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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말의 바른 사용과 선행으로 나타나야할 참된 지혜
구속사 개관:
본장은 성도의 신앙 성숙과 교회 공동체의 공고한 결속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한 보다 기본적인 교훈들로서 시험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와 믿음이 있는 자에게 필히 있어야할 행함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을 준 본론 전반부 1:2-2:26에 이어, 보다 구체적으로 성도 개인의 신앙 인격 수양을 위한 개인적 교훈과 교회 공동체의 일치 화목을 위한 교회적 교훈들을 주고 있는 본론 후반부 3:1-4:17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으로서 주로 성도 개개인의 신앙 인격 수양을 위한 개인적 교훈을 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하의 본장은 그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12절에서는 성도 개개인의 미 성숙된 신앙에서 비롯된 이기심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에 따라 함부로 발설되는 그릇된 말들로 인하여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되었던바 이를 경계하기 위한 교훈으로 말의 바른 사용의 중요성을 여러 비유들을 통해 다각도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 13-18절에서는 말의 바른 사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교만한 생각을 품게 하는 거짓된 세상 지혜를 버리고 성결과 화평과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참된 지혜를 갖도록 권면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 전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해 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성도(Saint)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복음을 믿음으로 법적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은 자이나 실제로는 여전히 죄성(罪性)을 지닌 죄인으로서 완전한 외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성화(Sanctification)에 힘써야 할 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윤리는 바로 이와 같은 성도로서의 자기 정체(Identity)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그러한 인식을 근거로 하여 더욱 성화에로 나아가려는 노력과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만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의지하고 성화에 대한 노력은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 안주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 윤리란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되고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든 교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마 5:13-16)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미성숙한 신앙 인격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자기 죄성에서 비롯된 이기심이나 세속적 가치관에서 속히 벗어나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 앞에 선한 본을 보이며 그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자신의 성화를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올바른 구속사적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세상 죄악 가운데 속하여 있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성도로서 합당한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삶의 가치관(價値觀) 자체가 변하여야 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과거 복음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으로는 죄성이 가득찬 마음속에서 독한 시기와 교만 및 자기 자랑을 뿜어낼 수밖에 없고 또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와 인간의 역사 전체를 주장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희생까지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항상 배우고 익히며 그것으로 우리 삶의 절대 유일의 기준으로 삼아 행하는 신본주의적 삶의 가치관을 가질 때에 우리의 악한 생각들을 버릴 수 있으며 또 그로 말미암아 선한 행실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히 3:1), 나아가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일(빌 2:5)은 진정 성도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는 삶의 참된 비결이다.
외울 말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3:17,18)
혀의 올바른 사용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선행으로 나타나야할 참된 지혜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원어 연구: 3:3 어거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타고'( )이다. 이는 '~함께', '~뒤에', '~후에'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 )와 '인도하다' , '몰고 가다'라는 뜻의 동사 '아고'(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어떤 대상을 이끌고 한 지점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 또는 어떤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을 원하는 수준까지 이끌고 가기 위하여 교훈하고 가르친다는 뜻의 '교훈하다', '지시하다', '감독하다'라는 뜻이 파생 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단어는 말(horse)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제어하며 이끌어가는 것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본문은 결국 주인이 자기 말을 그 입에 물린 재갈로써 제어하며 이끌 수 있듯이 사람에게 있어서 입의 혀도 마치 말의 재갈과 같아서 그 혀의 사용에 따라 사람의 전체 생활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혀 곧 말의 사용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3:1-12 혀의 올바른 사용
야고보는 지금까지 1:2-2:26까지에서 성도의 보다 성숙한 믿음을 위하여 시련을 당할 때의 성도의 자세와 믿음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실천을 동반한다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원론적인 측면에서 역설하였다. 이제 3:1-4:17까지 에서는 앞서 언급한 원론적인 교훈에 근거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이 신앙생활 가운데서 접하게 되는 주요한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교훈들을 제시함으로써 성숙한 성도의 바른 신앙 자세에 대해 일깨워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 3장이 보다 개인적 교훈인데 반해 제 4장은 교회 공동체에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 본문은 본장에서 제시하고 있는바 성도 개개인의 신앙 인격 성숙에 있어 요구되는 두 가지 교훈 중 그 하나로서 혀(말)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보다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절에서는 함부로 다른 사람들 앞에 선생이 되려고 나서는 일에 대해 금한 뒤 말의 절제의 중요성을, 이어 3-5절에서는 혀의 특성과 영향력에 대해, 6-8절에서는 혀를 제어하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악한 결과에 대해, 그리고 9-12절에서는 혀의 올바른 사용이 성도의 바른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임을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는 이상의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재갈', '키', '불', '동물', '샘', '나무의 열매' 등을 비유로 들어 혀의 올바른 사용의 중요성을 다각도로 조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야고보가 말의 올바른 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한 이유는 당시 초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도들 간의 다툼이나 분쟁의 발단이 결국 개인 신앙 인격의 미성숙으로 인한 말의 오용에 있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이미 앞에서도 두어 차례 말의 절제에 대해 교훈하였거니와(1:19,20,26) 본문에서는 보다 집중하여 말의 절제를 통한 개인 신앙 인격의 성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의 오용으로 인한 다툼이나 분쟁은 비단 초대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인바 본문이 현대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실로 크다 하겠다.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① 말의 사용은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인바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 인격 수양을 통해 말을 올바로 사용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잠 17:27; 골 4:6; 딛 2:8).
② 말의 오용이 주는 폐단은 비단 자신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이 죄에 얽매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데 있다(잠 18:8; 마 12:36,37). 따라서 시편 기자처럼 항상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는 기도와 함께 스스로 말의 오용을 막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③ 말의 사용은 대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대신 관계에서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성도의 직분과 또 나아가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성도의 의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올바로 사용해 성도로서의 직분과 의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사 43:21).
3:1 선생된 우리가‥‥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서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자만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형제를 판단하려는 신앙인들에 대해 충고하는 문제로 옮겨간다. 여기서 '선생'(디다스칼로스)이란 말은 '가르치는 자'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명령받은 자를 일컫는다(요 3:10). 그러나 본절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선생'이라는 말은 자신의 판단을 기준삼아 다른 성도들의 행동을 성급하게 매도하며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당시 유대인 출신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들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형제를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야고보는 그러한 시도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되지 말라'(메 기네스데)는 말은 부정어 '메'( )와 '~이 되다'를 의미하는 '기노마이'(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인 '기네스데'( )가 결합된 것으로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되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의 금지를 요구하는 명령이다(Robertson).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즉 선생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 책임이 더욱 큰바 그에 대한 심판도 더 엄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경고는 아니다. 이는 단지 선생된 자의 직무가 매우 막중함을 경각시키는 말인 것이다. 선생된 자가 그 임무를 성실히 감당할 때는 상급이 클 것이나 잘못할 때는 벌도 중한 것이다(막 12:40; 눅 12:48; 20:47).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 여기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예외없이 다 많은 것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라는 뜻으로 전절에서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세상에서 선만을 행하고 죄를 행치 않는 의인이란 없다(전 7:20; 롬 3:10). 따라서 선생이라 할지라도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선생은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까닭에 그의 직무를 성실히 담당치 못한 것이 되고 결국 선생은 직무 유기죄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실수'(프타이오멘)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사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안에 여전히 부패성이 살아남아 있어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중에 언행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성도들의 이러한 실수는 주로 말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혀를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선생들은 그 실수의 위험성이 높다 하겠다. 이는 결과적으로 선생들이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하여튼 말은 사람의 됨됨이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사람의 언행을 보고 신앙의 성숙도를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이 시의적절하고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온전하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온전한'(텔레이오스)은 '완전하다'(perfect)라는 의미가 있으나 이는 죄성이 하나도 없는 상태보다는 신앙이 매우 성숙됐음을 의미한다.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혹자는 본절의 '몸'(소마)을 교회로 해석하여 자신의 말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교회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Grotius). 이 해석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맥의 흐름상 자신의 말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그의 다른 모든 행동까지도 스스로 복종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
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온 몸을 어거하며. - 본절과 다음절은 말(言) 곧 혀의 능력이 매우 큼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본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의 말 곧 혀를 '재갈'(칼리노스)에 비유했는데 여기서 '재갈'이란 '늦추다', '내려보내다'라는 의미의 '칼라오'( )에서 유래한 말로 말이나 소를 제어하기 위해 씌운 '고삐'를 의미한다. 그런데 재갈을 조정함으로써 말(馬)의 모든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혀 곧 말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는 부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인간 신체의 가장 작은 부분인 혀에 의해서 몸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이용한 것이다.
3:4 배를 보라‥‥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 앞절에 이어서 혀의 능력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큰 배가 자신의 항로를 따라 올바로 항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키'(엘라키스투 페달리우)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만약 이 키가 없다면 배는 광풍과 암초에 의해서 파선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허탄한 말은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나 잘 제어된 말은 자신의 인격을 성숙되게 하고 고결하게 만든다.
3:5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 3절과 4절의 비유를 완결한다. 즉 재갈과 키같이 작은 물건이 그가 속한 전체를 좌우하듯이 혀도 비록 미미한 신체의 일부분이지만 그 사람 전체 행동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재갈과 키의 비유는 긍정적인 면을 논의한 반면에 본절에서는 '큰 것을 자랑하도다'(메갈라 아우케이)로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다(시 73:9). 이는 인간이 자기의 영혼과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만하고 허영된 말을 함부로 하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나무를 태우는가. - 혀의 잠재적이고 파괴적인 면에 대해서 다시 불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 즉 작은 불이 숲 전체를 태우듯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무심한 한 마디의 말이 큰 무게를 가지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의 잘못된 말 한마디가 교회 전체를 파괴하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한 말씀이다(잠 18:6). 사실 교회가 잘못된 말로 인해 분열되고 파괴되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즉 잘못된 말은 자기 자신의 인격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교회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는 아주 무서운 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사에 언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3:6 혀는 곧 불이요‥‥온 몸을 더럽히고. - 혀의 잠재적인 파괴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혀를 불에 비유한 것은 구약에도 종종 나타난다(잠 16:27; 26:18-22). 아마도 이는 불의 파괴적인 면을 고려한 비유라 할 수 있다. 즉 잘못 사용된 혀는 불과 같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혀를 '불의의 세계'로 표현한 것은 혀가 인간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 매우 위험스런 존재이며 우리의 신체 중에서 불의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혀는 다른 신체에 비해서 그 크기는 미미하지만 그 영향력이 커서 모든 지체, 즉 인간의 몸을 모두 죄에 물들게 할 수 있다. 혀가 격정과 분노에 사로 잡혀서 내뱉는 말은 인간의 전존재를 파괴함은 물론 그로 인해 그의 불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생의 바퀴를‥‥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여기서 '생의 바퀴'(톤 트로콘 테스 게네세오스)는 인생의 전 과정을 가리킨다(Ropes). 즉 잘못된 혀의 사용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완전히 망친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는 '혀'와 동일시되며 인생을 파괴하는 '불'의 근원을 '지옥 불'에서 찾고 있다. 즉 불의의 세계인 혀에서 나는 불은 악한 불로 그것은 지옥 불과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 불은 현세에서는 사람들의 혀에 깃들어 그 생을 파괴하고 내세에서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태우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혀를 사용하여 '형제에 대하여‥‥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 :22)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지옥'(게엔나)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마 5:2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지옥 불'과 대조되는 불이 '성령의 불'인데, 이는 하늘로 나서 사람의 심령을 정결케 하고 그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준다.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 지금까지 혀의 파괴성에 대해 언급한 야고보는 이제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혀에 대한 제어가 불가능함을 말한다. 먼저 야고보는 본절에서 인간의 능력이 광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해물 등이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 왔음을 언급한다. 특별히 야고보는 '길들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마조'( )를 현재 시상과 완료 시상으로 적절히 배합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오랜 역사에 걸쳐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해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창 1:28; 시 8:6-8).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 인간의 광대한 능력을 보여 주는 전절과 달리 본절에서는 인간이 스스로는 세치 혀를 다스리고 길들이는데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혀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악마적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그 혀로 선한 맡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힘을 덧입기 때문이다(Robertson, Martin).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혀의 특성이 두 가지로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혀의 특성은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보다는 혀가 사악한 말을 내뱉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쉬지 아니하는 악'(아카타스타톤 카콘)은 우리에 갇힌 사나운 맹수의 모습에서 취한 은유이다(Manton). 즉 우리에 갇힌 맹수가 우리를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듯이 혀가 항상 악을 행하려고 요동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입의 구조를 보면 혀는 입술과 치아의 이중 울타리에 갇혀 있는 신세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는 그 울타리를 깨뜨리고 악한 말로 온갖 악을 행하기 일쑤이다. 다음으로 혀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 메스테 이우 다나테포루)이다. 이는 독으로 상대를 해치는 동물을 연상케 한다. 즉 혀는 독이 있는 동물처럼 그 나오는 말에 의해서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거나 심지어는 그 영혼을 파멸하게도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시 140:3). 그런즉 성도들은 하나님께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해야 한다.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사람을 저주하나니. - 전절에서 제어할 수 없는 혀의 두 가지 악한 특성을 언급한 야고보는 이제 본절에서는 혀의 이중성을 언급하여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 문제는 구약에서도 이미 지적된 바 있다(시 62:4). 저자는 먼저 긍정적인 면에서 성도들이 혀로 하나님을 찬양함을 언급한다. 이는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시 51:15). 즉 하나님이 주신 기관으로 하나님을 찬송함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러나 부패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혀로 하나님을 찬송함과 동시에 돌아서서 그 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저주한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 이런 행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난 행동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찬송하고'(율로구멘)와 '저주하나니'(카타로메다)는 모두 현재시제 동사로서 당시 수신자들의 교회 내에서 실제적으로 이런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 '주 아버지'(톤 퀴리온 카이 파테라)는 직역하면 '주와 아버지'라는 뜻이나 본절에서는 '주이신 아버지' 라는 말로 사용되어 '주'와 '아버지'가 모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호모이오신 데우)이란 표현은 인간이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복제품(reproduction)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창조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파괴되어 완전하지는 않으나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형제를 저주하는 것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혀를 제어함으로써 저주를 금하고 오히려 축복의 말을 해야 한다(눅 6:28).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마땅치 아니하니라. - 계속해서 야고보는 신앙인이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이 도무지 어울리는 일이 아님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찍이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마 12:33-37). 참 신앙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결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으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자는 이미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자연의 예를 들어서 성도들이 그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선한 말만 해야함을 교훈하고 있다. 자연은 항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 법칙에 따라 한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항상 한 맛을 지니게 되어 있다. 한 우물에서 두 가지 물맛이 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이 인간이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를 동시에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3:12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맺겠느뇨, - 열매를 맺는 식물들은 그들의 종류대로 독특한 열매를 맺는다. 자연적으로는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다(창 1:11). 이처럼 인간의 입도 본래는 선한 말만 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창조주를 대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따라서 성도들의 입은 하나님께서 그 입을 만드실 때의 본래의 목적에 따라야 한다. 즉 성도들은 그 입으로 깨끗하고 온전한 말만을 내야 하는 것이다.
3:13-18 선행으로 나타나야 할 참된 지혜
앞 단락 1-12절에서 성도 개개인의 신앙 인격 성숙을 위해 요구되는 두 가지 교훈 가운데 첫 번째로 말의 절제에 대해 교훈한 야고보는 본문에서는 그 두 번째로 마음속의 생각을 잘 다스리는 참 지혜를 소유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즉 야고보는 여기서 인격의 외적인 반영인 말의 사용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의 모든 윤리적 행위들이 결국 인간의 마음속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참된 지혜에 근거한 바른 생각을 마음속에 가짐으로써 결국 선한 행위를 나타낼 수 있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본문을 통하여 이 같은 교훈을 준 것은 일차적으로 초대 교회 당시 스스로 선생이 되어 지혜와 총명이 있다 하면서도 오히려 실생활에 있어서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으로 인해 성도들 간에 분쟁과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지적함과 아울러 참 지혜는 반드시 선행으로 나타나야함을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야고보는 먼저 거짓 지혜와 참 지혜를 대조하여 시기와 분열과 다툼이 거짓 지혜의 소산임을 밝힘으로써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하는 자들의 무지와 죄악을 지적하고(13-16절) 참 지혜 있는 자들은 필경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17,18절).
여기에 나타난 두 지혜의 특징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거짓 지혜의 특징은 독한 시기와 다툼과 자랑과 거짓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것이요 마귀적인 것으로, 결국 거짓 지혜는 무질서와 모든 악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14-16절). 반면 참 지혜의 특징은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17절). 따라서 참 지혜는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18절). 특별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참 지혜의 특성이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일치하는 것으로, 그 지혜가 하늘로서 난 것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참 지혜는 진정한 믿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지혜와 총명이 있다 하면서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한 열매를 맺는다면 그는 참 지혜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일 수 없다 참된 믿음은 전인격적인 것으로서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 곧 그 사람의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는다.
① 성도는 하늘의 참 지혜를 얻어 화평의 씨앗을 뿌리고 의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의 삶이요 거듭난 자의 마땅한 삶의 모습인 것이다(엡 4:25-32; 5:8-14).
② 오직 하나님의 참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짐을 깨달아 성도는 한편으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에(딤후 3:14-17), 다른 한편으로는 내 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성령 충만한 생활에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2:10; 엡 5:18).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 계속해서 신앙인의 행함, 특히 선생된 자들의 행함에 대해서 언급한다. 먼저 '너희'(휘민)는 구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자신들의 높은 위치를 자랑하는 선생들을 가리키나 포괄적으로는 전체 교인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란 물음은 당시에 자신들이 특별한 지식이나 비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물음에는 반어적으로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전혀 없음이 암시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지혜와 총명'은 지혜 문학의 관용어로 양자 간에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으나 전자가 보다 관념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보다 경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여기서 '지혜'란 실생활에서의 경건성(엡 5:14)을 가리킨다(Vincent).
그는 선행으로‥‥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 야고보는 만약 자신들이 주장하듯이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온유함 가운데서 행함'으로 보여 주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온유함'(프라우테스)은 매우 연약함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성령의 열매의 하나로(갈 5:23) 마음의 평정성(平靜性), 유화성(柔和性), 친절성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성품이자 그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성품이다(마 5:5). 한편 그리스도인의 온유는 하나님을 대하는 겸손한 심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기 부정의 결과라 하겠다. 또한 '보일지니라'(데익사토)는 과거 명령형으로서 단일회적인 행동과 급격한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동사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이처럼 강력하게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로 수신자들의 교회 내에 분열과 다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Martin).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같은 성도를 정죄함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는 온유한 자세이다. 이에 야고보는 자칭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주장하는 선생들이 입으로만 지혜를 말하지 말고 그 말대로 행함으로 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그치게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14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 여기서 '독한 시기'(젤로스 피크로스)는 전절의 '온유'와 대조되는 것으로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열정을 말한다. 특히 말과 관련해서는 다른 신앙인을 비방하거나 흠잡음을 의미한다. 또한 '다툼'(에리데이아)은 교회 내에서 서로 당을 지어 분쟁함을 말한다. 소위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실수가 많고 이로 인하여 교회는 분열되고 다툼이 일어난다.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삶은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이다. 왜냐하면 시기와 다툼은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기 부인의 심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기 보다는 잠잠해야 한다.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추악한 행위인 것이다.
3:15 이러한 지혜는‥‥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 여기서 '이러한 지혜'(하우테 헤 소피아)는 14절에 언급된 '독한 시기'와 '다툼'을 바탕으로 한 지혜를 가리킨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지혜가 아님을 야고보는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지혜의 성격을 다음 세 가지로 밝힌다.
① '세상적'(에피게이오스)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중립적 의미(요 3:12)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주로 부정적 의미(빌 3:19)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지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즉 이 지혜는 멸망할 세상만 바라보는 지혜요, 하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혜이다.
② '정욕적'(프쉬키코스)이다. 이것은 동물들이 자기 본능에 이끌려 사는 것과 같이 완전히 인간적인 판단과 성향에 모든 것을 맡긴 상태, 즉 이 세상에서의 안위와 쾌락만을 추구하여 오직 육욕적인 열매를 맺는 삶을 의미한다. 즉 그들의 지혜는 인간의 죄된 본성에서 나온 거짓 지혜일뿐이다.
③ '마귀적'(다이모니오데스)이다. 이는 마귀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행동은 마귀가 충동질해서 일어난 행동이며 자연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살후 2 :9). 이를 볼 때 14절의 말씀이 매우 합당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언행에 있어 항상 그 근원을 묵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며(욥 32:8)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잠 2:6).
3:16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 헛된 지혜의 결과를 말한다. 첫 번째 결과는 '요란'이다. 여기서 '요란' (아카타스타시아)은 안정되지 못한 무질서를 말한다. 이 단어는 '쉬지 않는 악'을 일삼는 혀에 적용된 단어이다. 8절 주석 참조. 쉬지 아니하는 악에는 쉴 새 없는 동요가 따르는 법이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 성도들로 하여금 바로 서지 못하게 하듯이 이 무질서는 결국 신앙 공동체가 올바르게 세워짐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후 12:27). 두 번째 결과는 '모든 악한 일'(판 파울론 프라그마)을 일으킨다. 이는 저자가 앞에서 언급한 헛된 말, 그릇된 열심, 파당 등을 가리키며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시기와 다툼에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여기서 다시 '온유함'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온유함에서 오는 화평이다(마 11:29).
3:17 위로부터 난 지혜. - 이 표현은 14,15절에 나타난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참된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준다. 야고보는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의 특성을 8가지로 말한다.
성결. - 참 지혜의 첫째 요소이다. '성결'(하그노테스)은 하나님 말씀의 특성이며(시 12:6) 신자에게 있어서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화평. - 참된 지혜는 온유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에 '화평'(에이레네)을 가져온다.
관용. - '관용'(에피에이케이아)은 도전이나 자신을 자극하는 상대방의 논리에 대해서 논쟁을 삼가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성품을 말한다.
양순. - '양순'(유페이데스)은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에 대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을 의미한다.
긍휼과 선한 열매. - '긍휼'(엘레오스)은 '시기'에 반대되는 것으로 남의 비참한 형편에 대한 동정과 함께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또 '선한 열매'는 긍휼의 결과이다.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 끝으로 참된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는' 삶을 살게 한다. 여기서 '편벽'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여 구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는 당시 수신자들의 교회 내에서 신자들을 차별하는 상황(2:1-4)을 염두에 둔 말이다.
3:18 화평케하는 자. - '화평'은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함에서 오는 평화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다시 화평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 내에 분열과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4:2).
의의 열매. - '의의 열매'(카르포스 디카이오쉬네스)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 얻어지는 영생이나 성화 그 자체를 의미한다(canton). 따라서 본절은 당시의 분열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다툼과 분열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장차 받을 상급을 쌓는 행위이며(마 5:9) 현세에서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사는 소중한 삶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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