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사나이들
괴사(怪事)!
백년이대괴사(百年二大怪事)!
백 년의 세월동안 풍운무림(風雲武林)에는 가히 미증유(未曾有)의 이대괴사가 벌어졌다.
인간을 죽이는 살상용 무기를 지니도록 허락된 무림의 세계에서 그 숱한 세월동안 어찌 한두 가지의 일만이 벌어졌으랴마는 사실 백년이대괴사라 불리는 이 두 개의 일만큼 크고 엄청난 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첫번째, 도가혈사(道家血事)!
도(道).
학문적으로는 대륙을 풍미하는 유(儒), 음양(陰陽), 법(法), 명(名), 묵(墨), 종횡(縱橫), 잡(雜), 농(農)과 더불어 구류(九流)의 하나로 꼽히는 도(道)는 유불선(儒佛仙)이라 하여 삼성도(三聖道)로 불리기도 한다.
수양과 고행으로 선인(仙人)의 경지를 지향하는 세외(世外)의 대학(大學)이기도 한 도가(道家).
백 년 전, 그 도가에 때아닌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영락일년(永樂一年).
남부 도가대파(道家大派)의 하나인 공래파( 崍派)의 장문인 침소에서부터 이 끔찍한 일은 비롯되었다.
선풍대구식(旋風大九式)으로 도가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무림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절공우사(絶空羽士)가 자신의 침소에서 목없는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것을 필두로 하여 수심암심(樹深岩深)의 수양대파 청성파(靑城派)의 대장문(大掌門) 천혜진인(天慧眞人)이 그의 연공실(練功室)에서 처절하게 피살되었고, 남부 동정호(洞庭湖)로 집단고행을 떠났던 공동파( 派)의 도사 백여덟 명이 한꺼번에 호수 수면으로 시체가 되어 둥둥 떠오르게 되니…….
경악!
분노!
홍진(紅塵)이 싫어 세외(世外)로 나간 이들 도인들을 이토록 무참히 척살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소림(少林)을 태두(泰斗)로 한 무림맹에선 연일 회의가 소집되었고, 무림오대도가(武林五大道家)로 불리던 무당(武當), (靑城), 공래( 崍), 공동( ), 전진(全進)의 다섯 문파에선 정예고수 일천을 모아 도가추적대를 결성하여 무림에 급파해 그 흉수를 찾고자 했다.
하나 흉수는 거의 완벽했다.
그는 운중신룡(雲中神龍)인 양, 비단 티끌만한 흔적도 내비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추적하는 도가의 고수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서를 종횡하며 계속 도인들을 죽여 나갔다.
최초의 절공우사 이래, 삼 년 동안 이 엽기적 살인마의 손에 죽어간 도인의 수는 무려 일천.
뿐인가?
그해 겨울에는 흉수를 추적하던 도가추적대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다시 일천의 목숨을 눈덮인 설원에 흩뿌렸다.
도마(道魔).
누군가 그 흉수를 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신경(神境)에 이른 무예로 휘하문인 삼만을 헤아리던 오대도가의 정예들을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했고 급기야는 무당을 제외한 청성, 공동, 공래, 전진의 사대도가를 무림에서 영원히 제명시켜 버렸다.
소림과 더불어 무림양대산맥으로 그 명성을 떨치던 대무당파도 그 이후 세력이 격감, 유능한 인재는 문파를 떠나고 남아 있던 인재는 화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자결하게 되니…….
그 어마어마했던 도가혈사 이후 무림에선 도가의 위풍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무림맹이 소집하는 무림회의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영화롭던 도가의 건물들은 이끼와 잡초로 뒤덮여 갔다.
도가에 입문(入門)하려는 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도가혈사.
아무도 그 수수께끼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고, 또 알고자 하는 사람도 없는 채 백 년의 세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째, 영웅패사(英雄覇事)!
오십 년 전, 기련산(祁連山) 장천봉정(長天峯頂)에는 거대한 석비(石碑) 하나가 우뚝 세워졌다.
일천오백여 사파(邪派)의 서명이 있는, 핏빛으로 얼룩진 검은 흑옥(黑玉)의 패.
일명, 만사패(萬邪牌).
―잊지 않으리라. 이 사무치는 혈한(血恨)을!
진천우도(震天雨道)여…….
오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라!
우리의 후예가 반드시 잃어버린 사파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패의 주위에는 일천열한 개의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것들은 제각기 울고 찡그리고 분노하고 탄식하는 백팔번뇌의 표정으로 서 있다고 한다.
천하의 사파는 그 패 하나만을 남기고 이 땅에서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 때문에!
벽력뇌군(霹靂雷君) 진천우도(震天雨道).
그가 처음 무림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그의 반 토막난 취검(翠劍)과 병약한 몰골을 비웃었다.
하나 그 웃음은 이내 놀람으로, 또 놀람은 믿을 수 없는 경악으로 변해야만 했다.
벽력뇌군 진천우도는 무림에 등장하자마자 가히 경천동지의 패업(覇業)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단신필마(單身匹馬)로 그 당시 무림을 횡행하던 사마(邪魔)의 무리들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흑마궁(黑魔宮), 혈혈마성(血血魔城), 신도사해맹(神刀四海盟), 마마교(魔魔敎) 등 무림을 날뛰던 육방칠회사맹일채(六 七會四盟一寨)가 그의 정검(正劍) 아래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뿐인가? 또한 그는 말을 남북으로 짓쳐 당시 중원을 은근히 엿보고 있던 새외의 이파(異派)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천축(天竺)의 마라혈궁(魔羅血宮), 북해(北海)의 설교(雪敎), 성숙해(星宿海)의 탑륵대성(塔勒大城) 등의 새외 거효마파들로 하여금 스스로 중원불침(中原不侵)의 약서(約書)를 쓰도록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다가 진천우도가 바로 천 년 전, 신화의 영웅 만룡무군왕의 후예임이 밝혀졌을 때는 사람들은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해 버렸다.
그렇다! 전설의 만룡무학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토록 가공한 패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천 년의 세월을 이은 두 번째 신화의 탄생!
진천우도!
그는 만룡무군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무학과 명망은 가히 하늘에 높이 떠 있는 태양과 견줄 만큼 높았다.
무림인들은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으며, 무림과는 관계없는 시정(市井)의 서민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진천우도의 거처를 대봉황천(大鳳凰天)이라 이름짓고 그곳을 일대 금역(禁域)으로 여겼다.
대봉황천의 진천우도.
그는 영원히 허물 수 없는 거인(巨人)이었다.
아무도 이 이름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신인(神人)이었으며,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수(高手)였기 때문이다.
영웅패사.
정도(正道)로부턴 신망(信望)을, 사도(邪道)로부턴 굴복을 받아내어 무림의 역사상 두 번째로 이 땅의 주인이라 일컬음받게 된 자.
이 일대거인의 협의, 슬기, 무예를 일컬어 사람들은 백 년 내의 두 번째 괴사라 하였다.
덕분에 무림천하는 오랫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무림사(武林史)에 일찍이 없던 현상이었다.
하나 시기와 음모와 피비린내나는 투쟁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험악한 무림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평화가 사실 오래갈 수 없음을 내심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초의 징조는 남부 괄창산(括蒼山)의 너른 벌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 *
징징!
삐이익―삐익!
꽹과리소리, 징소리, 그리고 귓청을 찢는 듯한 호각소리.
제각기의 소리는 정신없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너른 들판.
일망무제(一望無際)라 해도 좋고, 광활무공(廣闊無空)이라 해도 좋다.
저 멀리 괄창(括蒼), 천태(天台), 안탕(雁蕩)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봉들이 병풍처럼 초원의 끝에 서 있고, 그 위로는 건드리면 금방 푸른 물이라도 묻어날 듯한 짙푸른 하늘이었다.
그 가을의 들판 사이로 여기저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약 일이백 명쯤 될까?
손에 손에 몽둥이와 꽹과리를 든 채 거대한 타원형을 형성하며 그들은 천천히 벌판을 압축해 오고 있었다.
손에는 사슴가죽장갑을 끼고 허리에는 살촉을 꿰어찬 그들은 일견해 보기에도 사냥을 돕는 몰이꾼의 행색이었다.
몰이꾼들이 무려 이백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사냥터에 나온 자들은 황제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닌 배부른 위인들인 듯했다.
초원의 이쪽 끝에 있는 한 개의 야트막한 둔덕 위로 두 사람이 말을 탄 채, 몰이가 진행중인 사냥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좌측의 위인은 사십대의 장년인이었다.
그는 검은 흑의무복(黑衣武服)에 같은 색의 비단 피풍(被風)을 쓰고 있었으며, 교룡가죽으로 만든 듯한 번들거리는 장갑을 낀 우수로 당차 보이는 한 자루의 탄궁(彈弓)을 들고 있었다.
그에겐 마치 부처의 후광처럼 빛나는 일종의 위엄이 뿜어지고 있었다.
늘 명령만 하고 살아온 자 특유의 오만도 엿보였다.
그가 탄 말이 먹물처럼 검은 오추마(烏 馬)인데 비해 우측의 말은 붉디붉은 혈홍마(血紅馬)였다.
우측의 사람은 승인(僧人)이었다.
노란 승포에 붉은 선삼(禪衫)을 걸친 노승(老僧).
흑황교(黑黃敎) 계열의 라마승(喇 僧)인 듯했다.
우뚝한 코와 장대한 신형은 그를 마치 하나의 산(山)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는 거의 눈을 감고 있다시피 했다.
하나 이따금씩 주름진 눈꺼풀이 열릴 때마다 그 사이로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안광이 스며 나오곤 했다.
한눈에도 고귀한 기품이 역력한 이들의 뒤로는 열두 명의 현의무복 고수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와와……."
삐익―삑!
징―지잉―
그때 돌연 허리까지 덮일 듯한 무성한 풀숲 속에서 느닷없이 한 마리의 멧돼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멧돼지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맹렬히 땅을 박차며 장년인 일행을 향해 짓쳐들기 시작했다.
우두두―
푸르르―
흑포장년인은 말없이 수중의 탄궁을 치켜들었다.
시위가 팽팽히 당겨지고 그의 우측 뺨 근육이 가볍게 경련한다 싶은 순간,
타앙!
빛줄기인가?
츠츠츳―
공작깃털이 달린 화살은 정확하게 달려오는 멧돼지의 앞이마를 꿰뚫었다.
꾸에엑!
멧돼지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파아란 하늘에 꽃잎처럼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
핏물을 투과해 오는 햇살은 무지개빛이었다.
문득 장년인의 얄팍한 입술 사이로 한소리 중얼거림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우리는…… 그를 살려야 하오."
무슨 뜻일까?
노라마승의 백미(白眉)가 꿈틀했다.
장년인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흘려냈다.
"둘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뿐이기 때문이오."
노라마승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둘째 이황야(李皇爺)께서 나리께 반역(反逆)의 기(旗)를 쳐든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
"둘째는 거인(巨人)이오. 그는 어려서부터 우리 네 형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존재였소."
"대봉황(大鳳凰)의 십팔절기예(十八絶技藝)는 물론 금기서화(琴棋書畵) 및 기문방학(奇門傍學)에도 모조리 달통했다고 들었소만……."
장년인은 침중한 탄식을 터뜨렸다.
"부친께서 천하의 사마(邪魔)를 모조리 멸하시어 그들을 새외로 몰아낸 지 어언 삼십 년…… 솔직히 둘째의 성취는 우리 세 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나오. 또한 가친께서도 그를 가장 총애하셨소."
노라마승의 두 눈에 예리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가 왜……?"
"아무도 이유를 모르오. 하나 분명한 것은 둘째는 이미 대봉황을 뛰쳐나가 가친에게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들었으며, 그런 그를 제압할 사람은 가친을 제외하고는 오직 위지중걸(慰遲中傑), 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오."
커흥!
크르르―
이번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사냥터로부터 날듯 뛰쳐나왔다.
흑포장년인과 노라마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손을 쳐들었다.
퍽!
좌측 호랑이의 목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뒤쪽으로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황교(黃敎)의 전설적인 무예, 서천불수인(西天佛手印)이었다.
팍!
우측 호랑이의 몸은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반으로 쫙 갈라져 나갔다.
슈욱!
육안으로는 거의 분간할 수도 없는 붉은빛 한 줄기가 빨리듯 흑포장년인의 소맷자락 안으로 스며들었다.
노라마승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월신아(一月神牙)는 대봉황 암기십절(暗器十絶)의 하나…… 과연 훌륭하도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를 외우고 난 노라마승은 다음말을 이었다.
"하나 위지중걸은 나리에 대한 불경죄(不敬罪)로 지하 십 리의 지옥뢰(地獄牢)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死刑囚)가 아니오이까?"
장년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욱 그를 살리자는 것이오."
"나리를 뒷받침했던 대봉황 제이의 고수…… 그의 한 자루 도(刀)는 하늘의 벽뢰를 벤다 하였으니…… 그런 그를 다시 풀어놓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일 텐데……."
"그는 정대(正大)한 사내요. 비록 감옥에 갇혀 있기는 하나 그는 아직도 가친을 존경하고 있소."
흑포장년인의 건조한 시선이 고요한 하늘을 우러렀다.
"설사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 해도 이미 어쩔 수 없소. 상처입은 두 마리 호랑이를 같이 놔둘 순 없는 것이오."
"죽음을 기다리는 호랑이로 하여금 도망간 호랑이를 쫓게 한다?"
"그것이 최선책이오. 설사 내가 가친이라 해도 이 방법을 택했을 것이오."
* * *
어둠, 자욱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 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당당한 체구요, 건장한 몸이었다.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는 마치 산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면은 벽.
아득한 높이의 창살로 흐린 구월의 햇살이 스며든다.
그때 돌연, 둔중한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소름끼치는 철문의 개음(開音)이 주위의 정적을 찢었다.
철컹!
삐이걱―
역광을 안고 한 그림자가 성큼 철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일신에 붉은 무복(武服)을 걸친 무사였다.
홍의무사는 극히 공손한 태도로 철문 안의 장대한 사내를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나오십시오."
사내의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아니, 그저 밝음을 향해 무심히 돌려졌다는 표현이 옳을까? 비로소 희미한 빛 아래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는 사십 세 가량으로 보였으며,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과 흑백이 뚜렷한 한 쌍의 호안(虎眼), 시커먼 구레나룻, 그리고 굳게 다물린 입술 등이 그의 완강한 고집을 능히 짐작케 했다.
사내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오라는 데 대한 질문도 거부도 없이 그는 몸을 일으켰고, 철문조차 왜소해 보이는 그 거대한 신형을 밖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연무장(練武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무예를 연마하는 고수들과 제각기의 일들로 분주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걷거나 몸을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흰 대리석을 깐 연무장 위로 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동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그리고 일제히 멈추어졌다.
사내는 건장한 체구를 매우 천천히, 느릿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은 일시에 수만 평의 연무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내를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극경(極敬)의 념(念).
사내는 오연히 햇살 속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몸은 이내 고루거각의 숲 사이로 파묻혀 갔다.
한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옆 사람을 향해 물었다.
"누군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질문을 받은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쯧쯧…… 아무리 늦게 입문했다고는 하나 저 영웅을 모른단 말인가? 그는 과거 이곳 대봉황천의 십만교두(十萬敎頭)이자 천하제이인자라고 불리던 대고수일세. 염왕시상면(閻王是相面) 마도불시상면(魔刀不是相面)도 모른단 말인가?"
"염왕시상면…… 마도불시상면? 맙소사! 설마하니 무적마도(無敵魔刀) 위지중걸?"
벽력뇌군 진천우도의 네 아들은 각기 다른 성을 쓴다.
그들은 모두 동부이모(同父異母)의 이복형제들로서 진천도우는 괴이하게도 이들에게 각기 모친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첫째 남강(南江)이 도씨(屠氏)요, 둘째 천상(天上)이 화씨(華氏)이다.
셋째 헌위(軒葦)가 용씨(龍氏)요, 넷째 경경(瓊瓊)이 위씨(韋氏)였다.
도남강(屠南江)은 창을 향해 뒷짐을 진 채 우뚝 서 있었다.
위지중걸(慰遲中傑)이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위지중걸은 그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방 중앙에 놓인 탁자로 천천히 걸어가 털썩 주저앉으며 한 잔의 차를 따라 입술로 가져갔다.
차(茶).
참으로 오랜만에 마시는 것이다.
영원히 마실 수 없을지도 몰랐던 그것을 그는 매우 아끼며 천천히 마셨다.
문득 등진 자세 그대로 흑포장년인 도남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요. 대교두(大敎頭)!"
위지중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남강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 땅을 지배하는 거인(巨人)의 첫째 아들이며, 천하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십만이나 모여 있는 대봉황천의 제이인자(第二人者)이기도 한 그는 색깔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둘째 천상(天上)이 성을 나갔소. 그는 아버님을 배신했소."
위지중걸의 손에 들린 찻잔에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하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아직 극비에 붙여져 있소. 둘째의 행동을 이해하실 수 있겠소?"
위지중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이 무림에 알려진다는 것은 신성화되어 있는 아버님의 명예에 흙칠을 하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위지대교두에게 기대를 걸고 있소."
위지중걸은 호안에 가벼운 의아함을 안고 도남강을 향했다.
도남강의 우수가 느릿하게 한쪽을 향해 쳐들렸다.
순간 우측 방벽이 밀려 올라가더니 두 가지 물건이 자단(紫壇) 위에 놓여져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그긍―
첫 번째 물건, 형틀.
죄수들이 유배 갈 때 목에 차고 가는 목형 틀.
두 번째 물건, 도(刀).
전신에 황금빛이 도는 영롱한 교룡금수(蛟龍錦繡)의 신도(神刀).
도는 바로 위지중걸의 애도(愛刀)였다.
그리고 육각형의 창문 틈으로 다시 하나의 섬세한 인영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쪽에서는 볼 수 있지만 저쪽에선 이쪽을 볼 수 없는 구조.
창 저쪽에서 서성이고 있는 교영(嬌影)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 정도.
반달처럼 흰 아미(蛾眉)에 주사빛 입술이 새하얀 옥부(玉膚)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미소녀.
위지중걸의 두 눈에 가벼운 흔들림이 일었다.
그의 미간 사이로 한줄기 고뇌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도남강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벽을 환원시켰다.
"따님은…… 그 동안 우리가 정중히 모시고 있었소."
"……."
"지금 대교두의 앞에는 형틀과 보도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소. 그 어떤 것을 택하든 그것은 대교두의 자유이오. 다만 보도를 택하시게 된다면 대교두의 죄는 모두 사면되오. 총명한 따님과 다시 행복한 삶을 이어가실 수도 있게 될 것이오."
위지중걸의 얼굴에 한줄기 씁쓸한 고소(苦笑)가 스쳐 지났다.
"내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순간 도남강의 눈에 차가운 한광이 피어올랐다.
그의 얄팍한 입술이 완강한 어조로 음성을 토해냈다.
"둘째의 목을 이리로 갖다 주시오."
"크큭……."
위지중걸은 툴툴 낙엽처럼 황량한 웃음을 흘려냈다.
순간, 자단 위에 놓여져 있던 금도(金刀)가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그의 손 안으로 스르르 빨려드는 것이 아닌가?
챙!
맑은 금속성과 함께 투명한 도신(刀身)이 자청(紫靑)의 광채를 흩뿌려냈다.
도신의 감촉.
좋았다.
위지중걸은 문득 한줄기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혈도를 치달려 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홀린 듯 도신을 바라보던 그의 입이 이윽고 침중한 어조를 토해냈다.
"하겠네."
도남강의 얼굴에 씩 웃음이 번졌다.
그는 위지중걸을 향해 깊게 포권의 예를 취해 보였다.
"십만 봉황문인을 대신하여 먼저 감사드리오."
"그러나……."
그가 예의를 올려오건 말건 위지중걸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는 내 삶을 위해서도…… 나의 딸을 위해서도 아니네. 다만 주군(主君)의 명예를 지켜드리려는 마지막 충성으로 알게!"
* * *
휘이잉―
휘잉―
산봉(山峯)을 뒤흔드는 바람은 놀랍도록 거세었다.
중양절(重陽節)의 달이 그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산정의 한 그루 고송 아래 비단 차일(遮日) 하나가 쳐져 있고, 그 아래 한 명의 귀공자가 홀로 정좌해 있었다.
그가 정좌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장기판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장기의 수를 연구하고 있었다.
몰아지경이라고 할까?
장기의 수를 연구하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그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듯한 태도.
일견하기에도 귀티가 물씬 풍기는 그 귀공자로부터 십여 장쯤 떨어진 바위 위엔 다시 한 사람의 무사가 우뚝 서 있었다.
냉막했다.
만년빙굴에서 살다 튀어나온 듯한 냉염한 얼굴을 지닌 무사는 산 아래를 꼿꼿이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런 그의 품에는 이제 돌이나 갓 지났을까 싶은 아기 하나가 안겨 있었다.
노란 솜옷에 감싸여 곤히 잠든 아기.
혈관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아기의 피부 위로 달빛이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신비스럽도록 아름답고 귀여운 아기였다.
냉면무사는 행여나 아기가 깰세라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품안의 아기를 부드러운 눈길로 슬쩍 내려다본 후 다시 산정의 귀공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 속으로 문득 한줄기 초조한 빛이 언뜻 스쳐 지났다.
'한 달 전부터 우리 일행은 누군가에 의해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다. 화살…… 무려 이백여 장을 나는 화살…… 주군을 모시던 무장 십오 명이 그 화살에 꿰뚫렸고…… 바로 오늘 낮엔 주모(主母)마저 그 공포의 화살을 맞고 돌아가셨다.'
휘이잉―
삭풍(朔風)이 스쳐가자 볼이 얼얼했다.
냉면무사는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주군…… 다 죽고 이제는 당신과 저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지만 사실 당신과 저는 지금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토록 멀리 화살을 쏠 수 있고…… 이토록 완벽하게 우리를 조여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벌써 우리의 옆에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데 지금…… 그토록 사랑하시던 주모를 잃고도 다만 장기의 수를 풀고 계신단 말입니까…….'
그때 돌연, 귀청을 찢는 파공음이 심산의 유적(幽寂)을 가른다 싶더니 느닷없이 한 자루의 강전(剛箭)이 귀풍스런 귀공자가 보고 있는 장기판 앞에 꽂혔다.
슈웅!
퍽!
화살의 길이는 아무리 못 잡아도 다섯 자.
전미(箭尾)에 달린 공작의 깃털이 달빛 아래 차라리 요사스럽다.
귀공자는 막 한마(漢馬)를 들고 옮기던 참이었다.
화살이 꽂히는 순간, 잠시 멈칫했던 그의 손은 이내 물처럼 고요하게 행마(行馬)를 끝냈다.
연후, 그의 시선이 흘낏 건너편 산봉을 향했다.
있다!
어두운 밤구름을 발 아래 두고 한 자루 거대한 탄궁을 움켜잡은 채 소나기 같은 달빛 속에 우뚝 선 백의거한(白衣巨漢)이…….
딛고 선 산(山)보다 더욱 커 보이는 거풍(巨風)을 지닌 사내였다.
"왔군……."
한소리 중얼거림과 더불어 귀공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냉혼(冷魂)! 용아(龍兒)를 이리 데리고 오라."
냉혼이라 불린 냉면무사는 황급히 달려가 품속의 아기를 건네주었다.
사내는 한줄기 연민이 깃든 눈으로 아기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품속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불쌍한 놈……."
아기의 가냘픈 심장고동이 그의 가슴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말없이 옷섶 한 자락을 길게 찢어내더니 좌수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빠르게 무어라고 써갈겼다.
<一爲武林替死 무림을 위해 죽노라!>
"아비는 이제까지 사랑해 오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무림에서 태어난 목숨이 무림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뭐 그리 아쉬우랴마는…… 네 가냘픈 어깨에 지워질 무거운 삶이 나의 가슴을 찢는구나."
아기는 백포자락을 앙증맞은 손에 꽉 쥐고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이 마냥 평온하다.
사내는 그런 아기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한 줄기 언뜻 비치다 만 것은 영웅의 눈물인가? 그는 이윽고 아기를 다시 냉혼에게 넘겨주고는 건너편 산의 백의거한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던졌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떠오른다 싶자 무릎 관절 하나 굽힘없이 앞으로 쭈욱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부풍어영(浮風御影)과 대능공허보(大凌空虛步)!
순간 건너편 산정에 우뚝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의거한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아무 탄력 없이 공중에 떠서, 그것도 백여 장을 무반동으로 날아온단 말인가?'
평생 모시고 있던 주군 진천우도 외에 처음으로 마주쳐 보는 대고수였다.
"나의 화살에 그대의 아내가 맞은 것도 뜻밖이었지만……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장기의 수로 달랠 수 있는 그 침착한 풍도는 더욱 뜻밖이다. 주군의 아들된 자로서 부친을 거역하여 나를 놀라게 하더니…… 또다시 그 무예로 나를 놀라게 하는가?"
휘이잉―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사내, 화천상(華天上)은 백의거한의 십 장 밖에서 유삼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얽힌 시선 사이로 달빛이 은조각처럼 반짝인다.
한쪽은 주군의 명예를 위해 녹슨 애도를 움켜잡은 일대의 고수요, 다른 한쪽은 무엇인가 깊은 사연을 끌어안고 반부(反父)의 대역(大逆)을 저지른 젊은 영웅.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고 무슨 행동이 더 있으랴!
일진의 한풍이 얽힌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무심히 날아든다 싶은 순간, 두 사람의 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부딪쳐 갔다.
"하앗!"
"타앗!"
* * *
인간 세상에는 싸움이란 것이 수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무림(武林)이란 특수상황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단 두 개의 논리(論理)가 지배하는 비정하고 잔혹한 무림.
그렇기에 지금도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달빛 아래서 시작된 이 고독하고 외로운 승부는, 그러나 지금까지 이 땅에 있어 왔던 그 어떤 싸움이나 대결보다도 더 험악하고 치열했다.
쿠쾅!
콰앙―
쌍방간에 펼쳐진 초식의 수는 이미 만여 초(招)!
하루인 양 흘러가 버린 칠주야(七晝夜)!
뿐인가?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경력으로 인하여 그들이 딛고 선 산정은 거의 반이나 균열이 가 있었고, 그 아득한 나락 사이로는 시뻘건 용암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피와 땀과 용암의 대혈투!
꽈꽝!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한차례의 접장(接掌) 이후, 두 사람의 몸은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그들의 몰골은 이미 거의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위지중걸(慰遲中傑)이 걸치고 있던 백의장포는 갈기갈기 찢어진 데다가, 헝클어진 머리는 퍼붓는 빗물 때문에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찢어진 장포 사이로는 꿈틀대는 듯한 혈선(血線), 혈흔(血痕)이 수도 없이 그어져 있었고, 그곳에선 잠시도 쉬지 않고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온전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얼굴에 박힌 두 눈뿐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말겠다는 처절한 집념이 서린 그의 두 눈은 신선한 열기(熱氣)와 별빛처럼 해맑은 광채를 줄기줄기 내뿜고 있었다.
위지중걸은 흙탕물과 피,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화천상의 몰골 또한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장포는 갈가리 찢겨져 걸레 조각처럼 이리저리 나부꼈고, 온몸은 그대로 핏빛 일색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작 역시 몹시 힘들어 보였다.
또한 그의 두 눈은 처절한 승부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피가 터져나오도록 입술을 짓깨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공력이오."
위지중걸의 창백한 얼굴에도 흐릿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도……."
기이한 일이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더할 수 없이 친밀하고 따뜻했다.
필사의 일장을 맞대고 난 후 서로에게 느끼게 된 짙은 호감.
정과 사, 또는 모든 은원과 미움을 초월하여 진정한 적수로서 서로를 아끼게 된 것일까?
"왜……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슈파팟!
파악!
제일만구백오십초째, 한 줄기 현란한 백색기류와 더불어 화천상의 입에선 승부에 목숨을 건 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꽈르릉―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장!
위지중걸은 한 줄기 괴이한 역도를 쳐내어 화천상의 장력을 엉뚱한 곳으로 흐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어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빙글 맴도는가 싶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화천상의 옆으로 다가와선 백팔십금강수(百八十金剛手)를 한꺼번에 쳐냈다.
쐐액―쌕!
파파팟!
순간 백팔십 개의 담청빛 장영이 화천상의 요혈(要穴)을 노리고 사나운 속도로 휘몰아쳐 들었다.
화천상은 그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 몸을 둥실 허공으로 한 자 정도 떠올리며 보결(步訣)을 짚어갔다.
"부친의 일을 알고 계시단 말씀이오?"
유령이 흐느적거리듯, 바람이 허공에 일렁이듯, 무게없는 한 점 먼지처럼 소나기 같은 장영 속을 팔랑팔랑 누비는 신형.
"나리께선 패도지학(覇道之學)을 연마하고 계시다. 인세에 없는 가공할 패학이자 금지된 금단(禁斷)의 마공(魔功)…… 만약 그 수위가 구성(九成)에 이르면 마인(魔人)이 되고 마는 절대마공(絶代魔功)이다."
"당신은 그것을 아는구려."
"나리께선 당신의 굳건한 의지력으로 그 무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계신다. 다만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나리께서 왜 그런 무예를 배우겠다고 결심하셨는가 하는 것……."
말과 함께 위지중걸의 손은 박룡십절해(縛龍十絶解)의 금나수법(擒拿手法)으로 바뀌었다.
화천상은 허공에서 황망히 몸을 돌려 그의 천외래운식(天外來雲式)을 피한 후 한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 안의 이유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여 다 헤아릴 수가 없으나…… 당신은 만약 부친이 그 일에 실패하셨을 경우를 상상해 보았소?"
"……."
"부친은 대마인(大魔人)이 될 것이고 세상은 대혼란에 빠질 것이오. 거기다가 신비에 가려진 부친의 휘하세력, 아니 만룡의 숨겨진 세력 신역사계(神域四界)가 그 마성(魔性)에 합류한다면 무림은 그로써 끝장이오."
순간 위지중걸의 쇄비장공(碎碑掌功)이 화천상의 가슴 앞 삼대사혈(三大死穴)을 노렸다.
쐐액!
화천상은 황급히 그 장력을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두고 피해냈다.
그런데도 장력이 스쳐 지나간 부분으로부터 은은한 통증이 전달되어 왔다.
위지중걸은 그 장력만큼이나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그러나 나의 주군이시다. 신하된 자는 제왕지도(帝王之道)를 논할 수 없다. 주군의 명은 곧 법(法)이 아닌가?"
꽈꽝!
또 한 차례의 접장으로 하여 일어난 해일 같은 먼지와 함께 두 사람은 주춤 물러났다.
시선과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위지중걸, 그는 강직한 영웅이었다.
화천상은 탄식을 터뜨렸다.
"나는 부친이 그 무공을 익히기 시작할 때부터 그 대비책을 연구해 왔소. 그리고 드디어 만룡무학, 즉 내 가문의 천적을 알아낼 수 있었소."
위지중걸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흥미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화천상은 말없이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냉면무사 냉혼에게 안겨져 있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냉혼은 화천상의 손끝이 이르자 자고 있는 아이의 앞 옷섶을 묵묵히 벌려 보였다.
순간 태산이 무너져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이던 위지중걸의 몸이 부르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보라! 달빛 아래 드러난 아기의 투명한 옥부(玉膚)와 그 가슴 한복판에 은은히 드러난 핏빛 용(龍), 혈룡(血龍)의 그림자를!
"혈룡지문신(血龍支紋身)…… 치우적후인(蚩尤的後人)……."
그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치우천인(蚩尤天人)?"
치우천인!
혈룡의 문신이 있는 곳에 치우의 후인이 나타난다는 십자전설(十字傳說)의 치우천인.
"전설의 치우무학(蚩尤武學)…… 그렇소. 저 아이는 내 아들이기 전에 천 년 전의 만룡대사조(萬龍大師祖)가 말씀하셨던 치우천인이오이다. 또한 저 아이가 바로 부친의 마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요, 천적(天敵)인 것이오."
위지중걸은 침묵을 지켰다.
강철같이 굳강한 그의 가슴도 지금만큼은 마구 흐트러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사람을 시험하는가, 아니면 운명이 인간을 희롱하는가!
만룡의 가문에서 어찌 천적인 치우의 후예가 탄생했단 말인가?
화천상은 명월교교한 창공을 한차례 우러러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후후…… 내 아내는 늘 우리가 촌부(村夫)였으면 했소. 무림의 일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기를 원했던 것이오. 그녀는 늘 우리의 행복이 왜 무림의 대세로 인해 깨져야 하는가를 섭섭해 했소. 하나 나는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라 여겼소."
"……."
"나는 아내가 당신의 화살에 죽은 뒤 오랫동안 장기의 수를 연구했지요. 그제서야 나는 아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소. 인간의 행복이 결코 명예와 권력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장기를 두며 그때서야 나는 왜 그녀에게 그 동안 다정한 말 한마디 못해 주었는가를 후회하였소."
위지중걸은 말없이 건너편 산봉 위, 냉혼에게 안겨져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쇠처럼 완고한 그의 얼굴로 바로 발 아래 균열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화천상은 돌연, 수중의 검을 천천히 들어 한쪽의 석벽을 향해 맹렬히 내던졌다.
깡!
검은 섬뜩한 불똥을 튕기며 자루까지 석벽 속으로 박혀들었다.
"대교두, 저 검자루 안에는 이 모든 일의 전후 원인이 기록되어 있소. 당신이 오고 있음을 알고…… 오직 당신만이 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어 쓴 글이오."
위지중걸은 무심히 화천상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한소리 놀람에 찬 외침을 터뜨려냈다.
"그대……!"
화천상, 그의 몸은 이미 용암 속으로 반이나 가라앉고 있었다.
치지직―
극열(極熱)에 살과 의복이 타고 매캐한 몽연이 피어오르는 데도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쨌든 부친을 거역한 천역(天逆)의 죄인…… 살아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대교두, 당신은 내 목을 가져감으로써 임무를 완성한 것이 되오. 대신 만룡의 손자이며, 나의 아들인 운룡(雲龍)을 당신에게 맡기오."
그것뿐이었다.
말이 끝났을 땐 이미 화천상의 몸 또한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되었다 터지는 극열의 용암수만이 말없이 태고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을 뿐!
* * *
천하는 넓소.
세상 사람들은 만룡가(萬龍家)의 무학만이 홀로 완전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이 땅에는 그에 버금가는 무예가 십삼종(十三種)이나 있다오.
중원에 삼종(三種), 새외(塞外)에 십종(十種), 이것이 바로 만룡대사조께서 말씀하셨던 고대십삼대무학(古代十三大武學)이오.
오랜 옛날, 아득한 그날.
이 땅에는 무예의 대혼란기가 있었소.
천외십사종(天外十四宗)!
당시의 천하를 지배하던 열네 개의 무예계파(武藝系派)들.
화북(華北)의 만룡가(萬龍家).
한북(漢北)의 용권풍(龍卷風).
화남(華南)의 광무천(廣武天).
중주(中州)의 신선도(神仙道).
이렇게 중원(中原)에는 사종의 계파가 있었고, 새외(塞外)에는 도합 십종(十宗)이 있었소.
서장(西藏)의 밀종(密宗).
새북(塞北)의 관산장(關山場).
열하(熱河)의 철혈문(鐵血門).
천축(天竺)의 유가법종(瑜伽法宗).
남해(南海)의 십검지(十劍地).
요동(遼東)의 음자촌(陰者村).
남만(南蠻)의 만독성(萬毒城).
동영(東瀛)의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
대막(大漠)의 광풍사(狂風砂).
서촉(西蜀)의 파산파(巴山派).
그들 중원사종과 새외십종을 더하여 천외십사종(天外十四宗)이라 불려진 이 십사국(十四國) 십사계파(十四系派)의 재화절대신공들이 각기 한 시대의 최고무예라 자부하여 천하를 혼란케 했던 것이오.
그 중 화북(華北)의 무예 계파가 바로 본 만룡가문의 선조격인 것이며, 비록 당시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진이학(奇珍異學)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들 천외십사종의 무예와는 애초에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소.
극도의 혼란기요, 한편으로는 무예의 대번성 시대이기도 했던 그때, 끊임없이 싸움과 도발이 그치지 않게 되자 결국 십사가(十四家)의 십사종주(十四宗主)들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소.
그들은 무려 칠십주야를 거듭한 회동 끝에 한 가지의 대원칙을 제정하게 되었소.
천 년 후, 정식으로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를 개최한다는 것.
하여, 검회의 최종승자를 영원한 종주(宗主)로 받들며 그 전까지는 모든 싸움을 종결짓도록 한다는 것.
십사계파가 즉시 천 년 후를 대비하여 천외로 묻혀가게 될 즈음, 본 가(本家)의 제사대조사(第四代祖師)께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을 만방에 시험해 보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천하제패!
즉, 그 어른이 바로 만룡무군왕(萬龍武君王)이었던 것이오.
십사계파의 무예는 서로가 아니면 견제할 수 없으리만큼 강대하오.
하여, 만룡가 또한 즉시 새외로 묻혀 그들과의 천 년 후 약속에 대비하여 천하검회에서 펼쳐보일 한 가지 무예를 연구하기 시작했소.
공령지예(空靈之藝)!
공령!
그것은 실존무예의 최고 단계이오.
무림인들의 최대염원이며, 그들이 꿈으로 여기는 삼화취정(三花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화경(化境)보다도 세 단계는 높은 단계로써, 화경으로부터 공령(空靈)까지 이르는 단계는 다음과 같소이다.
그 첫번째는 조화경(造化境).
이는 전신의 공력이 끊이지 않고 재생되는 경지로써 일생을 통틀어 싸운다 해도 지치지 않는 신비의 경지이오.
그 둘째는 지념경(止念境).
이것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억제하여 얼음보다 정결하고 자연처럼 무심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써 일종의 득도(得道)의 무예라 할 수 있소.
그 셋째는 공심경(空心境).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鍾鍾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鍾鍾法滅)이라 하였으니 마음이 일고 죽음에 따라 신정(神精)이 자연 동화되어 움직이는, 이른 바 천인지경(天人之境)의 단계인 것이오.
이러한 모든 것을 거쳐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령(空靈)의 공부이니 그 과정의 험난함이야 어찌 다 필설로 형용하겠소?
천외십사종의 무예는 적어도 첫번째 단계인 조화경(造化境)의 경지까지 이르러 있는 것으로 짐작되오.
부친이 익히고 계시는 성심마공(聖心魔功) 또한 두 번째 단계 지념경(止念境)으로 올라서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
부친이 그러한 마공을 익히고 계신 것도 사실 십사연방천하검회(十四聯邦天下劍會)를 대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인 것이오.
이제, 십사연방천하검회는 불과 십팔 년 후로 다가왔소.
만룡가뿐 아니라 중원의 무예가라면 그 누구라도 이방(異邦)의 고수들에게 종주의 자리를 넘기려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중, 치우천인은 천외십사종의 무예 모두의 극성(極性)으로써 어떤 무예든 새로운 아류를 만들어 치우무학(蚩尤武學)이라는 희대의 절공으로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하였으니…….
위지형!
이와 같은 하늘의 조화를 도대체 뉘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겠소?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부친의 고육지계를 나는 이해하오.
하나 네 명의 아들 중에 하나쯤은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할 수도 있는 법이 아니리까.
이제 화천상은 가거니와 이 하늘 아래 오직 위지형만이 천하의 대세를 똑바로 꿰뚫어보고, 또한 치우천인을 이 혼란시대의 선한 힘으로 키워낼 수 있으리라 믿소.
필부의 일방적인 결정을 마음껏 비웃어 주시오.
* * *
신(神)으로 받들어 온 만룡가의 무학에 버금가는 무예가 이 하늘 아래 십삼종이나 더 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런 그들이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오는 대검회(大劍會)의 맹약(盟約)을 했다는 것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공령(空靈)!
무예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단계.
신비로운 경지가 주는 충격은 차라리 신선하기까지 했다.
하나 전설의 치우천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차라리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위지중걸, 태평대에 태어나 천하제이인자로까지 불렸던 이 칠척거구의 사내는 자신이 지금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한가운데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신이 자신에게 아주 중대한 역할을 맡겼음을 느낀 것이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딛는다면 그로써 무림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때 문득, 딸 소혜(小慧)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미 없이 키워왔기에 보석처럼 아껴온 딸이었다.
그러나 위지중걸은 묵묵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 저만큼 위로 시월의 스물아홉 번째 여명이 부챗살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
"용서해라……."
―딸아, 나를 용서해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