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장. 얄궂은 운명의 법칙
- 바라는 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진 자는 바라지 않는다.
7년 전.
진화운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당시 천성문 관할지역에 지독한 색마(色魔) 하나가 출현하여 온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십여 건에 달하는 부녀자 겁간과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그 자를, 관아에서는 쉽사리 잡아들이지 못했다. 어디서 배운 것인지 그 색마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아로부터 천성문에 협조의뢰가 들어갔고, 그렇지않아도 관할지역내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고를 수습해야할 암묵적인 책임이 있던 천성문은 쾌히 승낙했다.
천성문은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고 고만고만한 실력의 제자들 두 명을 보냈다. 그런데 삼주일 후, 그들이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문제는 심각해지고 뜨거워졌다. 더 이상 일도 처리할 겸 풋내기 제자들 경험 쌓아주는 동시에 악랄한 범죄자를 처리했다는 신망을 얻는, 일석삼조 (一石三鳥)의 효과를 계산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린 거였다. 무슨 짓을 해서든 이 색마를 척살(刺殺)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앞선 두 제자 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어버리고 천성문의 위상은 땅에 떨어진다.
이 사실을 모를리 없는 천성문주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그는 실력만은 이미 수위 제자에 다달았으나 나이 때문에 대제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던 진화운에게 명했다. 그 악랄한 인간을 반드시 죽인 다음 돌아오라고. 이 말에 그때 천성문의 흉흉한 분위기를 덧붙여 각색해보면 이렇다. 땅 끝에 다달아 무저갱의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색마를 죽이지 못할 경우 돌아오지 말라고.
보통 이상의 눈치를 가지고 있던 진화운이 이 말없는 압력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느낀 그는 한숨 한 번 푹 내쉬고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준비를 시작 했다. 오랜 기간을 각오한 짐을 꾸리고 추적하는 방법에 대해 대충 전해듣고 살해당한 아랫제자들의 상처를 살펴보며 상대의 무공을 헤아려 보고...
그가 천성문을 나선 시점부터 대충 한 달 뒤. 마침내 그는 그 색마를 포착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색마에게 다가간 그는 빛살같이 검을 내질렀다. 이 기습적인 일격으로 색마는 치명상을 입고 도망쳤다.
진화운은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색마를 추격했다. 목숨이 간당간당했 던 색마는 정신없이 도망치며 검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이 피로 만들어진 색마의 꼬리를 진화운은 천천히 밟아갔다.
드디어 진화운의 눈앞에 색마가 나타났다. 색마는 벼랑 끝에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진화운은 일부로 눈을 송곳같이 세우고 색마에게 다가갔다. 색마가 뭐라뭐라 떠들어도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 묵직하게 밟으며 다가오는 진화운을 향해 색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화운의 사정권 안에 색마가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색마가 뒤로 돌아서서 벼랑으로 뛰어렸다.
겁나도록 무표정하던 진화운은 이때 처음 놀랬다. 그는 색마의 목을 잘라가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저 상처를 가지고 벼랑에 떨어져서 살아 날 리가 없지만, 확인은 불가능해진다. 진화운은 급히 달려가 벼랑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실수였다.
색마는 떨어지는 척 하며 벼랑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곧이어 진화 운이 고개를 내밀자 그는 불쑥 튀어나왔다. 진화운은 놀라서 뒤로 물러 나려 했으나 색마가 한 단계 빨랐다. 색마는 두 다리로 단단히 몸을 고 정시킨 채, 진화운의 멱살을 쥐고 등 뒤로 날려버렸다.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한 상태라서 진화운은 너무나 손쉽게 허공으로 날아갔다. 밑은 새까만 낭떠러지.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스치는 가운데 진화운은 색마의 눈을 마주보았다.
색마는... 한껏 비웃고 있었다. 그의 허둥거림을.
울컥 열화가 치민 진화운은 앞뒤 볼 것 없이 들고 있던 검을 색마에게 던졌다. 색마의 눈이 아래위로 확 벌어짐과 동시에 진화운의 검이 그의 등을 꿰뚫었다. 색마는 피를 토하고 나서 스르륵 미끄러졌다. 진화운은 이 장면을 떨어지던 중, 밑에서 바라보면서 아주 짧은 망상을 떠올렸다. 저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았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고.
'이대로 죽는 것인가...?'
밑을 내려다보니 온 몸이 온통 새까만 흡욕(吸慾)의 악마가 아가리를 벌려 자신을 삼키려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고 침이 말라왔다.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고 오금이 저려왔다. 공포란 이름의 송곳이 거세게 고동하는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안돼!!'
문득 그의 어느 한 구석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맹렬히 머리를 회전하여 살 길을 찾았다. 표정은 바닥까지 가라앉고 손 끝, 발 끝은 극한까지 처절해졌다.
'그럴 순 없다. 살아남아야한다.'
진화운은 몸 한 부분쯤 포기할 각오를 했다. 때마침 깎아지른 절벽가운데 한 가닥의 나뭇가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나뭇가지가 끈질 긴 생을 피워놓은데 대해 경탄을 표할 겨를은 없었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늦추면서 두 손으로 잡아당기듯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두둑 소리가 나며 나뭇가지는 늘어졌다. 당연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뭇가지는 뿌리까지 뽑혀나갔고 진화운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집념어린 나뭇가지의 생애를 단박에 꺾어버린데 대해 애도를 표할 겨를 역시 없었다.
다행히 나뭇가지는 그의 추락속도를 많이 낮춰주었다. 진화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다음 두 손을 갈퀴처럼 펴고, 온 힘을 집중하여 절벽에 박아 넣었다.
- 카드드드득!!!
손가락에 붙어있던 열 개의 손톱이 순식간에 부서져 튕겨나가고 손 끝 및 손바닥이 찢겨져 피를 뿌렸다. 손 등에 피부를 뚫고 튕겨나올 것만 같은 굵은 핏발이 불뚝 떠올랐다. 최초의 손끝에서 최후의 어깨까지 이어진 수많은 신경 및 근육이 당장 끊어져버릴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참혹한 고통이 양 어깨를 타고 진화운의 중추신경을 강타했다. 진화운은 흠칫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얼굴근육에 찰나의 경련이 일어났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다. 아까 그대로의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막대한 통증이 머리 속을 뒤흔드는 가운데, 그는 양 팔에 더 큰 힘을 주입했다. 두 팔이 뜯어져도 상관없다는 각오였다.
이 때, 정말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발바닥에 든든한 감촉이 닿은
것이다. 벌써 바닥에 다다랐을 리는 없었다. 진화운은 얼떨떨해져 아래를 바라보았다. 직각이 되다 못해 둔각을 이루는 낭떠러지에서 이례적으로 불쑥 튀어나온 반석(盤石)을 자신이 딛고 있었다. 어쩃든 살아남은 것이다.
진화운은 천천히 몸을 돌리다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짜릿짜릿한아픔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양 팔을 늘어뜨리고, 그는 등을 절벽에 기 대었다. 막상 떨어질 때는 또렷하게 깨어있던 정신이 지금에 와선 흐려졌다. 새삼스레 오싹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이대로 헐떡이며 휴식을 취했다.
한참 후, 진화운은 마지막 날숨을 내쉰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일단 옷 모퉁이를 찢어 엉망인 손가락을 대충 감쌌다.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느낌 자체가 어둠에삼켜 졌다. 별 수 없었다. 신중히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수 밖에. 아마 족히 하루는 걸릴 것이다. 아주 오싹두근한 박진감이 한가득 들어있는 하루가 될 것 같다.
갑자기 진화운의 턱이 살짝 꺾였다. 방금 아래를 내려보다 무언가를 스쳐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상한 것이 보였다. 상체를 더 내밀었다. 보일듯말 듯 했다. 아슬아슬한 경계까지 몸을 내밀었다. 간신히 그것이 보였다. 이 반석 밑에는... 동굴이 있었다. 꽤나 커다란.
"...."
진화운은 잠시 고민했다. 그의 눈이 힐끔 위로 올라갔다. 웅장한 규모의 절벽이 그의 머리를 찍어 누를 것 같았다. 그는 금방 결정 내렸다.
이 동굴 속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혹시나... 바라건데 정말 혹시나 이곳을 빠져나갈 길이 있을지 몰랐다. 최소한 아무 짓도 안하고 저 험악한 절벽을 기어 올라가느니 한 번 탐험을 해보는 게 나았다.
그는 경련이 이는 양 팔을 되도록 쓰지 않고 동굴 속에 들어섰다.
깜깜했다. 허리를 숙여 키를 절반쯤 줄인 뒤에 오른 손으로 벽을 짚어가면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길이 예상보다 잘 닦여져 있었고 함정 따위는 없었다. 대신 무척이나 음산했다. 이따금 그의 발 끝에 걸린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이 적막한 공간을 채우는 전부였다.
계속 걸어가던 그가 우뚝 섰다. 앞이 막혀있었던 것이다. 역시...하며 몸을 돌려 세우려던 진화운은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동굴이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만들어질 일은 절대 없었다. 즉, 누군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놨다는 것인데...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찬찬히 살펴보고 더듬어 보았다. 아무 이상한 점이 없자 옆의 벽을 조사했다. 잠시 후,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있는 돌덩어리가 손에 잡혔다. 잡아당기고 흔드는 것에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세게 밀어보았더니 스르륵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벽이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갑자기 앞이 탁 트이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그리고 몇 개인지 모를 야광주(夜光珠)가 함께 빛을 뿜었다. 얼핏 스쳐봐도 만만치 않게 커다란공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화운은 입술을 둥글게 말고 감탄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들어가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전체적으로 둥근 테두리에 규모는 왠만한 연무장(練武場) 저리가라 할 정도의 크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절벽 한가운데 이런 공간이 생길 수 있는지 신기했다. 계속 감탄하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간 진화운의 눈에 희한한 것이 들어왔다. 작은 제삿상 하나와 그 위에 올려져있는 한 권의 책, 하나의 향그릇, 세 개의 향대, 화섭지 하나. 제삿상 뒤에 존재하는 또하나의 문. 이것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서 존재했는지 주위 광경에 녹아들 듯 존재하고 있었다. 진화운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 위에 올려진 책을 펼쳐보았다. 훅! 하며 자욱한 먼지가 날아올랐다.
책의 제일 첫 장에는 일기와 같은 편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노부는 담묵천(潭墨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한때 월령산인(月靈山人)이라 불리웠다. 아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일 것이다. 무림에서 의 활동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 여러 무술대회나 유명한 결투들을 보러다니며 견식을 넓힌 것뿐이니까. 난 출세나 부귀영화따위보다 무공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무공을 출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에 비해 나는 무공을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그다지 유별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은 은근히 많다. 오히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 무림이 무림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어느 분야에서든 분야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파고드는 사람 없이 그 분야가 대성할 수는 없다. 이 점에 있어 나는 자부심을 가진다.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돌아다니며 이십여 년 간 갖가지 무공을 보고 들었다. 수많은 무공들을 마구 섭렵했다. 삼류무공이고 일류무공이고 가리지 않았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무작정 외워버렸다. 그러다보니 한 가지 무공을 떠올리려 하면 내 의식이 그와 통하는 무공들에까지 줄기줄기 뻗어나가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산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무공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놓았다. 천천히, 주의 깊게. 가물가물한 것은 아예 제쳐두고 확실한 것들만 적었다. 이 작업만 거의 사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일을 끝마치자 수백권에 달하는 책이 쌓였고, 난 이것들을 틈만나면 반복해서 읽고 탐구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내 머리 속에서 툭 하고 무엇인가가 뚫 렸다. 그때부터 중간에 존재하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각각의 무공들이 하나로 엉켜들었다. 가히 환희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은 후에 몇 번 더 일어나며 나를 경이로움에 빠뜨렸다.
문득 나는 나 자신의 무공을 만들고 싶어졌다. 어디에서부터 이어내려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독창적인 무공을.
가벼운 발상과 달리 무공비급을 창시(創試)하는 작업은 무척 힘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관념을 글로 바꿔놓으면 백이면 백 어딘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어휘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글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도구이기 때문이리라. 수 년 동안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 끝에 간신히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자 뿌듯함과 동시에 기묘한 바램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 무공을 누군가한테 전수해주어 한 번쯤 전 무림을 떨쳐 울리고 싶어진 것이다.
허나,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사람이 안 된 자에게 무언가 건내주는 짓은 절대 있어선 안될 일. 내 남은 생애동안 만족할 만한 자질을 지닌 제자를 찾아낼 자신은 없었다. 그렇건만 내 무공을 넘겨주고 싶은 마음은 날로 커져만 가고... 결국 나는 고민 끝에 이 동굴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름모를 후학이여... 그대는 결코 흔치않은 인연을 다리삼아 이곳에 왔다. 이런 절벽 한가운데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그대가 내려왔겠는가. 그만한 인연이라면 내 모든 것을 넘겨줘도 아깝지 않다. 이 비급과 내 모든 무공지식이 담긴 책자들, 우연히 얻게 된 영약들을 모두 주겠다.
그대가 무림인이 아니라면, 아니 무림인이라 해도 내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다면 당장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려라. 거리낄 필요 없다. 이곳을 찾아낸 그 순간부터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니까.
하지만 그대가 만약 내 무공을 배우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임해주길 바란다. 이 책은 내 필생의 노력이 집약된 것이므로. 그렇다고 그대가 나를 스승으로 삼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겨우 책 몇 권외에 잡다한 몇 가지를 건네주고 스승대접을 바랄 염치는 없다. 대신, 두 가지만 지켜다오.
무공을 익히기 전에 이 옆에 있는 향을 피워 놓고, 향이 다 타들어
갈 시간 동안만 내 죽음에 대해 애도해다오. 그리고 누군가 이 무공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한 마디만 해다오. 월령산인(月靈山人) 담묵천(潭墨天)이 만든 구극탈명공(九極奪命功)이라고... 』
진화운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허... 그러니까 지금 이게... 기연이란 말이지?"
그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어이가 없어졌다. 확신하건데 세상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절실한 마음으로 무공을 원하는 이가 널려있다. 그에 반해 자신은 무공을 생계유지의 수단 이상으로 여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이러한 기연이 굴러떨어진 것인가. 반가워하지도 않는 것을.
누군가 그랬다. 바라는 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진 자는 바라지 않는다고.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게 돌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나 보다.
"이 노인장도 참 불쌍하지. 넙죽넙죽 절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쩌다 나같은 놈을 만났을까. 쯧쯧."
진화운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심지어 얼굴조차 본적 없는 노인인 담묵천을 향해 깊은 동정을 표시했다.
"자, 이제 어떡한다."
지금이 일생일대의 기회인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진화운은 도무지 새로운 무공을 배울 의욕이 안일었다. 그가 야심이란 놈에게 가슴 속 매우 비좁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는 탓도 있지만, 우선은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 '적당할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다짐해왔었다. 거저 건네준다는 말에 무조건 덥썩 넘겨받아봐야 자신한테는 부담되고 남한테는 미움받는 신세가 된다는 논리였다.
"그냥 다 태워버릴까?"
담묵천이 써놓은 그대로 말이다.
"아니, 아니야."
그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신중함이 안쪽에서 갑자기 번져 나왔다.
진화운은 자신의 나이를 되새겨보았다. 스물다섯. 슬슬 보험에 들어 두어야 할 시기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젊은이다운 열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이 메마른 발상이었다.
"그래. 결정했어. 배워보자."
이렇게 진화운은 기연을 만났다.
* * *
담묵천의 바램에 따라, 진화운은 향을 피우고 담묵천의 죽음을 애도했다.
향 그릇에 꽂힌 향대가 다 타들어갈 동안. 아니, 솔직히 그 시간의 삼분지 이쯤은 잡생각에 할애해버렸다. 애써 한다고 했으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긴 어려웠다. 진화운은 뭐, 어쩔 수 있나, 이 진씨 할아버지도 내가 슬픈 나머지 펑펑 우는 장면까지 연출하길 바라진 않았을 거다...라고 자위했다.
애도를 끝낸 진화운은 천천히 제삿상 뒤로 돌아갔다. 아까 슬쩍 스쳐봤던 문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이라기보다 또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에 돌덩어리를 겹쳐놓은 형식이었다. 여하간 돌덩어리를 옮겨놓고 들어선 진화운은 다시 한 번 감탄을 터트렸다.
진화운의 키 높이까지 쌓여진 책자들이 우측을 가득 메운 체 죽 늘어서 있었다. 무작위로 몇 권 뽑아보니 필적이 모두 똑같았다. 진화운은 이게 바로 담묵천이 사 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무공필서(武功筆書簡)임을 짐작했다. 정말 대단한 집념이라 실감하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자가 늘어선 반대편, 즉 왼쪽에는 왠 항아리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대부분 안에 벽곡단이 들어있었는데 모두 합친다면. 한 사람이 먹을 경우, 능히 일 년을 버틸 만 했다. 그에 더하여, 제일 위에 올려져있는 몇 개의 항아리에는 각종 영약이 담겨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 귀물들은 아니어도 쉽사리 구하기 힘든 것들임에 틀림없었다.
항아리들과 책들의 가운데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파여 있었고 거기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혹시 그 전설상의 공청석유(空淸石乳)가 아닌가 하여 진화운이 한모금 마셔보았더니... 맹물이었다. 약간의 실망을 뒤따라 중간 이상의 신기함이 진화운을 덮었다. 암벽만 가득 채워진 이 공간에서 대체 어떻게 물을 퍼올린 것인지... 아무래도 담묵천이란 사람은 무공을 하지 말고 기관학(機關學)이나 건축학(建築學)을 했어야할 인물 같았다.
웅덩이를 살짝 넘어가자 커다란 궤짝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둘 다 자물쇠 같은 것 없이 그냥 닫혀있었다. 그 중 하나를 열어보자 그 안에 수십 벌의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개어진 모습이 보였다. 몇 벌 안 되긴 해도 궤짝 한 구석에는 여자용 옷가지까지 들어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각종 생활용품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수건, 빗, 거울, 필기구, 대야, 바가지, 치아세적용 소금 등등... 진화운은 잠시 말을 잊었다.
단 일면식(一面識)도,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나누지 않은 사람이지만, 진화운은 담묵천이란 사람에 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엄청... 꼼꼼한 사람이다.
"헛, 참. 이거 도저히 피해갈 수 없게 만들어 놨군."
진화운은 정말 진지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부담되어서 그랬다. 굳은 결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난 진화운은 궤짝을 닫은 다음, 다시 아까의 제삿상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담묵천이 남긴 비급을 펼쳤다.
(3)
제일 앞에 담묵천이 적어놓은 당부의 말이 있었다.
『혹시나 그대가 의구심을 가질까 싶어 이 글을 써본다. 그대는 기본기가 최강의 초식이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분명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기본기 없이는 세상을 무너뜨릴 초식이 있다 해도 아무 쓸모없다. 허나, 그렇다고 초식을 배우는 것이 완전히 쓸데없는 짓이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찌르고 휘두르는 기본 동작은 간결함과 신속함을 생명으로 한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웬만한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상대에게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일급 이상의 고수들은 기본기의 숙련도에 있어서 거의 엇비슷하다고 봐도 좋기 때문이다. 만일 일급고수와 천하제일고수가 기본기만 가지고 싸운다면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경험에서 앞선 천하제일고수가 승리할 확률이 높지만, 그 정도는 당일의 몸상태나 행운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차이다.
천하제일고수와 일급고수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초식의 운용에 있
다. 짧고 간결한 기본기는 제아무리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다 해도 일정 이상의 힘을 실을 수 없다. 그러나 초식은 다르다. 초식은 근육의 수축과 이완, 관절과 관절의 연계, 가장 효과적인 내공 흐름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움직임에 심어놓은 것이다. 기본기가 최강의 초식이란 말은 무공에 있어서, 주춧돌(기본기)조차 세워놓지 않고 무작정 지붕(초식)부터 지으려하는 얼간이들의 행태가 개탄스러워 누군가 꺼낸 말이다. 섣부른 판단을 걷어내라.
그 수많은 명문정파가 멍청하고 할 일 없어 초식을 만든 줄 아는가?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갈고 다듬어진 초식의 진정한 위력을.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들어맞는 초식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이미 막느냐 피하느냐의 선택이 아니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문제가 된다.』
"호오오... 이 사람 제법이네."
진화운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다.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무학(武學)이라는 것도 배우니까. 하지만 담묵천처럼 노골적인 사실을 들먹여 수긍하도록 하진 않았다. 최대한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어려운 말을 나열해놓는 게 고작. 그건 남자의 성기(性器)를 양물(陽物), 여자의 성기를 음부(陰部)라고 우물쭈물 바꿔부르는 것과 비슷했다. 학문이란 가끔 쓸데없이 고상해지는 경향이 있다.
피식 웃고 난 진화운은 다음 장을 넘겼다. 본격적으로 구극탈명공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구극탈명공(九極奪命功)은 제 일식 화접출쾌(火蝶出快)부터 제 구식 패도천승(覇刀天昇)까지 총 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우 특이한 점은 이 초식들에 정해진 투로(鬪路)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초식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나는지조차 모호했다. 단지 초식의 개념과 초식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내공흐름과 만이 지나칠 정도로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과연 이것들을 초식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에 관해서 담묵천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초식이란 상대방의 반응을 미리 계산하고 덮어씌우는 올가미와 같
다. 그러므로 만일 그 올가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덮쳐들지 예상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류의 초식이 단순 하고 가변성이 짙으며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위력을 담는 것은 다 그 때문이다. 반대로 저급한 초식은 동작이 많고 경직되어있으며 중심이 없다. 이류, 삼류의 초식은 오래 견딜 수 없는 일회용이다. 순간의 반짝거림과 같은 의외성이 없어지면 약점이 간파되고 버려진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기본에 가까워질수록 좋은 초식이 탄생한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길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때에 따라 가장 좋은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되면 또 너무 막연하게 되어버
린다. 그래서 난 연구한 것이다. 가장 기본에 가까우면서도 정밀한 계산이 섞인 초식을.
이렇게 하여 아홉 개의 초식이 탄생했다.
초식이라곤 해도 공격할 때 써야한다든지, 수비할 때 써야한다던지, 달려가며 써야한다던지 하는 조건은 전혀 없다. 특별한 자세 따위도 필요없고 앞뒤사방 어느 쪽의 적을 노려야 하는지도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하나 골라잡은 다음, 내공의 흐름에 유의하여 상대방한테 표출하면 된다. 개념만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면 어느 상황에 어떤 초식으로 대응해야할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진화운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 역시 천성문의 딱딱한 초식에 불만을 가져오던 터였다. 하지만 섣불리 손대기 시작했다간 너무 피곤해질 일이라 그냥 무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쨋든 이 무공으로 천하를 떨쳐울리겠다는 담묵천의 말이 영 허풍은 아닌 것 같았다.
『구극탈명공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것은 바로 유(柔), 강(剛), 만(慢), 쾌(快), 잠(潛), 표(表), 환(幻), 실(實), 이 여덟가지 요소다. 파고들자면 훨씬 많은 요소가 존재하나, 내 경험상 제대로 실전에 쓰이는 요소는 이 여덟 가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뒤에 적힌 아홉가지 초식은 이 여덟가지 요소를 최소한으로 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즉, 가장 기초적인 활용에 지나지 않는다.??일단, 뒤의 아홉가지 초식부터 확실히 익혀두라.』
한 번 믿음이 가자 진화운은 정신없이 구극탈명공에 빠져들었다.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잘 때도 그는 구극탈명공을 연구했다. 칼 대용인 길쭉한 나무토막이 그의 손에서 도무지 떠날 줄 몰랐다.
『제 일식 화접출쾌(火蝶出快)는 유(柔), 만(慢), 쾌(快), 실(實)의 요소가 담겨진 초식이다. 이 초식에는 느림과 빠름의 상반된 요소가 같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이어주는 부드러움의 존재가 아주 중요하다.
나비와 같이 하늘하늘(柔) 움직이다(慢) 갑자기 맹수로 돌변하여(快) 최단 직선경로로 나아가(實)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한다. 느림 속에 튀어나오는 빠름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중요점이다.
눈을 감고 온 몸의 힘을 풀어라. 관절 사이사이, 근육 하나하나마다 가벼운 수증기가 불어넣어졌다 상상해보라. 중추부터 말초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경을 텅 비워놓아라. 조급해하지 마라. 세상은 그대의 속도에 맞추어 돌아간다. 그 어떤 것에도 옥죄이지 마라. 몸을 묶어놓고 있는 밧줄을 서서히 풀어나가라. 가만히 있으면 불연듯 떠올라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라.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즐겨라.
온 몸이 충분히 가벼워진 다음, 춤을 추어라. 의식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주변의 기류(氣流)에 맞추어라. 어디선가 날아온 한줄기의 바람을 타라. 너의 몸 전체가 깡그리 분해되어 주위에 녹아버렸다고 상상하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잡아끌면 잡아끄는대로, 붙잡으면 붙잡는 대로, 치면 치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너울너울 춤을 추어라.
이제 눈을 뜨고 앞을 보아라. 눈앞에 적이 있다. 적은 지금 날카로 운 공격을 퍼부으며 그대를 공격하고 있다. 그대는 분명 느리게 움직이고 있으나, 상대방은 그대를 맞추지 못한다. 제아무리 강한 일격이라도 깃털을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대는 찬찬히 상대방을 살펴보라.
허술한 부분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만들어라. 달려드는 상대의 검을 쳐내든지, 꼼짝않는 상대의 다리를 무너뜨리든지. 드러난 상대의 헛점에 그대의 초점을 맞추어라. 가슴 속에서 불꽃 하나를 꺼내어라. 그 불꽃을 그대의 몸 한군데에 보내라. 칼을 쥐고 있는 손이든, 이마든, 발이든 좋다. 상대방을 가장 용이하게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아무데나 상관없다. 불꽃을 심어놓고 계속 상대를 지켜 보아라. '이때다'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럼 심어놓은 불꽃을 터트려라. 어느새 상대의 명줄을 끊어놓아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내공구결은...』
진화운은 되풀이해서 책을 읽었다. 도장을 파내 듯, 머리 속에 무공구절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해하려 애썼다. 길게 풀어서 설명되어 있긴 해도, 군데군데 시적 언어와 같이 푹 농축된 표현들이 많았다. 덕분에 그는 벽에 막힐 때마다 비명을 질러가며 머리를 굴려댔다. 짐작하건 데 이만한 집중력은 이전 그의 생애에서 없었고, 이후 그의 생애에도 없을 것이다.
진화운은 눈을 감고 섰다. 자신의 온 몸을 늘어뜨렸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매우 더뎌졌다 느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곧이어 발바닥에서 땅을 딛고 있는 감각이 사라졌다. 그는 춤을 추었다. 마치 나비처럼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그의 눈이 자연스럽게 띄여졌다. 시꺼먼 사람 그림자 하나가 그를 공격해왔다. 그의 손이 다가올 적마다 진화운은 살짝 살짝 피해냈다. 잠시 후, 그림자의 목 부분이 텅 비었다. 동시에 하나의 번쩍거림이 진화운의 가슴 속에서부터 오른 손에 쥔 검끝까지 내달았다.
진화운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나무토막을 죽 뻗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무토막은 그림자의 목덜미를 꿰뚫고 있었다. 그 림자는 잠깐 침묵하다 스르륵 사라졌다. 제 일식 화접출쾌(火蝶出快)가 마침내 그의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제 이식 진뢰참혼(振雷斬魂)은 강(剛), 만(慢), 실(實)의 요소가 들어있다. 수직베기에 가장 어울리는 초식이긴 하지만 그에 꼭 구애될 필요는 없다. 대각선베기, 수평베기, 심지어 찌르기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어찌 보면 아홉 초식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초식이라 할 수 있겠다. 상대방이 좀처럼 헛점을 드러내지 않을 때 쓰면 좋다. 이걸 받아낸 상대는 좋든 싫든 약간의 흔들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여력을 모았다가(慢), 목표를 포착한 즉시 일직선으로(實) 검을 던져라. 대신, 절대로 자세를 무너뜨려선 안 된다. 이것은 동귀어진(同歸御盡), 일초각사(一招覺死)의 초식이 아니다. 처음부터 위태로운 상태였으면 모르되, 공격과 방어를 균등하게 두고 초식을 사용해야 한다. 세차게(剛), 말 그대로 세차게 내리쳐야 한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부수고 지나갈 만큼.
검 끝에 성난 파도를 매달아라. 웅혼함을 한가득 채워 넣어라. 분노든 울분이든, 혹은 자랑스러움이든 가슴 속에 맺혀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라. 냉정한 가운데 감정을 다루어야함을 잊지 말도록. 가슴이 벅차오름이 느껴지는가. 이것을 검에 담아...』
『제 삼식 유혼격참(幽魂隔斬)은 유(柔), 쾌(快), 잠(潛), 표(表)가 아슬아슬하게 섞여있다. 네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특별히 돌출되거나 뒤쳐지면 실패다. 이 초식은 상대방 모르게, 하물며 그대 자신조차 모르게 다가가 상대를 베어야한다.
일단, 상대의 앞에 드러나라(表). 거리는 가깝든 멀든 상관없다. 그리고 주위의 흐름을 느껴라. 흐름... 그렇다. 흐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흐름이 상대방을 향하는 순간이 온다. 그럼 살며시 뛰어올라흐름을 타라(柔). 흐름의 율동에 말려들어라(潛). 이때부터 그대는 상대방의 시야에서, 범위에서 사라진다. 상대방은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그런 상대방의 곁에 다가가서 휘둘러라(快). 휘두른다 생각하지 말고 휘둘러라. 아늑한 강 위에서 노를 젓는다고 생각하고 휘둘러라...』
『제 사식 화우일랑(火雨一狼)은 강(剛), 만(慢), 환(幻)의 초식이다.
이것은 가장 높은 기교(技巧)가 요구된다. 검의 세련된 움직임에 성패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어느만큼 검에 익숙해있지 않은 사람은 그냥 넘어가도록.
수십개의 섬광으로 상대를 현혹시키며(幻) 천천히(慢) 상대에게 다가간 후, 마지막 한 발짝에 무게를 실어 하나의 폭탄(剛)을 뿜어내야. ..』
『제 오식 회공섬탄(回空閃炭)은 강(剛), 쾌(快), 실(實)을 갖춘 초식으로서, 극소에 가깝게 집중되어 극한에 가까운 파괴력을 자랑하는...』
『제 육식 질풍검영(疾風劍影)은 유(柔), 쾌(快), 환(幻), 실(實)의...』
『제 칠식 암출맹아(暗出猛牙)는 강(剛), 만(慢), 잠(潛)...』
『제 팔식 월야절쇄(月夜絶殺)는 강(剛), 쾌(快)...』
『제 구식 패도천승(覇刀天昇)은 가장 특이한 초식이며...』
『이 아홉 가지 초식을 꾸준히 반복하라. 그럼 그 속에 담겨진 여덟가지 요소가 저절로 몸에 배어든다. 어느 시기를 넘어서서 어림풋이 여덟가지 요소의 윤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윤곽이 또렷이 드러나는 순간, 그대는 이 구극탈명공을 완전히 익혔다고 볼 수 있다.』
진화운은 무서운 속도로 구극탈명공을 연마해 나갔다. 구극탈명공의 아홉 초식은 무얼 먼저 익히고 무얼 나중 익혀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갑자기 변덕이 일어나 제 이식 진뢰참혼(振雷斬魂) 다음에 제 칠식 암 출맹아(暗出猛牙)를 익힌다해도 상관없었다. 물론, 괜한 반골근성이 없던 진화운은 그냥 일, 이, 삼, 사의 순서대로 나갔다.
그런데 하다보니 이게 또 다들 각각이 아니었다. 하나를 익히고 나서 다른 하나를 보는 것 보다 둘을 익히고 나서 다른 하나를 보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졌다.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담묵천이 말한 가장 기초적인 활용이란 소리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담묵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홉가지 초식은 단 하나라고 볼 수도 있고 수백수천이라 볼
수도 있다. 제 일식 화접출쾌(火蝶出快)에서 유(柔)와 쾌(快) 요소를 빼고 강(剛)의 요소를 넣으면 제 이식 진뢰참혼(振雷斬魂)이 되고, 만(慢) 의 요소를 빼고 환(幻)의 요소를 넣으면 제 육식 질풍검영(疾風劍影)이 된다.
또, 제 사식 화우일랑(火雨一狼)에 새로이 잠(潛)의 요소를 섞거나, 제 육식 질풍검영(疾風劍影)에서 환(幻)의 요소를 첨가하면 전혀 색다 른 초식이 만들어진다. 제 오식 회공섬탄(回空閃炭)에서 강(剛)의 요소를 빼버린다단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성공할 자신만 있다면, 아예 두 가지 초식을 하나로 합쳐서 사용해도 좋다. 이것들은 순전히 그대의 창조물이니, 그대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도 된다.』
진화운은 찌르기, 베기와 같은 기본적인 수련을 절대 거르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한 찌르기, 베기를 반복하다보면 막혀 있던 부분이 뻥 뚫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가장 기본에 다가간 초식을 추구하는 이 구극탈명공의 특성상 더욱 그랬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알아낸 것인데, 담묵천이 남겨놓은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그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뭐랄까, 눈앞에 서있는 벽을 뚫지 못해 안달하던 중에, 벽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져 있으며 어떤 충격에 약하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힌 설명서를 얻는 격이랄까.
진화운은 한층 더 열심히 수련에 전념했고, 이에 맞추어 그의 무공수위는 가히 청천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는 몸관리 또한 철두철미하게 했다. 정해진 시간에 꼭꼭 식사(벽 곡단 몇 개 주워 먹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를 챙겨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 틈틈히 빨래나 청소를 하며 위생에도 신경썼다. 중간 중간 영약을 복용하여 내공을 키우고, 스스로 세워둔 계획에 따라 근육을 단련해나갔다. 이리되자 그의 몸은 무섭도록 탄탄해지고 활력이 흘러넘쳤다. 몸 상태가 어느 만큼이냐 좋았냐하면...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화장실은 따로 안 만들어놨네. 절벽에 대고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꼼꼼한 사람은 괜히 꼼꼼하다 부르는 게 아니지. 나중에라도 눈치 챘으면 그 성격에 맘 편히 눈감지 못했겠는 걸? 훗 훗훗."
...가끔 이런 농담을 중얼거릴 정도였다.
오직 수련에만 신경쓰는 나날이 계속되자 평소 잡다한 일 때문에 늘 가져오던 퀴퀴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올곧은 추진력이 붙었다. 그는 제 물을 만난 물고기 마냥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팔딱팔딱 뛰어다녔다.
쉽게 말해 '뭐가 되도 되는 시기'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 아홉 가지 초식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기틀을 닦아 논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쓰는 자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변형이 가능하다. 실상 아홉 가지 초식의 근간을 이루는 여덟 가지 요소 역시, 목표한 곳에 도달하기 위한 계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 단계를 넘어 더 나아가면 그대의 동작 하나하나가 곧 초식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확실한 다짐은 해줄 수 없겠다. 그대는 나를 뛰어넘어라. 이 무공이 그대를 한계까지 끌어올려줄 수 있으리라고 감히 나는 자신한다. 그대가 어느 만큼의 역량을 가졌는지 궁금하구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진화운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제 떠나야할 때가 왔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경건한 기분으로 불을 피웠다. 불이 잘 안 일어나는 바람에 경건한 기분 대신 짜증스러움이 들어찬 것이 옥의 티였다.
하여간 간신히 일으킨 불꽃을 구극탈명공 비급에 붙이려던 진화운이 잠시 멈칫했다. 굳이 태워버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불꽃은 비급에 옮아 붙었고, 약간의 기다림 후에 책을 한 줌의 재로 바꾸어 놓았다. 담묵천은 분명 '그대가 내 무공을 배우기 싫다면 망설일 필요 없이 여기 모두를 불태워 버려라.'...하고 말했다. 전해지면 좋고 전해지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다짐이었음에 틀림없다.
"쳇..."
진화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방금 말은 핑계였다. 적당히 합리화하긴 했으나 진화운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 아닌 누군가가 이곳을 발견하게 되어 구극탈명공을 익히게 될까 두려운 심정이 분명 들어있었다. 냉철하게 따져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느 미친놈이 뭐가 있을 줄 알고 이 절벽 한가운데로 찾아온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도 왔는데 다른 사람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생각을 진화운은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결국 불을 피움으로써 그는 있을 수 없는 일에 굴복한 꼴이 되었다.
진화운은 나도 참 속이 좁군..하며 쓰게 웃었다. 최소한 애써 이 창피함을 잊으려하는 추한 모습까진 보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할 정도로 이 구극탈명공이 뛰어나다는 소리니까. 너무 억울 해하지 마십시오, 담묵천.'
진화운은 책들과 항아리가 쌓여 있는 방에도 불을 질렀다. 참 찝찝하고 미안한 기분이 그를 콕콕 찔렀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어찌하겠나. 세상은 만약의 경우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이 무공을 익힌 자가 나와 나중에 적대관계로 만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봐야 늦다. 피할 수 있는 위험은 반드시 피해가야 한다.
어른은 될 성부른 새싹을 키워주지 않는다. 될 성부른 새싹이 자신 을 위협하기 전에 밟아 죽인다. 싹을 키우는 경우는 어디까지나 싹이 커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진화운은 약간 감상에 젖어 중얼거렸다. 순수한 호의란 것은... 과연 있을지 모르나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다.
『내 마지막 당부는 언제 어느 때라도 기본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본이란 가장 최초의 시발점을 뜻한다. 무공을 익히다 막힐 때면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전진하라. 그럼 어느 사이엔가 문제가 해결된다. 만일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어느 부분에서 엇갈렸는지는 알 수 있다. 명심하라. 기본이다.』
책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진화운은 눈을 감고 되새김질하듯 이 구절을 몇 번 암송했다. 그리고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나가던 길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비죽 튀어나온 돌을 건드려 문을 닫았다.
그그그그긍...
동굴 밖으로 나선 진화운은 기지개를 좍 펴고 난 다음, 절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나 가벼워 그냥 손앞이 발로 톡톡 튀어 올라가도 될 듯 싶었다. 무공을 단련하다보니 별볼 일 없던 경공까지 덩달아 큰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실행하진 않았다. 그는 돌발적인 자신감을 늘 경계하는 사나이였다. 덕분에 동료들 사이에서 만취한 상태에서도 술값 내겠다고 나서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손쉽게 벼랑으로 올라선 진화운은 두 팔을 한껏 벌렸다. 본질적으로야 다를 것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매우 다른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셨다. 근래 없던 확 트인 상쾌함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는 거의 필연적으로 배 한가운데에서 뻗어 나오는 호탕함을 느꼈다.
진화운은 커다랗게, 온 몸으로 웃었다.
첫댓글 예전에 본것 같은데.....
다시한번 읽어보는 느낌 입니다.
즐독 ㄳ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