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 수술을 받고 난 이듬해인 2005년 맥월드에서 맥 미니를 선보이는 스티브 잡스(왼쪽). 5년 후에는 다른 사람처럼 수척해졌다(오른쪽). [중앙포토]
이달 9일 칠순을 맞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기자들이 올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건강밖에 없죠”라고 답했다. 건강하기를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경영자(CEO)의 건강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박용만 ㈜두산회장은 “CEO는 기업이 관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인적 자산”이라고 말한다. 김승남 조은시스템 회장은 심지어 “CEO의 건강이 곧 그 회사의 건강”이라고 주장한다. CEO는 집안의 가장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CEO는 회사의 구성원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김현중 한화건설 사장).
회사를 대표하는 CEO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경영 성과는 물론 이후 진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채은미 페덱스 코리아 대표).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현대 경영은 갈수록 CEO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CEO 주가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고 볼수 있다. CEO 주가란 CEO의 경영 능력이나 이미지에 주식 가격이 크게 좌우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CEO가 기업 경쟁력의 한 요인일 뿐 아니라 기업 가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반영하는 조어다. CEO의 건강에 이상이 있을 때 회사 주가가 출렁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 세 번째 병가를 낸 스티브 잡스 애플CEO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사례다. 고영섭 오리콤 사장은 “CEO는 회사와 일심동체”라고 말한다. 애플에 적용하면 잡스의 상태가 곧 애플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잡스의 병가 소식이 알려지자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던 애플 주가는 이달 17일 독일 증시에서 6.2%나 떨어졌다. 시가총액으로 220억 달러가 일순에 날아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에 따르면 애플 주식은 거의 모든 미국 펀드에 편입돼 있어 대다수의 미국인은 잡스의 병가와 그에 따른 애플 주가의 움직임에 이해관계가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이 미국의 안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잡스의 건강은 미국인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된다는 얘기다.
2002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했다. 당시 수행원들은 김대통령 숙소의 온도와 습도를 일일이 재가며 대통령의 건강을 챙겼다.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안보에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 기밀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CEO의 건강은 기업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번 잡스 쇼크가 다시 한번 CEO 건강의 중요성을 일깨운 셈이다.
CEO의 건강이 왜 중요할까. 우선 회사 내 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김종훈 한미파슨스 회장은 “회사에 따라 CEO의 비중이 50% 이상인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CEO는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인력도 아니다(박용만 회장).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 참모의 건강으로 대신할 수 없다. 머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구학서 신세계 회장). 그래서 CEO는 함부로 아플 수 없고 아파서도 안 된다(한경희 한경희생활 과학 사장).CEO가 건강을 해치면 무엇보다 의사결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남승우 풀무원홀딩스 대표). 조직관리에도 누수가 생길 수 있다.
CEO의 건강에 이상 징후가 있을 때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단기적으로는 건강 회복을 지원해야 하고, 장기적 내지 상시 대응책으로서 후계자 양성 계획이 필요하다. 박용만 회장은 “건강 이상으로 대행 체제를 꾸리든 건강 문제가 심각해 교체를 하든 CEO가 일자리 걱정 없이 건강 회복에 전념하도록 회사가 배려하고 보호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영각 삼정KPMG 회장은 “CEO의 건강이 악화되면 회사가 회복기간에 충분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몇 년 걸 리더라도 관련 경비는 물론 급여도 지급해야 한다”는 것.김일섭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장은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를 두고 CEO의 부재 시 이 기구가 최고 의사결정을 하도록 상시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CEO의 휴가를 의무화하고 이때 집행위로 하여금 이런 의사결정을 하는 연습을 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장인환 KTB자산운용 사장도 “CEO가 병가를 간 동안 해당 본부장들이 합의체를 구성해 CEO 대신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관 도레이첨단소재 사장은 “CEO의 병가·장기출장 때 가동할 회사 운영 매뉴얼을 반드시 만들어둬야 한다”고 귀띔했다.
잡스의 공백은 과거 그가 두 번 병가를 떠났을 때 애플의 경영을 맡은 팀 쿡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메웠다. 2009년 두 번째 병가 때 그는 잡스가 빠진 애플을 이끌며 아이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잡스의 부재가 장기화할 때 쿡이 잡스라는 거인의 존재감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채은미 대표는 “CEO가 평소 견실한 후계자 양성 계획을 마련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이를 점검,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훈 회장은 “CEO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전 후계 구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후 CEO 유고 상황이나 건강에 중대한 이상이 있을 때 비상조치와 더불어 후계 체제를 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이 일을 실행에 옮겼다. 한미파슨스의 창업 멤버인 이순광 사장은 창업자 김 회장의 후계자다. 현재는 COO이지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면 최소 10년간 이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된다. 전략적 의사결정등만 하는 김 회장은 65세가 되는 2014년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 하겠다고 공표했다.
30대 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은 “해마다 규정에 따라 전 계열사 CEO가 자신이 염두에 둔 2~3명의 후계자 후보군을 오너 회장에게 서면으로 보고한다”고 말했다. 대상자는 상무 이상의 임원이다. 현직 부사장도 이 명단에서 빠질 수 있다. 이들은 그룹 차원에서 비밀리에 관리한다. 후보자로서 특별교육도 받는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적절한 휴식이 필수다.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은 현직에 있을 때연간 4주 이상 휴가를 갔다. 서양화가이기도 한 강 회장은 여름 휴가를 20일에서 한 달씩 썼는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때로는 티베트·실크로드 같은 오지로 들어갔다. 이런 장기휴가 때 그는 인사를 제외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위임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임원들이었다. 휴가지에서 돌아오면 회사는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었고, 인력이 제대로 배치됐는지 확인하는 부수적인 수확도 있었다. 그는 위임하고 떠나는 이 장기휴가를 ‘부재 경영’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 당시 잭웰치 GE 회장은 “차기 리더를 양성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코멘트했다고 한다.다양한 경력의 CEO인 김일섭 회장은 오랫동안 연 4~7일씩 휴가를 썼다. 요즘은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휴가를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남승우 대표는 40일가량의 장기 병가, 두 번에 걸친 3일짜리 병가를 낸 적이 있다. 그는 책도 여러 권 읽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독서와 새로운 구상은 병상보다 휴가지에 더 어울리는 활동이다. CEO여! 병가를 내느니 제때휴가를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