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느날 전락한 문단 배신자
문협이 예총 운영에 중심이었던 시절
--목동쌀롱. 1
1987년 원로 수필가 조경희 선생이 예총회장에 재선되면서 획기적인 발전 방안에 따른 인적 쇄신으로 내가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사무총장에는 오학영 희곡작가가 맡았고 기획실에는 오찬식 소설가가 있어서 마침 내가 시인으로 총무부에 근무하게 되니까 수필가, 희곡작가, 소설가, 시인 등 문협 각 장르의 회원들이 각 부서마다 직책을 수행하고 있어서 문협을 방문하는 문인들이 자연스럽게 예총에도 들리게 되어 문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었다.
여기 목동쌀롱에서 털어놓고자 하는 나에겐 중대한 사건이 하나 있다. 당시 오학영 총장은 문협 상임이사까지 겸하고 있어서 문단의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고 차기나 차차기 이사장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문협의 핵심 멤버(4인방-황 명, 성춘복, 김시철, 오학영)였다. 나는 예총 사업을 담당해서 사무총장과 회장을 보좌하면서 성심껒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경희 회장이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장관으로 발탁되어 취임하고 예총에는 보궐선거로 전봉초 전 서울음대학장이 회장으로 당선되어 첫 사업으로 독일의 윤이상 음악가와 함께 남북음악교류를 위한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나 이루어지 못했다.
다음해에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 선배가 표를 예매했으나 회사의 긴급한 업무로 못하게 되었다고 나를 다녀오라고 선 듯 내밀었다. 고향 가서 노모님 뵙고 성묘도 하고 귀경하려 했으나 표가 매진이다. 아뿔사. 상경표를 미리 예매하지 않고 왔기에 하는 수 없이 하루를 결근하고 다음날 상경하여 출근을 했다.
오 총장께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사정에 의해서 하루 결근 했다는 이유로 사표를 내라는 것이었다. 변명과 ‘너무 하다’는 항의가 통하지 않았고 대노(大怒)를 받아들여 금년 말까지만 근무하기로 말미(末尾)를 약속했다.
이게 무슨 연유인가. 그 후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을 했더니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전화내용인 즉 오학영총장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지금 이 병원에 와있다는 것이다. 급히 윗층 문협에 올라갔으나 사무월간문학 직원 한 사람만 있었다. 빨리 사무국장에게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택시로 그 병원에 도착해서 지하 컴컴한 구석에 싸늘하게 누워있는 오총장을 병원 직원에게 확인해 주었다.
유한근 사무국장과 이충이 시인이 급히 왔다. 매일 출근시 사모님과 딸이 동승하고 예총으로 학교로 태워다 주고 사모님도 무슨 학원에 등교한다는 것이다. 이충이 회원이 오늘 아침 교통사고 환자 입원명단을 확인하고 병실을 찾아갔으나 사모님은 위독한 중태였고 딸은 의식불명이었다.
이어서 황 명 문협이사장, 성춘복 부이사장 등 문협 임원들이 속속 도착해서 안치실이 있는 한양대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이때 사모님도 운명해서 함께 모셨다. 나는 3일장 내내 밤을 새우면서 장례식을 도왔다. 용인 카톨릭공원묘지에 안장했다. 그는 시집 『한 우수주의자의 노래』를 출간하기 바로 전날 비운을 맞았기에 시집을 그의 관속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이듬해 짧은 50세에 인생을 마감하고 편히 잠든 그의 묘소에서 문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으로 조그마한 문학비를 세우고 그의 업적을 회상하고 시집속의 시를 낭독하는 추모행사를 열었다.
그 일이 11월에 있었으니까 나는 이미 총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내년 1월1일부터 이수화 시인이 사무국장으로 있는 ‘기업문화재단’ 설립 사무국에 출근하기로 약정이 되었기에 당시 전봉초 회장에게 퇴직 인사차 회장실에 들어갔다. ‘무슨 얘기냐?’ 펄쩍 뛰면서 사직서를 결재한 사실이 없으니 무효라는 것이었다. 즉시 비서를 시켜 총장실 책상 서랍에 잠자고 있던 사직서를 찾아왔으나 노발대발하면서 ‘불가’라며 반려하였다.
아하, 문제는 이수화 형과의 약속을 낭패로 만든 것이다. 평소에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라 나의 사정과 형편을 이해해 주었다. 물론 나는 백배 사죄하였다. 이렇게 근속한 예총에서 약 20년의 장구한 세월을 대학로에서 보냈다. 예총회장도 조경희(문인), 전봉초(음악), 강선영(무용), 신영균(영화), 이명복(사진), 이성림(국악) 다섯 분의 회장과 김양수, 최절로 사무총장(이상 문인)을 모시면서 업무를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예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직을 끝으로 지금 생각하면 아슬아슬했던 예총 근무를 마쳤다.(2020. 5. 월간문학. )
어느 날 전락한 문단 배신자
--목동쌀롱 2
예총에서 퇴직한 후 신변을 정리하면서 잠시 쉬고 있었다. 어느 날 신세훈 문협 이사장의 연락으로 만났더니 당시 김창완 사무국장이 사정에 의해서 퇴직을 하게 되어 그 자리에 내가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문협 직제개편에 따라서 사무국장이 아니고 사무처장으로 출근했다.
예총에서 근무한 총무, 사업, 편집 등 업무 경험을 살려서 성실하게 근무했다. 당시 최대의 사업으로 성취해야 할 문제는 ‘문협 정관’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문협 분과 중에서 ‘민조시분과’를 추가하는 것. 당시 신 이사장은 자칭 민조시 창시자라는 자부심을 내걸고 기필코 문협 정관에 삽입하여 명실공히 문학 장르로 타 분과와 동일한 문학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사회에서 통과되고 마지막으로 3분의 2이상의 회원이 찬성해야 확정되는 절차가 있었다. 나는 이의 통과를 위해서 전국 회원들의 찬성 위임장을 받는 일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결과는 개정 정관이 총회 에서 확정되고 문화관광부의 승인까지 받아서 시행하게 되었다.
2006년 추석이 지나자 문협 제24대 임원개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사무처에서는 선관위 구성 등 절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회원이 표절에 대한 확인과 동시에 이사장 피선거권에 대한 진정서가 접수되었다. 이것이 전 문단에 회자되었던 ‘성기조 석사논문 표절’ 사건이었다. 신 이사장은 나에게 이의 확인을 위해서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도서관, 국회도서관을 방문해서 이 석사논문과 표절된 문헌을 검색하고 찾아오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전 일이어서 찾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노력 끝에 서울대도서관 깊숙한 지하 서고에서 이 석사논문과 표절되었다는 김 모교수의 시론집을 복사할 수 있었다.
이를 신 이사장은 면밀히 대조하고 표절 부분을 발췌해서 문단윤리위원회에 제소하여 제명처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성기조 선생을 제명해서 불출마하게 되면 신 이사장이 밀고 있는 후보가 무투표 당선된다는 논리였다. 나는 즉각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두 분이 정당하게 투표를 해도 승리할 수 있다는 나의 예측이었다. 그러자 나에게는 매일 실시하는 조회에 불참으로 제재하면서 나를 ‘성기조와 내통하는 간첩’이라는 명분으로 사무처장 업무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나의 진실을 설명했으나 신 이사장의 완고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나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고 문협을 떠났다. 이제 마음 편히 쉬면서 시를 쓰고 여행이나 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년균 시인이 만나자는 전화가 와서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성기조 선생이 이미 제명처분으로 문협 이사장 출마가 저지되어 자신이 입후보하기로 그쪽 참모들이 확정했으니 작금의 문제를 함께 풀어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축하하면서도 거절했다. 신 이사장이 ‘간첩’이라고 엉뚱하게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서 누명을 씌운 괘씸한 면도 있지만 너무 성급하게 그에게 보복하는 형태는 올바르지 못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년균 시인이 부이사장일 때 내가 사무처장을 했고 평소에도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기에 무엇을, 어떻게 돕느냐고 물었다. 내가 시분과회장에 출마해서 함께 선거운동을 하면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는 이미 선거사무실까지 개소해 놓고 전국에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즉각 나의 제자들과 가까운 친구 및 선배들에게 의견 타진을 해보았더니 출마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총에서 문협에서 교감한 전국의 시인들에게 우선 조심스럽게 전화로 알리고 지원을 부탁했다. 선거일이 공고가 되고 입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자 신 이사장은 나를 경계하고 주시했으나 등록 마감 한 시간 전에 등록을 마치고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해서 결국 ‘이사장 김년균’, ‘시분과회장 김송배’라는 당선증을 김우종 선관위원장으로부터 건네받았다. 개표장은 환호성이 넘쳤다.
이후 임기 4년간 김년균 이사장과 함께 문협 발전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던중 만해마을에서 열린 만해축제에서 무산 조오현 스님(시조시인)을 만나 반갑게 문안인사를 드렸더니 ‘사람이 인연을 배신하면 안돼!’ 청천벽력이었다. 연유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스님은 사라졌다. 나는 하루 아침에 배신자로 전락 되어서 당황스러웠다. 선거당시에 나의 낙선을 위해서 ‘배신자’, ‘알콜 중독자’ 등 그쪽의 모함이 여기까지 전파되었나 싶어 씁쓸하기만 했다. 아쉽게도 조오현 스님은 열반했기에 끝내 해명할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2020. 6. 월간문학 )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지평 정립
--『시원』 창간 5주년을 맞이하여
2016년 6월 1일, 우리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정립하여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시인들의 발표 지면을 확대하여 창작의욕과 시 정신 발양에 획기적인 동력을 제공하여 한국 시문학 발전에 공헌하려는 목적으로 계간 『시원』 을 발행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원로 중진 시인들을 위시하여 강호의 시인들이 동참해서 작품과 시평 및 시론을 발표하여 시인들과 전국의 시 애호가들의 공감을 획득한 바 있어서 우리 시문학사에 한 획을 장식한 쾌거를 진심으로 자축하면서 그간의 소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많은 동료들이 열성적으로 합류하여 계간 『시원』 을 창간하게 되었는데 정순영 시인의 광고 협찬의 도움으로 잡지의 기틀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에 따라서 최초의 창간 발행인 김송배, 주간 정순영, 편집국장 강명숙, 편집위원에 김유신, 김 종, 김현기, 방지원, 손해일, 엄창섭, 이동희, 임선영, 정성수, 정순자, 조의홍 시인들이 전국에서 동참하여 활력을 발휘하게 되는 영광을 함께 하였기에 무한한 감사와 경의를 보냅니다.
이처럼 창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전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표기회를 고르게 제공하는 동시에 <한국시원 시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우수작품을 발굴하여 시상하는 한편 신인상도 매회 심사 선정하는 등 시문학 관련사업을 착실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서 <한국시원 시문학상>에는 대상에 조의홍, 임병호, 권숙월, 이서연 시인이, 본상에는 임애월, 김현기, 강경애, 강명숙 시인이, 우수상에는 임선영, 이정현, 문연자 시인이 수상하는 영광을 가졌으며 이들의 작품과 시인으로서의 품격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함께 획득하는 시문학사의 한 획을 장식하였습니다.
또한 신인상에도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약 20여명의 시인을 발굴 탄생시키는 영광도 제공했습니다. 이들도 앞으로 우리 한국시단에 크게 공헌할 것으로 기대되며 지금 도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어서 그들의 활동무대를 확대하기 위해서 시창작 교육을 활성화하면서 그들의 친목과 단합을 위해 <한국시원시인회>를 창립하여 상호 시적인 정보 교환은 물론 계간 『시원』 의 발전방향도 함께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배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창간 5주년을 기해서 우리 편집위원들과 운영이사들은 현재 우리 시단과 시문학의 발전 저해 요인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면서 그 해법을 탐색하는 연구도 계속해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지난 창간호에서 ‘우리는 지금 인문학의 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삶의 부정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정자들이 국가의 정책이나 국가의 발전방안에 경제 위주의 범주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인간의 정서의 교육을 등한시하는 등의 많은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편집위원들의 담론을 다시 새기면서 창간 정신을 더욱 확고하게 구축하려는 노력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문학의 새로운 활성화의 탐구’라는 제하에 ‘정신적 위기 시대에서의 시문학’과 ‘잡지 제호가 왜 시원(詩苑)인가’ 그리고 ‘향후 시문학의 새로운 활성화 계획’ 등을 소상하게 천명한 바와 같이 우리 시문학의 침체와 시정신의 결핍을 다양한 방안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발양할 것을 재삼 다짐합니다.
전국의 시인들과 시 애호가들의 적극적인 지도 편달로 올바른 정신세계의 정착에 동참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광고 등의 협찬으로 잡지 발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 정순영 시인과 박흥우 시원운영이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또한 지적인 교양과 숭고한 안목으로 교정 집필로 알찬 내용을 제공하여 지면을 더욱 빛내주신 조의홍(차 한 잔 시 한 편), 이동희(계간 시평), 김현기(시비 순례), 방지원(문학동인 순방), 임선영(회중유시), 이서연(문학관 탐방) 시인들의 노고에도 무한한 찬사를 보냅니다.
지금은 코로나19의 어려운 시국입니다. 당국의 방역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난국을 극복하고 작품 창작에도 심혈을 기울이기를 희망합니다.(계간시원 제 호)
한국시의 영원하신 큰 별
--황금찬 선생님 백수 축하
후백(后白) 황금찬 선생님께서 백수(白壽)를 맞으셨다. 항상 건강하신 명언과 강의로 우리 후학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인자한 모습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내가 월간 『心象』에 신인상을 응모했을 때 심사위원으로서 작품을 선(選)해 주신 사제(師弟)의 인연으로 살아오면서 이 지구상에 하나 밖에 없는 심상해변시인학교 교장 재임시에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기에 나도 이만큼 나의 시를 성숙시키고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늦은 봄, 내가 월간 『심상』신인상에 당선하고 상패를 받기 위해 찾아간 원효로 박목월 시인댁에서였다. 그는 신인상 심사위원장으로서 나에게 시상을 했다. 목월 시인의 미망인 유익순 여사와 장남 박동규 교수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상패를 주면서 ‘좋은 시 많이 써서 훌륭한 시인이 되십시오. 정말 축하합니다.’는 격려와 함께 당시 그의 온화한 얼굴과 정겨운 말씀에서 진정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대학교 졸업을 23일 앞두고 애지중지하던 딸 ‘애리’를 떠나보내고 딸의 죽음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아내마저 먼저 보내야 했다. 그는 절규하면서 기도했다. ‘신이여! 여기 장미꽃송이를 당신의 손으로 받아주시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 / 밤 하늘의 별빛만 / 네 눈빛처럼 박혀 있구나 // 새벽녘 / 너의 창 앞을 지날라치면 / 언제나 애처럽게 들리던 / 너의 앓음소리 / 그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 그 어느 땐가 네가 건강한 날을 향유하였을 때 / 그 창 앞에는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 나비부인중의 어떤 개인 날이 / 조용히 들리기도 했었다 // 네가 그 창 앞에서 / 마지막 숨을 걷어갈 때 / 한 개의 유성이 / 긴 꼬리를 끌고 / 창 저쪽으로 흘러갔다 // 다 잠든 밤 / 내 홀로 네 창 앞에 서서 / 네 이름을 불러본다 / 애리야! 애리야! 애리야! 하고 / 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 / 대답이 없구나 //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 진정 너의 창이 잠들었구나 // 네 창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나 / 모두 부질없구나.
그는 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창 앞에서 애절하게 딸 ‘애리’를 불러 보았으나 ‘모두 부질없’다는 작품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를 지금도 되새기는지 모를 일이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시뿐만 아니라, 삶에도 사랑이라는 신념의 구축에 많은 교훈을 주셨다. 세상이 시끄럽고 인성이 퇴보하여 나라가 어지럽다고 해도 선생님은 ‘그래도 아직은 이 세상을 살만해요. 시가 있고 시인들이 많이 있으니 우리는 희망이 있어요.’ 한생을 시와 함께한 노시인다운 말씀이 아직도 아른거리고 있다.
또한 선생님은 나의 수필집에 서문을 써주시면서 칭찬을 해주시면서 격려를 해주셨고 나는 선생님의 시집 『오르페우스의 편지』의 서평을 써서 『예술세계』에 수록해서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선생님의 아들 황도제와 친구사이이다. 우리는 <응시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의 대망을 꿈꾸었다.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선생님은 시 「또 하나의 소망」에서‘생명이 있는 / 풀 한 포기와 곤충 한 마리도 / 해치지 말고 / 구름이 하늘에 날 듯 / 우리는 사랑 안에 / 언제나 있어야’라는 어조로 우리 동인들을 지도해 주셨다.
이 시대의 원로 대가 시인이신 황금찬 서생님.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정감과 사랑이 철철 넘쳐나는 시와 인생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것을 닮아야 할지. 그러나 선생님의 큰 별로서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시가흐르는서울 특집)
편운 조병화 시인의 작호 청송(聽松)
나는 편운 조병화(片雲 趙炳華) 시인이 1945년에 쓴 작품 「落葉끼리 모여 산다」를 무척 좋아했다. 시를 공부할 때 항상 참고 작품으로 곁에 두고 외우기도 했다.
낙엽에 누워 산다 /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지나간 날을 생각ㅎ지 않기로 한다 // 낙엽이 지는 하늘ㅅ가 /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 얇은 피부는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서 이미 버려지고 / 육체 가까이 또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 온다 //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 낙엽끼리 모여 산다 / 낙엽에 누워 산다 /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항상 검은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다니던 그를 길거리에서나 문학 행사장에서 만나면 가슴 설레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에 그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으나 친밀하게 자주 대하기는 어려웠다. 그후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서 혜화동 로타리 부근에 있는 그의 집필실로 찾아 갔다.
때마침 그는 인하대학교 부총장과 대학원장을 정년퇴임하고 학교에 있던 책을 옮기고 있었다. 청탁서만 전하고 그냥 돌아설 수가 없어서 하루 종일 책 정리를 도와 드렸다. 우리는 끝난 후 싸우나를 함께 하고 저녁 식사도 했다. 고맙다는 말과 그의 시집 몇 권을 선물로 주었다. 당시에는 구입할 수 없는 희귀한 시집이었다.
나는 예총에 근무하면서 그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어느날 나는 시민아파트에서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그에게 간단한 휘호를 부탁하였다.
‘日月順天 一九八八年 春 爲 聽松 金松培 詩人 片雲 趙炳華’
즉석에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聽松”이라는 아호(雅號)를 사용하게 되었다. 편운 선생님은 나에게 작호(作號)를 선물하신 것이다. 액자로 만들어 지금도 소중하게 걸어두고 감상하면서 그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322번지에서 태어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화학을 전공하고 서울고 교사, 경희대 교수, 인하대 교수, 중앙대 이사장을 거친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9년 7월에 첫 시집『버리고 싶은 遺産』(珊瑚莊 刊)을 상재하면서 우리 문단에 등장하게 된다.
또한 문단활동에서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세계시인대회 한국위원회 회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계 대회에 가장 많이 참석하고 계관시인의 영예를 안기도 했으며 아세아자유문학상과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그리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가 한국문협 이사장 재임시에 나는 예총에서 발간하는 월간『예술세계』 편집주간을 맡고 있어서 자주 만날 기회가 많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안부를 물으면 시 쓰는 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유의 허허 웃음을 뱉으며 파이프 담배를 연신 빨아댄다.
언젠가는 『월간문학』출신 ‘미래시’ 동인들과 안성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편운재(片雲齋)와 청와헌(聽蛙軒)이 있다. 편운재는 생가로서 어머니 사진을 비롯하여 졸업장, 상패, 초기의 서적들, 럭비공 등 생애에 기념이 될만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고 청와헌은 새로 지은 건물로 독서와 그림, 집필과 휴식을 하고 방문객을 맞아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곳이다.
또한 어떤 모임의 뒷풀이에서 그는 세계 각국과 국내 명승지를 일주했으나 유독 안동 하회마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주선하여 몇몇 문인들이 안동으로 갔다. 대구의 김연대 시인, 안동의 김원길 시인에게 미리 연락을 했으니 여행은 순조로웠다. 안동과 인근 문인들이 노대가 문인을 찾아와 환대하면서 시를 이야기하고 안동의 풍습과 역사를 교감했다.
그는 일행들과 하회마을 류성룡 고택, 병산서원, 의성김씨 학봉종택(鶴峰-김성일 고가)과 기념관(운장각)을 둘러본 뒤 내앞(川前)에 있는 의성김씨 종택을 보았다. 동참한 김남환, 김현숙, 김원길, 김연대 그리고 내가 의성김가라고 말하자 그는 의성김씨들 양반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는 50여권의 시집과 40여권의 수필집을 상재하고 유화 및 시화 개인전을 약 20회 여는 등 한생을 글과 그림으로 살았다. 선시집, 화집, 시론집을 비롯해서 ‘조병화시문학전집’ 10권이 학원사(1988)에서 간행되어 우리 시문학사에 영원한 등불로 남아 있다.
한편 그는 생전에 거액을 희사하여 ‘편운문학상’을 만들었다. ‘이 상은 편운 조병화 시인의 문학에 대한 순수하고 깊은 뜻에 의해서 제정된 상으로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연 우수한 시인 및 평론가에게 준다’는 목적과 같이 지난 18년 동안 우수 시인들이 수상한 바 있다.
그는 28세 때인 1949년의 『버리고 싶은 유산』 이후 인간의 존재와 고독을 주제로 말하듯 자연스러운 시를 썼던 그가 ‘어머님이 주신 노자’가 다 소진 되었는지 2003년 3월 8일, ‘그 혼자 가는 길 마지막 숙소’로 떠났다. 그는 편운재 옆 양지바른 어머니 묘소 곁에 잠들었다. 지금도 안성 난실리 버스 정류장에는 ‘꿈’ 깃발이 펄럭이고 편운재 입구에는 ‘편운 조병화문학관’이 새 건물로 우뚝 서서 그의 시혼을 빛내고 있다.
상남(尙南) 성춘복 선생님을 만나고
1980년대 초반, 열사의 <심상해변시인학교>에서 선생님은 초대시인으로, 나는 담임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그때 지방 초등학교 전체를 빌려서 개설한 여름 시인학교는 박동규 서울대 교수가 이사장, 황금찬 시인이 교장, 김광림 시인이 교감, 이명수 시인이 교무주임을 맡고 『심상』 출신들이 각반 담임시인으로 200여명의 독자들과 여름 해변의 낭만을 만끽하면서 시와 인생을 교감하는 축제에서 선생님을 우리반 초대시인으로 모셔서 문학강의를 들었던 것이 끈끈한 우정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에 『월간문학』 출신들의 모임인 <미래시인회>가 주최하는 전국 투어의 시낭송회와 문학강연회, 문학기행에 선생님과 동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래시인들과도 교감하게 되었고 특히 조병화, 박태진, 김영태 선생님을 비롯한 감태준(당시 『현대문학』 주간), 유한근(문협 사무국장), 윤석산(제주대 교수), 허형만(목포대 교수), 차한수(동아대 교수), 정성수, 김남환, 김현숙, 장 렬, 박종철 시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문단의 초년병으로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시인협회 그리고 국제펜한국본부에 입회를 주선해주어서 전국 문학행사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특히 대만에서 개최된 <아시아시인대회>에 동행하여 처음으로 외국여행의 행운도 열어주셨다. 박태진 선생님과 우리 일행은 일본 동경까지 동행하여 난생 처음으로 일본의 풍광도 만끽하였으며 그 후에도 선생님과 문협 해외세미나로 중국 상해, 북경, 백두산을 거쳐서 카자흐스탄 알마타와 러시아 쌍트베르테부르크, 모스크바 그리고 자동차로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베스트, 독일의 베를린 등을 여행하면서 나를 극진히 챙겨주셨다.
또한 그후에 어느 단체에서 <금강산 뱃길 시낭송회>에 선생님과 함께 초청되어 최초로 방문하는 북한땅 금강산행에 동승한 선실에서 지내면서 온정각, 구룡연과 만물상을 돌아보고 곳곳마다 붉은 글씨로 새겨놓은 그들의 구호에 쓴웃음을 삼킨 일 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내가 어느 개인 출판사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것을 보고 당시 예총회장 조경희 선생에게 소개하여 직원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자상함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으로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님은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과 부이사장, 이사장, 예총부회장을 재임하면서 예총회관 한 건물에서 매일 뵙게 되어 자연스럽게 교분을 더욱 공고하게 교감하게 되었고 당시 문단의 대 어른들 김동리, 조병화, 김시철, 황명, 전숙희, 허영자 선생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작품을 심취하게 되었다. 첫시집 『奧地行』은 절판이 되어 선생님 보관본을 빌려서 복사를 해서 탐독하면서 「奧地에 켜진 등불-시인 尙南」 제하에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썼다.
오랜 가뭄을 적시는 / 보슬비는 향그럽다 / 시든 풀꽃 쓰다듬는 / 따사로운 손 끝에 / 한 권의 복음서가 펼쳐지면 / 멀리서 혹은 곁에서 들리는 / 둔탁한 음절도 녹아 흐르고 / 오지에 비 젖는 날 / 숨 막히는 어린 자벌레들 / 그의 부드러운 정원에서 / 넉넉한 사랑을 손질하고 / 젖은 마음들을 말린다 // 순백의 깃 드리운 찻잔 속에 / 일렁이는 멋 가득 채우고 / 아, 내 마음 끝간 데를 몰라 / 더듬어 보는 언어들 / 저만큼 앞서 걷는 / 그림자만 따라 가느니 / 쌓인 어둠 속 우리들 사랑을 위해 / 시를 위해 / 오지를 밝힌 저 등불.
그 후에 발간한 시집(현재, 내가 보관하고 있음) 『공원 파고다』 『산조』 『복사꽃제』 『네가 없는 이 하루는』 『혼자 부르는 노래』 『해적이기 해작이기』 『혼자 사는 집』 『마음의 등불』 『봉선화 꽃물』 『내 안 뜨거워』 『길 밖에서』 『반백년 나들이』 『십삼월의 뜰』 『여든의 하루를 사는 법』 등 20여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 수필집도 많이 펴내어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상남 선생님은 항상 외모를 잘 단장하는 멋쟁이 시인으로 문단에 정평이 나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눌러쓴 베레모 시인모자와 안경, Y셔츠, 목도리와 신발에 이르기까지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외형과 더불어 해박한 지식으로 문학적인 가르침에 심취한 우리 후학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면서 “성춘복 사단”이란 별칭이 있을 만큼의 한국문단의 거목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후배나 제자들과 동료들의 생일이나 집안일까지도 챙겨주는 자상한 정감이 넘치는 문단 어른으로 공경의 존재로서 각인되기도 했다. 나의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소문을 듣고 예쁜 책가방을 사주면서 축하해주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편 선생님은 그림에도 일가견을 넘쳐 화가의 경지에 도달하여 틈틈이 스케치한 것들을 모아 몇 차례의 시화전도 개최하여 문단의 관심을 모은바 있다. 나는 표구된 시화를 몇 점 구입하여 지금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는 어떤 문학단체에의 <성춘복 시인의 밤>에서 선생님의 시집 『혼자 부르는 노래』 에 대하여 “선생님의 순정적인 체취는 자아에서 파생되는 인식(주관)과 행위(주체)를 합쳐서 우리는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는 대상에 대하여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사유를 포괄함으로써 자아에 대응하는 객관성을 질감 높게 승화하고 있는 점이다.”라는 어줍잖은 논평을 해서 청중들의 박수는 물론이거니와 선생님께도 칭찬을 들은 일도 있었다.
이런 발표문은 그 이후에 발행된 <김송배 시론집> 『화해의 시학』에도 「自我와 對我의 주정적 화해」라는 제하(題下)로 수록하여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린 바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춘복 시학”을 새롭게 정리해서 우리 후학들이 그를 기리고 탐구하는 한편 우리 한국문학사에 금자탑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전언으로 글을 마쳤는데 얼마 전에 마침 박영배 시인이 평론집 『성춘복 시세계』를 발간하여 선생님의 작품세계의 전체를 자상하게 정리하여 조명하고 있어서 우리 후학들의 필독서로 남을 것으로 반가운 업적이다.
이기애 시인을 애도(哀悼)함
이기애 시인이 지난 8월 5일에 타계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잠시 인간의 운명에서 새삼스럽게 생멸(生滅)에 관한 생각을 깊게 해본다.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는 옛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이기애 시인에게서는 생의 연륜에 비해서 너무 일찍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는 애석함이 남아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하기에 생명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항상 새롭게 진실과 행복을 창출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서 전진한다. 그리고 생명은 신성하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고 창조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면서 살아가기를 여망한다.
어쩌면 이기애 시인도 이러한 가치관을 작품 속에 투영하려는 의욕이 바로 생명의 신성함에서 탐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64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운명 속에는 현실적인 갈등과 고뇌의 요소들이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이를 극복하고 타개하려는 굳은 의지와 자아를 인식하는 투철한 의식이 그를 지탱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1989년 겨울 어느 날, 대학로에서 열린 ‘문학과 창작(박제천 시인이 주관하는 모임)’ 시낭송회에서 김여정 시인의 소개로 지금까지 『심상』출신 선후배로 지내왔다.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누구보다도 문학적 열정과 강인한 의지로 작품을 창작하는 열혈 시인이었다.
그는 항상 여린 풀잎처럼 삶에 대한 연민이 고뇌로 차 있었으나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확고한 인생관을 정립하는 의식의 흐름을 작품에 다양하게 투영시키고 있었다. ‘축축한 삶의 언저리 뿌리 디밀며 / 부러질듯 부러질듯 위태로운 / 길목이 되어 서 있다(「봉익동 수채화」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위태로운 / 길목’이 그의 시적 공간이며 작품의 설정구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 관한 사유(思惟)나 지향적인 정서의 향방은 ‘흔들리는 것은 바람 탓이 아니다 /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 그대 때문입니다(「억새의 노래」중에서)’라는 자성의 어조로 그의 삶을 화해하는 시적 조화를 통해서 진실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는 심상시인회 회원이 되고 이후로 한해도 빠지지 않고 심상해변시인학교에 참가하여 독자들과의 교감을 통해서 그의 시세계는 더욱 내실있게 발전하여 첫 시집『내 안 가득한 당신』을 상재하고 이어서 『흔들리는 것은 바람 탓이 아니다』를 발간하게 된다. 나는 이 시집의 해설에서 ‘자아에 대한 끝없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수용과 회피 등의 지속적인 반복으로 연결되고 그 지혜의 축적은 곧 자아의 수용을 전제로 하는 성찰이 큰 맥을 이루고 있다’고 그의 작품의 주제를 살펴본 바가 있었다.
그가 특히 ‘앞으로만 살아가는 연습을 한다(「거울-스모그의 노래.3」중에서)’는 단정적인 언표는 삶이나 생명(혹은 존재)의 소중한 정서의 중심축이 그의 작품에서
상당한 위의(威儀)를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이어서 시집 『해가 기우는 쪽으로 머리를 두다』『오늘을 선물한다』『나무나라』등 총 다섯 권을 상재하고 그의 정서와 사유를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가 영위해온 인생과 존재의 문제를 나름대로 승화하는 작업을 끈질기게 계속해 왔다. 그는 펜클럽과 문학진흥재단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한국문협과 한국시협, 여성문인회, 목월포럼 회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시,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 결성하여 시 독자들에게 창작 지도를 해왔다.
이 험난한 현실적인 난관을 극복하면서 올곧은 시인으로 정착하려던 그 신성한 꿈은 못다 이룬 채 모든 고통과 아쉬움을 ‘죽음에 닿아 있어 살아 있는 목숨보다 내일이 먼저 추억에 닿아, 그대 중심을 향하여 단 한 번인 삶, 그 순간을 확 열었으나-중략-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는 그의 시처럼 영원히 묻어두고 말았다. 이제 그는 이승을 떠났다. 이 세상 현실적 갈등과 병고(病苦)의 아픔을 모두 거둔 채 저승의 어느 조용한 ‘나무나라’에서 영혼의 안락한 영면을 이루소서. (2010. 8월호 [심상])
한국 ‘수필학’ 탐구의 선지자
--운정 윤재천 선생님 미수(米壽)에
운정 선생님을 일러 ‘청바지의 신사 문인’이란 별칭으로 문단에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선생님은 청바지와 더불어 항상 젊음의 표상으로 신사의 품위를 유지하시는 모습을 나는 존경한다. 그의 작품 「청바지와 나」에서 ‘청바지는 값나가는 고급 상품이 아니다. 서양 노동자들이 즐겨 입는 작업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사회적 통념의 구속을 비교적 적게 받는 청바지에 간단한 남방차림을 일상복으로 애용하고 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오늘도 나는 청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우리들의 일상과 매우 친근한 생활방식이 담긴 그의 사유(思惟)에 더욱 흡인되고 있다.
선생님의 아호가 운정(雲亭). 구름 정자인데, 오래전부터 ‘구름까페’를 개설하여 그의 집필실과 『현대수필』 편집실로서 또는 후학들과의 학습을 통한 인생적, 문학적 담론과 더불어 진정한 문학정신을 고양하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항상 독서와 명상이 동시에 흐르는 짙은 향기가 넘치는 명소가 되었다.
선생님은 한평생을 우리 한국 ‘수필학’의 정립을 위해서 몸 바치신 분이다. 그는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약간 안이한 개념을 지우고 수필이 ‘비문학’이라는 오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필가들의 새로운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수필이 그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수필학』을 수십년째 발간 배포하는 그의 공로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나에게도 잡지를 통해서 시와 수필을 교감하는 글을 청탁하곤 했다. 『현대수필』 특집으로 ‘그림과 시가 있는 수필-다시 듣는 물소리’가 성춘복 시인의 그림과 함께 수록된 일이나 『수필은...』 이란 단행본에서 김 종 시인이 아름답게 장식한 삽화와 함께 ‘시 같은 수필’을 기획하여 일반 독자와 전국의 문인들에게 수필을 널리 알리는 일에 지금도 노익장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어서 언제나 감사함을 보내고 있다.
벌써 미수(米壽)의 춘추시란다. ‘구름까페’에서 세파의 혼란함과 부유(浮遊)에서 떠나 도인(道人)처럼 관조와 유유자적의 미덕으로 인생의 멋과 여유의 선율이 흐르는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오늘도 우뚝 서 계신다. 부디 건강하심을 기원한다.(2018. 7. 12.)
정공채 시인을 그리워함
나는 정공채(鄭孔采) 시인을 만나서 많은 담론을 가진 바는 없었다. 문협 쪽에 어떤 볼일이 있어서 방문했을 때 몇 번 만나서 문학과 문단 이야기를 이유식 평론가와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한승욱 『서울문학』발행인과 미모의 편집장 최실장과 함께 인사동 <순풍에 돛을 달고>라는 주점에서 가끔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사회 현실과 인생에 관한 훈시를 엄숙하게 경청해야 했다.
또한 피맛골 ‘소문난 집’에서도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술꾼이라고 자처하는 문사들이 모여 담소를 하거나 기고만장한 열변을 토하는 토론의 장이 되어 한승욱, 이창년, 이수화 시인과 박춘근 수필가, 오인문 소설가, 신동한 평론가 등의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항상 그를 대하면 작품「美 八軍의 車」에 대해서 궁금했다. 그것은 그가 1963년 12월호『현대문학』에 장시「美 八軍의 車」를 발표하여 우리 문단뿐만 아니라, 세간에 비상한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1,500행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도 당시의 상황으로는 주목의 대상이었지만,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그 내용이 반미주의 혹은 반정부주의라는 정치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신원조사를 당하고 결국 중앙정보부에 출두해서 곤욕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百年의 列車를 타야 할 / 그 女子는 / 그 사람이 運轉하는 / 美 八軍의 車를 탔다 // 바퀴는 나의 맨발이 못따르는 / 揮發油를 타고 / 바퀴는 / 굴러갔다. // 버드나무에 말을 / 맨 駐屯 / 資本이 / 땅 위에서 黃昏 때의 꽃밭같이 / 꽃으로 피었다 / 公主들은 / 主로 그 꽃만 좋아했다. // 그리고 / 달리는 바퀴 위의 美 八軍의 / 車 안은 / 이러한 꽃으로 가득차 / 資本은 빛나도록 달리고 있다.
이처럼「美 八軍의 車 <24>」는 우리와 백년가약을 맺어야 할 처녀들이 양공주가 되어 한반도를 석권한 미군과 자본 등에 변태적 유혹으로 우리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환유(換喩)로 처리했으나 당국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조지훈, 조연현, 김현승, 김용호 등 당시 시인과 평론가들이 반미성이 아니라,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시라는 평가로 감옥행은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는데도 자유롭지 못한 한생을 보내야 했다. 인사동에서 혹은 피맛골에서 호탕한 웃음과 때로는 후배들에게 작품과 인품을 질책하면서 호음(豪飮)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1934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58년『현대문학』에 작품「종(鐘)이 운다」,「여진(女眞)」등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시단’, ‘현실’, ‘목마시대’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해점(海店』,『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와 수필집『지금 청춘』,『비에 젖습니다』등을 상재하여 현대문학상과 시문학상 그리고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그가 일산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창년 형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병명은 무슨 암이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모님의 전언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알아보고 쾌차를 빈다고 큰소리로 말하면 알아들었는지 큰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세상 떠나면서 운다 / 그 때 태어날 때와 지금 운다 / 눈물 소리 못 내고 한두 방울 / 이 빗방울에 말도 없이 고별사를 안긴다 / 잘 있거라 내 사랑아
이 작품은『월간문학』2008년 3월호에 수록된 정공채 시인의「고별사(告別辭)」전문인데 그는 이미 이 ‘세상 떠’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러한 순박한 서정적 언어를 조용하게 띄우고 있었다.
그는 2008년 4월 30일 오랜 투병으로 한생을 마감했다. 병원 영안실에는 신세훈 시인 등이 모여 문상을 하고 그의 업적과 평소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장례절차와 장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장지는 고향인 하동으로 하고 장례는 현대시인협회장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주농림고등학교 임학과 재학 때「눈내리는 밤에」라는 작품으로 학원문학상(1950년대부터 문학 지망생들은 학원문단에 매료된 적이 있음) 최우수상을 받아서 문학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적이 있고 연세대학교 재학중에는 본격적으로 시재(詩才)를 보여「귀거래」로 제1회 연세문학상도 수상하였다.
다시 그는 대학신문 ‘연세춘추’의 문화부장과 연세문우회 회장 등으로 학내에서 일약 문학 스타로 드날리면서 시작활동을 전개하다가 1957년 11월부터 박두진 시인(추천사에서 ‘정공채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이라고 찬사를 받았음)에게 『현대문학』에 3회 추천을 받아 화려하게 문단에 나왔다.
그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美 八軍의 車」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어느 글에서 대답하고 있었다.
시의 헌팅에 있어서의 나의 경우의 일례를 본인의「美 八軍의 車」에서 들어본다. 이 시는 백 오십매에 걸친 시다. 실로 이 작품 하나를 두고 나는 약 4-5년간의 詩作 헌팅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한 2년간은 족히 내 서럽 속에서 잠재웠다. 이윽고 63년『현대문학」에 게재하였다. 이 작품의 ‘타이틀 . 네이밍’이 가리키듯 전후의 기지촌이며 전후의 풍물을 위해 나는 역시 이 전후 속에 즐겨 잠겨 있어야 했다.
이처럼 그는 정치적 발언에 관한 충동이나 작의적으로 어떤 목적에 접근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과 오직 시의 미학에 충실하고 싶어서 시인의 체험을 육화하는데 비중을 두었다고 당시 부산수산대 교수였던 강남주 교수는 그의 견해를 평론집『反應의 詩論』에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 사건 이후 번듯한 직장 하나 잡지 못했다고 했다. 그를 반미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정치적 메시지나 표현하는 시인으로 매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시집『海店』서문에 보면 시인의 정감적 언어의 절규가 몸에 배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나는 겸허를 다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나와 모국어의 시를 있게 한 지엄지애(至嚴至愛)하신 하늘과 사랑하는 내 나라 韓國에--
그는 이제 그토록 좋아하는 술 한 잔 함께 마실 수가 없다. 그의 통쾌한 화법이나 올곧은 선비풍의 어조는 우리 후학들이 동시에 어떤 마력을 느끼는 신사였음을 잊지 못한다.
그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사후에 돌아간 고향 경남 하동에서 그를 환대해서 묘지 조성과 시비를 건립해서 고향 시인을 기린다는 낭보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맘놓고 사회이야기 정치 풍자를 포함해서 시의 묘미를 발휘할 수 있겠다. 명복을 빈다.(2009. 12.)
백파 홍성유 소설가와 만남
백파 홍성유(伯坡 洪性裕) 소설가는 어떤 행사나 모임의 식사 자리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맛있게!’를 외친다. 일종의 건배제의에서 선창하는 구호이다. 동석한 일동들은 ‘즐겁게!’ 하고 후창을 외친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건배제의 구호를 ‘지화자!’ ‘조오타!’로 한 것에 대비되는 구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때 어느 일간지에 ‘맛자랑 기행’을 연재하면서 전국의 유명 음식점을 순회하고 있었기에 식도락에 관하여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건배구호를 창안(創案)하게 되었으리라.
그와 처음 만나 것은 1987년 초, 내가 예총에 입사할 때 조경희 회장 앞에서 그와 성춘복 시인이 입사보증인으로 도장을 찍어 주었을 때부터이다. 그는 문협의 이사와 예총 이사여서 거의 매일 그를 만나는 행운이 왔다.
그후 예총에서 발행하던 월간『예술계』가 어찌어찌한 사유로 198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잠시 휴식기를 거쳐 재창간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주간으로 초빙되고 나를 편집부장으로 발탁하여 계간『예술세계』를 1989년 6월에 탄생시키면서 같은 사무실에서 있게 되었다.
그는 무보수였지만 열과 성으로 잡지 만드는 일에 진두지휘했다. 필자 선정과 편집 방향 등 그동안 쌓아온 문화적 예술적 감각을 동원하여 ‘진정한 민족문화의 정립과 순수예술 창작의 활성화로 민족자주 정신의 고양을 통한 계도적 기능 확대’라는 창간 목적을 발간 지침으로 내세웠다.
그를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황 명, 김시철, 정벽봉, 성춘복 시인을 비롯하여 안장환, 유재용, 김병총, 조수비, 김녕희 등 소설가들이 매일 방문하여 나는 그들과의 교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 무형문화재(태평무)인 강선영 예총회장과 최절로 사무총장이 재임하고 있어서 무용가, 화가, 서예가들과도 많은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맛자랑 기행’ 취재가 있는 날이면 나를 동행시켰다. 물론 그의 친구나 문인들을 대동해서 탐방한 음식점에서 칙사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면 음식점 사장과의 대담이 시작된다. 주 메뉴에서부터 식당의 특징과 규모, 역사 등 세세하게 메모를 하여 다음날 집필을 하는 것이다.
그는 계간『예술세계』가 월간으로 발전할 무렵 나에게 주간직을 맡기고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소설가협회의 세미나, 문학기행, 소설 낭독회 등 행사 때마다 나를 불렀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하와이 이민 100년 기념 문학세미나, 한-터어키 문학 교류, 한-몽골 세미나, 대마도 문학기행 등에 동참하게 된 것도 그가 나를 협회 준회원으로 등록을 해놓았던 덕분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많은 소설가들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 우의를 돈독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중후한 인품과 온화한 표정으로 항상 동료와 후학들과 대화를 즐기면서 술도 마시고 여행도 함께 즐기는 낭만적 기질에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던 것이었다.
그가 고희(古稀)를 맞아서 기념문집『고희의 언덕에서-79인의 회상-내 마음 속의 백파』를 간행하고 세검정 어느 중국 요리집에서 성대하게 잔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나의 글 중에서「천년의 학」이라는 시를 그날 축시로 낭독했다.
웅비의 나래 활짝 펴고 / 창공 저 햇살로 빛나리 / 거기에 / 지혜가 넘치고 / 슬기가 충만한 거기에서 / 우리는 불타는 청운을 보았느니 / 아아, 찬연한 필봉 / 불꽃으로 일렁이는 혼이여 / 이 산하 가득 / 뜨거운 가슴 속에 무르녹아 / 흐르는 정감 / 그 물결 따라 / 거대한 옥토가 무성하리 / 한 점 이슬 / 옥구슬로 영롱하리 / 우리 모두 영원히 / 그 비상, 그 혼불을 닮으리 / 천년을 예감하는 우리의 학이여.
사실은 그와 함께 지낸 2년여의 시간을 제외하곤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옛날에 읽은「태양에 감사한다」와 비극은 없다 등 영화로 본후에 드라마로 본「장군의 아들」의 작가라는 정도의 인식뿐이었지만 그가 한국의 문단의 거목이라는 점을 알게 된었다.
어느 날 그가 들려준 에피소드 한 토막은 잊을 수가 없다. 「장군의 아들」을 집필하던 중 김두한과 기생들이 명월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기생이 ‘홍도야 울지마라’를 열창하는 대목. 그 노랫말을 글 중에 삽입해야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득 떠올린 것이 문인들 중에서 누가 이 노래를 18번으로 부르냐였다.
아. 박재삼이다. 그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새벽 2시.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집어든 박재삼 시인. 몇 마디의 인사가 끝나고 ‘아아랑을 알고아는 이아람옥에...’ ‘뭐라꼬? 잘 안들려!’ ‘그래? 아아랑을 알고아아는...’ 깜깜한 밤중에 수화기에대 대고 ‘홍도야 울지마라’를 구성지게 부르고 그는 받아 적었다고 한다.
당시 박재삼 시인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발음이 어눌한 상태였다. 정작 놀란 것은 박재삼 시인 사모님이었다. 잠자다가 일어나 전화 한 통 받더니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이 양반이 미쳤나?하는 것은 사모님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그는 후일에 사모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야구광이었다. 특히 청룡기 고교 야구를 좋아했지만, 야구에 있어서는 해설가 못지않게 일가견을 가졌다. 야구경기가 있는 날은 만사를 제폐하고 동대문야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에게는 낚시광, 그 외에도 바둑, 마작, 고스톱 등 잡기(雜技)에도 아주 능했다는 주변 문인들의 전언이다. 이처럼 그는 작가이기 전에 야구광이며 여행가이며 식도락가이며 잡기의 고수이지만 ‘신사’라는 작위가 어울린다.
또한 그는 착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다도(茶道)에 심취한 인기 소설가로서 「비극은 없다」(1958),「비극은 있다」(1973), 「장군의 아들」(1987) 등 유명한 장편소설과「한국 맛있는 집 1010점」등을 발간하여 한국문단의 큰 별로 빛났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歲月不待人)는 옛말처럼 그도 이런 섭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2002년 12월 24일 그토록 사랑하던 외동딸 다영이를 남겨둔 채 우리들 곁을 떠나 서울 우이동 카톨릭묘원에 영면하였다.
한산 최절로 시인과의 짧은 만남
나에게 한산(閑山) 최절로(崔岊鷺) 시인이 “씨뿌려 거둘지니”라는 족자(簇子)를 만들어 전해준 것은 1990년, 문인협회에서 수여한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할 때라고 기억된다. ‘爲祝 金松培詩人 尹東柱文學賞 受賞 놀뫼’라 쓰고 낙관까지 찍었다. 그는 전서(篆書)에서도 대가로 한국미술협회 쪽에서 이미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묘비명이나 시비 등의 제작의뢰를 많이 받고 있었던 시절에 오학영, 김양수 예총 사무총장에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어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의 본명은 최성민인다. 최절로라는 필명을 쓰지만, 그는 ‘한산’이라는 호를 즐겨 쓴다. 이를 순 우리말로 번역한 ‘놀뫼’도 자주 쓴다. 그가 즐겨 쓰는 전서 작품에는 언제나 그의 아호와 낙관을 대할 수 있다.
조경희 예총회장이 정무2장관으로 영전할 당시 취임했던 오학영 총장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김양수 선생이 취임했으나 전봉초 전 서울음대 학장이 임기를 마치고 강선영 무형문화재(태평무)가 회장 임기를 시작하면서 그를 사무총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그와 나는 예총의 경영에 관한 정비작업을 수행했다. 우선 각종 내부 규정을 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직제, 인사, 보수 등 기본적인 업무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규정으로 확정해 놓으면 누구라도 이 규정만 숙지하면 업무처리가 가능하도록 제도화해 나갔다.
그와는 1980년대 초에 한국문인협회 지방 심포지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호탕한 기질과 함께 많은 문우들과의 교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는 문학적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문학정신이 곧 인간의 정신이라는 철학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집이나 수상집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가 구가하는 사회적 문제라든가 인간적인 갈등이나 고뇌가 그의 시정신과 융합되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정열이 가미되고 화산이 폭발하듯이 명쾌한 어조와 논리로 문학의 근원을 해부하는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서 경남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므로 그의 필치는 예리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가 신념으로 간직한 주제들이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공감을 획득하고 있었다.
소위 남의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보이는 직업 정치인들, 그들은 단 한번도 국민의 입장에 서서 나라를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아 불만의 소리가 높다.
사랑하는 나라나 국민을 위하여 스스로 판단하여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정치인은 손 털고 국민을 무시하는 이념이 죽어가듯 먼 곳으로 가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싶다.
한 칸의 원고지를 메꾸거나 한 호의 그림을 그리고, 한 편의 곡을 쓸래도 도무지 마음 편치 않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된다면 한 치의 발전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상집『詩人의 목소리』에서 「純愛」중에서
그는 이러한 주장이나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끔직하게도 아끼는 마산고등학교 후배 문인들 중에서 김병총, 감태준, 김건일과 마포구청장을 지낸 시인 이경배 등에게 항상 문학정신과 인간정신의 일치를 강조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후에 『최절로 전서집』을 비롯하여 시집『이랑』『고발』『인간중독자』등과 점자시집『제3의 눈』과 육필시집『부재 속을 흐르는 강』과 함께 『西紀 2000年 여섯자 이人間이 어디서 살꼬하니』『춤추는 허사비』등 12권과 칼럼집『조용한 함성』, 수상집『詩人의 목소리』가 출간되어 문단의 관심을 주목하게 되었다.
대체로 살펴보면 ‘매미가 저렇게 우는 것은’, ‘물무당 유전’, ‘앵곶말 사람들’, ‘대나무 숲’, ‘가을 들길의 회향’ 그리고 ‘고향’ 연작시들은 모두가 시간과 공간이 합일된 주제로서의 서정을 화상의 의식 위에서 용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최절로 시인의 원형적 상징이나 이미지의 주체는 ‘님’이다. 이 ‘님’의 정체가 다변화되어 어떤 인식 단정은 조급하지만, ‘님’이 갖는 다의성은 곧 최절로 시인이 절대치로 인격화시킨 창조의 신비이거나 이상향의 기원에서 탐색된 새로운 정화의 한 상징으로서, 아니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 무한한 사랑과 조화를 꿈꾸는 시적 대상물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의 시집『고운님 그리는 것은』에 대한 서평을 위와 같이 “‘님’을 통한 자아 성찰과 수용 의지”라는 제목으로 써서 당시 『예술세계』에 발표하였다. 그는 나에 대한 문학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업무에는 더욱 진지한 지시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신영균 회장까지 마무리하고 예총을 떠났다. 그는 본업인 전서의 작가로 또는 시인으로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그는 한국예총 사무총장을 비롯해서『조국문학』주간직과 도서출판 ‘문단’ 대표, 한국문인협회와 한국미술협회, 한국건축가협회 그리고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서 참치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이제는 술친구도 시친구도 모두 떠나고 텅비었다고 했다. 어쩐지 혼자만 남아있다는 외로움이 예전같지 않게 엄습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술인회관’ 미완성에 따른 불미스러운 예총의 작금 사태에 대해서는 분노를 토한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만큼 준공의 성사를 보지 못하고 퇴임을 했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는 요즘의 문단 실정을 분노하고 있다. 신인들의 양산에 대해서 쓴소리를 쏟아낸다. 문인으로서의 예절뿐만 아니라, 기초 지식과 소양의 충전 없이 잡지사의 경영문제와 연관해서 신인을 뽑았으므로 기본적인 역량의 미달이라는 견해이다. 요즘 시인들은 특히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 메말라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입력된 언어만 나열되어서 창조라는 개념이 휘발해버린 불감증시대에서 겨우 살아가는 우리 시인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의 기개나 열정은 이제 많이 퇴화하고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는 모습은 세월이 어쩔 수 없이 서녘하늘 노을처럼 번지고 있었다.(2009. 6. 문학공간)
심상과 박동규 평론가와의 교감
1970년대 말, 월간 시전문지 『心象』이 주최하는 해변시인학교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박동규(朴東奎) 평론가를 만났다. 그는 박목월 대시인의 장남이기 전에 핸섬한 외모와 박식한 문학이론으로 특강을 하면 참가자들이 매료되는 정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心象』지에 신인상 투고를 준비하던 중이라서 더욱 관심 깊게 청강하고 참가 시인들과의 토론 그리고 해변시인학교 생활에도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 당시에 시전문지로『心象』이외에『詩文學』『現代詩學』이 있었고 종합 문학지로『現代文學』『月刊文學』『文學思想』등이 있었는데도 그렇게『心象』만 고집했던 것은 아마도 박목월 시인에 대한 마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목월 시인은 타계(1978년)했지만 나의 고집은 오로지 『心象』이었다.
그후 그는 카나다 교환교수로 나가 있는 동안 신인상 심사가 몇 년간 중단되어 나의 등단도 늦어지고 말았다. 그가 돌아와 신인상 시상식에 참석차 심상사에 들려서 정식 인사를 나누었고 시상식은 목월 시인 원효로 자택에서 있었다. 심사위원은 황금찬, 김광림 시인었으며 목월 시인 사모님 유익순 여사와 목월 시인 제자들인 허영자, 유안진, 이건청, 신규호, 유승우, 오세영, 신달자 시인 등 그리고 축하차 참석한 강우식, 정진규, 성춘복, 전재수, 이수화 시인, 『心象』선배인 김성춘, 이명수, 한광구, 권택명, 권달웅, 윤강로, 이상호 시인 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박동규 교수는 심상사의 가장 큰 업적인 해변시인학교를 한해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시 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이것이 올해로 30회째를 맞아 한국시단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다. 그는 나를 『心象』상임편집위원으로 지명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편집회의를 하고 술도 한 잔씩 나누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해변시인학교에서는 담임시인을 맡아서 그를 도왔다.
내가 한국예총에 근무하면서 그를 전국 순회 청소년 강연회의 연사로 초빙하여 함께 다닌 일이 있다. 그가 [TV문화가 산책]과 아침마당에 출연하는 유명인사이지만 그의 구수한 입담도 청중을 몰입하게 했다. 어느 해 여름, 경남 김해에서 강연이 예정되어 그와 나는 비행기로 떠났다. 왠일이냐. 폭우와 태풍 때문에 김해공항에 착륙을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김해에서는 문예회관 대강당에 가득 메운 청중들이 그의 유명한 강연을 기다리다가 실망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주최측에서는 이를 수습하느라 한바탕 고역을 치루었다.
또 2000년 8월에는 심상사와 재미시인협회 공동 주최 세미나가 미국 LA에서 개최되어 그와 함께 참석하여 그곳 ‘라디오 코리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시낭송을 한 후, 우리는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났다. 하루 종일 샌버나디노 산맥을 넘고 열사의 모하비 사막을 달려 콜로라도 강변 휴양도시 레플린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그랜드 캐년과 후버댐을 거쳐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라스베가스는 카지노의 도시다운 휘황한 네온에 눈이 아찔해 질뿐이었다.
나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는 원효로 목월댁으로 세배를 갔다. 거기에는 목월 선생 사모님 유익순 여사가 아들 문규, 남규와 동명이 고모와 함께 목월 문하생과 많은 시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덕담과 회고담으로 웃음꽃이 피었고 떡국과 술이 나왔다. 더러는 2층에서 고스톱을 하는지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박교수와 몇몇은 맥주집 ‘오투’나 ‘맥켄치킨’에서 뒷풀이를 하고 헤어졌다.
그후 유익순 사모님께서는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노환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내 근무처가 대학로라 가까워서 매일 문병을 갔다. 시인도 죽고 시인의 아내도 이 세상을 떠난다는 어쩌면 허무감 같은 것을 사모님은 내 두 손을 꼭 잡고 모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울음이 쏟아졌다. 사모님도 우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사모님이 운명하실 때 나는 직장의 일로 외국 출장을 가서 끝내 사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49잿날에 목월 선생님과 함께 용인공원묘원에 잠든 묘소를 찾아서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던 일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이런 일로 그는 나에게 항상 고마움을 전해 왔다.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리는 심상시창작교실에 나를 특강 강사로 부르는가 하면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과 수원 삼성반도체 주부대학에 강사로 추천하는 등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늘 고마운 일이다.
그도 서울대 교수를 정년퇴임해야 했다. 그의 ‘정년퇴임문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벌써 박동규 교수님이 정년이라니.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순리를 어쩌랴. 서초구민회관 심상창작교실에 부르고 <심상>편집회의에, 무슨 백일장 심사에, 안면도 청노루의 집에 불러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의 학문과 지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의 덕망과 지혜를 따리가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미진한 나를 “어이, 송배 형. 어때? 별일 없지?” 앞으로도 그 손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고와 서울대를 나온 문학박사이며 서울대 교수였다. 1962년에 『現代文學』에 문학평론 「카오스의 질서화 작용」과「언어 . 성격 . 행동」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고 『한국 현대소설의 성격 연구』『현대 소설의 이해』『전후 대표작 분석』『글쓰기를 두려워 말라』는 저서와 수필집『별을 밟고 오는 영혼』『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어이 송배 형. T.S 엘리엇이란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말이야. 시의 세계로 들어온 철학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 그런가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 의미하에서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거든. 사실 요즘 시에는 철학이 없어. 어떻게 생각해?’라는 평론가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다.
나는 그저 멍멍하게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시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요즘 시인들의 처절한 고뇌 혹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자기의 독백 차원을 탈피하고 새로운 가치관의 세계 탐색이 요구되는 시적 진실을 나에게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리(錦里) 이창년 시인을 애도함
-형님, 언제 만나서 식사라도 해요./ 대상포진을 앓으면서 보행이 만만찮고/ 주량도 많이 줄어서 출행이 약간 불편해서 글쎄-/ 고향 합천 대선배님과 교유는/ 80년대 초 보리수시낭송회로 거슬런다/ 황금찬 최은하 선생 등 원로 시인들과/ 시를 이야기하고 술과 담론을 즐기던/ 우리 시단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미워할 수 없는 사람아’를 부르짖으며/ 동료 후배들과 어울리던 시인 / 서울문학에서 미스 최실장을 만나고/ 한맥문학에서 김진희 회장과 만나고/ 이한세상’에서 변사또를 만나서/ -한 잔 빨자, 한 잔 빨자/ 큰 형님의 인자한 목소리는 지금도 쟁쟁한데/ 시인통신, 소문난집, 순풍에 돛달고, 시가연/ 인사동 골목골목 술집을 다 헤매어도 / 그의 흔적은 지금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너를 사랑할 시간은 더욱 많지 않구나’/ 아아, 이제 사랑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세상/ 극락의 평원에서 천주(天酒)를 즐기면서/ 이승에서 풀지 못한 시름 모두 잊어소서.
--『낭만주의자의 우수, 이창년 시인』 전문
이 작품은 <ᄒᆞᆫ맥문학>2021. 7월호에 이창년 형을 애도하는 특집으로 그를 존경하는 후배들이 모여 수록한 작품이다. 그는 2021년 4월 30일 오전 3시 30분에 영면하셨다. 을지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사진 앞에 절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지난 1주기 때에는 평소에 정답게 교류하던 후학과 지인들이 인사동 <시가연>에 모여서 대성황으로 추모의 밤을 열기도 했다.
다은 글은 <문학공간>에서 “김송배가 만난 문인들”을 연재하면서 12회째 수록한 글을 옮겨서 그와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문학공간> 2009. 5월호)
금리(錦里) 이창년(李昌年) 시인은 나의 고향 경상남도 합천 삼가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청운의 뜻을 품고 대구로 나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문학 창작 교육을 받은 우리 문단의 신사이며 재원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중반쯤 ‘보리수시낭송회’에서였다. 당시의 시낭송회는 음향시설도 없는 다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런대로 멋이 있고 낭만이 넘쳤다. 또한 문학 지망생들과 독자들이 많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황금찬, 최은하, 박현령 시인이 주축이 되어 매월 개최하는데 우리 문단에서 가장 오래된 시낭송모임이어서 초대시인도 많았다. 여기에서 이창년 시인과 통성명을 한 결과 고향 선배 시인임을 알고 무척 기뻤다. 그도 좋은 후배 하나 만났다며 한국 문단과 등단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박목월 시인이 주재하는 『심상』지에 등단을 희망하고 있으며 열심히 시 창작 공부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열심히 해서 꼭 성취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깔끔한 외모에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 어떤 사업체를 크게 경영하여 재산도 많이 모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업가가 아닌 천성적인 시인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고 있었다.
내가 등단한 후 그에게 등단 잡지를 한 권 보냈더니 이제는 정식 시인 자격으로 어떤 낭송 모임에 초대해서 자작시를 낭송하게 하고 뒤풀이 장소에서 일일이 소개하는 자상함도 잊지 않았다.
그후 우리는 문단의 문학심포지엄이나 기타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나는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특히 술자리에 동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의 호탕한 성품은 좌중을 휘어잡고 시 이론, 노래, 음담패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빈 술잔에 / 간헐적으로 발자국 소리 / 뚝뚝 떨어지고 있다 / 풀숲엔 밤이슬 촉촉하고 / 벌레 울음조차 / 멈추네 / 곧 침몰할 정적마저 / 해풍에 흔들리고 있다 / 어느 포구의 추억으로 / 낡은 거룻배 삐걱거리고 있다 / 나의 빈 술잔에
그의 작품「나의 빈 술잔에」(1991. 10. ‘河洛圖書’ 발행 제3시집『나의 빈 술잔에』수록)서 보는 바와 같이 ‘빈 술잔’에서도 인생문제와 연결하여 형상화하는 서정적 이미지가 그의 풍모와 함께 잔잔하게 풍긴다.
그를 요즘 문단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라고 부른다. 그가 기업을 경영할 당시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나 그가 통풍(痛風)으로 고생할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항상 동안(童顔)의 웃음을 잃지 않는다.
또한 그는 문우들과 선후배를 구분하지 않고 잘 어울려서 사귀고 술을 마신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문우들이 많다. 그가 주재하는 ‘이한세상’이라는 동인들도 그의 해학(諧謔)적 입담과 더불어 포용의 정으로 끌어안는다.
이 ‘이한세상’ 동인은 이창년에서 ‘이’를, 엄한정에서 ‘한’을, 변세화에서 ‘세’를, 그리고 송상욱에서 ‘상’으로 각자 이름에서 한 글자씩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이창년, 엄한정, 정송전, 이상규, 최재환, 변세화, 강우석, 황송문, 임상덕, 정명섭 시인들이 합류하여 동인지 제10집(2008)을 간행하고 상호 친목과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그는 첫 시집『바람의 門』(1980. 문예원) 발간 이후『겨울나비』『나의 빈 술잔에』『아침이슬 저녁노을』『너가 울메 나는 산이 되리』『동짓달 아흐레달』『미워할 수 없는 사람아』등을 상재했으며 에세이집『간이역』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문단활동에서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맥문학가협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거나 현재 재임 중에 있으며 한국문인산악회 문학상, 서포문학상, 한맥문학대상을 수상하였다.
이창년의 「진달래꽃 따먹고」는 자연 풍경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다. ‘꽃’이라는 상관물이 단순한 서경(敍景)의 재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시인의 전조나 심리상태와 암시가 있어서 분위기, 느낌, 간정 등의 뉘앙스를 환기시키는 일종의 협의의 서정성을 추구하는 서경시라고 할 수 있다-중략- 이창년은 그 자연 속에 자아를 동질적으로 합일시켜서 진달래꽃‘과 더불어 존재하는 자아를 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진달래꽃은 진작에 피었지만’ 또는 ‘진달래꽃은 진작에 시들었지만’ ‘백년’ ‘천년’의 시간성은 바로 미적정서로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중략- 이창년은 ‘아무렴 어떠랴’라는 초월이 주관과 객관이 처음부터 미분화되어 있어서 ‘꽃’과의 공존이라는 대명제를 주제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어느 문학지에 발표한 작품「진달래꽃 따먹고」에 대해서 내가 쓴 월평의 일부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한데 대해서 묵묵부답이었다. 못마땅해서 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묵언(黙言)은 바로 긍정이며 수용이라며 ‘언제 한 잔 빨자’(그는 술 한 잔 먹자는 말을 이처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그와 나는 날을 잡아서 인사동 술집 ‘순풍에 돛을 달고’(여기가 그의 단골집이었다)에서 만났다. 문단 이야기, 고향 이야기 등을 섞어서 취하도록 마시면서 내린 결론은 그의 작품 전체에 대한 ‘이창년론’을 내가 쓴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는 고향 합천문인협회에서 출향문인을 초청해서 문학강연과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그와 내가 초청을 받고 동행했다. 행사가 끝난 후 해인사관광호텔에 투숙했는데 오랜만에 고향에 왔으니 자신의 생가(합천군 삼가면 금리)를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선산에 들려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읍내에서 합류하여 상경길에 올랐다. 직행버스가 없어서 대구로 나가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그의 에세이집『간이역』에 수록된 글들을 들려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달플 때도 있었고 즐거울 때도 있었다. 질퍽이는 늪에서 부초잡고 허우적거리기도 하였고 눈부신 태양아래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인생이란 궤도 위를 시름시름 달리면서 낯선 간이역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스쳐간 한적한 간이역의 풍경이 선연히 떠오르며 지금은 그리움이 되었다.
그의 넋두리처럼 들렸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이젠 고희를 넘어선 세월 앞에 서 있다. 은발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고 눌러쓴 모자가 그의 인생과 시의 연륜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형님, 언제 한 잔 빱시다.’ ‘좋지’라는 그의 낭만적인 대답은 그의 변함없는 성품으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벌써 떠나는 문인들이 많은가
일찍이 누군가가 생(生)과 사(死)에 관한 문제의 해답은 이전에 살고 있었던 지혜 높은 사람들에게서 얻는다고 했다. 실제로 먼저 떠나간 선인(先人)들에게서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들을 깨우치면서 나의 생명은 유지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사의 문제는 태어남과 죽음의 중간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삶이 하나의 습관으로 지탱해 왔던 것이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중병(重病)으로 일찍 별세하는 운명에서 처음으로 직접 아버지의 주검을 대할 수 있었는데 사람을 이렇게 죽음의 길로 떠나 저승으로 떠나는구니 하는 어린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후 할아버지와 백부모님과 종형(從兄) 몇 분이 먼저 떠나더니 이제는 나의 어머니와 친형과 친동생이 차례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초상집 근처를 지나가지도 못했지만 상여가 나가는 모습은 피해서 숨었던 기억이 나고 동구밖 길모퉁이에 있는 상여집을 뀌신 나온다고 멀리 돌아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데 부모형제와 사별(死別)하는 현장을 자주 대하면서 인간의 생명 곧 죽음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지혜를 알게 되엇던 것이다.
나는 문단 40여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시상지에 등단하면서 발행인과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심상시인회와 목월문학 포럼 등에서부터 한국예총에서 약 20년간 근무하고 한국문인협회에서 약 12년여의 기간 동안 문단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보니 많은 문인들과 공사간(公私間)에 많은 교감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는 문단의 어른들과 선배들 그리고 동료들, 후배문인들과 함께 문학행사를 하거나 무슨 모임 등에서 서로 소통(疏通)하면서 친분(親分)으로 발전하여 우의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아쉽게도 이러한 지인 문인들의 부음(訃音)을 많이 대하게 되면서 어쩐지 나 자신도 공허의식 내지는 생명의 한계점이 어디까지 인지를 스스로 자문하기도 한다.
우리 문단에서도 나와 교감이 있었고 더러는 친구처럼 지낸 동료와 선배들이 운명을 달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당황하면서 안타까워한 일이 많았다. 우선 <응시>동인으로 약 20년간 함께 시의 길을 걸어온 동인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윤강원, 김병학, 이무원, 황도제, 채수영 동인이 먼저 떠났다.
문단에서 평소에 존경했던 어른들, 황금찬, 조경희, 조병화, 전숙희, 박태진, 황 명, 김시철, 문덕수, 김윤성, 김남조, 홍윤숙, 박화목, 박재삼, 원영동, 윤병로, 신동한, 홍성유, 정을병, 박현령, 박명자, 함혜련, 박곤걸, 윤종혁, 장윤익, 진을주, 장백일, 최절로, 장석향, 원형갑, 장 호, 이성교, 성찬경, 구인환, 이 탄, 오학영, 김종길, 빅일동, 박재능, 박명용, 정공채, 김해성, 김경린, 강석호, 강 민, 이창년, 이근식, 하유상, 홍완기 김영태, 김병권, 최승범, 서영수, 이영호, 성기조, 신기선, 신동춘 김남환 정진규, 오탁번, 조정권, 이은방, 오찬식, 추은희, 추영수, 한기팔, 이상개 선생 등이 떠났고 소설가 유재용, 안장환, 김병총, 이길융, 염재만, 정병국, 김창동 형 등도 떠났다.
이 밖에도 더욱 가까이 친교로 문학을 나누었던 전재수, 신규호, 이수화, 박 찬, 이효녕, 송명진, 김용오, 문인수, 김솔아, 한택수, 이충이, 김종섭, 이 숙, 김기문, 배기정, 이기애, 신현정, 정공량, 정희수, 김정웅, 김종철, 박제천, 김건일, 박성배, 김윤호 등 아직도 문단 생활을 지속해야 할 청춘에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먼 길을 떠났다.
나는 직접 망자(亡者)의 빈소(殯所-대체로 병원 장례식장)로 문상(問喪)도 많이 다녔고 더러는 조전(弔電)을 치거나 조사(弔辭)와 조시(弔詩) 또는 추모시 등도 많이 써서 우편으로 또는 이메일로 보내어 유가족을 위로하거나 조문(弔問)의 예를 표시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는 연세가 많아서 수명을 다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병고(病苦)로 고생을 하신 분도 있고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떠나는 이도 많이 있었다.
이처럼 시중에서 회자(膾炙)되는 담론은 문인들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책상에서 컴퓨터와 씨름해서 운동 부족이 발병의 원인이라고 말한자다. 대체로 살펴보면 내 주변의 주당(酒黨)들도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편이고 먼저 가신 이들도 모두 자기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않고 무슨 낭만이다, 풍류다 하면서 생사를 초월하는 기품(氣品)들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들어서 문상(問喪)을 가는 일이 많아졌다
절친(切親)이 이승을 하직한 장례식장에는
모두들 조의(弔意)만 표하고 나갔는지
상주들만 썰렁하게 조문(弔問)을 받고 있다
할 일 못다 이룬 채 훌쩍 떠나버린 그의 영정은
그래도 웃음 가득 머금은 표정으로
생사의 행간에서 진한 눈물로 정을 나눈다
내일이면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변할 육신
지옥이냐 극락이냐 따져볼 겨를도 없이
납골당 유골함에서 그는 잠들어 있겠지
잘 가시오.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고통을
훌훌 벗어던지고 영원한 안식을 구하겠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하직의 슬픈 섭리
마지막 곡성(哭聲)이 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하직(下直)에 대하여」
나는 어줍잖은 시 한편을 쓰면서 먼저 일생을 마치신 선현들의 글들을 읽고 문학 공부를 하던 문학지망생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읽고 감명 받았던 책들을 지금도 보관하고 틈나는 대로 다시 읽곤 한다.
김동리(수필집) 『사랑의 샘은 곳마다 솟고』 김승옥(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
김동길(수필집) 『고독한 영혼과의 대화』 조지훈(산문집) 시인의 눈
법성스님(수필집) 『마음 한번 돌리니 극락이 예 있구나』
구 상(수필집) 『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조연현(산문집) 『문학과 사상과 인생』
이병주(산문집) 『허와 실의 인간학 』 백 철 <문학전집 4권>
김형석 에세이 전작집 5권 이어령 <전작집 12권>
하근찬(소설집) 『싯달다』 이희승(수필집) 『메아리 없는 넋두리』
이어령(수필집) <한국과 한국인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