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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거짓 사도들과 비교되는 바울의 자랑과 자기 자랑하는 이유 해명 및 수고와 고난으로 인한 사도 바울의 자랑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고린도후서의 본론 후반부로서 10:1-13:10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 즉 바울이 동일한 주제를 비교적 소극적 입장에서 다룬 전반부와 달리, 자신의 사도직 곧 사도권의 정통성과 그에 임하는 자신의 바른 자세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도권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강한 경고를 발하는 내용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본장은 좁게는 10:1-13:10까지의 일련 기사 중에서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자신의 사도권을 공고히 하는 10:1-:13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일련 기사 전반의 내용 전개를 개략 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0:1-11은 정통성을 가진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악의적으로 곡해하여 끝까지 바울을 불신하며 그의 훈계를 거부하는 일부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바울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그들을 향한 권징(勸懲)의 의지를 밝힌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이제 다시금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내지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일련 기사를 시작하는 간접적인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 10:12-18은 바울의 사도권의 정통성 또는 사도로서의 성실한 자세의 중거요 또는 자랑으로서 바울이 제시한 첫번째 사실인 고린도 교회 성도 각자가 바울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되고 또 성도로서 계속 성숙해 가고 있는 사실 자체를 보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11:1-15은 바울이 그 두번째 증거요 자랑으로 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때 자신은 오직 주의 복음만을 그것도 당연히 고린도 교우들로부터 영육 간의 대접을 받을 권리까지 포기하며 순전히 전한 사실과 사도로서 자신은 그 지식과 열정에 있어서 그 어떤 사도에도 뒤지지 않음을 제시한 사실을 보도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런 순전함과 열정을 악의적으로 호도하는 일부 고린도 교우들은 어리석고 완악하며 더욱이 바울을 배후에서 모함하고 있던 거짓 사도들은 악한 자로서 영원한 심판의 대상임을 밝힌 바울의 경고도 함께 보도한다. 한편 11:6-21은 삽입 기사로서 지금 자기가 이처럼 자신의 사도된 증거이자 동시에 사도로서의 자랑거리를 말하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해명을 보도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대다수의 고린도 교우는 그간 자기들 교회 내에서 발생하였던 몇몇 오류에 대한 바울의 견책을 듣고 들이켰으나 일부의 교우가 이제는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조차 불신하는 상황에서 부득이 자신의 사도직의 증거와 자랑을 말해야 하는 자신의 복합적 심경을 피력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불가피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11:22-33은 바울이 세 번째의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의 증거요 사도로서의 자랑으로 제시한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그가 겪고 또 극복해낸 극한 수고와 고난을 보도하고 있다. 이어지는 12:1-10은 바울이 밝힌 그 네번째 중거요 자랑으로서 놀라운 신비 체험과 특별 계시를 받았는데 그 체험의 위대함은 심지어 그로 인하여 바울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까지 주실 정도였다는 바울의 진술을 보도한다. 끝으로 마지막 15:11-13은 일단 사도권의 정통성에 대한 변론을 최종 마무리하는 단락이다. 바울은 여기서 새삼스러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사도권은 그 자체가 자명하나 다만 일부 고린도 교우들로 인하여 부득이 긴 변론을 행하였음을 다시 한번 밝힘으로써 오히려 더 확고하게 사도권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처럼 10:1-12:13의 일련 기사는 전체적으로 바울의 사도권 주장을 일관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세부 단락별 의의는 해당 강해주석에서,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 변호에 대한 전반적 이해는 제 11장 자료노트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개관에서는 다만 바울의 사도권 주장 관련 기사 모두가 전반적으로 보여 주는 구속사적 의의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바울이 자신의 직접 체험한 특별계시(特別啓示)나 신비체험(神禮體驗)에 대한 회고 등 여러 부분에서 직 ․ 간접으로 밝혔듯이 바울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파 그 소명의 본질얘 대하여 확고한 인식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바울이 거듭 밝히고 있는 바 멱안 중에는 교만과 나태의 유혹을, 반대로 극한 고통 중에는 배교와 소명 포기의 유혹을 물리치고 추호도 흔들림 얼이 자신의 소명에 일관된 자세로 헌신하였던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기실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즉 사도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기에 바울은 그 어떤 한계 상황에도 굽힘 얼이 사도로서 바른 자세로 일관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뿐 아니라 무룻 모든 인간이란 창조주 하나님처럼 스스로 무한한 초월자가 아니라 피조된 유한자인 바 그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인식과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그 인생의 모든 차원이 결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우리는 바울이 이재 구속사(救贖史)의 시대(時代)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전되는 비상한 시기에 예수님 이후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유일한 공동체가 될 교회의 모체인 초대 교회의 설립자로서 의 자신의 소명과 그에 따르는 구속사적 상급을 사모하며 위대한 삶을 살았듯이 우리 각자도 태초부터 종말까지, 아니 하나럼의 경륜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실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을 때만이 이 잠시의 나그네 인생길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구속사의 노정에서 하나님은 성도 모두에게 각각 그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케 하기 위한 크고 작은 소명을 주셨는 바 날마다 더욱 성숙해지는 신앙을 따라 더욱더 명료한 소명 의식을 가질 때, 우리도 바울처럼 나 자신에게 부여된 구속사적 소명에 꿋꿋이 헌신하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다시금 새로이 절대 무오하게 하나님과 인간, 우주와 역사 곧 구속사의 총체적 진리를 보여주는 유일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堅經, the Bible)의 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당위 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나는 성경을 통하여 구속사의 실체와 그 구속사의 노정에서 나에게 부여된 소명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아 천국을 지향하며 이 땅에서 내 소명을 다하는 역동적 삶을 살고 있는가?
외울 말씀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때 바울의 자랑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7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9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11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12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자기 자랑에 대한 해명
16 ○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바울의 수고와 고난으로 인한 자랑
22 ○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주제-11:5, 사도의 이해
행 1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11:10 성경의 진리 개념
요 16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11:4,5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
우리는 바울이 예수의 열두 사도(Apostle)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사도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태도와는 달리 바울 당시에는 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을은 여러 차례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거나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롬 1:1; 고전 9:1,2; 고후 11:4,5; 갈 1:1). 이제 이와 관련 바울의 사도권 변호에 대해 살펴보겠다. 한편 '사도'에 대해서는 이미 행 1장 자료노트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1. 바울의 사도권 변호의 배경
바울의 대적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의 사도권을 공격하였다. 첫 번째 이유는 바울이 예수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아니며 또한 사도됨의 요건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다니며 그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행 1:21,22). 두번째로는 바울이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구약 선민(選民)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도리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딘 집중한 자라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그가 당시 초대 교회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어떤 신임장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3:1).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대부분 유대주의적 이단인 율법주의자들로 구성된 바울의 대적자들은(3:14: 11:22)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그의 사도권을 집중 공격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적 이단 교리를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여러 초대 교회들에 심고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이를 반대하고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사상을 전하는 바울의 주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의 사도권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성도들이 이단
에게 미혹되지 않고 자신이 전한 기독교의 정통 교리 위에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이단들을 교회에서 영원히 축출해 내기 위해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2. 바울의 사도권의 증거들
① 기원: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분으로부터 직접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사도로 세움받은 자(행 9:-22)이다. 이는 바울 신도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갈 1:) 그의 사도권(Apostleship)은 다른 12사도와는 달리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주어진 것은 아니나 주께로부터 받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동일한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갖는다.
② 사도로서의 확신: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신적 기원을 갖는 것이며 사사로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위탁받아 전하는 것임을 누차 강조했다(롬 1:1,5; 11:13; 고전 1:1; 갈 1:1,17 등). 뿐만 아니라 바울은 교회들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순복할 것을 요구했으며(고전 4:9; 9:2), 서신서의 머리말에는 자신의 사도권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저함 없이 '거짓 사도들'(고후 11:13; 12:11)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담대한 태도들은 그가 자신의 사도권을 절대 확신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③ 타인의 중거들: 바울의 사도권은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되었음이 분명하다(행 9:26-30). 또 12사도들도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였다는 간접적인 증거를 성경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갈 2:8,11-14).
④ 바울의 사역에 나타난 중거들: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전도 사역과 교회 설립 등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것으로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였다(롬 15:14-21; 고후 12:11-13; 딤후 4:8,17).
3. 바울의 사도권 확립의 의의
바울의 사도권 확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로 중대한 의의를 준다.
첫째, 전 27권의 신약 성경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의 바울의 저작들이 사도적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들임을 확증해 준다.
둘째, 사도인 바울의 이방 선교 사역을 통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불문하고 택한 모든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알게 된다.
셋째,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분골쇄신하였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또 사도로서 남들 위에 군림하기보다 수고와 봉사로 누구보다 앞서서 다른 성도들을 섬겼던 교회 지도자로서의 그의 자세는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는 바 이는 그의 사도권의 확립을 통하여 보다 진실된 교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도표-11:1-21 사도 바울이 고발한 거짓 사도들의 행태
1.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에서 떠나 부패케 함(3절)
2. 참 사도가 전파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파함(4절)
3. 성도들이 받지 않은 다른 영을 받게 함(4절)
4. 성도들이 받지 않은 다른 복음을 받게함(4절)
5. 성도들을 교묘하고 간사하게 속임(13절)
6.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함(13절)
7. 의의 일꾼으로 가장함(15절)
8. 육체의 일을 자랑함(18절)
9. 성도들을 율법의 멍에로 옭아 맴(20절)
10. 스스로 자신을 높이며 교만함(20절)
지도-11:10 아가야 지방의 위치
원어연구-11:14, 가장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타스케마티조'( )로서, 이는 '메타'( )와 '스케마티조'( )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메타'는 '~후에', '~뒤에'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스케마티조'는 외적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해 '모양을 꾸미다', '겉모양을 꾸며 가장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따라서 '메타스케마티조'는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뒤에서 모양을 꾸미다'가 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마치 곤충이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그렇게 '모양을 바꾸다', '변화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나(빌 3:21) 대부분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수시로 바꾸는 행위나 자신의 실제 모습은 감춘채 겉으로 다른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가장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고전 4:5). 본문의 경우도 바로 후자에 해당된다.
여기서 바울은 사탄의 속성 중의 하나로서 그가 성도들 앞에 때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를 잘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또 14절에서는 사탄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꾼들도 의의 일꾼인 것처럼 가장시키는 일을 행함을 지적한다. 이러한 일들은 바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으므로 우리 성도들은 겉으로 나타난 사실들에 현혹되어 사탄이나 그 수하의 부하들인 거짓 선지자, 이단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요주제-11:14,15, 이단의 이해
요일 4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1:22-27 사도 바울이 고난받은 실례들
살전 2장 자료노트 참조
11:1-15거짓 사도들과 비교할 때의 바울의 자랑
앞장 마지막 단락(10:12-18)에서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의 증거요 자랑으로 고린도 교회를 제시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함으로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한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바울의 어조는 자못 강한데 그가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명예가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 사도들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잘못된 길로 인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사도는 복음 전파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사랑과 인내의 자세를 잃지 않지만.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 넣는 자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단호하게 대처한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자신과 그들을 다음 몇 가지로 비교해 보이고 있다. 첫째로, 바울 자신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열심을 내어 중매자의 역할을 했으나, 거짓 사도들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다(2,3절), 둘째로, 바울 자신은 비록 언변이 부족할지라도 영적인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나, 거짓 사도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웅변술에 능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5,6절). 셋째로, 바울 자신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를 지녔으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대접만을 받기 원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복음에만 전념토록 하려고 자비량 선교를 한 바울의 처사를 비난하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모함하기까지 했던 것이다(7-9절).
한편 바울은 자신과 거짓 사도들의 차이점을 열거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경계함 엄이 너무도 쉽게 그들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책망한다(4절). 그리고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려는 거짓 사도들의 어떠한 책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길에는 거칠 것이 없음을 확신있게 선포함은 물론(10절),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사도들이 바로 '궤휼의 역군'이며 '사탄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힘으로써(11-15절)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도 혹은 의(義)의 일꾼으로 가장하지만 실상은 세상적인 명예와 재물을 탐하는 자들에 불과한 자들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퉁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교회 지도자의 자질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고전 4:19,20).
②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만 불의한 지도자는 자기의 안위와 명예, 재물 따위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겔 33:6; 롬 16:17,18).
11:1 어리석은 것을…용납하라. - 전장(고후 10장) 전체에 걸쳐서 바울은 자화자찬에 가득차 있던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그런데 본장에 접어들면서 바울의 어조에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그 변화란 다름 아니라 바울 자신도 거짓 사도들과 같이 자기 자랑을 개진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사도가 자기 자랑을 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추악한 무리들을 분쇄하고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과 탁월성을 과시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대의적 진의(眞意)를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위를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자기 자랑이란 것이 결코 유익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할 바가 못된다는 바울의 평소의 소신에서(고후 10:12)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바울은 자랑할 수밖에 없는 정황에 놓여 있었다. 그 이유는 ① 고린도의 성도들의 대부분이 '거짓 사도들의 자랑과 거짓말'에 대해서 매우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왔으며, ② 위선된 거짓 사도들을 타파하는 방법으로서는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의 능력을 보여 주는 정공법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의 자랑에 호의적이고 동조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에(고후 12:11) 바울은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행위인 줄 알면서도 불가피하게 자기의 적대자들이 이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사용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다. 이러한 사상은 '용납하라'는 글귀에서 자세하게 밝혀질 수 있다. '용납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네케스테'( )는 '인내하다', '견디다'라는 뜻의 동사의 2인칭 복수 직설법 또는 명령법이다. 따라서 이는 직설법으로 해석하면 '여러분은 참고 있습니다'가 되고, 명령법으로 해석하면 '나에 대해서 참아주기를 바랍니다'가 된다. 한글 개역 성경은 후자의 문법적 해석을 취했는데(Calvin, Bengel, KJV, NIV) 전자의 문법적 해석을 주장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Meyer, Hodge, Alford). 명령법의 해석을 채택할 경우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간곡한 요청이 부각되고, 직설법으로 풀이하는 경우에는 사도 바울의 자기 자랑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무리없이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는 바울 자신의 신념이 강조된다. 여기서는 어느 것을 선택해도 의미의 전달에 크게 전환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다만 앞에서 일차 언급했듯이 어리석은 자랑에 어느 정도 수긍하였던 고린도의 성도들을 전제한다면 바울이 여기서 간절하게 요청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자기 자랑이 자연스럽게 수용되리라는 기대를 바울이 가졌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11:2 하나님의 열심히. - 바울의 자기 자랑이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본 구절 이하에 제시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의 명예나 이기적인 욕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들을 인도하며 감찰하시는 것처럼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한다. 특히 '열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젤로스'( )가 '열애', '질투'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 대목에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택하신바 된 이스라엘은 종종 하나님의 배우자로 묘사되었는데, 이스라엘이 다른 우상을 섬겨 영적으로 타락했을 경우에는 '영적 간음'으로 지적되기까지 하였다(렘 3:14; 호 4:12). 구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즉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향해 질투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처럼 바울 또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애정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중매함이로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배우자의 관계에서 이해했던 구약의 방식이 신약에서도 굴절되지 않고 그대로 투사되어 나타나있다. 물론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다는 말은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킨다는 의미로 축약될 수 있다(고전 12:12-27). 더욱이 본절에서 바울이 '한'(one)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구약 시대에 우상 숭배는 곧 '간음 행위'로서 정죄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영적 이스라엘인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로 서지 못하고 거짓 사도들의 유혹에 빠져 흔들린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부끄러운 행위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 그들의 믿음의 아버지라 할 수 있으며,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었다(고전 4:15). 그러나 그리스도의 배우자인 교회가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여 그 남편을 떠나게 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바울은 '혼인 관계'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오로지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진리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에덴 동산의 사건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고 있다. 따라서 '뱀'은 거짓 사도들을, '이와'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뱀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단'과 동일한 개념으로 통용되었으나, 여기서는 '사단'의 사자(使者)라기 보다는 '간계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사악한 세력을 나타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대목은 '뱀'이 아니라 '간계'라는 것이다. 뱀은 '간사하고 간교한 것'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여겨졌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적대자들을 '뱀'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의 거짓됨을 만천하에 폭로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상당수가 거짓 사도들의 속임수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된다.
너희 마음이…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아비였던 바울이(고전 4:15) 고린도 교인들의 행동과 거짓 사도들에 대한 그들의 호의적 태도에 대해서 깊은 우려와 관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일이다. 사실 바울은 당시에 무척이나 긴장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만일 거짓 사도들의 간사한 속임수가 고린도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긍정적으로 수용된다면 고린도 교회는 붕괴될 것이며, 그것은 곧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게는 실로 크나 큰 손실과 충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그러한 관심과 우려는 '두려워하노라'(포부마이)라는 문구 속에 농축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 발견되는 '진실함'과 '깨끗함'은 2절의 '정결한 처녀'와 관련된 상관어구들이다. 정결한 처녀는 한 남편을 위해서 진실함과 깨끗함을 지키고 보전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영적으로 그리스도께 신실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른 것에 집착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의 두려움이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타락과 관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처럼 급박한 정황에 처해 있었으므로 부득불 어리석은 수단일망정 '자기자랑'을 내세워 고린도 교회에 대한 긴급 처방을 내리게 된 것이다.
11:4 본절은 바울의 우려에 대한 이유와 또한 바울의 자기 자랑이 고린도 교회에서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바울 자신의 암묵적인 요구를 말한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들의 가당치 않은 자랑에 미혹되었음을 일면으로 풍자하면서 자신의 자랑이 마땅히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예수…다른 영…다른 복음. - 예루살렘에서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예수를 전파했다. 이는 신앙의 대상자인 '예수'가 또 하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과 거짓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믿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다른 예수를 전파한다고 지적했는데 이 말은 갈 1:6-9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은 대개의 경우가 '유대주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인용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적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몰래 빠져나온 자들이라는 사실을 검토해 보면, 거짓 사도들이 '유대주의'의 전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상반되는 이설(異說)을 전파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도 우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영향력 있는 추석가들은 거짓 사도들이 전파한 다른 예수가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단정하기를 꺼린다(Morris, Barrett), 더욱이 '다른 영', '다른 복음' 등 '다른 예수'에서 파생된 개념들을 규정하는 과세가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의 일기를 보이고 있지 못하다. 다만 문맥의 흐름과 갈 1:6-9까지의 내용을 참고로 삼아 추론컨대, 바울의 적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서정을 인정하기 꺼리는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의 한 부류일 것으로 보여질 뿐이다(갈 1:4).
잘 용납하는구나. - 선후 문맥의 관련 속에서 보면 이것은 칭찬과 격려가 아닌, 풍자와 비난의 어구임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비꼬는 어투를 통해서 자기의 자랑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가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자랑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리라는 바울의 확신은 이미 1절에서 밝혀진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고린도 교회의 경거 망동을 지적하는 의미가 첨가되어 나타나 있다.
11:5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없는 줄 생각하노라. - 본절에서부터 비로소 바울의 자기 자랑이 본격적으로 개진된다. 바울은 우선 자기의 사도권에 대한 정통성 문제를 확고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소위 '지극히 큰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기의 사도권이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정통성과 권위에 입각해 있음을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이 언급한 지극히 큰 사도들이 실제적으로 어떤 인물들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의견이 양립하고 있다. 첫째는 칼빈(Calvin)과 크리소스톰(Chrysostom) 등 초기의 주석가들이 주장했던 견해로서 지극히 큰 사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목격했던 열두 사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대에 이르러 핫지(Hodge), 캐제만(Käsemann)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는 바, 이들은 사도 중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을(갈 2:9) 지극히 큰 사도라고 풀이하였다. 둘째는 현대주석가들의 상당수가 지지하는 해석으로서 지극히 큰 사도들을 유대주의의 거짓 교사들, 즉 거짓 사도(13절)라고 보는 것이다. 렌스키(Lenski), 모리스(Morris), 파랄(Farrar) 등의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는데,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을 비꼬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불트만(Bultmann) 같은 이는 바울의 의도적인 과장된 표현을 부각시켜서 사도 바울이 어리석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자의 견해 중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바울이 13,15절에서 지극히 큰 사도들을 사단의 중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 사단의 종과 동일시되는 모순이 생기게 되고,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굳이 사단의 일꾼인 거짓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을 그들과 비교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해리스(Harris)는 양자의 견해를 모두 거부하고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는 어구는 바울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고도에 침입한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을 지칭해서 자기들의 자만심을 과시하려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 교회의 샤도들을 지극히 큰 사도라 여기지 않았고 다만 거짓 사도들이 우쭐대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지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도 일면 설득력을 가지지만 그 어조는 전자의 주장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이상과 같이 '지극히 큰 사도들'의 정체에 대해서 이견이 대립되었는데 어느 하나를 확정해서 말하기는 어렵고, 타당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후자의 견해가 유력하다. 즉 바울은 자칭 위대한 사도라 주장하는 자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항상 겸손과 겸비한 태도로 주의 사역에 임했지만 그 스스로는 그 어떤 사도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11:6 비록 말에는 졸하나. - 이 표현은 선행절(5절)에서 밝힌 바울의 자신감과 반대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5절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자기의 사도권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천명했는데 바로 뒤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모순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5절의 '선언'에 부가된 어구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문구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6절이 5절의 선언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에는 졸하나'라는 평판이 과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고린도에 침입한 거짓 사도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냐 하는 '출처'를 가리는 문제이다. '졸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이디오테스'( )는 본래 정치나 공적인 사건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인 사람을 지칭했는데, 후에 그 의미가 변용되어 특정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 즉 훈련받지 못한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을 가리켜 '말에는 졸하다'라고 평가한 사람들은 그의 수사학적인 웅변술을 문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이 말이 고린도에 침입한 바울의 적대자들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고린도에서 바울이 수사학적인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않았던 것이 아마도 바울의 언변술과 그의 능력을 불신하는 계기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궤변 철학자들의 온갖 장광설(長廣舌)과 화려한 언어 구사에 길들여진 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바울은(고전 2:1,2) 다소간 언어 구사에 능숙지 못한 자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에게 연어 장애가 있기나 그의 어투가 어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쉽게 매료되던 헬라의 철학을 강의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만을 전파했을 뿐이다. 이것이 곧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이 말에 서툰 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의 성도들은 바울의 언변술에 대해서 시종 일관불만족스러운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인데(고후 10:1,5,7,10),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외면에 치중하는 태도를 공박하는 한편 그들의 편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 그들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대목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편견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논지는 그들에게 양보하는 자세에서 끝나지 않고 적극적인 논박의 형태로 진전된다. 이것은 다음 문장에서 그가 '지식'을 거론하는 데서 확연하게 보여진다.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만약 '지식'을 인간의 내면세계라 하고 '말'을 그 내면이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면, 바울은 '말'이라는 형식보다는 '지식'이라는 내용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인용한 '지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지식'이라는 단어가 매우 다양한 함축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 의미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구절의 '지식'을 영지주의자들이 신봉하던 '신비한 지식'과 동일시하려고 하였다(Barrett). 그러나 본절의 전후 문맥을 고려해 보아도 사도 바울이 소유한 지식이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식이 아님은 분명히 나타난다. 그렇다고 그 지식이 일반적 의미에서 통용되는 백과사전적 지식은 더욱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추구하고 선호하던 철학적 사변이나 수사학적인 웅변술을 구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소유한 지식은 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그에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6-11; 갈 2:2). 이같이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소유한 이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신적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사도권을 주장할 수 있고 이 사실을 근거로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언급한 '말'과 '지식'의 문제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차원에서 보다는 바울이 소유한 지식의 완벽성과 신적권위를 밝히는 수준에서 풀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11:7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 바울의 겸손한 태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배려로써 작용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주는 것을 꺼려하였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배려를 넘어서 고린도의 성도들이 오직 복음에만 전념하도록 하게 하려는 바울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발로였다. 즉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하루 속히 그리스도의 복음에만 매진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자신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도를 봉양하는 의무를 면제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죄를 지었느냐. - 고린도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서 바울의 진실한 배려가 오히려 바울의 적대자들과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바울을 힐난하는 자료로 악용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 성숙에 최대의 관심을 두고 그들에게서 일체의 사례금을 받기를 거절하였는데, 거짓 사도들은 이를 꼬투리 잡이 ① 바울의 사도권에 결함이 있으며, ②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서 물질적인 보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바울 자신도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고전 9:4-14). 그러나 바울은 특별히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그들에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고린도에 침입한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봉사와 전도에 대한 물질적인 대가를 충분히 받아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서 성도들의 공궤를 받는 것이 사도직의 정통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깊은 애정과 관심을 오히려 매도했던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의 2차전도 여행 시에 고린도에 체류하면서 고린도 교회가 아닌 마게도냐 교회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전도 사역을 하였으며(행 18:1-5), 3차 전도 여행 시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의 회합에서도 누구의 원조를 받기 보다는 자기의 생업, 즉 천막을 만드는 일에 기초해서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하였다(행 20:33-35). 이는 바울이 가능하면 전도 사역지에서 복음 전파의 대상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사랑에서 기인한 바, 이러한 현상은 아가야 지역의 선교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관심과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바울이 고전 9:4-18에서 성도들의 공궤를 거절하는 자기의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의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회의하게 된 데에는 당시 유행하던 헬라 철학의 순회 교사들의 악습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강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강료를 요구하는 직업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익숙해진 고린도의 성도들은 바울의 겸손과 배려를 사도직의 결함이라 생각했다는 말이다. 복음을 값 없이 전파한 것이 죄가 되느냐는 바울의 반문은 고린도 성도들의 무지와 경솔함을 질책하는 각도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자기가 낮아짐으로 남을 높이는 바울의 삶의 태도-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인 바-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깨달아야 했다.
11:8 다른 여러 교회. -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개척을 할 때에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그에게 많은 연보를 하였다(행 18:5). 그 중에서 특히 빌립보 교회가 이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14:15,16),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 이 구절은 선택점의 '복음을 감 없어 너희에게 전함으로'라는 문구에 관련되어 고린도 교회의 개척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요'를 받는다는 것은 '급료', '뽕'을 받는다는 뜻인데 바울은 그것이 곧 '강탈한 것'이라는 어색한 고백을 하고 있다. 여기서 실제로 마음이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정기적인 사례를 받았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며, 다만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디모데와 실라를 통해서 보내온 전도 후원금을 바울이 '요'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울은 왜 전도 후원금을 탈취했다고 표현했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제시 되었다. ① 마게도냐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자기들을 목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을 공궤할 의무가 전혀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보내온 연보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라 표현했다(Morris). ② 이것은 단순한 비유일 뿐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따라서 '탈취'라는 의미를 축소시키고 '대신'이라는 전치사를 삽입시켜야 한다(Hodge). ③ 마게도냐 교회들은 바울에게 전도 후원금을 후송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헌금을 하였다. 바울은 차마 그러한 연보를 받을 수가 없어서 '탈취'했다고까지 말한 것이다(Lenski). 이 가운데 마지막 견해가 설득력을 지닌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궁핍을 고려한다면(고후 8:2) 바울이 그러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토록 받기가 미안한 헌금을 받으면서까지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배려하고 부담을 덜어주려했던 바울의 목회적 관심이 이러한 표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로 고린도 교회의 설립은 바울의 자기희생적인 헌신과 마게도냐 교회들의 정성어린 연보에 기초해 있음을 알게 된다.
11:9 용도가 부족하되. - 사도 바울의 궁핍한 생활상을 보여 주는 어구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체류하는 18개월여의 기간 동안 아굴라와 함께 천막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일상 생활비를 충당하였는데 그런 노동에서 나오는 금액은 매우 부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핍절한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이 때마다 마게도냐 교회가 보내온 전도 후원금이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 - 마게도냐는 특정한 도시가 아니라 광범위한 지역을 총칭하는 지명인데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등의 교회(행 17:10-15)가 설립되어 있었다. 고후 8:1 주석 참조. 그런데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여러 가지 환경의 제약으로 매우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보에 대해서 열심있는 태도를 보여 왔는데 그 가운데서도 빌립보 교회는 특별히 바울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 풍성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빌 4:15,16). 사실 생업에 종사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역을 병행하던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파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한 것도 바로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가져온 '정성어린 연보'의 덕택이었다(행 18:5; 살전 3:6).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살라는 빌립보에서 각각 연보를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이는데 바울은 이 사실을 계속 강조하면서 고린도의 성도들이 자신의 그러한 자세를 충분히 숙지해 주길 요구하고 있다. 한편 1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의 자랑은 5,6절에서 사도직의 정통성과 권위를 주장하는 대목과 함께 7-9절에 걸쳐서 고린도 성도들의 사례를 거절하는 데 대한 적절한 해명으로 일차 마무리된다. 그리고 본절 이하에서는 전도자로서의 바울 자신의 각오와 의지, 그리고 거짓 사도들에 대한 공격과 폭로가 전개된다.
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 바울이 아가야 지역에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바울 스스로에게 자랑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아가야 지역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를 자랑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자랑이 결코 방해 받아서는 안되고 널리 전파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막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프랏소'( )는 매우 강력한 어조를 나타내는데 길이나 수로를 '차단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잠 25:26; 호 2:6). 더욱이 '아니하리라'라는 어구는 '절대로 막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결국 본절에는 '아무도 이 자랑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바울의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진리-인간들을 부요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핍절하게 된 것-를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행함으로써 사도로서, 목회자로서의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숭고한 희생을 오해하던 무지한 세력에게 무기력하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태도와 자세를 확고히 견지해나갈 것임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11:11 어떠한 연고뇨…하나님이 아시느니라. - 10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태도를 끝까지 철회하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아가야 지역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방침은 관철되리라는 결단을 보였다. 본절에는 바울의 봉사와 희생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즉 ① 무보수 봉사는 바울의 사도권에 결함이 있다는 증거이며, ②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애정이 없다는 주장 가운데 두 번째 사항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어 있다. 바울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게 호소함으로써 자기의 희생과 배려를 하나님이 아실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이는 단순히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라는 애매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컨대 하나님은 나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을 아실 것이다' 라는 자신감과 담대함의 표현이다.
11: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 본절부터는 거짓 사도들의 음흉한 흉계를 폭로하는 내용들이 전개되는데, 먼저 바울은 자신의 목회 원칙 특히 사례에 관한 자신의 태도가 이전과 변함이 없을 것임을 단언한다. 거짓 사도들이 취임하기 전에 바울은 다른 지역의 교희들 보다 심각한 죄에 것이 있던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각성과 신앙의 성숙을 북돋기 위해 그들에게 사도를 공궤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고 자신은 궁핍한 생활을 지속했었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이 침입하여 그의 무보수 봉사를 빌미로 자기를 적대하는 정황 속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원칙을 그대로 관철시킬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기회를 끊어. - 거짓 사도들은 집요하게 바울을 공격하였다. 그중 가장 예리한 비수를 맞은 부위는 바울의 무보수 봉사였다. 거짓 사도들은 무보수 봉사를 사도직의 결함으로까지 확대시켜 바울을 매도했는데, 그들이 하필 왜 바울의 무보수 봉사를 꼬투리 삼아 논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해석이 제시되었다. ① 그들은 사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도직의 표식이라 생각하고 보수를 사양한 바울을 진정한 사도가 아닌 자라고 모함하였다. 이렇게 바울에게 압력을 넣어 그로 하여금 사례를 받게 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린 다음에 바울과 자기들을 동일한 선상에서 평가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례문제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즉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태도를 무너뜨려 자기들과 비슷하게 조작한 후에 자기들이 진짜 사도처럼 행세하기 위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해석이다(Lenski, Harris). ②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많은 돈을 벌어 일신상의 영달을 누리려는 목적으로 복음 전파의 사역을 자청했다고 비난하였다. 이를 익히 인지한 바울이 그들에게 비난받을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무보수 봉사를 한 것이다. 즉 거짓 사도들은 바울에게 사례를 받도록 조장해서 자기들이 설치한 올가미에 바울이 빠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해석이다(Hodge). 전자의 해석을 취하면 거짓 사도들의 기회는 곧 자기들이 진짜 사도 행세를 하려는 것이고,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전도 사역을 바울의 경제적 사업이라 매도해 그를 파멸시키려 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아무래도 전자의 풀이가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적대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사도 바울이 무보수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간계를 미리 간파하고서 그의 무보수 봉사를 지속함으로써 자기와 거짓 사도들의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 보이는 동시에 그들이 노리던 기회를 봉쇄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와 같이 되게. - 앞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간계를 고발하면서 자기의 목회 방침이 계속 고수될 것임을 밝혔다. 그런 후에 바울은 여기서 거짓 사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즉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 사도권의 합법성, 고린도 교회의 목회권에 대한 적법성, 그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사례금 등에 대해서 자랑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바울은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사심없는 순수한 열정으로 전도 사역에 임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11:13 거짓 사도요…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고린도에 침입한 적대자들의 정체가 만천하에 폭로된다. 바울은 마침내 그들의 실체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혔다. 여기서 '거짓 사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는데 '거짓 사도'(프슈다포스톨로이)라는 특정한 집단이 존재했던것은 아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에 침입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만들어 불렀던 용어가 점차로 고유명사화된 것이다(Robertson). 복음서에서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라는 용어가 발견되기도 하는데(마 24:24: 막 13:22) 이들은 다같이 진리를 가장한 사단의 추종 세력이라는점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어쨌든 바울이 그의 적대자들을 '거짓 사도'라고 규정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① 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을 받아 정통성과 권위, 성령의 풍성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 바, 적대자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② 참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지만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전했다(롬 16:18). ③ 두 번째 이유와 동일한 것으로써 참된 사도는 사심 없는 자기 희생을 보이는데 적대자들은 자기의 일신상의 이익을 위해 '봉사'와 '희생'을 가장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혼란시킨 무리들은 아가야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았다. 바울의 서신을 근거해 보면 로마(롬 16:17,18)와 소아시아 지역(딛 1:10,11)에도 이런 무리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도 거짓 사도라 칭할 만한 유사 집단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계 2:2).
11:14 사단도… 천사로 가장하나니. -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형태를 사단에 비유하고 자신을 광명의 천사에 비유한다. '광명의 천사'란 항상 빛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를 가리킨다(요 8:12; 요일 1:5). 사단은 실로 간계하여 천사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유대인의 묵시 문학 중에 '모세의 묵시록'이라는 글에는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는 사단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글의 저자는 사단이 천사들 속에 숨어들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사도 바울이 유대의 묵시문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천사로 가장하는 사단의 간악한 모습이 당시 유대인에게는 일반적인지식으로 수용되고 있었기에 바울이 그러한 비유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거짓 사도들을 '사단'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표현법은 3절을 연상시키는데 본절의 '사단'과 3절의 '뱀'이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대명사로 사용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있다. 즉 바울은 현재의 정황을 표면적으로 기술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가 바울과 거짓 사도의 대립을 하나님과 사단의 대결 구조로 구도화하고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자신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임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단순한 교회의 훼방꾼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궤사를 행했으므로(4절: 갈 1:8,9) 바울에 의해 비난받고 정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유대에서 고린도에 숨어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이처럼 가혹한 공격을 퍼부었는데, 이는 그들이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돌림과 요구를 준행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이방인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에게 강요하여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대적자들과 궤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하는 사단의 흉계임이 틀림없다(4:9; 5:4).
11:15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 - 본절은 14절에서 밝힌 사실에 덧붙여서 사단의 간교한 모습을 재차 폭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행세하는 것처럼 사단의 일꾼들 또한 의의 일문으로 가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외의 일문'을 율법적 의미에서의 '의'(義)의 일꾼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즉 사단의 일꾼들이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로 가장했다는 뜻이 아니라(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거스리는 자들이 마치 자기들만이 유일한 구원의 교사인 양 행세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의 일꾼'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대치시키면 본절을 이해하기에 한층 용이할 것이다.
11:16-33 자기 자랑에 대한 해명 및 수고와 고난으로 인한 바울의 자랑
앞단락(1-15절)에서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자신이 진정한 참사도임을 입증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그가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고난과 수고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자랑으로 제시한 세번째 사실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듯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자신의 공로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됨이 거짓 사도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월등함을 변증하기 위함이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의 허탄한 자랑에만 현혹되어 진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바울자신과 복음을 무시하자 부득불 그들의 양육을 위하여 '자랑'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거짓사도들의 외적 조건만을 보고 거짓 복음에 현혹된 고린도교인들이 돌이켜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16-21절).
한편 주의 사역에 대한 헌신과 수고에 있어서 아무도 바울 자신을 능가할 수 없음을 변증하기 위해 본문에 열거된 바울의 고난(22-33절)은 이미 고후 6:4,5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만큼 극심한 것들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생애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받은 사명 곧 복음 증거를 위해 온전히 바친(행 20:22-24)바울이 아니고서는 결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바울을 비난하고 모함하던 거짓 사도들로서는 도무지 바울이 당했던 것과 같은 고난을 겪을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달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이와 같은 차이점이 바울의 사도권을 증명해 주고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시킨다고 할 수 있다. 참으로 고난이 닥치기 전에는 과연 누가 진정한사도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또한 진실된 상도의 명목상의 신자를 가려 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결코 우리는스스로를 참된 복음 사역자니 정도로 여기지는 안 된다1:24).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 땅에서 우리가 쉬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우리의 신분을 입증해주고, 또한 우리의 신인 인격을 좀더 성숙하게 단련시키시 주님을 위해 더욱 새롭게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비울이 진실로 자랑하는 것은 화려한 육적 조건이 아닌 인간적 나약함이었다는 사실이다(30절). 곧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외적 조건이 아닌 나약함을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주의 사역자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의 모든 업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겸손함을 잃지않는다(고전 15:10).
11:16 다시 말하노니. - 바울은 1절에서 본장에는 자기의 자랑이 개진되리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러한 자랑이 결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는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는 평소의 소신대로(고후 10:12) 자기의 행위를 어리석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후에 5,6절에 걸쳐서자기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공언하고 7-12절까지는 자신의 사도권을 둘러싼 시비에 대한 변론을 스스로 가한 후에 13-15절에서는 고린도에 침입한 거짓 사도들을 '상단의 일꾼'이라 정죄하기에 이른다. 본절의 '다시'라는 어구는 6절에서 잠시 중단되었던 그의 자랑이 이하의 문맥 속에서 개진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 1절에서부터 개시된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이 일단 6절에서 중단되고 다시 본절에서부터는 자랑이 계속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1절과 16절이 의미상 모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1절에서 자기의 행위를 어리석다고 인정한 바울이 16절에서는 태도를 바꾸어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절과 16절을 비교해 보면 두 구절이 상반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케 된다. 바울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임을 잘알고 있었다. 자랑이라는 것이 바울 자신의 성격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리스도의 사도인 그에게 도저히 합당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낮은 수준에 처해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서 바울은 부득이 '자랑'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절). 그러나 바울의 자랑은 진정 자기 자신의 지혜와 신비한 은사를 과시하기 위한 외면상의 자랑이 아니었다.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그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된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렇게 깊은 바울 사도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바울을 거짓 사도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인식하였다. 이처럼 외면만을 중요시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자기의 자랑의 진의를 깨닫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더라도 받으라. -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일면 양보하는 듯한 바울의 태도가 엿보이는 구절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자기를 그저 자랑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판단한다 해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랑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은 '만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든 그런 사람으로 쳐 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좀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11:17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 본절의 문자적인 의미는 '주님의 명령과 뜻에 따라서 하는 말이아니다'이다. 이는 곧 '자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말이다. 앞에서도 심각하게 논의했거니와(7-9절)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희생의 행동을 자기 행위의 표본으로 삼아 살았는데 그리스도에게서는 '자기 자랑' 이란 것을 찾아 볼수가 없었기에 바울은 스스로 현재의 행위가 사도로서 합당치 못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인간적이고 육적인 자랑을 할 수밖에 없는 바울의 입장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랑이 결코 사도로서 할 것이 못되지만 자기는 부득불 자랑할 수밖에 없다는 바울의 변명이 역설적으로 대변되는 어구이다.
11:18 육체를 따라…자랑하겠노라. - '육체를 따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 텐 사르카' ( )인데, 전치사 '카타'( )는 '~에 관해서'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거짓 사도들은 육체를 따라, 육체에 관한 것들을 자랑했다. 저들은 육적인 외부 조건들, 즉 인종이나 민족, 가문이나 지위, 혈통, 히브리적인 정통성 등에 지대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자기들 스스로 자족한 나머지 우월감과 특권 의식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고백하였다(갈 5:24). 그런 바울이 다시 육체를 따라 자랑한다는 것 또한 모순점이 있는 듯하나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염려와 배려를 이해한다면 바울의 태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한편 본절의 '육체'를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해석하고 상반절의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와 하반절의 '나도 자랑하겠노라'를 문맥상 전혀 무관한 문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Hodge)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육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 왔는데 거짓사도들처럼 자기들의 육체적인 조건들을 자랑하자면 바울은 그들에게 조금도 뒤질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 핫지(Hodge)의 해석처럼 거짓 사도들의 자랑을 인간 본성의 타락이라 규정하고 그들의 육체를 따른 자랑과 바울이 이제 표명했던 바 자랑을 완전히 다르게 구분하려는 시도는 다소간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바울 스스로가 본절 이하에서 육체를 따라서 혈통과(22절) 자기의 업적, 권위 등을(23-33; 고후 12:1-13)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1:19 지혜로운 자로서…용납하는구나. -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풍자와 비난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이다. 바울이 이미 밝힌 것처럼 고린도인들은 학식과 지혜가 풍부하였는데(고전 1:5; 10:15) 지혜있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을 관용으로 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의 지혜와 관용을 칭찬하려는 의미보다는 거짓 사도들의 궤사에 쉽사리 미혹된 그들의 무분별한 지혜를 풍자하고 오히려 바울에게 대적하였던 고린도 성도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비난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11:20 종을 삼거나. - 본절에서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저질렀던 악행이 일일이 열거되고있다. '종을 삼거나'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둘로이'( )는 신약에서 본절과 갈 2:4에서만 사용된 용어인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여 그들을 율법의 속박에 매이도록 유혹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도 역시 그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종을 삼는 것'이 단순히 율법에 종속되게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거짓사도들이 고린도 성도들을 문자 그대로 노예로 삼아서 자기네들이 모든 생활면에서 상전 행세를 하려 한다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하겠다.
잡아 먹거나. - 거짓사도들은 자기들의 꾀임에 빠진 자들로부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물질을 갈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잡아 먹는다'로 옮겨진 헬라어 동사 '카테스디오' ( )는 '먹어 버리다', '삼키다' 등의 어원에서 유래되었는데 복음서에서는 과부의 재산을 착취한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예수께서 책망하시는 장면에 이 단어가 인용되었다(막 12:40; 눅 20:47).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성도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거짓 사도들의 악행과 자원하여 무보수로 희생 봉사하는 바울의 헌신이 대비되는 어구이다.
사로잡거나. - '사로잡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바노'( )는 새나 짐승을 덫으로 잡거나 물고기를 그물로 잡듯이 미끼를 던져서 사람을 속이는 경우에 사용 되었는데(눅 5:5), 여기서는 거짓 사도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자기들의 우월성에 대한 자랑, 수사학적인 언변술 등에 의해서 고린도의 성도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미혹되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자고하다 하거나. - '자고하다'의 원어 '에파이로'( )는 '쳐들다', '자신을 높이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이는 '자랑하다'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띤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너희들에게 뽐내다'(lords it over you)라고 풀이하기도 하였는데(Plummer) 단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을 깔보는 행위를 지칭한다 하겠다. 거짓 사도들이 스스로 사도직에 올라 오만한 태도로 고린도 성도들을 상대했던 것을 바울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뺨을 칠지라도. -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은 피해 당사자에게 결정적인 모욕감을 안겨주는 행위인데(막 14:66; 행 23:2) 이 구절이 실패로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성도들의 뺨을 때린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은유를 나타내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현대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은유보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더욱 강하다고 풀이하는 추세에 있다. 즉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자기네 노예로 삼을 뿐 아니라 폭력 행사를 주저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거짓 사도들의 폭력 행사를 사랑의 표식이요 사도권의 정당한 행사라고 여긴 나머지 그들의 폭력에는 순응하면서 사도 바울의 진정한 사랑은 거부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폭행 당하는 자를 참 선지자로, 모욕을 하는 자를 거짓 선지자의 표지로 여기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왕상 22:24; 마 5:39), 바울은 이런 점에서 폭력과 구타를 절대적으로 금지하기도 하였다(딤전 3:3:1:7).
11:21 우리가…욕되게 말하노라. - 본절에서 바울이 '욕되게 말하노라'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의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① 자기에 대해서 자랑하는 일 자체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Alford, Hodge). ② 거짓 사도들의 포악한 행동을 용납했던 고린도성도들을 바울이 심한 욕설로 책망했기 때문이다(Chrysostom, Calvin). 이중 전자의 해석이 긍정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거짓 사도들처럼 가장된 권리를 주장하며 성도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은 곧 자기의 약함에서 기인한다고 고백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조 역시 다분히 풍자하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되었음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바울은 풍자적 어조로 자신을 약하고 부끄럽다고 말하면서 거짓 사도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연결되는 구절에서 바울의 공격이 전면적으로 전개된다.
11:22 본절은 바울이 자신의 혈통에 대해서 자랑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울은 여기 말고도 간혹 자기 자랑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었다(고후 10:8; 11:1). 이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그의 적대자들의 악행에 맞서기 위해서는 불가불 감수해야 할 과제였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네들의 혈통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바울 역시도 혈통적으로 그들에게 뒤질 것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히브리'라는 명칭은 문법적으로 히브리어의 '이브리'( )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브리'는 '저편에', '건너편에'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브라데 강 저편에서 온 자'임을 지칭할 때 붙여진 이름인데 (창 14:13; 수 24:3) 점차로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을 구별하는 고유명사로 그 의미가 전용되었다. 그런데 행 6:1에서는 '히브리'라는 단어가 헬라어를 말하는 '헬라계 유대인'과 히브리어를 말하는 '유대 본토 유대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히브리인이라는 단어는 팔레스틴 출신의 유대인들 곧 아람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팔레스틴에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데 인용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그들이 항상 유대 본토 유대인과 헬라계 유대인을 첨예하게 구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나 문화권의 영역이 아니라 '순수한 혈통'의 자손이냐 하는 것이었다. 어떤 당사자기 팔레스틴에 신고 있느냐 디아스포라(Diaspora: 팔레스틴에서 뛰이지 나와 뿔뿔이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총칭)냐 하는 것은 여기서 그리 중요치 않고 그 사람이 유대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 거리가 된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자기 지신이 혈통적으로 순수하며 조상들의 유전으로도 결함이 없는 순수한 유대인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는 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지는데(창 32:28), 이 이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선택받은 민족과 선택하신 주권자, 소유물과 소유자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히브리'가 혈통적인 인종을 지칭한다면 '이스라엘'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인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혈통적 유대인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바울은 믿음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적 이스라엘의 구성원이라고 천명하였다(롬 9:6; 갈 6:16). 한편 본절은 앞의 '히브리인'과 관련된 일련의 반복어구로써 바울이 그의 반대자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주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 아브라함의 씨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역시 '히브리인'에 연결된 반복어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구절이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였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언약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2:2). 물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축복이 임하리라는 이 약속은 육의 자손에게 해당되지 않고 믿음의 자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것인데(갈 3:7,29), 유대인들은 이러한 축복을 자신들만이 독점한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다(요 8:33; 롬 9:7). 주지하다시피 바울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편견을 타파하고 진리를 제시하였지만(롬 9:6-13; 갈 3:16,19), 거짓 사도들이 집착하던 조건들에 따른다 해도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환경과 조건을 자기가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시할 필요가 있었다.
11:23 저희가…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 선행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출신 성분이 정통 유대인이며 그 혈통 또한 유대주의자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어 본절 이하에서는 사도의 업적에 관한 진술들이 개진되는데(23-29절) 이로써 자신이 거짓 사도들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본절을 시작하며 자기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얼마나 희생하고 수고했는가를 말하는데 바울은 그런 자신이 '정신없는 말'을 한다고 표하였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미친 사람의 맛 같겠지만' 이라고 옮겼는데, 이는 자랑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바울의 평소의 소신을 잘 나타내 준다고 생각된다. 한편 바울이 자기 자신과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들이 실제로 누구였느냐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는 본절에서 바울이 특징한 집단을 지칭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거짓 사도들 말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상대로 하여 이중의 싸움을 벌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Barrett). 물론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궤휼의 역꾼, 사단의 일꾼이라 지칭했으므로(13-15절) 본절의 그리스도의 일꾼을 거짓 사도가 아닌 다른 제 3의 집단으로 생각하려는 의도는 인민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꾸미고 행세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15절) 그의 반대자들이 그렇게 자처했던 것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보인다(Plummer, Short). 바울은 적대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로 자기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헌신과 봉사에 충성을 다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 그리스도의 일꾼의 표지(標識)는 그를 위한 수고나 다름없다. 사실 바울은 거짓 사도들보다 더욱 많이 더 충성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수고가 넘쳤다는 것은 거짓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넘치도록'은 비교급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의 수고가 곧 양적으로 우세하다는 뜻이 아니라 거짓 사도들의 허황된 욕심과 바울의 수고는 질적으로 궤(軌)를 달리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의 수고는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과된 것인 바, 그러한 수고야말로 그리스도의 일꾼됨을 증명하는 빙거인 것이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할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바울이 투옥된 것이 기록된 것은 단 1회에 지나지 않는다(행 16:23-40). 물론 예루살렘(행 22:29), 가이사랴(행 23:35), 로마(행 28:16-31) 등의 지역에서 투옥된 기록이 있으나 이 사건들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다음에 발생하였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기의 고난을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의 투옥 사건을 일일이 보도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바의 투옥 사건을 생략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의 클리멘트(Clement)는 A.D. 96년 고린도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바울이 일곱 번이나 옥에 갇혔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경의 기록과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아무튼 바울의 자전적인 고난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살펴볼 때 그의 생애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한 내용보다 훨씬 다채롭고 고난에 가득찬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매도 수없이 맞고…죽을 뻔하였으니. - 바울은 이미 고후 6:4-10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의 표지로서 험한 수고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는데 거기서는 옥에 갇히는 것, 매 맞는 것,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등을 말하였다. 본 어구는 그 진술을 반복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다음 구절 이하에서 비록 한정된 부분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고 있다.
11:24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았다는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오지는 않지만 바울은 스스로 다섯 번이나 이런 태형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태형은 40대로 제한되었는데(신 25:1-3) 율법의 해설서인 '미쉬나’(Mishnah)에는 매질의 횟수를 헤아리는 사람이 자칫 실수하여 41대까지 때리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39회까지만 때리도록 규정하였다. 그래서 태형은 39대만 때리도록 법적으로 규제되었는데 그 고통이 극심하여 대부분의 죄수들은 39대를 맞기 전에 목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태형의 집행은 회당에서 있었는데(마 10:17; 막 13:9) 랍비들의 규례에 의하면 죄인의 두 손을 결박하여 기둥에 묶고 양 어깨와 가슴을 벗겨놓고 소가죽을 엮어 만든 가죽 채찍으로 13회씩 3회에 걸쳐서 태형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면서 그 죄수 앞에서 시편이나 신명기 등을 낭독하기도 하였는데(Josephus) 이렇게 율법의 정신을 외면한 지나친 형식주의와 율법 준수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철저하게 공격되기도 하였다(막 7:6-23). 아무튼 여기서 복음 전파를 향한 바울의 집요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이런 극형을 5회씩이나 감수하면서까지 그는 복음전파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 태장(笞杖)은 가죽끈의 끝에 납덩어리를 매달아 그 부분으로 매질을 가하는 형벌인데, 로마인들이 노예나 이민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다. 태장 역시 유대인의 매질과 마찬가지로 그 고통이 극심하여 살이 찢겨지고 피가 터져나와 집행 중에 죄수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세 번이나 태장을 맞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한 번의 기록만을 전해 주므로(행 16:22,23) 나머지 두 번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한편 로마의 법(lex Julia)에 의하면 로마의 시민들에게는 태형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바울의 경우는 군중들의 극심한 선동에 의해 로마의 관원들이 법을 무시하고 신분 확인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로 형을 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돌로 맞고. - 모세의 율법에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를 돌로 치라는 규정이 있는데(레 24:16)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에게 이러한 형벌을 임의적으로 가했었다(행 14:19).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았는데 이고니온에서는 맞을 뻔 하였다가 피하기도 하였다(행 14:5,6).
세 번 파선하는데…지냈으며. - 바울이 승선한 배가 좌초되어 표류했다는 기록은 행 27장에 나와 있으나 그 때는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이후이다. 사도행전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이는 바울의 보조자였던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바울의 일신상의 수난을 대부분 생략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누가는 바울의 해상 여행을 수 차례에 걸쳐 보도하고 있는데 (행 9:30; 11:25,26; 13:4,13,14,25,26; 16:11; 17:14,15; 18:18-22)이 중에 어느 시점에선가 배가 파선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11:26 여러 번 여행에. - 바울은 전도 여행에 수반되는 위험과 환난을 계속 열거하면서 자신이 여러 번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의 원시성을 감안한다면(A.D. 1세기) 로마가 당시 아무리 번영을 누리고 도로가 발달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 여기서 '강의 위험'은 강을 건널 때 홍수로 인해 당하는 위험을 말한다. 거대한 강에서 흘러나온 지류나 다리가 가설되지 않은 계곡 등의 급류가 급작스럽게 불어나 여행하던 사람들이 익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특히 바울의 여행지였던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에서는 이러한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한편 '강도의 위험'은 여행자들에게 있을 수 있는 보편적 위험이다.
동족의 위험. - 바울이 전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시종일관 그를 방해하고 그의 생명을 해치려한 것은 실상 유대인들이었다(행 9:23,29; 14:5,19).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증오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유대교로 개종시키려 했던 다수의 이방인들까지도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회개시킨 데서 더욱 가열되었다.
이방인의 위험. - 이방인들은 대체로 유대인들의 선동에 동원되는 경향을 보였는데(행 16:19-39; 19:13-41)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어느 정도 복음을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시내의 위험. - 바울이 다메섹이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에베소 등의 대소도시에서 직면했던 위험들이다(행 16:21; 19:27; 20:23). 그러한 도시에서는 도시 특유의 선동이나 작은 규모의 소동들이 일어났었다.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 바울의 여행로는 순탄한 신작로나 평화로운 항로에 그치지 않았다. 황량한 광야를 지날 때면 들짐승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바다를 항해할 때는 태풍이나 해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25절).
거짓 형제 중의 위험. -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천재 지변에 의한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바울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초래된 다양한 박해라고 볼 수 있다. 즉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과 그 외의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 가장하여 형제들을 미혹하였는데 이 때문에 바울은 심적으로 큰 부담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 편지를 쓰는 동기도 실은 거짓 형제들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돌이켜 보면,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전도 여행에 최대의 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27 수고하고 애쓰며. - 선행절에는 전도 여행 중의 어려움이, 본절에는 바울의 생활고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수고하고 애쓴다'는 표현은 자주 서로 병행해서 사용되는데(살전 2:9; 살후 3:8) 스스로 노동을 해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뜻을 가진다(고후 12:16). 바울은 전도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생계를 위해서 육적인 노동을 하였다(살후 3:8).
여러 번…굶고. - 바울은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는데 그 이유가 육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위험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복음 전도자가 기도나 설교 때문에(행 20:7-11) 그리고 교회에 대한 목회적 염려 때문에(28절)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바울은 주리고 목마르고 굶는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했는데 그의 굶주림이 신앙적인 결단에서 나온 자발적인 금식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궁핍으로 초래된 불가피한 굶주림인지 밝히기는 어렵고 다만 그가 항상 복음 전도자로서 매우 핍절한 생활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춥고 헐벗었노라. - 본절에 제시된 바울의 고통들을 한 마디로 축약해서 표현한 구절이다. 사도 바울은 가난하고 정처없이 여행하는 중에 안락한 거주지와 온화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주를 위해 희생하였다. 더욱이 주야간의 기온 차이가 극심한 사막지방의 기후를 감안한다면 습기와 바람, 추위에 고생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11:28 이외의 일. - 바울은 24-26절에 걸쳐서 전도여행 중에 겪었던 고초와 위험을, 27절에서는 생활상의 어려움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고백하려 하는 듯한데, '이외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견해가 양립된다. ① 이상과 같은 것(24-27절) 밖의(without) 일이다(Bengel, Calvin). ② 이상과 같은 것 이외의 (beside) 일이다(Alford, Hodge, Meyer). ⓛ을 따르면 이제까지는 외적 고난을 증거했으니 이제부터 내적 고난을 증거하겠다는 뜻이 되고, ②를 따르면 지금까지 많은 고난을 열거하였으나 그것들은 그만 두고라도 이제 더 큰 것을 말하겠다는 뜻이 된다. 전후 문맥상 ②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눌리는 일…염려하는 것이라. - 여기서 '눌리는 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스타시스' ( )는 '마음으로 무겁게 걱정한다'는 뜻을 가진다. 바울은 항상 마음속에서 진지하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염려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로부터 누가 실족케 되었다거나, 분파가 생겼다거나(고전 11:19),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고(딤전 4:1), 이리같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다는(행 20:29,30) 소식을 접할 때마다 목자로서 맡은 바 양들이 상처받지 않을까 하여 노심초사했으며 교회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롬 14:1).
11:29 누가 약하면.… 아니하며. - 본 구절은 선행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바울의 교회를 향한 열심은 사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한 몸이라는 사상에서 표출된 것인 바(고전 12:26) 교회 구성원 상호 간의 공동체 의식과 그에 따른 공감대 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 하겠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의 전 구성원은 한 몸이라는 사상에서 본 교회를 신학용어로 '유기체적 교회'(organic church)라 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사상 하에 믿음이 약하고 신앙이 곧지 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고 함께 고민하며 아파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고전 9:22).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실족하게 되면…애타하지 않더냐. - '실족'(스칸달론)이란 일반적으로 성도가 넘어져 믿음을 잃었을 때나 죄에 빠졌을 경우를 나타내는 단어인데, 여기서 바울은 후자의 경우를 상정하고 죄에 빠진 형제들을 대할 때 자기의 마음이 매우 안타까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애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퓌로오'( )는 '불'(fire)을 뜻하는 단어 '퓌르'( )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애타다'라는 것은 매우 강렬하게 속이 끓어 오르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또한 바울의 목회자적 열정을 잘 드러내준다.
11:30 부득불…자랑하리라. - 바울 사도는 자랑하는 것이 완전히 무익하고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나 고린도 성도들을 올바로 인도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하게 자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자랑은 거짓 사도들의 자랑같이 신분이나 혈통, 직위, 학식, 언변술 등에 있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위험, 궁핍 등에 있었다. 바울의 자랑은 영광과 승리의 내용보다는 적으로부터 당하는 위협, 육신적인 허약함, 신체적 결함에 대한 역설적인 자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바울은 이 약한 것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고백하였다(고후 12:9,10).
11:31 주 예수의…하나님. -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바울에 대해서 의심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고후 1:13,14) 바울이 본절과 같은 엄숙한 맹세로 자신의 진술을 보증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후 1:3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하였는데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라는 어구는 히브리적 관용구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그분의 칭호를 보증으로 특정한 사실을 확인하는 기능을 하였다(출 3:14; 롬 9:1; 고후 1:12,23).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이 장엄한 칭호가 ① 이제까지 진술된 내용들을 보증하는 것인지(Estius, Hodge), ② 아니면 이후에 진술될 고백에 관련된 것인지(Calvin, Farrar), ③ 또는 양쪽 모두에 관련되어 있는지(Plummer)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는데 ②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즉 바울은 앞에서 자기의 고난을 일차적으로 회고한 후에(23-27절) 일생일대의 중대한 사건을 진술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고 장엄하게 자기의 고백의 진실을 서약하고 있는 것이다.
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왕. - 여기서 '아레다'(Aretas IV)왕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장인으로서 다메섹 동남쪽의 아라비아 지역을 약 48년 간이나 통치했던(B.C. 9-A.D. 39) 사람인데 헤롯이 그의 딸을 버리고 이복 형제인 빌립 1세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군대를 보내어 헤롯 안디바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마 1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레다 왕이 다메섹을 통치했다는 바울의 진술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다메섹은 B.C. 63년에서 A.D. 34년까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로마의 황제였던 갈리굴라(Caligula, A.D.37-41)와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다메섹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다메섹 지역 만큼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이 다메섹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아레다왕을 다메섹의 통치자로 임명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Tommsen)이 역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다른 학자들은 다메섹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다메섹의 일정 부분은 아라비아인들의 특별 자치 구역으로 배려되어 있어서 아레다왕이 그 지역에 한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Bruce, Meyer). 상기한 내용들이 모두 확실한 역사 자료로써 뒷받침되고 있지는 못하나 그래도 이 가운데서 브루스(Bruce)와 마이어(Meyer)의 해석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추세이다. 하여튼 본절은 바울이 회심한 직후 다메섹에서 복음을 증거한 사실(행 9:19-25)과 연관이 있는 듯한데 바울은 이때 유대인들에 의해 매수된 아레다 왕의 방백들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탈출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1:33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 여기서 '들창문'(뒤리스)은 작은문 또는 구멍을 뜻한다. 즉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 있을 때 체포의 위기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의 외곽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극적으로 탈출을 한 것이다. 이는 매우 수치스러운 사건이며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진솔하게 털어 놓으면서 자기가 최초로 받은 그 박해가 끝까지 가슴에 사무치는 안타까움을 남겨 놓았음을 고백하며, 그 때 이후로 자기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고 인도하여 주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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