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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교회의 일체성
1-6절, 겸손, 사랑, 연합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므로’라는 뜻이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는 말은 바울이 주를 위해 또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옥에 갇힌 자로서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보인다. ‘권한다’는 말은 권위적으로 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부드럽게 말함을 나타낸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는 단지 전도자의 음성을 통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셨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5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사랑과 거룩의 삶임을 증거한다. 그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의 삶으로 표현한다.
우선, 우리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해야 한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또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이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를 깨달은 자라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6-8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신 주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셨고 속죄제물로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또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고린도전서 13:4, 7,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조급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린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아야 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셨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그 아들을 오래 기다리며 참으며 용납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으시며 용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오래 참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또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 ‘평안’은 ‘화평’이라고도 번역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불화와 분열은 좋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0에서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악들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요한일서 3:15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헤노테스)’이라는 말은 ‘성령의 하나이심’이라는 말인데, 한글성경대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모든 성도는 그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말은 사람의 연약함을 전제한다. 성도들도 사람이며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교회가 분열하기 쉽고 성도들이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체성은 불신앙과 오류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사귀리요]”라고 말했고, 또 에베소서 5:11에서는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하였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바른 믿음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일치하고 연합해야 한다.
[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세상에 교회들이 많고 교파들이 많아도 또 성도가 속한 교회는 각각 달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이며 모든 성도는 그 한 교회의 교인이다. 택함 받은 죄인들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으로 이 한 몸 안으로 들어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큰 죄를 짓고 회개치 않아 제명, 출교를 받기 전까지 다 그 한 몸인 교회에 속한다.
성령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택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여 구원하는 자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중생(重生)시켜 구주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모든 성도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 격려자, 권면자이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잘못을 책망하시고 부흥케 하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는 성령 말고 다른 영들, 곧 사탄과 악령들이 있다. 그들이 곧 미혹의 영들, 속이는 영들, 거짓말하는 영들, 이단의 영들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에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은 많은 비진리들과 거짓된 요소들이 포용되고 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요 14:17) 모든 일을 성경 교훈대로 행하신다. 그는 성경의 교훈에서 이탈하거나 성경 교훈을 넘어서거나 성경 교훈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지 않으신다. 참된 성령 운동은 에스라 때의 부흥운동처럼 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강해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의 충실한 해석과 실천이 없는 운동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일 수 없다.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소망으로 부르셨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의 영생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적, 물질적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바라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장차 영광 가운데 드러날 일들을 소망하며 산다(고후 4:16-18). 예수님 믿는 모든 성도는 다 이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이다.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주께서도 한 분이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오늘날 불신앙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에 불과하며 그런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증거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장차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증거된 이 예수님 외에 다른 주님이 없다. 그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으시고 죄가 없고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신 사람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셨고 우리의 경배와 찬송과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주님이시다.
믿음도 하나이다. 물론, 이단과 정통 신앙은 다르다. 천주교의 믿음과 개신교의 믿음은 다르다. 자유주의의 믿음과 보수주의의 믿음은 다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각종 이단 사설들은 다르다. 물론 개신교회들 안에도 교파들 간에 믿는 내용의 차이가 있고, 한 교파 안에서도 작은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개신교회들 내에는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에 일치가 있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하는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그의 신성(神性),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대속, 부활, 재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한 죄인들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영생, 천국과 지옥 등을 믿는다. 여기에 확실히 역사적 기독교회에 믿음의 일치가 있다.
세례도 하나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한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요일 1:7).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세례밖에 없다.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만유로 말미암으시고] 만유[우리 모두]3)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님께서도 한 분이시다. 영원자존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그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홀로 섭리하신다. 그 외의 모든 신들은 다 거짓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참되시다. 그는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만유’는 ‘모든 것’ 혹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원천이시며 만유 위에 초월해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특히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 2:5-8). 이것은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덕이며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 매우 요긴한 덕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 13:4). 사랑은 상대방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그가 깨닫기를 기다려주며 그가 깨닫고 사과할 때 용서해주고 그를 용납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런 인내와 사랑을 가져야 한다. 에베소서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셋째로, 우리는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과 한 주님과 한 성령님을 믿고 섬기며 한 소망과 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한 세례를 받았고 한 몸이 되었다. 우리는 범사에 또 항상 겸손하며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고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7-16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감
[7-8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된 교회를 완성하시기 위해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신다. 이것은 특히 봉사의 직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교회의 직분들은 그가 주신 다양한 은사들에 따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메시아 사역을 예언한 시편 68편(68:18)을 인용함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라는 말은 메시아의 원수 곧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에 대한 말씀이라고 보인다. 시편 본문은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는다’고 표현했으나,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전리품들을 취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셨음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먼저]4)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키고, ‘그가 먼저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키든지 그가 무덤 속에 묻히셨던 일을 가리킨다.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여 들어가신 천국은 지극히 높은 하늘임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다(고후 1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목적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대로 구원을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신다는 뜻이라고 본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주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직분은 ‘사도’이었다. 그 직분은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 주어진 직분이었다. 원문 신약성경에서 예외적으로 바나바도 두 번 사도로 불리었다(행 14:4, 14). 사도는 주께서 친히 세우신 자로서 복음의 선포자요 해설자이었다(롬 1:1).
‘선지자’는 사도들처럼 복음 진리의 계시와 은혜를 받은 직분이었다. 사도행전 15:32의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이었다. 선지자의 사역은 미래의 예언보다 현재의 교훈이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과 더불어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불렀다(엡 2:20).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이다.
‘복음 전하는 자’는 빌립, 디모데, 디도 등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했던 직분을 가리킬 것이다. 초대 교회가 뽑았던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은 ‘전도자’로 불렸고(행 21: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하였다(딤후 4:5). 오늘날에도 전도의 특별한 사명을 느끼고 그 일에 전념하는 자들, 국내외 선교사들과 개척 전도자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원문에서 ‘목사와 교사’라는 말(투스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에서 하나의 관사는 그것이 한가지 직분임을 보인다. ‘목사’라는 원어(포이멘)는 ‘(양이나 소를 치는) 목자’라는 말로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4-16). 또 그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21:16). ‘치다’는 말(포이마이노)은 ‘돌보다, 다스리다, 인도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은 양을 치는 직무를 수행한다.
목사를 ‘교사’라고 부른 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를 보인다.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모든 교리적, 윤리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목회는 무엇보다 양들을 돌아보고 성경을 충실히 가르치는 일이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과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잘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참 목사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계시된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힘써 연구하고 바르게, 충실하게, 가감 없이 가르쳐야 한다.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목사의 직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부족한 점들을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8-29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성도의 성화(聖化)의 일이다. 성화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죄로 인해 어그러진 인격을 완전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에 맞는 인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완전 성화는 성도의 삶의 목표이며 목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일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오늘날도 설교와 성경공부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성경말씀에 정통한 목사들이 필요하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딤후 3:16-17).
목사의 직무는 또 성도들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의 여러 가지 일들에 쓰시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필요로 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주일학교 교사들, 구역 권찰들, 찬양대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목사의 직무는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한 명의 영혼이 구원받을 때마다 교회라는 건물의 벽돌이 한 장 쌓여져 간다. 하나님의 택한 모든 영혼들이 다 구원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완성될 것이다.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성화(聖化), 곧 그들의 지식과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신실한 목사후보생들을 일으키며 성경과 신학으로 잘 훈련시켜야 하며, 이것은 교회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다. 이런 준비가 없다면 교회들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적인 온전한 인격이시다. 교회는 목사들의 직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자리에까지 자라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의 목표는 개인들의 성화와 온전함뿐 아니라 또한 교회적 완전에 있다. 교회 전체가 ‘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사들의 사역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들은 지교회뿐 아니라, 전체교회에 책임이 있다.
교인들의 영적 성숙과 완전은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일치된 믿음과 지식을 가져야 한다. 목사는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성도들이 일치된 믿음과 지식에 도달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본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인성의 온전함은 본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격의 모범이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교인들에게 믿음과 지식의 온전함이 필요한 까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잘못된 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린아이들처럼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방황하였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도 속고 다른 이들도 속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다시는 사람들의 교리들과 교훈들과 사상들을 따라 방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바른 지식과 믿음의 온전함이 필요하다. 성도들과 신약교회는 지식과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참된 것을 하다’는 원어(알레듀오)는 ‘참되다, 참된 말을 하다’는 뜻이다(BDAG).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는 말은 온전케 되는 방법을 보인다. 사랑과 진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사람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그 본래의 의롭고 선한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악된 옛 성품을 다 버리고 사랑과 진실 안에서 자라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임을 보인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 그의 말들과 행동들, 그의 진실과 사랑, 그의 온유와 겸손, 그의 충성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성화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의 이치를 사람의 머리와 몸에 비유한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몸을 자라게 하는 데 필수적 기관이다. 머리가 상하면 몸이 계속 자랄 수 없다. 건전한 머리는 몸을 성장케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건전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몸된 교회가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 교회는 그를 통해 자라서 온전케 될 것이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 되신 그에게서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라며 사랑 안에서 건립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한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시는 힘의 근원이 되신다. 그에게서 온 몸은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어 자라게 된다. 그는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자신과 제자들을 참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에 비유하시면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그 나무로부터 도움을 입음으로써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이치를 말씀하셨다. 물론 주께서는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이런 일을 이루신다. 참으로 개인이나 교회의 영적 성장과 온전함은 사람의 인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치고 또 열심히 잘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다. 목사의 중요한 직무는 교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양무리를 돌보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목회 사역의 목표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과 그리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봉사의 일들을 하게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위해 의도하신 이 뜻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날도 목사들은 성경과 신조들과 신학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성경을 바르게, 열심으로 가르쳐야 하고, 또 성도들은 성경을 열심히 잘 배워 자라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성도 개개인을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전체 교회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범사에 자라고 완전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성화의 목표이실 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영적 성장의 목표이시다. 전체 교회는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온전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지교회 양무리들을 돌보는 목회의 책임뿐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책임도 가진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하며,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을 주셔서 우리로 자라며 온전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참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말만 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점점 자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것이다.
17-25절, 의와 거룩과 진실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부터 다른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특징들을 열거한다.
첫째로, 이방인들은 그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명도 모르고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모르고 허무한 것을 생각하고 행하고 있다.
[18절]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굳어짐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둘째로, 이방인들은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다. 그들은 육신적인 일들이나 물질적인 일들에는 지혜가 있을지 모르나 참으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가장 기본적 사실들인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사람의 삶의 목적과 사람의 죄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모르고 있다.
셋째로, 이방인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해 자신의 잘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대로만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게 찾지 않으며,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떠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아셀게이아 ajsevlgeia)[육욕, 호색,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넷째로, 이방인들은 도덕적 감각이 없고 자신들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도덕 의식이 없다. 그래서 이방 사회는 심히 부도덕하며 죄악된 사회가 되었다. 부도덕한 사람들의 죄악들 중 첫째는 음란이다. 사람들은 음란하고 방탕하다. 그들은 ‘모든 더러운 것’ 즉 온갖 죄악들을 행한다. 죄 없는 사회는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지만, 죄악된 세상은 갈등들과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 의는 깨끗하고 단정한 옷과 같지만, 죄는 더럽고 냄새나는 옷과 같다.
이런 점들이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들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무지하고 부도덕한 모습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말아야 한다.
[20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죄악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순종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악된 삶으로부터 회개하라고 배웠지, 이방인들의 죄악된 삶을 그대로 살라고 배우지 않았다.
[21절]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그에 대하여]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안에 진리가 있다(요 14:6). 에베소 교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듣지는 못했을 것이나 사도들을 통해 그에 대해 많이 들었고 그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본절 끝의 “받았을진대”라는 말부터 24절까지는, “받았으니 곧 . . . 입으라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즉 22절부터 24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라는 구원의 초청이었다.
[22절]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이전의 생활 방식에 대하여(KJV, NASB), 너희는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사람의 욕심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자아(自我)를 말하며 앞절들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속이는 욕심들을 따라 부패하는 삶이었다. ‘벗어버리고’라는 원어(아포데스다이)(과거부정사)는 그 행위의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구원의 사건이다. 구원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이 중생이며 회개와 믿음이다.
[23절]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영의 활동들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이다. 본절은 그 중에 특히 지식을 강조한다. 사람의 영의 활동들 중에 생각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생각의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생각이 새롭게 되었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현재부정사)는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성숙해진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의 변화는 있다. 하나님을 아는 생각, 자신의 부족을 아는 생각, 구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진다. 그 생각의 성숙은 평생 계속될 것이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새사람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의 내용은 ‘의와 참된 거룩’이다. 그것을 ‘본래의 의’라고 부른다. 구원은 범죄함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즉 그 본래의 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입으라’는 원어(엔뒤사스다이)(과거부정사)는 단회성(單回性)을 보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명하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 전에 그들이 받았던 구원 초청의 내용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초청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사람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로 옷 입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이 칭의(稱義)이다. 이 칭의(稱義)는 이제 성화(聖化)로 나아간다.
[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믿어 구원을 받아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본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을 버리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한다.
세상에는 거짓말로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산지를 속인 식자재나 인체에 해로운 식품을 파는 자, 이중장부를 쓰는 기업, 가짜 영수증, 가짜 추천서, 가짜 학위증, 가짜 증명서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자, 법정에서 위증하는 자, 가짜 취업 알선소, 가짜 결혼 소개소, 가짜 연예 기획사 등 속이는 자들이 많다.
거짓말은 나쁜 악이다. 모든 거짓의 근원은 마귀이다. 예수께서는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였었다. 거짓과 속임은 마귀의 본성이다. 마귀는 거짓으로 가득한 자이다. 세상은 마귀의 손 아래 있으므로 거짓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말하는 자들을 반드시 철저하고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하는 자들이 많지만, 성경은 그들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계 21:27; 22:15) 다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계 21:8).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거짓말은 지극히 합당치 않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삼가야 한다. 사람의 남은 죄악성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데 익숙하다. 따라서 우리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려고 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생각하며 말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만을 말하려고 해야 하며 항상 참된 것만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행위를 버려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 생각이 허무하고 깨달음이 없고 무지하며 마음이 굳어져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고 도덕적 감각이 없고 방탕하고 음란하며 모든 더러운 것들을 욕심으로 행한다. 비록 과거에 우리의 삶이 그러했을지라도, 우리는 이제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초청은, 속이는 욕심을 따라 부패하는 옛사람을 버리고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대로 그의 은혜로 모든 죄를 회개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날마다 생각의 영이 새로워져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또 모든 거짓을 버리고 서로 간에 진실한 말만 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 예수님 믿고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고 또 그때로부터 날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 가운데 생각이 더욱 성숙해지고 도덕성에 있어서 성화(聖化)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6-32절, 선함, 덕스러움, 인자함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분을 낼 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된 일들에 대해 노하신다. 주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여 성전 제사의 제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마 21:12-13).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노하며 엄히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분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정당하게 분을 낼 때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분을 낼 때 말과 행동에 실수하기 쉽다. 과격한 말, 미워하는 말, 욕설, 성급한 판단과 정죄, 싸움, 살인 등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우리는 분노할 때 그런 실수가 없도록 조금 멈추어 생각하고 기도하며 신앙적, 이성적 언행을 하도록 힘써야 하며, 죄악에 대한 미움과 분노 중에라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분을 내어도 그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도 고치지도 않는 때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있다(롬 12:19). 노를 품고 있으면 몸에도 해롭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분노의 감정은 미움, 과격한 말과 행동, 술취함, 살인 등으로 발전되며, 그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할 때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심령은 항상 온유와 평안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도 신중히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하며, 분노 중에라도 마귀가 우리를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거짓과 탐심, 또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게으른 마음에서 생기는 일이다. 그것은, 돈 벌기가 어렵고 땀 흘려 일하기는 싫기 때문에 남이 벌어 놓은 것을 훔쳐서 쉽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불의한 이익,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도둑질이 많다. 옷 도둑, 학생의 부정행위, 학자의 논문 표절, 음악이나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 기업주의 노동력 착취, 피고용인의 근무 태만 등. 우리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아야 하고, 제 손으로 수고하여 가난을 면하고 도리어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릇’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더러운’이라는 원어(사프로스)는 ‘불건전한, 나쁜’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라가’ [빈 머리, 바보]라고 말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남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고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에 대해 성경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 ‘성령,’ 혹은 ‘영’이라고 표현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시며 도덕적으로 성결하시다. 또 그는 자신이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죄인들을 거룩케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과 정신, 거룩한 마음과 거룩하게 살려는 의지를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근심하신다. 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일위신론자(一位神論者 유니테리안들)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하나님의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며 성령께서도 그러하시다. 그는 기뻐하기도 하시고 근심하기도 하신다. 그가 근심하시면 진노하실 것이다. 이사야 63:10은,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인하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문서를 확인할 때 거기에 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이다. 그 효력은 ‘구속(救贖)의 날까지’ 지속된다.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므로 우리의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보장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부족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셔서 멸망치 않고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요 3:16; 6:39-40; 10:28; 롬 8:30).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이라는 원어(피크리아)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말로 독한 생각을 뜻한다. 독한 생각에서 ‘노함과 분냄’이 나온다. 또 분노는 ‘떠듦과 훼방’으로 나타난다. ‘훼방’은 남을 악한 말로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끝으로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남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말은 남을 해치려는 의지로 발전한다. 위의 말들은 점점 심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종류의 악한 생각이지만, 그 다음에는 노함과 분냄, 그 다음에는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한 의지로 발전해 나아간다고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옛사람의 성질들이다. 이것들은 새사람이 된 성도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모든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하다’는 원어(크레스토스)는 ‘자비롭다, 친절하다’는 뜻이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프랑크노스)는 ‘동정하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인간 관계에서 취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며, 인정이 있고 동정심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본문은 서로 용서하는 자들이 되라고 교훈한다. 용서는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결함과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서로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기 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후,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14).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1만 달란트의 빚과 같고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 정도와 같다고 비유하셨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까, 한 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만 보아도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다.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는 1만 달란트와 같았다. 그것은 사람이 결코 갚을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만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한다. 정당한 분노라도 분노는 지나치거나 치우치기 쉽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범죄하기 쉽다.
둘째로,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며 선을 베풀 수 있도록 손으로 일하며 수고해야 한다. 성도는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우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 노함과 분냄, 떠듦과 훼방, 모든 악의를 다 버리고 서로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정 있는 자들이 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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