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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디모데 파송 및 디모데의 보고를 받은 바울의 기쁨과 중보기도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격려를 기록한 본서 본론의 전반부를(1:2-3:13)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즉 본장은 앞부분에서(2:17-20) 언급한 바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방문하려는 바울의 소망은 비록 좌절되었으나 자신을 대신하여 디모데를 파송하였다는 사실과(1-5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디모데의 보고를 접한 바울이 느낀 기쁨에(6-10절) 이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를(11-13절) 다루고 있다. 이를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칭찬과 격려는 끝나고 이어지는 본론 후반부에서는(4:1-5:24) 보다 실제적인 성도의 삶과 관계된 교훈과 권면이 이어진다.
이러한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의 세부 내용이 지닌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전반부 1-5절은 데살로니가 교회 방문 계획이 좌절된 바울이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굳게 하며 자신의 전도 사역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자기 대신 디모데를 파송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한번 전도한 것으로 자기의 사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관심을 갖고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는 바울의 태도를 통하여,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는 그 자체로만 할 일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위하여 계속 수고하는 것처럼 복음 전파자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역시 이러해야 함을 보여 준다. 또한 디모데를 호칭한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이란 표현을 통하여 바울이 사탄의 세력을 이기고 구원의 복음을 확장하는 중차대한 구속사적 사역을 혼자의 힘으로가 아니라 동역자와 더불어 도모하며 그러한 동역자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의 영적 유대감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 받은 성도 역시 다른 성도와 배타적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구속사적 대 사명을 수행해야 할 동역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중반부 6-10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굳게 서 있으며 그들이 바울을 간절히 보고 싶어한다는 디모데의 보고를 접한 바울의 기쁨이 기록되어 있는 바, 특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으로 인해 위로를 받았으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음이 나타난다. 즉 전도자 바울은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전도의 결실로 위로받고 기뻐하며 이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이는 바울이 구속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단순히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종으로서의 의식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크게 쓰셔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바 오늘날 성도 역시 자신이 쓰임 받음을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영적 성숙함을 지녀야 한다.
후반부 11-13절은 본론 전반부(1:2-3:13)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바울의 중보(仲保)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계획은 인간에게 있을지라도 이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잠 16:9) 바울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라도
미혹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범람하는(벧전 5:8) 가운데서 바른 신앙을 유지하며 재림하는 그리스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가능하다는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을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넘어질 수밖에 없다(옵 1:4). 따라서 재림이 임박하여 사탄의 궤계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이때에 성도들은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편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고후 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원어연구 - 3:11 직행하게 하옵시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튜뒤나이'로 기본형 카튜뒤노'의 부정과거 회구법이다. 카튜뒤노'는 '~아래로'(down),'!~을 향하여'(toward, 행 8:6) 등의 뜻을 가진 '카타'와 '곧은'(traight), '평평한'(level, 막 1:3)이라는 '유뒤스'에서 유래한 동사 '유뒤노'의 합성어로 '길을 곧게 만들다'(행 9:11), '방향을 지시하다'. '옳은 길로 인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 그리고 '본문과 같이 이 단어가 은유적으로 쓰일 때는 서로 먼 곳에 떨어져 있어 상대를 빨리 만나고 싶어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주로 서신을 통해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단어는 희구법으로 쓰여 강한 소망을 나타낸다. 한편 '하나님께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9; 고후 3:5)라는 표현을 쓸 때에도 때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어떤 환난이나 인생의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모의 마음과 그들과의 순탄한 만남에 대한 기원을 나타낸다.
디모데 파송의 동기와 목적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搖動)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시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디모데의 보고와 바울의 기쁨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窮乏)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 할꼬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바울의 중보기도
11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보감-3:7-13 성화의 방편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단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신앙 인격에 있어서 성도는 중생(重生)의 순간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감에 따라 주 앞에 갈 때까지 점진적이면서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되고 자라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화(sanctification)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금방 완성된 신앙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 된다. 또한 지금 당장 신앙 인격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정죄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신앙 인격이 성숙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다 함께 힘써 노력할 필요가 있는바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의 방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1 | 성령세례(롬 6:6; 고전 12:13; 딛 3:5) |
2 | 성령의 인도(롬 8:12-14; 엡 2:18; 딛 3:5) |
3 | 성령충만(엡 1:17,20; 5:18) |
4 | 예배(시 24:3,4; 요 4:24) |
5 | 기도(요 14:13,14) |
6 |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요 15:3; 딤후 3:16,17) |
7 |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열정(골 3:1; 벧전 1:2) |
8 | 새로운 성령(엡 4:23) |
9 | 성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빌 3:14; 딤전 6:12) |
10 | 환난과 시험을 통한 연단(살전 3:7-13; 히 12:10) |
3:1-5 디모데를 파송한 동기와 목적(이유)
앞부분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를 다시 만나고 싶은 열정에 재방문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사정이 되지 않았음을 밝힌(2:17-20) 바울은 이어 본문에서 그러한 연유로 자기 대신에 디모데를 보낸다는 사실을 통보하며 디모데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디모데를 파송하는 목적에 대해 밝힌다.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태에 대해 알고자 파송하는(1절)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자신의 형제이며 복음의 일꾼으로 소개하고(2절),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환난을 이겨내며 신앙을 굳게 하고 바울의 복음 전파 수고가 헛되게 되는 일이 없도록(2-5절) 디모데를 보낸다는 파송 목적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은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과(느 4:16,17). 더불어 성도는 마땅히 환난 당한 이웃을 위로하고 이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형제 사랑의 태도가 필요함을(사 40:1,2) 교훈 받을 수 있다.
3:1 이러므로. - 2:17,18에 관련된 어구로서 이하에서 언급되는 디모데의 파송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취한 방법임을 밝히고 있다.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을 다시 보기를 열망하였으나 그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살전 2:18). 그래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자기 대신 보내어 그의 열망을 대신코자 한 것이다.
참다못하여. -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형태는 바울 서신에서 통상적으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본절과 연관되는 행 17:14-16; 18:5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에 머문 후 바울만 아덴으로 보내어졌고 실라와 디모데는 계속 베뢰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다시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과 실라, 디모데가 마치 아덴에 함께 체류했던 것처럼 묘사하여 해석상 곤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다양한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실라는 그대로 베뢰아에 남아 있고 디모데가 아덴에 와서 바울과 해후한 후에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을 받았다가 거기서 실라를 만나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De Wette, Ellicott). ② 바울의 두 제자는 아덴에서 사도와 만났으며, 디모데만 그곳에서 파송을 받고 실라는 바울과 같이 고린도에 도착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방문을 완료하고 돌아온 디모데와 다시 접촉하게 되었다(Frame, Hofmann). ③ 바울과 함께 디모데와 실라도 아덴으로 갔는데 거기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실라는 빌립보로 파송되었다가 서로 만나서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과 합류하게 되었다(Thiessen). 이런 해석 가운데 첫 번째 견해가 독일이나 미국, 영국 등의 주석가들에게서(Paley, Jowett) 보편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방안은 여기서의 '우리'라는 복수가 바울, 실라, 디모데 세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살전 1:2) 바울이 단독으로 등장하더라도 전도단 일행을 대표하는 복수형태가 사용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개인 '바울'에게만 적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Morris). 상기의 의견은 모두 나름대로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굳이 택일할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되나 이 마지막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듯하다. 행 13장 연구자료, '전 3차에 걸친 바울의 전도 여행과 로마 여행' 참조.
3:2 우리 형제. - 형제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공동체의 일원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개인적으로는 '믿음의 아들'로 불렀으나(딤전 1:2; 딤후 1:2) 여기서는 제 삼자에게 소개하는 것이므로 '형제'라 호칭한 것이다. 한편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구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새로이 소개하는 것은 복음 전도라는 공적 사역을 수행하는 디모데의 입장을 반영하는 관례적 표현이라(빌 2:25) 이해된다.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 디모데는 성도들의 신실한 영적 형제였을 뿐 아니라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치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여기서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 )는 사본에(B) 따라서 '동역자'를 뜻하는 '쉬네르고스'( )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어느 단어를 채택하던지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된다( KJV는 'minister of God and our fellow labourer'라 번역하여 양자의 의미를 모두 전달하고 있다). 한편 '일꾼'이라는 헬라어 용어 '디아코노스'는 일반적으로는 '섬기는 자'를 뜻하는데 목회서신에서는 '집사'의 직분을 지칭하기도 하여(딤전 3:8,12) 복음을 위해서 일하며 섬기는 자라는 포괄적 내용을 함축하게 되었다. 또한 '동역자'는 '같이'라는 전치사 '쉰'( )과 '일하는 자'라는 명사 '에르곤'( )의 합성어로서 복음 전도의 사역을 동등하게 감당하는 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결국 이 두 용어는 '형제'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겠는데 디모데를 아끼고 사랑하는 바울의 깊은 애정을 담고 있는 말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너희를 굳게하고. - 여기서 '굳게하다'(스테리조)는 '붙잡다', '고정하다'(히스테미)에서 파생하여 '확고부동하게 고정하다', '확립하다'는 뜻이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형제들을 굳게 하라 명령하신 바와(눅 22:32) 같이 마땅히 전도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확고한 신앙을 갖도록 해야 한다(행 14:22).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환난 중에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사도의 기본적인 사명이다(행 14:22; 롬 1:11). 한편 여기서 '대하여'라고 번역된 원어 '휘페르'( )는 '관하여'의 의미보다는 '위하여'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위로한다'는 것은 실의에 빠진 사람을 '위안'한다는 뜻 이상으로 해석된다. 즉 '위로한다'는 뜻의 헬라어 '파라칼레오'( )는 '옆으로'라는 전치사 '파라'( )와 '부른다'는 동사 '칼레오'( )의 합성어로 '옆으로 부른다'라고 직역되는데 명사형이 되면 '법적인 차원에서 변호해 주고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확대된다(Morris). 이렇게 본다면 '위로'는 소극적 차원의 '위안'(comfort)을 넘어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강력한 권면, 격려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3: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요동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사이노'( )는 '개가 꼬리를 흔들며 살랑거리다'(Homer, 오딧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점차 그 의미의 폭이 넓어지면서 아첨하는 행위까지도 내포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요동'이라는 단어를 유대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사용한 '부드러운 유혹'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일면 타당성이 있으나 본절에서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인 환난을 당해서 굴복하고 흔들리는 상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그들에게 강인한 확신을 심어주는 한편 극심한 환난 중에서라도 인내할 수 있도록 디모데를 파송한다고 파송 목적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 사탄이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선(善)을 지향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환란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도처에서 발견되는바(마 5:10; 행 14:22; 벧전 2:21) 본문에서도 바울이 사용한 현재 수동태 분사 '케이메다'( ), 즉 '당하게'란 말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이 단어는 '지명되다', '작정되다'로 풀이되는데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이 결코 돌연한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나타내 준다. 즉 기독교 신자들에게 환난이 작정되었고(NIV, ~We were destined for them) 신자들이 환난을 위해 지명되었다고 할진대(KJV, We are appointed thereunto) 현재의 환난으로 인해 위축되거나 환난을 기피하려는 소극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겠다(공동번역, ~우리는 이런 곤경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환난은 기독교 교회에 있어서 불행한 사고(事故)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과 투쟁하는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正倫性, Identity)을 확인시켜주는 본질적이고 필연적 속성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다(요 16:33; 행 14:22). 살후 1장 자료노트, '환난에 처한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 참조.
3: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 선행절에 나오는 '여러 환난'이란 표현과 연결될 수 있는 어구이다. 한편 여기서 '받을'이라는 미래형으로 표기된 용어 '멜로멘'( )은 미래시제를 나타낼 뿐 아니라 '환난'이 미리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었음을 내포하고 있다(Milligan, Ellicott). 즉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여러 가지를 말하던 중에(살전 2:ll,12; 4:1,2; 살후 2:5) 장차 받을 현실적 환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는데(행 14:22; 살후 1:4,6) 본절에서 이야기하는 환난은 행 17:3-13에 나타난 내용과 더불어 현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겪고 있는 여러 환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바울의 환난 예언이 사실로 입증된 것은 환난 이후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약속도 그대로 실현될 것에 대한 강한 입중이 된다(행 14: 22). 바울은 여기서 이점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3:5 이러므로. - 선행 절에서 이야기한 내용 즉, 바울이 평소에 예고했던 바와 같이 환난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닥쳐왔다는 내용을 받는 접속사이다. 바울이 예고했던 것처럼 환난이 임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위기 상황을 묵과할 수만은 없다는 바울의 목회자적 염려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 1절 전반부의 진술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1절에서는 주어가 '우리'라는 1인칭 복수 형태로 나타났는데 반해 본절에서는 '나'라는 단수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표면에 나타난 단어에 집착하면, 1절에는 바울과 다수의 일행이 주체가 되어 있고 본절에는 바울이 단독으로 주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불일치는 1절 주해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이 단독으로 등장하면서도 전도단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설명으로 납득되어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라와 디모데 혹은 여타의 다른 동역자들이 바울과 함께 아덴에 체류할 수도 있었다는 개연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디모데와 실라가 아닌 익명의 동역자들이 아덴에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1절은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본절은 바울이 자기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1인칭 단수를 사용한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과연 아덴에 전도 동역자로 칭함 받을 만한 다른 동역자들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에는 다소 부정적이다. 학자들도 이 곤란함을 풀기 위해서 다양한 방도를 연구하였는데(1절 주해 참조) 거듭 강조하는 것은 독자들이 그중 하나를 꼭 택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대목에서는 바울이 단독적인 입장에서 진술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여겨진다.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 시험하는 자는 곧 사탄이요(마 4:3)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을 방해하는 악령이다. 그랜드 종합 교리 '귀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또한 시험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을 말하며 이들을 유대교로 회유하는 비열한 행동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런 유대주의자들의 훼방과 책동 속에서 사탄의 역사를 직감하고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신령한 싸움을 개시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 싸움의 승패의 관건(關鍵)은 물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있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어 선한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을까 우려한 바울은(고후 6:1; 빌 2:16) 자신이 신임하는 디모데를 보내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3:6-10 디모데의 보고와 바울의 기쁨
디모데 파송 배경을 기록한 앞부분에(3:1-5) 이어 본문에서는 돌아온 디모데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굳게 서 있다는 것과, 그들이 간절히 바울을 보고싶어한다는 보고로 인하여 바울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에 이어 기회가 닿는 대로 그들을 방문하였으면 좋겠다는 바울의 희망이 피력되어 있다.
한편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름다운 소식을 접한 바울의 기쁨을 통하여서 형제 영혼의 구원을 위한 바울의 영적 열심을 알 수 있으며 전도자는 마땅히 이러한 영적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9:22).
② 성도에게는 육적인 것으로부터 얻는 기쁨보다 영적인 기쁨이 우선하며(고후 7:4) 이러한 기쁨에 대하여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골 3:15).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 진술의 시제가 과거의 배경 설명으로 진행되었던 것에서 현재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선행 절에서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 파송 받은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본절에 접어들면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돌아와 바울에게 처리한 일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5절 이전과 6절은 얼마간의 격차가 있고 공간적으로도 디모데를 파송한 아덴에서 당시 바울이 머물렀던 고린도로 바뀌어 있다(행 18:5). 즉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해서 디모데의 보고를 받았으며 디모데의 보고를 받은 뒤에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디모데의 귀환 보고는 근심과 염려로 가득차 있던 바울의 심령에 단비를 뿌려 근심을 해소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케 하였다.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간직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달해 주었다. 여기서 믿음은 곧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사랑은 성도들 상호간의 교제에 관한 것으로 보여진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서 수차례 우려의 뜻을 나타냈으며(살전 1:3,8; 3:2) 디모데를 파송한 것도 결국 그들의 믿음을 염려한(2,5절) 때문이었다. 따라서 돈독한 믿음 뿐 아니라 위기와 곤궁에 처한 성도들이 상호간에 형제애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사랑으로 환난을 극복한다는 디모데의 보고는 실로 우려에 잠겨 있던 바울의 심령을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바울은 이를 '기쁜 소식'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이 뜻으로 평상시 통용되던 '아팡겔루신'( )이라는 용어대신 '복음 전파'의 의미를 함축한 '유앙겔리사메누'( )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디모데가 전달한 소식을 표현하였다. 그 의미를 풀어 말하자면 '디모데의 보고가 바울에게는 복음이 되었다'가 된다. 이처럼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후자의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사역의 소식' 외에 다른 뜻으로 사용된 것은 본절밖에 없는 이례적 사건이다. 그만큼 성도들의 믿음과 형제애적 사랑은 존귀한 것이요 사도 바울 또한 그 두 가지 요소를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의 반석 위에서 굳게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바울을 기쁘게 한 두 번째 소식은 바울 사도가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열심 이상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바울을 사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 전파자 바울에게 가지는 애정은 곧 복음에 대한 애착이요 그들의 신앙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간절히 보고자함'(에피포둔테스)은 전치사 '에피'( )와 동사 '포데오'( )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간절한 사랑이 전제된 사모함을 가리키는 단어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곧 간곡한 염원이 현재에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표현해 주는 말이라 하겠다(롬 1:11; 고후 9:14).
3: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느니라. -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바울에 대한 깊은 애정은 사도를 기쁘게 했을 뿐 아니라 사도의 궁핍과 환난을 극복하도록 독려하는 촉매제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구절이다. 궁핍과 환난은 외적인 처절함을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눅 21:23; 고전 7:36) 궁핍은 주로 육체적인 결핍, 환난은 외부 세력의 핍박을 나타내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전도 여행 중 수차례에 걸쳐서 궁핍과 환난을 당했으며(고후 6:4-5; 11:23-27) 그가 본서를 기록하던 고린도에서도 적지 않은 곤궁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고후 6:4; 12:10).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들려온 기쁜 소식은 그를 위로하여 이런 궁핍과 환난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확신이 내포된 문구이다. 얼핏 보면 가정(假定)의 뜻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Findaly) 이 문장은 오히려 '단언'하는 의미로 보아야 옳다.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할 때 '굳게 선다'라고 표현하곤 하였는데(갈 5:1; 빌 1:27) 유대인들과 자기 나라 사람들의 이중적인 핍박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믿음을 지킨(살전 2:14)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을 본절에 재차 인용하였다. 한편 '굳게 선' 곳을 '주 안'(엔 퀴리오)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동일하게 참된 신앙이 근거해야 할 정당한 위치를 밝히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서는 엡 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의 견고함은 곧 사도 바울에게 삶의 새로운 활력을 충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우리는 지금 정말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공동번역). 즉 본문은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았다'는 선행절의 어조를 반복하면서 이를 일단락 지우는 뜻을 내포한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살리라'고 표현된 부분의 해석에는 몇 가지 이견들이 제시되었다. 즉 이는 영원한 생명(요 17:3),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는 존귀한 생명(요 1:4), 환난과 궁핍이라는 제약적 요소들을 극복하는 생명력(고전 15:31) 등으로 풀이되었는데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즉 디모데가 전달해 준 소식이 바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으며 그것이 곧 바울로 하여금 궁핍과 환난을 감내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롬 8:36; 고전 15:31) 그래도 극심한 고통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목회자적 사랑에 있었다고 생각된다(Frame).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은 바울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큰 기쁨을 맛보게 하였다. 그런데 혹자는 '살리라'와 '기쁨'을 서로 동의어로 취급하여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Lightfoot) 상이한 용어를 굳이 그렇게 묶어서 해석할 까닭은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 표현은 고난을 이겨낸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이 바울에게 닥쳤던 궁핍과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활력을 가지게 하였을 뿐 아니라 환난을 기쁨으로 여기는 믿음을 소유하게 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이 위대한 사도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의 신앙도 교회 지도자나 주변 성도들의 신앙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 데살로니가 교회가 굳건하다는 디모데의 보고에 접한 사도 바울의 심경을 토로한 결론적 마무리 어구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한 바 있거니와, 데살로니가의 이방인 개종자들이 믿음 위에서 굳건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요 섭리의 결과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점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의 손길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살전 1:2). 또한 진실한 감사를 가진 자는 마땅히 그 은혜의 보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열정이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숙한 신앙인은 모든 행동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로 귀결된다. 한편 여기서 '주야'란 표현은 바울이 쉬지 않고 기도함을, 그리고 '심히'(휘페르에크페릿수)는 '아주 열심히'라는 의미로 이러한 표현들을 바울의 열정적 신앙을 보여 준다.
너희 얼굴을 보고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함이라. - 바울이 아주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부족한 점이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무장시키고 굳건히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한편 여기서 '부족'(휘스테레마)은 '뒤에 온다', '뒤에 남아 있다'라는 어원을 가지는데 성경에 인용되면서 '물질적, 영적 결핍'(고전 16:17; 고후 8:13; 골 1:24)의 의미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온전케 하다'(카타르티조)는 본래 그물이나(마 4:21) 그릇을(롬 9:22) 수리하고 정비한다는 뜻인데 명사형으로 쓰이면 성도가 직분에 적합하도록 준비하는 과정(엡 4:12)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문에 쓰인 단어를 분석해 보면 분명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에서 제대로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바울 또한 데살로니가의 방문 목적을 그들의 믿음을 보충하여 온전케 하려 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볼 때 바울이 이미 앞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을 고무적인 어조로 평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살전 1:3,8; 2:13; 3:6-8) 그들에게는 어떤 부족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주석가들은 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더 성장해야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Calvin, Bengel, Thomas), ②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에는 충만했으나(6절) 소망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③ 믿음에는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의 바탕이 되는 지식이 부족했으므로(Alford, Findlay) 바울이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중 첫째와 셋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바,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열정은 품었으나 재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살전 4:13-18) 오히려 무책임한 방종과 나태에 빠지기도 했으므로(살전 4:2-6) 사도 바울의 마음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태도를 유발시키지 않았나 판단된다. 칼빈(Calvin)은 이를 가리켜 이미 시작된 성도들의 믿음을 완전한 데로 인도하는 스승의 사명을 보여 준다고 논평하였다.
3:11-13 바울의 중보기도
본서 본론의 전반부(1:2-3:13)는 전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칭찬과 격려를 담고 있다. 그리고 특히 바로 앞부분에서는 디모데의 보고를 접한 바울의 영적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나와 있다(3:6-10).
이제 바울은 이에 이어 본문에서 본론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한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또 모든 사람 곧 불신자에 이르기까지 넘치도록 사랑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바울은 이러한 중보 기도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본문은 다음 장부터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재림과 실제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교훈을 주기에 앞서 수차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주어로 언급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바울의 성숙한 신앙이 반영된 부분이기도 하다.
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 바울은 본서 본론의 전반부인 역사적 부분(1:2-3 :13)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황에 대해서 감사하면서(1:2-10) 과거의 전도 사역을 회상하던 중 다시 감사에 복받쳐(2:1-16) 데살로니가에 또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2:17-3:10),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가 나타나는 여기에서는(3:11-13) 이러한 정황에 대한 반복되는 감사와 더불어 데살로니가 교회의 확고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본절에는 성부와 성자께서 전에 좌절되었던 자신의 데살로니가 방문을 가능케 하실 것이라는 바울의 믿음이 표출되어 있는데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를 연결시켜 표현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 신격(神格)의 단일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인정되고 있다(Ellicott). 즉 이미 바울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기는 성부, 성자의 일체성(Einheit)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을 본질적으로 동등한 격(格)으로 여겨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동일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을 완전히 하나로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신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Calvin) 바로 이 구절에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점이었던 삼위일체 개념의 신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살전 1:1; 살후 2:16). 삼위일체의 개념에 대하여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튜뒤노'( )는 곧은 길을 뜻하는 명사 '유뒤스'( )와 '따라서'란 뜻의 전치사 '카타'( )가 합성된 말이다. 즉 이 단어는 다른 방해 없이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방문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이 동사의 어미형태가 3인칭 단수변화를 나타내고 있는데(카튜뒤나이) 이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한 분으로 여긴 결과이며, 또한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터전이 되었음은 위에서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러한 바울의 기도대로 약 5년 후에 바울의 마게도냐 방문이 실현되었는데(행 19:21; 고후 2:13) 이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최고의 미덕이요 본질적 요소인 '사랑'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다. 물론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권고를 받을 만큼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었으나(살전 4:9,10) 사랑은 넘칠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제시한 사랑의 모범이 다름 아닌 바울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교만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은 사도로서의 바울이 그들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 즉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궁극적 사랑의 화신이시며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요 13:34)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도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피차 즉 성도간이나 모든 사람 즉 불신자에 이르기까지 넘치도록 사랑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영적 상태의 향상을 위한 중보기도인바 중보기도에 대하여는 고후 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 여기서 마음은 단순히 정서적 측면뿐만 아니라 지 . 정 . 의(知 ․ 情 . 意) 모든 측면을 가리키며 본문의 표현은 전인적인 인간성 위에 넘치는 사랑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 위에서 성도들이 더욱 견고하게 서는 것을 뜻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 본절 전체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 재림으로 시작되는 종말에 대비하여 경성하는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경성하여 종말을 준비해야 함을 교훈한 것이다. 그런데 주 예수의 강림과 관계되어 기술된 본문의 '모든 성도'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① 신자들이다(Calvin, Findlay, Gloag). ② 천사들이다(Dibelius, Moffat, Bailey). ③ 신자와 천사들 모두이다(Bengel, Ellicott, Milligan)라는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첫 번째 견해인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모든 성도'라 번역된 헬라어는 '판톤 톤 하기온'( )인데 '판톤'은 '모든'을 뜻하는 형용사, '톤'은 관사, '하기온'은 '거룩한 자'를 뜻하는 명사 '하기오스'( )의 복수형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줄곧 이 낱말을 '신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했으며(롬 1:7; 고전 1:2; 골 1:2; 빌 1:1). A.D. 2세기 전반에 기록된 '12사도의 교훈집'(Didache)이라는 문헌에도 슥 14:5의 '거룩한 자'를 '믿는 성도들'로 풀이한 용례가 나타나기 때문에 (Didache 16:7) 동일한 용어가 사용된 본절의 '모든 성도' 역시 신자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지닌 자들은 초대 교회의 묵시문학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미 죽었던 신자들과 함께 오신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며 본문을 신자들로 이해하는 또 하나의 근거로 세운다. 한편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근거로는 천사들이 주님의 재림 시에 함께 동행한다는 구절들이 있으며(마 13:41; 25:31; 막 8:38; 눅 9:26), '거룩한 자'들이 '천사'와 동의어로 사용된 구절들(시 89:5; 단 4:13; 8:13)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 등이 있다. 또한 이러한 구약적 배경과 함께 외경에서도(Enochl 1:9; 12:2; 39:5) 메시야가 천군천사들을 수행하고 재림하신다는 사상이 현저하게 나타나며 그러한 개념이 복음서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막 8:38). 이처럼 상기한 두 갈래의 흐름이 각각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양자택일을 굳이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본절 전체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결국 성도들의 '의로움, 거룩함'을 판단할 것이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거룩'(하기오쉬네)이란 낱말은 히브리인들의 '여호와 경배' 사상에서 태동된 용어로서 세속적인 것과의 '구별', '분리'를 뜻하는데 종종 하나님의 존재 형태를 나타내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기술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롬 1:4; 고후 7:1). 그런데 구약적인 거룩의 개념이 신약에 접목되면서 하나님께 대한 서술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는 성도들의 삶의 정결함, 순결 등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본절에서도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구별된 삶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들은 이처럼 견고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 그리고 풍성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매일의 삶에 있어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대해서는 눅 17장 연구자료 '다가오는 종말과 성도의 현실 생활 자세'를 보다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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