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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문안 인사와 장로의 자격 및 거짓 교사 경계
구속사적 개관
전 21권의 신약 서신서는 신 ․ 구약 성경 66권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의 구속(救贖) 구원의 원리를 말하는 동시에 이의 성도의 실제 생활에서의 실천적 원리와 실천적 적용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디도서는 바울의 세 목회 서신 중의 하나로서 사단(Satan)의 사주를 받은 세상의 핍박과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또 교회의 조직과 질서를 확고히 함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성도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되도록 해야할 목회자의 목회 지침 및 사회와의 관계에서 성도의 바른 태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본서를 시작하는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된다.
먼저 전반부 1-4절은 본서의 도입부로서 서신서의 정형화된 인사말 양식에 따라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기하고 사도권에 근거한 축도로써 문안 인사를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천명함과 동시에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전도인의 사명을 밝히면서 디도도 자신과 동일한 전도인의 사명을 받은 자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음으로 후반부 5-16절은 본서 본론인 1:5-3:11까지의 내용들, 즉 디도가 목회하고 있던 그레데 교회가 직면한 여러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목회 지침들과 목회자의 성도의 바른 신앙 생활 지도 지침 및 국가 권세자들과 불신자들에 대한 성도의 바른 태도에 대한 실천적 교훈을 기록한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즉 여기서는 교회 내부의 질서 확립과 성도의 바른 생활 지도의 가장 중요한 관건인 두 가지 내용, 즉 장로 또는 감독의 자격과 유대주의적 이단에 대한 경계라는 신학적 교훈을 주고 있다. 그 내용을 좀더 상술하면 먼저 5-9절에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 지도와 교회 질서 확립, 특히 거짓 교사들의 책동으로부터 성도와 교회를 보호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장로 또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10-16절에서는 당시 그레데 교회를 혼란시키던 할례당(割禮黨)으로 대표되던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전반부 1-4절의 머리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고 구속 구원을 얻게 된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부름 받는 순간 다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구속사적 사명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주께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받은 이유와 자신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의 한 노정에서 각각 주께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인바 자신이 받은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그 사명(使命) 수행을 위한 목표에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 5-16절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 다음의 두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먼저 5-9절에서 신약 시대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인 교회는 조직(組織)을 갖추어야 함을 말하는바, 이는 교회의 일치와 질서 확립과 성도의 자질 향상, 그리고 선교 사업의 효율적 진행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교회 조직과 교회 조직의 효율적이고 바른 운영을 위한 직분자들의 자격에 관한 구속사적 의의에 관해서는 딤전 제 3장 개관을 참조하라.
그리고 10-16절에서 이단(異端), 근본적으로는 그 배후에서 이단을 조종하는 사단(Satan)의 책동은 교회의 존립 자체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종 실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하는 그의 궤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단의 책동은 비단 본문에 제시된바 디도가 목회하던 그레데 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약 2,000년 교회사(敎會史)에 있어 계속 있어 왔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자유주의 신학이나 세속 학문으로 가장한 이단의 활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의 책동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사 그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 목회자(牧會者)들은 물론이고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이단의 책동으로부터 자신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위에 든든히 서고 항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항상 성령 충만하여 언제라도 이단, 근본적으로는 그 배후의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는 영적 전투태세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엡 6:10-20).
외울 말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ㄹ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지기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 1:15)
문안 인사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장로 자격
5 ○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단 경계
10 ○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 바울의 사도권 변호 이해
고후 11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2 성도의 소망의 특징
성도는 이 땅에서 구원받은 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이다. 이런 성도의 소망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또 세상이 아무리 불의의 쾌락으로 유혹하여도 이 나그네 생활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촉매가 된다.
다음에서 성도가 갖는 이 소망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보자.
1. 하나님께 향한 소망(행 24:15)
2. 보이지 않는 소망(롬 8:24,25)
3. 성도가 함께 얻을 소망(고전 9:10)
4. 의의 소망(갈 5:5)
5. 부르심 받아 생긴 한 소망(엡 4:4)
6. 하늘에 쌓아둔 소망(골 1:5)
7. 영광의 소망(골 1:27)
8. 좋은 소망(살후 2:16)
9. 영생의 소망(딛 1:2)
10. 복스러운 소망(딛 2:13)
11. 주께 나아가게 하는 소망(히 7:19)
12. 산 소망(벧전 1:3)
도료-1:5,9 권면의 15대 목적
1. 형제의 영혼을 구원함(마 18:15)
2. 형제를 회개로 인도함(눅 3:3)
3.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함(행 14:22)
4. 형제에게 안위를 줌(고전 14:3)
5. 하나님의 사업에 열심을 내게 함(고후 9:5-9)
6. 온전한 신앙을 갖도록 성숙케 함(골 1:28,29)
7.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함(살전 4:1-6)
8. 교회의 덕을 세움(살전 5:11)
9. 성도 간에 화목케 함(살전 5:13)
10. 모든 사람에 대해 선을 행하게 함(살전 5:15)
11. 말씀의 가르침을 준행토록 함(딛 1:9)
12. 근신하며 행실을 절제토록 함(딛 2:6)
13. 죄에 유혹되어 강퍅케 되지 않게 함(히 3:13)
14.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게 함(히 10:25)
15. 그릇된 교훈에 유혹받지 않게 함(히 13:9)
원어연구-1:8, 근신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프로네오'( )이다. 이는 '소스'( )와 '프렌'( )의 합성어인 '소프론'( )에서 유래했다.
먼저 '프렌'은 원래 힁경막 심장주위 부분, 혹은 배속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은유적으로 '마음'(mend), '생각하는 능력'을 지칭하게 되었다 한편 '프렌'의 동사형인 '프로네오'( )는 '생각하다'(행 28:22), '~할 마음이 있다'(롬 15:5), '~에 주의하다'(롬 14:6)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구원하다'(마 1:21), '치료하다'(마 9:22; 막 5:34)의 뜻인 '소조'( )와 같은 어근을 가진 '소스'는 '안전하고 건전한'(safe and sound)이라는 뜻이다. 이에서 파생된 동사 '소프로네오'는 자신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 욕정을 억제하다',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다', '자기 통제를 행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근신하다'는 교회의 감독자가 갖춰야 할 모습으로 먼저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고 자신의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절제함으로써 자신을 온전케 하는 것을 말한다.
1:1-4 문안 인사
본서는 바울이 그레데 교회의 목회자인 디도에게 거짓 교사를 척결하며 교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지침을 주기 위하여 기록한 서신이다. 이러한 본서를 시작하는 도입부인 본문에서 바울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기하고 자신의 사도권에 근거한 축도로써 수신자 디도에게 문안 인사를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 서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형화된 인사말 형식이다.
그런데 바울이 디도에게 문안 인사하는 본 지면을 빌어 주께서 자신에게 사도(使徒)의 직분을 주신 목적은 참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음을 특히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 때문이었다. 즉 당시 그레데 교회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횡행하고 있었고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신앙생활은 문란한 상황이었으므로(9-16절) 디도가 그 같은 모든 상황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디도 자신이 목회자로서의 사명 의식에 투철하지 않으면 안 됨을 교훈하기 위해서 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도 그 내용과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사명들을 소유하고 있는바, 자신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의 삶의 현장 속에서 그것을 힘써 실천하려는 사명자로서의 자세를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마 28:19,20).
1:1 본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본 서신의 도입부로 문안 인사를 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使徒權)을 주장하고 있다. 딤전 1:1 주석 참조.
하나님의 종. -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과 사명을 받았던 자들을 가리키던 구약적 개념과 달리(출 14:31; 수 1:1; 24:29; 삼하 3:18; 왕상 14:18; 렘 7:25) 신약 성경에서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기도 한다(롬 6:22).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 크리스투이에수)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롬 1:11 빌 1:1). 또 다른 표현으로는 딤후 2:24에서 '주의 종'(둘로스 퀴리우) 그리고 갈 1:10에서는 '그리스도의 종'(크리스투 둘로스)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주로 '그리 스도의 종'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데 반해 디도서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란 용어를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이는 그레데에서 복음을 거스르고 훼방하던 유대인들(14절)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겼던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은 하나님의 일꾼임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종'(servant)은 주인께 예속되어 주인의 일을 힘껏 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절대적인 순종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 여기서 '사도'에 해당되는 '아포스톨로스'( )란 말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특별한 위임을 받고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의 12제자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세움 받고 그 특별한 권위를 인정받은 자를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한편 바울서신에서 이 단어는 롬 1:1; 고전 1:1; 고후 1:1; 딤전 1:1; 딤후 1:1에 나타난다. 비록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의 제자 중 하나로 부름 받지는 못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된 자임을 시사해 준다. 즉 본서는 비단 디도 한 사람에 국한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돌려 보아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Hervey).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세움 받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고자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해 놓으신 자들을 가리킨다(엡 1:3-5). 바울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 믿음을 증진시켜 주기 위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 받는 것이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 여기서 '지식'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는 문자적으로는 이해, 파악, 확인 등 특히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친숙하거나 잘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 지식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지적인 의미의 이해가 아니라 개인과 대상 간의 인격적이고도 삶 전체를 통한 경험적인 앎까지도 의미한다. 신약에 나타나는 이 단어의 사용은 대개 이러한 히브리적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는 '진리의 지식'이란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代贖) 죽음을 당하셨으며 그 후에 부활하고 승천하신 것이 우리 인간과 무슨 연관을 지니는 가'를 바로 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의 지식'이란 말 앞에 '경건함에 속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유는 그릇된 진리를 신봉하는 자들이 부패한 심령을 지닌 자들로서 멸망에 처해 있는 것과는 달리 바른 진리를 깨닫는 자들은 경건함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건함'이란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결한 생활과 선한 행실을 힘쓰는 것을 가리킨다(딤전 2:2; 4:7; 딤후 3:5). 그러므로 바울이 이 같은 말을 함에 있어서는 당시 복음의 바른 진리를 왜곡하여 가르치던 거짓 교사들의 허탄한 교훈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 본절에서 바울의 메시지는 영생의 소망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영생'(eternal life)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이는 즉 모든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하여 영원한 사망 가운데 처해 있던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함으로써 생명의 길이 다시 열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요 3:16; 롬 5:12-21). 성경은 이러한 예수에 대하여 '생명이시며'(요 11:25; 14:6)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과 같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지신 분'(요 1:4; 5:26)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베풀기 이전에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종교인 것이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본절에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거짓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며 하나님 자신이 참되신 분인 것을 강조한다(삼상 15:29; 롬 3:4).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의 '신론' 중 '하나님의 속성'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이 구절은 그레데인이 거짓말쟁이라는 말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12절).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은 결코 변개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들에게 주기에 충분하다.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 여기서 '때'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보통 2가지로 나뉘어진다. 때의 계속을 가리키는 헬라어 '크로노스'( )와 때의 어느 특별한 시점을 가리키는 '카이로스'( )이다. 여기에서는 '크로노스'가 쓰여져 있다. 한편 여기서 '영원한 때'라는 것은 창세 전부터의 시간을 뜻한다. 이것은 딛 1:3의 '때'(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의 의미와는 대립되는 개념이다(Hervey). 바울은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진행되어져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작정하셨음을 일깨워주고 있다(롬 8:29,30; 고전 2:7; 엡 1:4; 딤후 1:9).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신론' 중 '하나님의 작정 및 예정'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1:3 자기 때에. - 본절에서의 '때'는 2절의 '때'(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 시점을 가리키는 '카이로스'( )가 쓰였다. 특히 목회서신에서 이 단어는 약속된 하나님의 시간을 뜻하는 구원사적인 용어이다(딤전 2:6; 6:15). 그러므로 본절은 갈 4:4의 '때가 차매'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 여기서 '자기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2절)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영생에 관한 약속인데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사 대속(代贖) 사역을 완수하심으로써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허비(Hervey)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포함하여 복음의 전체 계시로 이해한다. 한편 '전도'(케뤼그마)라는 단어는 '선포'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골 1:26-29; 딤후 1:10).
우리 구주 하나님. - 목회서신의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을 '구주'(Savior)라고 표현하는 것이다(딤전 1:1; 2:3; 4:10; 딛 2:10; 3:4).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하나님 자신이 구원 사업을 직접 행하는 자임을 강조해 준다. 한편 동시에 4절에서처럼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다(눅 1:47; 유 25).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동일성을 보여준 것이다. 구원의 전 과정 속에는 태초로부터 영원하신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이것을 직접 실현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오신 예수님이 함께 역사하신다.
내게 맡기신 것이라. - 복음 전도의 사명은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위탁 받은 것으로서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준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친히 사도의 권위를 부여해 주신 것이다(행 9:15,16).
1:4 서신서의 인사말 가운데 수신자와 축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 여기서 '같은 믿음'이란 말은 좁게는 바울과 디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동일한 믿음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의미한다(Hieberth). 한편 '같은 믿음'(코이넨 피스틴)이란 어구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표현이다. 이는 성도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됨을 일깨워 준다.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 이 편지의 수신자인 디도(Titus)는 사도행전에는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본절을 제외하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 열두 번 언급되고 있다. 언급된 곳을 보면 고후 2:13; 7:6,13,14; 8:6,16,23; 12:18; 갈 2:1,3; 딤후 4:10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도 간접적으로는 언급되어 있는바 행 15:2과 갈 2:1,3을
비교해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와 동행한 사람 중에 디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도에 관하여 언급된 이상의 성경 구절을 종합하여 보면 디도의 양친은 모두 헬라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갈 2:3). 디도는 바울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항상 바울의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예로 고린도 교회가 갖가지 분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파송된 자가 디도였다(고후 8:16). 그는 난국을 수습하는 적임자였던 것이다. 또 그는 동시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여 주었다(고후 8:6-15). 실로 디도는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 준 믿음의 동역자였다(고후 7:6,13,14). 바울이 이러한 디도를 향하여 '나의 참 아들'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디도를 개심시켰기 때문이다. 본절의 '아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테크논'( )은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는 의미와 함께 '너는 나에게 소중하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Hendriksen). 바울은 디도를 믿음 안에서 낳았으며 디도는 바울에게 있어서 진실한 믿음의 '참 아들'이었다. 또한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디모데에게도 동일한 칭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딤전 1:2). 한편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참 아들'이란 칭호 외에도 '형제'라고 불렀으며(고후 2:13) '일과 수고의 동역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후 8:23). '디도'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하나님 아버지와‥‥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바울서신에서 볼 수 있는 축도의 전형적인 형태이다(고전 1:3; 고후 1:2; 갈 1:3; 딤전 1:2; 딤후 1:2). 이 가운데 '은혜'(카리스)란 단어는 바울서신에서 약 100여회 나타난다. 구약에서 '은혜'는 '우아함' 혹은 '아름다운 것'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으나(잠 31:30), 바울서신에서는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 말로써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그의 백성에 대한 호의(favor)로써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무조건적인 것이며, 인간 편에서는 공로 없이 얻는 과분한 것이다(엡 2:8).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써의 구원과 축복을 가리킨다(롬 5:2). 다음으로 '평강'(에이레네)이란 말은 바울서신에서 40번 이상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죄인이었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과 그로 인한 마음의 평안과 삶의 기틀을 누리게 된 것을 가리킨다. 이는 히브리어 '샬롬'(솰롬)의 의미와 비슷한 것으로 '완전함'과 '번영'과 '복지'란 의미도 지닌다. 그런즉 '은혜'가 물의 원천이라면 '평강'은 이 수원(水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줄기이다(Hendriksen). 바울은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저들이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 됨을 축도의 형태를 빌어 말하고 있다.
1:5-9 장로(감독)의 자격
본문은 1:5-3:11까지에 이어지는 본서 본론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중 본문은 교회 질서의 확립 및 기독교의 정통 교리 수호의 책임이 있는 장로(감독)의 자격요건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그레데(Crete) 교회에는 다른 지역의 초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이단들, 특히 모세의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거짓 교사들이 맡았고, 이들로 인하여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상당히 위협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질서도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바울이 본서를 쓴 목적은 그 같은 혼란에서 그레데 교회를 보호하며 올바른 신앙을 확립하는 데 목회자인 디도( )가 앞장서도록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본서에서 제일 먼저 장로의 자격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이유도 그러한 상황 하에서 올바른 지도자의 선택이야말로 교회 질서 확립과 거짓 교사들의 책동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복음의 바른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는 이단의 그릇된 사상과 교훈으로부터 성도들과 교회를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진다. 이 책임의 바른 수행을 위해서 교회 지도자는 먼저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며 그 행실에 있어서도 모범적이어서 타인의 비방을 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 전체의 덕을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은 죽기까지라도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철저한 사명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교인들은 그러한 지도자를 배(倍)나 존경할 자로 알아 마땅한 예우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딤전 5:17). 이렇게 할 때에 교회가 교회다워지며 질서와 일치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부 그릇된 교회 지도자들은 맡은바 사명에 충실하기보다는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또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를 공박하며 힘으로 대적함으로써 여러 문제와 교회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바, 실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다지며 반성할 것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장로의 자격은 딤전 3:1-7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과 유사하다. 이러한 자격 요건이 지니고 있는 의의 및 이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교훈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 문단강해를 참조하라.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 본절은 사도 바울이 그레데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그레데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A.D. 63년경) 잠시 그레데를 방문한 것으로 본다(Hiebert).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그곳에서 체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은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디도는 그레데에 그리고 디모데는 에베소에 각각 머물게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그레데에 몇 개의 교회가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며, 디도가 그레데에 남게 된 이유를 그가 그레데인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으나 이것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그레데'(Crete)는 그리스 본토의 남단 약 96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서 시실리와 구브로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크기는 동서 250km, 남북 11km에서 50km이며 지중해에서 시실리와 사르디니아 그리고 구브로 다음으로 큰 섬이다. 구약에서의 이곳 이름은 '갑돌'(Caphtor)로(암 9:7) 블레셋의 영토였으며, B.C. 3000-1500년경에 전성기를 누렸던 '미노아(Minoa)문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B.C. 67년까지 독립된 국가로 있었으나 다시 그 해에 로마에 합병되어 직할시가 되었다. 근세에는 1913년 그리스 영토로 합병될 때까지 터어키의 영토로 있었다.
부족한 일. - 이는 그레데에 거짓 교사들이 난무하여 교회가 혼란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10,11절)과 교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에 걸 맞는 행위를 보이지 않은 것(16절)을 가리킨다.
바로 잡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디오르도오'( )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언급되었다. 이 단어는 '더' 혹은 '그 외에도'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 )와 '바로잡다'를 뜻하는 '디오르도오'( )가 결합한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첨가하여 바로잡다'와 또는 '완전하고도 철저히 바로잡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은 이로써 디도를 그레데에 남긴 이유 중의 하나가 디도를 통하여 그레데에서 자신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음을 밝힌다.
나의 명한대로. - '나의 명한 대로'란 말속에 이미 바울이 디도에게 장로들을 세우는 기본 지침을 주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즉 바울은 디도와 함께 그레데에 있을 때 이미 그 지침들을 주었는데 이제 다시 글로써 이것을 반복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6-9절). 각 성에. - '성'을 의미하는 헬라어 '폴리스'( )는 일반적으로 '도시'와 '성읍' 등의 성벽으로 방비되어지는 거주지를 의미하며 또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국가'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각 성'이란 그레데의 여러 도시(공동 번역)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레데에서 기독교가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음을 보여 준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 여기서 '장로'를 가리키는 '프레스뷔테로스'( )는 본래 '연상의' 또한 '나이가 많은'이란 뜻으로서 '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구약에서의 '장로'의 개념에서 비롯된 단어인데 신약에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책임 맡은 교역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다음으로 '세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디스테미'( )는 '놓다', '세우다', '임명하다',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디도 혼자의 독자적인 결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회중들의 책임 있는 협력 아래 사도적 권위를 지닌 자로서 적격자를 지명한다는 뜻이 강하다. 한편 당시 그레데에 세워진 교회수와 장로의 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다만 본절만 보더라도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 직분 제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6 책망할 것이 없고. - 6절부터 9절까지는 구체적인 장로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중 '책망할 것이 없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넹클레토스'( )는 문자적으로 '붙잡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도덕적 혹은 법률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말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며. - 이 말의 의미는 혼인 관계에서 자신의 배우자(配偶者)에게 충실할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는 자기의 아내를 버리거나 혹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장로가 반드시 결혼한 남자이어야 한다든지 혹은 한 번만 결혼했던 사람이어야 한다는, 즉 재혼한 사람은 장로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확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단지 장로는 혼인관계에서 정조(貞操)를 지키며 타의 모범을 보일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Hiebert).
방탕하다 하는‥‥믿는 자녀를 둔 자. - 본절은 장로는 반드시 자신의 가정을 신앙으로 잘 지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정을 잘 다스리는 능력은 자녀를 순종케 하는 능력에서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보다 더 큰 공동체를 제대로 지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齋家 治國平天下)라는 선인(先人)들의 가르침에도 잘 나타나 있는 바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카르타고(Carthage) 종교 회의에서 '감독과 장로와 집사는 그 가족 전체가 교회의 교인이기 전에는 임명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방탕함'(아소티아)이라는 말의 의미는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야기시키는 낭비적인 삶을 말한다. 이 단어는 특히 당시 쾌락주의에 빠진 자들의 윤리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써 극심한 도덕적 방탕을 의미했다(Trench).
1:7 감독. - 목회서신에서 '장로'(프레스뷔테로스)와 '감독'(에피스코포스)이란 말은 구분이 분명하지 않고 동의어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행 20:17,28). 이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 연령과 직위와 관련하여서는 '장로'라 불렀고 그들의 직무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감독'이라 불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Hendriksen). 이에 관해서는 딤전 3:1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하나님의 청지기. - 여기서 '청지기'(오이코노모스)란 비록 집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의 뜻대로 집의 전체적인 일을 관할 맡은 자를 가리킨다. 이는 곧 감독은 자기의 뜻대로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자여야 함을 잘 나타내 준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 여기서 '제 고집대로'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우다데스'( )의 문자적 의미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남의 의견은 배제한 채 자기 생각과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태도를 말하며 곧 교만과 자기애(自己愛)로 가득찬 상태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벧후 2:10에 한 번 더 나오는데 거기서는 하나님 에 대한 교만과 방종을 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절은 감독들이 성도들에게 완고하게 대하거나 남들을 멸시하거나 스스로 자만하거나 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 여기서 '분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길로스'( )는 '성질이 급한 것, 참지 못하는 것, 격한 것'을 뜻한다.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 게 온유함과 관대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잠 16:32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 여기서 '술을 즐기다'(파로이노스)의 문자적 의미는 '술에 지나치게 빠지다' 혹은 '과음하여 다투다'는 뜻이다. 사실 정도에 지나치게 마시는 술은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가며 실수를 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덕을 세우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상하게까지 한다. 그러므로 술 자체는 비록 악한 것이 아니나 그 해악(害惡)은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엡 5:18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훈육하고 있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 여기서 '구타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렉테스'( )의 문자적 의미는 '때리는 사람'이다. 본절은 무엇에든지 싸울 듯한 태도 혹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호전적인 행동 그리고 성마른 행동을 경계하고 있는 구절이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 여기서 '더러운 이를 탐하다'(아이스크로케르데스)는 말은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릇 공동체를 지도하고 관할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직위를 남용하여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물질을 쌓거나, 또 물질로 인하여 부덕한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한편 이 말은 당시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악명이 높았던 그레데인의 악평(惡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12절). 폴리비우스(Polybius)도 '그레데 사람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쓰며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방법이라도 개의치 아니하고 쓰는 것을 어느 누구라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에서 우리는 발람(벧후 2:15), 게하시(왕하 제 5장), 가룟 유다(마 27:3-5), 아간(수 제 7장)과 같이 더러운 이를 탐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들의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1:8 나그네를 대접하며. - 6-7절이 장로의 자격 요건 중 소극적인 면을 언급한 것이라면 8-9절은 적극적인 면을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나그네를 대접하다'(필록세노스)는 말은 '나그네에게 친절한'이란 의미로서 '사랑하는' 또는 '친구'의 의미를 가진 '필로스'( )와 '외국인', '이방인'을 뜻하는 '크세노스'( )의 합성어이다. 오늘날과 같은 숙박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못하던 때에는 여행 중인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기본 덕목이었다(창 19:1-3; 욥 31:32). 특히 초대 교회 당시에는 전도자들이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덕목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감독이 이 일에 솔선수범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선을 좋아하며.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라가도스'( )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사랑하는', '친구의'의 의미를 가진 '필로스'( )와 '좋은', '선의'를 뜻하는 '아가도스'( )가 합성된 것이다. 개역 성경에서는 '선을 좋아하며'란 형용사의 서술적 용법으로 번역했지만 '선을 좋아하는 자'란 형용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RSV). 한편 로마 시대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은 선을 사랑한다는 자체를 명예로 여겼다(Debelius).
근신하며.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론'( )은 '건전한'과 '온전한'과 '온화한'을 의미하는 '소스'( )와 '마음'을 의미하는 '프렌'( )이 결합하여 형성된 단어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과 관계된 덕목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적절하게 제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딤전 3:2 주석 참조.
의로우며 거룩하며. - 여기서 '의롭다'는 의미는 사람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거룩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Hendriksen).
절제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크라테스'( )는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언급되는 단어로서 자신을 극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식욕과 성욕과 물욕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자신의 죄성(罪性)까지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자기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성취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아담의 타락 이래 모든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롬 3:10-18).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하여서는 성령의 장중에 사로잡힌바 되어 성령 충만하여야만 한다(엡 5:18).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성령의 열매들로 언급한 사실(갈 5:22,23)을 기억할 수 있다.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 - 이는 디도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2절) 곧 복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니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대로 치러야 하리니.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테코메논'( )은 살전 5:14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그곳에서의 뜻은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주다'이다. 반면에 목회서신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데 '온전하게 간직하다' 또는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장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룩한 진리와 정통을 사수해야 할 뿐 아니라 몸소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뜻한다. 만일 그러하지 못한다면 그가 그릇되게 행동하거나 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는 자를 책망하거나 권면할 때 저가 들을 리 만무하다.
능히 바른 교훈으로‥‥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에서는 감독의 두 가지 기능을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긍정적인 면으로 바른 교훈, 즉 정통 교리로써 사람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 정통 교리를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거스려 말하는 자'(안틸레곤타스)는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는 이단자를 가리킨다. 이처럼 감독은 스스로가 진리의 말씀에 정통해 있어 그 말씀으로 교인들을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능히 이단자들을 분별하여 그들을 책망하며 바른 진리의 말씀에로 인도해 들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맡기신 양떼들을 잘 돌보는 방법이요 교회를 질서 있게 관리해 나가는 비결이다.
1:10-16 거짓 교사 경계
앞에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 교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관련하여 디도에게 장로로 세울 자의 자격 요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5-9절). 이제 그에 이어진 본문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바로 수호하기 위해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레데(Crete) 교회 안에는 쓸데없는 논쟁과 거짓 교훈으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 부류가 곧 할례당으로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의 진리(롬 1:17)를 거스려 할례(割禮)를 받는 등의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단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10절). 즉 그들은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Messiah)로 믿긴 했으나 구원(救援)은 단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모세 율법 준수라는 행함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니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엡 2:8)이며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이 이단들은 이러한 신학적 오류와 함께 도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즉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며 경건한척 하였으나 실상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는바 속으로 더러운 이(利)를 탐하였던 것이다(11,12,16절). 이러한 이단 할례당으로 인하여 그레데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과 신앙생활 자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유대주의적 이단들의 그릇된 교리들을 지적하기보다 그들이 그러한 거짓 교리들을 고수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이고도 세속주의적(世俗主義約)인 악한 동기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비난하며 디도에게 저들을 꾸짖고(13절) 경계할 것(14-16절)을 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단은 결국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왜곡, 호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좇아 살게 하고 종국에는 멸망에 이르게 하고자 획책하는 사단(Satan)의 배후 조종을 받는 자들인 만큼 그들의 삶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내적으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악한 동기들을 추구하는 표리 부동한 것이 될 수밖에 얼음을 깨닫게 된다. 이에 일적이 주께서도 그러한 이단들의 삶의 열매를 보고 그 정체를 알라고 교훈하셨다(마 7:15-23).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이단의 속성을 분명히 깨달아 그들에게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엡 6:10-20) 이를 능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10 복종치 아니하고. - 이 단어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뉘포탁토스'( )는 '종속되지 않은', '순종하지 않는', '반항적인'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여기에서는 진리의 말씀과 바른 교훈에 순종하지 않는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헛된 말을 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타이올로고스'( )는 '헛되이'와 '무익하게'를 뜻하는 '마타이오스'( )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로서 '헛된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과 '쓸데없는 말이나 사소한 논쟁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역시 여기서도 이단자를 가리키는데 이는 허탄한 가르침을 유포하는 저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
속이는 자. -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나파테스'( )는 '속이다'를 뜻하는 동사 '프레나파타오'( )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로서 '유혹자'란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영혼을 속이는 자' 혹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는 헛된 말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이단자의 특성을 나타내 준다.
할례당. - 이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중 여전히 '율법주의'를 고집하던 자들이다(행 10:45; 갈 2:12; 빌 3:2,3). 즉 이들은 유대교의 각종 의식과 규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특히 할례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다(갈 6:12,13). 즉 이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을 믿는 이외에 할례를 행하는 것과 같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이었다(행 15:1). 이는 누구든지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 이단 사상이 아닐 수 없다(롬 3:28).
1: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 여기서 '입을 막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피스토미조'( )의 문자적 의미는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뜻이다(Hiebert). 후대에 와서 이단어는 점차 '이성(理性)으로 사람을 침묵시키다' 혹은 '말을 억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졌다. 본절은 이단자들의 입을 어떻게 막아야할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교회의 지도자는 헛된 말로 성도를 미혹케 하는 자를 단호히 처리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겔리(Gealy)는 이 말에 대해 감독자들이 할례당에 속한 자들의 설교나 가르칠 기회를 교회 안에서 허락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이해하였다.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 이는 거짓 교사들의 행동의 근본 동기를 보여 준다. 즉 저들이 헛된 가르침을 유포하는 표면적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나 실상은 사람들로부터 명예를 얻거나 또한 가르치는 보수(報酬)를 기대해서였던 것이다. 이것은 7절에 언급된 감독의 자격과는 상반된 것이다. 즉 감독이 수고한 보수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딤후 2:6). 그러나 그것은 결과에 해당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보수를 기대하고 수고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과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 '집'과 '거주지'와 '가정'과 '혈통'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스'( )는 여기서 거주하는 집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는 '성도의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엎드러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나트레포'( )의 문자적 의미는 '뒤집어엎다', '전복시키다', '멸망시키다'이다(딤후 2:18). 이처럼 허무맹랑한 이단 사설은 성도의 믿음을 저해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믿음의 가정을 파괴시킬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경계되어야 한다.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제롬(Jerome)의 증언에 의하면 이 선지자는 그레데 출신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이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 '7대 현인(賢人)' 중 한 명이다. 그 7대 현인은 에피메니데스 외에 철학자 비아스(Bias), 법률가 솔론(Solon), 스파르타의 행정가 킬론(Chilon), 철학자 클레오불루스(Cleobulus), 천문학자 탈레스(Thames), 정치가 피타쿠스(Pittacus)이다(Hendriksen). 에피메니데스는 B.C. 659년에 그레데의 페스터스(Phaest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한 신화적 전설을 보면 그는 아버지의 명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어떤 동굴에 들어갔었는데 그만 그곳에서 잠이 들어 무려 50년 동안 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리고선 마침내 잠이 깨어 긴 머리카락과 흰 수염을 날리며 동굴을 나왔고 이때부터 자연 과학과 의학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후에 아테네로 가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많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보상과 명예를 거절하고 고향 그레데로 돌아와 살다가 죽었다. 그 후 그는 그레데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 숭배되었고 플라톤(Platon)까지도 그를 신인(神人)으로 불렀다. 그런데 본절에서 바울이 에피메니데스를 선지자라고 칭한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선지자로 칭한 것은 아니다. 대신 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이 에피메니데스를 '신적으로 영감 받은 사람'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그를 선지자로 언급한 기록들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Hendriksen).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게으름장이라. - 본절은 에피메니데스의 6행시의 일부로서 그레데인에 대한 평판을 보여 준다. 이 중 에피메니데스가 그레데인을 거짓말장이로 표현한 것은 그레데인이 그레데 섬에 제우스(Zeus)의 무덤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칼리마쿠스(Callimachus, B.C. 300-240년)는 그레데인이 거짓말장이라는 것을 풍자하여 시를 지었다.
그레데인은 상투적인 거짓말쟁이다.
그들은 인위적인 무덤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당신의 무덤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아 왕이시여!
당신은 죽지 않았으며
당신의 생명은 영원하나이다.
다음으로 '악한 짐승'이란 표현은 저들의 포악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희생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란 저들의 쾌락주의적 성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고대 사회에서 그레데인들의 이러한 악한 습성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한 예를 보면 당시 '거짓말한다'는 뜻의 단어에는 '크레티조'( )가 있었는데 그 문자적 의미는 '그레데화하다'이다. 이는 곧 그레데인의 특성 중 하나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것이었음을 잘 나타내 준다(Hiebort). 이러한 그레데인은 고대 사회에서 실로 악명 높은 3급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3C'는 그레데인(the Cretans), 길리기아인(the Cilicians), 갑바도기아인(the Cappadocians)을 가리킨다.
1:13 그 이 증거가 참되도다‥‥온전케 하고. - 바울은 12절에서 인용한 에피메니데스의 시구가 사실임을 확증하고 있다. 그리고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런 그레데인들을 엄히 꾸짖기를 명한다. 이것은 그레데인의 악한 근성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깨 닫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 내포되어져 있다. 즉 징계의 참된 의의는 그릇된 자들을 돌이켜 바르게 하는 데 있지 저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 대한 처리는 불가피한데 이는 남은 자들이 미혹되어 그릇행하지 않도록 방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고런 자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8:17)고 명하신 것이다.
1:14 유대인의 허탄한‥‥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그레데인들을 엄하게 꾸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그릇된 교훈을 좇고 있던 그레데인들에게 주의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복음의 바른 진리만을 좇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여기서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는 딤전 1:4에 나오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당시 그레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유대인들 중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구약 성경을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Hendriksen). 그리고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이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상반되게 무릇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는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10절과 딤전 1:4의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양심이 더러운지라. - 본절은 정결의 문제가 외부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거룩함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의 이러한 논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 15:11,15-20; 눅 11:38-41). 이는 즉 막 7:15,16에 의하면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유대인의 기존 관념을 깨뜨리는 말로써, 이러한 정결의 표준이 의식적(儀式的)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 어떤 것도 본래부터 부정한 것은 없다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강조하였다(Hervey). 한편 그레데인들에게 이러한 정결의 문제가 야기된 배경에는 첫째로 율법주의자들이 모세의 율법 준수를 강요했거나, 둘째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Gnostics)들의 금욕주의 때문에 혼인이나 음식을 금하는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딤전 4:3,4 주석에서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참조하라.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 - 이는 유대주의적 이단인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의식주의자(儀式主義者)들을 가리킨다.
마음과 양심. - 두 단어 중 특히 '양심'(쉬네이데시스)은 목회서신에서 많이 언급되는 단어이다(딤전 1:5; 4:2; 6:5; 딤후 3;8), 물론 '마음'(누스)과 '양심'은 동의어이다. 그러나 이를 굳이 구분하자면 '마음'은 인격의 갖추어진 바를 의미하며 '양심'은 선악을 구분하여 바른 행동을 하려 하는 자아 의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1:16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 여기서 '시인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호몰로게오'( )의 문자적 의미는 '일치하여 말하다'와 '약속하다'와 '고백하다'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진정한 내면적 고백이 아닌 표면적 고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뒤에 나오는 '부인하다'와 짝을 이루고 있다. 다음으로 '행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곤'( )은 '일'과 '행동'과 '나타남' 그리고 '실제적 증거'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즉 그레데의 거짓 교사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그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은 하나님을 욕되게 함으로써 도리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증한 자요‥‥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 이들은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을 알며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의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로 이들은 가증한 자들이다. '가증하다'(브델루소)의 문자적 의미는 '악취가 나다'이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타락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우상 숭배 행위를 가리키는 측면이 강하다. 둘째로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다. '복종하지 않다'(아페이데오)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설득할 수 없다'이다. 이는 곧 그 양심이 굳어 있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셋째로 선한 일을 버린 자들이다. 여기서 '버리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 )는 본래 표준 무게에 이르지 못하는 위조 주화나 전쟁터에서 도망하는 비겁한 병사를 나타낼 때 사용된 어휘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 자'(딤후 2:15)와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일을 도모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한 자들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을리 만무한 자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딤후 3:8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이상에서 나타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란 점이다(딤후 3:5).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경계함으로써 그레데 교인들로 하여금 이런 자들에게 미혹됨이 없이 돌이킬 것을 교훈하고 있다.
디도서 연구자료
디도-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1. 인적 사항
① 디도는 '공경하다'라는 뜻.
② 헬라인(갈 2:3).
③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며(딛 1:4) 신실한 동역자(고후 8:23).
④ 그레데 교회의 목회자(딛 1:5).
2. 시대적 배경
A.D. 1세기 후반 경에 주로 활동.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으로 확장되던 때였다. 이 때에 디도는 전 3차에 걸친 세계 전도여행을 하던 바울과 동행하여 복음전파 사역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초대 교회들이 겪고 있었던바 교회 조직의 미비 및 이단의 공격 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레데(Crete) 교회를 비롯하여 안디옥,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3. 성품
① 중대한 임무를 띠고 고린도 교회에 몇 차례나 파송될 만큼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자(고후 8:6,16-24; 12:17).
② 바울이 그를 크게 아끼고 그로 인하여 위로받을 정도로 매사에 헌신적이고 진실한 자(고후 2:13; 7:6,7; 딛 1:4).
③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잘 인도하고 그들에게 존경받은 것으로 보아 현명하고 열성적이며 사랑이 많은 자(고후 7:5,6,15).
④ 그레데 교회의 부족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그레데 교회에 남겨질 정도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지도력이 있는 자(딛 1:5).
4. 주요 생애
1) 회심 이전
(1) 출생 - -
(2) 바울 전도 사역 초기에 복음을 전함 - -
2) 회심 이후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됨
(1) 안디옥 교회의 대표로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함 A.D. 49년경 행 15:2
(2) 고린도 교회에 몇 차례 파송됨 A.D. 53-57년경 고후 2:13;
8:16-24
(3) 그레데 교회에서 사역함 - 딛 1:5
(4) 바울로부터 서신을 받음 A.D. 66년 초 딛 1:4
(5) 니고볼리에서 바울과 합류함 - 딛 3:12
(6) 달마디아에서 복음을 전함 - 딤후 4:10
(7) 죽음
5. 구속사적 지위
① 할례가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회의 결과에 따라(행 15:1-21)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자(갈 2:3).
② 바울의 통역자로서 안디옥, 고린도, 그레데 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였고, 특히 고린도 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자(고후 7:13-15; 딛 1:4,5).
6. 평가 및 교훈
① 디도의 헌신은 고난당하는 바울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반목과 질시로 혼란에 처해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감화를 주어 그들을 화목케 하고 바른 신앙으로 인도케 하였다(고후 7:5-7,13-15). 이처럼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간절함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모습이 될 때 그것을 보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교회가 크게 도전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로 인해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② 디도가 바울의 동역자로서 주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널리 전파하고 이를 정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의 두터운 인간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고후 8:16-24; 딤후 4:10; 딛 1:5). 즉 그는 바울이 파송하는 곳에서, 또한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매사에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일을 해나갔던 것이다. 이렇듯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겠다.
③ 진지한 열정과 성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그리고 목회 사역에 있어서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른 처신과 매사에 현명한 판단으로 정확하게 일을 처리했던 디도의 모습은 오늘날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큰 귀감이 된다(고후 7:13-15; 8:16-24; 딛 1:5).
7. 핵심 성구
.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고후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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