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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염려와 권면 및 여러 이단 사상에 대한 경계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본서 본론 전반부(1:13-2:23)의 일련 부분이다. 이에 대해 좀더 상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이미 앞부분에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임을 밝히기 위해 구속주(救贖主)이시며 창조주(創造主)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며 화목주(和睦主)이신 그의 신분과 사역을 밝힌 바 있다(1:13-23). 그리고 이어서 이처럼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반응으로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매진하고 있음을 밝혔다(1:24-29). 이에 이어지는 본장에서는 지금까지 거론해 온 보편적인 진리와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의 범위를 보다 축소시켜 본서의 수신자인 골로새 교회에 적용시킨다.
즉 본장 전반부인 1-7절은 앞부분에서의 이방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역(1:24-29)을 골로새 교회에 적용시켜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염려하며 권면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앞에서 밝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여 공교한 말로 그들을 꾀는 자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비록 자기가 직접 세우지는 않았으나 골로새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역할 설정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어 나올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이단 사상들을 경계하는 도입부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또한 후반부 8-23절은 그리스도의 우월성(1:13-23)을 골로새 교회의 현실에 적용시켜 그리스도의 충만과 대조되는 이단의 공허함을 밝힘으로써 이단을 척결하고자 한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이단(Heresy)은 혼합주의적(Syncretism)인 양상을 띠었으므로 본문이 말하는 이단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규명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율법주의와 천사 숭배와 금욕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구성된 본장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추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 1-7절은 이 지상 교회(地上敎會)의 불완전성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성도가 마땅히 지향하여야 할 바를 보여 준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적용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또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유형 교회(有形敎會)는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조직을 갖출 조직체(組織體)로서의 교회이다. 그러나 이 가견적(可見的) 유형 교회에는 가라지도 포함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가진다(마 13:24-30). 이 가라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구속의 진리를 거부케 하는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건히 함으로써 스스로를 교묘히 위장하여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하수인인 이러한 이단적 세력을 분별하며 그들과 싸워 이기는 신앙의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처럼 영적 혼란의 와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여 신앙의 용장(勇將)이 되게 하는 권면자가 되어야 하겠다.
또한 이어지는 8-23절은 이단이 스스로의 주장을 마치 구원을 주는 대단한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리스도의 충만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허한 것이란 사실에서 출발하여(8-10절) 당시 사람들을 미혹했던 여러 이단들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11-22절). 우리는 여기서 본문에 묘사된 각 이단들의 실체를 살피기보다는 이단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이단(異端)이란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되심을 거부하며 그리스도 외에 혹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른 구원의 방편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할 사단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범함으로써(시 14:14; 딤전 3:6) 모든 악이 근원이 되어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인간 역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이 사단은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 과정에서 계속 방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죄까지 범했으며(마 4:4-11) 선교 사역을 방해하고(마 16:23; 요 8:3) 십자가에서 죽게까지 하였다(요 13:27). 그러나 그리스도는 시험의 극복과 부활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셨으며 구원받을 자들을 불러 교회를 설립케 하셨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사단은 교회의 와해를 위해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에서 떠나게 하며(살후 2:11,12) 성도의 성화(聖化)를 방해한다(엡 6:10,11). 하나님의 교회 내에 이단이 발생하여 활동하는 것도 이처럼 구속사의 진행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궤계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이단의 활동을 용납한다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며 진리에서 떠나 거룩함을 잃어버리며 결국 사단과 더불어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지고 만다. 따라서 성도는 진리의 수호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의 세력인 이단에 대하여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며(8절) 그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밝혀내고(계 2:2) 그들을 멀리하여야 한다(딛 3:10).
외울 말씀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염려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성숙한 신앙에 대한 권면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단의 공허함과 그리스도의 충만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율법주의의 경계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천사숭배에 대한 경계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금욕주의에 대한 경계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단 경계 결론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2장 본문&자료노트
도표-2:8-23 세상 학문만을 좇을 때 나타나는 증세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인 삶과 구원에 대해 논하기는 하되 실제로 아무런 해답도 제시해 주지 못하는 철학을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8절). 여기서 인생의 참 진리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며 인생의 내세(來世)에 대해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는 철학은 곧 세상 모든 학문의 대명사인 바, 이 같은 세상 학문만 좇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중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심이 많아짐(창 3:1-6) 2. 세상 지식만 절대시 함(잠 14:15)
3. 근심이 많음(전 1:18) 4.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함(마 6:2)
5. 남을 시험하길 좋아함(눅 10:25) 6. 지나친 증거를 요구함(요 20:24,25)
7. 변론을 즐김(행 17:18) 8. 새로운 것만 찾음(행 17:19-21)
9. 교만해짐(고전 8:1; 딤전 6:3-5) 10. 궤휼에 빠짐(고전 3:18-20)
11. 이생에서의 자랑만 좇음(고후 11:18) 12. 겉으로 나타난 것만 중시함(골 2:16)
13. 모든 것을 비판함(골 2:16) 14. 위선적인 겸손을 보임 (골 2:18)
15. 신비한 인적 체험을 과장함(골 2:18) 16. 옳다 여기는 것을 우상시 함(골 2:23)
17. 금욕주의 등에 빠지기도 함(골 2:23) 18. 도덕적 방종에 빠지기도 함(벧후 2:2)
19. 말만 많고 행위는 없음(요일 3:18) 20. 하나님 대신 사람을 추종함(골 2:22)
보감-2:2 성경에서 하나님의 비밀로 기록된 것들
1. 천국(마 13:11-52)
2. 이방인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경륜(롬 11:25)
3. 종말에 있을 성도의 부활과 변화(고전 15:51,52)
4.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의 통일에 관한 경륜(엡 1:9,10)
5. 그리스도로 인한 이방인의 구원(골1:27)
6. 그리스도(골 2:2)
7. 그리스도의 전구속 희생 사역들(딤전 3:16)
도표-2 : 2-10 그리스도에 대한 본서의 묘사
1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1:13) 2 구속을 주시는 이(1:14)
3 하나님의 형상(1:15) 4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1:15)
5 만물을 창조하신 이(1:16) 6 교회의 머리(1:18)
7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1:18) 8 만물의 으뜸(1:18)
9 성부의 신성이 충만하신 자(1:19) 10 화목케 하신 이(1:22)
11 영광의 소망(1:27) 12 하나님의 비밀(2:2)
13 지혜와 지식의 보화(2:3) 14 정사와 권세의 머리(2:10)
15 성도의 생명 (3:4) 16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이(3:11)
표-2:11 신약 시대의 성도가 받아야 할 할례
믿음으로 구원 얻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구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던 육적 할례가 필요치 않다. 대신 신약 성도들은 영적으로 거룩하여지고 또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나아가기 위하여 받아야 할례가 있는 바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마음의 할례(롬 2:28,29) 2. 이면적(내면적) 할례(롬 2:29)
3. 영혼의 할례(롬 2:29) 4. 믿음의 할례(롬 2:29)
5. 사람 손으로 행치 않는 할례(골 2:11) 6.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
7. 육적 몸을 벗는 할례(골 2:11)
원어연구 - 2:14, 도말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살레이포'로서 이는 '에크'와 '알레이포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알레이포'는 '기름을 바르다', '문지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솨흐'를 번역한 것이다. 즉 '마솨흐'는 구약 시대에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을 기름으로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나 어떤 직분자들을 임명할 때 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과 관련된 용어이다. 따라서 '알레이포'도 히브리서 '마솨흐'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알레이포'에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크'가 결합된 '엑살레이포'는 의식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과는 관계가 별로 없으며 더러운 것을 기름으로 깨끗이 닦아서 제거한다는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이 단어의 성경적 용례를 보면, '눈물을 씻다', '깨끗이 하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계 7:17 ; 21:4) 때로 '글씨를 삭제하다', '법을 폐기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계 3:5), 비유적으로 '죄를 깨끗이 하다'(행 3:19)는 뜻으로도 쓰인다.
따라서 본문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신다'는 것은 곧 구약 율법의 법적 효력이 성도에게는 미치지 못하게 구약 율법을 폐기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구약의 율법이 적용되어지지 않고 폐기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인 것이다(마 5:17).
2장 강해주석
2:1-7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와 권면
2:8-23 그릇된 교훈에 대한 경계
2:1-7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와 권면
자신이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은 지금까지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음을 피력한 바울은(골 1:24-29) 이제 본문에서는 골로새 교회에 대한 자신의 염려와 관심을 표명한다.
사실 골로새 교회는 바울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바울은 그들과 얼굴을 대면한 적도 없었다(1절). 그러나 골로새 교회 내에 이단 사상이 침투해 그릇된 교리가 성행하고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비록 자신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는 곤고한 처지에 있었으나 마음은 이미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바울이 염려하는 까닭은 저들로 하여금 성도간의 마음의 위안과 사랑의 연합, 원만한 이해,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데 있었다(2절). 즉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참된 지혜와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풍성히 감취어져 있음을 깨닫게 하여 어떠한 이단 사상의 속임에도 빠지지 않게 하려한 것이다(3,4절).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신앙 고백하는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한다(6,7절).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뿌리를 깊게 박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셋째는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생활로 응답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굳은 믿음으로 여러 이단 사상의 유혹을 물리칠 것을 촉구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때로 교회의 분열을 야기시키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성도는 사랑 안에서 원만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즉 미숙한 성도로 인해 그러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임을 기억하여 서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 원인을 근절시켜야 하겠다(엡 4:3,13).
② 이단의 유혹이나 헛된 사상에 미혹 받지 않기 위해 성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에 대한 확신을 소유해야 한다(벧후 3:18).
③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 애썼듯이 성도는 자기 자신에게만 얽매어 있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는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희생적 사랑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전 10:24).
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 라오디게아(Laodicea)는 골로새 근처에 위치한 리쿠스(Lycus) 계곡에 자리 잡고 있던 도시로, 금융 산업이 매우 발달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렸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바사 제국 시대와 헬라 제국 시대 때 소아시아에서는 가장 번성한 도시의 하나였으며 예술과 문화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잦은 지진으로 인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어오다, 결국 대지진으로 인해 멸망하여 지금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곳은 주민들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을 정도로 유대인이 많았다. 한편 이곳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는 골로새 교회와 함께 에바브라에 의해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골 4:13),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 바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이다. 당시 바울은 이곳저곳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목회 활동을 하였으나, 몸은 하나인데 가야할 곳은 너무 많아 미처 방문조차 하지 못한 곳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떤 곳의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만을 보았을 뿐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본 구절은 바로 그 사람들을 지칭한다.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리콘 아고나 에코'를 직역하면 '내가 얼마나 큰 싸움에 임하고 있는지를'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위해 바울이 얼마나 내적인 염려를 하고 있는가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만일 이 편지의 수신자들 중에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반대로 바울도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얼굴도 모르는 형제들을 간절한 기도와 염려로 돌보았던 것이다.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여타 지역의 형제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목적이 본절에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첫째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위안을 받게 하다'는 동사 '파라칼레오'는 '용기를 주다', '힘을 주다', '편을 들어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바울은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고무시키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둘째는 사랑 안에서 연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랑'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으로서 하나님의 본성이다(요일 4:8). 그리고 '연합하다'(쉼비바조)는 것은 '한 동일체로 서로 밀착되게 연합하다'는 의미이다. 즉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도록 하기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본문에서 '이해'(쉬네시스)라는 말은 '통찰력' '분별력'을 의미하는 말로, 단순히 어떤 사실을 이성으로 깨닫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의지가 그 깨달음에 동참한다는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한 것을 실천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감취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고 그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있느니라. - 여기서 '그'란 2절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Chrysostom, Lightfoot, Ellicott, Moule). 이 그리스도 안에는 하늘의 모든 지식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은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진 것도 아니며, 소수를 위해서만 제한된 것도 아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랑 안에서 연합한 모든 성도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방된 비밀이 감취어 있다고 표현한 것은 이 지혜와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이며, 또한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의 '지혜'(소피아)와 '지식'(그노시스)은 '지식'이 단순히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지혜'는 그 진리를 논리화하여 그것들의 관계를 추구해 나가는 능력을 의미한다(Lightfoot), 그러나 이러한 지혜와 지식에 대한 설명은 순전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한 설명이며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지혜와 지식은 원초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Hendriksen)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혜와 지식으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2: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교묘한(공교한)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다놀로기아'는 아주 흔치않게 사용되는 용어로 신약에서도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단어이다. 철학자들은 이 단어를 고전어에서 정확한 논증을 동반하는 고도의 수사학과 반대되는 말로 사용하였다(Platon). 즉 고대 철학자들은 이 용어를 거짓과 술수를 사용한 그럴듯한 이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결국 이 말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안으로는 거짓과 기만이 가득한 속임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와 같은 여러 이단들이 발호하여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이단들을 경계시키기 위해 지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 바울은 지금 옥중에 갇혀 있었음에도 결코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낳은 신앙의 자녀들이 지닌 문제를 자기 손이 미치지 않는다고 방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보다 깊은 관심을 내면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1절 주석 참조. 즉 바울은 몸으로 같이 하지 못하는 것만큼 더욱 영적으로 그들과 하나되어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질서(규모)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 '질서(규모) 있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탁시스'은 본래 균열이나 흐트러짐이 없는 군대의 행렬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골로새 교인들이 잘 훈련받은 병사처럼 교회를 거짓된 진리로 교란시키려는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분열이나 흐트러짐 없이 신앙의 정도(正道)를 바로 걸은 것을 가리킨다.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 '굳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레오마' 역시 앞의 '규모'와 같이 군대 용어로 견고한 전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골로새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지켰음을 시사한다.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를 원문 그대로 표기하면 '톤 크리스톤 이에순 톤 퀴리온'이다. 이 원문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라는 명칭 앞에 관사 '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서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라는 단어가 관사 하나로 연결된 경우는 본절 외에는 그 어디에도 없다(Robertson). 바울이 이처럼 자신이 흔히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표현법을 본절에서 사용한 것은 신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를 분리하려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의 오류에 대항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실재 인물이었으며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오묘하게 결합된 완전한 신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또는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주가 되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의 관사를 통해 명백히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본절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및 주변의 성도들에게 하는 바울의 권면의 말이다. 이 권면의 말은 전부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중 처음 두 가지는 식물과 건축물로 비유한 권면이다. 바울은 엡 3:17에서도 이와 같이 성도의 영적 상태와 성장을 식물과 건축물로 비유한 적이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네 동사는 모두 분사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계속적인 생명의 동작을 나타낸다. 특별히 그 가운데 맨 처음 동사 '뿌리를 박으며'(에르리조메노이)는 완료형으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및 그 주변 지역 성도들이 주 안에 믿음의 뿌리를 박은 것이 이미 완료된 기정사실일 뿐 아니라 그러면서도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외의 동사 '세움을 입어'(에포이코도무메노이), '굳게 서서'(베바이우메노이), '넘치게 하라'(페릿슈온테스)는 모두 현재형으로 그 동작이 계속되어야 할 것을 나타낸다. 또 이상의 네 동사 중 처음 세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어 뿌리를 박는 것과 세움을 입는 것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가능한 것임을 나타내 주며, 마지막 동사는 능동태로 되어 있어 감사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실행하여야 하는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2:8-23 그릇된 교훈에 대한 경계(이단의 경계)
이제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기 위해 창조와 구속의 주인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기독론을 설명하고(골 1:13-23),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사역과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 대한 염려를 토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것을 권면한 바울은(골 1:24-2:7) 이어 본문에서는 골로새에 침투한 여러 이단 사상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에 비추어 논박한다.
먼저 바울은 당시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여러 이단 사상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충만과는 대조되는 공허한 것임을 밝힌다(8-10절). 즉 하나님의 충만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되었고 그것을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채워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케 되어지는 축복을 체험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 당시 골로새 교회에 유행하던 다양한 이단적 사상들을 조목조목 다루며 그 허구성을 밝히고 있다.
첫 번째로 바울이 거론하는 것은 할례를 행하며 율법의 규정에 의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 안식일 등의 율법과 전통 준수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에 대해 언급한다(11-17절). 이에 대해서 바울은 심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율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직도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에 머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밝힘으로써 그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천사 숭배 사상을 다루는데,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예배하는 것은 교만한 일로써 중보자로서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면서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무효화하게 하는 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변증으로써 바울은 머리와 몸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논한다. 사실 몸이 머리 없이 생명력을 소유할 수 없듯이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만 생명력을 지니며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성도는 그의 몸, 즉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 없는 천사 숭배의 이단자들에게는 생명도 자람도 없고 오직 허무함만이 있을 뿐이다(18,19절).
다음은 인간이 만든 규정을 하나님의 지지를 얻는 수단으로 여기며 이를 강요하는 금욕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이다(20-2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모든 이단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이 만든 규정이므로 무가치하며 오히려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23절).
한편 이러한 모든 이단의 공통점은 구원에 이르는 참 진리를 교묘히 바꾸어 그리스도께서 주신 참 자유(요 8:32,36)를 빼앗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멸망케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되시며,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면 성도로서의 참 자유를 얻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이단의 사상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노략할까) 주의하라. - 본절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테스 필로소피아스 카이 케네스 아파테느)에서 '헛된 속임수' 앞에 따로 관사가 없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하나의 관사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헛된 속임수인 철학'이라는 의미인 것으로 해석된다. 본래 '철학'(필로소피아)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당시 '철학'은 궤변과 같은 언어 유희적 논증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교회를 강하게 위협했던 영지주의도 헬라 철학을 원용한 일종의 철학의 한 유파였다. 영지주의와 관련해서는 요일 서론 특별자료, '영지주의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철학을 '헛된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 그 자체가 이성을 사용하여 지혜를 추구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거나 속임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철학을 인본주의의 도구로 삼고 말의 유회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철학은 거짓과 속임수가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드높이며, 실재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개념이나 말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려는 철학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철학 사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러한 거짓과 속임수의 철학이 아무리 과학과 객관의 옷을 입고 미혹하여도 그것들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유전)과. -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의 교훈을 가리킨다. 당시 골로새 교회 내에는 유대주의적 이단인 율법주의와 헬라주의적 사고가 기독교에 들어와 생긴 이단인 영지주의 등이 다 같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다. 진리가 아닌 것은 설령 그것이 처음에는 좋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부패하여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다.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 '초등 학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이온'는 성경에서 '우주의 물질들'(벧후 3:10,12), '초보적인 가르침'(히 5:12), '유대교의 의식훈련의 요소들'(행 15:10; 갈 4:3,9)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본절에서는 참된 지식이신 그리스도에 비해 저급한 인간의 지식 및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거짓된 진리를 의미한다(Meyer, Lightfoot).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 여기서 '충만'(플레로마)은 '가득 채우다'라는 의미의 '플레로오'에서 유래한 말로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속성과 권능의 전부'를 가리킨다(Lightfoot). 그리고 '그 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이 완벽하게 있다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 주목하여야할 것은 그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 자체이신 것이다(빌 2:5-8).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요 신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부인하는 자는 사람의 말을 좇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자이다.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기독교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핵심 진리인 것이다(요 1:14).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롬 6:3-11)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충만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충만이 다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임하며 또 교회로 말미암아 만물이 충만케 된다는 것은 에베소서의 중심적 사상이기도 하다(엡 1:23; 3:19; 4:13).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 '모든 정사와 권세'는 성경에서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골 1:16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지배자가 됨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본절은 당시 그리스도를 천사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거나 오히려 그보다도 못하다고 여긴 천사 숭배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한 말이다.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영지주의(8,9절) 및 천사 숭배자(10절)들을 경계한 바울은 이제 본절에서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는 당시 골로새 교회에는 여러 이단사상이 혼합적으로 내재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여튼 바울은 여기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의 폐단을 '할례'를 실례로 공격하고 있다. '할례'란 본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민의 표적으로 주신 것으로 육체의 일부인 양피를 베는 행위를 가리킨다(창 17:9-14). 이에 대해서는 수 5장 자료노트, '할례'를 참조하라. 그런데 이러한 손 할례는 장차 성도들이 받을 참 할례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율법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의 노예가 되어 버린 유대인들은 모형을 참된 것으로 대치시켜 놓고 그것을 숭상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심지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났으며 그들은 손으로 하는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으며 여기에서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가 분명하게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해서는 행 15장 연구 자료에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곳곳에서 발호하여 성도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등 여러 율법주의적 교훈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였으며 그러한 현상은 갈라디아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서 더욱 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그러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의 교훈이 헛된 속임수라는 것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참된 구원은 육체의 일부를 자르는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육적인 것을 잘라 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을 입어 중생함을 입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롬 4:9-12; 갈 2:20).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한편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그리스도께서 받은 할례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할례, 곧 마음에 하는 할례를 의미한다(Robertson) .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세례'는 구약의 할례에 대한 신약적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갈 2장 자료노트, '초대 교회의 할례 논쟁'을 참조하라. 따라서 본절은 11절의 '그리스도의 할례'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한 것이다. 참된 할례, 곧 성령의 세례란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장사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의 모든 육신의 것을 묻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고후 5:17). 또한 그것은 순간의 거듭남인 동시에 계속적인 변화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에서 상술하였는바 그곳을 필히 참조하라.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 여기서의 '범죄'(파라프토마)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죄라기보다 구체적인 '행악' 또는 '과오'를 지칭한다. 그리고 '육체의 무할례'(테 아크로뷔스티아 테스 사르코스)란 문자 그대로 단순히 육체에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이라는 죄(롬 7:5)를 벗지 못한 상태, 곧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신 10:16; 렘 4:4). 한편 본절에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단절은 그 자체가 죽음이요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과 형벌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때에 함께 살리시어 영광과 진리 가운데로 옮겨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친히 우리 성도들에게 행하신 할례요 세례이다.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 본 구절은 인간의 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율법은 선한 것(롬 7:12)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 인간을 고소하고 해하지 않는다. 율법이 인간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이유는 인간이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다는 말은 뒤집어 해석하면 인간이 율법을 어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인간이 율법을 어기고 범죄한다는 말을 율법을 의인화시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롬 3:19,20).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여기서 '도말하시고'(엑살레이프사스)는 '문질러 닦아내다', '지우다'라는 의미로, 이는 인간을 정죄하고 고소하던 율법의 조항을 무효화한 것을 의미한다. 또 '제하여' (에르켄)라는 말은 '들어올리다', '나르다'는 뜻의 '아이로'의 완료형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율법을 영원히 제거했음을 나타낸다. 사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도저히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이외의 한 법을 세우셨고 그 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다(롬 3:19-28). 그 법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다. 즉 하나님은 무죄하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구주에게 내어 주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십자가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죄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거듭남을 입어 영생을 얻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므로 사실상 율법 자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Peake, Meye.).
2:15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략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를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 '정사와 권세'가 일반적으로 '천사'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이미 10절 주석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악한 천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격파하시고 그 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기서 '벗어 버리다'(아페크뒤오마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빼앗다', '약탈하다'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쳐부순 것을 나타낸다. 또한 '드러내시고'(에데이그마티센)는 '본을 보이다'라는 의미의 '데이그마티조' 의 제 1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격파하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셨음을 의미한다.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8-15절)을 결론적으로 말하면서 그 내용에 따라 실천해야 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율법과 의문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그러한 옛 율법과 의문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 본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한편 여기서 '평론하다'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노'는 '심판하다', '평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은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여 그 효력을 제거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더 이상 아무런 효력도 없는 율법 규례의 준수 여부로 인해서 판단 받아서는 안될 것을 나타낸다.
먹고 마시는 것. - 이는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음식에 대한 규례(레 11장; 민 6:3)와 관련된 말이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 존재했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의 금욕주의 경향을 염두에 둔 말인 듯하다(Robe탄son). 아마도 골로새 교회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성도들에게 금욕적 생활을 강요하며 금욕하지 않는 자들을 판단한 듯하다.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 유대인들의 성일(聖日)에 대한 총칭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일을 지키는 것은 곧 율법 준수를 상징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일은 구약의 법인 율법이 신약의 법으로 대체됨으로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은 성도들에게 이를 지키도록 강요하고 그 준수 여부로 성도들을 판단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의 '성일'에 관해서는 신명기 서론 특별자료에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여기서 '이것들'이란 16절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표현된 율법의 규례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림자'라는 말의 헬라어 '스키아'는 실체가 아닌 허상을 의미한다. 즉 '그림자'란 빛이 투과되지 않아 생기는 물리적 현상으로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실체의 형태를 하나의 현상으로만 나타내 줄 뿐이다. 그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표현했던 하나의 예표에 불과하다. 한편 본절의 '몸'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마'는 '그림자'(스키아)에 대립되는 개념의 말로 실체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따라서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은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는 표현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곧 실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은 그림자이나 그리스도는 실체라는 뜻으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도 예표에 불과한 율법에 집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무의미한 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 일단의 학자들은 본절의 '일부러 겸손함'(데론 엔 타페이노프로쉬네)을 '겸손 속에서 기쁨을 가지는'(Augustine) 또는 '겸손한 목적으로'(Alford)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본절은 전체적으로 부조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러 겸손함'은 '천사 숭배함'과 함께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겸손함'은 '고의적으로 겸손을 가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당시 천사 숭배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것은 교만이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하고 있는 천사를 숭배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본절이 말하는 '일부러 겸손함'은 그런 천사 숭배자들이 말하는 겸손을 일컫는다(Lightfoot, Bruce). 천사 숭배자들은 진실로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의 논리를 편 것이 아니라 천사숭배라는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고의로 겸손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상을 빼앗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브라뷰오'는 본래 경기에 관련된 용어로 심판에 오류가 있어 당연히 받을 상을 받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이 복음이 아닌 그릇된 행위와 의식을 주장하며 그것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16절의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더욱 강조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그 본 것을 의지하여. - 에브라임 사본(C)이나 베자 사본(D)에는 본 구절이 '보지 못한 것을 의지하여'라고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들. 즉 시내산 사본(H),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등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표현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 개역 성경의 표현이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의지하다'(엠바튜오)라는 말은 '얻기 위하여 들어가다', '탐구하기 위해 들어가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예비적인 교육을 받은 신비 종교의 교도가 신비 종교의 의식에 참예하여 환상을 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신비체험을 근거로 자신들을 자랑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추종케 한 것이다(Ramsay).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 여기서 '육체의 마음'이란 죄의 본성을 떤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 즉 거짓교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가 아닌 타락한 인간의 감정이나 이성에 따라 자신들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며, 자신들의 것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언제나 과장한다. 그리고 그 파장이 지나쳐 급기야는 교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이단으로 빠지는 자들의 특성이다.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 본 구절은 18절에서 시작된 문장의 끝부분으로, 거짓 교사들이 헛되이 과장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머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골 1:18), 즉 육체의 마음을 좇는 자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에서 제하여 버리기 때문에 저들은 머리 없는 몸과 같이 되어 허망한 것에 빠지며, 결국 과장하고 교만하게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리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 머리는 온 지체를 제어하여 각 지체가 균형 있게 성장하도록 작용한다. 이와 같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각 지체들이 균형 있게 성장하고 활동하도록 양육하시고 인도하신다. 엡 4:16 주석 참조.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거부함으로 교회를 병들게 하고 끝내는 교회를 파멸로 이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거짓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되며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온전히 연합해야 한다.
2:20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이다(롬 6:2; 7:6; 고후 5:14,15; 갈 2:20; 벧전 2:24).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세상의 초등 학문의 지배에서도 벗어난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초등 학문에 성도들이 순종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며, 그것은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신분을 망각한 처사라 할 것이다. 본절로 미루어 보아 골로새 교인들의 상당수가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져 율법의 규례에 매이는가 하면 천사 숭배에 빠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초등 학문'에 대해서는 8절 주석을 참조하라.
2:21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 전절에서 말하는 '의문'(義文)을 추구하는 거짓교사들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골로새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신앙을 내적 확신이나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보지 않고 외양이나 규칙을 그 중심에 두고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 '... 를 하지 말라'고 규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과 강요는 생명과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닌 인간을 속박하는 헛된 절제와 금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2: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 본문의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지칭하느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20절의 '의문'으로 보는 견해이다(Ambrose, Augustine). 즉 '의문'은 헛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킬수록 영적으로 부패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문을 따르는 자', 곧 이단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olshausen, De Wette), 즉 의문을 따르는 자는 의문 자체가 헛된 것이기 때문에 헛된 의문에 의해 부패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21절에서 말하는 금령들을 음식물에 관한 것으로 보고(Calvin, Meyer, Lightfoot), 의문을 따르는 자들이 중요시하는 음식물이란 실상 중요치 않은 것이며 썩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이단 사상을 책망하기 위해 바울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람의 명령과 교리들을 좇느냐. - 철학이나 율법과 같은 세상의 초등 학문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 기원이 있음과 그것을 좇는 것이 옳지 않음을 명백하게 선언하는 구절이다.
2:23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 골로새의 이단의 성격을 결론적으로 제시한 구절이다. 즉 그들은 인간이 고안하여서 인공적으로 만든 어떤 대상을 숭배하고 교만으로 돌돌 뭉쳐 있으면서도 겸손을 가장하는가 하면 신앙의 성장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해야할 금욕을 목적화하여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양 거짓 가르침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외형적으로 볼 때 일견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견상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인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이단에 대한 결론적 판정으로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우크 엔 티메 티니 프로스 플레스모넨 테스 사르코스', 본절의 해석은 전치사 '프로스'와 '유익'에 해당하는 '티메'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부 학자들은 '프로스'를 '~ 대하여'로 보고, '티메'를 '가치'로 해석하여 본절을 '육체의 방종을 막는 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로 해석한다(Lightfoot, Moute, Ellicott). 또 일부 학자들은 '프로스'를 '~의 견해로서'로 해석하고 '티메'를 '평가'로 해석하여 본절을 '육체의 정당한 만족에 아무런 평가도 보이지 않는다', 즉 '육신을 진정으로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로 해석한다(Calvin, Luther, Meyer. Abbott). 그러나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의 견해가 본장 전체의 흐름과 보다 잘 어울린다. 즉 이단의 가르침은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육체에만 유익을 줄 뿐 진정한 의미에서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치지 못하는 헛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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