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원선사경책(山大圓禪師警策)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이 연루됨(形累)을 면하지 못하니,
부모께서 물려주신 몸을 이어 받고
뭇 인연에 의지하여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사대四大가 [이 몸을] 부지하여 나가지만
항상 서로 어기고 등지는 까닭에
무상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과 더불어 기약하지 못하고
아침에 있다가도 저녁이면 없어지니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봄날의 서리나 새벽의 이슬과도 같아서
잠깐 사이에 곧 사라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 속의 등나무가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찰나찰나가 신속하여 한 순간에 숨을 돌리면
곧 내생來生인데 어찌 편안히 있으면서 헛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부모를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지도 않고,
육친六親도 굳이 버리고,
나라를 편안히 다스리지도 못하고,
가업의 상속마저 문득 던져버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멀리 떠나와서
머리를 깎고 스승으로부터 계를 받았으면
안으로는 생각을 이기는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밖으로는 다투지 않는 덕행을 넓힘으로써
티끌세상을 멀리 벗어나서 해탈의 기약을 바래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겨우 계를 받은 정도에 올라서서
문득 [나는 비구이다]라고 말하며
시주들이 바라는 바가 있는 상주물常住物만 먹고 쓰면서
그 온 곳을 헤아려 생각하지도 않고
[법이 그러하니 공양을 받음이 합당하다]라고 일컬으며,
먹고 나서는 머리를 맞대고 시끄럽게 떠듦에
단지 세간의 잡된 말들만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것은 곧 한 때의 쾌락을 뒤쫓음에 있어서
쾌락이 고통의 원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세속의 인연(塵緣)만을 쫓음에
일찍이 반성하지 못하였으니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날수록 받아 쓴 것은 점차 많아지고
시주의 은혜는 두터워만 지는데,
여차하면 한 해가 지나가건만 버리고
여윌 생각은 하지 않으니 쌓이고 모인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도 헛된 몸뚱이만 보호해 지키는구나.
지도하는 스승이 글(勅)을 보내어
비구들을 경계하고 권면하기를
[나아가 도를 배우는 자들은 몸가짐을 엄히 하되
세 가지 상주물은 부족한 듯 하게 하라] 하셨거늘,
사람들이 대체로 여기에 대해서
그 맛을 탐내어 쉬지 않음에 해가 지고 달이 뜨니
바람결에 머리는 허옇게 세고 만다.
뒤에 배우는 자들이 아직 요지(旨趣)를 듣지 못했으면
응당 선지식先知識에게 널리 물어야 할 것이거늘,
출가하였다고 일컬으며
어찌 옷과 음식을 귀히 여겨 추구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먼저 계율을 제정하여
처음으로 계도하고 몽매함을 깨우쳐 주심에
그 궤칙軌則과 위의威儀는 깨끗하기가
마치 얼음이나 눈과 같아서 그치고 지키며
짓고 범하는 것으로 처음 먹은 마음(初發心)을 단속함에
미세한 조강條綱과 전장典章으로
모든 외람된 폐단을 개혁하셨으나,
계율을 설파하는 자리에
일찍이 외람되게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궁극적인 진리가 되는
최상의 법을 어찌 밝히고 분별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일생을 헛되이 보내면 그 후회를 뒤쫓기 어려우며,
교리敎理에 일찍이 마음을 두지 않으면
현묘한 도에 계합하여 깨달을 원인이 없다.
나이를 먹고 승랍僧臘이 많아지기에 이르면
빈 뱃속에 마음만 높아져서 어진 벗과
친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오직 거만할 줄만 알며,
불법과 계율을 깨닫지 못하므로 이를 가다듬을 마음도 전혀 없다.
혹은 거창한 말투와 높은 목소리로
말을 함에 법도가 없으며
위아래의 품계를 공경하지도 않으니
바라문 집단의 모임과 다를 것이 없다.
[식사 중에는] 밥그릇 소리를 내거나
식사를 마치면 먼저 일어나며,
오고 감에 있어서도 행동이 괴각스러우니
승려로서의 모습이 전혀 없다.
일어나고 앉을 때도 허둥대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혼란케하며 사사한 궤칙軌則이나
소소한 위의威儀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장차 어떻게 [스스로를] 단속하겠는가?
뒤에 새로이 배우는 사람들이 본받을 것이 없다.
겨우 깨달아 성찰하게 되면 걸핏하면 하는 말이
[나는 산 속의 승려이다]라고 하지만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여
도를 닦아 가지지 못함에
한결같이 정情을 거친 곳에 둘 뿐이다.
이와 같은 소견은 대개 처음 먹은 마음이
게으른 까닭으로 탐이나 내고 하는 일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럭저럭 보내다가
마침내 성글고도 거칠게 되니,
어느덧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해
고루하게 늙어버리고 무슨 일에 부딪히면
마치 얼굴이 담벼락에 맞닿은 것과도 같게 된다.
후학들이 물어오면 마땅히 이끌어 줄 말이 없으며,
비록 얘기한다 하더라도 전장典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간혹 업신여기는 말이라도 들으면
곧장 후생後生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그 사람을 꾸짖다가 하루아침에 병으로 누우니
병석의 온갖 고통이 얽히어 핍박함에
아침저녁으로 헤아려 생각해 보면
마음속이 혼란하고 앞 길이 망망하여 어디로 갈지를 알지 못한다.
이로부터 비로소 허물을 뉘우칠 줄 알지만
목말라 샘파는 격이니 어찌 하겠는가.
스스로 일찍이 미리 수행하지 않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여러가지 과오와 허물이 많음을 한탄하며,
죽음에 임해서는 몸부림치며 두려워 어찌할 줄을 모른다.
비단이 뚫어지면 참새는 날아가니,
식심識心이 업業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사람이 빚을 지게 되면
가장 큰 빚쟁이가 먼저 끌어당기듯이
마음의 실마리는 여러 갈래지만
무거운 쪽으로 치우쳐 떨어지기 마련이다.
무상한 살귀殺鬼는 순간순간에도 쉬지 않음에
생명은 가히 늘리지 못하고 시간은 가히 기다리지 않으니,
인계人界나 천계天界나 삼계三界에 있어서
응당 이를 면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몸을 받은 것이
몇 겁劫이나 되었는지 논할 것도 없이,
그 고통을 느낌에 탄식하고 놀라며
슬픔은 마음을 저며내니 어찌 입을 다물고
경책의 말을 전하지 않을 것인가.
한스러운 것은 상법像法과
계법季法의 시기에 함께 태어나
성인의 시기와 요원히 멀고 불법은 생소해져
사람들이 대체로 게으르고 나태해진 것이니,
간략하게 소견을 펴서
뒤에 오는 이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만약 자만을 없애지 아니하면
진실로 윤회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