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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유대인들의 예수 살해 음모와 베다니 도유 사건,가룟 유다의 배신, 성만찬 전후의 사건들과 겟세마네 동산의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제 11-16장까지 이어지는 주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에 대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제 11-15장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본래 제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의 구속 사역의 결정적 성취인 십자가 수난 사건을 다루는 수난 주간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은 제 11장 개관을 보라.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은 수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서 여섯째 날인 금요일 새벽까지 대략 4일간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본장은 매우 긴 장으로서 십자가 수난이 있기 직전의 가룟 유다의 배신,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예수의 체포와 심문 등의 숨 막히는 사건이 급박하게 전개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본장을 각 문단별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절은 지금껏 11:20-13 : 37까지에 기록된 화요일의 각종 논쟁과 주의 행적으로 이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하여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죽이려는 살해 음모를 꾸미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보도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이 지금껏 비록 위선으로나마 가졌던 윤리와 양심의 가면까지 저버리고 그 어떤 술책을 통해서라도 예수를 살해 제거하고자 상호 결의하였음이 보도된다. 마침내 예수를 정치적 불순자로 몰아 무고히 처형하는 데까지 비약된 유대인의 예수 배척은 그 원인, 과정, 결과 전반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필요한 바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보라.
다음 3-9절은 유명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도유(塗油) 사건의 기록이며 10-11절은 넷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가룟 유다 배신 기사이다. 이 도유 사건은 원래는 성 고난 주간의 둘째 날인 토요일 날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저자 마가는 이를 여섯째 날의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과 대조시키기 위하여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여기 함께 기록한 것이다. 주의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발생한 이 여인의 기름 부음은 예수가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요 구속주이심을 신앙 고백한 것으로서 다가오는 주의 장례를 예비한 결과가 되었다. 한편 가룟 유다의 배신은 먼저는 이 여인의 도유 시 그 사건의 구속사적 의의는 깨닫지 못하고 그 도유 사건에 들어간 300 데나리온의 경비만 생각하다가 주님께 꾸중들은 것이 직접적 동기가 된 측면도 있다. 따라서 주님께 도유했던 이 여인이 구속주(救贖主)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과 헌신을 나타냈다면 가룟 유다는 불신과 배척을 나타내어 구속주이신 우리 주 예수에 대한 반응의 양극단을 각각 보여 주었다 하겠다. 그리하여 마가는 이 둘을 시간 순을 무시하고 함께 기록한 것이다.
다음 12-31절은 성 고난 주간의 제 다섯째 날인 목요일에 있었던 성만찬 사건 전후의 기사이다. 이를 보다 세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12-16절은 주께서 유월절(the Passover) 하루 전임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만찬 준비를 명하신 것을 보도한다. 이는 단순한 유월절 만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 시대의 유월절(출 12:21-28)이 예표했던 참 실체인 주의 십자가 구속 수난을 통한 죄인의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을 기념하는 신약의 성만찬(聖晩餐)을 새로이 제정하시기 위함이었음이 후에 드러난다. 사실을 보도한다.
17-21절은 주께서 성만찬 석상에서 다시 한 번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한 사실을 보도한다. 이는 결국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한 것은 주님이 약해서나 미래를 미리 예측하시지 못해서 가아니라, 이처럼 미리 다 아셨으면서도 스스로 당하신 것으로서 결국 우리의 구속을 위한 희생이었음을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22-26절은 주께서 이제 구약의 유월절(the Passover) 만찬의 법을 신약의 성만찬의 법으로 새로이 제정하셨음을 보도한다. 여기에서 오묘한 구속사적 섭리가 담겨있다. 유월절은 다름 아니라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원래 죄인으로서 죽어야 할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룸으로써 인간을 살리는 구속의 원리를 상징했던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집마다 바르게 하시고 이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구원하시고 반대로 바르지 않았던 애굽인의 집은 그 장자를 치심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였다(출 12:1-10). 그런데 이제 주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당신 자신을 영원하고 완전한 희생 양으로 내어 주사 그 피로 모든 죄인은 죄 값을 대신 갚아 구속하시고 그 피를 믿는 택한 모든 죄인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탈출시켜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구원의 대상과 결과가 신약의 주님의 구속사역에는 못 미쳤으나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서 결국 주님의 구속사역을 예표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었다. 이에 주님은 구약의 유월절이 기념한 출애굽 사건이 예표한 실체였던 당신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 유월절의 법은 폐하시고 그 유월절의 실체였던 당신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성만찬의 법을 제정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당신을 기점으로 시작된 신약은 구약을 성취 확장한 것으로써 당신 안에서 얻은 자가 되고 예속되며 발전됨을 보여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신·구약을 일관하여 당신의 구속사역을 하나의 원리, 하나의 주권, 하나의 은혜로 진행해 오셨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또한 주님은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자이심을 깨닫는다. 끝으로 주님은 그 옛날 유월절의 법을 제정하셨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의 법을 제정할 주권을 가지신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다.
27-31절은 당신께서 잡히시고 십자가 수난을 당할 때 모든 제자들이 당신을 떠나고 특히 당장은 호언장담하는 베드로(the Peter)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 내용이다. 이 구절은 짧지만 깊이 묵상할수록 더욱 깊은 구속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구절들이다. 먼저 이는 주님은 앞으로 닥칠 당신의 십자가 수난사건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제반 사실을 세세히 다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이는 결국 다시금 주님의 십자가 수난 사역은 주께서 힘이 없거나 무지해서 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당하신 구속사역으로서 실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임을 증거해 준다. 둘째 주님이 그토록 크신 은혜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또 용기 있게 수난 당하셨지만 제자들은 곧 주님을 버리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였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런 현실이 유독 베드로에게만 국한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구약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내내 그러하였으며 바로 나 자신도 수없이 주님을 부인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그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가! 세 번째 주님이 베드로의 세 번 부인 등을 예언하신 것은 베드로나 제자들을 원망하거나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이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당신이 부활 승천하였을 때 비로소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은 앞일을 다 아셨던 전지전능한 주이시다는 것, 자신들이 주님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주님의 뒤를 따라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볼 때에 이처럼 나약하던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새 힘을 받아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죽음을 각오하고 전했음을 발견한다. 이는 인간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진리 안에 거하면 영원한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여, 그 어떤 죄인도 권능과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다는 구속사적 진리(救贖史的 眞理)를 반영한다.
32-42절에 기록된 성만찬(聖晩餐)을 마치시고 이제 내일로 다가온 십자가 수난을 예언하여 주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장면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기사에서 우리는 구속주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더욱이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을 앞두신 주님의 처절한 기도였기에 우리는 이를 대할 때 주님을 향한 끝없는 감사와 죄스러운 마음이 뒤엉킨 벅찬 감동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택함 받은 우리 모든 성도의 대표로서 이제 십자가 수난 사역이라는 구속사적 결정적 사건을 앞두고 기도하는 주님을 수행했던 제자들의 나약한 모습에서 실로 주님은 처절한 고독 속에서 구속사역을 감당하실 수밖에 없었음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수행한 주님의 은혜가 그 얼마나 큰 것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제 2위성자로서의 신성(神性)과 더불어 연약한 인성(人性)을 지니신 주님께서 땀이 피가 되는 애끓는 기도를 드리시면서도 당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 사실에서, 그런 주의 희생과 노고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본을 받아 나약한 인간이라는 핑계를 내세우기 전에 실로 죽기까지 충성하여야 할 구속사적 의무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다음 43-72절까지는 모두 성 고난 주간 중에서도 결정적으로 십자가 수난이 집행된 날인 금요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들로서 예수님의 체포 사건(43-52절)과 이어진 대제사장 가야바의 예수 심문(53-65절), 그리고 그 이전의 주의 예언 말씀대로 체포당하신 예수를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66-72절) 등에 대한 기록이다. 체포에서 주의 죽음에까지 이른 십자가 수난 전체의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제15장의 개관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긴박하게 전개된 각 단락 자체의 구속사적 의의에 집중하기로 한다.
먼저 주님의 체포 기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전 우주적인 전지전능한 주권과 능력을 스스로 인지하시고 또 이를 분명히 밝히시면서도 스스로 그리고 순순히 체포당한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그 체포와 십자가 처형 등 일련의 주의 수난이 단순히 정치, 종교적 수난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제2위 성자 하나님만이 수행할 수 있는 택한 죄인 모두를 위한 구속 사역을 위한 수난이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주께서 당신은 열두 영(營) 더되는 천사들(Angels)을 동원할 수 있음을 강조한 사실, 그리고 당신을 세인의 눈을 피해 지금 도적과 강도처럼 체포하는 자들의 부당함과 비겁함을 지적하시면서도 이 모든 것이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구속 섭리를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밝히고 순순히 응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주의 수난이 주의 무지나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수난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이 증명되어야만 많은 불신자들이나 주의 신성(神性)과 메시야직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의 죽음이 실패한 정치 혁명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 태초부터 계획된 구속사역(救贖事役)을 수행한 죽음임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가야바(the Chaiaphas)의 심문 기사에서는 구약 선민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약 제사법의 최고 집행자인 대제사장이 오히려 눈앞의 정치 종교적 이권에 눈이 멀어 그 구약 제사법의 실체인 우리 주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참람한 자로 선포하고 죽이려고 시도한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구약 계시를 받았으면서도 이를 모두 다 하나님의 계시로 수납하지 않고 자신의 민족과 그리고 자신들 계층의 입장에서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또 편협하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였었기 때문에 사실 구약의 성취요, 새로운 신약의 시작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계시를 그 계시 자체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함을 깨닫는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한 자가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고위직에 있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더욱 악한 사단(the Satan)의 도구로 전락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편 우리는 주님이 사단의 도구로 전락한 구약 대제사장 앞에서 육신의 죽음을 무릎쓰고서 당신의 메시야 직과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심과 나아가 당신께서 재림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사실까지 분명하고도 당당히 선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이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눈에 이 선언은 허황된 말처럼 들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한 죽음을 예수께서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시점에 사는 우리에게 예수의 이 선언은 예수가 한 자연인으로 실패한 혁명가로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속주로 대속 희생을 하신 것으로서 그를 통하여 구속 사역이 성취된 사실 그리고 아울러 장차 그 분이 재림주로 오사 세상을 심판하실 사실의 확실성을 보여 주는 증거 구절이 된다. 한편 본장 마지막 단락의 베드로의 예수 세 번 부인 사건은 이 사건만으로 해서는 그 온전한 뜻을 알 수 없고 이 사건 전에 이에 대해 말씀하셨던 주님의 예언과 그리고 이 사건 뒤에 다시 주의 부활과 성령 강림도 체험한 이후의 베드로 및 제자들의 변화와 함께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바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27-31절 개관 부분에서 설명하였다.
외울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예수 살해 음모
1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시몬의 집 도유 사건
3 ○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가룟 유다의 배반
10 ○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무교절 만찬 준비
12 ○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가룟 유다의 배신 예언
17 ○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성만찬 제정
22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언
27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 기도
32 ○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 체포되심
43 ○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가야바의 예수의 심문
53 ○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베드로의 예수 부인
66 ○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새
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본문 & 자료 노트
풍습-14:3-9 향유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주간 바로 직전에 있은 사건으로서, 한 여인이 윽합을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은 기사이다. 본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향유의사용과 그 가치 등을 간략히 살펴보고자한다.
1. 향유의 사용
이스라엘과 같이 더운 지방에서는 향수와 향유가 많이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땀을 많이 흘리는 반면 환경적으로 물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향수가 훌륭한 목욕 재료가 되었다. 즉 힘든 하루일과를 마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땀내 음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향수로 몸을 닦았다. 또한 향수는 향기뿐만 아니라 덥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피부가 마르고 갈라지는 것도 방지해 주었으므로 가난한 사람들 조차도 집엔 향료와 향유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향수․향유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한편 향수에 비해 향유는 올리브유에 향료를 가하여 만든 것으로, 매우 값진화장품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방문했을 때 그 집의 주인이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발라주는 것은 손님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2. 향유의 재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향유는 올리브에서 추출한 것이지만 유향이나 몰약을 포함한 다른 향유들도 많이 사용되었다. 향료를 만드는 과정은 원료와 목적에 따라 다양했는데. 향료는 식물의 수액(樹液)과 나무껍질. 향나무 뿌리 등으로부터 유향, 풍자향, 물약. 육계. 나드향 등을 추출했다. 향료의 원료는 때때로 분말로 해서 건조시켜 향분(香粉)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3. 향유 보관 용기
값비싼 기름이나 향유는 부드럽고 반투명한 대리석과 같은 광물로 만들어진 옥합(玉遣)에 보관되었다. 이 옥합은 몸 전체가 둥글고 목이 길었는데, 봉인(封印)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할 때 병의 목을 자르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상에서 '옥합을 깨뜨린다'는 표현은 병 전체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을 사용하기 위해 병의 목을 자르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4. 교훈
본문에서 마리아(요 11:1)가 예수님 머리에 부은 향유는 순전한 '나드'였다. 그런데 나드는 북인도와 히말라야 산맥에서만 재배되는 핑크빛 꽃으로부터 추출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가격이 매우 비쌌다. 본문에는 그 가치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였음이 나타나 있는데, 당시 1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일 년 동안 말해야 겨우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매우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이 마리아처럼 나의 가장 귀하고 순수한 사랑과 열정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쏟아 붓고 있는가?
삽화-14:3, 옥합
아래의 삽화는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값비싼 향유를 보관하던 옥합으로서, 그 모양은 몸 전체가 둥글고 목이 길다.
인물연구-14:10, 가룟 유다
본권 마 26장 연구자료 참조
지리배경-14:3-9 베다니(Bethany)
베다니는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마리아, 요 11:1)가 와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또한 이곳은 나사로의 고향이기도 하며, 그 뜻은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다. 이제 다음에서 이러한 베다니의 위치와 이곳과 관련된 사실들을 알아봄으로써본문을 더 자세히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위치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동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지점으로서. 벳바게와 함께 감람산 동편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행정 구역 상으로는 유대지방에 있었던 마을이다. 한편 이 베다니의 위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는 도중, 즉 예루살렘 동편 약 3.2km 지점에 있는 오늘날의 '엘 아지리예'(el-Aziriyeh)로 여겨진다. 이 지명(地名)은 나사로(Lazarus)를 성인(聖人)으로 모시는, 오늘날 여기에 사는 회교도 주민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 관련 기사
베다니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월절 성전예식에 참여할 때, 약 6일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의 지형상, 동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사람은 이 베다니를 거쳐 감람산의 산마루를 넘어야했다. 예수께서도 유월절에 승리에 찬 예루살렘 입성(入域)을 하실 때 바로 이 같은 경로(經路)를 이용하셨던 것이다(막 11:1-11). 한편 이곳은 시간상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일어났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즉 이곳은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고향이며,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직접 이곳에 오셔서 이미 무덤 속에 매장되어 있던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부활시키신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또한 본문의 기록처럼 문둥이인 시몬의 집이 여기 베다니에 있었고, 마침 그곳에서 예수가 식사하실 때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께 와서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것이다. 또한 이곳은 예수께서 최후로 그의 제자들로부터 떠나가신 장소(눅 24:50,51)이 기도하다.
3. 의의
위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베다니는 그 명칭의 뜻이 밝히고 있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마을에서도 예수의 사랑은 어김없이 발해졌고 또한 마리아처럼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께서 가난하고 비천한 마을인 베다니를 즐겨 찾으시고, 사랑과 위로와 은총을 베푸셨던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주요 주제- 14:22-25 성찬(聖餐)의 의의
성찬(the Eucharist)은 세례와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두 가지 성례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유월절에 제자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제정하신 것이다(마 26:26-29). 즉 예수께서는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이 예표하던 바, 자신이 전 인류 의 구원을 위한 희생 구속의 제물이 되실 것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자신의 살을 떡으로, 그리고 자신의 피를 포도주로 상징하여 이제는 신약 성도들이 유월절이 아니라 그 실체인 자신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도록 이 성찬 예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성찬은 다음과 같은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성찬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므로 그것을 먹는 자마다 그와 연합(聯合)함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1:26). 여기서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법적 사죄와 영생을 얻는 것은 물론 성령을 주와 통하여 인격적으로 연합함을 말한다(갈 2:20).
성령 세례와 내주가 각 성도들이 실제로 주와 연합케 하는 사건 자체라면 성찬은 주와 성도들의 연합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임을 보여 주며 또한 거듭하여 성도와 주의 연합을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기념의식이다.
2. 각 성도가 새 언약에 동참함
성찬은 곧 그리스도께서 신약 시대의 전 성도들을 대표하는 12사도들과 함께 세우신 새 언약 곧 신약(新約)의 체결의식이었다(눅 22:20; 고전 11:25).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언약 곧 구약(舊約) 하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 교재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부족 상태에서 행하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이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언약 하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고 완전히 도말해 주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렘 31:33,34). 요엘 선지자도 여호와의 신이 만민에게 부어질 때 이 같은 온전한 교제가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욜 2:28,29).
이 모든 바램과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와 살로 세우신 새 언약으로 인해 온전히 성취된 것이다. 구약시대 화목 제물이 예표하는 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온전한 화목의 근거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언약 하에서도 성도들은 현재는 하나님과의 교재 상태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장차 천국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고전 13:12) 온전하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을 확신한다.
3. 성도와 성도의 연합과 일치
성찬은 또한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 각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새 언약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연합한 결과 결국 성도들도 서로 그들이 모두 하나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됨을 의미한다(고전 10:17).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찬식을 나눌 때마다 성도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의 같은 구속으로 말미암아 함께 구원된 자로서 결국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됨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4. 영적인 양식의 공급
성찬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福音)만이 참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영혼의 양식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의 집권 과정에서 각 성도가 다시금 주의 구속(救贖)의 섭리와 은혜를 깨달으며 또한 주와의 연합을 새삼 뜨겁게 체험함으로써 영의 양식이 실제로 공급되게 한다.
5. 의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지속된다(고전 11:26). 그리고 그 때까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확신하고 주와의 연합을 더욱 돈독히 하는 은혜의 방편으로써, 또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교제를 이를 것을 더욱 소망케 하는 것으로써, 성찬식에 성스럽고 경건하게 참석해야 한다. 성찬은 실로 신약 성도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다.
도표-14:9 예수께서 주신 예언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난제해설-14:12-16 성만찬의 시기
본권 마 26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4:32-42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의 특징
본권 마 26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6:5-15 기도의 10대 유익
1 | 하나님을 인식케 됨(출 33:12,13) |
2 | 생활이 윤택해짐(대상 4:10) |
3 | 진리를 깨달음(대하 7:14) |
4 | 위기를 극복케 됨 (시 107:17-20) |
5 | 영혼이 소성케 됨(시 119:23,28) |
6 | 죄의 유혹을 물리침(마 26:41) |
7 | 자기를 통제하게 됨(눅 18:1) |
8 | 하나님께 영광 들리게 됨(요 14:13) |
9 | 능력을 받음(약 5:14-16) |
10 | 순종을 배움(요일 3:22) |
풍습-14:51,52 유대인의 속옷
본문은 사복음서 중 오직 이곳에만 증거되고 있는 삽화(episode)로서, 예수가 체포당하실 때에 한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부끄러운 기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은 몸이 정확히 알몸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속옷만 입은 것을 벗은 몸이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유대인의 속옷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형태
당시의 유대인의 웃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속옷과 그 위에 입는 웃, 그리고 외투 식의 겉옷이 그것이다. 여기서 속옷이란 살에 직접 닿게 입는 것인데, 가장 단순한 형태는 소매가 없이 무릎이나, 때에 따라서는 발목까지 오는 것이었다. 부유한 층에서는 소매를 달아 발목까지 오게 해 입었는데, 이러한 것은 결국 신분 차이의 표시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모양이나 형태에 있어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남녀 모두가 이런 종류의 속옷을 입었다.
한편 로마 군인들이 제비뽑기를 한 예수님의 속옷은 솔기 없이, 머리와 두 팔이 나갈 곳만을 내고 아래를 터 놓고 통으로 짠 것이었다.
2. 용도
가죽이나 털이나 아마포로 해 입던 이 속옷은 겉옷에 바쳐 입는 것으로서가 아닌 겉옷의 대용이 되기도 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더운 여름날 속옷만 입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류층에서는 집안에서 이렇게 입더라도 외출할 때나 손님을 맞을 때는 겉옷을 필히 입었다. 그리고 이런 부유층의 유대인들은 속옷 한 겹만 입는 것을 '벗은 것'
으로서 간주하여 경멸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벗었다는 것은 속옷만을 입고 있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3. 의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풍습을 고려해 볼 때 본문의 한 청년, 곧 마가로 추정되는 자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즉 마가가 예수의 체포로 인해 두려운 나머지 세마포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은 채로 다급히 도망했거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대충 겉옷으로만 몸을 가리고 집에서 나왔다가 다급한 나머지 겉옷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도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속옷만 입었든 알몸으로 도망했든지 간에 당시 팔레스틴에서 매우 귀한 것이었던 세마포 겉옷조차도 버리고 도망한 마가의 모습은 당시 제자들을 위시해 모든 사람들이 여수를 완전히 홀로 두고 도망했음을, 잘 보여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토록 철저 하게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던 것이다.
도표-14:49 예수를 중심한 성경의 통일성
본권 사복음서 개른 특별자료 참조
주요주제-14:55, 산헤드린 공회
본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참조
도표-14:66-72 베드로의 실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주님을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일한 자였다. 그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영적 체험도 많이 했으며(참조, 마 17:1-5; 막 5:37),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도 받은 자였다(마 16:16-18).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주님을 향한 실수도 하였다(마 16:21-23).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 중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면 이러한 베드로의 실수의 원인을 살펴보자.
1 | 자만에 의합(29절) |
2 | 육신을 의뢰함(31절) |
3 | 기도하지 않음(35절) |
4 |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 함(66-72절) |
5 | 세상 사람들과 어울린(66-72절) |
도표-14:53 신약의 사회 ․ 문화적 배경
본권 신약 총론 참조
주요 주제-14:62, 인자의 이해
본서 13권 눅 12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14:64 참람(潛濫)한 말
이에 해당하는 엘라어 원어는 '블라스페미아'( )이다. '훼방하는'(벧후 2:ll), '모독하는'(행 6:ll), '거스리는'(행 6:13) 등의 뜻을 지닌 '블라스페모스'( )에서 유래하여 주로 '훼방'(골 3:8; 계 2:7) 및 본절과 같이 '참람'(눅 5:21; 요 10:33)이라는 뜻으로 번역 이 된다.
그리고 '블라스페모스'는 원래 육체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 즉 인격이나 명예에 있어서 누군가를 '해치다'(막 16:18) 또는 '상하게 하다'(눅 4:35)라는 뜻의 동사 '블라프토'( )와 '소문'(마 9:26; 눅 4:14)을 뜻하는 '페메'( )의 파생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블라스페모스'에서 유래한 '블라스페미아'는 '블라스페모스'를 이루는 두 단어인 '블라프토'와 '페메'를 분석함으로써 그 뜻이 더 분명해 진다. 즉, 본절의 참람한 말이란 인격이나 명예에 있어 남을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말을 가리킨다. 혹은 평판이나 소문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어 특별히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거나 거스리며 훼방하는 행위나 말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본절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이 그 말씀을 참람한 말이라고 한 것은 대제사장의 귀에는 예수께서 하신 스스로 권능자의 우편에 앉으며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62절)는 말씀이 한낱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을 격하시키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 하는 언행'으로 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언행을 통해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 존재 위상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참람한 말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발언을 참람한 것으로 선언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치 아니했던(65절) 대제사장과 함께 한 무리들임을 알게된다.
도표-14:53-55 예수의 재판 순서
예수께서는 종교 법정과 세속 법정, 두 곳에서 다 심판을 받으셨으나 뚜렷한 죄목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예수께서 종교적으로 무흠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심을 입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예수의 무죄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당시의 재판 순서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1. 종교적 재판
1) 안나스의 예비 심문(요 18:12-14)
2)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비공식 재판(마 26:57-68)
3)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식 재판(마 27:1,2)
2. 민사재판
1) 빌라도의 1차 질문(마 27:15-26)
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눅 23:-12)
3) 빌라도의 2차 심문 및 최종 판결(마 25:15-26)
인물 연구-14:66-72, 베드로
본서 16권 벧전 2장 연구자료 참조
14:1-11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의 배신
본장에서부터 드디어 예수님의 본격적인 수난사가 전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부분은 '유대인의 예수 살해음모'(1-2절), '기름 부음 받으심'(3-9절), '유다의 반역'(10-11절)이 기록되어 인간들의 추악한 음모와 배신과 더불어 예수에 대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목표를 향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심이 부각된다.
한편 예수님의 고난 주간 가운데 셋째 날(화요일)에 발생한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1-2,10-11절) 이날 발생한 가를 유다의 배신과 그 이전에 이에 일어났던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헌신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즉 본문 3-9절에 소개되는 향유 사건은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직전의 토요일에 발생한 사건인데도(요 12:1-8) 일부러 화요일 사역과 관련시켜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팔아 죽음 가운데 넘기기로 대제사장들과 밀약을 맺은 가룟 유다의 배신행위와 예수의 장사지냄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루는 여인의 헌신을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재물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지상의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게 된데 대한 실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게 된다. 여인이 예수님께 부은 향유의 가격은 적어도 300데나리온 이상이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일반 서민의 전 재산에 해당될 정도의 재물이었다. 만약 성도가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이제 주님을 위해 자신도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마저 바치겠노라는 각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② 개인적인 야망이나 세속적인 출세의 방편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자는 결국 실망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다.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존재란 자신을 메시야의 지상 왕국에서 요직을 차지하도록 만들어 주고,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돈궤를 맡은 자신이 적당히 재물을 횡령하여 스스로의 배를 불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대상에 불과했다. 이처럼 예수를 우리의 영혼을 죄악에서 구원할 대상으로 생각지 않고 인간 욕심을 달성하는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생명의 주를 죽음의 자리에 넘긴 가룟 유다와 같은 자이다.
14:1 이틀을 지나면. -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48시간 이후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하루의 일부를 하루로 보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시간 개념으로 본다면 '만 하루보다 조금 더 경과한 이틀'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시간적 상황을 오늘날의 시간으로 본다면 고난주간중 유월절기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가 이루어지는 날로서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이틀 전인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그 정도의 시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 유월절이란 유대력으로 정월에 해당하며 태양력으로 3-4월 경인 니산 월 14일이 시작되는 시간에 양을 잡아 그날 저녁에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 절기를 말한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황급히 음식을 먹은 때를 상기하며 이스라엘의 장자를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출 12장). 또한 무교절은 니산 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는 절기로 가정에 누룩을 두지 않는 기간이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급히 빠져 나을 때 누룩을 섞지 않는 반죽으로 무교병을 만든 사건과 그때 그들이 겪은 고생을 기억하여 지키는 절기이다(출 12: 15-20; 13:3-10). 이처럼 두 명절은 독립된 각각의 명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같은 명절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14일의 일부가 서로 겹쳐지면서 연속되는 절기이며 또한 두 명절이 다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절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과 병행구인 눅 22:1에는 이를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하였다(대하 30장 자료노트, '유월절과 무교절' 참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를 죽이려 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병행구절인 마 26:3에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 나와 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산헤드린 구성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산헤드린의 결의로써 예수 제거의 계획이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은 의논 장소가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으로 나와있는 데서(마 26:3)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은 당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조직적인 계획 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 여기서 '궤계'(돌로스)는 '꿰어내다', '간사하다'에서 유래한 말로서 '속임'(막 7:22), '거짓말'(계 14:5)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에게서는 그 어떠한 잘못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속임수로써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한편 '구하다'(에제툰)은 '애써 찾다', '궁리하다'(제테오)의 미완료형으로서 계속하여 애써 죽일 수 있는 방책을 찾고 있음을 보여 준다.
14:2 민요가 날까 하노니‥‥명절에는 말자. - 당시 백성들 중에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교권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을 파헤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막 3:6; 11:18; 12:12). 이러한 사실은 산헤드린의 무리들이 예수를 섣불리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군다나 유대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고 이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의 강포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는 상당히 들 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이 보는 앞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수를 처형한다면 실제로 백성들이 반발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사실 유월절이 되면 평소 예루살렘 상주 인구의 5배가 넘는 120만 명 가량의 대군중이 운집하여 절기를 지키려고 하였고 이들은 먼 거리에서 절기를 지키려고 온 열정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Josephus).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절기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여든 무리들이 들떠 있을 때 예수를 처치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시간을 더 기다린 후, 즉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을 대다수 떠난 후에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의 처형이 급격히 이루어짐으로 수정되고 말았다.
14:3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 도유(途油)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본문 사건이 눅 7:36-50에 있었던 도유 사건과 별개의 사건임을 밝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마 26:6 주석 참조). 즉 후자의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있었으므로 유대의 베다니에 일어난 본 사건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편 베다니는 예수살렘에서 가까왔으므로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시 자주 숙소로 사용한 곳이었다(마 11:1, 12). 이곳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는데 문둥이 시몬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혹자는 그를 죽음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난 나사로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나사로의 부친, 그리고 마리아나 마르다의 남편일 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확인 불가능한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록 본절에서는 '문둥이'라는 표현이 나오나 당시 시몬이 문둥이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의 의식법상 문둥이는 마을 내에서 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둥이란 표현은 그가 과거에 문둥병에 걸렸으나 현재는 완쾌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 혹자는 본문의 시몬을 예수께서 막 1:40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에 의해 고침 받은 문둥병자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나(Bruce) 이 역시 추측에 불과하다.
식사하실 때. - 요 12:2에는 '잔치할 새'로 표현되어 단순한 식사 이상으로 성대한 식사 자리였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잔치가 구체적으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두 개의 대표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마태와 마가복음의 기록(마 26:2; 막 14:1)에 나오는 싯점에 따라 수요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 12:1의 기록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유월절 엿새 전으로 승리의 입성이 있기 하루 전인 토요일에 이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본 주석은 3-9절을 하나의 삽입구이며 10절 이하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대조되는 사건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이 부분에 배치한 것으로 보아 후자의 견해에 따른다. 즉 본 사건은 토요일에 있었던 사건인 것이다.
한 여자. - 본문과 병행구인 요 12:3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태(마 26:7)와 마가는 익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공관 복음서에 마리아의 이름이 은폐된 것은 공관 복음 저술 당시 생존해 있던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기독교를 반대한 유대인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 '순전한'(피스티케스)은 '순수한 것', 또는 '오염되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향유는 원액에 포도주를 섞어 사용하던 것에 반해 여자가 가져온 것은 완전히 정제된 순수한 고급 향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드'는 동인도의 '나르도스타미스 자타만시'(Nardostachys jatamansi)라는 식물에서 채취되는 향료이다. 그런데 이 나드 향나무는 주로 히말리아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래서 이처럼 먼 지방의 생산물을 수입해야 했던 까닭에 향유의 값은 매우 비쌌다. 요 12:3에는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약 300데나리온으로 나타나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가격은 엄청난 액수의 큰 돈이었다. 한편 솔로몬이 지은 아가서에는 사랑의 향기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나드향에 대한 언급이 3번 나온다(아 1:12; 4:13,14). 이처럼 나드 향유는 고대로부터 매우 소중하게 여겨진 귀중품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인과 히브리인들은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자의 시신에 이 향유를 발라 악취가 나는 것을 막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비록 마리아는 존경의 의미로만 행했다고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본문에서나 눅 7:46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자기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이것을 머리에 발라 주는 것 역시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옥합을 깨뜨리고. - 합을 깨뜨린 것은 본문에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옥합'(알라바스트론)은 대리석과 비슷한 흰색 석회질 광석으로 만든 병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싼 것으로 향유와 같은 고가품만을 저장하는 용기였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향유를 사용하기 위해 병의 목을 자르는 행위를 말한 것이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본절과 마 26:7에는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으로 나오는 반면 요 12:3에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다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은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차이는 여자가 실제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발에도 부었을 수도 있고 머리에 부은 향유가 발까지 적셨을 수도 있는데 요한은 그 가운데 더욱 파격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4: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 본문에는 '어떤 사람들'로 나와 있으나 마 26:7에는 '제자들', 요 12:4에는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분내는 주체로 나와 있다. 이로 보아 당시 마리아의 행위는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선 헌신 행위였고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조차 그 아름다운 행위의 가치를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요한이 가룟 유다를 지목한 것은 그가 대표적으로 불평을 털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분내어'(아가나크툰테스)는 '흥분하다', '노하다'(아가나크테오)의 복수 현재분사로서 서로 어울려 지속적으로 흥분하며 화를 내고 있음을 뜻한다.
14:5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 제자들이 여인이 한 행동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표시한 이유이다. 즉 삼백 데나리온은 남자 어른이 300일 이상 노동을 해야 얻을 수 있는 큰 액수의 돈인데 이를 일시에 '허비'(4절)하기보다는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제자들이 한 것이다. 당시 빈부의 격차가 심하였던 팔레스틴에는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실제로 유월절 기간에는 이들에 대한 구제가 많이 행하여 졌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감안한다 해도 당시 제자들의 행동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폭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들은 그들이 목격한 기름 부음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직껏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기술에 따라 모든사람이 다 구제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의경우는 이 돈을 훔쳐갈 기회를 잃은 것을 안타까와 하는심정으로(요 12:6) 이런 말을 했다고 할 때 그들의행동은 불순한 동기를 가진 자의 선동에 휩쓸린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책망하는지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브리몬토'( )는 '엄히 경계하다'(막 1:43), '통분히 여기다'(요 11:33,38)란 뜻을 지니는 동사의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분한 마음으로 질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14:6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 제자들은 면전에서 여인을 공박하므로 인해 여인은 매우 당혹스러운 상태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비난을 중지시키고 그녀를 변호하시게 된다. 한편 여기서 '괴롭게'(코푸스)는 '베다'(마 21:8), '때리다'란 뜻의 '콥토'( )에서 유래하여 마치 칼로 자르고 채찍으로 때리듯이 심한 심적 고통을 준 것을 가리킨다.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예수께서는 여인의 갸륵한 진심을 직관적으로 아시고 그녀가 행한 일을 좋은 일이라 규정하심으로 제자들의 비난의 근거를 없애버리셨으며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한편 '좋은 일'(칼론에르곤)에서 '좋은'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칭찬받을 만큼 고상하고 유익한'이란 뜻을 지닌다. 즉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극찬의 말로써 그 여인이 행한 일이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자선과는 달리 늘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구속이 역사에 의의를 부여하는 값진행동임을 밝혔다.
14:7 가난한 자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 모세 율법에도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신 15:11). 즉 구제의 기회는 항상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예수님의 이 말은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구제의 당위성에대한 지적이 많다(마 6:1,2; 막 12:41-44). 따라서 당시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와 구제를 택일하라는 문제는 아니다. 즉 이는 항상 있는 것과 단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 사이에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 것이 현명한가란 문제의 제기이다. 즉 가난한 자를 도우고 싶을 때 이들은 언제든지 있지만(신 15:11) 예수님은 곧 고난 받으시며 승천하시게 되므로 그러한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로 이 땅을 떠나시게 된다는 것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지닌다.
14:8 저가 힘을 다하여 …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 '저가 힘을 다하여'란 표현은 마가만 기록한 것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는 참다운 헌신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물질과 마음의 헌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즉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죽음에 대한 '장사를 미리 준비'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러한 의미 부여는 이 여인이 예수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그 여인의 향유 부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에 의해 그때가 갖는 구속사적 중요성은 막연히나마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 그 행위에 크나큰 가치를 부여함은 물론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 왔음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결국 말없는 한 여인의 봉사가 온 인류를 구속하려는 메시야의 고독한 걸음에 한 줄기 하늘의 빛을 비추어 주면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14:9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 예수는 자기의 죽으심을 예언하셨을 뿐 아니라(8절) 그 죽음이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을 것도 예언하셨다. 이 예언대로 기독교는 이미 세계 종교가 되었고 장차 만국에 전파되며(막 13:10) 이때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기념하리라. - 예수의 이 예언은 약 60년 후(A.D. 90) 요한이 복음서를 쓰게 될 당시에 벌써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었다. 당시 요한은 베다니를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이라고 부름으로써(요 11:1), 베다니의 명칭을 바꾸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여인을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11:2)라고 설명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이야기가 되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에 세 번이나 반복 기록되어(마 26:6-13; 막 14:3-9; 요 12:2-8) 성경을 읽은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14: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 -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이 본문과 마태복음(마 26:14-16)에서는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 바로 뒤 이어서 일어난 것처럼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향유를 부은 사건은 요한의 기록대로 유월절 엿새 전인 토요일에 있었고(요 12:1) 본절의 사건은 예수께서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내셨던 화요일(막 11:20-14:11)이 다가는 시간쯤에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시간적 차이가 나는 사건을 마가와 마태가(마 26:14-16) 병행시킨 것은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와 유다의 죄악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려는 마가와 마태의 의도 때문이거나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가 토요일에 있는 향유 사건에서 질책 받은 때문인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마가는 유다를 지칭할 때 앞으로 계속 '열둘 중의 하나' 혹은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는 말을 붙이게 되는데(20,43절) 이것은 다른 열한 제자와 다르게 구별되는 말로서 유다처럼 배신하여 영원한 저주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는 말이다.
예수를 넘겨주려고. - 막 3:19에서 제자를 소개하면서 이미 가룟 유다를 '예수를 판 자'로 규정하고 있으나 본절은 이러한 행위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한편 유다의 배반이 이루어진 직접적 배경에 대해 마태는 돈을 사랑함으로 인하였다 하고(마 26:14,15), 누가는 보다 근원적인 배경을 밝혀 사단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하였다(눅 22:3). 그러나 유다의 배신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그의 정치적 야망, 즉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다 왕국을 이룰 정치적 메시야로 예수가 행동해 주기를 기대했으나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된 것이 그의 배반 이유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이 전제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배반의 주체가 유다 자신이었으며 그에 대한 책임도 그 자신이 져야 된다는 것이다.
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 산헤드린은 예수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차에(1,2절) 유다의 방문을 받고 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본문에 '듣고'란 말은 가룟 유다가 능동적으로 예수 체포의 대가와 방법을 제시했다는 추측을 갖게 한다. 실제로 마 26:15에는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를 요구하는 가룟 유다의 질문이 나오며, 눅 22:4에는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상호 의논한 것으로 나온다.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 마가는 돈의 액수를 밝히지 않았으나 마태는(마 26:15)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은 30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은 30이란 은화 30세겔을 가리키는데 당시의 가치로는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지나지 않았다(출 21:32). 이로 인하여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긴 것은 순수하게 돈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10절 주석에서 밝힌 바와 같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기회를 찾더라. - 당시는 유월절 축제를 눈앞에 둔 시기였으므로 대제사장 무리들조차 민요(民擾)를 걱정하여 예수 체포의 시기를 늦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측근이였던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 신속한 체포가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 없는 체포와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고 이를 결행하기 위해 좋은 시기를 찾게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넘겨줄'이란 표현은 단순히 체포뿐만 아니라 예수의 측근이었던 가룟 유다를 예수를 고발할 신빙성 있는 증인의 하나로 삼아 확실히 처형하는데 가룟 유다를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14:12-25 최후의 만찬
11:20에서부터 앞 단락 까지는 고난주간의 셋째 날(화요일)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은 고난주간의 다섯 째날(목요일)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의 기록자들이 한결같이 고난주간의 넷째 날(수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한 데, 아마 예수님께서 이 날에 자신의 공생애를 돌이켜보시고 베다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조용히 휴식의 시간을 가지셨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여튼 본문은 고난 주간의 목요일에 있었던 주의 최후의 만찬과 이에 즈음한 성만찬의 법의 제정과 관련된 전후 사건의 기록이다. 즉 본문은 주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에게 준비시킨 자리에서(12-16절) 자신이 12제자 중 한 사람에 의해 팔리울 것을 예언 하시고(17-21절), 유월절 만찬을 이제 새로이 성만찬의 법으로 제정하신 사실(22 -25절)을 보도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자 첫 성만찬이 된 주의 이 유월절 만찬은 사실은 본래의 관습보다 하루 앞당겨 먹은 것이었다(마 26장 자료 노트, '최후의 만찬의 시기' 참조). 즉 주님 자신은 유월절의 공식 개시일인 다음날 저녁이 되기 전에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것을 아시고 유월절 만찬을 하루 앞당겨 먹은 것이었다. 물론 예수께서 이처럼 날짜까지 당기시면서 까지 유월절 만찬을 드신 데에는 그만한 목적이 있다.
유월절이란 다름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되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다(출 12:1-14). 그러나 유월절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영원한 유월절 어린양되신 주께서 오셔서 택한 만민을 죄악된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 유월절 양이 예표했던 실체로서 이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그리고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입성한 유월절 사건이 예표한 실체인 만민의 천국 구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이제 예표에 불과했던 구약의 유월절 기념의 법을 그 실체인 자신의 십자가 구속 수난을 기념하는 성만찬의 법으로 바꾸기 위하여 굳이 날짜까지 하루 앞당겨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에 즈음하여 성만찬의 법을 주셨던 것이다.
특히 주께서 드신 유월절 만찬에는 그에 필수적인 어린양의 고기 없이 떡과 포도주만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음날 주께서 양 잡는 시간(니산월 13일 오후 3시경)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두 사실은 주님이 바로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인 신약의 영원한 어린 양이심을 암시해 준다. 실로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한편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눅 22:14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에 제자들의 질투심을 책망한 내용이 나오는바 제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메시야의 섬기는 사역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명한 세족례(洗足禮)도 이때 제정되있는 데(요 13:1-20)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친히 섬기는 자의 도를 보여주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들을 본서가 생략한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추어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려는 본서 저자의 의도와 성만찬이라는 보다 중요한 사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 있을 것이다.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 - 무교절이란 발효되지 않았던 떡을 먹었던 유월절에 이어지는 절기로서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의 기간을 말한다(레 23:6; 민 28:17). 하지만 출 12:18에는 유월절 당일인 니산월 14일부터 모든 누룩을 집안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이르기 전인 13일이나 그 이전부터도 집안에 누룩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무교절의 첫날'이라는 표현은 정식으로 명절이 시작되는 니산월 14일을 가리키는 엄격한 표현이라기보다는 관습상 그 보다 하루나 이틀 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 될 수 있다(눅 22:7). 그런데 본절의 뒤이은 '유월절 양잡는 날'은 14일 저녁에 시작되는 유월절 만찬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양(羊)을 도살하는 13일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모든 사건들이 문자적으로 볼 때 13일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만찬 그 다음날 아침 예수를 고발하는 무리들이 아직 유월절 잔치를 먹지 않았다는 기록은(요 18:28) 본절 현재의 시점이 보편적으로 양 잡는 그 날(13일)도 아니라 그 하루 전임을(12일) 보여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 26장 자료 노트 난제 해설을 보다 참조하라. 즉 당시 제자들은 그날이 지나고 그 다음 날 있게 될 유월절 식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유월절 식사에 대해서 질문하였고 예수께서는 12일에 이어지는 13일이 시작되는 시점에 식사 준비에 대한 대답을 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먹은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식사는 아니었으나 유월절 만찬의 의미를 부여한 식사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유월절 만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구운 양고기와 쓴 나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시점이 본절의 사건이 있은 후 하루 후 오후 3시 경인데 이 때 예루살렘 성내에서는 유월절 양을 도살하던 시간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이 예표하는 제물로서 성내에서 유월절 양이 죽는 그 시간에 갈보리에서 죽으심으로 구약 예표의 완성이 되셨던 것이다.
어디로 가서…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당시 관습에 의하면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야 했으며 유월절 식사 역시 예루살렘 성내에서 먹어야만 했다. 또한 이때 다른 지방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 식사 자리와 잠자리를 성내의 사람들에게 요청하였을 때 거절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와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적용되기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왜냐 당시 지도층에 의해 핍박받던 이들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는데 드는 비용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6:8,9). 그래서 제자들은 13일이 되기 전에 미리 이 문제를 예수와 협의 하였던 것이다.
14:13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 누가는 이 둘을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밝힌다(눅 22:8). 아마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 식사를 하는 중요한 문제를 당시 교권주의자들이나 군중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치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장 신임하던 두 제자에게 준비를 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 물동이를 나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여자가 하는 일이었다(창 24:11; 요 4:7). 그러나 본절의 '사람'(안드로포스)은 남성 명사로 쓰였는데 이는 아마도 남자 노예일 것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이 사람 찾기는 쉬웠을 것이다.
14:14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 이어지는 말에 의하면 집 주인은 예수를 잘 아는 사이였든지 아니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던 익명의 제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는 이 집 주인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 새끼를 빌려주었던 사람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그 집은 본서의 저자인 요한 마가의 집으로서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도 바로 이 집이었으며(요 20:19). 오순절 날 이적적인 성령의 은사를 받은 곳도 바로 이 집에서 였으며(행 1:13) 또한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 나와서 찾아간 곳도 이 집이었으며(행 12:12) 이 집은 초대 기독교회의 한 처소가 되었으며 나중에 '시온 교회'라는 교회가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장 오래된 교회였으며 후에 사도들의 다락방 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한다(Joseph Medo). 그러나 이 역시 구전에 근거한 것으로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이라 호칭하고 그 권위를 집주인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집 주인이 예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당시는 교권주의 자들이 예수를 극히 경계하던 때로서 예수를 누구인지 알면서도 방을 내주는 것은 예수에 대한 큰 신뢰와 용기가 없으면 하기 힘드는 일이었다.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 '객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뤼마'( )는 문자적으로는 돈을 받고 손님을 묵게 하는 '여관', '사관'(눅 2:7)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단순히 '방'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데 특별히 '나의 객실' 이란 말은 '나를 위한 방'으로서 소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나를 위해 예비된 장소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14:15 그리하면. - 원문에는 접속사 '카이'( )와 인칭대명사 '아우토스'( )를 병행시켜 예수의 말씀을 전해들은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 - '자리를 베풀고'란 식사를 하기 위한 모든 것, 즉 식탁, 의자, 방석 등이 모두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다락방'(아나가이온)이란 행 1:13에 등장하는 '다락'(휘페로온)과 유사한 '윗층에 있는 방'으로서 조용하고 다른 방들을 거쳐 다니지 않고 다닐 수 있어 휴식을 취하기는 안성마춤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 '우리'라는 말을 통해 이 저녁 만찬의 주인이 예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만왕의 왕되신 예수께서 당시에 세상 왕들들이 연회석에서 군림하는 풍습을 따르지 않고 제자들까지 잔치의 주인으로 삼는 것은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왕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14:16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 다른 특별한 언급 없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의 집에서 유월절을 예비하라는 말을 순종하기란 쉽지 않을 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을 확인했다. 한편 '유월절을 예비했다'는 말 속에는 유월절 양을 구하는 일, 무교병, 쓴 나물, 포도주, 그리고 정결케 하기 위한 물 등등의 모든 것을 준비하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에 유월절 양이 준비되었을지라도 식탁에 배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께서 잡수신 식사는 정규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그보다 만 하루 앞서 행하여 진 기에 그 다음날 행하여 질 정규 유월절 식사까지 그 양을 먹는 것은 미뤄져야 했기 때문이다(12절).
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 '저물매'란 표현을 통해서 이제 니산월 12일이 지나고 유월절 예비일인 13일이 막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의 시간 개념은 저녁 해지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가 지남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제자 열둘을 데리시고'는 앞서 만찬을 위해 먼저 보내졌던 제자 둘이 다시 베다니로 돌아와서 나머지 제자와 함께 합해졌음을 나타낸다. 실제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km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준비를 마친 제자 둘이 다시 베다니로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14:18 17절과 18절 사이에는 본문에는 나오지 않으나 제자들의 다툼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눅 22:14-16,24-30)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세족례(洗足禮)의 사건이(요 13:1-20) 생략되어 있다.
다 앉아 먹을 때에.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월절 식사법은 원래 서서 먹는 것이 규칙이었다(출 12:11). 그러나 당시 식사법은 비스듬히 누워 먹는 것으로 관습이 바뀌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앉아'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다.
너희 중에 한 사람…팔리라. -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단지 중요한 상황만을 서술하였다. 한편 배반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만찬이 갖는 축제적인 분위기를 급속히 냉각시켰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문화권에서 함께 음식을 먹은 후에 배반하는 것은 가장 악한 비인륜적인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시 41:9).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4:19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제자들은 잔치 석상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통하고도 엄숙한 배반의 예고를 듣고는 매우 침통한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라는 마태의 표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마 26:22). 한편 '내니이까' 라는 질문은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뜻을 지닌다. 당시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보다 그 죽음에 자신이 연루되는가의 여부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가룟 유다의 이 질문에 대해 '네가 말하였도다'란 예수의 답변을 기록함으로써(마 26:25) 가룟 유다가 배반자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마가는 이를 생략함으로써 당시 제자들이 자신만은 여기서 제외된다는 확신이 결여된, 즉 자신도 배반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불확실한 신앙의 소유자임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14:20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 이 말씀의 요점은 예수의 배신자가 다름 아닌 그릇을 함께 사용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가리키려는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적인 사건이 결코 우연히,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즉 이 사건은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한 시 41:9의 정확한 성취였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그릇'이라 함은 대추야자나 무화과, 건포도 등 과일을 으깨어서 물과 식초를 배합하여 만든 국물(soup)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Hendrickson). 이 국물 그릇은 2,3인에 하나씩 식탁에 배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식사 습관에 있어서 스푼이나 포크 등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빵을 손으로 떼어, 위에 언급된 국물에 찍어먹었다. 따라서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을 가리키는 독특한 표현이다. 한편 요한복음에는 이 당시의 다른 상황을 보여 주는데, 즉 배반자가 누구인가란 사도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떡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줌으로써 가룟 유다가 배반자임을 지적한 사실이 묘사되어 있다(요 13:23-26). 이러한 예수의 반공개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자들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확신하지 못한 듯하다(요 13:27-29).
14:21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기록된 대로'란 이미 계획되고 예정된 메시야의 길, 즉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미 정해진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으로서, 이는 사 53장 '고난 받는 종'의 예언이나 시 22편이나, 41편의 의인의 고난 받음과 궁극적 승리에 관한 말씀들과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약에 산재된 많은 메시야 고난 예언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교권주의자들의 계획과 가룟 유다의 배반 등으로 실현되는 것은 사실이나 이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미 예수의 운명이 하나님의 섭리 하에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잘못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편 '가거니와'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관습적 표현으로서 죽음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이 표현에 대해 '아버지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사용하였다(요 7:33;8: 14, 21).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예수의 죽음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섭리이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의 책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자신을 배반한 자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말이다(Donald Burdick). 그리고 그에게 '화'가 있다고 했는데 이 '화'는 마 23:13에 기록된 대로 분노의 화가 아니고 아주 깊은 슬픔과 고통의 화를 나타낸다. 즉 예수를 판 일로 인한 현세적 고뇌나 내세적인 응보 등을 일컫는 말이다.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 문자적으로는 '그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저주의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스승을 파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그 사람에 대한 동정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키 위한 권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이 일이 있고 난 후 바로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하기 위해 나감으로써 영원한 배반자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14:22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히브리인들의 유월절 식사의 전통과 관계지워 이해한다면 이 부분은 네번에 걸쳐 마시게 되는 포도주 가운데 세번째인 '축복의 잔'을 먹기 전이 될 것이다. 한편 이때 예식의 주관자는 무교병을 취하여 축복을 한 후 떼어서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된다. 한편 여기서 '축복하시고'(율로게사스)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다', '찬양하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이를 기념하는 자에 대한 신적 축복이 포함된 순서일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당시 유월절 식사법에는 누룩 없는 떡을 애굽 땅에서 우리 조상들이 먹은 고난의 떡이다라고 해석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이에 얽매이지 않고 '내 몸이니라'는 새로운 해석을 주셨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최후 만찬의 교회적 계승인 성찬식에서 나누는 떡이 예수의 살로 진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r-tiation)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때 나누는 떡은 진짜 예수의 살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에 대한 상징일 뿐이며 십자가에서 나타나신 구속의 은총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눅 22:19와 고전 11:24에서 이 말에 이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란 문구가 삽입되어 기념적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이 둘을 조화시켜 성찬식 때 나누는 떡과 포도주에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가 있어서 구속의 효과가 주어진다는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을 수용한다(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가운데 ‘성례’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누가는 이 말에 '너희를 위하여’ (눅 22 : 19)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 제자들만이 아니라 이를 기념하는 후세의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더 강하게 표현하였다.
14: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 눅 22:20에 의하면 떡을 나누는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에 잔을 나누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로 보건대 22절과 본절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이 경과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의 순서를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와 연관시킨다면 이는 3번째 포도주를 나누는 축복의 잔에 해당될 것이다. 이때 히브리인들은 큰 잔을 사용하므로 여기 언급된 '잔' 역시 제자들이 돌려가면서 마실 수 있는 큰 잔으로서 그 안에 담긴 것은 물을 3분의 2가량 섞은 포도주로 추정된다.
14:24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 여기에 언급된 '많은 사람'은 특정한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그의 죽음의 영향이 일부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협소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광대하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위하여'(휘페르)는 '대신하여'란 의미도 지는 바 예수의 죽음이 이 세상 모든 이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홀리다'(에크퀸노메논)는 수동태 현재분사로서 대속의 피 흘림의 효과는 계속되어짐을 암시하고 있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 윗부분에 나오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예수의 피가 곧 '언약의 피'임을 보여 준다. 이는 예수의 죽음이 구약시대 아담 이후로부터 계속되어 왔던 짐승 제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구약 시대에는 짐승 제물의 피를 통하여 속죄가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로운 속죄의 언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본절과 병행되는 눅 22:20에는 이를 '새 언약'으로 묘사함으로써 이것이 옛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효력이나 가치에 있어서 옛 언약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즉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으로서 자주 드려질 수밖에 없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번에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는 최종적 효력을 지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렘 33장 주요 주제를 참조하라.
14:25 포도나무…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유월절 식사에 쓰인 주요 요소인 포도주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한편 이를 유월절 만찬과 관련시킨다면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란 표현과 26절에 이어 만찬석상을 떠나는 것으로 보아 유월절 날 마시는 마지막 잔인 네 번째 포도주잔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다시 마시지 않겠다'는 표현은 이것이 예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만찬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출애굽시대로부터 당시까지 계속 지켜져 왔던 유월절 예식이 그리스도의 만찬과 더불어 이어질 죽음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의미도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본절의 표현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나라에서 새로운 만찬을 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는 당시 마시던 포도주나 성찬식에서 마시는 포도주와는 다른 '새 것'으로 마시게 된다. 여기서 '새 것'(카이논)은 '시간적인 새 것'(네오스)보다 질적인 새 것을 의미한다(벧후 3:13). 따라서 천국도 물질적인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임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 물질이 세상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즉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14:26-31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신 예수님
유월절 식사를 끝내신 후에 감람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가시면서, 신적 예지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다른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적인 용기로써 장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새벽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否認)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듭되는 예고에 대해 베드로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도움을 요구하는 신앙의 성숙함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불과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밖에 없을 만큼(66-72절), 인간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된다. 만약 우리 성도들이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실패를 향해 달려가는 지름길이다(잠 16:18; 고전 10:12).
② 성도들은 주님의 책망과 경고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을 자신의 허물을 돌이켜 보고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았다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③ 하나님은 허물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를 진정 의지하는 자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주신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주님께서 각각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끝내 죄악의 길로 치닫고 말았으며, 다른 한 사람은 마침내 회개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허물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철저한 회개가 그 이후에 뒤따르며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3:123).
14:26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본절의 '찬미'는 유월절 식사를 모두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부르는 마지막 순서로서 시편 할렐(Hallel) 송의 후반부였을(시 115-118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늘 하던 습관에 따라 기도하기 위해(눅 22:39) 감람산, 더 정확히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갔다(32절). 그러나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식사가 마친 후 즉시 간 것이 아니라 가기 전에 예수의 작별설교가 있었고(요 14장) 그 후 이곳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는 동안에도 그리스도의 마지막 설교와 기도가 있었다(요 15-17장).
14:27 이 부분이 공관 복음에 의하면(마 26:31-35; 막 14:27-31; 눅 22:31-38) 마치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요한의 기술(요 13:31-38)에 따라 유다가 밖으로 나간 이후(요 13:30)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로 보는 것이 좋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얼마 후에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도망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50절). 그러나 여기서의 '버리리라'(스칸달리조)는 '실족하다'(마 9:42)는 소극적 의미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범죄하다'(마 9:45), '배척하다'(마 6:3)란 의미도 지닌다. 그러므로 이 말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단지 잘못하여 죄를 범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님을 죽게 된 상황에 버린 것은 배척한 것과도 유사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 이것은 즉 13:7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슥 13장은 그 전후 문맥을 보면 즉 11장의 거짓 목자와 대조되는 참 목자가 해를 입으므로 대부분의 양 떼가 사라져버리나(슥 13:8,9) 양 떼의 3분의 1은 남아서 연단을 받은 후에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과연 이런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를 팔고(10절), 버리고(50절), 부인하게 된다(68-72절). 하지만 선택된 이 제자들은 연단을 통과한 후 다시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행 2:14-36).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일시적으로 양 떼처럼 도망치듯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14:28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 앞절에서 목자가 침을 당하고 양들이 흩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이 묘사되었으나 여기서는 목자가 회복되고 제자들이 다시 집결하는 희망적인 상황이 예언되고 있다. 이것은 고난 주간에 처음으로 주어지는 예수께서 하신 부활의 예고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이에 이어 이루어질 부활까지 이미 예견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먼저 가다'(프로악소)의 뜻은 '앞서 가다'란 의미 뿐 아니라 '앞에서 인도하다'란 의미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시간적으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서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다시 시작을 하시겠다는 뜻이 된다.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도 된다. 한편 본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많은 지역을 제쳐두고 왜 하필 갈릴리를 지목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곳이 제자들의 고향임과 동시에 제자들을 부른 곳이고 생전에 이곳에서 주로 많은 활동을 하시므로 예수님의 동조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새로운 출발에 적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4:29 베드로가…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 예수를 향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즉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를 더 사랑한다는 자신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인간적인 척도에서 타인과 비교한 것으로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넘어지기 쉽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혹자에 의하면 베드로는 다른 제자에 대한 자신의 비교 우위('다 주를 버릴지라도' 마 26:33)의 행위는 이미 제자들의 동질감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Gnilka). 한편 베드로가 자신을 너무 믿은 나머지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적 절개가 인간의 의지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베드로는 이러한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 처해지고 만다. 이때 그의 자신감은 처절히 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72절). 이러한 사실은 부활 이후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신앙만을 언급한데서도 잘 드러난다(요 21:15).
14:30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베드로는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호언장담했으나 예수는 신적 예지력으로 진실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예측은 빗나갈지라도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됨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보증이기도 하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등의 표현은 너무나 세밀하며 충격적인 예언이었다. 한편 여기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는 기록은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이는 마가가 베드로로부터 직접 이 말을 들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닭은 새벽 12시 30분, 1시 30분, 2시 30분경에 각각 우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닭이 두 번 울기 전인 1시간 30분이전이란 말이 된다(HansKosmala). 그런데 당시 유대인에게는 이 닭이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특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사육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것은 경비를 서고 있던 로마 경비병의 임무 교환을 알리는 나팔소리이거나,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에 의해 길려진 닭울음소리라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어 베드로의 나약한 심성과 믿음을 보게 된다(72절).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이 예언은 후에 그대로 이루어진다. 한편 여기서 특별히 '세 번'이 강조된 것은 이것이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의 부인은 실수나 과오로 볼 수 없는 철저한 배신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베드로는 당시 제자들의 대표격이었고 이어 제자들도 베드로의 말에 동조한 것으로 보아(31절) 이는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전체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31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 '힘 있게'(에크페릿소스)는 '매우', '굉장히'란 뜻으로 시제는 미완료형이다. 이는 베드로가 계속해서 몇 번이나 예수에게 장담했던 것에 대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얼마나 열정적이며 자신에 차 있었나를 알게 해 준다.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 예수의 부인 예언이 확고한 것과 마찬가지로(30절) 베드로의 확신에 찬 발언 역시 계속해서 강화되어 지고 있다. '즉 … 하지 않다'(우 메)라는 이중 부정 구분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백성을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베드로의 과도한 자기 신뢰이었다. 즉 예수를 따르고 그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자, 주님께서 붙잡아 주셔야만 되는 사실임을 망각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이러한 자신감은 예수께서 잡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그에게 있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성령을 충만히 받았을 때 그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옥에 갇히는 고통이나 죽음의 고통도 이기는 신앙의 용장이 될 수 있었다.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 베드로와 더불어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자신들의 의지만을 믿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의 필연성과 임박성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충성심의 경쟁만 부추기고 있다. 한편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요 13:30) 이때 유다는 이미 떠나고 없고 열한 제자만 남아 자신에 대한 장담만 서로 늘어놓았던 것을 볼 수 있다.
14:32-42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유월절 식사 후에 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겟세마네에서 밤이 깊도록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이처럼 성자(聖子)이신 예수님께서 슬퍼하시며 고통스러워 하신 더 큰 이유는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육체적 고난과 죽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는 영적인 고뇌 때문이었다(15:34). 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를 온전히 맡기기로 작정하셨으며, 또한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몰려오는 대적들을 향해 친히 나아가셨다. 한편 본문에서 우리는 고뇌에 찬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전히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그 직전까지 무사안일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마저 버리겠노라던 그들의 호언장담(31절) 이 얼마나 부질없는 허풍에 지나지 않는지 입증해 준다.
따라서 본문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올바른 기도란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빌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를 의미한다. 신성(神性)과 함께 인성(人性)도 지니셨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이 또한 예수님의 신적 위대함이었다.
② 성도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늘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는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영적 무기가 '기도' 외에 결코 없기 때문이다(벧전 5:8).
14:32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 '겟세마네'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서쪽 경사면에 있으며 예루살렘 동쪽 성문으로부터 약 1.2km 떨어진 지점으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원래 겟세마네란 문자적으로 '감람(올리브) 기름 짜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마 이 부근에 많이 재배되고 있었던 감람나무의 기름을 짜는 '착유기'가 설치된 데서 유래된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수는 마치 기름을 짜듯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기까지 기도하심으로'(눅 22:44) 이 지명이 갖는 예언적 역할을 감당하셨다. 한편 일찍이 예수께서 40일 금식 기도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막 1:12,13), 늘 기도에 힘쓰셨으며(막 6:46).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준비하는 시점에서도 이곳을 찾으심으로써 기도의 사람임을 스스로 입증하셨다.
나의 기도할 동안…여기 앉았으라. - 이어지는 33절을 볼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달리 8제자에게는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하셨다.
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 병행구인 마 26:37에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세베대의 두 아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키므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죽음의 잔을 함께 마시겠다고 한 자들이었으며(막 10:38-40) 베드로 또한 절대로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던 자이다(29절). 이처럼 이들은 예수를 스스로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변화 산에서의 영광된 모습과(막 9:2) 죽음을 앞두고 고민과 슬픔에 빠진 예수의 양면을 보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자들이었다. 실로 이들은 예수에게 있어 특별한 제자들로서 중요한 사건마다 증인이 되어 후세에 전하게 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자들이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 마 26:37의 '고민하고 슬퍼하사'란 표현보다는 훨씬 생생한 표현이다. 즉 '심히 놀라다'(에크담베오)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크'( )와 '놀라서 말문이 막히다'란 뜻이 있는 '담보스’( )의 합성어로서 정신을 잃고 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상태를 말한다. 또한 '슬퍼하다'(아데모네오)는 '마음이 무겁다', '괴로와하다'를 뜻한다. 이처럼 예수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제자들에게 준비시킨 바 있지만 이제 바로 그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격렬한 정신적 압박 가운데 마음이 짓눌려 있는 극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의 무게와 고통을 겪어야 하는 처절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34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 여기서 '마음'(프쉬케)은 인간의 내적 생활의 중심이 되는 영혼이나 지·정·의의 기능 전체를 의미한다. 이로 보아 당시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며 지·정·의 모든 부분을 망라한 아픔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고통은 ① 육체적 죽음을 앞두고 이를 맞이하는 인간 예수의 인성(人性)적 고통 ② 자신의 죽음에 수반될 유대인의 범죄와 제자들의 배반을 예견한데서 오는 슬픔 ③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버리심을 당하는데서 비롯된 영적 고독감 등이 이러한 슬픔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너희는…깨어 있으라. - '깨어있다'(그레고레오)란 말은 단순히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경계의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즉 '경계하라', '정신 차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 같은 말을 하신 것은 앞으로 예수께서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 크므로 같이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과 예수의 시련이 곧 제자들이 시험에 빠지는 길이 될지도 모르므로 기도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14: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 예수께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을 이길 힘을 성부께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홀로 나아갔다. 누가에 의하면 이때 예수와 제자들의 거리는 '돌 던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고 한다. 그렇다면(눅 22:41). 이를 약 30-40m 정도의 거리라고 추정할 때 제자들은 적막한 밤공기를 타고 오는 예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당시 기도가 기록으로 남게 된 까닭일 것이다. 한편 이때의 상황은 예수께서 앞에 계시고 그 뒤에 보다 예수를 잘 이해하는 세 제자, 그리고 그 아래 예수를 따르던 여덟 제자가 있어서 혹자는 이러한 형태는 교회의 질서를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기도의 자세를 '땅에 엎드리고'에 대하여 마태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라고(마 26:39), 그리고 누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눅 22:41)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의 보편적인 기도의 자세가 서서 기도하는 것이란 면에서 볼 때(막 11:25) 이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시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모두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 '이 때'에 대하여 마태와 누가는 '잔'이라고 하였다(마 26:39; 눅 22:42). 그러나 때와 잔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예수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4:36 아바 아버지. - '아바'( )는 당시 근동지방의 일상 언어였던 아람어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되는 친근한 말이다. 그런데 마가는 그와 동의어인 '아버지'(파테르)란 헬라어를 이에 첨가하여 기록하였는데 이같이 두 가지 용어가 겹쳐 사용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시의 공용어인 아람어로만 두 말을 다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는 유대인을 위해서 '아바'라 하시고 그 다음은 이방인을 위해서 '아버지'라는 헬라말로 하신 것이다(Wessel).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히브리말로만 '아버지여'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예수께서는 아람어로만 '아바'란 호칭을 사용했으나 마가가 이방인 독자를 위해 헬라어로 그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호칭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으로는 불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나 성자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호칭은 후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롬 8:15; 갈 4:6). 한편 예수의 이 기도는 형식면에서 먼저 기도의 응답자 되시는 하나님을 불러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기도에 있어서도 먼저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모델이 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 일반적인 기도가 하나님의 성호를 부른 이후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이어져야 하는 것처럼 이 부분은 이러한 기도의 형식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찬양 부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나 실패가 전혀 없는 절대적인 분이심을 고백하며 그 전능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가 주장하듯이 이 부분을 다음에 이어지는 죽음을 면케하여 달라는 간구의 전제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잔'은 성경에서 뿐만이 아니라(시 11:6; 16:5; 116:13; 사 51:17,22) 이방 문학에서도 어떤 인간에게 이내 지정되어진(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운명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잔'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다. 그러나 지금 고통과 수치가 점철된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명이란 자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인성(人性)을 입으신 자로서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탄원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 누가의 기록에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되어 있다(눅22:42). 이 기도에는 예수의 두 가지 의지, 즉 인간적인 의지와 신적인 의지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안일을 꾀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기 때문이다.
14:37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 이에 대해 누가는 그들이 '슬픔으로 인해 잠들었다'고 한다(눅 22:45). 또한 변화산 위에서는 '곤하여 졸았다'고 기록했다(눅 9:32).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동안 인간적인 곤함과 슬픔을 극복치 못하고 '깨어 있으라'란(34절) 예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즉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예수와 함께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쳤으나 그러한 맹세를 행동에 옮기려는 영적인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로 하여금 크나큰 비애와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으로서 제자들의 영적 무지와 나태함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시몬아 자느냐. -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본명인 '시몬'으로 부르시며 꾸짖으셨다. 이는 그가 지금 보이고 있는 행동은 실로 부름 받은 자로서의 '반석'이란 뜻이 있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께 부름받기 전의 존재인 '시몬'에 머무는 비신앙적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조금 전에 다른 사람은 다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임을 고백한 바 있다(29절). 예수께서는 이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스승을 배반할 자가 베드로임을 아셨으므로 그가 좀 더 각성하여 기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한 시 동안도. - 여기서 '한 시'(미안 호란)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한 시간'(one hour)을 뜻하나, 여기서는 '길지 않는 시간', '어떤 일이 있는 시간' 즉 '기도할 동안의 시간'을 의미한다.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 예수님이 제자들의 잠을 깨우신 것은 하나님을 계속하여 찾고 그로 말미암아 닥쳐오는 수난에서 자기들을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기도하심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제거하시고 시험을 이기는 모범을 보이셨으나 제자들은 잠에 빠짐으로 인해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이처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며 기도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영적으로 각성한 자만이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가 결여되면 시험에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성립한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마음'(프뉴마)은 의미한다. 그리고 육신'(사륵스)은 말 그대로 인간의 육체를 뜻한다. 결국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에까지 동참하겠다는 인간의 의지나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영적인 요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혹에 약한 육체를 비교하는데 있다. 즉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다만 마음이 육신의 피로나 슬픔을 능히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약함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제롬(Jeerome)은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확신하지만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14:39 동일한 말씀으로. - 마태의 기록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란 내용이 나온다(마 26:42) 즉 첫 번째 기도에서 보여지는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란 기원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다 적극적인 죽음의 수용 의지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란 그 중심 뜻에 있어서는 첫 번째 기도와 동일하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고 더 적극적으로 죽음의 잔을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밝히신 것이다.
14:40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 '심히 피곤하다'(카타바뤼노메노이)는 문자적으로 '아래'(카타)와 '무겁다'(바뤼노)의 합성어이다. 즉 졸음이 너무나 심하여 눈이 내리감기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즉 너무나 심한 피곤과 무기력과 큰 슬픔이 그들을 덮쳐서 자신들의 마음과 같이 깨어 있을 수가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도하지 못하는 바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보다 더욱 심한 피로를 느꼈으나 깨어 기도함으로 시험을 대비하셨기 때문이다.
14: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 예수가 행한 기도에 대하여 마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도 내용을 알려주고 있으나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동일한 내용이었다고 한다(마 26:39-44). 반면 마가는 세 번째 기도에 대하여 언급이 없고 다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도가 동일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예수께서 하신 세 번의 기도는 그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기를 바라며 이를 이길 힘을 주시기를 원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세 번이나 동일한 기도를 반복하신 것은 기도의 내용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나타낸다. 바울도 자기의 문제를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수이며 완전수로 여기는 3번에 걸쳐 기도한 적이 있다(고후 12:8).
이제는 자고 쉬라. - 일부 학자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체포당하시기 전까지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자라는 권면으로 본다(Williams, Zahn). 하지만 이때까지 제자들이 잠자고 있었고(마 26:40,43) 다음 절에 이어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 26:46)라는 본문과 다른 분위기의 말씀이 주어진 것을 볼 때 이러한 해석이 합당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아직도 잠만 자면서 쉬고 있느냐'라는 비난조의 허락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McNeil).
그만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케이'( )는 거래를 마치고 '영수증을 쓰다'(마 6:2,5), '끊다' 등의 뜻이 있는 '아페코'( )의 현재 능동태적 직설법이다. 마가복음 이 부분에만 등장하는 이 용어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기도의 시간도 끝났고 이기도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이제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이다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때가 왔도다. - 여기서의 '때'는 죽음의 시간을 뜻한다. 35절에서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져 이 때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이제 기도를 모두 마친 여기서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보라'란 말은 지금까지 기도하고 준비하였던 상황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보여 준다. 또한 '죄인의 손'이란 구체적으로 유다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팔리우느니라'는 말씀의 성취적 측면에서 보면 구속의 주체가 하나님이자 예수님임을 감안할 때 결국 하나님이 팔리움의 주체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 던짐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
14:42 일어나라…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유다가 인도하는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이 접근하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셨는데 이는 함께 죽음의 장소로 나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체포하러 오는 사람들 앞에 담대히 나아가 자란 의미이다.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많은 고심을 하였으나 세 번에 걸친 기도의 힘으로 결정적인 그 순간을 맞아 영적 담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능동적인 모습은 본서의 일차 수신자인 로마 세계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고난을 담대하게 맞이할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14:43-52 체포당하신 예수님
세 번에 걸친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기기로 결심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선도(先導)하는 대적들의 손에 체포당하심으로 십자가를 향한 본격적인 수난의 길에 오르셨다. 예수께서 이처럼 능동적으로 체포당하신 것은 이러한 고난을 당하여야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구속사를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가룟 유다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배신을 예고받자, 즉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에게로 달려가서 기왕에 맺어진 밀약(10,11절)을 서둘러서 실행에 옮기도록 재촉한 듯하다(요 13:21-30).
한편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위기에 처한 것을 본 베드로는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위는 마치 예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칠 만한 권능을 갖지 못해서 체포당하시는 줄로 착각한 결과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간적 혈기를 책망하시면서, 당장이라도 하나님께 구하여 천사들로 구성된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 단숨에 대적들을 물리칠 수도 있지만, 오로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사역을 이루기 위해 주님 자신이 대적들의 손에 붙잡혀 십자가를 져야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마 26: 52-54).
결국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자들의 가증함을 본받지 않도록 성도들은 조심해야 된다(7:6; 사 29:13; 마 15: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라고 부르며 자신이야말로 주님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입맞춤을 했는데, 바로 이러한 그의 몸짓은 대적들의 손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한 신호였다.
② 인간적인 혈기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며, 오히려 주님의 뜻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비록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의분(義憤)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할지라도 베드로가 검을 휘둘러 다른 사람들을 해치려고 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다(10:45). 그러므로 성도들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전 15:50).
14:43 말씀하실 때에. - 동일한 말을 마태와 누가로 기록하고 있다(마 26:47; 눅 22:47). 제자들과 대화중에 체포자들이 들이닥칠 만큼 당시의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열둘 중의 하나인. - 이 말 역시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다(마 26:47; 눅 22:47). 이로 보아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일반화된 유다의 별칭으로서(눅 22:47) 그의 배신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 같다. 실로 '열둘'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명예로운 말이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극히 치욕스런 말이다.
파송된 무리. - 파송한 주체로 묘사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산헤드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예수 체포에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이 그 주축이 된 것을 말한다. 한편 이때 파송된 '무리'에 대하여 마태는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 이들의 규모가 큼을 나타내었고(마 26:47), 누가는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혀(눅 22:52) 이들 무리들 가운데는 성전 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은 '성전의 군관'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하속들'이라 하여 이일에 군인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음을 나타낸다(요 18:3). 이처럼 유월절 명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폭풍 진압을 위해 파견된 로마 군인들조차 체포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예수를 폭동을 일으킬 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때 동원된 군대에 천부장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요 18:12) 적어도 이 무리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추측할 때 더욱 신빙성을 가진다.
검과 몽치를 가지고. - 아마 '검은 로마 군인들의 무기를', '몽치'는 그 이외 사람들의 무기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무력적인 저항을 염두에 두고 실패 없는 체포를 위해 무장한 많은 수효의 사람들을 파견한 것이다.
14:44 그들과 군호를 짜. - '군호'(쉿세몬)란 '신호' 또는 '암호'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체포조끼리 미리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리기 위해 약속해 놓은 입맞춤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예루살렘 상주(常駐)하지 않았던 로마 병사를 비롯하여 급하게 조직된 체포조 '무리'들 중에는 예수를 모르는 자가 있었거나, 어두워서 예수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호를 짠 것으로 보아 체포의 대상은 예수와 그 제자들 전부가 아니라 오직 예수 혼자뿐임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내가 입 맞추는 자. - '입맞추다'(필레오)는 일반적으로는 '좋아하다'(마 6:8), '사랑하다'(요 5:20)로 번역된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 사회에서의 입맞춤은 사랑하는 연인이나 좋아하는 친구 혹은 사제 간에 신뢰의 표시로서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롬 16:16). 이러한 신뢰의 표시를 반역의 군호로 사용한 것에서 유다의 가증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삼하 20:9; 잠 27:6).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 마가복음에만 있는 기록으로서 유다의 가증스럽고 비열한 모습을 자세히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 '단단히'(아스팔로스)는 '안전하게', '틀림없이'(행 2:36), '엄중하게'등의 뜻을 지닌다. 이처럼 유다가 오히려 체포조에게 닥달하는 것은 아마도 예수가 이적을 행하여 도망치므로(눅 4:30) 자신이 받은 은 30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14:45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 병행 귀절인 마 26:49,50에는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란 유다의 인사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는 예수의 대답이, 그리고 눅 22:48에는 '유다야 네가 입 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란 질책이 나와 있다. 이처럼 유다는 간교하게 예수께 접근하였고 예수는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의연하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입을 맞추니. -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입맞춤이(눅 7:38; 15:20; 행 20:37) 유다에게는 배반과 살인의 가증한 술책으로 사용되었다(잠 27:6). 한편 혹자는 입맞춤이 연장자가 수하의 사람에게 하는 것이란 점을 들어 당시 유다는 사제의 관계를 무시한 무례를 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4:46 저희가… 잡거늘. - 요 18:4-9에는 체포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보다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란 질문을 하셨고 체포조는 '나사렛 예수라' 대답하였고 예수는 다시 '내도다'라고 스스로 신분을 밝히신 것이다. 또한 이때 체포조는 예수의 위엄에 놀라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안전을 위해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체포에 응하셨다. 이처럼 공관복음은 유다의 배반과 예수의 수난을 강조한 반면 보다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적 위엄을 잃지 않으심과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면모를 보여준다.
14: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 공관복음에는 익명으로 나와 있으나 요한복음은 그가 시몬 베드로임을 밝힌다(요 18:10).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공관복음서 기록 당시는 베드로가 살아 있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는 절대 세력이 드세었으므로 베드로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Meyer, Carr).
검을 빼어…귀를 떨어뜨리니라. - 당시 베드로가 칼을 휴대하고 있었던 것은 신앙 무장을 촉구하기 위해 '검을 사라'란 그리스도의 상징적 교훈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눅 22:36). 한편 베드로는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예수의 안전과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여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아마 그는 이것이 예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도 모른다. 그는 가까 있는 사람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상대가 피하는 바람에 귀를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서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눅 22:51에는 '이것까지 참으라', 마 26:22에는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검으로 망하느니라', 요 18:11에는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란 예수의 말씀이 나온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무력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며 무력은 또 다른 무력을 불러 일으켜 결국 멸망만을 가져온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보여 주셨다.
대제사장의 종…귀. - 요한은 그가 '말고'임을(요 18:10), 그리고 누가는 '오른편 귀'임을 밝힌다(눅 22:50). 또한 누가는 예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심을 기록함으로써(눅 22:51) 원수까지 사랑하는 신적 사랑과 귀를 단번에 낫게 하시는 신적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14:48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강도'(레스테스)는 '노획하다'(레이조마이)에서 유래하여 '노상 강도', '도둑'이란 뜻도 있으나 바나바와 같은 '폭도', '반도'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를 강도들 중의 하나와 같이 체포했으며 또한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철저한 모욕을 당하셨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예수께서 죄인의 몸으로 고난 받으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것이므로(사 53:12)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용납하셨다.
14:49 날마다…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 예수께서는 강도처럼 인적이 없는 곳에서 밤에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인 성전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때 교권주의자들은 여러 차례 예수에게서 어떠한 잘못이나 그릇된 것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자신들의 허위성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들은 강도처럼 은밀한 곳에서 모의하여 예수를 잡으려고 획책한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은 지금 비난 하시는 것이다.
성경을 이루려 함이러라. - '성경'(그라파이)이 원분에는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이는 구약의 어떤 특정한 구절이나 말씀이 아니라 메시야에 관계된 모든 예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구속사를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는 그 일생을 구약의 예언을 응하는 삶을 사신 것이다. 그러나 당시가 예수의 모욕적인 체포가 이루어지는 싯점이므로 그리스도가 범법자로 취급받는다는 사 53:12이나 제자들의 도망과 관계된 슥 13:7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4:50 제자들이…도망하니라. - 저녁을 먹을 때만해도 서로 예수를 위해 같이 죽겠다고 맹세했던 이들은(31절) 예수께서 잡히시는 것을 보자 예수께서 이미 예언하신대로(27절) 모두 도망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의 자기 신뢰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이런 측면에서 이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같이 기도를 안 하고 잔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도망간 제자들 중에서도 두 사람, 즉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를 내어 체포된 주님의 뒤를 따라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당도하게 되었다(요 18:15).
14:51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 마가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는 제자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셨던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을 기록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청년이 마가일 가능성이 많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이 추론하기로는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곳이 마가의 집이었고 그곳으로부터 감람산으로 나아가실 때 마가는 자기 집에서 잠들었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후에 예수께서 잡혀 이 집을 지나가실 때 그는 잠에서 깨어 덮고 있던 '베 홑이불'(신돈)만 걸치고 무리들을 따라 나갔다는 것이다(Leneski). 한편 이 '베 홑이불'은 세마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수입품이며 상당히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부유한 집 아니고는 구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를 누렸던 마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은 것이다.
14:52 도망하니라. - 예수를 따라온 이 청년은 무리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자 두르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도망갔다. 이처럼 벌거벗은 채 도망치는 예수 추종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모두 도망한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이다.
14:53-65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 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으나 대적들의 손에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서 심문을 받으신(요 18:12-23) 후 당시 대제사장이며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으셨다. 한 밤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곳에는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이 비밀리에 소집되어 있었으며,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거짓 증인들마저 동원시켜놓고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예수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체포하자마자 밤에 빨리 심문하려 하였던 것은 유월절 축제 이전에 예수를 죽이려고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은 결코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조작해 낸 증거들이 서로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바 있는 그들은 억지로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자신을 불법적으로 정죄하여 죽이려는 유대종교의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심으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사 53:7). 바로 이것은 주님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정죄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형식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종교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마저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서 살해하려고 시도할 만큼 사악해진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처럼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위선과 불의가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불의를 숨기는데 급급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를 바로 직시하거나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걸림돌이 된다.
14:5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이 제일 먼저 끌려간 곳은 전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A.D. 7-17년)에게였고 그 다음이 당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A.D. 18-36년)였다고 한다(요 18:13). 그런데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고 전임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비록 현직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붙들려 제일 먼저 그에게 끌려간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들은 유대인의 최고 재판 기구였던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이었다.
다 모이더라. -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인 의장한 명과 바리새인, 서기관 및 장로 71명 등 전체 7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원래 범법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독자적으로 집행할 수 없었다 (신약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참조). 그래서 이들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도(64절) 빌라도에게 다시 고소한 것이다(막 5:13). 한편 본절의 '다 모이더라'는 표현은 산헤드린 회원 전부가 모인 것이 아니라 의결 정족수에 해당하는 회원들 정도가 모인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 체포의 시점은 밤이었고 원래 해가 지고 난 이후에 산헤드린의 정식적인 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예수의 심문은 민중들의 봉기를 유발할 수 있는 사건으로서 비밀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회원 전부가 모였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해가 뜨고 난 이후 정식으로 산헤드린이 재소집 될 수밖에 없었다(눅 22:66-71).
14:54 베드로가…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를 보고 모든 제자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이 한 맹세(31절)와 예수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예수를 뒤쫓아 갔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가 상당히 위축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이 '멀찍이'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베드로는 항상 도망갈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고 그 뒤를 따라간 것이다. 한편 요 18:15,16에 따르면 이때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던 요한은 그 집으로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서 있었으나 요한이 그를 인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베드로는 심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불을 쬐더라. - 해발 800m정도 되는 예루살렘은 일교차가 심하며 새벽 공기는 대단히 차가웠다. 따라서 예수가 심문당하는 동안 대제사장의 종들과 다른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종들 그리고 성전 수비대원들이 불을 피워 놓고 추위를 녹이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 역시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자신을 은폐하며 추위를 막기 위해 불을 쬐고 있었던 것이다.
14:55 예수를 죽이려고 증거를 찾되. - 여기서 '온 공회'라는 말 역시 53절의 '다 모이더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이는데 적극 동참하는 산헤드린 회원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하나 이는 전체 공회원이 모인 합법적인 회합이란 말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먼저 예수를 죽이기로 원칙을 정해놓고 이에 합당한 죄목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사실은 '찾되'(에제툰)이란 말이 '발견하기 위해 찾아 헤매다', '궁리하다', '조사하다'(제테오)의미 완료형으로서 계속해서 힘써 찾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14:56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합하지 못함이라. - 모세 율법에 의하면 두 명 이상의 일치된 증거가 있어야만 죄인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다(민 35:30; 신 17: 6; 19:15). 그러나 예수에 대하여 많은 거짓 증인들이 왔지만 그들의 증언은 거짓되었기 때문에 서로 일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유죄로 인정하기란 극히 어려웠다. 한편 심문 시간이 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증인이 왔다는 것은 이미 예수를 제거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상당했음을 알게 해 준다.
14:57 어떤 사람들이. - 마태에 의하면 이때 두 사람의 증인이 나타나 비교적 일치된 증거를 하게 된다고 한다(마 26:60). 그러나 본문은 구체적 언급 없이 '어떤 사람들' 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 역시 완전히 일치된 증언이 아니었고(5절) 예수를 해치기 위한 거짓증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억울한 사람의 억울함이 풀려야 하는 법정에서 이처럼 합법을 빙자한 불법이 횡행하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4:58 그의 말을 들으니 …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 거짓 증언자들은 담합 끝에 오래전 성전 숙정 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유일한 증거로 내세웠다(요 2:19). 그러나 이 또한 거짓된 증거이다. 즉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성전을 헐고'가 아니라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이다. 또한 예수께서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일으키리라'라고 하셨다. 결국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자신의 몸된 성전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며, 또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한 것이다(요 2:21). 따라서 이는 실제 성전을 헐고 일으키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한편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리이스-로마 세계에서도 신전의 파괴나 모독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과거 선지자 예레미야는 범죄한 유다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성전에 임할 재난을 예언하였다가 죽음의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렘 26:1-9).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를 성전 모독죄로 몰려고 한 것이다. 후에 스데반도 이러한 죄목에 몰려 죽게 된다(행 6: 13,14).
14:59 합하지 않더라. - 성전 모독죄에 대한 이들의 증언 또한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에 대한 죄목을 들추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어떤 사람을 해치기 위하여 증언을 하던 자의 말이 거짓으로 판명나면 그가 주장했던 범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대신하여 받도록 되어 있다(신 19:16-20). 따라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였던 거짓 증인들도 사형을 받아야 할 것이나 당시 교권주의자의 비호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4:60 대제사장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 예수께서는 거짓 증거에 대해 서로 침묵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변론 하도록 요구하는 가야바의 심문에 대해 서로 역시 침묵하셨다. 한편 여기서 가야바의 말은 당시 유대인 법전에서 피고에게 자기 변론의 기회를 주는 전통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고발에 있어서 증인 확보에 실패했으므로 이제 대제사장이 법정에서 말의 꼬투리를 잡아 불리한 증거를 도출해 내기위한 사악한 수법이다. 한편 예수의 이러한 침묵이 갖는 의미는 첫째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며, 둘째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침묵을 하시므로 더 이상 그들이 악행을 범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시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14:61 잠잠하고 아무 대답을 아니 하시거늘. - 이미 예수께서는 자신을 말의 올무에 빠뜨리려는 대제사장의 계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변명하실 필요도 없었다.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 가야바는 비록 많은 증인들이 예수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증거가 미약함을 알았고 또한 마지막 두 증인의 증언 또한 일치하지 않으므로 이것만으로는 예수를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도를 바꿔 전혀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분이 메시야임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만일 메시야가 아닌 자가 메시야로 주장하는 것은 참람(blasphemy)죄로서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당시 유대인의 관점으로는 메시야는 자신의 메시야됨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만약 메시야라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신성 모독죄로 처형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본절에서 '찬송 받을 자의 아들'은 마태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표현이다(마 26:63).
14: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 만약 이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침묵하셨다면 예수는 스스로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긍정의 말을 하셨다. 한편 병행구인 마 26:64에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가야바의 말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밝혀주는 위대한 자기 계시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 여기서 '권능자'(뒤나미스)은 모든 권세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편'이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와 영예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능을 부여받은 자신의 직위를 자신 있게 공개한 것이다.
구름을 타고 오는 것. - '우편에 앉으리라'가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면 본절은 재림 사건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 받은 심판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므로 이 날 주님의 대답을 들은 자는 결코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으며(계 1:7) 이는 그리스도 승귀(昇貴)의 최종 단계이다(그랜드 종합 교리 '기독론' 참조). 한편 당시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관에 따라 단순히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킬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인가란 질문을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본질적인 메시야관인 하나님과 동등하며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교권주의자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대답을 하셨다. 이는 자신의 목숨 부지에는 지극히 불리한 증언이나, 진리를 밝히는 차원에서 증거하신 것이다.
14:63 자기 옷을 찢으며. - 옷을 찢는 것은 원래 슬픔과 고통의 표시였다. 그러나 점차 이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을 때 이에 동조하지 않으며 선민으로서 분노를 표현하는 상징적 행동이 되었다(왕하 18:37; 19:1).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관례화되어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상대방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예수의 말을 신성 모독죄로 규정하여 자신의 옷을 찢음으로써 예수를 처형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당시는 외식주의가 극에 달해 있었을 때로서 옷을 찢는 지점과 방법과 치수까지 정해 놓았으며 한번 찢은 옷은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 가야바는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기가 의도한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므로 더 이상의 증거도 필요 없이 신성 모독죄가 성립한다는 것을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14:64 참람한 말. - '참람한 말'(블라스페미아)은 '하나님을 모독한 말'이라는 뜻이다. 즉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에 대한 불경인으로 규정하므로써 사실상의 사형 판결을 내리고 있다(레 24:11). 이어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이 이 자리에 참석한 산헤드린 회원에게 의견을 묻자 이들은 모두 예수에게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형을 선고함에 있어서 단 한 사람의 변호인의 말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재판의 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이는 막 10:33에 나오는 수난 예언의 성취이다.
14:65 침을 뱉으며…주먹으로 치며…손바닥으로 치더라. -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예수에 대한 모욕 행위가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한편 병행 귀절인 마 26:67은 '침을 뱉는다'는 말에 '얼굴'이 첨가되어 있는데 유대인에게 있어서 얼굴은 인격을, 그리고 침을 뱉는 것은 최대의 경멸 표시였다(민 12:14; 신 25:9; 욥 30:10; 사 50:6). 그리고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말은 '네가 선지자라면 때린 자가 누구인지 보지 않고서도 알 것이 아니냐'란 조롱적인 말이다. 더욱이 '손바닥으로 치더라'(라피스마)는 '몽둥이로 때리다'란 뜻도 지닌 것으로 보아 예수에게 얼마나 심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처럼 교권주의자와 그 하속들은 낮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피고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며 이틀 이상에 걸쳐 신중하게 심리해야 할 중요한 사건을 밤에 가야바의 집에서 변호할 기회도 없이 급속히 재판을 진행시키고 그 결과에 따라 예수를 모욕하는 이중 삼중의 죄를 짓고 있었다.
14:66-72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고 계시는 동안에, 베드로는 자신의 호언장담(27-31절)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예언대로(30절)결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특히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상황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다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약속과 의지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실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과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가 보여주게 되는 담대하고 용기 있는 모습을 비교해 봄으로써 참된 믿음과 충성이란 결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부인은 사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마 26:69-75; 눅 22:54 -62; 요 18:15-18,25-27) 각 복음서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요한은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이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서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한 시간쯤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정황들로 볼 때 베드로의 부인은 안나스와 가야바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시간적인 간격을 두면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가는 이러한 세밀한 점을 기록하기 보다는 예수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하는 참담했던 사실만을 부각시켜 기록하였다.
한편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어떤 위협과 고난이 닥칠 때 자신의 안전을 도모키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否認)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 장차 주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이며 이 세상의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상실케 되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마 10:32,33; 딤후 2:12).
② 성도라고 해서 절대로 범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한다는 점이 불신자들과 구별된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다같이 예고하셨으며 또한 주님의 예고대로 두 사람 모두 범죄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판이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택한 것은 자살이었고(마 27:3-10; 행 1:15-20), 베드로가 택한 것은 회개였기 때문이다. 비록 범죄하여 더 이상 주님 앞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즉시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요일 1:9). 베드로 역시 철저한 회개가 선행되자 그는 초대 교회의 구심점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자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14: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 마 26:69에는 '바깥 뜰'이라고 되어 있으나 동일한 장소이다. 한편 베드로가 예수가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당하는 동안 이곳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스승 예수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더 컸으므로 앞으로 닥쳐올 시련에 대해서는 이기지 못하고 말았다(요일 4:18).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비자'(婢子)는 여종으로서 요한의 부탁으로 베드로를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 장본인일 것이다(요 18:16,17). 그 여자는 예수 체포로 인해 들떠 있는 분위기와는 다르게 초조한 모습으로 있는 베드로를 수상히 여기고 질문하였을 것이다.
14:67 불 찜을 보고 주목하여. - 앞부분에 나오는 '보고'(에이도)는 일반적으로 보는 행위를 가리키나(마 2:2), 뒤에 나오는 '주목하여'(엠블레포)는 '자세히 관찰하다', '응시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즉 비자는 불 쬐는 베드로를 보고난 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 그 얼굴을 확인하였음을 가리킨다.
너도… 함께 있었도다. - 여종은 예수와 제자들이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한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나사렛 예수. - 구약의 여호수아란 이름을 계승한 예수라는 이름이 흔했으므로 출신지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흔한 이름인 유다 앞에 가룟이란 출신지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당시 나사렛은 특권 의식에 젖어 있던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천대받던 갈릴리 지역에 있었으므로 영예로운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말투로 보아 이 여종 역시 예수에 대해 멸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자까지도 역시 멸시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요 1:46).
14: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 인간의 자기 신뢰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예수 앞에서 절대로 주를 부인하지 않고 같이 죽겠다고 맹세까지 한 베드로가 비천한 여종의 질문에 즉각적인 부인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란 언급은 본서에만 나오는 것으로 이러한 이중 부정은 법정에서 사용됨직한 철저한 부정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고 묘사함으로써 세상 죄의 대속을 위해 자신을 죽음 앞에 내어놓는 예수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려는 베드로의 비겁함에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앞뜰로 나갈 새. -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불을 피워 놓고 그 둘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아래 뜰(66절)을 피하며 보다 출입구에 가까우며 어두웠던 앞뜰로 피하였음을 말한다.
14:69 비자가…이 사람은 그 당이라. - 원문을 보면 '비자' 앞에 관사를 붙여 앞에 언급한 그 비자가 또다시 베드로에게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이 비자에 대해 명백히 '다른 비자'라고 설명했으며(마 26:71), 누가는 다른 사람(남자)으로 표현하고 있다(눅 22:58). 이러한 복음서 간의 차이점은 아마도 베드로에게 의심을 품고 다가 온 자들이 첫 번째 비자를 포함하여 여럿이었으며 각 복음서 저자가 이를 짐작케 해 준다. 한편 '그 당'이란 '한 패거리'란 의미이다.
14:70 또 부인하더라. -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함을 보여주고(마 26: 72), 마가는 이 말을 미완료로 써서 거듭해서 지속적으로 부인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조금 후에. - 누가는 '한 시 쯤 있다가'로 표현함으로써(눅 22:59) 두 번째 질문 이후 한참 시간이 흘렀음을 밝힌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 - 본문에는 추궁하는 주체가 '사람들'로 나오나요 18:26에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 즉 말고의 친척이 주축이 되었음을 밝히며 그가 직접 겟세마네에서 베드로를 목격했음을 밝힌다. 또한 마 26: 73에는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후음(喉音)을 잘 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베드로의 사투리로서 예수와 한 패임을 주장하고 있다(마 26:73). 뿐만 아니라 '참으로'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와 베드로가 함께 다니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단정적으로 베드로에게 추궁하니 베드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4:71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되. - 베드로가 저주와 맹세로써 나타내 보이려 한 것은 바로 '예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세 번 예수를 부인한데 이어 저주까지 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세속적인 욕망을 갖는 인간에게 진리의 파수가 얼마나 힘든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이는 유대교에서 출교시키는 사람에 대해 선언하는 말이다. 즉 이 사람과 우리는 더 이상의 관계가 없다는 공식적인 선언인 것이다. 이처럼 육적 생명의 부지를 위하여 영적 생명의 근거가 되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세속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란 예언의(30절) 정확한 성취이다.
기억되어 생각하고. - 닭 울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은 베드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즉 그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것이다(30절). 한편 눅 22:61은 닭 울음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돌아보는 주님의 눈길이 또 다른 회개의 동기였다고 한다. 즉 주님은 베드로를 회개시켜 그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 회개의 촉매제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생각하고'(에피발로)는 '위에'(에피)와 '던지다'(발로)의 합성어로서 해석상 난점을 지닌다. 즉 성경에서 이 용어는 '던져 넣다'(고전 7:35), '붙이다'(마 9:16), '부딪치다'(막 4:37)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도 '머리를 싸다', '땅에 주저 앉다'(RSV), '머리를 부딪치다' 등으로도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즉 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땅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통곡하는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회상하다'(Meyer)란 개역성경의 해석과 더불어 고려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울었더라. - 마 26:72와 눅 22:62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로 나온다. 즉 철저한 패배와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잠든 영혼의 눈이 뜨여 그로 하여금 밖으로 뛰쳐나가 통곡하게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눈물이다. 진정 그는 철저히 실패하였지만 진정 회개함으로 인해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이후부터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무릎을 꿇고 지난 날의 자기 잘못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마가가 본서에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실패를 극복하는 신앙을 교훈하여 실패의 경험이 있음을 알게함으로써 또한 고난의 극복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밝힘으로써 로마의 박해로 인해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성숙한 신앙심을 갖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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