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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좋은 일꾼
1-13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1-2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고 진실한 일꾼들이 부족하므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강해져서 말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굳게 믿고 모든 죄를 버리고 마귀의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가 바울에게 들은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기적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 약속 등에 관한 것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곧 복음에 담긴 내용들이다. 위의 사실들은 ‘많은 증인 앞에서’ 확증된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많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한다. 그 사실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들이다.
기독교는 지어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예수님은 지어낸 인물이 아니다. 만일 그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지 않았고 기적들을 행하시지 않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지 않았고 40일 후에 승천하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고 많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해 증거되고 순교의 피로 확증된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충성된 사람들’이란 참으로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나 환경여건에 따라 변하는 자는 충성된 자가 아니다. 충성된 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복음 진리를 믿고 그대로 행하는 믿을 만한 자이다. 디모데는 자기가 받은 복음을 이런 충성된 자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진리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며 계승되는 방식이다. 이것이 참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이다. 교회는 이런 계승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에 전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받고 배워 자신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바르게 가르칠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경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자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3-4절] [그러므로](전통사본)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전통사본에는 없음)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 중에서 고전분투하면서 전도의 일을 하였듯이, 디모데도 이제 고난을 감당하며 일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전도는 전쟁에, 그리고 전도자들은 군인에 비유할 수 있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도 사역을 방해하며 전도자들을 핍박한다. 그러므로 전도와 교회 사역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일이다. 전도자들은 군인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군인들은 평소에 훈련에 참여하고 비상이 걸리면 언제나 출동하고 언제나 전쟁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몸이 피곤하다거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을 부른 국가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 그들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국민들은 밤에도 평안히 쉬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물론 전도자들이 자기들의 집을 내버리고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들의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6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교한다. 선수는 규칙들을 지키며 경기해야 한다. 달리기 선수는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축구 선수는 손으로 공을 만지거나 상대방 선수의 발을 걸거나 차거나 하는 반칙을 해서는 안 된다. 경기에서 이기려면, 선수들은 반드시 경기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또 복음 사역자들을 농부들에 비교한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 농사일이다. 농부들이 이런 수고를 했을 때 곡식을 거두는 기쁨과 복을 누릴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성경에 교훈된 규칙대로 행해야 하고, 부지런하게 또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한다.
[7-9절]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주시기를 원하노라](전통사본).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전도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도 증거된 바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는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고 그 인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고난 받는 그의 모든 제자들의 본이 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이 지금 고난 가운데서 일하고 있지만, 그 결말은 복된 승리일 것이다. 그들은 복되고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을 받았고 죄수로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의 복음은 갇혀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망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은 삼백년이 되지 않아서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 동안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동굴에서 신앙을 지켜 왔다. 과거에 일본 군국주의의 기독교 핍박이나 그 후 공산주의의 기독교 탄압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 없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자유의 복음이며 그 무엇도 그 자유의 복음을 매어둘 수 없었고 또 앞으로도 매어둘 수 없을 것이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은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그를 믿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구원’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한다. 구원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은 죄가 전혀 없고 의만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벧후 3:13),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이다(롬 8:18).
[11-13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지만 이 말씀은 더욱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 것이다.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면 주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3). 우리의 믿음은 보잘것없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진실하시며 신실하시고 언제나 믿을 만하시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로서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들이 받는 고난의 결과로 택한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구원은 영원하며 영광스럽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고 믿을 만한 약속의 말씀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의 종들과 직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성과 세상의 죄악된 풍조들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싸워야 한다.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둘째로, 우리는 성경적 사도적 복음 진리와 교훈들의 계대(繼代)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보수하고 후대에 전수해야 한다. 우리의 바른 교훈 전수는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며 주일학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충성된 청년들을 불러 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것이 참된 제자 훈련이며 실상 그것이 바른 신학 교육의 일이다.
셋째로,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시인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며 주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시고 함께 살고 함께 왕노릇하게 하실 것이다. 주의 종들과 교회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되기를 사모하며 주를 위해 고난도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
14-19절,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
[14절]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주](전통본문)2)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복음의 일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수고하며 인내할 것을 기억해야 하고 또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일꾼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잃어버리게 하고 결국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말다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오직 마귀가 기뻐할 뿐이다.
[15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은 1:13에 말한 ‘바른 말씀’ 곧 건전하고 유익한 말씀을 가리키며, 2:2에 언급한 ‘내게 들은 바’이며, 2:8에 말한 ‘나의 복음’이며, 2:9에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이며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옳게 분변한다’는 원어(오르도토메오)는 ‘바르게 해석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전달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근거 없이 추측하며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또 성경의 어떤 본문을 성경의 다른 곳들의 명백한 진리와 충돌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읽게 되지만, 우리가 점점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우선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하고, 각 문장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또 그 본문 앞뒤의 문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불명확한 부분들은 명확한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하였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은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이다. 일꾼이 자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다하는 일꾼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된’이라는 원어(도키몬)는 ‘시험된, 증명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며 전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바른 말씀의 봉사자가 되는 데에도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목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오래되어 다른 이들과 어린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직분자들에게도 교훈이 된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16-17절] 망령되고(베벨로스)[속되고, 불경건하고, 가치 없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강가이나)[괴저, canker(KJV), gangrene(NASB, NIV)]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주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보수하고 바르게 해석하며 불경건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변론들과 논쟁들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한 데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불경건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독한 창질’[괴저]은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해 조치하지 않으면 온 몸을 버리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암과 비슷하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이런 무서운 병과 같다. 이단이 그러하다. 교회가 이단에 대해 지혜롭고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단자들인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언급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비평함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이단자들을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절]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불경건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그들은 진리에 관해 그릇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부정하는 잘못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될 것이다. 과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 . .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3) 이것은 이단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 바르트는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니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얼마나 더 불신앙적일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대교단들과 우리나라의 몇몇 대교단들(감리교, 장로교 기장, 통합)이 이런 이단 사상들을 배격하지 않고 용납하였고,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개신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변질되고 부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배교의 큰 죄악이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과 이단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말한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열거한 진리들은 성경의 근본 진리들이며 그 외에도 더 있으며 이런 근본 진리들을 다시 논해서는 안 된다. 참된 교회는 성경의 근본 진리들 위에 세워져 있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단사설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바른 진리를 믿고 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다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이다.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성도는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는 참 성도의 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불의는 도덕적 악 뿐만 아니라, 교리적 악 곧 이단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리적, 윤리적 악에서 떠나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불경건한 이단사설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각종 이단종파들과,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확신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가리킨다.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그 진리들을 다 믿고 교리적 이단사설들과 윤리적 죄악들로부터 떠날 것이다.
20-26절, 귀히 쓰는 그릇
[20-21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큰 집’ 곧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쓰레기통으로나 버리는 물건을 두는 데 쓰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주의 종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 이단사설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교리사상적으로 깨끗해야만 한다. 그들은 모든 이단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사상, 바른 교리 사상을 가져야 주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소유한 종이다. 그런 종은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이다.
[22절]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들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 죄악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남녀 관계의 시험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비록 집주인은 진실을 알지 못하였고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것들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하지 않으려 애쓴 경건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마침내 그를 들어 가족들을 구원하는 자로 쓰셨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음’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기 믿음의 성장을 위하며 또 다른 이들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자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참된 교회이다.
참된 교회는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여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의는 모든 죄와 불의와 악에 반대되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는 성경적 행위이며, 세상 표준이나 세상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와 다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을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 온다(롬 10:17).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써 견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사랑은 모든 윤리적 선을 포함하는 가장 고상한 덕이며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이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또 우리는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교만한 마음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마 11:29). 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특히 주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그릇들을 교회에서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23-24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또 주의 종들이 소유해야 할 덕들이 있고 버려야 할 악들이 있다. 주의 종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들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용어나 명칭이나 표현상 문제로 다투는 말다툼이나, 중요성이 없는 지엽적 문제로 다투는 것이나, 세상 문제들의 변론들을 말할 것이다. 그런 변론들은 어리석은 변론들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첨가하였다. 과연 온유함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성품이다. 주의 종들이 온유한 성품이 없고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이었다. 민수기 12:3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한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눈물과 더불어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25-26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교훈, 훈계, 교정,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NASB; KJV, NIV도 뜻이 비슷함).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교훈하고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징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혹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곧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주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겨 돌아오게 하신다면 그들도 회개하여 복음 진리를 깨닫고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우리는 다 과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고 그 말씀만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와 개혁신학이 하나님의 그 바른 말씀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 말씀만 믿고 이단사설들을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적 욕망의 죄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들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교훈하며 징계해야 한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온유함으로 그를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특히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과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모든 성도들이 힘써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성화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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