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3)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증거
롬 1:18~25
I. 서론
오늘 본문부터 로마서 본론이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로마서 서론을 살펴봤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차례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았는지도 알 수 있는데, 본문에 크게 세 가지 증거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사람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리를 막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아무 진리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진리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에 보면, “진리” 앞에 “정관사(τὴν)”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진리는 로마서 1장 1절부터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16절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러니까, 좁게 말하면,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말이고, 조금 넓게 말한다면,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이 지금 3차 선교여행 중이고,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에 오기 바로 전, 에베소에서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에서 약 2년간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데메드리오를 위시하여,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장사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수입에 손해가 발생하자, 바울이 전하던 복음의 진리를 막고 수많은 무리들을 선동하여 소란을 피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사건을 머리에 두고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들의 특징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입니다. 영어로 보면, 조금 더 명확합니다. 롬 1:18 (NIV) “The wrath of God is being revealed from heaven against all the godlessness and wickedness of people, who suppress the truth by their wickedness” godlessness, wickedness. 그러니까, 경건하지 않다는 것은 Godlessness, 즉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이고, 불의하다는 것은 Wickedness, 즉 악한 일을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없이 살고,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고 핑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답변을 미리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9~21절을 읽어볼 텐데, 이 구절에서 “안다”는 말과 “보이다”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오고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19~21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안다”는 말은 3번 (19, 알 만한 것 / 20, 알려졌나니 / 21, 알되) “보이다”는 말도 3번 (19, 보임이라, 보이셨느니라 / 20, 분명히 보여)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을 조금 더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우리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이점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고 하나님께 감사도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두 번째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 영광과 감사의 예배 드리고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읽은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보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시면, 두 가지 방법으로 보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20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는 19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20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 속에 (사람 밖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사람 속에, 다른 하나는 만물 속에 두신 것입니다. 20절, 만물 속은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조금만 경건한 마음으로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건한 마음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만 가지고 관찰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간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신체 하나 똑같이 만들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었다고 한다면, 이것 하나 똑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주 속에 떠다니는 흔해 빠진 행성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냉정하게, 인간인 우리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9절에 있는 “사람들 속에 두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도 바울은 직접적인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해설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맥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1~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21~23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상을 만든 재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두신 것과 하나님께서 만물 속에 두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두 가지 재료를 결합해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두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 의식”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의식”입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하면, “종교 의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아무리 고등한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신 의식을 가지고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두신 신 의식과 하나님께서 만물 속에 두신 피조물로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을까요? 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로마 사회가 이러한 우상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를 읽고, 로마교회 성도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 로마 사회는 다신론적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다른 문화와 신들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이라고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상규 교수님의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규,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많은 신을 숭배할수록 신에게 은총을 받을 기회가 더 많아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행 17장)...... 로마는 모든 신들을 다 수용했습니다. 로마 사회가 지닌 다신교적 특징 때문에 공존이 가능했으며, 또한 하나의 신만 섬긴다거나 다른 신을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도시는 주피터를 숭배하면서 동시에 아무런 내적 충돌 없이 아폴로 신을 숭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호수용성은 다양한 신들을 단지 이름만 다른 동일한 신으로 보거나, 아니면 최고의 신 휘하에 있는 지역신들로 보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로마의 문화에 익숙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지금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행동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로마 당시의 문화가 현대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를 존중해 주고,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현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현재 우리의 사회를 본다면, 로마서를 다시 써서 보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 내려졌는지 아십니까? 24, 26, 28절을 읽어 볼 텐데, 어떤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어떤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까? “내버려 두사”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보시면, 이 말 앞에 한 단어가 더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 내버려 두사” 그러니까,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심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는 형태로 심판하실까요? 그 이유는 최후의 심판 때, 더 큰 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네게 쌓는도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둠으로 사람들이 계속 죄를 짓게 해서 최후의 심판 때에 더 큰 벌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는 심판,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진노의 날, 최후의 심판 때 하시는 심판입니다. 이 땅에서의 심판은 내버려 두는 것으로 나타나고, 최후의 심판은 지옥에 보내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옥이라고 말씀 드리면, 거부감을 가지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니러니하게도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백금산, “첫째, 예수님은 불신자가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지옥”이라 부르십니다(마 5:29-30, 23:15, 23:33; 막 9:45-47). 둘째, 예수님은 지옥을 ‘불’과 연관시켜 “지옥 불”,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불”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셨습니다(마 5:22: 마18:8-9). 셋째, 예수님은 지옥을 “바깥 어두운 곳”이라 표현하시면서 지옥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마 8:11-12, 25:30). 넷째, 예수님은 죄인들이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때는 세상 끝 날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40-42, 49-50). 다섯째, 예수님은 지옥을 몸과 영혼이 모두 고통 받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여섯째, 예수님은 지옥에는 불신자만 아니라 마귀와 마귀의 부하인 타락한 천사들도 함께 던져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41). 일곱째, 예수님은 지옥의 고통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43-4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세 번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조금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징계”와 “진노”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징계”는 하시지만, “진노”는 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진노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이미 다 쏟아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는 하십니다. 히 12:7~8,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진노”는 내버려 두는 것이고, “징계”는 혼나는 것입니다. “진노”는 저주의 표현이고, “징계”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30년 전 사랑의교회를 다닐 때, 그 교회에서 간증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분들 중에서 남자 1명, 여자 1명을 선정하여 대예배 시간에 세례 받기 전에 간증을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년 듣다 보면, 내용만 다르지, 패턴은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는 분들이니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자신이나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났거나 부도가 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큰 근심에 쌓여 있던 중, 동창생이나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사람이 사랑의교회 다락방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랑의교회 교우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후, 주일예배나 새생명축제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에게 찾아온 시련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그냥 예전처럼 잘 먹고 잘 살도록 내버려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분들은 결코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너무 나간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비추어 봤을 때, 솔리비타나 우리 주위에 계신 분들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분들이 지금 이대로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이것을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분들에게 시련을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마셔서 최후의 심판은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는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는 징계하심으로 돌아오도록 하시고, 자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함께 하셔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사랑했던 성경구절이 이사야 41장 10절이었다고 합니다. (YouVersion 통계)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징계하시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함께 하시며 붙들어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은혜가 올 한 해 동안,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