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감상교실 1
1. 박제(剝製)
어제의 따스한 숨소리 멀어지고
아침 이슬 내린 솔밭을 벗어나
조용히 떨리는 가슴으로
창가에 앉아 있다
어지럽게 예감의 손짓으로
풀숲을 펄럭이다가
그리움도
사랑의 기다림도 없이
속살 버리면서
노래마저 묻혀지고
못 이룬 작은 소망은
허우룩한 껍질로 남아
텅빈 햇살을 줍고 있다
퇴색한 산울림
눈동자에 메아리지 데
오늘은 쓸쓸한 창가에서
찬바람의 화음만 듣는다.
생명이 멈춘 사물들의 표정도 진지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종로를 어슬렁거리다가 옷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진열장에 서 있는 몇 개의 마네킹에게서 넋을 잃었다. 저마다 멋을 한껏 뽐내는 옷으로 치장하고 다양한 자세로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네킹은 벌거벗고 서 있다. 아마도 가슴이 불룩한 걸로 봐서 여자인 듯 싶다. 최신 유행의 새옷으로 갈아입는 중일까. 어쩐지 속살을 훔쳐보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와 그 마네킹을 번갈아 훔쳐보곤 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앗다. 왜냐하면, 나체 마네킹 옆자리에 꿩인지 독수리인지 지금 기억이 안나지만, 눈알을 부라리며 박제로 앉아 있었기에 말이다.
박제된 동물과 마네킹(박제된 인간으로 환치)에서 문득 얻은 상상력은 ‘사랑의 기다림도 없’다는 허무가 시각적 이미지와 연상작용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어제의 따스한 숨소리’와 체온이 식어버린 채 또 다시 ‘창가에서 / 찬바람의 화음만 듣’고 있는 시적정황이 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박제되기 이전의 생명체가 한생(그것은 행 . 불행을 차치하고라도)이 진열장 창문에서 측은하게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 공중을 비상하거나 아니면 잔솔밭을 기면서 저들만의 사랑을 위해 아름다운 밀어를 나누던 모습들이 어쩌면 죽어서도 저렇게 선연하게 재생되고 있었으나 지금 현재의 내 삶의 한 다면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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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묘지송(墓地頌)
아무도 열 수 없는 빗장을 잠근 채
투명한 명상으로 살아가는
겨울바다
창 밖에서 서성이던 나뭇잎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끝남을 위한 축제
어지러운 발걸음 멈추고
잔잔히 숨죽인 바람
수천 길 벼랑 아래로
아래로만 곤두박질하다가
이승 언 빨래줄에 걸려 있는
낡은 한 올의 기억
떠나고픈 길 막힌 그믐밤
여기는 참으로 화목한 세상이여.
우리들 생명은 우한하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대체로 백년을 넘지 못한다. 생명의 존귀함은 일생의 번뇌와 희로애락을 마감한 뒤 섬광처럼 번뜩일 수도 있으나 몸뚱이 하나 가지런히 누워 잔디 이불로 영원한 명상에 잠긴 안온이 한생을 살다간 표지(標識)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속세의 미련을 모두 훌훌 집어던진 채 ‘아무도 열 수 없는 빗장을 잠’그고 긴 명상을 하고 있다.
언젠가 선친 산소에 성묘를 하러 고향에 내려간 김에 조상들의 산소도 둘러보면서 많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하기야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선대들만 해도 이젠 이승과 인연을 버린 묘소가 많았다.
오랜 투병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의 운명(殞命)을 지켜본 뒤 꼭 보름만에 할아버지가 천수를 다하여 겹상주가 되기도 했다. 그 뒤로 중부님, 나의 어머니, 중모님, 큰집 큰종수님, 종형님 두 분, 친형님, 큰집 장손, 큰 종형님이 차례로 이 세상을 떠나서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모두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끝남을 위한 축제’를 위해서 살아있다는 을씨년스런 생각이 나를 어습한다. 그러나 내가 적시한 사물의 ‘묘지’를 위한 송가(頌歌)는 ‘참으로 화목한 세상’에의 가녀린 동경이다. 단지 살아가는 일들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관이 어떤 연유로든 허망으로 발전될 때 누구나 조용히 흥얼거리는 작은 노래가 아닐까.(김송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