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절정공자(絶情公子)
1.
내당 안은 정결하게 꾸며진 넓은 대청이었다.
대청의 중앙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좌우로 앉은 채 걸어들어오는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좌측에는 회색 도포를 걸친 육십 가량의 여도사 하나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도사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깨끗했는데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 깊이를 알 수 없게 했다.
그녀가 바로 이곳 현묘관의 관주이며 강남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묘우사태(妙雨師太)였다.
그녀의 옆에는 화려한 궁장(宮裝)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아쉽게도 얼굴에는 검은 망사를 하고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 궁장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와 자태는 그야말로 사내라면 누구나가 침을 흘릴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녀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귀공자가 앉아 있었고 귀공자의 뒤에는 쌍둥이로 보이는 두 명의 청의중년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귀공자의 용모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뛰어난 것이었으나 눈빛이 차갑고 냉랭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엽단풍의 엄청난 체구에 모두들 놀란 듯했다.
엽단풍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의 장대같이 큰 키와 우람한 체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를 만나본 후에 품게 되는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엽단풍은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앙에 앉아 있는 궁장망사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특유의 휘적휘적하는 걸음걸이로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는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시오?"
궁장망사녀의 망사 사이로 두 줄기 눈빛이 반짝거렸다.
"당신은 나를 아시나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듣기만 해도 절로 시원한 감을 느낄 정도로 맑고 깨끗한 것이었다.
엽단풍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당신은 사대미인 중에서서봉(西鳳)이라고 알려진 서천봉희(西天鳳姬) 공손단경이 아니오?"
궁장망사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공손단경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요?"
엽단풍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를 모르오?"
이것은 참으로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공손단경이 생면부지의 그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공손단경은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몰라요. 당신은 누군가요?"
엽단풍은 친절하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엽단풍이란 사람이오. 고향은 산서성(山西省) 분양(汾陽)이며 나이는 이십육 세이고 아직 미혼(未婚)이오. 신체는 보다시피 건강해서 충분히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고 그렇게 게으른 편도 아니오."
엽단풍은 입가에 침도 바르지 않고 주절주절 잘도 지껄여댔다.
"게다가 잠을 잘 때 코를 고는 버릇도 없고 남들처럼 술버릇이 나쁘지도 않소. 손재주가 좋아서 아무 거나 다 잘 만들고 어린 아이를 싫어하지도 않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아주 믿음직하고 성실하며 자상한남편감이란 이야기요."
그의 일사천리 같은 말에 공손단경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멍한 표정이었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칭 훌륭한 남편감이라고 떠벌이고 있으니 누가 보기에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공손단경은 한동안 멍하니 그를 지켜보고 있다가 망사사이로 나직하게 웃었다.
"풋! 재미있는 분이군요.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했나요?"
다른 건 몰라도 엽단풍의 낯짝은 철판보다 두꺼운 게 틀림없었다.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거나 거리끼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어서 남들하고 대화하는 걸 별로 바라지 않소. 내가 당신을 만나려고 한건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과연 소문처럼 대단한 미인인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오."
공손단경의 눈빛이 망사 사이로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내가 만일 소문과 달리 별로 예쁜 미인이 아니라면?"
엽단풍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나는 잘 있으란 말을 하고 이대로 술집에 가서 술이나 진탕 퍼마실 거요."
"만일 내가 소문처럼 미인이라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엽단풍을 주시했다. 엽단풍은 히죽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꼬셔서 술을 한 잔 같이 마신 다음 데리고 잘 생각이오."
사람들은 아연해져서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눈앞의 이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손단경을 술집에서 몸을 파는 기녀(妓女)처럼 손쉽게 데리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자가 존재하다니... 설사 그런 마음을 품었다 해도 어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 자는 공손단경이 어떤 신분의 여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자신의 커다란 체구만 믿고 천하의 누구도 감히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닐까?
공손단경도 일시지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화가 나서 말을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서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아무튼 그녀의 심정이 지금 어떠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엽단풍만은 제외였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넉살좋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물론 싫다고 하겠지만 나하고 조금 지내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요. 나는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니 당신은 그저 내게 모든 일을 맡기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오."
대체 이런 일에 경험이 많다는 건 무슨 말이고 모든 일을 맡기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공손단경의 얼굴은 망사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그린 듯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냉막한 인상의 귀공자였다.
귀공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은 엽단풍이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의 얼굴에 고정된 채 날카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벌려지며 얼굴에 떠오른 표정 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작자로군. 소궁주(小宮主)는 이런 자와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시오?"
공손단경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냉공자(冷公子)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냉공자라 불리운 귀공자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소궁주만 괜찮다면 나는 이 자를 물리치고 소궁주와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소. 소궁주의 의향은 어떻소?"
공손단경은 망사 속에서 조용하게 웃었다.
"냉공자님이 하시려는 일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어요? 냉공자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대를 치켜 세우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조금 미묘한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냉공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표정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냉공자는 짤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운(程雲)! 이 자를 밖으로 내보내라."
그의 뒤에 말없이 시립해 있던 두 명의 청의중년인 중 입가에 깨알만한 점이 찍혀 있는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운이라 불리운 청의중년인은 즉시 엽단풍의 앞으로 다가왔다.
"귀하. 따라오시오."
엽단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오라니?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한단 말이오?"
정운은 입가에 냉랭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이곳은 귀하가 더 있을 자리가 아니오. 괜한 수작부리지 말고 어서 밖으로 나오시오."
엽단풍은 봉두난발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공손단경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소?"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나를 따라 오시오."
"난 이곳에 있는 게 더 좋소. 그러니 정 나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나가구려."
정운의 눈가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정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소?"
엽단풍은 히죽 웃었다.
"난 철이 든 이후로 뭘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번도 없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용건이 없으니 당신 혼자서 밖을 싸돌아 다니든 관을 보고 눈물을 질질 짜든 마음대로 하구려."
정운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로 해서는 안 될 작자로군."
그는 엽단풍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우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엽단풍의 어깨를 잡아왔다.
스읏!
정운의 손은 마치 매의 발톱처럼 강인하고 빨랐다.
누구라도 그 강철 같은 손아귀에 걸린 다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갈라질 것 같았다.
더구나 그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과연 엽단풍은 피하지 못하고 정운의 갈쿠리 같은 손에 그대로 어깨를 잡히고 말았다.
"내 손이 독하다고 탓하지 마라!"
정운은 악독하게 외치며 엽단풍의 어깨를 움켜잡은 손에 잔뜩 공력을 돋구었다.
뚝!
뼈가 으스러지는 음향이 들려오며 한 사람이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크으윽...!"
냉공자는 냉랭한 웃음을 지으며 그쪽을 돌아보다 안색이 홱 변했다.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정운이 아닌가?
그는 오른 손가락이 모두 부러졌는지 손가락이 기이하게 뒤틀린 채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모...몸뚱아리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엽단풍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 몸이 단단한 게 아니라 당신 손가락이 너무 약한 거요. 그래가지고야 어디 닭 모가지라도 비틀 수 있겠소?"
정운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미...미친 놈! 어디 내 검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그는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쾌액!
검을 뽑는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이 허리춤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섬ㅉ한 검광(劍光) 한 가닥이 엽단풍의 가슴팍을 향해 폭사해 나오고 있었다. 실로 가공스러운 쾌검(快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엽단풍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덥석 오른 손을 내밀어 그 무시무시한 검광을 잡으려 했다.
"이 놈!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검광 속에서 정운의 폭갈소리가 터져 나오며 검광이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팟!
검광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엽단풍의 오른손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아니, 꿰뚫었다고 느꼈다.
검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이란...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날아들던 정운의 검이 엽단풍의 커다란 손아귀에 그대로 잡혀져 있는 것이아닌가?
"이...이럴 수가..."
정운은 검을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악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엽단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검이 어떻게 상대방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놀란 것은 비단 정운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주인인 묘우사태는 물론이고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공손단경의 눈가에 마저 희미한 놀람의 빛이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냉공자였다. 냉공자만이 정운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뢰쌍검(奔雷雙劍)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내다니...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군.)
그는 엽단풍에 대한 생각을 달리한 듯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전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운과 그의 쌍둥이 형인 정풍(程風)은 과거 하남(河南)일대를 석권했던 절정의 검객들이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분뢰쌍검 정씨형제(程氏兄弟)의 명성은 강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검법은 비단 빠르고 날카로울 뿐 아니라 강맹하기 그지없어 별호 그대로 마치 뇌전(雷電)이 치는 듯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의 검을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인 양 쉽사리 빼앗아 버리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엽단풍은 중인들의 이런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른손에 움켜잡은 정운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상하군. 저 자는 이게 굉장히 무서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는데 어째서 이렇게 변변치 못한 것일까?"
그가 검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검의 한 부분이 뚝뚝 부러졌다.
"이것 좀 봐! 이건 유리로 만든 게 분명하군. 손가락도 그렇고 차고 있는 검도 이 지경이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로군."
그는 쯧쯧하고 혀까지 차는 것이었다.
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의 검은 비록 절세의 신병(神兵)은 아닐지라도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강검(靑剛劍)으로서 분뢰쌍검의 명성을 천하에 날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청강검이 엽단풍의 수중에 들어가자 정말 유리로 만든 것인 양 맥없이 부러지고 있으니 그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는 상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인물임을 알았으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을 생각하자 도저히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이 미친 놈...!"
그가 막 노성을 지르며 엽단풍에게 달려들려 하는 순간,
"정운. 물러나라."
냉공자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정운은 이를 악문 채 엽단풍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검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냉공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엽단풍을 돌아보았다.
"내가 귀하를 잘못 보았군. 귀하는 확실히 이곳에 와서 큰 소리를 칠 실력이 있소."
엽단풍은 여전히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 주는군.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의 얼음덩어리 같은 얼굴이 아니라 저기 앉아있는 저 여자요."
그는 턱으로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공손단경을 가리켰다.
냉공자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감돌았다.
"흐흐... 광오(狂傲)하군. 내가 누구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엽단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소. 나는 원래 남자에게는 별로 관심 없소."
냉공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나 절정공자(絶情公子) 냉우빙(冷宇氷)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 자는 아직 없었소."
"그거야 당신이 견문이 좁은 탓이지. 그런데 참...당신 이름이 냉우빙이라 했소?"
엽단풍이 묻자 냉공자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그렇소. 왜 이제 생각이 달라졌소?"
엽단풍은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이름이 생긴 것하고 아주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소. 과연 당신은 내 짐작대로 얼음(氷)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구료."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단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망사 속에서 나직하게 웃었다.
심지어 근엄한 표정의 묘우사태마저 웃음을 참느라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냉우빙의 안색이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정도로 냉막하게 변했다.
그의 일생(一生)에 이와 같은 모욕을 받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절정공자 냉우빙은 강남무림(江南武林)에서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손꼽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용모가 출중하고 공력이 초절할 뿐 아니라 검법에 있어서는 젊은 층의 고수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강남제일공자(江南第一公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냉우빙은 별호 만큼이나 냉혹하고 차가운 성격이라 모두들 그를 두려워 해서 누구도 그의 앞에서 그를 무시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그가 언제 엽단풍 같은 사람을 만나 보았겠는가?
2
엽단풍은 냉우빙의 안색이야 어떻게 변하건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럼 용무가 끝났으면 얼음공자께선 이만 비켜주시지 않겠소? 난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오."
이어 성큼성큼 냉우빙의 옆을 지나 공손단경에게 다가가려 했다.
냉우빙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작자로군."
그의 오른쪽 소매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거렸다.
파아아...
그와 함께 무언가 노도와 같은 암경(暗勁)이 엽단풍의 상체를 향해 밀려왔다.
이것은 금강무영수(金剛無影袖)라는 초절정의 상승무공(上乘武功)으로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금강동인이라도 박살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금강무영수는 그야말로 은밀하면서도 강력하기 그지없어 엽단풍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대로 가슴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쾅!
굉음이 터지며 엽단풍의 커다란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냉우빙 자신이었다.
"으음..."
그는 주춤 뒤로 두 걸음 물러난 뒤 얄팍한 입술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호신강기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엽단풍은 물끄러미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은 완전히 먼지로 화해 맨 가슴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 전 그가 당한 일격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엽단풍은 별다른 충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건 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옷인데 벌써 못쓰게 되었으니... 나는 마음이 너무 좋은 사람이지만 이건 도저히 참지 못하겠군."
그는 냉우빙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옷 값을 물어내던지 아니면 새 옷을 하나 사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옷을 홀라당 벗겨 버리고 말겠소."
냉우빙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검을 피할 수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하지."
엽단풍은 팔짱을 낀 채 히죽 웃었다.
"그렇게 하다니..옷을 물어주겠다는 거요? 아니면 홀라당 벗겠다는 거요?"
냉우빙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무표정하게 굳어졌다.
그는 냉정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경천삼검(驚天三劍)을 모두 받아낸다면 당신이 원하는 데로 하겠소."
경천삼검이란 말에 공손단경과 묘우사태의 눈에 경악어린 빛이 떠올랐다.
하나 엽단풍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좋소, 좋아! 당신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당신의 알몸도 얼굴처럼 그렇게 차가운지 알아봐야겠소."
냉우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얼음장같이 냉막한 그의 얼굴 한가운데 박힌 두 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殺光)이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순간,
"경천뢰(驚天雷)!"
그의 얄팍한 입술을 뚫고 싸늘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파파팟!
그의 허리춤에서 십 여 가닥의 번갯불 같은 검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마른 하늘에 수십 개의 뇌전이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수십 개의 뇌전은 허공을 갈가리 찢어 놓으며 엽단풍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그야말로 보기만 해도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가공스러운 위력이었다.
경천삼검은 강호무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상고절학(上古絶學)으로서 한 번 펼치면 능히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다고 알려진 절세의 검법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검법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도 익혔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냉우빙의 손에 의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엽단풍의 전신은 그 폭발 치듯 퍼부어지는 수십 개의 검광 속에서 금시라도 산산이 잘려질 것만 같았다.
폭죽처럼 피어오르던 검광이 사라지고 장내의 광경이 나타났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나직한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입고 있는 흑의도 그대로였고 흐트러진 흑발 또한 변함이 없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중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검광이 그의 전신을 수십 차례나 지나갔을 텐데 아무런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니...
냉우빙은 엽단풍의 일 장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우유빛 검광이 번뜩이는 연검(軟劍)이 쥐어져 있었다.
냉우빙은 엽단풍을 뚫어지게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엽단풍은 문득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왼쪽 소매 한귀퉁이가 조금 잘려져 나가 있었다.
엽단풍은 잠시 잘려나간 자신의 옷소매를 내려보다가 냉우빙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멋진 초식이오. 과연 경천삼검의 이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냉우빙은 여전히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엽단풍은 별반 표정 없는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빠른 것에 비해서 어째 변화의 묘미는 좀 떨어지는 것 같군."
냉우빙의 몸이 움찔거렸다.
엽단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 말은 사실은 경천삼검 중 제 일초식인 경천뢰의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짧은 순간에 그 자리에 선 채로 경천뢰의 가공할 쾌검을 피하면서 언제 그 초식의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인가?
냉우빙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다음 순간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재차 엽단풍을 향해 날아들었다.
스으으...
그의 연검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검기(劍氣)가 피어올랐다.
바로 경천삼검의 두 번째 초식인 경천무(驚天霧)가 전개된 것이다.
경천무는 비단 빠르기도 빠를 뿐 아니라 검이 떨쳐나가는 범위와 변화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엽단풍의 몸은 순식간에 그 검의 안개 속에 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앗?"
안개 속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이 놀라 보니 그는 바로 냉우빙이 아닌가?
엄청난 기세로 공격해 들어갔던 냉우빙이 너무도 간단하게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두 손으로 연검을 잡은 채 커다랗게 휘둘렀다.
"이야압!"
주위를 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의 검에서 마치 그물 같은 검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파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그 그물 같은 검광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버렸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그물 속에서는 살아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경천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경천망(驚天網)이었다.
경천망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경천뢰의 빠르기에 경천무의 변화무쌍함을 가미한 것으로서 절대로 맨손으로는 견뎌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엽단풍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오른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주먹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별다른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하나 그 다른 사람의 주먹보다 두 배는 더 클 듯한 주먹이 천천히 움직이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스스...
그 느리게 다가오는 주먹에 닿는 순간 냉우빙이 펼쳐낸 막강한 검광의 그물이 맥없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예리한 도끼에 닿은 그물이 가닥가닥 끊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냉우빙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사력(死力)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자신의 검세 속을 천천히 뚫고 들어오는 그 커다란 주먹을 막을 수가 없었다.
쾅!
주먹과 검이 정면으로 격돌하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냉우빙은 답답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왈칵 피를 토하고 말았다.
"우웩!"
냉우빙은 한 차례 시뻘건 피를 토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든듯 경악과 불신어린 표정으로 엽단풍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이렇게 무거운 권법(拳法)이 있다니..."
엽단풍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마치 천하의 무엇으로도 꿈쩍하지 않을 거대한 철탑(鐵塔)을 보는 것 같았다.
거친 흑의를 장대한 체구에 감추고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말 못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엽단풍은 언제 손을 썼느냐는 듯 담담한 눈으로 냉우빙을 응시했다.
"당신의 검을 피하면 당신의 알몸을 구경시켜준다고 한 것 같은데..."
냉우빙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렸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엽단풍은 빙긋 웃으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약속이 약속이니 만큼 특별히 봐주도록 하지."
그의 커다란 손이 흡사 거대한 문어발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자 냉우빙은 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하나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오는 그 손그림자의 위세가 실로 기이하여 도저히 피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찌익!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냉우빙의 어깨부분 옷자락이 길게 찢어졌다.
"어허. 옷 벗는걸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왜 피하는 거요? 당신은 그럼 스스로 벗겠단 말이오?"
엽단풍은 오른손에 찢어진 냉우빙의 옷자락을 든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냉우빙은 멍하니 찢어진 자신의 옷자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치욕은 반드시 갚고야 말겠다."
"옷 좀 찢어진 걸 가지고 치욕은 무슨... 약속 안 지키고 도망가면 그게 진짜 치욕이지."
엽단풍은 껄껄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어 냉우빙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냉우빙은 다시 전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엽단풍의 그 커다란 손그림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찌찌찍!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냉우빙의 허리부분 옷자락이 찢어져 그의 속살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냉우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날아갔다.
"하하...그냥 가면 어떡하오? 약속을 지켜야지."
엽단풍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할 때 돌연 그의 양쪽에서 섬뜩한 검광이 폭사해 왔다.
파앗! 팟!
정운과 정풍이 냉우빙을 쫓아가는 엽단풍을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엽단풍은 수중에 들고 있던 냉우빙의 찢겨진 옷자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내가 보고 싶은 건 당신네들 알몸이 아니라니까. 난 저 얼음공자의 알몸이 보고 싶단 말이오."
까까깡!
불똥이 튀기며 정운과 정풍의 몸이 뒤로 주르르 격퇴되었다.
"크윽!"
"큭!"
놀랍게도 옷자락이 닿은 순간 그들의 검은 그대로 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하나 그 순간 냉우빙의 몸은 어느 새 창문을 뚫고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엽단풍...! 이 복수는 반드시 해 주겠다!"
멀리서 냉우빙의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엽단풍은 찢어진 옷자락을 든 채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것 참. 저 자는 속살이 뽀얗고 보들보들해서 여자 알몸 보는 기분이 날 것 같았는데..."
그가 혼자 주절거리고 있는 동안에 정운과 정풍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냅다 냉우빙이 사라진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도망쳐 버렸다.
실로 천하가 경동(驚動)할 일이었다.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절정공자와 분뢰쌍검이 한 사람이 무서워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엽단풍은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명색이 강남제일의 공자라는 작자가 자신이 내뱉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다니...그까짓 알몸 좀 보여주는 게 그렇게 큰 일인가? 그냥 목욕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될 텐데 말이야..."
그는 연신 히죽히죽 웃더니 고개를 돌려 공손단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