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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말세의 배도에 관한 예언과 이단의 그릇된 교리 경계 및 성도 신앙 교육과 관련된 목회 지침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목회의 주요 현안과 관련하여 본론 전반부 1:3-3:13에서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목회 지침을 준 반면에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본론 후반부 4:1-6:2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 하에 본장은 이단(Heresy, 異端)에 대한 경계와 성도의 신앙 교육과 관련된 목회 지침이라는 점에서 1:3-20의 내용과 대칭을 이루는 장으로서 구체적으로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들 중 두 가지를 실례로 들어 그것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이단의 가르침에 성도들이 유혹 받지 않도록 가르치며 성도들의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지도해야 할 참 교사로서의 목회자가 힘써야 할 신앙 교육적 측면에서의 목회 지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상술하자면 1,2절에서는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 사상과 그릇된 교훈에 미혹 당하여 바른 믿음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는 배도(背道)에 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 3-5절에서는 초대 교회 당시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이단의 그릇된 교리 중 혼인과 육식(肉食)을 금하는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으로 6-16절에서는 이러한 이단 사상에 대응해야 할 참 교사로서의 목회자가 힘쓸 일들 곧 스스로가 먼저 경건된 생활을 힘쓰며(6-10절) 매사에 믿는 자들의 본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말씀 연구에 힘쓰는 중에 사람들을 잘 가르치라는 교훈(11-16절)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이 주는바 구속사적 교훈은 실로 말세 지말에 처하여 더욱 거센 사탄(Satan)의 책동이 예상되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절실하게 요청되며 더욱 영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인바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 1-5절에서 기록한 말세에 있을 배도(背道)에 관한 예언과 이단(異端)의 그릇된 교훈에 대한 경계는 구속사의 최종 마감을 앞둔 현 세상에 대한 구속사적 인식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이러한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현 세상에는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케 한 사단(Satan)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세상을 심판하사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를 구분하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타락한 이 세상의 오고 오는 세대에 걸쳐 모든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하여 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사탄과 세상에 대한 심판을 유보(留保)하시고 장구한 구속사(救贖史)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침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탄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들을 향한 사단의 공격이 끊이지 아니할 것인데 그 양상은 곧 핍박과 환난 뿐 아니라 각양 이단 사상으로 미혹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더욱 분명하고 자주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의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항상 영적으로 경성해 있음으로 사단의 술수에 넘어지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지켜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빌 2:12). 후반부 6-16절에서 우리는 사단의 획책이 더더욱 거세게 일고 있는 말세 지말에 처한 현금에 있어 성도 개개인은 물론이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이단으로부터 미혹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의 진리 위에 올바로 굳게 서게 하는데 있어서 참된 교사로서의 목회자(牧會者)가 갖는 구속사적 사명이 실로 얼마나 막중한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속사적 사명을 능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 자신이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복음의 진리 위에 올바로 굳게 서며 또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각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함으로써 억지로나 강요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성도들이 자신을 따르며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 받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받게 된다. 한편 이단이 횡행하는 말세 지말에 이단(Heresy, 異端)에 대한 성도와 목회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관한 자세한 구속사적 교훈에 관해서는 제 1장 개관을 보라.
외울 말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4:8)
말세의 배도에 대한 예언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단의 거짓 교리에 대한 경계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참 교사로서의 자기 경건 훈련 권면
6 ○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참 교사로서의 성도 교육 명령과 그 자세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4:1-8 성결된 삶의 8대 지침
1.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삼상 12:23)
2.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를 지키라(살전 4:2-8)
3. 항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4. 말씀을 통하여 향상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라(딤후 3:16,17)
5. 주 앞에서 항상 겸비하라(약 4:10)
6.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힘쓰라(벧전 1:22)
7. 범죄 했을 경우에는 즉각 회개하라(요일1:9)
8. 이웃 사랑에 부족함이 없는지 돌아보라(요일 3:16-18)
도표-4:6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여러 표현들
1. 하나님의 봉사자(사 61:6)
2. 파수꾼(사 62:6; 겔 33:7)
3. 사람 낚는 어부(마 4:19)
4. 그리스도의 사환과 증인(행 26:16)
5.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롬 15:16)
6.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
7.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
8.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9.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
10.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 1:1)
11. 그리스도의 군사(빌 2:25)
12. 그리스도의 사도(살전 2:6)
13.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딤전 4:6)
14.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
15. 의의 전파자(벧후 2:5)
원어연구-4:3 받을 것이니라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에이스 메탈레프신'( )으로 명사 '메탈레프시스'( )의 목적격이다. 그런데 '메탈레프시스'는 동사 '메타람바노'( )에서 유래하였다. '메타람바노'는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 )와 '취하다'(take), '먹다'(eat)라는 뜻의 '람바노' ( )가 결합한 것으로 '참석하다'(to partake of), '함께 하다', '나누다'(share), '(함께) 음식을 먹다'(take food)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메탈레프시스'는 '함께 참여함'이란 뜻이 된다. 그런데 이 단어가 '~ 위하여', '~와 일치하며'라는 뜻을 가지며 목적격을 취하는 전치사와 나란히 쓰였기 때문에 본문은 '함께 참여함을 위하여'로 해석된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약간 의역하였으나 직역해 보면 '어떤 자들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함께 참여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기를 스스로 먹는 것을 금할 것이다'란 뜻이 된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처럼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금욕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자는 모든 것이 선하며 복될 뿐임을 말하고 있다.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자는 모든 것이 선하며 복될 뿐임을 말하고 있다.
4:1-5 배도(背道)에 관한 예언과 이단의 그릇된 교훈에 대한 경계
본문은 목회 현안에 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본론 후반부 4:1-6:2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본문은 바울이 말세에 있을 배교(背敎) 현상을 예고하면서 당시 이단 사상에 물들어 있던 자들의 그릇된 교훈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내용상으로 볼 때 1:3-20에 기록된 것과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1:3-11에서는 이단에 대한 신학 원리적인 측면에서 경계한 데 반해 여기서는 일단 말세에 많이 일어날 배도에 대해 예언한 후 그러한 배도를 주도하게 되는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들 중 혼인과 식물을 금하는 금욕주의적인 가르침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이 이단의 그릇된 교리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회자가 구체적인 말씀 교육에 힘써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신앙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육체적인 쾌락을 무조건 죄로 여겨 혼인을 금하는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과 구약 율법 중 레위기의 의식법에 따라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의 육식(肉食)을 금하는(레 11장) 유대주의적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이 그릇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중 혼인에 관하여서는 고전 7장에서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음식 문제에 관해서는 고전 8장에서 바울이 이미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다만 우리가 알 것은 부정한 음식을 금하고 있는 레 11장을 비롯한 구약 의식법(儀式法) 전체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예표 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성취되었고, 또 그것의 영적 교훈들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계승 승화됨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히 8:13).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성도는 더 이상 구약 의식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폐하여진 것을 다시 지키도록 하는 이단의 거짓 교리에 속박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고 계시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 바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롬 12:2). 그런데도 우리 역시 사람의 눈만을 의식(意識)하여 지금 이 같은 인간의 거짓된 교훈에 얽매여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기고 있지는 아니한가?
4:1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 )는 앞선 부분과 대조되는 사실을 거론하기 위한 접속사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앞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시킬 경우, '경건의 비밀'(딤전 3:16) 곧 복음이 그렇게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복음과 반대되는 악한 사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기 위한 말이 된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 여기에서 성령이 언제 누구를 통해 말씀하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추측컨대 바울은 일전에 성령께서 자신에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성령은 예언의 영으로서(행 20:23; 고전 12:10) 사람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 같은 계시의 말씀을 받은 자는 스스로 가감(加減)함이 없이 받은 바 그 말씀을 다시금 사람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었다.
후일에. - 여기서 '후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스테로스 카이로스'( )는 묵시 문학적 용어인 '말세'와 동일한 단어이다(딤후 3:1: 약 5:3). '말세'란 좁은 의미에선 예수 재림 직전의 때를 가리키나 보다 넓게는 예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사이의 모든 기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후일'이란 단어도 이중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첫째는 바울 당시의 시절에 기준해서 그다지 멀지 않은 가까운 장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둘째는 그보다 더 먼 훗날의 때, 즉 예수 재림이 임박한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약서신에는 이 '훗날' 또는 '장래에'란 말이 첫 번째 의미로만 쓰였거나 아니면 두 번째 의미로만 쓰인 경우도 있긴 하나 대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중적 의미로 쓰였다.
어떤 사람들이. - 이는 이단인 영지주의(Gnostirism) 중 금욕을 가르치는 자들과 구약 율법 중 레위기의 의식법에 따라 육식(肉食)을 금하는 따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금욕주의자들과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당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그릇된 사상은 3절에서 언급되고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그곳 주석을 보라.
믿음에서 떠나. - '배교'(tasty)를 뜻하는 이 말은 누가의 기록에서는 종종 볼 수 있으나 바울서신에서는 이곳과 고후 12:8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이단인 영지주의와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당한 자들은 자신들이 결코 믿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믿음을 지닌 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그처럼 주장한 이유는 그들이 믿음보다 지식을 더 높은 위치에 두고 그 지식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선 요일 서론 특별자료, '영지주의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미혹케 하는 영. - 마귀(딤전 3:6,7)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마귀는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여 바른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마 24:15; 요일 4 :6; 계 12:9) 이렇게 불리우기도 한다.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 여기서 '귀신'(다이모니온)은 딤전 3:6의 '마귀'(디아볼로스)와는 다른 말로써 복수로 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마귀는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데 비해 귀신들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 그 하수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의 '귀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같이 마귀는 이단자를 통해 가르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믿음에서 떠나게 되면 곧바로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믿음 안에 온전히 거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후 13:5). 그리고 신앙 세계에서는 결단코 중간 지대가 용납될 수 없음을 깨달아 항상 올바른 진리를 좇아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신실함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 여기서 '화인(火印) 맞다'라는 헬라어 '카우테리아조'( )는 이곳 외에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독특한 어구로 비유적이다. 당시 노예들은 이마와 같은 신체 부위를 불로 지져서 그 주인의 소유로 표시되었다(Theophylact, Lock, White). 물론 그 지진 부위는 다른 부위와는 달리 감각이 없어지고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것은 불로 지진 노예의 상처와 같이 한 개인의 양심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자기 행동이 그릇됨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디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4:19).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침을 받음(갈 6:17)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여 항상 불의와 부패를 일삼고 이웃과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자를 의미한다(Hervery). 한편 헨드릭슨(Hendriksen)은 양심의 화인 맞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① 거짓말을 계속함으로 성령으로 근심하시도록 함. ② 성령을 반대함. ③ 성령으로 하여금 떠나시게 함. ④ 성령을 거스려 반역함. ⑤ 따라서 양심의 기능은 어두워지고 굳어지게 된다. 즉 양심의 특징은 '진실'인데 이단자들의 양심은 화인 맞은 듯이 지을 수 없게 외식(外食)과 거짓으로 물들어 있어서 언제나 진리를 거스려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 '외식자'(휘포크리테스)란 본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자', 즉 배우를 뜻한다(Lenski). 이에서 파생된 '외식하다'(휘포크리노마이)는 말은 양심이 화인 맞아 마비됨으로 인해 본심에도 없는 언동을 함부로 하는 것을 가리킨다.
4: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금욕주의의 전형으로써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엣세네파(Essenes)의 한 특징이었다. 이들은 B.C. 2세기 이후에 생겨났는데 팔레스틴의 사해 연안 지대에 살면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장려하였다. 즉 이들은 공동 소유를 포함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음주(飮酒)와 육식(肉食)을 금지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본서 12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유대교 분파들'을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이러한 엣세네파의 금욕주의(禁慾主義)가 영지주의(Gnosticism)와 혼합되어 본절과 같은 이단 사상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의 이 같은 주장은 정신은 선하고 물질, 즉 육은 악하다는 생각과 육신의 욕망을 제어함으로 보다 고결한 삶을 힘쓰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인 제도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제정하신 선하고 아름다운 제도임을 안다. 즉 인간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 바로 혼인 제도이다(창 2:18-25). 다음으로 특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은 모세 율법에 나와 있는 규정이긴 하다(레 11장). 그러나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으니 오늘날 모세 율법 중 의식법(儀式法)은 그 문자적 구속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마 15:11).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도리어 인간의 그릇된 사상으로 속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금욕 생활은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곧 음란과 술 취함과 방탕함 그리고 시기함과 탐욕 등을 멀리하는 것이다(롬 13:13; 벧전 4:3).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바울은 식물이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니 속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롬 14:14; 고전 8:7). 여기서 '식물'이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각종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고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의 논조는 어떠한 식물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금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결코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롬 1:21). 그런 점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만이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무가치성이나 음식물의 제한 규정 등의 그릇된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하고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행 10:10-15).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본절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이 선하다(창 1:31) 라는 의미이다(Lenski).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중에 그 지으신 피조물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0,12,18,21,25,31) 라고 반복 강조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Hendriksen).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그 모든 것을 창조 질서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모두 선한 것이 된다. 그것은 식물의 경우나 혼인의 경우나 마찬가지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을 빌어서 유대인들이 어떠한 음식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아니하는 관례(慣例)를 거부한 것 같다. 즉 그는 레위기에 나타난 '정결한 동 ․ 식물'과 '부정한 동 ․ 식물'의 구별(레 11장) 자체를 거부하면서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고 가르쳤던 것이다(3절). 따라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서 자유하게 된 그리스도인이 금해야 할 음식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으니 인간이 정도에 지나치게 취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몸을 균형 있게 성장, 유지시켜 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근본 뜻과는 거리가 먼 금욕주의의 사슬로 자신을 얽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질서 안에서 모든 것을 합당하게 취하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성도들이 기도 중에 인용하는 성경의 구절로 이해한다(Alford, Debelius, Bernard, White). 한편 '식물'은 그 자체가 거룩한 성질을 지니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식물은 무인격체이고 또 스스로 하나님을 의식할 만한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식물을 취하는 사람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먹는다면 그 식물은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성전에 있던 물건들이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왕상 9:3). 따라서 성도들은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임을 깨달아 감사함으로 그것을 취하여 먹고 힘을 얻어 더욱 하나님을 위해 열심으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든 성도는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고전 10:3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그냥 먹고 마시는 것 자체만을 탐닉하며 방탕하게 취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배를 위하는 잘못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고전 6:13).
4:6-16 참 교사로서 목회자가 힘쓸 일들
앞단락(1-5절)에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경계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단의 가르침에 성도들이 빠지지 않도록 해야할 참 교사로서 목회자가 힘써야 할 교육적 측면에서의 목회 지침에 관해 언급한다. 그것은 먼저 참 교사로서 목회자 자신이 먼저 주께로부터 선한 교훈을 받으며 경건에 이르기를 힘쓸 뿐 아니라(6-10절) 매사에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며 말씀 연구에 힘쓰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잘 가르치라는 것이다(11-16절).
이상에서 우리는 참 교사로서 성도들을 교육해야 할 목회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첫째, 목회자 자신의 삶으로 본을 보임으로써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스스로 경건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둘째, 자신의 주장이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무리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먼저 말씀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셋째, 말씀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 말씀의 진위를 나타내어 성도들이 순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에게는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뒤로 하고 말씀의 권위를 앞세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말씀을 가르칠 때는 쉬임 없이 계속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이 그 말씀을 따라 실천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4:6 네가 이것으로. - 이것이 앞선 부분 전체(딤전 1-3장)를 가리키는 것인지(White), 아니면 바로 앞선 금욕에 관한 경계의 말(1-5절)을 가리키는 것인지(Hendriksen, Vincent)에 대하여 양론이 있다. 그러나 본장이 새로운 측면에서 새로운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1절 주석 참조) 대체적으로 후자를 정설로 취한다.
형제를 깨우치면. - 여기서 '깨우치다'(휘포티데미)라는 말은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충고'나 '권고', '제의' 등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혜로운 자들의 한 특징으로 저들은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에 있어 강압적으로 어떤 지식을 주입시키기 보다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른 교훈을 제시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하곤 한다. 이것은 실로 참된 권위를 지닌 지도자의 모습과 지도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 여기서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 )는 딤전 3:8의 '집사'와 같은 낱말이나 여기서는 '섬기는 자', '봉사자'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선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음은 저가 그리스도의 뜻을 좇아 행하는 충성된 일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딤후 2:3의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란 말과 같은 것이다(Hendriksen). 한편 이 용어가 에베소 교회의 교역자인 디모데에게 적용된 것임에 비추어 '선한 목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때 '목자'(shepherd)란 오늘날의 '목사'(minister)와 같은 말이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여기서 '믿음의 말씀'이란 '복음'을 의미하고 '선한 교훈'이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준행해 온 성경적 교훈을 가리킨다(딤후 3:15-17).
네가 좇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콜루데카스'( )의 문자적인 뜻은 '네가 친밀히 지켜온'이다. 즉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가르침에 합당하게 생활해 온 것이다(딤후 1:5). 한편 이 말은 눅 1:3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서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의 발자취를 바짝 좇아가다' 혹은 '사건의 과정을 재연하다'는 뜻을 지닌다. 즉 이 말은 '어떤 사람의 생각을 따르다'는 의미이다.
양육을 받으리라. -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었으나 고전 헬라어에서는 '양육하다' 또는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다'의 뜻으로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스스로 양육하라'는 뜻으로서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옮길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이 네 자신을 훈련하라'이다(Alford). 이는 교역자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교인들을 양육하는 자이지만 그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가운데 스스로도 보다 성숙된 상태로 양육 받게 되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 여기서 '망령된'(베벨로스)은 '사악한', '속된', '경건치 않은'이란 뜻으로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때 무가치한 것을 가리킨다(Lenski). 그리고 '허탄한'(그라오데스)은 '노파다운'이란 뜻으로 노파들이 아이들에게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허풍'을 가리킨다(Earle). 그러므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란 '신화와 끝없는 족보'(딤전 1:4)와 같은 말로써 앞절의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6절)에 반대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이단인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무익하고 거짓된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에 관해 경계토록 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 여기서 '연습하다'(귐나조)는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히브리서에 두 번(히 5:14; 12:11) 그리고 베드로후서에 한 번(벧후 2:14) 나온다. 이 단어는 운동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옷을 벗고 연습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본절에서는 그와 같이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라는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 한편 여기서 '경건'(유세베이아)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하였다(시 2:11). 그러면 경건을 연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경건하게 살게 되기까지 연단 받는 것을 의미한다. 즉 ① 기도와 구제에 힘씀으로 경건을 이루어가고(행 10:2), ②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에 힘씀으로 경건을 이루어 가고(히 5:13,14), ③ 주를 위한 고난을 계속 받음으로 경건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롬 5:3,4). 결국 경건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8 육체의 연습은. - 이는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는 것과 같은 금욕 생활(3절)에 힘쓰는 것을 가리키는지(Calvin, Grotius, White) 아니면 운동 경기에 나가거나 또는 건강 유지를 위하여 신체 단련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지(Chrysostom, Theodoret, Huther, Bengel, Alford, Lock, Gealy)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앞절에서 '연습하다'(7절)는 말이 운동 경기를 위한 신체 단련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 이것은 '적은 유익'을 의미하는데 그렇다고 육체의 연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의 연습이 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전제일 뿐이다. 즉 경건의 연습에 비해 신체의 연단은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유익이 있을 뿐이니 곧 적은 유익이라는 것이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경건 생활에 힘써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금생(今生)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고(마 6:33,34), 죽어 내세(來世)에서도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이다(막 10:30). 즉 육체의 단련은 현세에서만 건강하게 사는 유익을 가져올 뿐이나 경건의 연습은 위와 같은 고귀하고 영원한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축복을 '약속'이라 일컫고 있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 받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축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람 중 대다수는 영적 소경이어서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함으로 경건을 힘쓰지도 이루지도 못하고 있다.
4: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 이와 같은 관용적 표현은 목회서신의 특징이 될 만큼 자주 나온다(딤전 1:15; 3:1; 딤후 2:11; 딛 3:8). 그런데 '이 말'이 ① 바로 앞선 8절의 내용을 받는 것인지(De Wette, Hither, Gealy), ② 뒤따르는 10절을 받는 것인지(Alford), ③ 아니면 딤전 3:16을 받는 것인지(Heinrich)에 관해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나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서는 앞절 곧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한편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관용적 표현에 대하여선 딤전 3:1 주석을 참조하라.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 헬라어 성경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란 접속사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란 8절의 내용인 경건의 연습에서 얻어지는 금생과 내생의 약속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ock, White, Gealy). 즉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썩을 면류관에 두지 아니하고(고전 9:25) 금생과 내생에서의 축복을 약속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두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다.
진력하는 것은. - 여기서 '진력하다'(아고니조마이)는 말이 어떤 사본(Textus Receptus D.L)에는 '능욕을 받다'(오네이디조메다)는 말로 대치되어 있는데 이 표현이 더 힘이 있고 나은 듯하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단순한 수고 이상의 어떤 것, 곧 성도가 견뎌온 극심한 박해와 고통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4:9-13; 고후 11: 23-27; 딤후 3:11). 즉 이는 성도가 세상사는 동안 각종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까닭임을 잘 나타내 준다(롬 8:17).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모든 자들의 구주시라. - 여기서 '하나님'을 '구주'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저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며(겔 33:11) 또한 일반 은총 가운데 그들을 보존하여 유지하심(마 5:45)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라 함은 하나님의 원하심과 달리 구원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요 3:16-18).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참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을 위해 비록 이 땅의 삶이 힘들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또 정열을 다해 복음 전파와 경건에 힘쓸 수 있는 것이다(골 1:29; 4:12; 딤후 4:7). 한편 하나님을 가리켜 '구주'로 표현한 경우는 딤전 1:1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즉 이에 관해서는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4:11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 여기서 '이것들'이란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교훈을 가리키는 데 작게는 구원의 도리와 경건 생활에 관해 언급한 1-8절의 말씀을 의미하며 크게는 1-4장의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 그리고 '명하다'(파랑겔로)는 원래 군대에서의 명령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신적 권위에 입각해 당신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명하신 것을 가리킬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다(마 10:5; 눅 8:29). 따라서 본절은 디모데에게 그가 확신한 진리에 근거하여 명할 자를 명하고 가르칠 자를 가르치고, 또 명할 때 명하고 가르칠 때 확실히 가르치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즉 이것은 목회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권위에 입각해 교인들을 양육하고 지도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오테토스'( )는 어린아이나 청소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군대에 나갈 만큼 다 자란 사람으로부터 40세 정도까지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로써 노인들에 비해 저들의 경험과 연륜이 부족한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Loek). 한편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수행했을 때(행 16:1-3)를 20세 전후로 본다면 이때는 38-40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Vincent, White). 따라서 그가 나이 많은 장로들과 교인들 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연소함에 업신여김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가 연소하다는 이유 때문에 교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제대로 교인들을 지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디모데가 이 같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 온 교회의 본이 되어야 했다.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의 연령의 문제까지 들어 저에게 필요한 목회 지침을 일러주고 있는데 여기서 디모데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부성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딤전 1:2).
오직 말과 행실과. - 이는 곧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가리킨다. 누구든지 자신의 말하는 바와 그 행동하는 바가 각기 틀리면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특히 교역자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바는 사적(私的)인 것이 되지 못하고 공인(公人)으로서 행한 것으로 평가될 뿐이다. 그러므로 타인에 비해 더욱더 주의하고 모범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 이 단어는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주고받는'(give and take) 식의 이해관계가 전제된 사랑이 아니라 남을 이해하고 관용하며 무엇이든 남에게 베풀 줄 아는 '무조건적 사랑'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전도하며 기도한다는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이다. 이와 관련해선 요일 3장 자료노트 '원어로 살펴본 사랑의 개념'을 참조하라.
믿음과. - 앞에서의 '사랑'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가리킨 것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을 대하는 마땅한 자세이다. 즉 이것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충실한 봉사와 신실을 의미한다.
정절에. - 이는 도덕적으로 방탕하지 않고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우상 숭배하지 않고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순결한 양심을 지닐 때에 만이 가능하니 '깨끗한 양심' (딤전 3:9)과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포스'( )의 문자적인 의미는 쇠로 만든 틀을 쳐서 생기는 '자국'을 뜻하는데 고전 10:6,11에서는 '거울'로 번역되어 '모형'(Type)을 뜻하였다. 본절에서는 성도들이 목자의 거동을 주시하고 그 행하는 대로 본받게 되니 매사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4:13 내가 이를 때까지. - 이는 1차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보려고 에베소를 방문하고자 한 사실을 가리킨다(딤전 3:14).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행이 지체될 것 같자 바울은 먼저 본 서신을 띄워 디모데에게 권면과 교훈, 위로를 베푼 것이다. 딤전 3:14 주석 참조.
읽는 것과. - 이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탐독하는 것 뿐 아니라(Robertson) 예배 시에 회중 앞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말한다(Earle). 즉 초대 교회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행해져 왔던 성경 낭독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아 예배 의식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때 읽은 책들은 구약 성경과 각 권에 따라 기록이 완료된 신약 성경들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가 기록되기 전에 이미 기록 완료된 신약 성경으로는 데살로니가전 ․ 후서와 고린도전 ․ 후서, 로마서 그리고 사도행전 등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성경의 분류'를 참조하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 이는 성경의 진리를 바로 해석하여 들려줄 뿐 아니라 그 가르침에 입각해 사람들이 바로 행동하고 바로 살 수 있게끔 교훈한 것을 가리킨다. 즉 사람들이 단순히 성경 말씀을 읽고 듣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며 그 진리에 입각해 바로 살 수 있게끔 지도할 의무가 목회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착념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케'( )는 '주력하라', 혹은 '열중하라'는 뜻이다. 즉 목회자의 본분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올바로 양육하는 데 있으니 온 몸과 마음, 시간을 거기에 다 쏟아 부으라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는 말씀을 떠올릴 수 있다.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 이는 바울이 즐겨 쓴 용어로 로마서에 6회, 고린도전서에 7회 사용되었고, 벧전 4:10에 한 번 나타날 뿐이다. 여기서 '은사'(카리스마토스)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을 뜻하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사를 뜻하고(롬 5:15; 6:23), 좁은 의미로는 병 고치는 것 같은 특수한 은사를 뜻하기도 한다(고전 12:9). 이에 관해서는 고전 12장 연구자료, '은사의 이해'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장로의 회에서. - 이는 원래 유대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유대의 최고 권위 기관이며 사법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을 일컫는 말이다(눅 22:66; 행 22:5). '산헤드린'에 대해서는 12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러한 조직이 초대 교회 정치 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회의 중대사를 논하는 의결기관이자 성례전을 집행하던 단체로 직제화 되었던 것이다(행 20:17). 또한 교회에서 장로들의 모임이 직제화된 시기는 대략 A.D. 1세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장로들의 모임이 일찌기 존재한 것은 바울이 3차 여행의 귀로 시(歸路 時)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행 20:17). 한편 딤후 1:6에 의하면 바울도 이 장로회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수 받을 때에. - 안수(接手)는 구약 시대 때부터 시행된 오랜 풍속이었다(Lange). 구약에서 행해진 경우를 보면 족장들이 축복할 때(창 48:14), 직분자를 세울 때(민 8:10; 신 34:9), 병 고칠 때(왕하 4:34) 등이다. 이런 경우 안수는 시행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받는 자에게 영적 은사나 능력, 또는 축복 등을 수여하는 상징적 행동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안수 행위는 초대 교회에도 전승되어 감독을 위시한 장로의 회에서 병든 자(막 6:5; 눅 4:40), 성령의 내주가 필요한 자(행 19:6)에게 실시되었으며 교회의 지도자를 임명할 때(행 6:6) 또는 축복을 빌 때(막 10:13)에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12사도가 안수 받은 기록은 없고, 또 초대 교회에서도 안수는 고정 예배 의식 중 하나가 아니었다. 더욱이 바울은 디모데에게 함부로 안수하는 것을 금하기까지 하였다(딤전 5:22). 이러한 안수에 대하여서는 창 48장 자료노트, '안수'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서 디모데가 안수 받은 때와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확실치가 않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①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복음의 일꾼으로 동행하고자 하였을 때(행 16:1-3, De Wette, Hendriksen, Wiessenger), ②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였을 때(luther, Alford, Lock)로 각기 추정을 하는데 대체로 두 번째를 정설로 취한다.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을 조심 없이 말며. - 신약 성경에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는 것도 일명 '예언'으로 언급하였다(고전 14:3). 그러므로 본절은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 장로들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 권면의 말을 들려준 것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 여기서 '모든 일'이란 목회자로서 수행해 나가야 할 일, 즉 성경 읽기, 설교하기, 가르치기, 자신의 믿음과 인격을 성숙시키는 일,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12-14절). 그리고 '전심전력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멜레타오'( )는 여기서 두 가지 뜻을 가지는데 ① 그 받은 사명대로 교역(敎役)을 힘쓰라와 ② 그 일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연구하라는 의미이다. 한편 이 밖에도 행 4:25에서는 이 단어가 어떤 사실을 놓고서 연구하거나 미리 생각하는 것 또는 서로 의논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대개 춤추고 활 쏘는 것과 같은 기술을 '연마하다' 또는 '실천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Hervery).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 여기서 '진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코페'( )는 '성장'을 뜻한다. 이 말은 이곳 외에도 빌 1:12,25에 보이는데 어떤 것의 성장이나 발전을 나타낸다는 뜻의 '복음의 진보', '믿음의 진보'로 쓰였다. 한편 본절이 가르쳐주듯이 참된 목자는 자신의 삶과 그 모든 하는 일에 있어서 끝 없이 진보하여야 하며 그 진보를 성도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목회자를 평가하는 근본적인 척도는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들은 입술로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한 메시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 여기서 '삼가'(에페케)란 '주의 깊게' 보는 것을 뜻한다(눅 14:7; 행 3:5; 19:22). 즉 목자가 무엇보다도 먼저 관심을 둘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Lenski). 이는 비록 교역자로서 자신의 생활이 깨끗하고 아름다울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교훈이 불건전하면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데 유력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역자의 교훈이 비록 바른 진리에 입각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생활에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외식자(外飾者)로 취급받고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 이는 교역자가 자신의 본분을 힘써 행하면 자신도 구원 받고 그의 가르침과 권면을 받는 교인도 구원에 이르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목회 사역은 육신을 위한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거저 받았으니 남에게도 거저 주는'(마 10:8) 거룩한 사역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하고 그 믿음의 도리에 합당하게 살도록 사람들을 양육하는 성직(聖職)이다. 그뿐 아니라 교역자는 그 일을 할 때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러움이 없도록 힘쓰게 되니 결과적으로 스스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믿음과 구원을 굳게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롬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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