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말로써 말 많으니
국어사전을 몇 번 읽었는가
80년대 초반에 『심상』지에 등단을 하자마자 심상출신시인들이 모여서 <심상시인회>를 결성하고 대전 동학사에서 창립총회 겸 야유회를 가졌다. 여기에서 심상 제1기 등단자인 김성춘 시인이 초대회장에 선출되고 앞으로 『심상』지의 발전과 회원들의 친목, 그리고 회의 활동방향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그 중에서 <심상시인회 사화집> 발간사업을 시작하여 한국문단과 문화예술계에 알려서 우리들의 위상을 높이자는데 합의하였다.
바로 이 사업이 실행되어 첫 사화집 『캄캄한 항구에 닻을 내리며』를 회원 40명이 참여하여 빛을 보게 되었으며 이를 신문 방송 출판 등 중요 언론매체에 보도자로를 보내서 전국에 알리기로 했다.
이러한 일들은 신인들이 담당하기로 해서 나는 출판사와 잡지사를 맡아서 열심히 주소를 들고 찾아서 PR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다녔다. 어느 날 현대시학사를 찾았다. 서대문 로타리 우체국 건물쪽에 삐거덕거리는 2층의 문을 열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방문한 사유를 알려드렸다.
어떤 중년의 노장(老壯)이 앉아서 열심히 교정을 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어서 한참을 서 있다가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려 하는데 한 말씀 던졌다.
“귀하도 시를 쓰는가?”
“예,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몇 번 읽었는가?”
“예?”
“사전을 적어도 처음 ㄱ에서부터 ㅎ까지 세 번을 읽고 시를 서야 할 것이네”
“........”
대화는 끝났다. 찾아간 목적도 말하지 못한 채 사화집만 책상위에 얹어놓고 투덜투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소설이나 만화책도 아닌 국어사전을 끝까지 세 번씩이나 읽으라고? 허허 헛웃음이 나왔었다.
아니나 다를까, 등단한지 1년도 못되어 우선 언어에 대한 고갈현상이 나타났다. 썼던 말을 다시 쓰게 되어 시의 전개나 흐름 그리고 구성에서 써먹었던 말은 반복하게 되어 작품으로써의 내용이 식상하게 됨을 발견하고 나서 아, 그 어른이 한 말이 맞구나. 지금부터라도 국어사전을 읽어야지. 당장 교보문고에 달려가서 포켓용 국어사전 3권을 사고 돌아와서 마루에, 안방에, 심지어 화장실에 각각 한 권씩 던져놓고 수시로 내용을 읽었다.
실제로 사전을 항상 많이 읽고 이를 참고로 해서 작품을 완성하면 시어의 선택뿐만 아니라 그 단어에서 문득 과거의 체험이 재생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미지의 창출이나 주제의 정립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제서야 아, 그 때 그 선생님의 말씀이 어떤 이유에선지가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현대시학』지를 발행하는 원로시인님이셨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시는 다른 문학 장르인 수필이나 소설과는 간결한 언어가 필요하다. 또한 언어의 절약에서 얻어지는 함축미가 돋보이며 어떤 금언(金言)이나 잠언(箴言)처럼 그 의미가 명징(明澄)하게 전달되는 특징이 있었다. 사실 수필은 2백자 원고지로 15매 내외, 소설 단편의 경우 80매 내외의 긴 문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많은 언어를 사용해서 주제를 적시(摘示)하게 되지만 시는 5~6매 정도, 21행 내외의 문장으로 한 편을 완성하면서 기승전결(起承轉結) 구도에 맞게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시는 언어의 마법같은 수련이 더욱 필요하기에 나는 시창작 강의나 시담(詩談)에서 늘 들려주곤 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니까 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언어를 직조(織造)하는 연금술사 혹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부른다. 이는 시인은 우리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는 기능을 요구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도 언어의 조탁(彫琢)이 이루어져야 괜찮은 시 한 편을 건질 수 있으니 말이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
이 작품들을 보라. 일반 통념이나 과학적 사고에서 보면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사실성이 없고 객관적으로도 증명할 수도 없다. 어떤 개념이나 의미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긴 밤의 시간을 비축했다가 임이 오는 날 모두 소비하겠다’라거나 ‘어떤 나그네가 저녁놀이 덮힌 강나루를 건너 술익는 마을 길을 간다.’라는 서술로 충분하다. 그러나 시와 언어 사이에는 신비로운 시적 진실과 우주적 진실의 메시지를 내포(內包)하는 마력(魔力)이 있는 것 같다. 국어사전을 수없이 읽어서 아예 외어버리면 어떨까 싶다.(1997. KBS방송문화센터 시강의 자료)
할 말은 많사오나군 생활 때 이야기다. “어이, 김 일병!”“네. 일병 김송배”“이것 좀 봐줘”선임하사가 내미는 종이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母主任 前上書此時 嚴冬之節에 母主任 氣體候一向萬康하옵시고家內 大小諸節이 無故하옵신지 不孝子 遠處에서 問安드립니다.然而나 不孝子는 母主任의 遠念之德分으로今日도 身體 健康하게國防 義務를 忠實히 遂行中에 有하오니너무 過한 極情 止止하옵소서.日前에 母主任 病患이 差度가 無하다는 片紙를 接하고卽時 歸鄕 病垂髮 不行爲의 近心으로 不眠이오니容恕를 懇切하게 求합니다.---(중략)----할 말은 萬事오나 이만 葱葱 止筆하옵니다.餘不備禮上. ‘야, 참 유식한 체 하고 있네.’ 속마음은 그랬지만, ‘언제부터 선임하사님의 한문 실력이?’ 놀란 척 하면서 무조건 명문장이라고 추켜세웠다. 그 당시 부대 안에서는 내가 책께나 읽고 글께나 쓴다고 소문이 나 있었던 터라, 아마도 나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면서 자기 실력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대체로 살펴본 편지의 내용은 이 겨울에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가내 대소제절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어머니의 병환이 차도가 없다는데 즉시 돌아가서 병수발을 하지 못해 근심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우선 윗글에서 밑줄친 부분을 보면 한자를 억지로 갖다 맞추었다는 점이다. ‘모주임(母主任)’은 ‘님’을 ‘任’으로 썼다고 하더라도 ‘충실(忠實)’은 군대에서 충성만 강조하였으니 또 그렇다고 하자. ‘걱정을 하지말라’는 표현을 참 유식한 체 ‘걱정 지지(極情 止止)’라 했으니 ‘걱정’이 ‘극정’이 되었다. 그래도 ‘止止’는 ‘끝낼 지’자니까 첩어(疊語)로 써서 빨리 끝낸다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말은 될 법도 하다. 또한 ‘불행위(不行爲)의 근심(近心)으로’는 병수발을 하지 못하는 근심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불행위’는 이런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니며, 순 우리말 ‘근심’이 갑자기 ‘近心’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이곳이 어디이며 어느 안전(顔前)인가. 이 글자는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니고 또 문장은 어떠하다고 충고(?)를 할 개재(介在)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맞다고 할 수도 없어서 나는 군대식으로 머리를 굴렸다.“선임하사님, 이 난해(難解)한 한문 서간(書簡)을 모주님께서 통독(通讀)하실 수 있는지요?”“야, 임마. 그런 걱정은 안 해두 돼” 확 뺏어간 편지는 부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정작 배꼽을 쥐고 웃었던 것은 ‘할 말은 萬事오나’였다. 그냥 ‘많사오나’하면 될 것을 진짜 유식한 체 ‘萬事오나’라고 해서 할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은가 보지 뭐. 무식의 극치를 보여준 그 후로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한층 부드러워졌다가도 경계심을 보이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 선임하사 씨는 월남전에 참전하고 나는 만기 제대를 했다. 나는 잡문을 쓰면서 가끔 그 ‘할 말은 萬事오나’가 떠오르고 선임하사 씨도 그립다. 그 어머니에게 직업군인으로서 얼마나 할 말이 많았으면 ‘일만 만’자에 ‘일 사’자를 썼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은 한글만 전용해야 한다느니, 한자 교육을 초등학교에서부터 실시해야 한다느니 양론이 비등하다. 나도 평생 글을 쓰는 동안 우리 국어를 사랑하면서 우리말을 살려서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萬事오나’ 식의 한자가 아니라, 뜻이 서로 혼동되는 낱말은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법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은 분명하다. 언젠가 순수한 우리말로 된 청첩장을 받았다. 어리둥절해서 사전을 펼쳐놓고 풀었다. 너무 유식한 한문투의 문장도 문제이지만, 순 우리말의 이해도 역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느냐는 앞으로 연구할 과제이기도 하다.'두 사람이 다솜으로 만나 미쁨으로써 옴살이 되려 합니다.
그동안 아껴주신 어르신과 아음, 벗들을 모시고
가시버시의 살부침을 맺고자 하오니 바쁘시더라도 꼭 오셔서
두 사람의 앞날에 비나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두 사람은 한살매 서로 괴오는 마음으로 의초롭고
살뜰하게 살아가겠습니다‘(2008. 11.)
내가 좋아하는 방언. 좋은 말
-천지 삐까리
내가 어릴 적에 배탈이 자주 났다. 어머니는 응급처치로 쑥을 뜯어다가 몽돌로 콩콩 찧어서 집을 내어 마시게 했다. 이 쑥은 길옆이나 논두렁, 밭두렁 등 아무데나 쌔비릿다. 이럿듯 서부 경남(합천, 거창, 함양, 산청)쪽 산촌에는 쑥 말고도 약초들이 엄청시리 널려 있다.
여기에서 ‘쌔비릿다’는 말은 ‘쌔고쌨다’는 말로서 아주 흔하다는 말이며 ‘엄청스럽다’는 것은 ‘엄청나다’는 것으로 생각보다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사투리이다. 억수로 많다는 표현도 있는 것을 보면 많다는 과시적인 허세도 내포된 듯하다.
내에게 배탈이 자주 일어나자 어머니는 다시 처방을 내리고 형에게 산에 가서 ‘삽초(표준어는 ‘삽주’)’뿌리를 캐오도록 시켰다. 오래전부터 민간요법으로 삽주뿌리를 삶아서 그 물을 마시면 위장병을 낳게 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러나 형은 하루 종일 산골짝을 헤매어도 한 뿌리를 캐지 못하고 꾸중만 들었다. ‘얘야. 절골(옛날 절터가 있었던 골짝) 산비알로 올라가다 보면 삽초가 천지 삐까리다. 내일 다시 가봐라.’
나는 당시의 쓰린 배를 지금 움켜쥐고 우리 말의 다양한 위력을 잠시 생각해 본다. 숫적으로 또는 양적으로 많음에 대한 표현을 ‘엄처시리 많다’나 ‘억수로 많다’는 일반적인 것보다는 ‘쌔비릿다’와 ‘천지 삐까리’라는 정겨운 토속 언어가 몸에 배어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왠일일까.
이처럼 많다는 표현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수두룩하다’나 ‘지천에 늘렸다’ 또는 ‘전신만신으로 늘려 있디’는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 이글은 [문학의 집 . 서울]에서 발행한 <그리움의 말을 찾아서>에 수록되었음.
-품앗이
우리 집 앞 서마지기 논배미에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엎드려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왠일일까. 마침 새참을 이고 나오시던 울 엄매가 ‘품앗이’라고 일러주었다. 품앗이? 다음 날엔 울 아부지 엄매가 이웃 당산댁 논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
아. 그렇구나. 모두가 바쁘고 힘들 때 서로 일을 거들어 주면서 도와주고 또 도움을 받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네 인정이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편이었다. 우리 아버지들은 이렇게 협동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얼마나 슬기로운 일인가. 며칠 후 그 들판은 갓 심은 모포기 잎들이 바람에 온통 파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품앗이는 ‘품’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품은 어떤 일을 하는 데 드는 힘이나 수고를 말한다. ‘품을 팔다’고 하면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의 대가로 받는 것이 ‘품삯’이다. 그래서 ‘날품’과 ‘날품팔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날품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부적 늘고 있어서일까.
요즘은 ‘발품’이라는 말도 있다. 발로 뛰어서 얻어낸 성과를 말하는 것 같다. 끈질기게 만나서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도 ‘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품앗이는 이러한 품삯과 관계없이 서로 지고 갚는다는 데서 정겨운 우리의 심성이 무르녹아 있다. 어려울 때 나누는 이웃과 동료와의 상부상조의 정신이다. 이것은 옛 조상들의 지혜로운 생존 방식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결혼식장에 가야겠다. 내 딸 결혼식 때 와서 축하해 주었으니 가지 않을 수 없다. 또 출판기념회에도 가봐야 한다. 어쩌면 이것도 품앗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대에 따라서 변해버린 품앗이의 형태는 엉뚱한 의미로 변질되고 있어서 왠지 요즘 이 말의 개념은 좀 씁쓸하다. 어릴 적 우리 집과 당산댁 논배미에서 서로 돕고 나누던 순정은 그 빛이 바랜지 오래이기 까닭이다.
*<문학의 집 . 서울> 발행 『우리 말 우리 글 사랑』 수록
잘못 읽기(誤讀) 쉬운 한자말
우리의 글자는 한글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후로 이조 5백년 동안은 언문(諺文)이라는 별칭으로 암글(內語)라고 해서 안방마님이나 규수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때도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큰집 백모님이 밤이면 온 동네 아낙네들을 모아놓고 『박씨부인젼』, 『츈향젼』 『옥단춘젼』 등을 읽어주면 호롱불 아래서 옷소매나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던 일이 기억난다.
물론 손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한글 필사본이었다. 문종이를 꿰매어 만든 유일본(有一本)인 이 책들은 얼마나 애지중지 읽었는지 반들반들 손때가 묻을 정도로 빛바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콧물 눈물 훌쭉이던 모습과 오늘 너무 밤이 이슥해지면 내일의 약속으로 계속하여 읽기를 끝내지만 마지막 날 맨 끝장에서는 언제나 “만나서 잘 먹고 잘 살더라”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소설의 묘미를 들러주곤 했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박수를 치고 누군가 준비해온 막걸리를 책거리로 내놓고 한바탕 독후감을 나누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백모님은 저 타지(他地)의 명문(名門) 은진 송씨(恩津宋氏) 집안의 양반댁의 규수로서 우리 가문 의성 김씨(義城金氏) 집안 백부(伯父)님께로 출가하면서 가마 안에 필사본 책들과 서간문 등을 가득 싣고 시집왔다는 얘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우리 한글을 사랑하는 백성들도 많았는데 왜 이씨조선 왕조들은 한자(漢字)를 숭상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문서는 물론,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도 한문으로 출제하고 채점을 했던 잔재(殘在)가 지금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4학년 국어에는 한자를 괄로()로 처리해서 그 의미를 배웠는데 어느 날을 갑자기 한글전용이라 해서 한자를 모두 없애고 겨우 중고등학교에서는 한자 교과서를 따로 만들어 배운적인 있었다.
우리 글이나 말은 모두 한자에 그 어원(語源)을 두고 있는 단어가 많다. 문제는 한자를 전혀 배우지 않은 세대는 자기의 이름도 한자로 쓸 줄 모르고 신문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무식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외래어가 넘쳐나서 길거리에 즐비한 간판이나 아파트의 이름까지도 외래어 천지이다. 문자들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한자로 쓴 성함들을 잘못 읽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특히 우리 문단에서 거목들인 시인 황금찬(黃錦燦)은 황면찬으로 비단 금(錦)자를 솜 면(綿)자로 잘 못읽은 것이다. 정한모(鄭漢模)를 정한막(漠)으로, 김남조(金南祚)를 김남작(作)으로, 유안진(柳岸津)을 유안률(律)로, 신달자 (愼達子)를 진(眞)달자로, 염산국(廉山國)을 강(康)산국으로 또는 미당(未堂) 서정주를 말(末)당으로 읽어서 좌중을 웃게 한 일도 있었다.
옛날에는 신문이나 책을 인쇄할 때에는 주조된 활자를 문선이 일일이 채자(採字)하고 식자공이 조판을 하고 꼼꼼한 교정을 거친 후에 인쇄기에 걸어서 돌리는 인쇄였다. 그러나 이 식자하는 과정에서 잘못했거나 교정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인쇄되어 나왔으나 오자(誤字)가 발견되어 정정(訂正)보도를 내거나 정오표(正誤表)를 붙여서 시중에 나오는 경우가 하다했다.
어떤 신문기사에는 점(.) 하나 잘못되어 그 내용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버린 예도 있어서 독자들이 아연실색(啞然失色)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나타나서 독자들에게 회자(膾炙) 되었던 일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大統領)이라는 어떤 기사에서 이승만 견(犬)통령, 이승만 태(太)통령이 된 것이다. 갑자기 큰 대(大)자가 개 견(犬)자로, 콩 태(太)자로 바뀌어 개대통령이 된건지 콩대통령이 된건지, 그래서 이 신문은 당국의 정간처분을 받았다는 고사(故事)도 있었다.
이처럼 점 하나 잘못 찍은 실수로 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경우는 많이 있다. 주인(主人)이 왕인(王人)이 되고 탄환(彈丸)이 탄구(彈九), 견공(犬公)이 대공(大公), 영화 왕중왕(王中王)이 옥중왕(玉中王), 방위(方位)가 만위(万位), 양심(良心)이 간심(艮心), 광견병(狂犬病)이 광대병(狂大病), 장녀(長女)가 창녀(娼女), 회장실(會長室)이 화장실로 등등 많은 오류(誤謬)를 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시 어려운 한자를 멀리하고 우리 한글을 소중히 여기면서 잘 살려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자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우리 말 단어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빨리 알아차리기 힘든 낱말은 반드시 괄호로 한자를 표시하여 독자들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령 시 중에서 “오지에 젖는 날”이라는 구절이 있다면 오지가 어떤 말인지 선득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지(奧旨)라고 한자를 병기(倂記)하여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깊숙한 땅”이라는 사전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잘못 읽는 한자말은 화기애애(和氣靄靄)를 화기알알로, 호시탐탐(虎視耽耽)을 호시침침으로, 혈혈단신(孑孑單身)을 홀홀단신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를 야밤도주로, 포복절도(抱腹絶倒)를 포복졸도로 읽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지금 나도 이런 경험이 많아서이지만 이 밖에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현대시 공부를 하기 전에 당시(唐詩)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한자가 표의문자(表意文字)라서 그 뜻을 새겨서 살펴야하는 데서 매력을 갖기도 했다. 이태백이나 백낙천 그리고 두보의 시를 읽으면서 어릴 때 읽었던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다시 읽게 되었고 나아가서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사서삼경(四書三經)까지도 들여다보게 되어서 시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 쓰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 한 축, 북어 한 쾌
가끔 한가한 날이면 집 근처 모래내 재래시장을 배회한다. 거기에는 살아가는 이들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생선 한 마리, 풋나물 한 뭇 너 팔겠다고 아우성인 상인들을 바라보노라면 여기가 삶의 전장터 같지만 그래도 생기가 넘치는 곳임을 실감하게 된다.
다분히 산문적(散文的)이다. 시내백화점에서 바겐세일 때 와글와글하는 것이나 이 재래시장에서 왁자찌끌한 아우성들이 산문적이라면, 반대로 산사에서 묵상하면서 깊은 사색에 젖어 있는 광경은 시적(詩的)이라고 해야겠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사람이 무슨 산문적인 현장에서 어슬렁거리느냐고 항의할 사람도 있으리라.
아니다. 정중동(靜中動)이다. 시는 삶의 현장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하여 수시로 현장에 부딪혀야만 한다. 그것이 삶을 통한 인간의 진실을 탐색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이 된다.
“자자. 칼치 한 마리, 간고등어 한 손, 굴비 한 두름. 싸요 싸."
“자. 여기. 쪽파 한 단, 배추 한 포기, 김 한 속. 싸요 싸”
나는 무심코 지나가다가 ‘한 마리’, ‘한 손’등 팔 물건들에 붙는 단위에 대해서 매료되고 말았다. 아. 각각의 물건마다 수를 세는 단위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구나. 우리는 이것을 문법적으로 명수사(名數詞)라고 한다.
대체로 물건을 셀 때에는 한 개, 두 개로 센다. 그러나 밤 한 톨이며 은행 한 알이다. 과일은 100개가 되면 한 접이라고 한다. 요즘은 상자에 포장하면 한 박스라 하고 몇 개가 담긴 것은 한 봉지로 통하지만 이를 칼로 잘라놓으면 사과 한 쪽, 배 한 쪽이 된다.
동물의 경우는 한 마리가 단위이다. 소 한 마리, 돼지 두 마리, 개 세 마리이다. 좀 특이한 것은 경주용 말은 한 필이라고 붙인다. 생선에서도 마리로 세다가 간고등어 두 마리가 되면 한 손으로 부른다. 굴비나 조기도 20마리가 되면 한 두름이라 하고 오징어 20마리는 한 축이며, 북어 20마리는 한 쾌이다. 이것이 셀 수 없이 많을 때는 소떼, 오징어떼라고 그 무리를 지칭하게 된다.
나무 한 그루에서 잘라낸 나뭇가지를 묶으면 나무 한 단이 되고 몇 단이 모이면 한 짐이다. 두부도 한 판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면 한 모가 되듯이 벼 한 섬을 나누면 몇 가마가 되고 또 몇 말로 나누면 몇 되, 몇 홉, 몇 작으로 변한다. 그리고 버선 열 켤레, 저고리 열 벌이 되거나 돗자리 열 닢이 되면 한 죽이지만, 연필 12자루는 한 다스라고 한다.
이렇게 명수사에 대한 분류는 어떠한 기준을 적용해서 명명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는 없으나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을 돌다가 시장끼가 느껴져서 난전에 앉아서 순대 한 접시, 술국 한 사발 안주로 소주 한 잔을 마셨다. 깎두기 한 보시기와 고추장 한 종지 곁들인 술판 한 상은 술을 한 병이나 먹게 하였다.
나는 반나절을 시장에서 헤매다가 오이 한 거리, 미나리 한 갓(열 모슴)을 사들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문 채 큰길로 나왔다. 마침 꽃집이 있어서 장미 한 다발과 춘란 한 분을 사들고 한 마장쯤 떨어져 있는 집으로 향했다. 나의 명수사에 대한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 비행기, 자동차, 자전거는 한 대인데 배는 한 척인가.
- 단독주택은 한 채인데 아파트는 한 동인가.
- 쌀 한 자루와 연필 한 자루는 어떻게 다른가.
- 물 한 동이와 석유 한 초롱의 양은?
- 명주실 한 테와 새끼 한 발의 길이는?
- 총을 한 방 쏘았다와 침을 한 방 떴다의 차이.
- 시 한 수 읊었다와 감성돔 몇 수나 건졌나.
- 병아리 물 한 모금과 이슬 한 방울의 차이.
- 책 500권과 500부의 차이. 한 질은?
이밖에도 많이 있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흙 한 더버기’도 있고 ‘글 한 대문’도 있으며 ‘바늘 한 쌈’, ‘한 아름되는 나무’, ‘양념 한 자밤’, ‘시루떡 한 켜 한 켜’, ‘새벽닭이 세 홰째 운다’는 등의 명수사는 아름답기도 하다.
요즘은 m, ㎡,㎥,㎏,ℓ등으로 길이와 넓이, 부피,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度量衡)가 바뀌어서 약간의 혼동이 있으나 예전에는 한 자(0.3m), 1간(6자), 1정(360자), 1리(12,960자)를 길이의 단위로 계산했고 한 평(0.3㎡), 1단보(300평), 1정보(3,000평)로 넓이를, 한 홉(5.54ℓ), 한 되(10홉), 한 말(10되)로 부피를, 한 돈(3.75g), 한 근(160돈), 한 관(1,000돈)을 무게의 단위로 했다.
그러나 cm, m, km, 인치, 피트, 야드, 마일과 ㎡,아르, 에이커와 ㎥, ℓ, 입방야드, 갤런과 g,kg, 톤, 온스, 파운드 등으로 계량 단위로 환산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약간 어려움이 따른다. 아파트 몇 평하면 될 것을 굳이 몇 평방미터라고 해야 한다.
아무래도 재래시장에서 김 한 톳과 생선 한 뭇을 더 사다가 된장찌개 한 술로 밥 한 끼 때우고 책 한 쪽 읽으면서 보약 한 첩 먹은 셈치고 또 한 해를 보내야겠다.(2009.)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여기 무명(無名) 씨가 읊어 남긴 시조처럼 예나 지금이나 말 많이 해서 구설에 오르지 않는 일이 없는가 보다. 말을 잘 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있는 것과 같이 어느 곳에서 남의 흉을 보거나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도 결국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말은 가려서 해야 할 것이다. 꼭 필요한 말은 전달하되 해서는 안 될 말은 삼가야 한다.
이러한 말로서 벌어지는 구설이나 시비는 진실을 왜곡하거나 아니면 모함의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실을 자기의 일방적인 추론으로 말을 전달하면서 빚어지는 오해가 있는가 하면, 어떤 특정인을 모함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과 우위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거짓말쟁이의 속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無足言飛千里)’거나 ‘소더러 한 말은 안 나도 아내더러 한 말은 난다(言牛則滅語妻則洩)’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 한 말이라도 세어 나가게 되어 있다.
지난 날 내가 문협에 재직할 때, 책임자가 술을 마시지 못해서 지방에서 찾아온 회원들에게 식사나 술 접대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문단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그와 문단정치판에서 대결구도를 이루었는데 그가 나를 대낮에도 술마시고 다니는 주정뱅이 혹은 알콜 중독자라고 모함하면서 회원들에게 유포하여 수모를 겪은 적이 있었다. 사실은 그가 할 일을 도와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것을 곧이곧대로 인정하는 회원은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언젠가는 가깝다고 생각한 몇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인생과 문학 등 많은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나눈 일이 있었다. 끝날 쯤에서 문협 이야기가 나오고 발전방향이나 개선점 등이 자연스럽게 거론 되었다. 내가 사무책임자라서 그런지 그들은 궁금한 게 많았으리라.
나는 그들에게 바깥의 여론을 먼저 물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여론을 들려주고 또 개선책까지 내놓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점은 정말 개선되어야 발전이 있다고 긍정하고 동의했을 뿐인데, 웬걸, 다음 날 아침 그 책임자의 언성은 나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나는 그렇지 않다. 왜곡되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의 인식에는 나를 불신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 어제밤 만난 그들에게 전화로 항의하고 진실을 규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말은 조심해야겠구나. 한편으로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으나 다시는 그들의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처럼 말의 위험성에는 항상 거짓말이 동행하고 있다. 주작부언(做作浮言)이라 해서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이 있는가 하면, 말을 부풀려서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지어낸 말이든 부풀린 말이든 간에 전해 듣는 사람은 기분이 상하게 되며 처음 말한 사람 그 당사자는 깊은 오해에 휘말리게 된다.
조선시대 중기 문신인 김상용의 시조에서도 말조심을 강조하고 있다. “말을 삼가하여 노(怒)하온 제 더 참아라/ 한번을 실언하면 일생에 뉘우쁘뇨/ 이 중에 조심할 것이 말씀인가 하노라” 지금의 상황이 못마땅해서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나 이를 아첨하는 언어로 전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유념해야 하리라. 그러나 침묵이 금(金)이 아닌 경우도 있다. 정당한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당당하게 말을 해야 한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거나 주장하지 못하면 순간에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려는 것이 있거든 그 말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나 제 자신을 평정하고 선량하고 사랑 깊은 사람이라고 느낄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평정을 잃고 악을 느끼며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흔들릴수록 말로 인하여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누군가가 이처럼 ‘말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공자도 ‘옛글에 이런 말이 있다. 즉 언변으로 자기의 뜻을 성공시키고 문장으로 자기의 말을 성공시킨다고 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람의 뜻을 알 수가 있으며 또 말을 한다해도 문장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그 뜻이 전달될 수 있겠느냐(志有之 言以足志 文以足言 不言誰知其志 言之無文 行之不遠)’고 해서 필요한 말은 조리 있게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語不成說)을 하는 사람과 달콤한 말로 남을 꾀는(甘言利說) 사람과 말 뿐이고 알맹이가 없는(德音無良)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성적인 언어로 교양과 덕담을 전해주면 그 진실을 이해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쩐지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말에 익숙해져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그 고역 또한 감당하기 어려우리라. 참새처럼 조잘대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언천금(一言千金)과 같이 품위와 가치가가 있는 말은 소중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2009)
왜 여자에게만 가혹한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 不同席)’이란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었다. 남자 여자가 나이 일곱 살이 되면 한 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이 말은 유교적인 개념에서 남녀의 유별(有別)을 강조하고 ‘남녀가 한 자리에 앉지 말라’는 엄격한 규범으로 들린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나이쯤 되면 남녀간의 본능적인 욕정의 발현을 규제하려는 묘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사대부가(士大夫家)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의 사회에서도 통념적인 유교사상이 모든 생활을 지배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남성 우월을 실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성은 오로지 규방(閨房)이나 내방(內房)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규범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만의 지혜가 담긴 규방문학(閨房文學)이니 내방가사(內房歌辭)라는 여유거리를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는 이러한 남녀간의 본능적인 문제보다는 여자가 감히 남자의 ‘자리’(同級)와 대등하거나 그 위에 앉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옳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찌보면 이상의 두 가지 해석이 모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여기에서 묘한 상상력을 일으키는 대목은 왜 7이라는 숫자일까 하는 것이다. 뭐, 위의 해석대로라면 7세가 되면 남녀가 성적으로 성숙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7세부터는 사고력이 발달해서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즉 기쁨(喜) 성냄(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함(愛) 악함(惡) 욕심냄(慾)의 칠정(七情)을 가슴속에 품을 수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처럼 여성들에게만 가해지는 또 하나의 규범이 있다. 역시 7과 관계되는 것으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다. 이런 악례(惡例)는 여성(지어미)이 일곱 가지의 잘못을 저지르면 내쫓아도 된다는 남존여비의 극치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불순구고(不順舅姑)-시부모와 사이가 나쁘고
무자(無子)-자식을 낳지 못하고
음행(淫行)-남편 이외의 남자와 통정하고
질투(嫉妬)-질투심이 남다르고
악질(惡疾)-고질병을 앓거나
구설(口舌)-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도절(盜竊)-도둑질을 했다.
이와 같이 7항 중에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아내는 남편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글쎄, 요즘 같으면 이혼사유가 되는지는 법률적인 지식이 모자라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니컬한 사실은 이와 같이 7거(七去)의 이유에 해당된다하더라도 내쫓지 못하는 세 가지 사유를 장치해놓고 있다. 그게 바로 ‘삼불거(三不去)’라는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제척(除斥)사유가 될지라도 이럴 경우에는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그 악에서 구제될 수 있는 방법이다.
첫째로, 결혼을 할 당시에는 가난했으나 그 후 생활의 안정을 가져와서 부자로 가세를 키웠다면 내쫓지 못한다. 여성의 노고와 내조를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부모의 삼년상(三年喪)을 함께 모셨다면 내쫓김을 당하지 않는다. 이는 효행을 우선으로 한다는 항목이다. 옛날 내 어렸을 때만해도 상청(喪廳)에 혼백을 모셔놓고 하루 세 끼마다 상식(上食)을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올려야 하고 초하룻날과 보름에는 삭망제(朔望祭)라 하여 제사를 올렸다.
요즘은 삼일장(三日葬)으로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49제만 끝나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1주기에 소상(小祥), 2주기에는 대상(大祥)이라 하여 제사를 장례식 못지않게 지내는 번거로움을 며느리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고통을 감수한 아내를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내쫓겨도 갈 곳이 없으면 내쫓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인도주의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여권이 신장된 현대사회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칠거지악의 요소를 범했더라도 삼불거라는 장치를 통해서 결국 여성을 보호했다면 이 칠거지악은 여성들이 이런 항목을 경계하라는 법도의 의미로 보아야지 무조건 악에 연루된 여성을 내쫓는다는 것은 아닌상 싶다.
지금은 여성 상위의 시대이다. 남녀 동석(同席)에서 진일보하여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다. 여성 대통령에다 여성 국무총리,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 여성 회장 등 다양한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다. 이제 왜 여성들에게만 가혹했느냐는 우문(愚問)은 고전이 되고 말았다.
성님성님 사촌성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애고애고 말도마라/ 고초당초 맵다지만 시집보다 매울소냐
여성은 좋은 남편 만나서 시집을 가고 또 자식을 분만하는 고통도 따른다. 옛날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케케묵은 시집살이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들이여 힘을 내시라. (2009. 2.)
이등박문이가 열십자로 뻗었다 1950년도에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까, 일본 강점에서 해방된지 5년째이며 6. 25 사변이 일어난 해이다. 그때 우리 꼬맹이들은 일본을 욕하는 숫자풀이의 이런 노래를 자주 불렀다.1. 일본놈2. 이등박문이가3. 삼천리강산을 둘러 마시려다가 4. 사자를 만나서5. 오사(誤死)할 놈이6. 육혈포에 맞아서7. 칠십 먹은 늙은이가8. 팔딱팔딱 뛰는데9. 구둣발로 힘껏 차버렸더니10. 십리 밖에 떨어져 열십자로 뻗었다 그 당시 이러한 숫자노래가 아이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은 일제하의 무서운 항일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이 노래는 1905년 11월 17일, 일본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군내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통치하게 된 원흉 이등박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후 이등박문은 만주 하르빈역에서 안중근의사가 쏜 총탄에 쓰러졌으나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에 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동시에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한일합방조약을 매국노 이완용과 체결한다. 이로써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이래, 27대 519년 만에 망국의 서러움을 맞았다. 우리는 8월 29일을 ‘국치일’로 정해서 국가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다. 이등박문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러한 우리의 민요나 가사들은 본시 사람들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데 숫자를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수요(數謠)라고 한다. 이 수요는 수를 셀때 소리내어 세다가 노래로 변형되는 경우도 있지만, 구전되는 흥겨운 일종의 놀이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가사는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고 음만 강조하여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다.1. 일도 없는 할머니가2. 이집 저집 다니면서 3. 삼년이면 다된다고4. 사살질만 하더니5. 오살이 잡탕놈이6. 육혈포를 들고7. 칠거득 치려할 때8. 팔도강산이 제거라고9. 구석구석 쳐다니면서10. 싯뻘건 거짓말만 하더라 그냥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사살질만 하는 할머니를 비꼬는 가사이다. 그러나 임금이 미복(微服)으로 민정을 탐색하다가 들은 동요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들을 수도 있었다.일조정(一朝廷)이원군(二院君)삼각산(三角山)에사지(死地)로다오백년(五百年) 못되어육판서(六判書) 서름지고칠도(七道)에 흉년지고팔자(八字)좋은 정도령구중궁궐(九重宮闕) 구경차로십자가(十字街)에 왕래해. 한편, 관직과 중국의 역사와 고사(故事)를 엮은 수요도 있다.일검참사 한태조(漢太祖) 이군불사 제왕촉(齊王觸)삼국명장 제갈량(諸葛亮) 사면충돌 조자룡(趙子龍)오간참상 관운장(關雲長) 육국통합 진시황(秦始皇)칠년대한 은성탕(殷成湯) 팔척장신 초패왕(楚覇王)구세동거 장공예(張公藝) 십년지절 한소무(漢蘇武) 백년천손 곽자의(郭子儀).
(2009. 1.)
하루도 숫자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루도 숫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아침에 눈뜨면서 시계를 쳐다보고 달력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오늘이 며칠이냐에서 부터 몇 시에 집을 나와 몇 번의 버스를 타고 또 몇 호선의 지하철로 바꾸어 타서 몇 번 출구로 나와 출근하는 등의 수(數)와의 동거는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수를 세고 계산하는 일은 원시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잡은 물고기나 기르는 짐승, 따온 나무 열매 등 물건의 수를 세어서 나누는 일까지 모두 수와 연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숫자 쓰기와 수 세기를 가르치치 않으면 안 된다. 산수(算數-나는 ‘셈본’이라는 책으로도 배웠다)를 익히고 수학(數學-여기서부터는 대수(代數), 기하(幾何), 미분적분(微分積分), 피타고라스의 정리까지 복잡한 학문으로 이어진다)을 공부해야 한다. 숫자의 계산에는 덧셈, 뺄셈, 나눗셈도 중요하지만, 구구단을 외우는 곱셈의 방법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2×1=2부터 시작해서 9×9=81까지 ‘이일은 이, 이이는 사.....구팔 칠십 이, 구구 팔십 일’ 이런 방식으로 줄줄 외워야 하고 실제생활에 응용해야 한다. 우리의 고전 <흥부전>에도 ‘구구풀이’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도 구구단이 있었나? 후대에 우리 소리꾼들이 흥에 곁들인 게 아닌가 싶다.구구팔십 일광로는 정송자를 찾아가고팔구칠십 이태백은 채석강에 완월(玩月)하고칠구육십 삼천선자 학을타고 노라있고육구오십 사오선은 상산에 바둑두고오구사십 오자서는 동문상에 눈을걸고사구삼십 육수무는 전국적의 사절이요삼구이십 칠육구는 보국충정 갸륵하고이구십 팔진도는 제갈량의 진법이요일구 구궁수는 하도락서(河圖洛書) 그 아닌가 이러한 숫자는 산수(또는 산술(算術))의 근원으로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수와 양에 관한 간단한 성질 및 셈을 다루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숫자를 읽을 때와 셈을 셀때는 다르게 나타나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숫자 1, 2, 3,.......10, 100, 1000, 10000 등을 읽을 때는 일, 이, 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억, 십억.. (그 위에 몇 조, 몇 경, 몇 해까지 있다고 함) 등으로 읽지만 수를 셀 때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 백으로 세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물건을 셀 때는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라고 해서 받침을 빼거나 합성어로 변형 되어 새는 다섯 개부터는 여섯, 일곱하고 제대로 세고 있음도 특이하다(다만, 스물 개는 스무 개라 함). 이런 음법을 따른다면 엿 개, 곱 개, 덟 개, 홉 개, 열 개라고 편법을 써서 세는 것도 재미있을 법하다. 1일은 24시간이다. 이는 또 밤과 낮으로 12시간씩 나누어져 있다. 옛날에는 하루를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辛) 유(酉) 술(戌) 해(亥)시라해서 12시간으로 나누어 생활한 적이 있었다. 하루 24시간을 2시간씩 12등분한 것이다. 자시(子時)는 밤 0시에 해당하고 오시(午時)는 낮 12시를 말한다. 요즘도 낮 12시를 정오(正午)라 하고 오전을 상오(上午), 오후를 하오(下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오시(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그러나 중간인 낮 12시)를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을 상오(오전), 그 이후를 하오(오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30일(큰 달은 31일)이 모이면 1개월(한 달)이 되고 12개월이 모이면 1년(한 해)가 된다. 다시 1년은 4계절(春夏秋冬)로 나누어져서 1년 365일 내내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농경시대에 4계절도 모자라서 24절기(節氣-節侯라고도 함)로 세분해서 그 절기에 따라 파종을 하거나 수확을 하고 나아가서는 더위와 추위 등의 기후까지도 예상하게 되어 농업이나 어업 등에서는 아직도 없어서는 안 되는 시간과 의 관련이다. 이 24절기는 태양의 황도상(黃道上)의 위치에 따라 정해진 1년의 음력 절기이다. 15일 단위로 바뀌는 그 명칭을 살펴보면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이상 봄 절기)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이상 여름 절기)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이상 가을 절기)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이상 겨울 절기)이다. 이처럼 음력 절기이지만 춘분(3월 21일~23일경), 하지(6월 21일~23일경), 추분(9월 21일~23일경), 동지(12월 21일~23일경)는 양력 날짜에 든다는 특성이 있어서 어쩌면 양력과 음력의 조화도 고려해서 만들어진 달력이 아니겠는가하는 점이 아이러니컬 하다. 시간은 하루도 우리와 따로 살 수 없는 무형의 고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2009. 1.)
각설이도 숫자로 풀었다
몇 년 전 대학로에 김시라 시인이 있었다. 그는 한창 나이에 타계했지만, 시인이기 전에 소리꾼으로 명성을 얻은 품바 1세대였다. 그는 직접 품바 전용 소극장을 운영하면서 품바타령을 멋지게 읊어 세태를 풍자하고 관객들에게 웃음과 함께 통쾌한 메시지를 선사하였다. 이 품바타령은 일명 각설이타령이라고 하는데 시작하는 그 가락이 먼저 이러하였다.어헐씨구씨구 들어간다 저헐씨구 들어간다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왔네아주머니 보니깨내 반갑소 할머니 보니깨내 즐겁소 이렇게 시작되는 품바타령은 각설이라는 허구 인물로 분장해서 세태와 사회상을 비판하기도 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와 춤으로 한판 굿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 숫자와 관련된 일종의 수요(數謠)라고 할 수 있다.일자한장 들고보니 일월이 송송해송송 밤중새벽 여전하다이자한장 들고보니 팔도기생 의암이는 진주남강 떨어졌네삼자한장 들고보니 삼동가리 놋철때 경상감사 놀음할 때 촛불이나 밝힐까사자한장 들고보니 사현신님 가는길에 점심참이 늦어왔네오자한장 들고보니 오관참장 관운장이 적토마를 집어타고 제갈선생 찾아가네육자한장 들고보니 육군대장 김영일이 팔도짚고 헤엄친다칠자한장 들고보니 칠년대한 가물음에 백두산에 비가불어 만인간이 좋아한다팔자한장 들고보니 우리형제 팔형제가 한서당에 글읽어서 과거하기 힘을쓴다구자한장 들고보니 구월이라 구읻날에 강남제비 돌아간다장자한장 들고보니 장한솔에 범이들어 일등포수 다쏘아도 범한마리 못잡고 꿩잡기만 힘쓰는 데 눈먼포수 범잡았네품마품마 자리헌다 어헐씨구 자리헌다 이 각설이타령은 옛날에 문전걸식하는 거지들이 한 푼의 동냥을 하기위해 타령 한 곡조로 인사를 하고 주인의 동의를 구하는 형식이다. 그냥 불쑥 나타나서 ‘한 푼 줍쇼’가 아니라, 이처럼 멋있는 광경을 연출하여 적선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걸의 한 방법은 얼마나 애교 있는 일인가. 우선 이 각설이타령은 1, 2, 3의 숫자음을 따라 해학적으로 부르는 노래지만, 그 곡이 경쾌하고 흥이 있어서 듣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멋진 데가 많다. ‘이 각설이 이래뵈도 정승판서 자제로서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다네’라는 가사로 보아 긍지와 자존심을 버리고 돈 한 푼 얻는 재미로 이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애교가 넘치고 웃음이 가득하다. 또 이 가사 중에는 한발돋친 허수아비두발돋친 까마귀세발돋친 삼족오네발돋친 당나귀지리구지리구 잘헌다 품바하고도 잘헌다라는 숫자와 연관된 가사들이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숫자로 말을 만들어 재미를 더한 이런 류의 가사는 ‘신재효 본(申在孝本)’ <춘향십장가(春香十杖歌)>에서도 볼 수 있다.일지정심 잇사오니 이리하면 변할테오이부 아니 섬긴다고 이거 죠난 당티안쇼삼강이 즁하기로 삼가히 본바닷소사지를 찟드래도 사또의 처분이오오장을 갈나주면 오족히 좃소리까육방하인 무러보오 육시하면 될터인가칠사즁의 업난 공사 칠때로만 쳐보시오팔면부당 못될일을 팔작팔작 뛰어보오구즁분우 관장되어 구진짓을 구만하오심발지목 멋자마오 십은 아니줄터이니 이렇게 우리의 민요나 사설들은 구전되거나 혹은 노래로 불려져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극장 무대에서 특별히 공연되는 것을 제외하면 누구나 어디든지 쉽게 접할 수 없는 아쉬움뿐이다. 김시라 시인의 품바도 몇 대로 전승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지금은 상설 공연장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춘향가 판소리 공연도 들어본지가 너무 오래인 것 같다. 오랜 세월 서민들과 가깝게 흥을 돋우어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민요나 가사들을 보존하는 방법은 없을까.(2008. 12.)
화장실에도 문화가 있다
화장실에도 문화가 있다? 하기사 자동차 문화, 등산 문화, 음식 문화, 다방 문화, 놀이 문화, 여행 문화, 낚시 문화 등등 요즘처럼 문화라는 용어가 하도 유행으로 불리니까 그러하겠지만, 화장실 문화는 어쩐지 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러한 문화의 개념은 특정한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를 수행하는 방법이나 방식을 말하는 매너(manner)쯤에 해당하는 게 아니가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문화라는 말로 바뀌어 있었다. 매너는 예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려본 사람들은 다 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표찰을 살펴보면 이 글귀를 게시한 단체명이 ‘화장실문화시민연대’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장실 문화’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현대식 화장실로 변한 것은 현대 문명의 급속한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겠으나 공중화장실 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어 깨끗하고 편리한 화장실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옛날 내가 어릴 때에는 뒷간이라 해서 본채와 떨어진 곳, 행랑채 뒤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밤중에 혼자 볼일 보러가기엔 무서워서 쩔쩔맸던 기억도 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와 동행을 하고 엄마는 볼일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등불을 들고 보초를 서야했던 기억도 있다.
그 후 국민학생(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름방학을 맞아 읍내에 사는 내 또래의 이모 아들(이종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가 새벽에 뒷간을 간다는 것이다.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관솔불을 밝혀들고 내가 보초를 섰다. 마침 새벽달이 온 마을을 비추고 있어서 흥얼흥얼 동요를 불렀지만, 앞산에서 들리는 산짐승(나중에 알았지만 밤에 가끔 늑대가 운다고 했다.) 울음소리에 놀라서 주무시는 엄마를 깨웠던 소동도 기억한다. 그날 이후 그 동생은 무섭고 불편한 우리 집을 한 번도 다시 온 일이 없었다.
지금 통상적으로 화장실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똥둣간’이 아닌 ‘변소’라는 이름으로 대소변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골 똥둣간은 밑딲개가 없어서 지푸라기로 처리하는 일도 있었고 똥돼지의 중요한 먹이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 통칭 변소에 대해서 금성교과서에서 발행한 국어사전에는 변소(便所)를 대소변을 배출하기 위한 시설. 뒷간, 정방(淨房), 측간(厠間)이라 하고 화장실은 변소의 미칭(美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변소를 중국에서는 측소(厠所). 일본에서는 오수세(お手洗). 미국에서는 토일렛(toilet)이라고 하고 또는 화장실을 왓쉬 룸(wash room) 혹은 드레싱 룸(dressing room)이라 해서 세수를 하거나 진짜 화장을 하면서 옷을 매만지는 장소로 사용했던 것 같다. 언젠가 한때는 화장실을 W. C(water closet)라고 해서 ‘와싱톤 칼리지(워싱톤 대학)’이니 ‘나홀로 다방’이라고 이칭(異稱)을 즐겨 불렀던 때도 있었다.
우리의 각 사찰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르는데 그 뜻이 ‘근심을 푸는 장소’이다. 모든 근심 걱정은 여기에서 풀어버리는 해결의 성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의 화장실 문화는 이제 선진국에 다달았다.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아직도 공중화장실의 개량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가 수두룩하다. 특히 저개발국가나 후진국에서는 우리 60년대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측은함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우리말에는 변소에 관한 속담과 같은 격언이 전해오고 있는데 대충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많이 회자(膾炙)되기도 한다.
- 뒷간에 갈 적 말 다르고 올 적 말 다르다 : 자기에게 긴할 때는 다급하게 굴다가 제 할 일 다하면 말이 달라진다.
- 뒷간과 사돈집은 멀어야 한다 : 뒷간이 가까우면 냄새가 나듯이 사돈집이 가까우 면 말썽이 일기 쉬우므로 그것을 경계하는 말.
이처럼 우리 생활과 밀접한 화장실 이야기가 많지만, 화장실 가기 전에 온갖 감언(甘言)으로 회유(懷柔)를 해서 도모하는 일이 성공하면 그 이후의 언행과 태도가 180도로 바뀌는 부류의 인간들에 대한 하나의 경종을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많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의 한 단면이다.
언젠가 공중화장실이 개량되기 전에 연세대 건너편 화장실(지금은 개량해서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음)에 일을 보기 위해 들렸다가 문짝에 씌어진 낙서를 읽고 웃음을 금치 못한 일이 있다. ‘- 신은 죽었다.........니이체’라고 점잖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의 한 글귀를 옮겨 놓았다.
다음 날 또 들렸더니 ‘= 니체 너는 죽었다.....神’이라고 니이체의 언설(言說)에 대해서 신(神)이 반격하는 대구(對句)를 해 놓았고 그 다음 날에는 ‘☆ 너거 둘 다 잡히면 죽었다......청소부 아줌마’라고 화장실의 낙서에 대한 ‘청소부 아줌마’의 마지막 경고성 대구를 읽을 수 있었다. 아아, 얼마나 지적인 낙서인가. 아마도 글씨로 보아서 한 사람의 창작(?)일 테지만 화자(話者) 세 명이 교대로 언급한 언어의 유희(遊戱)는 걸작에 속한다.
화장실의 문화는 무조건 깨끗하게 이용하는 매너에 있겠으나 가정 화장실이 아닌 공중의 경우는 옛날처럼 낭만적인 요소는 사라진지 오래다. 현실은 무조건 편리하고 신속한 생존경쟁의 일단으로 문화라는 언어가 포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12. 3. )
고요한 밤 물고기가 달을 읽었다
--‘靜聽魚讀月
법보종찰 해인사는 내 고향 합천의 고즈넉한 가야산에 정좌(靜坐)하고 있다. 이곳 해인사는 어릴 적부터 많이 다녀본 절이다. 근래에 와서는 문학기행이나 문학 심포지엄 때 여기를 방문하고 참배한 일이 있을 뿐, 자주 와보지는 못했다.
몇 년전에 늦가을에 합천읍내 어떤 문학행사에 참석하고 만난 진각 스님이 율원에 계서서 그의 안내로 절간 곳곳을 두루 살펴본 일이 있었다. 먼저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큰 부처님께 삼배하고 ‘법보종찰 해인사는 불보사찰인 양산 통도사와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인데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자 우리 민족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우리 정신의 귀의처이며 이 땅을 밝히는 등불’이라는 진각스님의 설명을 토대로 해인사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잠시 성철스님이 열반하신 ‘퇴설당’을 돌아보고 성철스님의 법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낭랑한 음성이 들리는 착각에 젖어보기도 했다. 그 설법에 감동한 많은 불자나 스님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그의 숭엄한 불교사상과 신행을 느낀다는 설명에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었다.
동양 문화의 정수(精髓)라고 일컬어지는데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人三昧)라는 구절에서 해인사(海印寺)라는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해서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멈출 때 비로소 우주의 다양한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며 우리 중생의 본래 모습,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라고 진각스님은 열변을 토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 화상과 그의 제자인 이정(理貞) 화상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10월)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대사를 위시하여 균여, 의천과 같은 뛰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곳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믈 등 70여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서 국내 사찰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가야산을 뒤로 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뿐만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겨울에 연출하는 설경은 신비경에 가깝다는 참배객이나 관광객들의 감탄이다.
합천 해인사 가는 길 초입부터 / 滅道의 바람이 곡선을 그린다 / 大寂光殿 부처님께 / 백 팔 배를 하고도 풀 수 없었던 / 화두 하나 오늘 제몸 감싼다
절간 解憂所에 앉아 / 근심 한 덩이 떠나보냈다 / 툭, 저승에 닿았나보다 /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 비로소 영과 육의 화해를 보았다
문득 울리는 범종 소리 여운 멀다 / 성불하소서 성불하소서 / 解脫의 구름 한 무리 산을 넘다말고 / 무진장의 시간만 / 이승에서 분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졸시 한 편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졸시「餘白詩 . 59」의 전문이다. 진각 스님과의 인연은 그가 편집하던 『海印』이란 잡지에 산사방문기라는 수필을 한 편 청탁받고 그 글이 수록되면서 더욱 친분을 갖게 되었는데 그와는 불교와 절간 이야기, 수행 등에 대한 이야기와 문학에 대한 담론을 많이 했다.
그가 갑자기 ‘청산불묵(淸算不墨) 천추화(千秋畵)요, 녹수무현(綠水無絃) 만고금(萬古琴)이라’라고 시 한 수를 읊조린다. ‘푸른 산은 먹물이 없어도 천년을 가는 그림 한 폭이요, 푸른 물은 거문고 줄이 없어도 만 년을 흐르는 거문고라’는 명시를 들려주고 있다.
이러한 창사(創寺)정신의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 수행정진해온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 장을 보존하기 만든 판전으로 해인사 경내에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각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었으며 팔만대장경은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진각스님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어느 주련에 걸려있는 ‘靜聽魚讀月(정청어독월)’이라는 싯귀(詩句)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아아, ‘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가 고요한 이 밤에 들린다’.는 한 줄의 싯귀는 누군가 대시인인 고승이 작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인사 입구에는 창건 식수로 심어졌던 나무가 1,200년의 장구한 세월을 견디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하고 이제는 둥치만 남아서 해인사의 역사와 함께 서 있다. 일주문 지나 봉황문, 해탈문을 지나면서 다시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오묘한 진실과 해인사의 정경에 매료(魅了)되고 말았다.
진각스님과 작별하면서 ‘다시 尋牛圖를 보았다 / 하필이면 왜 소였을까 / 소를 찾아 소를 타고 돌아오는 길 / 어디서도 풀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문득 소도 / 없어지고 나도 보이지 않았다 / 영혼과 육신이 混沌으로 / 大路에 그냥 서있다 / 본래 나를 찾는 일은 허사였다 /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자작시를 되뇌이고 있었다.*
(2013. 11. 조계사불교대학 리포터)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을 조심하라는 경고성이 담겨져 있다. 옛날 낙동강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 우리 동네에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쌕쌕이의 폭격이 무서워서 밤에 불도 켜지 못한 채 모두들 숨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웃마을 박서방집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어머니가 그 사연을 물었다. 한 마을에서 두 명씩 뽑아서 군대 보급품을 낙동강까지 우리 아군에게 전달하는 책무가 박서방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이장과 어른들이 모여서 제비를 뽑아 결정하고 내일 날이 밝으면 박서방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기로 했는데 오늘 그 결정사항이 정식으로 통보도 하기 전에 누군가가 미리 일러 바쳤다는 것이다.
전투에 사용할 탄약과 쌀 등 필요한 물건을 무사히 전달만 하고 돌아오면 될 일인데 거기에 차출되면 마치 전쟁터에서 죽는 것으로 착각하고 ‘왜, 하필 우리 남편이냐? 왜, 우리 아버지냐?’ 그 집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우왕좌왕의 밤이었다.
아버지는 온 가족들에게 경고 했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언제나 말조심하면서 살아야 해’ 싸늘한 그 말을 지금까지 되새기면서 살아왔다. 말을 잘못 전해서 실수하거나 망신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칫 말 전달에 거짓이 보태어지는 유언비어가 된다든지 꼬임으로 변한다면 또 다른 일로 확대될 수 있어서 서로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이라서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語不成說)을 하는 사람과 달콤한 말로 남을 꾀는(甘言利說) 사람과 말 뿐이고 알맹이가 없는(德音無良)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성적인 언어로 교양과 덕담을 전해주면 그 진실을 이해하고 느끼는 계기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쩐지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아지는 현실이다.
옛날에 작자 미상씨가 남긴 시조에서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 많이 해서 구설에 오르지 않는 일이 없는가 싶다. 말을 잘 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꼭 필요한 말은 전달하되 해서는 안 될 말은 삼가야 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無足言飛千里)’거나 ‘소더러 한 말은 안 나도 아내한테 한 말은 난다(言牛則滅語妻則洩)’는 옛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친한 사이에서 한 말이라도 세어 나가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경고를 명심하고 있는 것이다.(문학의 집. 2015. 11.)
방랑시인 김 삿갓의 해학
김 삿갓의 본 이름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자(字)는 성심(性深)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도 그를 본명이나 자, 호를 부르는 사람이 없고 그냥 김 삿갓이라고 하거나 삿갓 립자를 써서 김립(金笠) 이라고만 부른다.
그것은 한 평생을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방랑하는 시인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또한 삿갓은 햇볕을 가려줄 뿐만 아니라 날이 구증면 비를 막아주기도 하려니와 깊숙이 얼굴을 가리고 하늘과 사람 대하기를 무척 꺼려했다는 표징이기도 하다.
김 삿갓이 아닌 김병연은 왜 일생을 떠돌이로 전국을 누비며 시만 지었을까. 이 불운의 한 시인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의 뒤안에 묻혀 있는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야 한다.
순조 11년(서기 1811년)에 서북부 지방에서 홍경래가 주동한 난동이 벌어졌다. 나라에서 이곳 출신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 등 서북지방을 차별대우한다는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난군(亂軍)은 일시에 가산을 점령하고 곽산, 정주, 선천, 용천, 태천, 박천 등이 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 김 사갓의 조부 김익순은 선천부사였은데 난군이 쳐들어오자 굴복하고 난군이 주는 벼슬을 받았다. 아마도 죽음이 두려워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죄는 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고 죄상(罪狀)의 조사가 시작되자 김익순은 홍경래의 최고 참모인 김창시란 자의 머리를 잘라서 군문(軍門)에 나타나서 대죄(待罪)하였다. 적군을 죽였으므로 죄를 다소나마 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김창시의 목을 벤 것은 김익순이 아니고 철산에 사는 조문형이라는 보고서가 날아왔다. 조문형이 김창시의 머리를 관군에게 비치고자 했으나 김익순이 천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자기의 공으로 가장하였으나 약속한 돈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김익순과 조문형을 대질시켰더니 김익순의 죄과(罪過)가 드러나고 말았다.
김익순은 드디어 모반대역이라는 죄명으로 서대문 밖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폐족(廢族)을 당하고 말았다. 이대 김사갓은 나이 다섯 살이었다. 집안이 결단나자 그의 아버지 김안근은 병하, 병연 두 형제를 집안의 하인이었던 김성수에 맡겨 멀리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시키고 신분을 감춘 채 살게 하였다. 멸족의 화를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 삿갓 나이 스물 두 살 되는 해 그는 고을에서 보는 향시에 나갔다(어느 지방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시제는 다음과 같았다.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김삿갓은 가슴을 펴고 시를 써내려갔다. 그중 마지막 한 구절만 보면 이렇다.
임금을 잃은 이 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김삿갓은 마음껏 붓을 놀렸다.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을 더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말을 들은 김삿갓의 심정을 여기에서 적당히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는지 스물두 살 때 장가를 보냈고 이어 손자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다. 연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아무도 몰래 가족과 이별했다. 세상은 허무하고 원망스럽기만 해서 홀연 방랑의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실르 남겼다. 그으 ltl는 재치가 넘치고 파격적이거나 야유와 조소가 함께 깃들어 있다. 까다로운 한시(漢詩)의 규칙을 깨고 자유자재로 읊는 시재(詩才)였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스므나무 아래의 서러운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마릉에서는 쉰밥을 주누나. 사람으로서 어찌 이른 일이 있으리오. 차라리 집에 가서 설은 밥을 먹으리라).
그러나 뜻도 중요하지만 스무나무를 二十樹로, 서러운 나그네를 三十客으로, 쉬어버린 밥을 五十食, 이런 일을 七十事로 표기하여 그의 놀라운 재치를 엿보게 한다. 어느날 그는 어떤 집에서 주인장과 한찬 담소를 나누는데 갑자기 하인이 나타나서 주인에게 “人良卜一 하오리까?”하고 물으니 주인은 “月月山山커든..” 삿갓이 가만히 들어보니 대화가 심상찮아서 “丁口竹天이로다. 허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내용은 식사 때가 되어 밥상을 올리리까(食上) 했는데 주인은 이 친구가 가고 나거든(朋出), 삿갓은 가히 웃기고 자바졌네(可笑)라고 응수 했다는 것이다. 이를 글자 그대로 새기면 아무런 뜻이 없는데 두 자씩 합치면 이와 같은 재치가 나온다. 합자(合字)로 풀어야 통한다.
어찌보면 이런 재치나 해학은 그의 천재적인 시작법도 인정되지만 그의 일생의 불운을 분출하는 특이한 몸짓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밖에도 시로써 혹은 문장으로써 많은 해학을 남겨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김삿갓리에 있는 <난고 김삿갓문학관>에 가면 그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말장난인가, 언어유희인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글께나 읽었던 사람(옛날에는 이를 일러 선비라고 했음)들이나 식자(識者)들은 자신의 글솜씨나 글을 배웠다는 인격의 과시를 위해서 글이나 말로써 회화(誨化)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일 중에는 실제로 살아가는데 충전이 되기도 하지만 장난기가 섞이는 해악이거나 상대방을 야유하는 언어유희도 많이 있었다.
옛날에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해서 신체적인 외관(外觀)도 중요하지만 그의 말솜씨와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가늠하던 시절도 있어서 누구나 말하기와 글씨연습을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가르치는 부모들이 많았다. 우리 동네 서당에서는 “공자왈 맹자왈” 우선 읽기를 중심으로 글을 가르치다가 붓으로 글씨 쓰기를 열심히 연마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말솜씨가 기막히게 잘하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코메디언 못지않게 어떤 대화나 담론 중에서도 임기응변이나 기지로 상황을 대단히 잘 처리하는 그의 언변(言辯)에는 진실이 중심이었지만 더러는 해학이나 장난기도 섞여 있어서 모두들 웃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그는 우선 시 두 편을 각 도별 사투리 버전으로 읽어 주었다.
내 꼬라지 비기 실타고 갈라카모/ 내사마 더러버서 암말 안코 그냥 보내 주꾸마/ 영변의 약산 참꽃/ 항거석 따다가 니 가는 길빠닥에 뿌리 주꾸마/ 니 가라카는 데 마다 나뚠 그 꼬슬/ 사부재기 삐대발고 가뿌래이/ 내 꼬라지 비기시러 갈라 카믄/ 내사마 때리직이삔다 캐도 안 울끼다.(김소월 「진달래」 -경상도 버전)
한산섬 그게 머시다냐/ 달이 겁나게 발가부린 이 밤에/ 또 그게 머시다냐 수루에 혼자 앉아/ 이따만한 큰칼 허리춤에 콱 차불고/ 허벌나게 깊은 근심에 잠겨부린 시방/ 워데서 거시기 한 가닥 피리 소리가/ 이로코롬 나으 애간장을 태워분가 잉.(이순신 「한산도」-전라도 버전)
모두들 박수를 치면서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버전은 왜 안 하냐고 성화였다. 그는 더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전해준 것이 다음 문장과 같이 앞에서 읽으나 뒤에서 거꾸로 읽거나 똑 같은 내용의 문장, 재미있는 도철어(倒綴語)를 들려주었다.
소주 만병만 주소
다시 합창합시다
다 큰 도라지일지라도 큰다
여보게 저기 저게 보여
자지만 만지자
다음에는 한자로 유희를 하는 사람은 김삿갓을 능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시주(詩酒)와 살았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목(耳目)을 집중할 수 있는 해학의 글을 남겼다. 그는 시도 해학적인 것 혹은 시사적인 고발성도 포괄하고 있다.
어느 동네에 들렸더니 초상이 나서 윗마을 친척에게 부고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집에 도착해서 내민 부고장에는 “柳柳花花”라고 적혀 있으나 글자대로 해석하면 버들 유자 2개와 꽃 화자 2개라 버들과 꽃이 둘이라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간청하여 물었더니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 졌다”는 것이니 곧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쌀가게 주인이 사용하는 작은 됫박으로 손님을 속이는 것을 보고 “方口月三八”이라고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주인을 나무랬다. 그러나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설명해줄 것을 요청하니 옆에 서있던 노인의 지팡이를 뺏어서 그 글씨 위에 걸쳐 놓았다. 그 글은 “市中用斗小”로 바뀌어 시중에 쓰는 됫박이 작다는 것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더니 주인이나 손님 모두가 놀랐다.
한편 한자의 해석은 글자를 해체하여 보는 측자(測字)와 글자를 합쳐서 그 뜻을 이해하는 합자(合字)가 있는데 어느 날 노총각이 동네의 처녀를 사모하가 만나줄 것을 간청하였느데 그 처녀는 “籍”이라 적힌 쪽지를 내밀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서당 훈장에게 부탁해서 알았는데 측자 곧 파자(破字), 글자를 분해서 해석하였다. 분해했더니 대죽(竹), 올래(來), 이십(艹), 일(一), 날일(日) 그래서 그 뜻은 “대나무 밭으로 이십일일에 오라”는 것이어서 그날 만나서 좋은 일이 성사되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이처럼 글자로 장난을 하거나 유희를 하는 것은 유머러스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상대를 비아냥대거나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변질되는 행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요즘은 젊은 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은어(隱語)나 반어(反語)등이 핸드폰이나 컴퓨터에서 난무(亂舞)하는 형상은 우리가 우리말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다듬어나가야 할 사명에 직접 해당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