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림공(靑林公, 諱:郁)의 가계도에 대하여
본 카페 초대의 글에서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아쉽게도 靑林公(청림공)의 정확한 生歿年(생몰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러 譜書(보서) 및 묘소(하서면 백련리 산101 소재)의 비문을 통해 추정해보면 1500년대 후반에 태어나시고 1600 년대 중반까지 사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공께서는 敬寧君(경녕군)의 후손이시지만 몇 번째 아드님의 자손이신지는 묘비에 없어 족보책을 통해서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1700년대나 1800년대에 발행된 古譜書(고보서)를 갖고 있지 않으니 정확한 가계도를 작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백련리에 있는 공의 비문을 보면, 弘文館大提學(홍문관대제학)을 지내신 諱(휘):洪(홍)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윗대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없는 상황이고, 二后 曾孫 萬興(이후 증손 만흥)께서 通政大夫(통정대부)에 등극하셨다는 기록 또한 있으므로, 청림공의 손자가 萬興 할아버님(二后의 뜻은 2대 후손의 뜻. 묘소의 상석에 있는 대와 일치함)임은 확인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洪 할아버님과 萬興 할아버님이 되므로 제 나름대로 이곳 저곳을 찾아봤습니다.
1) 洪(홍) 할아버님에 대한 기록 :
藏書閣(장서각. 조선 왕조의 국가 사적을 보관 관리한 기관)에 있는 전주이씨 경녕군파 족보 중 光武譜(광무보. 光武는 1897년 8월 17일부터 1907년 8월 11일 까지 대한제국 고종 때에 사용한 대한제국의 첫 번째 연호)를 열람해 洪자 諱를 검색해 보니, 1526년생이신 분과 1634년에 태어나신 분(完平君 완평군) 두 분이 나옵니다. 그러나 완평군께서는 中宗大王(중종대왕)의 8男이신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므로, 묘비에 있는 洪할아버님은 1526년생이신 분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무보에서 洪할아버님의 선대 가계를 보면 경녕군의 10男이신 丹山都正(단산도정 穗수)께서 증조부이시고, 조부는 恩山都正 權(은산도정 권), 부친은 益興君 熙措(익흥군 희조)이십니다. 洪할아버님은 원래 西陵君 熙哲(서릉군 희철)의 2男이었으나 익흥군의 계자로 입적이 되었으며, 관직을 보니 贈(증) 吏曹判書(이조판서)로 되어있고 홍문관대제학이란 관직명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洪할아버님의 묘비를 찾아 살펴보니 다행히(?) 증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이란 관직이 비문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참고로 洪 할아버님의 친형은 西陵君 熙哲(서릉군 희철)의 長子로서 이조판서 및 홍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지내신 沉(침)입니다]
그런데 洪할아버님의 아드님을 보니 慶郁(경욱1544년생), 光郁(광욱1549 년생), 馨郁(형욱1551년생), 榮郁(영욱1561년생)으로 네 분만 계셨습니다. 혹시라도 출계하신 분이 있는지 알아봤으나 그런 기록은 없었습니다. 또한 沉(침) 할아버님의 아드님일까 알아봤는데 廷郁(정욱), 文郁(문욱), 顯郁(현욱) 세 분 뿐이었습니다. 다만 아드님들의 항렬자에 모두 郁(욱)자가 들어갔고 청림공의 휘가 郁이시니 어떤 형태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전주이씨 대동보감(大同譜鑑 1985년 발행) 및 2010년에 발행된 경녕군파 세보(庚寅譜 경인보)를 찾아보니 청림공께서는 경녕군의 3男이신 梧城君 禾+致(오성군 치. 1434生) - 豊城君 杠(풍성군 강. 1468生) - 延城令 鑌(연성령 빈. 1503生)의 자손이신 景麟(경린) 할아버님의 系子(계자)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초,중기에는 당연히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으므로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때, 특히 왕실의 종친부에서는 아무나 계자나 양자로 들일 수 없었으므로 寸數(촌수)가 먼 친척의 아들까지도 계자로 입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같은 경녕군파라고 해도 지파가 다르면 촌수가 멀 수는 있으나 집안간 교류가 많았다면 결코 먼 친척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景麟 할아버님께서는 弘文館 修撰(홍문관 수찬)을 지낸 豊山 金氏 義貞의 따님과 혼인을 했으니 홍문관을 연결고리로 봤을 때 대제학을 지내신 洪할아버님의 아드님을 계자로 들이는 게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고 봅니다. 참고로 당시에는 홍문관대제학의 벼슬은 선비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라고 여겨졌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청림공께서 洪할아버님의 庶子(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嫡子(적자)든 서자든 아들임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洪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는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2) 萬興(만흥) 할아버님에 대한 기록 :
청림공의 아드님이신 夢順(몽순) 할아버님 또한 계자로 입적되었다는 기록이 대동보감과 경인보에 나오지만 광무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자이신 萬興(만흥) 할아버님부터 광무보에 나오는데 경녕군의 10男이신 단산도정의 후손이 아니라, 6男이신 牟陽君 稙(모양군 직)의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모양군의 후손 중에는 전주 이씨를 대표하는 芝奉 睟光(지봉 수광. 최초의 실학자. 지봉유설의 저자) 할아버님이 계십니다]
광무보에서 만흥 할아버님의 가계는 모양군-선사군承孫(승손)-하동군裕(유)-希得(희득)-彦光(언광)-命根(명근)의 선대를 거쳐 부친은 文揆(문규)로 나와 있는데, 이는 부안 백련리 묘소의 상석에 나와있는 부친의 이름인 夢順(몽순)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파시조로부터 대의 수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백련리 비문은 경녕군의 7대손인데, 광무보에서는 8대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萬興 할아버님께서 通政大夫(통정대부, 정3품)를 지내셨고 묘소가 하서면 문수동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동보감 및 경인보의 기록과 일치합니다. 다만 광무보 상의 생부는 文揆이시니 백련리 묘소의 가계를 참조했을 때 夢順 할아버님의 계자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참 어렵네요.
萬興 할아버님의 아드님을 살펴보니 광무보에서는 大聰(대총) 한 분만 나오지만 대동보감과 경인보의 경우 큰 아드님이 大聰이시고 둘째 아드님이 嘉善大夫(가선대부, 종2품)를 지내신 遇春(우춘)이십니다. 백련리 묘소에서는 萬興 - 遇春 - 明華(명화) - 德秀(덕수)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동보 및 경인보와 기록이 일치하므로 제 생각은 묘소의 기록을 더 우선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백련리 묘소에 둘째 아드님이신 우춘 할아버님께서 우선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큰 벼슬을 하신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3) 梧城君 支派(오성군 지파)의 가계도 :
경녕군께서는 고양군 질(高陽君 秩), 은천군 찬(銀川君 穳), 오성군, 영선도정 리(永善都正 利), 월성수 거(月城守 秬), 가흥수 적(嘉興守 積), 복성군 영(福城君 潁), 가림군 추(嘉林君 秋), 모양군 직(牟陽君 稷), 단산도정 수(丹山都正 穗) 등 10명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오늘날까지 후손이 이어지는 支派(지파)는 은천군, 오성군, 복성군, 가림군, 모양군, 단산도정의 6군파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청림공께서는 오성군의 증손자인 경린 할아버님의 계자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 집안은 오성군의 가계도를 따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참고로 오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 있는데, 경녕군을 낳으신 孝鑌 金氏(효빈 김씨) 묘소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구리시 교문동 산140-6 소재. 아울러 오성군의 유일자이신 풍성군의 묘소는 같은 아차산 자락(산106-1)에 계십니다.
제가 나름대로 선대의 묘소를 모두 찾아보고 대부분 참배를 했으나 풍성군의 9男이신 연성령의 묘소와 그 아드님이신 경린 할아버님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경녕군파 대종회나 오성군파(지파) 종친회에 나가 보더라도 연성령 후손의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사실 오성군파의 규모도 6군파 중 派勢(파세)가 가장 작은데, 그 주된 이유는 오성군파의 많은 후손들이 왕실 친위대를 맡고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仁祖大王을 호종하다가 남한산성과 강화도 함락 시 순국하신 분들이 많았고, 이후 지방 특히 전라남도 지역으로 많이 피난을 감으로써 한양 및 기호지방에 사시는 후손들이 적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4) 의복동 선산(하서면 장신리 산264-1)에 대하여
백련리 문수동에 계시는 선조들의 후손들이 아직 부안군에 꽤 있으며 또한 전국 각지에 정착해 살고 계시겠지만, 불행히도 종친회나 별도의 모임이 활발하지 않으니 후손들끼리 연락하고 만남을 갖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나마 청림공의 6대손이신 慶達(경달) 할아버님이 장신리 평지마을(의복동)으로 오신 이래로 후손들이 평지마을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으셨고 현재까지도 의복동 후손들을 중심으로 연락이 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달 할아버님의 증손이신 容元(용원) 할아버님께서는 折衝將軍 行龍驤衞 副護軍(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의 벼슬을 하셨고 그의 아드님이신 喜白(희백) 할아버님께서는 行健陵參奉(행건릉참봉)직의 벼슬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희백 할아버님의 첫째 아드님이신 鍾奎(종규) 할아버님께서는 通訓大夫 行掌樂院 主簿(통훈대부** 행장락원 주부)를 지내셨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벼슬을 하지 않고서는 이름을 떨치거나 재산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향촌에서 고매한 인품을 지키시며 은둔하신 조상님들은 족보에서 크게 언급되지 않으시니 좀 아쉽습니다.
[*절충장군은 정3품 당상관의 무신 품계인데 용양위 부호군은 종4품 무관직이라 품계는 높은데 비해 관직이 낮아 행(行)을 붙였다. 용양위는 조선시대 중앙 군사조직인 5위의 하나로 좌위(左衛)라고도 한다]
[**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 품계임]
미력하나마 필자가 요즘 청림공 후손들의 명부를 만들고 있습니다. 작년 초부터 시작했으나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있어서 아직 완성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향후 좀더 노력해서 명부를 만들 것이고 명부를 바탕으로 청림공의 가계도를 완성해 보겠습니다.
가내 평안 하심을 기원합니다.
2023년 2월 9일
청림공 14대손 원섭(元燮)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