다루어야 할 주제지만,
한국에서는 '총독부가 조선 토종의 개 멸종을 도모했다'는 등의 의미 불명의 음모론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거에 공을 들이는 의미가 없잖아? 라는 논리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제 증오심 때문에 한반도 광견병 대책사나 축견행정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측의 왜곡에 관해서는 '한국견사=견육식'으로 꽉찬 일본과 같은 레벨이며, 한일 양측 모두 시야협착으로 상호이해가 진행되지 않는군요.
그러면 들개 구제나 폐견 수매를 하지 않고 광견병의 만연을 방치하고 있다면? 총독부는
광견병 대책을 게을리 해 피해를 키웠다!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비난 받았을 것입니다.
총독부의 해수 구제가 일본인이 조선늑대를 멸종으로 몰았다는 비난받는 구도와 똑같네요
(일본늑대사에서 쓴 것처럼 엽총 소지규제가 유해산짐승의 발호로 이어지고 일본인이 누쿠테를 쏘아
가축 피해를 확대시킨다는 유언비어로 발전. 항일운동으로의 비화를 두려워한 총독부가 해수구제에
나선 속사정 등도 있었습니다).
감정론과 역사 왜곡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추적해 봅시다.
내부적으로는 샤미센(가죽장갑이나 핸드백 등)의 소재로 재활용되었던 포획된 들개의 모피가
한반도에서는 군수 원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쇼와 6년에 육군피복본창(陸軍皮服本倉)이 조사한 데이터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육군에서도 주로 갈색 개 모피를 일부 방한 피복의 재료로 다갈색 토끼 모피 또는
양모피의 대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전술한 조건(※모량풍부,솜털다,모질유연,모기장,모락소,
모절무,탈모무,가죽의땀샘소,경량,모색보호색,가격저렴,면적대)을 구비하고 있는
개털은 내지는 거의 산출되지 않고, 자작나무,만주산은 상당량이다.
조선의 사육수는 약 1700만 마리로 산정되었고, 모피로서 생산량은 1년에 약 10%라 칭해지며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주요 산지는 평안북도, 평안남도, 강원도, 함경남도, 전북 등이며,
특히 서북 조선지방의 것은 품질이 양호하다. 다음으로 조선산 견모피의 산출 및 수출 상황을
표시하여 참고로 한다(1951년 조).
육군피복본창 『개가죽의 이용가치』에서 1964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초기부터 한반도에서의 견피 이용은 확대되었습니다.
"장기전 하에서 개가죽은 군수용품으로 방한구로 가공되는 외에 최근에는 소가죽의 대용으로
그 효용을 인정받아 경북도에서는 선도 도내 36만호의 농가를 주체로 '개를 기르게 한다'는
표어로 축견 증식에 나서게 되었는데, 현재 경북의 축견은 약 20만마리로 추산된다.
경성일보 1948년
만주산 개의 모피는 구미에서 대용 모피(빠른 이야기가 위조 여우 모피의 재료)로서 수요가
있던 것에 비해, 조선산 견피는 대부분이 일본용. 따라서, 일본측이 기록을 제시해야 합니다.
조선총독부가 견피자원화 사업에 나선 것은 물자부족이 심화되기 시작한 1943년 무렵이었습니다.
총독부의 1차 사료가 있으므로 그대로 게재합시다(이 사료조차도 한일 쌍방이 자신의 주장에
편리한 부분만 잘라내 왜곡한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너무해요.
- 타이틀
본 보고는 종연방적주식회사의 수탁과 관련된 임야 피모조수의 증식에 관한 시험과 관련하여
본고장 기사 다카기 56이 조사하게 한 것으로 조선개의 개량 및 우량 피모 증식상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으로써 이를 공표한 것이다.
1943년 2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장
임학박사 카부라기토쿠지
1) 서언
조선의 고유견은 진돗개, 풍산개로서 최근 잇달아 천연기념보호물로 지정되었고 그 계통 및
우수 형질이 널리 세상에 소개되었다. 조선에 있어서 개는 일찍부터 공용(共食)용으로 사육되어
개 모피(犬毛)의 가치는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지만, 최근 모피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특히 군수자원향으로서는 더욱 그 증산이 요망되고 있다. 그러나 모피의 품질과 순계의
보존에 관해서는 본질적으로 검토 연구하고 그 향상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견에 대한 제반 실태조사가 긴요하다.
본방문은 상술목적에 대해 조사시험을 양한 것을 상술하였다. 인보다 더 많은 중요 사항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 완료를 기대하여 훗날 공표할 기회를 믿는다.
본 조사시험은 임업시험장장인 카부라기 박사의 유투 없는 지지 독려 하에 실시되었으며,
또한 카부치방적주식회사 쓰다사장의 과학에 대한 호의와 이해심 많은 지원을 담당하였으며,
본고장 촉탁 우메타니 박사도 시종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조사시험실행상 조선육군창고를 비롯하여 해당 관서 당무의술원 제씨, 나카가와 전
조선피혁회사 나가급본고장고원 나가타 열쇠군 등을 번거롭게 한 점이 많으며, 이왕직기사
시모고리야마 세이치씨는 특히 이곳 곳간회화보다 귀중한 숫점을 선택촬영 후 기증받았다.
이에 명기하여 심사의 뜻을 표하다.
- 견모피
1943년 조선총독부의 개 모피 자원화 사업에 따라 수집된 개 가죽 샘플. 이는 구제 들개와 불필요한
개의 매입으로 조달할 계획이었습니다.
3. 견피 및 견피의 용도 및 미래
개털은 종래 대중용 의료자원으로서 주로 미국 그 밖에 상당히 많은 수출을 보았다. 그 솜털이
촘촘한 것은 보온력이 크고 외관은 여우털과 유사하며 강인하고 저렴한 점은 방한 기타
실용모피로 우수하다. 유피의 과중이 결점으로 되어 있다.
여름철 도축의 모피, 남선 온난 지역 성육의 것은 비교적 털 짧고 방한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오히려 탈모하여 소복스나 딱따구리로 대용된다. 그러나 이 가죽은 강도약, 후도박, 신도대,
수축력소기 등의 결점이 있어 소돈가죽에 비해 실용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외관 키츠 가죽과
같이 매우 미려하고 현시 가죽류 부족. 전시 하모피피혁의 용도는 갑자기 격증하였고,
특히 개털은 항공용 방한피복자원으로 귀중하여 그 증산에 대한 기대는 시국 하익대(時國下益大)를
더하여 가령장래 평시(平時)로 회복하더라도 외화획득상의 중요물자가 되고,
평전(平戰時)을 막론하고 바로 국가적 중요자원이다.
견피 및 견모피의 용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모피
군수
· 모피 외투 안감, 항공복 의류, 부피
·가죽 의류 부분품
민수
· 모피 의모피(회색은 늑대, 흰색은 흰 여우, 적갈은 여우), 코트의 트리밍, 상복 안감,
방한용 조끼, 외투 안감, 방한모, 하타(꼬리를 사용한다)
·가죽
신발바닥 가죽, 신발 갑피(소 박스, 신발 대용), 봉지용
다시 말해 조선총독부의 축견행정은 통치하의 광견병 대책으로 논해야 합니다
(방치했다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화근을 남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견피로 인해 외화를 벌어들이자고 욕심을 부린 게 못됐다.
전후(戰後)가 되어 「그것 봐라!총독부의 목적은 자원의 착취가 아닌가!"라고 추궁당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론은 뒤틀려 진돗개 보호책 등을 무시한 '총독부가 조선 토종견의 멸종 시도'설의
폭탄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견계사 기록이 문외한들에 의해 항일운동사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일 양국 모두 이 이야기로 격앙되어 있는 것은 광견병사나 축견행정사나
수의학사에 무지한 사람 뿐이에요.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아, 당시 수역 대책도 마토모였구나'로 끝나는 이야기고요.
가축전염병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해에 걸친 검역체제를 구축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소요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국력에 직결되는 소나 말과 돼지, 양의 방역은 더욱 엄격하여 축산 분야의 근대 일본의
위기관리 수준은 상당했습니다(전국 47 도도부현과 외지와 만주국에 걸친
축산방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스스로 조사해 주세요. 여기는 강아지 블로그입니다.)
제74연대
KV조선지부 함남분회·6월 22일 보병 제74연대(함경남도 함흥 주둔)에 군견 두 마리 헌납.
昭和 12년
[광절 후 한국견계]
전쟁 말기의 조선견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패전 시의 혼란스러움도 있고, 기록이 적습니다.
광절 후 한국에서는 일본 셰퍼드 견협회 출신이 '고려 셰퍼드 견협회'를 발족하여
한국 셰퍼드 견계를 JSV로부터 계승하였습니다(고려 셰퍼드 견협회는 보수적인
한국 군용견협회와 갈등을 빚었고, 전쟁 전의 KV 대 JSV 구도가 한국에서 재현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6·25전쟁 후 부흥을 거치면서 한국 애완동물계는 융성. 이 과정에서 일본의 애견단체도
한국 축견전람회에 심사위원을 파견하는 등 한일 견계는 교류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철의 장막에 갇힌 북한 견계와 달리 전후에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한일 견계.
그런 과거는 어느덧 잊혀지고 훗날 세대는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서로 욕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돗개 이야기든 풍산개 이야기든 셰퍼드 이야기든 한일 양측 모두 냉정하게 논의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불행히도 양국이 마이너스면의 정보만 서로 혈안으로 탐색하는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하고 공부하지 않고 완고하고 시야가 좁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싸움의 소재이며,
'한일견계사 편찬에 기여하자'는 건설적인 사고는커녕 개에 대한 애정조차 없는 것이겠지요.
이 참상을 뒤집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일 애견가의 근대 견계사 편찬입니다.
그러나 근대 일본사의 기초지식이 결여된 데다 구미만 바라보는 애견인 측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일본 견계는 구미 견계를 말하기 전에 스스로의 걸음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부록)
한반도의 대형견
주제: 일본과 동양의 견종
한반도에는 일찍부터 서양견과 당견(중국?) 등이 유입되었습니다.
그 근처는 200년 정도 전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들 서양견이나 티베탄 마스티프들이
조선 토종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거론된 것은 다이쇼시대, 한반도의 황해도에 있던 대형견의 기록.
진돗개나 풍산개인지 아니면 다른 견종인지 궁금해요.
덧붙여서, 이번 등장하는 것도 2년 정도 전에 실은 기사의 나카무라씨와 그를 초대한 김씨.
저 호랑이 퇴치의 후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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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무라락(※아오이시카시라무라)의 전면에는 한 줄기 개울이 달리고 있는데, 이것을 먼 곳에서 본 결과,
강의 표면은 전면 두껍게 동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때마침 하늘의 일각으로부터 수백이라는 오리의 한 무리가 현춘으로 보자 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간
불길의 촌락과 산과의 중간에 펼쳐진 밭 위로 흡춘추가 하듯이 흩날렸다.
이 풍부한 게임의 모습을 목격하는 이상은, 나다운 것인지 어떤지 산책 등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없다.
곁의 김씨(金氏)도 이것을 바라보고, 아침저녁에는 특히 오리의 큰 떼가 밭에 날아와서는
먹이를 먹은 후에 다시 날아가는 것이 상상이란 것을 나에게 알렸으므로, 이에 풀초온돌 속으로 되돌리고,
출동준비도 거기에 10발의 탄환을 지니고 고의와 사냥개를 거느리지 않고,
오리의 발길을 재촉했다고 생각한다.
이윽고 밭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에 이르러 상보욕지에 주목하니,
백모르는 청수가 마치 참깨를 뿌린 듯이 밭 위에 산점하여 매우 훌륭하다.
한쪽에는 제법 깊은 도랑이 이어져 있으므로 코레유키히토 전선의 참호로 보아서 몸을
그 안에 숨기고 도랑을 전해 일거 적의 제일선에 육박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때를 가늠하여 서작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과연 전방 약 20칸의 밭은 보기 좋게 푸른 목으로 메워지고,
그 장관 운운하는 것만이 없는 것처럼, 몇 번인가 이러한 광경을 접하고 있는 나도 모르게
가슴의 고명을 금할 수 없는 것으로, 동시에 열심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여 서서히
먼저 준비할 3호탄 2발을 장전했다.
그런데, 그래서 총을 도랑의 가장자리에 놓고, 상반신을 뻗쳐 게임의 무리인 진유중과
각식 부분에 겨냥하여, 바야흐로 방아쇠를 당기자 범의 의식을 총 위에만 집중하던 그 순간,
갑자기 내 뒤에 부딪쳐 이상한 소리가 났다.
허를 찔려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을 흐트러뜨려 뒤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하나의 검은 것이
내가 숨어 있는 도랑을 뛰어넘어 나타났으므로, 오리떼는 깜짝 놀라 일시에 날아오르는,
소리 쪽에 정신을 빼앗긴 나도 순간적으로 다시 오리를 향해 쏘기는 했지만,
이미 약간 기회를 잃고 점차 두 마리를 죽게 되었다.
이 검은 짐승은 우리 숙소에서 기르고 있는 순수한 조선구로 보통개와 비교하면
3배 이상의 크기로 경성 부근에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온몸에는 칠흑 같은 털이 밀생하여 언뜻 보기에는 아무리 광포한 것 같지만,
성질은 비교적 온순해서 내가 김학균의 숙소에 도착한 그날 밤은 낯선 일본 사람의 모습을
수상히 여겨서인지 몹시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잔반이나 고기의 여유를 주면 신기하게도
능숙한 사람을 따르고, 오늘 아침은 이미 사육주처럼 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때마침 중요한 사격의 찰나를 방해받아 마음이 잔잔하지 않았지만, 무심했던 그가 자
꾸 꼬리를 흔들며 몸집을 추스르는 것을 보고는 한때의 불쾌함도 금세 염두에서 사라지고 오히려
그 원통함을 어루만져야만 하는 일종의 가련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조선구의 방해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족히 열 마리 정도의 오리는 잡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미련은 상당히 깊었다.
이리하여 이미 같은 장소에서는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포기하고 일단 숙소로 들어가 온돌 속에 아침을 먹은 뒤,
탐차 2명을 고용하여 이 마을을 뒤로 하고 기린장을 가리키며 발족하였다.
나카무라 생<계해 벽두의 시련>에서 다이쇼 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