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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장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행한 복음과 선교 사역에 대한 변론과 바울의 무죄 판정 및 로마 압송 결정
구속사 개관
본장은 넓게는 21:17-28:31에 이르는 일련기사 곧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Rome)에 이르게 되는 소위 바울의 로마 여행 과정을 기록한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바울이 소위 유대교(Judaism)의 오류에 빠진 광신적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무고히 체포된 때부터 마침내 가이사(Caesar)에게 직접 판결받기 위하여 미결수(未決圖)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B.C. 58-60까지의 대략 2년간의 과정을 기록한 21:17-26:32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즉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충돌하여 소요를 일으켜서 유대 율법 모독 및 사회 소요죄로 기소된 바울이 체포 직후부터 유대 군중 전체와 유대 공회 및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을 대리 통치하던 헤롯 가문의 분봉왕(分封王)과 로마 총독들 앞에서 수차 예수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가진 로마 시민권(Roman Citizenship)의 특권의 하나인 가이사 곧 로마 황제에게 직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 결과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 여행을 떠나기까지 의 과정을 기록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는 사소한 세부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주의 복음과 이를 전하는 초대 교회를 곡해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율법모독자 및 로마 식민 사회의 파괴자로 무고히 기소당한 바울이 수차에 걸쳐 주의 복음과 자신의 사역을 변론하다가 마침내 가이사에게 상소한 결과 로마로 이송되게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그 전체적 맥을 같이한다. 이에 본고(本瀉)에서는 먼저 이 일련기사의 전반적 내용 전개를 요약하고 그 전체적 배경과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만 요약하기로 한다. 따라서 본장 자체의 내용과 그 세부적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의 해당 강해주석을 보라.
이제 21:17-26:32까지의 내용 전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21:17-40은 이제 마지막 선교 여행이었던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바울이 본의 아니게 소동에 휘말렸던 사실을 보도한다. 즉 바울은 우리 주 예수 안에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바뀐 상황에서 구약을 성취 확장한 신약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자신의 사역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전승(tradition)까지 가미하여 유대인들만의 지상구원을 주장했던 유대교의 오류에 빠져 곡해한 나머지 하나님과 구약 율법을 모독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핍박하고자 하는 일부 광신적 유대인들의 오해를 구약 율법에 규정된 결례(潔禮)를 행함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본문은 바로 그런 결례의 과정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경내로 끌어들여 성전을 모독한 것으로 속단한 유대 군중들에 의하여 큰 소요(騷擾)에 휩싸임으로해서 본의 아니게 소요의 주역으로 로마 천부장에 의하여 체포된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22:1-21은 바울이 체포 직후 유대 군중들 앞에서 행한 변론을 보도한다. 다음 22:22-23:11까지는 군중들이 계속 소요하자 바울의 문제를 유대 민족내의 종교 문제로 파악한 천부장이 유대 공회(Sanhedrin)의 소집을 요청하여 일단 바울을 유대 공회 앞에 세우자 이에 바울이 다시 한번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중에 특히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리적 견해 차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앙 곧 복음의 도를 교묘히 변론하고 나아가 유대주의자들의 견해 차이를 더욱 노출시킨 사실이 보도된다. 다음 23:7-35은 일부 광신적 유대인이 바울 살해를 결심하자 로마 천부장이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울을 당시 관할 총독이 거주하던 가이사랴(Caesarea)로 이송한 과정을 보도한다. 그리고 24:1-21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당시 유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 벌어진 변사(辯士) 더둘로의 바울 고소와 이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소개한다. 다음 24:22-27은 일단 바울에 대한 선고가 유예되고 마침 이때에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이 교체되었음을 보도한다. 다음 25:1-12은 바울이 재차 신임총독 베스도 앞에서 자신을 거듭 고소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변론을 행하였음을 보도한다. 25:13-26:29까지는 신임 총독 베스도가 헤롯 가문의 잔존 분봉왕으로서 당시 갈릴리 북부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ba, A.D. 48-70)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 결과 다시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길게 예수의 도(道)와 자신의 사역이 종교적으로도 순수하며 더욱이 정치적으로도 로마 식민 정부에 대항하려는 것이 아님을 변론하였던 사실을 보도한다. 끝으로 26:30-32은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가 바울의 무죄를 판정하였으나 바울이 기왕에 자신의 로마 시민권상의 특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上訴)하였고 또한 바울을 석방하는 것보다는 로마로 이송하는 것이 당시 바울을 강력히 고소하는 유대주의자들과의 충돌을 피하는 길도 될 수 있을 것이어서 바울의 로마 이송을 최종 결정하였음을 보도한다.
이상의 문맥으로 전개되는 이 21:17-26:32까지의 일련 기사의 배경 또는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막 구속사(救贖史)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된 과도기적 상황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 ․ 구약을 온전히 계승한 초대 교회 기독교와 당시 선민(選民) 유대인의 종교였으면서도 구약의 일부 내용에 인본주의적 요소까지 가미하여 정통 구약 신앙을 변질시킨 유대교(Judaism)와의 갈등을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본문을 보면 바울을 직접 체포한 것은 로마군이었으나 이는 그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유대 율법의 모독자로 규정함으로써 유대 땅을 소란케 한 바울은 로마 정부의 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또한 정황상으로도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바울은 분명히 정치범으로 보다는 종교범으로 기소(起訴)되었었다. 사실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종교범인 동시에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의 경우보다 더 종교범의 비중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도행전 전체의 과정에서 볼 때에 다른 사도들보다도 더욱 이방선교에 힘썼던 바울(롬 11:13; 갈 2:8; 딤전 2:7)의 체포는 초대 교회와 유대교간의 갈등의 일환이요 그 결정적 사건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의 체포 사건 전 ․ 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초대 교회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 21장 구속사적 개관에 약술(略述)하였는바 이를 꼭 참조하라.
한편 우리는 이상의 바울의 체포 이후 로마 이송까지의 기사를 전반적으로 고찰할 때 다음 두 가지의 구속사적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예수의 복음(福音)과 이방 선교 사역으로 인하여 대략 2년여에 걸친 투옥생활중에 수차의 심문을 당하였지만 바울은 내내 추호의 흔들림없는 확신을 피력하며 오히려 그런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행 16:25-34; 26:27-29; 28:23-31). 이 짧지 않은 기간 중에 바울은 수차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하였었다. 더욱이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하였던 바울은 선민의 후손인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사회로부터 축출되는 것이 곧 최고의 영원한 저주라고 생각되었던 그 시기에 전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규탄을 당해야만 하였었다. 그러나 바울은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 이후 성령의 인도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섭리를 응축(凝縮)한 복음의 절대성과 진정성을 확신하였는바 인간이 가하는 그 어떠한 육체적 사회적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천국 구원이라는 절대 영원의 진리와 은혜를 확신한 자는 잠시 동안 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동요됨 없이 천국(天國)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롬 8:31-39).
둘째,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곡해 내지 핍박하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무고히 갇혀 고통받은 것은 이 당시만으로는 다만 패배와 굴욕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전체와 나아가 초대 교회 역사 전체와 비교해 볼 때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먼저는 초대 교회 복음의 정당성을 전교회를 대표하여 변증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아가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나마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이르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교회(Church of Rome)의 기틀이 공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우리에게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구속사를 더욱 확장케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을 깨닫게해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복음과 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속사는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기고 극복할 힘이 있다는 구속사의 생명력을 실증해 준다. 실로 바울 사건 이후에도 더욱 격화되어 갔던 전로마 제국의 엄청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관점에서는 비천하고 유약한 무리에 불과하였던 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믿었던 신앙 곧 기독교(Christionity)는 단순히 살아남은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로마 제국 전체를 복음화 시킴으로써 결국 박해를 이겨내었었다. 이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저 단순한 신앙의 힘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바로 그처럼 엄청난 핍박을 이겨낸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우리에게 이는 그 이면(裏面)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의 실체를 확립시켜 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외울 말씀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행 26:23)
바울의 아그립바 앞에서 변론
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의 무죄 판정과 로마 이송 결정
30 ○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6:1-23 바울의 자기 변론 자세의 7대 특징
1. 고소당한 처지이면서도 당당하게 말함(21:37-39)
2.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자신의 무죄를 증명함(22:1-21)
3. 감정부터 앞세우지 않고 침착하게 말함(22:1-21)
4.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처신함(23:6-10)
5. 누구에게나 예의바르게 변론함(24:10,11)
6. 권세자 앞에서도 기탄없이 말함(26:1-23)
7. 변론을 통해 오히려 복음을 전파함(26:28,29)
도표-26:4-29, 1) 구약의 사울과 2) 신약의 사울의 비교
1. 외모:
1) 키가 크고 준수한 용모(삼상 9:2)
2) 키가 작고 약하고 평범함(고후 10:10)
2. 출신:
1) 베냐민 지파(삼상 9:1,2)
2) 베냐민 지파(빌 3:5)
3. 생애:
1) 하나님의 친구로 시작하여 적이 됨(삼상 15:23)
2) 하나님의 적으로 시작하여 친구가 됨(딤후 4장)
4. 위기 상황에서:
1) 엔돌의 접신녀를 찾아감(삼상 28: 7)
2)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섬(딤후 1:12)
5. 죽음에 대한 태도:
1) 크게 두려워하여 자결함(삼상 31: 4)
2) 큰 소망 중에 담대히 맞음(딤후 4:6-8)
6. 삶의 특징: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삶(삼상 13:3)
2)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삶(행 26:19)
역사배경-26:10,11 초대 교회 박해사
행 12장 연구자료 참소
역사배경-26:11, 회당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 배경' 참조
역사배경-26:20 초대 교회의 선교사
행 서론 특별자교 참조
인물연구-20:1-32 헤롯 아그립바 2세
행 25장 자료노트 참조
난제해설-26:13-18 바울의 세 회심 기사의 차이
본서에는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기사가 세 번 나온다. 9:3-9의 기록은 실제의 사건에 대한 묘사이고 22:6-11과 26:13-18의 기록은 사도 바울의 회 고 기사이다.
그런데 이 세 기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면서도 각각 다 조금씩 다르다. 물론 세 기사는 모두 바울 자신이 각각 다른 시기에 회고했던 내용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표현이나 사용한 어휘가 다를 수 있겠지만 표면상으로 보기에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기록들도 있다. 이 때문에 혹자들은 이 기록들을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편집설을 주장하기 위한 중요한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같은 기록의 차이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 세 기사의 비교
세 기사를 비교함에 있어서 사소한 표현의 차이는 고려치 않고 두드러지게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것들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예수님의 말씀: 26:14에 있는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내용이 다른 두 곳에는 없다.
② 바울 동행자들의 증거: 9:7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로, 22:9은 '빛은 보면서도‥‥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로 기록하고 있다.
③ 바울이 사명을 받은 시점: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받은 시점에 대하여 9장과 22장은 모두 다메섹에 도착한 후 아나니아를 통해서 받은 것으로, 26장은 다메 섹 도상에서 받은 것처럼 기록하였다.
2. 차이의 조화
① 예수럼의 말씀: 이는 사실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 9장과 22장의 기록은 단순히 자신이 예수의 핍박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26장의 기록을 생략하였을 것이다. 제 26장의 기록에서는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가 자신이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 전부를 말한 것이다.
② 바울 동행자들의 증거: 이는 다음과 같이 서로 조화될 수 있다. 즉 9장에서 동행자들이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메시지의 분명한 내용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소리만 들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은 그 내용은 듣지 못하고 천둥소리로만 들었던 것과 같다(요 12:28,29).
22장에서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 소리의 분명한 내용은 듣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③ 바울이 사명을 받은 시점: 9장과 22장은 비교적 사건이 일어난 시간순으로 정확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26장에서는 사건의 시간순은 무시하고 바울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실만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에 관한 내용을 아나니아에게서 받은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아나니아가 전해 준 주님의 메시지를 바울이 마치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처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언급할 때는 자신의 고백을 듣는 대상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유대교적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고 제 26장에서는 특별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명받은 내용에 있어서 제 9장과 22장은 비교적 핵심 내용만을, 그리고 제 26장은 자세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3.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 바울의 세 회심 기사는 기록상의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조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들에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차이점 때문에 그것에 대한 신중한 고려도 없이 쉽게 단정하여 성경의 오류나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일은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비록 증거의 불충분 때문에 충분히 밝힐 수 없는 문제라 할지라도 성경이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는 자세는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점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올바른 신앙 정립을 위해 그렇게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물연구-26:4-29, 바울
롬 1장 연구자료 참조
원어연구-26:16, 사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페레테스'인데. 이것은 '휘포'와 '에렛소'의 합성어이다.
'휘포'는 '아래'라는 뜻이고 '에렛소'는 '노를 젓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휘페레테스'는 본래 '배 밑에서 노를 젓는 천한 노예' 또는 '힘든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도 이 단어는 역시 '하속'(마 26:58) 또는 '관의 노예'(마 5:25) 등 천한 직분자들을 가리킨다.
한편 '종', '노예'란 뜻의 또 다른 헬라어에는 '둘로스'가 있다. 이는 영적으로 또는 심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즉 나쁜 의미에서는 '죄의 노예'(요 8:34; 롬 6:17,20). 좋은 의미에서는 '스스로 헌신한 종', 혹은 '사역자'(행 16:17; 롬 1:1)를 가리 킨다.
따라서 '휘페레테스'가 사역(事役)의 일면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꾼이라는 측면에서의 '종'을 가리키는 반면(눅 1:2; 고전 4:1), '둘로스'는 주인되신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는 자라는 측면에서의 '종'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바울을 당신의 복음을 위한 사역자(휘페레테스)로 세우셨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매인 바 된 헌신자로서 자주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신학용어-26:15. 주
요 13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26:18, 기업
수 19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26:22,23 예수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26:1-23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변론
앞단락(행 25:13-27)에서는 베스도 총독이 헤롯 아그랍바 2세에게 바울의 일에 대해 자문을 구한 사실을 보았다.
이어 본문은 베스도에 의해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이 변론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본서에 나타난 바울의 마지막 변론으로, ① 유대인을 상대로(행 22:1-22), ② 공회 앞에서(행 23:1-6), ③ 벨릭스 앞에서(행 24:10-21), ④ 베스도 앞에서(행 25 : 6-12) 행한 변론에 이어 다섯 번째 변론이다. 이러한 바울의 마지막 변론은 이전의 그 어느 변론보다도 세련된 언어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바울의 변론을 자세히 살펴 보면 첫째는 변론의 배경이다(13절).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떼게 심문의 권한을 위임받아 바울에게 변론을 요청하였다. 이에 바울은 베스도가 잘 알지 못하였던 문제들까지 아그릴바에게는 정확히 이해될 수 있었으므로 그 앞에서의 변론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제 바울은 미심쩍어하던 베스도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아그립바를 통해 확실히 입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바을은 변론을 퉁해 자기 변호를 할 뿐 아니라 이를 적극적인 복음 선포의 기회로도 삼았다.
둘째는 변론의 내용이다(4-22절). 즉 그 내용은 ① 자신이 유대교인이었을 때를 회상한다(4-12절). 자신은 철저한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으며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여 복음을 핍박하던 자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다메섹 회심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다메섹 회심이 이방 선교의 전기를 이루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행 9:1-9; 22:5-21).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된 체험이 되므로 유대인 앞에서 변증할 때에는 특별히 언급을 한 것이다. ② 자신이 이방 선교를 위해 택함받은 자임을 변론한다(13-22절). 자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방 선교의 사명을 받으므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게된 것임을 고백한다. 이 변론에서 바울은 유달리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선지자.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는데 이는 아마도 유대인의 풍습과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의식한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복음과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자신도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고소대로 이단이거나 성전을 모독한 자가 아님을 항변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고소가 결국은 조상들이 전하여준 말씀과 구약의 예언을 믿기 거부하는 유대인의 완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모세 이전부터 약속되었고 성취된 건약의 복음임을 변론하여 자기가 유대교의 전통과 배치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었다.
셋째는 바울이 행한 변론의 핵심이다(23절).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기도 한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으며 이 구원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동등하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이미 바울의 변론은 변른의 차원을 넘어서 아그립바와 다른 이를 향한 복음 선포의 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처럼 바을은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변론에 급급하지 않고 자기 변론을 위해 주어진 기회를 오히려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고 있다. 이는 그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딤후 4:2).
26:1 아그립바가‥‥네게 허락하노라. - 아그립바가 관장하게 된 청문회(행 25: 22-27)에서 아그립바 왕은 이처럼 바울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데 대하여 변론을 할 수 있도륵 기회를 허락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다섯번째로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 자신을 변론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안토니오 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하여 했으며(행 22:1-21), 두 번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했었다(행 23:1-6). 그리고 세 번째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했으며(행 24:10-21), 네 번째는 베스도 총독 앞에서 했었다(행 25:6-12),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매번의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바울에게 죄를 발견할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재판은 계속되었으니 그로 인해 바울은 이미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를 해놓고 있는 상황이다(행 25:11).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고 있으니 곧 '임금들 앞에서'(행 9:15)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바울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것이라는 주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 바울은 아그립바 왕으로부터 변론할 기회를 얻어 변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손을 들어 변론하는 모습은 첫 번째 유대 군중들에게 변론하던 모습과 똑같은 태도이다(행 21:40-22:21). 그러나 지금 바울은 두 손에 쇠사슬로 결박된 상태이며(29절), 또한 왕과 총독 그리고 고관들 앞에서 변론하고 있는 상황이다(행 25:23). 따라서 이는 첫 번째 때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군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에게 정중한 예의를 표하는 행동이라 보여진다(Toussaint). 한편 계속된 바울의 이전의 변론에서도 그러했듯 바울은 이번 변명을 통해서도 단순히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로 삼았다. 더욱이 이번의 변론은 그 대상들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그리고 고관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바울의 변명수지가 어느 때 보다도 논리적이고 세련된 것이었음 것으로 여겨진다(행 25:23). 한편 법정적인 용어로서는 '항변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변명하되'(아펠로게이토)에 대해서는 행 22:1; 24:10; 25:8의 주석을 참조하라.
26:2,3 당신 앞에서…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 바울이 이처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 이유는 그가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모든 관습에 익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상황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아그립바는 베스도에 비하여 바울 자신과 유대인들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자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다행히'(마카리온)라는 말은 '행운'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과 바울의 일관된 변론의 내용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신앙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때문에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유대인 아그립바 왕에게 변론하는 것은 베스도에 비해 자신의 문제에 대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려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바울은 개인적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다행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사실 아그립바 왕은 예수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와 예수의 부활 등에 대해 소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을 터이니 호기심을 갖고 그에 관해 알기를 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처지가 비록 어려움에 처해 있을지라도 도리어 그로 인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 바울의 이와 같은 말은 단순히 동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자신이 변론하는 바를 끝까지 경청해 주기를 바라는 신중한 부탁이다. 이처럼 바울의 변증은 언제나 신중하고도 예의를 갖춘 말로써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별히 가이사에게 상소한 상태이어서 곧 로마로 가야 할 바울은 이번 기회를 자신이 유대인 앞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변증으로 여겨 더욱 신중히 변증했을 것으로 보인다.
26:4 처음부터…생활한 상태를. -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및 총독 베스도, 또한 가이사랴의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서(행 25:23) 먼저 자신이 젊었을 때의 삶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그의 구체적인 성장 배경을 통해서 바리새적 배경과 유대교적 열정을 강하게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여기서 '생활한 상태'(비오시스)란 '생활 양식'(manner of life, KJV)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하였으나 사회 생활의 출발과 활동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고(행 22:3), 처음부터 바리새파 가운데서도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26:5 우리 종교. -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배경, 즉 유대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신과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이 민족적으로 같은 동족이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드러내어 공감대를 얻고자 함이었다.
가장 엄한 파…바리새인. - 이제 바울은 자신이 누구 못지 않게 유대교적인 전통에 철저했음을 밝힌다. 즉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유대적 전통에 가장 임했던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자신도 그 일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유대교 분파들' 참조. 실제로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엄수했는가 하는 것은 빌 3:5,6에 언급되어 있다. 이로써 바울은 다시 한번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아그립바 왕에게 나타내고 있다.
26:6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 - 바울은 먼저 자신의 성장 배경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유대교 전통에 철저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아그립바 왕과 공감대를 형성하였으며(5절) 청문회에 참여한 자들에게도 유대적 배경에 대해 이해를 시켰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당한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이란 아브라함과(창 17:2-4; 22:8) 다윗에게(삼하 7:12-16) 약속하신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고 믿고 있었던 소망을 말한다. 이에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로 인해 가는 곳마다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당하였다(행 13:44-51; 14:19; 17:5-9). 이에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던 이러한 똑같은 소망을 확신하고 전파하다 도리어 유대인의 고소를 받게 되었음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26:7 열 두 지파가…이 소망을 인하여. - 바울이 이처럼 특별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언급하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북쪽의 열 지파 곧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정복당한 이래 대부분 이방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왕하 17:24-41). 그러나 본절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 지파가 '실종' 되거나 '소멸' 된 것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사실 주님께서도 열 두지파 모두에 관해서 언급하셨고(마 19:28), 야고보사도와(약 1:1) 요한 사도도(계 7:4-8) 그랬다. 아무튼 여기서 바울이 '열두 지파'에 대하여 언급하는 진정한 이유는 '유대 백성 모두가' 조상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12지파 곧 이스라엘 전민족은 장차 메시야의 통치 아래 통합될 것이다(창 49:28).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그 소망을 바라며 전파하다 도리어 저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는 것을 변호하고 있다. 사실 정작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初臨)하셨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저를 영접치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메시야를 못박았고 이제는 그 그리스도와,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토록 메시야를 열망하고 소망했던 자들이 영적 안목이 어두워 오히려 메시야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핍박한 것은 오늘날 영적 안목을 깨치지 못한 채 단순히 지식적인 신앙만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그 위험성을 일깨워 주는 크나큰 경고가 아닐 수 없다.
26:8 당신들은…여기나이까. - 본절의 '당신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아그립바와 모든 유대인을 포함하여 청문회에 참석한 비유대인 청중들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았고(행 17:31, 32), 그리고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행 23:8), 바울에게 있어서는 부활에 대한 교리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청중들 모두를 향해 외쳤을 것으로 보인다. 즉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며,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도 헛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고전 15장), 바울은 정녕 그렇지 않음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때 나 자신도' (에고 멘 운… 에마우토, I indeed then ... to myself)라고 하여 유대인들이 아직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도 과거에 그러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과거에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현재 자신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보다 더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핍박자였다(딤전 1:13). 즉 그 역시 예수의 이름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핍박했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과거에 보였던 자신의 불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현재 자신을 대적하며 고소하고 있는 무리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했던 자신도 개심하여 복음의 일꾼이 되었듯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자들도 자신처럼 변화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29절).
26:10 이런 일을 행하여…가편 투표를 하였고. -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즉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권세를 얻고(행 9:1,2),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으며, 그들을 죽일 때에 가편(可便) 투표를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가편 투표를 하였다'(카테넹카 프세폰)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는 돌을 던졌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고대 헬라 사회에서 재판을 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유죄라고 생각할 때는 검은 돌을, 무죄라고 생각할 때는 흰 돌을(계 2:17) 던지는 판결방식을 염두에 둔 것으로(Robertson)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사형에 처하도록 찬성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바울의 이러한 대표적인 박해 모습은 예루살렘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때 무리들이 바울을 증인으로 세웠던 것을 통해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행 7:58). 한편 여기서 '가편 투표를 하였다'는 바울의 말을 통해서 혹자는 그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고도 추측한다(Meyer, Alford, Holtzmann).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여 바울이 산헤드린 회원으로 재판에 직접 참가했다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동의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Knowling, Vincent).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려면 30세 이상으로 결혼하여 자녀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바울이 결혼했다고 추정할 만한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Robertson). 또한 바울 자신도 자신이 산헤드린의 회원임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이기보다는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보다 자연스럽다. 어쨌든 본 구절은 바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구절이 된다.
26:11 모든 회당에서…형벌하여. - '모든 회당에서'(카타 파사스 타스쉬나고가스)라는 말은 '회당마다'라는 의미로 예루살렘 시내와 주변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바울의 열광적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즉 교회의 초창기에 유대인 신자들은 회당에 자주 모였는데 그때마다 바울은 그들을 찾아 처벌하였다는 말이다(마 10:17; 23:34). 그런데 실제로 바울은 야수처럼 '교회를 잔멸했고'(행 8:3),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한편 여기서 '형벌'은 당시 회당에서 보편화되어 있던 가벼운 형벌인 채찍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에 각 회당들의 지도부에서는 소(小) 법정을 열어 피고를 심리한 후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법정에 기소하는 형식을 취했었다. 어쨌든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 공문을 요구하여 받아 가지고선 여러 회당을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행 9:1,2).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 본문의 '강제로'(에낭카존)라는 말은 '강권하여'라는 의미로 바울이 여러 회당을 다니면서 예수의 추종자들을 끌어내어 투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에 대한 신앙을 버리도록 강권한 것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케 하여 배교자가 많이 나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물리적인 박해 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신앙을 저버리게끔 회유와 강압책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실로 물리적인 박해는 오히려 성도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하여 순교에까지 이르게 했지만, 회유책은 성도들이 자칫 넘어가기 쉬운 보다 무서운 박해였다. 즉 이것은 신앙의 뿌리 자체를 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초신자들에게는 무엇이 정통 신앙인지를 분별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엄청난 위험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박해를 함에 있어 선봉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밝힌다. 이는 아그립바 왕과 유대인들에게 지금의 자신의 심정을 이해시키는 한편 자신에 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효과를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 본문은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함에 있어서 예루살렘 시내의 회당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벗어나 다메섹으로 가면서 지나가는 성마다에서도 성도들을 핍박한 것을 말한다(행 9:2:22:5). 이는 그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즉 본문의 '핍박하였고'(에디오콘)는 '적의 뒤를 좇다' 또는 '사냥감을 좇는다'는(디오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계속적인 동작 상태를 나타내 주는 미완료 능동이다. 이는 바울이 집요하게 예수 믿는 자들을 계속 좇아 다니며 박해하였음을 나타낸다.
26:12 그 일로…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여기서 '그 일'이란 예수 믿는 자들을 뿌리채 뽑으려는 계획을 말한다. 즉 본절은 바울이 합법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까지 가려고 했던 모습을 상세히 나타내 준다(행 9:1). 그리고 이어 다음절에서는 그처럼 기독교인 박해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칠 때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다메섹도상에서 이루어진 바울의 회심 사건은 본서에서 세 번이나 언급되고 있다(9장, 22장, 26장).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바울의 회심 사건이 바울 자신 뿐만 아니라 누가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가를 짐작케 된다. 그런데 동일한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면서도 누가는 단순히 사건을 재진술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본문의 기록 목적과 잘 부합하여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 특별히 본문의 기록(13-18절)은 이전의 기록에서 볼 수 없었던 점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이채롭다.
26:13 때가 정오나 되어. - 한낮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잊은 채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러 다니는데 여념이 없었던 바울의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구절이다. 행 22:6 주석 참조.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 본절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체험을 밝힌 것들 가운데 다른 곳에서 보다 더 구체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묘사 구절이다. 여기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란 빛의 초자연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Kno-wling) 이전의 동일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행 9:3; 22:6) 찾아 볼 수 없는 표현이다. 사실 바울이 본 빛은 하늘에서부터 현시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서 초자연적인 것이었다(행 7:2과 7:55,56을 비교). 그리고 그 빛은 3일 동안 바울의 육적인 눈을 멀게 했지만(행 9:8-9) 그의 영적인 눈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열리게 하였다(고후 4:3-6). 한편 이때 바울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빛의 광채와 3일 동안 눈이 먼 현상을 뜨거운 태양 빛에 의한 일사병이나, 바울의 심리 작용으로 돌리는 이성주의자들이(Baur, Eichhorn) 있지만 배척되어져야 한다. 이때 바울은 하늘의 빛으로 인해 눈이 이상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일생을 통한 지병이 되었다(갈 4:13-15; 6:11).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 위에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 행 9:3; 22:6에서도 하늘에서 나온 빛이 자신을 둘러 비친 사실을 말하나 본문에서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함께 동행하던 자들에게도 둘러 비췬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실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바울의 행보에는 다른 유대인들도 동행하였다. 그리고 하늘로서 비취는 빛이 그 동행자들에게도 비취므로 그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를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아그립바 왕과 다른 많은 관원들에게 밝히고 있는 이유는 과거에 경험한 자신의 회심 사건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임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이번 변론은 더욱더 세심하고 준비된 증언으로 여겨진다.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들으니. - 문 역시 자신의 회심에 대한 이전의 언급과 비교해볼 때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행 9:4; 22:7에서 자신이 땅에 엎드러졌다는 표현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바울의 일행 모두가 엎드러진 것을 말한다. 즉 하늘로부터 비췬 강한 빛이 모두에게 보였고 그 빛을 받은 자들 모두가 땅에 엎드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은 일행 모두가 강한 빛을 보았고 소리도 들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 그 계시의 말씀은 바울에게만 들려진 점이다(행 9:7과 비교). 어쨌든 세 번에 걸친 회심의 기록에서 바울과 누가는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이 회심 사건의 중요성을 분명히 주지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 방언. - 이 역시 고전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히브리어였을 것이다. 행 21:40:22:2 주석 참조.
사울아 사울아 핍박하느냐. - 눈에 비친 강한 빛의 현상만으로는 하나님의 계시하시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들려 주신 말씀은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인지하게 하고 확실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즉 바울의 동행들은 빛을 보았지만 주님을 보지 못했으며, 소리를 들었지만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에 익숙한 히브리 방언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바울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이렇게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살아계시며 핍박자요 원수인 자신조차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았을 것이다. 한편 실제로 바울이 핍박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그의 제자들이었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본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이 받는모든 고난에 동참하시는 것처럼, 주님 역시 핍박을 받는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그 신고(苦)를 나누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사 63:9).
가시채를 뒷발질...고생이니라. - 본문 역시 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기록가운데 여기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당시의 격언에 의거한 것으로 고대 헬라 문헌에 남아있다. 이 격언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신을 대적한다는것은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임을 일깨워주는데 있다(Longeneker). 또한 이러한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던 격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여기서 '가시채'(켄트론)는 끝에 뾰족한쇠로 된 가시가 달린 소몰이 채를 말하는 것으로 짐승이 주인의 말에 복종치 않을 때 채찍을 가하기 위한 것이다. 즉 본절은 계속해서 짐승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더 많은 채찍을 가하게 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바울이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얼마나 무익하였는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바울에게 있어서'가시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로 말미암는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이라고들 한다(Tous-saint).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포악을 행하며 교회를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신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딤전 1:13) 긍휼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시채'를 핍박하는 일로 말미암는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단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데반의 증언과 죽음(행 7장), 그리고 바울 자신 때문에 고난을 당한 다른 성도들의 충성된 증거 등으로 인해 바울은 유대교의 공허함과 나약함 그리고 율법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과 씨름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같은 경험에 의거하여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함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준엄한 징계의 매를 맞을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아 감사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며, 우리의 어떠한 행동이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26:15 주께서 가라사대 …핍박하는 예수라. - 본절은 이전에 두 번 언급한 회심에 대한 기록과 거의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본절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행 9:5; 22:8을 참조하라. 한편 18절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회심 기록에서는 아나니아에 대한 언급(행 9:10-19; 22:12-16)과, 바울이 눈이 어두워졌다가 후에 나음을 얻어 다시 보게 된 사실(행 9:8-9; 18-19; 22:11,13)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사실이 생략된 이유는 아마도 현재 상황이 앞전에 성전에서 군중들에게 말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청문회에 참석한 청중들에게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어진 주님의 말씀만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 것이다(행 9:5,6; 22:8,10 비교). 다시 말해 바울은 아그립바와 베스트 몇 여러 고관들 앞에서 자신이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받은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과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만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아그립바가 예수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에(행 25:19,23) 바울이 그것에 대하여서 충실히 증거하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 본 내용은 바울이 받은 소명에 관한 내용으로 앞선 두 기사에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주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행 9:15-17; 22:14-16).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아나니아가 전해 준 소명의 내용만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아나니아를 등장시키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소명의 내용만 언급한 것은 제 3의 인물인 아나니아를 언급하여 오히려 청문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함이며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직접 소명의 내용을 전달한 것만 부각시키려 한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이 소명의 내용은 바울이 후에 예루살렘에서 다시 환상 가운데 받았던 말씀(행 22:21)과 그리고 구약시대에 선지자 에스겔이 소명을 받을 때의 모습과도 유사하다(겔 2:1,3).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나타날 일에. - 본문에서 '네게 나타난 것은'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장차 네게 나타날 일'은 사도로 부름받은 후 계속해서 바울 자신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신 일들을 말한다(행 18:9,10; 22:17-21; 23:11; 27:23; 고후 12:1; 딤후 4:17). 바울의 이러한 언급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부름 받고난 후에도 계속해서 소명받은 증거들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소명을 받은 목적이 자신을 부르신 그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 여기서 '사환'(휘페레테스)은 본래 '노젓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고대 로마에서 그리고 중세까지만 해도 큰배의 밑창에서 노를 젓던 비천한 노예나 죄수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증인'(마르튀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목격자'를 말한다. 이러한 본절은 바울 자신이 사도로서 소명을 받은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신을 사환으로 극히 낮추어 표현한 점에서 바울이 회심한 후에 소명에 응하여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바울은 존경받는 지도자로 행세하는 데 익숙해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회심한 후에는 복음에 예속된 일꾼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주인이 되었다.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 본문의 내용은 바울이 주께로부터 소명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으로 행 9:15과 일치된 내용이다. 그런데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신다는 소명은 분명히 바울에게 놀라움을 던져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 민족에 대하여 큰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민족을 위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자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롬 9:1-3).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과 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음으로 바울의 편협성은 포기되어져야 했던 것이다.
구원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이레오'( )는 70인역(LXX)에서는 '선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48:10). 하지만 본문에서는 문맥상 '구원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Weiss, Meyer, Bruce). 본서에서는 이와 같은 용례가 많이 나온다(행 7:34; 23:27). 더욱이 실제로 바울은 3번에 걸친 복음 전도의 여정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핍박과 위기의 상황에서 여러 번 구원받았다(행 9:23-25; 16:19-40; 21:30-32; 23:12-32; 25:3-5).
26:18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 바울이 사도로 부름받은 자신의 사명을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명은 사 35:5; 42:7,16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실상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힌 눈먼 죄수와 같은데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해방시켜 빛과 자유를 줄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많은 사람들을 죄의 암흑에서(요 3:19; 고후 4:4; 엡 4:18; 5:8; 골 1: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으로(요 12:36; 고후 4:6; 엡 5:8; 골 1:12; 살전 5:5) 이끌어 내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사람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게 한다(요 8:44; 히 2:14). 죄 가운데 있던 자들이 사단의 권세 하에 예속되어 있다면 이제 구원을 받은 백성은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즉 복음은 인간을 영적 어둠의 지배자인 사단의 권세 아래서(엡1:21; 2:2; 골 2:15)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요 1:12; 롬 8:15). 이처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은 이러한 논리 정연한 변증을 통해 자신의 사도된 사명은 물론 복음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러한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얻어야 한다는 바울의 논조에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청중들은 심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26:19 하늘에서 보이신 것…거스리지 아니하고. - 바울은 다메섹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을 통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그 부름에 따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스스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임도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주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즉시 순종하였다. 즉 바울은 바로 다메섹에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증거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고(행 9:20-25),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자 거기서도 바울을 죽이려 했다(행 9:29-30). 그러나 이러한 반복된 위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며 또한 아무도 그러한 충성을 꺾지 못했다(행 20:24).
26:20 먼저 다메섹에와…예루살렘…유대 온 땅과 이방인. -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친히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상세하게 복음 전도의 과정을 증언하는 것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만을 위해 일해왔고 또한 그 복음 전도의 과정에서 자신이 체포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전도 행로(行路)가 행 1:8의 주님의 지상 명령에서 언급된 '예루살렘 → 온 유대 →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라는 노정과 비슷한 점이 특이하다. 바울은 실제로 회심하여 소명을 받은 후 즉시 다메섹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여 예루살렘, 그리고 유대 지역과 후에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방에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이 '유대 온 땅'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행 9:20-30과 갈 1:18-24에 비추어 볼 때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유대 온 지역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와 이방의 모든 나라에'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Bruce, Toussaint).
회개하고 …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 사도 바울은 본서에서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함을 주장하며 회개를 자주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에서 이 '회개'에 대한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부활과 더불어 사도들의 중심 메시지였다(행 2:38; 3:19; 5:31; 8:22; 11:18; 13:24; 17:30; 19:4; 20:21). 따라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이단으로 보는 유대인들에게는 바울이 가시같은 존재요, 염병과 같은 이단을 퍼뜨리는 이단의 괴수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행 21:28-30; 22:22; 24:5,6). 한편 본서에서 나타나는 베드로와 바울 사도의 복음증거의 메시지가 세례 요한이나(마 3:8), 예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선포의 내용(마 4:17)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과 주님과의 신앙적 연속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 안에서 구원얻는 길은 회개하며 그 회개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갈 5:22-24).
26:21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여 여러 차례 심문당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소위 이방인을 데리고 헤롯 성전의 '이스라엘인의 뜰'에 들어감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했다는 혐의였다. 행 21:28,29 주석 참조.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 사실을 생략한 채 단지 자신이 성전에서 유대인들로부터 죽을 고비를 당한 것만을 얘기하고 있다. 이는 곧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그 일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당하고 고소당하게 되었음을 아그립바에게 주지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26: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오늘까지 서서. - 본문은 17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또한 유대인들에 잡혀 여러 번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금까지 무사히 지내 올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행 21:31,32; 23:12-15).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그의 서신서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봉사할 힘을 얻었다(고전 15:10)고 언급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 사도 바울은 이미 자신이 사도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민족의 차별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한 것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을 밝혔다(17,20절). 그리고 그에 이어 이제 여기서는 복음이 민족적인 차별 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물론 복음 전파의 이러한 보편성과 세계성 역시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명령에 기인한 것임은 새삼 말할 나위 없다(행 1:8). 이와 관련하여 복음은 인간적인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제한됨이 없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해야 한다(롬 1:16,17).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 여기서 '선지자들이 말한 것'은 '선지서'를 가리킨다. 그리고 '모세가 말한 것'은 율법의 대표격인 '율법서'를 가리킨다. 즉 본절은 '율법과 선지서'(행 13:15)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곧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그리스도와 복음의 내용이 구약 성경, 곧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계시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은 시종 일관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에 입각해 고대해 온 것들이었다. 즉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과, 그분의 인류 속죄를 위한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주된 내용이었다.
26:23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 - 본절 전체는 바울이 이제까지 전파한 내용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고 신약 시대에 성취된 사실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요약으로 철저하게 구약 성경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즉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따라 바울이 전한 바는 고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하신 후 다시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다(시 22:6-8; 69:4-8; 사 50:6; 53:3,7). 그러나 이처럼 고난받으신 메시야에 대한 증거는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이었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영웅적 존재로서 옛 다윗 왕국의 영화를 재현할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고, 헬라인들의 사고로는 거룩한 신적인 존재가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습을 취하거나 고난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14권 막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를 참조하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 구약 성경에 예언되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 중에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시 16:10). 즉 그리스도는 거짓 증인들의 모함을 받고(마 26:60,61), 모욕과 조롱을 당하신 후(마 27:28-31; 막 14:6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마 27:38,50),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마 28:9),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특별히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한 사람들의 첫 번째'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첫 번째'(프로토스)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 순서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성도들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그의 백성의 부활에 대한 보증과 증거가 된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Bruce). 사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 것이며, 전파하는 것도 헛되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처해 있을 것이다(고전 15:13-19). 그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신앙의 근거와 보증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를 비롯하여 온 인류의 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이미 사 42:1-7; 49:6; 60:3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셨다(요 1:4; 8:12; 고후 4:6; 엡 5:14; 계 21:23). 이로써 바울의 증거는 유대인들이 믿어 오던 구약의 말씀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며 모든 선지자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도 명백해졌다. 한편 본문의 '선전하시리라'(카탕겔로)는 말은 '선언하다', '전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약 1:17; 요일 1:5). 이 말처럼 실제로 바울의 생애와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한 마디가 있다면 온 인류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16절)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구약에 예언되어 있고 자신이 경험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하고 친히 이루신 것을 증거하였을 따름이다. 또한 이와 같은 증거는 오순절 때부터 시작한 베드로의 전파 내용(행 2:14-36)에서부터 모든 사도들의 전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는 내용이며, 바울 서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교회 역시 전파하는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사 53장), 부활하신(눅 24:26; 고전 15장) 그리스도가 전인류의 빛이시고(행 26:13) 소망이신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순수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기를 힘쓰고 있는지 스스로 재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26:24-32 바울의 무죄 증명과 로마 이송 결정
앞단락(1-23점)에서는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과 자신을 변론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바웁이 아그립바에 의해 무죄로 인정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바울의 변론을 들은 베스도의 반응이다(24,25절). 베스도는 바울의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변증과 복음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듣고 그를 많은 학문으로 인하여 미친 것이라고 단정한다. 헬라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베스도에게는 부활과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전파하는 바울이 정신 이상자로 보인 것이다. 사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불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미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였다(고전 1:18).
다음으로 아그립바를 향한 바울의 권고이다(26-29절). 즉 바울은 베스도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아그립바를 향해 복음의 결단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그의 열정을 잘 대변해 주는 것으로, 이미 그는 죄수의 몸이 아니라 복음 전도자의 위치에서 확신있게 복음을 전파하며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는 끝내 바울의 회개의 촉구를 외면함으로써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아그립바에 의한 바울의 무죄 판정이다(30-32절). 즉 아그립바와 베스도는 비록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았으나 바울의 확고한 신앙이 결코 죄는 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에 대한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무죄 인정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박된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된다(행 27,28장).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가이사에게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행 25:11,12). 물론 바울은 상소를 취하함으로 놓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상소를 취하하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놓이고자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고(행 19:21) 또한 주님의 약속(행 23:11)이 있었던 로마 전도를 이루고자 한 까닭이다. 결국 그는 그의 소원대로 로마 전도의 숙원을 달성하게 된다(행 28:16-31).
한편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강퍅하여 복음을 배척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장차 그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가슴치며 후회할 날이 있게 될 것이다(눅 21:26; 계 1:7).
② 바울은 복음 증거를 위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행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행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전도를 위해서는 죄인의 몸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전 9:19-23). 그와 같이 오늘날의 성도들도 나 자신이 아닌 복음과 그리스도를 중심한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고전 9:14,16).
③ 바울은 심문을 당하는 처지에서도 심문자들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함으로써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서도 복음 증거를 쉬지 않았다(살전 2:2). 그와 같이 성도들은 때를 얻는지 못얻든지 항상 복음 증거에 진벽해야 한다(딤후 4:2).
26:24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 미쳤도다. - 유대의 종교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고, 성육신(成肉身)이나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는 헬라적 사고 방식을 가진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변론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행 17:32; 23:6,7). 거기에다 자유 자재로 구약을 인용한 바울의 논리적인 변론은 베스도로 하여금 바울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이해하게 했다. 따라서 베스도는 바울의 변론을 중단시키고, 그를 미쳤다고 외쳤다. 여기서 '미쳤도다'(마이네)라는 말은 '광란'을 의미한다(요 10:20; 행 12:15; 고전 14:23). 이는 바울이 복음을 요약하여 증거함에 있어서 얼마나 열정적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본문의 '많은 학문'(타 폴라 그람마타)은 문자적으로 '많은 책들' 이란 뜻이다. 아마도 베스도는 바울이 기독교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환상을 보았거나 아니면 옥중에서 성경을 많이 읽고 정신 이상자가 된 것으로 믿은 것 같다. 사실 바울은 세상적인 안목에서 볼 때 그의 학문적 배경과 성장 과정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율법에 정통할 뿐 아니라 당시의 철학에 대해서도 폭넓게 섭렵한 지식인이었다(행 22:3).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부터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기로 고백하고 결심하였다. 더군다나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해 열정을 가졌던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미친 자가 되었다고 고백하였을 정도였다(고후 5:13). 이처럼 우리도 예수의 흔적을 지닌 자답게(갈 6:17)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미친 자란 오해를 받을 정도로 순수하고도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한다. 이와 관련해선 우리의 생명의 주인되신 주님께서도 미친 자 취급을 받으셨던 것을 기억하자(요 10:20). 복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받는 오해는 실상 주님을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6:25 베스도 각하여…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 '각하'란 칭호에 대해서는 행 23:26 주석을 참조하라. 다음으로 '정신차린'(소프로쉬네스)이란 말은 '이성적' 혹은 '건전한'이란 의미를 지닌 '소스'( )와 '마음'을 의미하는 '프렌'( )의 합성어로 '참되고 이성적인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답변은 비록 베스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바울 자신에게는 지극히 참되고 이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26:26 이 일을 아시기로… 담대히 말하노니. - 본문의'이 일'이란 바울이 지금까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복음의 핵심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변론을 이해하지 못하자 바울은 이제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변론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즉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인데다 유대인의 풍속과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에 대해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3절 주석 참조) 자신이 변론한 내용이 사실인 줄 확인해 줄 수 있을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미쳤다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담대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담대히'(파르레시아조메노스)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란 뜻이다(Robertson).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 이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것들이 어느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거나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와 온 이방인들에게까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요, 일반적인 지식이며 광범위하게 증거된 사항임을 의미한다(마 2:3; 4:24; 24:25; 눅 24:18; 행 1:3).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는 바울의 소명 역시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13절). 즉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이 단순한 허구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그 위대한 복음을전하는 자신의 행위가 아무런 고소거리가 될 수 없음을 아그립바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리라는 사실은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예언된 것이며, 특별히 그의 죽음과 부활은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된 바이며 객관적인 증거까지 뒷받침되고 있다(마 28:9-11; 막 16:12,14; 눅 24:35-43).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복음에 빚진 자로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뭇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딤후 4:2).
26:27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아나이다. - 바울의 이와 같은 어조는 실로 대담하고 확신에 찬 태도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들의 전한 신앙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이 선지자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조상들을 배반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전통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는 실로 재치 있는 바울의 반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유대인들이 개입되어 있었고, 로마 총독 빌라도도 관련되었으며, 또한 예수께서 3년간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 많은 군중들이 따라다녔던 사실을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으로서는 바울의 이같은 물음에 핑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이 분명하다(Weiss, Knowling). 더군다나 왕의 대답이 있기 전 바울이 먼저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자답하여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26:28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본문의 '적은 말로'(엔올리고)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적은 것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특별히 '올리고' (biiyou)는 대개 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것이 시간의 지속을 나타내는 전치사 '엔'( )과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었으므로 많은 해석을 낳고 있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적은 말' 혹은 '짧은 논쟁'으로 이해하기도 하며(Alford, Knowling, Bruce), '적은 노고로'(Vincent) 또는 '거의', '아마'라는 의미로도 이해한다(Chrysostom, Luther).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첫 번째 의견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문은 '너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적은 말(논쟁)을 가지고 과인을 설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구나'라는 의미인 셈이다. 아무튼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말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청문회를 주재했던 그가(행 25:22), 바울의 명석하고 논리 정연한 변론에 몹시 당황하여 분명한 판단을 못내리고 어물쩍하게 바울의 반문(27절)을 받아 넘기기 위해 한 말이었다. 즉 아그립바는 바울의 논조로 보나, 진술의 내용을 보아도 바울을 흠잡을 만한 것이 없지만 동석한 베스도 총독과 여러 고관들의 입장을 살피면서 적당한 말로 사태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26:29 말이 적으나 많으나…모든 사람도 나와 같이 되기를. - 본문의 '말이 적으나 많으나'라는 것은 '말을 적게 하든지 많이 하든지 간에'라는 의미이다. 또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뿐만이 아니라 로마의 관원들과 성중의 높은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행 25:23). 그리고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라는 것은 '자신이 지금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자유를 잃어버린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라는 의미이다. 또 '나와 같이 되기를'이란 표현은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바울이 지금 비록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인해 죄수의 몸이 되어 있으나 모든 자들이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비록 쇠사슬에 묶인 몸이지만 그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반면에 바울을 결박하고 심문하고 있는 자들은 육체적으로는 자유하지만, 영적으로는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육사이멘 안토 데오)는 의미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기원문이다(롬 9:3).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예의 바르며 공손한 소원이 담긴 표현이다(Robertson). 비록 바울은 심문자들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결박당해 있으나 결국에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을 보면서 도리어 안타깝게 여겨 저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이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잘보여 준다. 성도들은 이처럼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아(눅 9:25)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 전도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
26:30 왕과 총독과…다 일어나서. - 본문에서 '일어나서'라는 것은 청문회가 끝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바울의 변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배석한 모든 자들이 더 이상 바울을 책잡을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청문회를 끝내고 만 것이다.
26:31 서로 말하되…사형이나…행사가 없다 하더라. - 바울에 대한 세 번째의 무죄 판결이다. 이미 바울은 로마법에 따라 무죄인 것을 천부장에 의해 확인받았고(행 23:26-29), 베스도 총독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행 25:25). 그런데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역시 배심원들과 더불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서 저자 누가는 바울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의 무죄성에 대한 공식적인 진술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였다(행 16:35-40; 18:12-17; 23:29; 25:25). 한편 비록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결박당하고 핍박을 받아야만 했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핍박이야말로 주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마 5:10).
26:32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다. -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무죄를 확인하고서는 바울이 이미 로마의 황제께 상소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와하고 있는 장면이다. 실제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은 상태라면 이즈음에서 석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상소는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태이든지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길 원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23:11). 또한 바울의 상소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고소를 종결짓는 상소였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로마에 상소하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어떤 구실을 찾아서든지 계속해서 바울을 법정에 세울 것이 뻔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상소한 이상 저들은 로마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더 극단적으로 말해 이 시점에서 바울이 석방되었다면 바울은 기어이 유대인들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상소함으로 로마에까지 안전하게 호송되어 복음을 전할 환경을 제공받게 된 것이다(빌 1:12-14; 4:22). 한편 아그립바 왕이 내린 바울에 대한 무죄 선언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번에 걸쳐 시행된 유대 및 로마의 재판에 대해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바울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독교가 어떠한 문제도 야기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정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그립바 왕과의 변론으로 말미암아 아그립바 왕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여러 번에 걸친 재판과, 로마의 황제에게 상소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된 최선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성도들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경륜과 인도하심이 함께 함을 믿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오직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어떠한 위기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시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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