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이 비명횡사한 후에 고려 제32대 임금으로 우(禑)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불과 열 살밖에 안 되는 우왕이다. 우왕의 할머니 뻘인 명덕태후가 대리 청정을 하고 있었다. 명덕태후가 운명하기 직전 우왕에게 지나친 여색을 삼가야 사직이 오래 보존될 것이라는 당부의 유언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우왕은 태후의 유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매사냥을 다니는 데 차츰 재미를 들였다. 들판에서 잡은 꿩을 안주삼아 주색놀이에 탐닉했다. 당시 이런 행태를 걱정하며 간하는 신하는 오로지 최영과 몇몇 신하뿐이었다. 당시 고려는 왕뿐만 아니라 벼슬아치,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몽고의 영향을 받아 윤리 기강이 매우 문란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정 부패가 만연했다.황희 아버지 황군서는 도당(都堂)에 소속되어 있었다. 성격이 워낙 강직하여 자신보다도 윗자리에 앉은 분들이 많았지만 왕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로인해 임금 주변의 아첨배들이 황군서를 죄를 물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최영이 나서서 적극 변론하여 파직 당하는 것으로 화를 면하였다. 그리고 최영이 주청으로 몇 개월 후에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부임하였다. 황희는 17세의 나이로 가까운 암자에 들어가 밤낮으로 공부만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중에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 벼슬을 지내는 최안(崔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황희의 아버지와 서로 교류하던 최영이 어느날 황희를 보고 흡족하게 여기면서 중매를 섬으로써 이루어졌다. 황희를 처음 대하는 자리에서 최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기골이 비범하니 후에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겠소이다. 내 집안에 조카뻘 되는 여식이 하나 있는데, 중매를 하리다.” 최영은 황군서의 인간성을 좋아하였고, 황희의 아버지 황군서는 청렴 강직하고 애국충절의 귀감이며 나라의 대들보인 최영 장군을 존경해 마지 않았다. 그후 일사천리로 혼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황희도 말로 만 듣던 최영 장군을 직접 뵙고 큰 영광으로 여기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황희는 다짐을 하게된다.
“저토록 훌륭하신 어른을 생전에 뵐 수 있다니 큰 영광이로다. 나도 열심히 학문에 힘써 저토록 훌륭한 어른을 본받아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살아가리라. ”황희는 예절바르고 교양이 높은 부인을 만나 더욱더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황희의 나이 어느덧 24세 되던 9월 최씨부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아내 최씨가 딸을 낳은 후 뒤끝이 안 좋아 시름시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황희는 17세 때 최씨와 결혼하여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라 집안을 전혀 돌보지 못했다.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기에 2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운명하기 직전 최씨 부인은 말했다.
“서방님, 비록 가난했어도 저는 행복했어요. 그 동안 제대로 내조하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서방님은 더욱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명이 짫아서 떠나가니 죄 많은 여자예요, 그동안 서방님이 제게 주셨던 따뜻한 정을 죽더라도 가슴에 품고 갑니다. 앞으로 저를 잊으시고 새 부인을 맞아 부디 행복하세요. 제가 낳은 딸아이 잘 키워주세요. 이것이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러면 저는 지하에서 감사할 거예요.”
황희는 “그동안 너무 고생만 시켰는데...., 곧 문과에 급제하여 부인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하려 했는데...., 창백하고 파리한 부인의 야윈 볼과 앙상한 손을 어루만지며 그동안 고생만 하고....., ”라며 말을 잊지 못하고 위로하였다. 숨을 거둔 최씨 부인의 무덤을 황씨 선영이 있는 양지바른 곳에다 마련했다. 황희는 슬픈 감정을 애써 억제하며 이 깊은 슬픔을 공부로 달래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길을 떠나기 전에 최영 장군을 찾아갔다. 최영 장군은 일흔에 가까운 나라의 원로 대신이었지만, 아직도 용맹스럽고 장군다운 위엄과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청빈하게 지내는 모습에 황희는 항상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시중 대감께(최영 장군)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귀한 집안의 따님을 주셨는데 일찍 보냈으니 이 죄를 무엇으로 받아야 하올지.......”황희가 이렇게 말하며 큰절을 올렸으나 최영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던 최영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명은 재천인데 너무 슬퍼 마시게,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렇게 나약한 자네를 원한 것이 아닐세, 적어도 장차 국가의 동량(棟梁: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이 되려면 가벼이 행동을 하거나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일세. 그 심정 알지 못하는 바 아니나 앞으로는 언행에 심사숙고하고 천금처럼 소중하고 무겁게, 한 번 결단을 내리면 신속히 실행하게. 지금 나라는 안팎으로 어지러운데 인재가 부족하다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다 나름대로의 사명을 부여하는 법이네. 스스로 매사를 결단하고 나약하게 보여서는 안되네.”, “그럼 잘 가게 앞으로는 그런 일로 나를 찾아오지 마시게, 친분 있는 관계로서 명색이 국가 대신이 내 집에 드라들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쉽지, 자칫하면 인정에 치우쳐 공과 사에 있어 공정함음 그르칠 우려가 있으니까.....문(文)이든 무(武)이든 우선 실력과 인품이 겸비되어야지.”
“시중대감님의 가르침,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아 실행하겠습니다.” 황희는 새삼스럽게 최영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올랐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황희는 집으로 돌아와 길을 떠나겠다는 자신의 뜻을 여쭈었다. 아울러 최영을 찾아뵌 소감도 말씀드렸다. 소자는 아직 문과 급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처럼 결심을 하고 조용히 암자로 들어가 공부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자 “갓 태어난 아기는 이 어미와 유모가 잘 기를테니 걱정 말고 몸 성히 다녀오너라.”고 하자 황희는 두 분께 하직인사를 올리고 다음날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아내의 무덤을 찾은 황희는 미리 준비한 술과 간단한 안주를 차려놓고 재문을 지어 아내의 영혼을 위로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아내의 무덤은 아직 흙이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 부모님께서 애통하게 여길까 봐 속으로 참아왔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울고 또 울기를 반복하다가 지친 나머지 목이 쉬고 기진맥진하였다. 울다가 지쳐 무덤에 쓰러져 잠시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들어 보니 눈앞에는 죽장망혜에 삿갓을 쓴 비승비속의 차림으로 황희를 내려다 보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황희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던 이 이인(異人)을 10여 년 전에(당시 12세)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황희가 이 이인을 만나게 된 것은 이전에 신돈 일당의 목이 장대에 꿰어진 것을 보았고, 이번에는 최만생과 홍윤이 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공민왕을 시해한 사건으로 갈갈이 찢겨져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때 이 낭인(浪人)이 석양이 넘실대는 바위 위헤서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피리를 불고 있었다. 황희가 다가가 누구신지를 묻자 “내가 누군지 알 필요는 없다, 다만 네게 몇 마디 할말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너는 곧 벼슬길에 나가게 될 것이니라. 그러나 후일을 도모하여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적당한 때에 물러나와 다시 학문을 더 연마하여라. 지금은 난세니라, 고려는 멀잖아 그 국운이 다할 것이다. 너는 장차 새 나라가 열릴 때 소명을 받을 큰 그릇이니라, 후일에 새나라에서 중용되거든 항상 임금의 그긋됨을 바로 잡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신도일당이나 오늘의 처형된 자들이나 모두 잘못된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 선정을 베푸는 편에서 국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황희는 무슨 연유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자신에게 막중한 임무와 소명감을 깨우치고자 하는지를 여쭈었다.
“아직은 밝히기가 시기 상조이니라. 멀잖아 내 뜻을 스스로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삿갓을 쓴 이 이인은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어디론가 훌쩍 가버린 것이었다. 이때 황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때 만났던 이인이 바로 오늘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황희가 뉘시냐고 묻는말에 “나는 지우도사(知牛道士)의 제자되는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것이다.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황희가 상처한 일로 비통한 심정에 젖어 마음이 상할 것을 미리알고 스승인 지우도사의 명을 받고 황희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당시의 황희의 심정은 ”저는 지금 비통한 심정에 젖어 그저 당장이라도 죽은 아내를 따라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받은 백운거사는 “허허 나도 그 심정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오. 나도 그토록 가슴 아픈 이별을 한 사람이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도 모르니, 한번 들어보구려. 지우도사는 황희가 상처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이곳으로 나를 보내어 공(황희)을 위로하라고 하셨소.”
이 말에 황희는 : 그렇다면 꼭 뵙고자 합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백운거사 : “아니오, 오늘은 그냥 나와 이야기 합시다. 인연이 있으니 훗날에 만날 수 있을 것이오. 나의 속명(俗名)은 이유생(李洧生)이라고 하오. 선도계에 입문하기까지의 사연은 참으로 절실하고 가슴아픈 것이었소.”
이렇게 운을 땐 백운거사는 자신의 지난날의 신상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치 황희를 나라의 선각자이자 민족의 큰 스승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중에 있기라도 한듯 하늘과 땅, 우주 만물이 그를 시험하고 큰 인물로 성장토록 인도하고 있다. 과연 황희는 하늘이 내린 인물인가?
다음에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