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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성도의 신분과 범죄에 대한 경계 및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 방법, 결과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삶의 소극적인 특징으로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을바른 관계에 장애를 가져오는 불법을 행치 않으며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성도의 삶과, 적극적인 특징으로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을바른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물론 수평적인 측면에서의 형제 사랑을 힘써 행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 기록한 본론 후반부 3:1-4:21까지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본장은 전반부 1-12절과 후반부 13-24절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 1-12절에서는 앞단락 2:18-29에서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경계하고 정통 교리에 근거한 바른 신앙 정립에 대해 권면한 사도 요한이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 간에 서로 구별되는 외적 특징으로서 자신을 정결케 하고 불법을 행치 않는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성도의 삶의 특징들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성도의 범죄에 대해 경계함은 물론 의를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상술하면. 1. 2절에서는 성도는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자녀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화에로 나아갈 자라는 성도의 정체(Identity)에 대해, 3-10절에서는 그러한 성도의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삶의 특징인 불법을 행치 아니하고 주의 계명에 따라 자신을 깨끗게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성도의 범죄에 대해 경계한 내용을, 그리고 11,12절에서는 가인의 아우 아벨 살해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자는 수평적으로 인간들과의 관계도 정상적일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 전반부 1-12절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여기서 우리는 실로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어떠한 존재이며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한 지평 속에서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즉 성도의 자기 정체와 구속사적 사명에 대한 분명한 인식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바른 인식의 정립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로서 합당하게 사단의 자녀들의 삶과 구별되는 의로운 삶을 살고자하는 실천적 노력의 중요성도 동시에 절감한다. 실로 성도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만족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마 5:16).
한편 후반부 13-24절은 사단의 자녀의 삶과 구별되는 불법을 행치 않는 성도의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삶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 전반부와 대조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의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삶의 특징에 대해 다루는 3:13-4:21까지의 기사 가운데 첫 단락으로서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 방법,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로서 우리 성도들이 먼저 자기 몸을 대속 제물로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은 곧 사랑에 빚진 까닭이라는 사실(13-16절)과 형제 사랑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17-20절),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명 준수의 핵심인 형제 사랑의 결과로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며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는 사실(21-24절)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결국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성도에게는 필연적으로 수평적으로 형제 사랑이라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하며 또 수평적으로 형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도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후반부에서 발견하는 바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그것은 바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진행시켜 온 하나님의 구속사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죽음은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최절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위로부터 먼저, 그리고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롬 5:8)을 받은 성도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반응이자 구속사적 의무가 바로 일차적으로는 수직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이차적으로는 수평적인 측면에서 함께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 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형제 사랑의 실천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간접적인 방법임과 동시에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되기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실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3:10)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성도 간의 관계도 더욱 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외울 말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지기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르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3:18,19)
성도의 신분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범죄에 대한 경계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
13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형제 사랑의 결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본문 & 자료 노트
도표- 3:1,2 하나님의 자녀의 단계별 성장 모습
특징
1. 유아기
1) 중생(요 3:3-6)
2) 신앙의 초보를 배움(히 5:12-14)
3) 여전히 육신을 좇음(고전 3:1-3)
4) 쉽게 넘어짐(고전 8:1-13)
5) 후견인이 필요함(갈 4:1-3)
2. 아동기
1) 마땅히 행할 바를 배움(잠 22:6)
2) 신앙의 초보를 넘어섬(히 6:1,2)
3) 세상 유혹으로 넘어지기도 함(엡 4:14)
3. 청년기
1) 하나님의 뜻을 행함(롬 12:1,2)
2) 선. 악을 분별함(히 5:14)
3) 푯대를 향하여 달려감(빌 3:13-15)
4) 시험을 인내로 극복함(약 1:2-4)
4. 장년기
1) 다른 성도에게 본이 됨(고전 4:14-16)
2) 다른 성도를 양육함(골 1:28,29)
3) 약한 성도를 권면함(살전 2:11,12)
4) 성화를 이룸(엡 4:13)
보감- 3:14-24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얻지 못하는 것
1. 마음의 평안(창 37:4)
2. 하나님의 용서(마 5:22; 6:15)
3. 자신에 대한 바른 성찰(마 7:1-5)
4. 성도 간의 온전한 연합(골 3:12-14)
5. 사랑의 교제로 얻는 기쁨(요일 1:3,4)
6. 하나님의 인도(요일 2:11)
7. 영생(요일 3:15)
8. 하나님의 사랑(요일 3:17)
9. 진리(요일 3:19)
10. 하나님의 기뻐하심(요일 3:22,23)
11. 하나님께 대한 사랑(요일 4:20)
12. 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요일 5:1-3)
원어연구-3:19, 굳세게 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이도'( )이다. 이 단어는 본래 '묶다'(bind)라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단어가 능동태로 쓰일 때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사실을 믿도록 말로써 유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득하다'(행 19:26), 또는 어떤 사람을 설득하여 '친분을 갖다'(행 12:20)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그리고 수동태와 중간태로 쓰일 때는 어떤 인격체나 대상에 의해 설득 받아 확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믿다'(눅 20:6), '신뢰하다'(빌 3:3,4), '확신하다'(롬 2:19)라는 뜻을 나타내게 된다. 이외에도 어떤 인격체와 친분을 갖기 위해 '좇다'(행 5:36). 또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쓰다'(갈 1:10)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한편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1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문자적으로는 '우리가(우리 마음을) 설득할 것이다'가 된다. 이를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이해해 보면 이 말은 우리가 진실함으로 사랑을 행할 때 그러한 사랑의 실천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의 마음에 두려움을 제거하여 주고 담대함과 평안함을 준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진리를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으나 진리를 행하는 자는 평안함과 확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도표-3:10,11 주요 원어로 살펴본 '사랑'(Love)의 개념
'사랑'(love)이란 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그 속성, 본질, 대상 등에 따라 사랑의 의미는 다 다르다. 아래 도표에서 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관련된 주요 원어들의 의미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사랑과 추구해서는 안 될 사랑을 대략적으로 나마 구분할 수 있다.
1. 구약원어
의미 및 관련 성구
1) 아하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사랑(신 7:8; 대하 9:8)
2) 도드: 부부간, 혈육간의 사랑(잠 7:18; 사 5:1)
3) 헨: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은총(삼상 20:29)
4) 마흐마드: 가치있게, 사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아 5:16)
5) 아가브: 무절제한, 감각적인 사랑(겔 33:31,36)
6) 라으야: 동료애, 동반자에 대한 사랑(아 1:9,15)
7) 야디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신 33:12; 시 127:2)
2. 신약의 원어
의미 및 관련 성구
1) 아가페: 이기적이지 않고 베푸는 이타적인 사랑(요 5:42; 요일 3:11)
2) 에로스(*): 남녀 간의 이성적 사랑
3) 필리아: 친구 간의 우정, 친족, 동료에 대한 호의(요 21:17; 약 4:4)
4) 스톨게(*): 부모와 자식 간의 혈연적인 사랑
5) 필란드로피아: 인류애, 박애정신(딛 3:4; 행 28:2)
6) 카리스: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은총(눅 2:52; 엡 4:29)
7) 엔티모스: 귀하에 여기는 마음(눅 7:2)
8) 프로스필레스: 상대에 대해 친절하고 우호적인 마음(빌 4:8)
9) 필라르귀로스: 물질에 대한 탐욕(딤후 3:2; 눅 16:14)
10) 필라우토스: 자기애, 이기심(딤후 3:2)
11) 피로데오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경건(딤후 3:4)
12) 필로테크노스: 부모로서 자녀를 향한 마음(딛 2:4)
(*) 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원어임
보감-3:7-9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
1. 그리스도의 말씀을 풍성히 받음(막 7:27)
2. 그리스도를 마음의 영접함(요 1:12)
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롬 8:14-16)
4.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쁘게 동참함(갈 4:8,9)
5.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림(롬 8:21)
6. 세상 초등 학문에 종노릇하지 않음(갈 4:8,9)
7. 빛 가운데서 행함(엡 5:8)
8. 죽음의 종노릇하지 않음(히 2:14,15)
9. 때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받기도 함(히 12:4-11)
10.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감(요일 2:28)
11. 의를 행함(요일 3:7)
12.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요일 3:9)
3:1-12 불법을 행치 않는 성도의 삶
지난 단락 2:18-29에서는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훼방하는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귀에겐 속한 불신자들과는 달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불법을 행치 않는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성도의 삶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도의 신분을 밝히는 부분이다(1,2절). 여기서 요한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성도의 특징을 제시하여 보이고 있다. 그것은 첫째,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 안에 있는 존재로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성도 자신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나 세상이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절). 둘째, 성도는 현재 불신자와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와 함께 영광스럽게 될 자들이라는 것이다(2절; 롬 8:17). 따라서 그 영광을 얻기까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엡 4:13). 여기서 사도 요한은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절대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필연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3-12절은 불신자들과는 신분이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전혀 다른 성도의 삶은 마땅히 하나님께 대해 불법을 행치 않는 것이어야 함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성도는 그 신분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하고 순결한 온전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레 11:44; 마 5:48). 또한 성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의 장성 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자라가는 것 인 만큼 율법을 행치 아니하고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자와 마귀에게 속하여 그와 교제를 누리는 자는 그 행실로 뚜렷이 구분된다.
특별히 요한은 여기서 마귀에 속한 대표적 인물로 가인을 소개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하고 있는데(11,12절) 여기서 가인은 본질상 하나님에 속한 자가 아니였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도 없었기에 결국 살인을 범한 자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결국 이웃에 대해 참 선을 베풀지도 않는다는, 즉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자는 수평적으로 인간들과의 바른 관계도 맺을 수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존재라는 사실과 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성화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삶의 궁극적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부단히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빌 3:10-14).
② 성도는 비록 멸망에 이를 죄 곧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짓는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6절)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때로 범죄할 수는 있는 바(롬 7:22-24) 이때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 다시 범죄하지 않도록 힘쓰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 성도는 죄를 떠나 삶 가운데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벧후 1:5-7).
3:1 보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이데'( ) 또는 '이두'( )라는 단수형이 사용되는데, 본절에서는 특이하게 '이데테'( )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본래 명령형이나 때로 감탄형으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도 감탄사로 사용되었다.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 '어떠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타펜'( )은 문자적으로는 '무슨 나라'란 뜻이나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항상 놀라움을 표시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그 놀라움은 양적으로 놀라운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놀라운 것이다(마 8:27; 막 13:1; 눅 1:29: 7:39; 벧후 3:11). 따라서 본문의 '어떠한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이라는 질적인 의미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얻게 되었다!'는 감탄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롬 8:14, 15; 갈 4:7)는 의미이다. 요한은 요일 2:29에서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언급해 놓고 그 연장선상에서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한 것이다.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크나'( )인데 이것은 출생으로 인한 자녀됨을 말하며, 이와 동의어인 '회오스'( )는 양자 개념으로 법적 관계로 인한 자녀를 말하는데 성경에서 전자는 성도들이 중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후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자가 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요한은 주로 전자를 사용하여 하나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묘사한 반면 바울은 주로 후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 여기서 '세상'이란 불신자를 가리킨다. 요일 2:2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불신자는 참 신앙인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본구절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극적인 사랑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살지 못하였다. 그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을 알지 못한다. 실로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고전 2:13) 육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영에 속한 빛의 자녀들을 알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2 사랑하는 자들아. - 요일 2:7 주석 참조.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 '지금'(뉜)과 '아직'(무포)이란 말이 접속사 '카이'( )를 사이에 두고 대조됨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현재와 미래가 내조되고 있다. 즉 성도의 현재 상태는 영적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지만 육체가 이 세상의 죄악 가운데 있음으로 아직은 완전한 영광을 차지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파네로데'( )로 요일 2:28의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아서 혹자는 바로 앞에서 말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Alford, Bengel, Brooke, Plummer), 혹자는 요일 2:28과 같이 '그리스도'를 주어로 보기도 한다(Barker, Lenski). 둘 다 의미가 통할 수 있으나 문맥으로 볼 때 후자의 견해가 옳을 듯하다. 따라서 본구절은 '우리의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을 줄을 우리가 안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옵소메다 아우톤 카도스 에스틴)이라는 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모습 그대로 본다'는 뜻이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는 의미이다(행 1:11). 성도가 주님과 같이 영광된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 소망은 바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마 16:19) 영광된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에 있다(고전 15:12-19; 고후 3:18).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여기서 '주'(아우토)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Bengel, Plummer, Smith) 아니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지(Brooke) 분명치 않다. 전자의 견해가 유력하나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다. '이 소망'(텐 엘피다 타우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이 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죄로 인해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빌 3: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이 땅에서 그 목적을 향하여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진해야 한다(레 11:44; 마 5:48). 이것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귐이며(요일 1:3),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 )는 요한이 항상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대명사이다(5,7,16절; 요 7:11; 9:12; 19:21; 요일 2:6; 4:17). 주님은 순결하시고 거룩하시며(레 11:44) 온전하시다(마 5:48).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소망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이 땅에서부터 자신을 성결케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성도는 그의 능력으로 완전히 성결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날이 오기 전부터 자신을 성결히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것은 성도가 자신의 공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요 14:21,23).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긍정을 말하고 나서 그 긍정의 부정을 말하는 요한의 특유한 논조가 다시 보이고 있다(요일 1:6,7,8,9; 2:4,5,9,10 등), '죄를 짓는 자'(호 포이온 텐 하마르티안)는 '죄를 행하는 자'란 뜻으로 전절의 소망을 가진 자'와 대칭을 이룰 뿐 아니라 요일 2:29의 '의를 행하는 자'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보다, 심각한 것으로서 죄를 먹고 마시는 자, 즉 죄에 완전히 빠진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이며, 이 말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 말 자체 안에 하나님의 계명에서 빗나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불법'에 해당하는 '아노미아'( )는 문자 그대로 '법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불법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율법을 지칭하나 본문에서는 그 율법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포괄적인 '하나님의 뜻'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실로 주께 소망을 두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1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죄이다.
3:5 그가…죄가 없느니라. - 본절은 요 1:29의 반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이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기 위하심인 것과 그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하시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3절 주석 참조.
나타내신 바 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 파네로데'( )는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표시하는 요한의 애용어로서(요 1:31; 21:1,14; 요일 1:2) 사람 상대의 표현이다. 이외에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한 낱말로는 '보내심' (아포스텔로), '오심'(에르코마이), '육체로'(사륵스) 등이 있는데, 여기서 보내심은 하나님의 편에서(요 3:17; 10:36), '오심'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장에서(요 1:11; 3:19; 8:14), '육체'로는 성육신의 모양과 관련해서(요 1:14; 요일 4:2) 표현한 것이다. 하여튼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비해 놓으신 분으로 감추어진 비밀이었다(고전 2:6-9). 그러나 그 감추어진 비밀을 하나님은 자신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신 때에 세상에 드러내셨다. 성육신하시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간을 구원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히 9:28). 그리고 이 사실은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본서의 독자들도 이미 들은 사실이 되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죄 있는 존재가 죄 있는 자를 대속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히 7:17)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려 인간의 죄를 속량시키셨다(히 7:26-28). 즉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셨지만(빌 2:7) 아담의 죄성을 입지 않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셨으며(눅 1:31-38), 하나님의 순전한 어린양으로서 죄가 전혀 없는 상태로(벧전 2:22) 십자가의 제단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을 보다 참조하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 이 문구를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난점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주를 믿는 자들도 실제로 범죄하기 때문이다(요일 1:8-10).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많은 해석들을 시도하였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본문의 죄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죄를 지칭한다(Augustine). ② 이 죄는 히 6:4-6과 같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죄를 지칭한다(Aquinas). ③ 이 죄는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가 아니라 죄인 줄 알면서 짓는 고의적인 죄를 지칭한다(Willmering). ④ 본문은 성도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Bengel). 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동안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Plummer). ⑥ 본문은 계속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Vincent). ⑦ 본문은 성도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범죄하지 않아야 하는 이상을 묘사한 것이다(Calvin). 논리적으로나 문법적으로 볼 때 ⑥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본문의 '범죄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하마르타네이'( )라는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어, 현재에도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죄를 습관적이고도 계속해서 짓는 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본문에서 '범죄하는 자'(호 하마르타논)는 습관적이고도 계속해서 범죄하는 자를 지칭하는데 이러한 자는 4절의 불법을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그것을 행하지도 못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범죄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지 않은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요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 또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사귐이 없어 사실상 하나님을 모르는 거짓신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요일 2:3)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14:21; 요일 1:3).
3:7 자녀들아. -요한은 다시 한 번 수신자들에 대하여 애정 어린 호칭을 사용하여 새로운 어조로 권면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 호칭에 대해서는 요일 2:1 주석을 참조하라.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 거짓된 사실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유혹되지 말라는 말이다(요일 2:22). 당시 초대 교회의 대표적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는 범죄하여도 영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등의 거짓 진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자료, '영지주의의 이해'를 참조하라. 그래서 요한은 본서의 독자들에게 전장에서 한 권면의 말(요일 2:26-29)을 다시 하여 그들에 대한 경각심을 재삼 고조시키고 있다. 즉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고 있으므로, 먼저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그 상태에서 주의 가르침에 따라 범죄하지 말고 성결하게 살라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의를 행하는 자'(호 포이온텐 디카이오쉬넨)는 '계속해서 의로움을 행하는 자'란 뜻으로 3절의 '소망을 가진 자'와는 병행하고, 4절의 '죄를 짓는 자'와는 완전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에케이노스)는 역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사람들에게 외적 행위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말로만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가 참으로 의롭다고 말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 요한은 다시 전절과 반대되는 개념인 '죄를 짓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죄를 짓는 자'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마귀에 속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투 디아볼루'( )는 '마귀에게 남', '마귀의 자녀'란 뜻으로, 요한은 죄를 짓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요 8:44) 마귀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 곧 마귀의 일을 행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인 것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예수님의 말을 빌리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어 진리에 서지 못하고 항상 거짓을 말하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대적하여 최초로 하나님의 뜻을 어긴 불법자이다(사 14:12,15).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그랜드 종합 교리의 '귀신론' 부분을 참조하라. 이처럼 죄의 근원은 마귀에게 있으며, 범죄는 마귀의 생활이다. 따라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본절은 5절에서 이미 밝힌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에 대한 해설이다. 요한은 죄는 불법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는 것은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마귀의 일'(타에르가 투 디아볼루)은 '하나님의 일'(요 9:3)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마귀와 그의 자녀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든 어두움의 요소들을 뜻한다(요 8:41). 그리고 '멸하려'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세'( )는 '깨뜨리다', '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진 '뤼오'( )의 제 1부정과거 가정법 형태로서 완전하고 확고하게 파멸시킴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옛 뱀, 곧 마귀를 멸하신다는 사실은 이미 인간이 범죄한 직후부터 예언된 사실이다(창 3:15).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을 속량하시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마귀의 파멸은 확정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냉정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마귀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짐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계 20:2,14,15).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6절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와 동일한 내용이다. 6절 주석 참조. '하나님께로서 난 자'(호 게겐네메노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를 믿고 성령을 받아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자(롬 8:14-16)를 지칭하는 것으로, 8절의 마귀의 자녀와 대조되는 자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자'이다. 한편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는 어떠한 특정한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6절에서와 같이 무슨 죄든지 간에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짓지 아니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범죄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성도의 마음 속에 두시사 범죄치 못하도록 경성시키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인식하고 성결되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순간순간마다 자기 자녀들에게 신령한 것으로 양육하시며 경성시키시사 자기 자녀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계신다. 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깨어 그 성령을 소멸시키거나(살전 5:19) 근심시키지 않도록(엡 4:30)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항상 자각하고 성령의 전인 자신의 몸을 성결케 유지하며(고전 3:16,17), 성령께 자신의 뜻을 의탁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그 자녀 간에 사귐이 있을 때 죄가 성도의 삶 속에 침투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씨'에 대해서는 ① 하나님의 말씀(Bede, Bengel), ② 성령(Meyer, Brooke), ③ 그리스도(Karl) 등의 견해가 있는데 ②의 견해가 합당하다. 왜냐하면 요한의 문서들에는 언제나 성령이 생명의 신적 원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3:5).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 본문은 하나의 결론적인 말로 '결국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확실히 구분되어진다'는 의미이다. 나무의 종류는 그 열매를 통해서 밝혀지기 마련이다(약 3:12).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들의 행위가 마귀의 자녀임을 드러내었듯이 죄에 거하는 생활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의와 죄 사이에서 중립이란 없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 쪽이냐 마귀 쪽이냐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선택되어지는 존재이다.
무릇…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요한이 구분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구별 점은 '의'와 '사랑'이다. '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의 양면이며 총체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하여는 심판의 의를 나타내며 인간에 대하여는 사랑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역으로 하나님의 의는 사랑으로 집약된다(마 22:37-40). 그러므로 의를 행하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렇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인 것이다. 사랑에 의의 절제가 없으면 죄가 틈타 들어오고, 의에 사랑의 부드러움이 없으면 그 의는 무미건조한 공의로 머물고 만다. 오직 의와 사랑이 연합하여 온전히 행할 때 선이 완성되는 것이다.
3: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 본절은 요한이 본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요약이며 핵심이다(요일 4:7,16). 요한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사귀고 빛 가운데 거하며 계명을 지키는 것도 다 사랑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요일 2:10; 4:10; 5:3).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사상과도 일치한다(고전 13:13).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처음부터'라는 것은 본서의 독자들이 '믿기 시작한 때부터'를 의미한다. 요일 2:7,24 주석 참조. '소식'(헤 앙겔리아)은 주님의 가르침인 복음을 지칭한다(Brooke).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하나의 강령으로 묶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거니와(마 22:37-40)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본서의 수신자들은 처음 믿을 때부터 들었다. 그 만큼 이 사랑은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이었으며 구체화된 복음의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사랑의 계명을 삶 속에 실현시켜야 하는 이유와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한 자요 자기 형제를 죽인 악인이었다. 그는 육으로 상징되는 땅에서 난 소산을 하나님께 드려 그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자신의 불의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의로운 제사를 드린 자신의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살인한 자이다(창 4:1-8). 요한이 이러한 가인을 마귀에게 속한 악인으로 예를 드는 것은 그의 행위가 의롭지 못할 뿐더러 그 속에 사랑이 없어 살인을 한 인류의 대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의와 사랑'이 없는 전형적인 악인이었던 것이다.
악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포네로스'( )는 본래 '악독한', '사악한', '타락한'이란 뜻을 가진 낱말로 본문에서는 10절의 '마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마 13:19; 요 17:15).
죽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팍센'( )은 '도살하다', '목을 자르다'라는 뜻을 가진 '스파조'( )의 제 1부정과거형으로 본문 이외에는 계시록에서만 나타난다(계 5:6,9,12; 6:4,9). 이는 단순히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비심 없이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3:13-24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 방법, 결과
요한은 지난 단락 1-12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삶의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으로서 마귀에게 속한 불신자들과는 달리 율법을 행치 말아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어 3:13-4:21에서는 앞의 논리를 좀 더 심화시켜 마귀의 자녀와 대별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으로서 형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 본문은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와 형제 사랑의 구체적 방법과 결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즉 수직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삶의 열매로서 수평적인 측면에서의 형제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형제 사랑의 필연적 이유로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하는 희생적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음(13-17절)을 밝히고 이어 형제 사랑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것(17-20절)을 제시한다. 그리고 형제 사랑에 따르는 결과로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으며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는, 즉 수평적인 측면에서의 형제 사랑이 수직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심화시켜 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21-24절).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믿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는 때로 이 세상 사람들의 핍박이 따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란 곧 믿지 않는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들일 수 있다(마 12:50). 그들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가 그들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나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바라보며, 또 우리에게 거저주신 주님의 십자가 구속 희생의 사랑에 대해 빚진 자로서 끝까지 믿는 형제 사랑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성도들은 형제를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실천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약 2:15,16).
➂ 형제 사랑의 실천은 곧 형제를 사랑하라 하신 주의 계명(요 13:34)을 준행한 것이 되므로 그 결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돈독하여진다는 것이다. 본문 21-24절에서 형제 사랑의 결과로 얻게 되는 담대함과 기도 응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숙한 교제의 증거들인 것이다(요 14:12,13).
3:13 형제들아. - 요한이 교인들을 부름에 있어 '형제'(아델포스)란 말을 사용한 것은 이곳이 유일한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자녀들아(요일 2:1,12,28), 또는 아이들아(요일 2 :18)로 부르고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요한은 악한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였다고 전절(12절)에서 설명하였다. 가인이 형제 아우를 죽인 것은 단지 자신은 악하고 아벨은 의로웠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한 내용에 대해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주님은 의와 사랑이신 자신에게 성도들이 속하였기 때문에 악한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8,19). 따라서 악한 세상이 거룩한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즉 거기에 대해 분노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한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이해하지 못하며(1절) 그 성도들이 의와 사랑을 행할 때 오히려 시기하고 미워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악한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하기 때문이다.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 이 문장의 용법은 요일 2:3의 용법과 동일하다. 즉 본문은 나타난 결과를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는 동인(動因)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요 5:24).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믿음이 있는 줄 알거니와'라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사랑의 행위는 믿음의 증거이며, 믿음은 사랑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비록 사랑의 행위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이유는 되지는 못하지만,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된다. 믿음과 사랑의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어느 한쪽이 결여되어서도 안 되며, 어느 한쪽을 버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이 결여된 믿음이나 사랑의 행위 그 자체로는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이 결여된 사랑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랑이요. 사랑이 결여된 믿음도 죽은 믿음인 것이다(약 2:17). 한편 '생명'에 관해서는 요일 1:1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망'(다나토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이므로 죄 가운데 그대로 있게 되며 따라서 죄의 값인 사망에(롬 6:23) 처하게 되는 것이다.
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예수 그리스도의 고감도(高速度) 윤리가 나타나고 있다.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으며(마 5:28),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 역시 살인을 행한 것과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요한은 이미 형제를 살인한 악인 가인의 예를 들어 살인의 불의성을 제기해 놓고 나서(12절), 이제 더 깊이 들어가 예수님의 고감도 윤리를 적용시켜 형제를 미워하는 것마저도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미움과 살인은 내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다만 살인은 미워하는 감정이 밖으로 강하게 표출된 것뿐이다. 미움은 어두움의 속성이며 마귀의 전유물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모든 상대를 미워하고 살인한 자이기 때문이다(요 8:44).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므로 그 안에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질 수 없으며 영생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 '그'(에케이노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목숨을 버리셨으니'(텐 프쉬켄 아우투 에데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셨던 관용구로서(요 10:11,17) 전절의 '살인', 즉 '타인을 죽이는 행위'와 정반대되는 개념인 타인을 위한 희생을 가리킨다. 한편 헬라어 원문에는 '이로써'(엔 투토)가 문장의 처음에 위치해 있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가인과 같이 땅에 뿌리를 둔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미움'과 '살인'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자신을 미워한 세상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요 3:16). 세상은 원수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된 자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사 원수된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친히 자기 목숨을 버리셨던 것이다(롬 5:10; 빌 2:6-8).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최상의 사랑을 보여 주시사 사랑의 모범이 되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하여 사랑을 알게 되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요한은 주의 말씀을 반영하여(요 13:34; 15:13) 형제를 위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죽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안다는 것은 죽음조차도 자신의 삶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미움의 핵심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데 있다면 사랑의 핵심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마땅하니라'(오페일로멘)는 빚진 자의 자세를 일컫는 말로 빚진 자가 빚을 갚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 본절의 헬라어 원문은 '그러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 )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긍정적인 전절에 대해 부정적인 반증임을 나타내는 말로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논법이다(요일 1:6,7; 2:4,5,9,10). 즉 본절을 전절과 연관시켜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형제를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자가 썩어질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 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이겠느냐'는 의미이다. 가만히 살펴볼 때 이 논조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탕감 받은 후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않아 주인으로부터 형벌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18:21-35). 예수님의 희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자기 생명을 희생하기는커녕 썩어 없어질 재물조차 궁핍한 형제를 위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면치 못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세상 재물'(톤 비온 투 코스무)은 돈이나 보화 같은 좁은 의미의 재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요구되어지는 모든 삶의 방법 또는 수단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을 막으면'에서 '막는다'는 말의 헬라어 '클레이오'( )는 '닫다', '잠그다', '감금하다'는 뜻으로, 이는 궁핍한 형제를 도우고 싶은 마음을 의도적으로 제어하거나 억누르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혹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나(Plummer) 이것은 요일 2:15에서와 같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보는 것이 옳다(Alford, Meyer, Bengel, Brooke). 사람은 누구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갖는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것을 외면하며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자들이 입으로 아무리 사랑을 외쳐댄다고 해도 그 외침은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3:18 자녀들아. - 요일 2:1 주석 참조.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요한은 본절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텅 빈 말로만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행함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는 것은 공허하고 거짓된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음에도 없는 상냥한 말을 떠들어대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말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이 아주 진실된 것일 수도 있다. 요한은 이런 것들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이 말로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데 있다. 참된 사랑은 진실한 말로 형제를 위로하고 사랑한 것에 걸맞게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진실된 말은 거짓이 되고 만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에 대해 명확하고 예리하게 말하고 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20).
3:19 이로써‥‥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 '이로써'(엔 투토)는 전절의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며, '진리에 속한'(에크 테스 알레데이아스 에스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한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맡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실제로 사랑을 진실하게 행하면 그것으로 성도가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께(요 14:6)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 받는다는 것이다. 14절 주석 참조.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도는 자기의 신앙을 확증 받을 뿐 아니라 신앙이 굳세어지고, 더 나아가서 성장하게 된다. 한편 '굳세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이도'( )로 이 말은 '평안케 하다'(Bengel) 또는 '확신케 하다'(Vincent)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느 쪽을 취해도 전체 문맥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전자의 견해를 따라 평안케 하다로 해석하여 본절을 '우리가 진실히 사랑하게 되면 장차 주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이 평안할 것이다'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하나님일까 보냐. -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이것을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된 그대로 보면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더 책망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렇다면 이 내용은 앞뒤와 전혀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더욱이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 )가 있어 본절이 앞절과 연관된 문장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본문을 앞절과 떨어뜨려 놓고 볼 수도 없다. 또한 '하나님일까 보냐'가 반드시 '우리를 책망할'의 '책망'과 대구가 되어 '하나님의 책망'을 의미하는지도 확실치 않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일까 보냐'를 '우리를 책망할'과 대구어로 보아 '하나님의 책망은 더 엄하시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Calvin, Findlay),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책망'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본다(Luther, Bengel, Vincent, Brooke). 전자의 견해를 취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앞뒤 문장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정리하여 보면 19절의 '굳세게 하리로다'를 평안케 하리로다'로 보고(19절 주석 참조), 본문의 초두에 원문대로 '왜냐하면'이 있는 것을 그대로 놓고, '하나님일까 보냐'를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진실하게 사랑을 행하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 또한 우리 마음이 주 앞에서 평안할 것이다. 왜냐하면 때로 우리가 연약하여 진실하게 행하다가 실수하여 혹 우리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함으로 행한 우리에겐 그 마음을 다 이해하시는 하나님, 곧 우리 보다 큰마음을 가지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크신 사랑과 은혜로 대해 주시기 때문이다'가 된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아마도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마음'이라고 해석된 헬라어 '카르디아'( )는 원래 지성과 도덕적인 정서가 깃들인 곳을 뜻하나, 여기서는 '양심'(conscience)을 의미한다.
3:21 사랑하는 자들아. - 요한이 교회의 형제들을 부를 때 즐겨 쓰는 애칭이다(요일 4:1,7, 11). 요일 2:7주석 참조.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전절에서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면 설령 미흡한 점이 있어 양심으로부터 자책 받을 것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에 속하고 하나님 앞에서 평강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20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러한 자책할 것조차 없이 참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형제를 사랑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의 계명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친구가 된다(요 14:21; 요일 2:24). 이처럼 사랑의 완성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게 해준다(요일 4:17).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벽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 따라서 그 때에는 온전한 기도를 통해 완전한 응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된다.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신 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다(요 14:12,14). 이는 주님의 길을 가면, 즉 주님이 실천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아 행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되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요한도 본문에서 기도 응답의 원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어 주님이 하신 말씀과 연관되고 있다. 아마도 요한은 주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 앞절(22절)에서 요한은 성도가 기도 응답을 받는 원인과 조건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요한은 본절에서 그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그 계명은 오직 두 가지로 요약되고 있는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엡 1:15).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그 아들'에서 '그'(아우투)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아들'이 첨가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이단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요일 2:22, 23). '이름'(오노마티)이 히브리 관념에서는 실재를 표시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계명'(헤 엔톨레)은 본래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나, 요한이 본절에서 '사랑'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한 것은 마 22:34-40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3:24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본문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 안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 주께서 그러한 자 안에 거하고 그가 주 안에 거하는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귐(요일 1:3)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아우토스)가 하나님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은데 이렇게 구분치 않고 사용하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다(요 14:15; 15:5; 요일 4:15). 따라서 둘 중 어느 것을 지칭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으나 22절에 비추어 볼 때 주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거한다'(메네이)는 것은 '내재한다', '함께 산다'는 뜻으로 매우 친밀한 영교(靈交)를 가리킨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거하시는 줄. -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되 그의 거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성도 안에 주시는 것이다(요일 4:13). 한편 '주신'(에도켄)은 부정 과거형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번 주신 것이 영원히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성령은 한 번 주어짐으로 성도를 인치고 또한 영원히 함께 하사 성도와 교제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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