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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장로의 자격
1-4절, 믿음, 지식, 영생의 소망
[1-2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낸다. 그는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었지만, 자원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복종함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바울은 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증거한다. ‘사도’(使徒)는 ‘보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가 된 목적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해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엡 1:4).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믿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6:39-40).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그 믿음을 ‘같은 믿음’[공통적 믿음]이라고 표현하며 또 에베소서 4:5에서는 ‘한 믿음’[같은 믿음]이라고 말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1에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둘째로, 바울이 사도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함에 맞는,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사람의 죄에 관한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구원에 관한 지식, 내세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믿음은 진리의 기본적 지식에 근거하고 그 기본적 사실들을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더욱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게 된다. 에베소서 4:13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고 말했고,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믿음이 덕과 지식을 갖추어야 함을 말했고(벧후 1:5) 또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교훈했다(벧후 3:18).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망이다. 사람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창 2:16-17) 영생의 소망이 암시되었었다. 만일 아담이 그 실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사함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복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또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또 그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8).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13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 영생은 가장 큰복이며 복된 소망이다.
[2-3절]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케뤼그마)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그는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및 선지자들에게 영생을 약속 혹은 암시하셨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그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다. 그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고, 이 설교의 일은 바울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이 사도들과 목사들의 직무이다. 전도 혹은 설교는 일차적으로 사도들과 목사들에게 맡겨진 직무이다.
전도는 죄인들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롬 10:17). 모든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전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도자들뿐 아니라,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를 위해 헌금해야 한다. 예배당도 이 일을 위해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이 일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명령인 전도와 설교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4절]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공통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전통본문)1) 평강[평안]이 네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진 믿음을 ‘같은 믿음, 공통적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공통적 믿음이 피부 색깔, 언어, 지방, 사회적 신분, 학력, 빈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통적 신앙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는 그것을 ‘옛신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공통적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통적 믿음,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학적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겨야 한다.
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긍휼과 평안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기원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항상 나오는 이 기원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복된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시며 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화(聖化)를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며, 또 ‘하나님의 평안’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성화에 근거하여 누리는 평안, 즉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가리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원인이며 평안은 그 구원의 결과이다. 구원 얻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날마다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믿음은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것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이다. 우리는 이 믿음을 전도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얻는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한 진리 지식을 가져야 한다. 성도의 참된 지식은 그의 경건하고 선한 인격과 삶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냉랭한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진리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지식도 전도와 설교를 통해 얻는다.
셋째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복은 영생이다. 그것은 성도의 복된 소망이다. 이 세상은 늙고 병들고 죽는 절망의 세상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이 소망도 전도와 설교를 통해 얻는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안을 이미 받았고 또 항상 사모하며 풍성하게 받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인격과 삶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루고 또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환경적 평안을 누려야 한다.
5-9절, 장로의 자격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말한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교리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사도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서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했다. ‘장로’라는 원어(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신약성경에서 목사와 장로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해 말한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장로의 자격에 대한 말씀은 디모데전서 3장의 내용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 사상이나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온전한 자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행실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장로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충실해야 한다.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좋은 인격이 아닐 것이다.
장로는 또 신실한 자녀들을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자녀들을 성경말씀대로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 자녀를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에 대해 다 적용된다. 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선함과 진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교육은 경건하고 순종하는 자녀를 만들 것이며, 그것은 믿음의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들을 성경말씀으로 바르게 충실하게 가르치며 믿음으로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자녀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있는 자녀가 될 것이다. 자녀를 보면, 그 부모의 신앙생활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7-9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관리자]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利)[이익]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신약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이며(행 20:17, 28) 그 둘이 다르거나 둘 사이에 등급이 있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에피스코포스)이라는 말은 ‘돌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감독은 교회를 돌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 곧 교회의 관리자이다. 그것은 교회 재산이나 재정을 관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신앙생활의 상태를 관리하는 자, 즉 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는지를 살피는 자이다.
한번 더, 본문은 감독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이 점이 반복해서 강조된다.
장로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자기 뜻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경의 교훈대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할 것이다.
장로는 또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은 성낼 때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고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우리는 깊이 생각한 후에 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해야 하고, 단순히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로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 취하게 될 것이다. 술 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 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10; 갈 5:21; 엡 5:18).
장로는 또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이 아내나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이지만(잠 13:24; 22:15; 23:13, 14),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또 비열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인격적이게 해야 한다(엡 6:4; 골 3:21).
장로는 또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익은 정당하지 않은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이나 투기성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우리는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려 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회 헌금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관리하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 재정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 교회의 재정은 교인들의 헌금이므로, 장로교회의 헌법대로, 목사와 장로들 즉 당회는 그것을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이 있다. 헌금을 계수하고 정리하거나 지출하는 일은 집사들이 할지라도 그 재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장로들 즉 당회의 책무이다.
장로는 또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는 또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정신을 차려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의로운 것은 성경과 이성과 양심에 비추어 정정당당한 것이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이 없는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술이나 육신적 쾌락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다.
장로는 또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9절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그래야 그가 다른 이들을 교훈하고 권면할 수 있고 또 바른 교훈을 거슬러 말하는 자를 책망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장로들, 감독들 즉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보살피고 교회를 인도하는 직분자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어야 한다. 그들은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말씀을 거스르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가 목사와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다. 모든 성도는 책망할 것이 없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해야 한다.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11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당시 그레데섬의 각 성의 교회들에는(5절)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 즉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이다. 또 헛된 말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말을 가리킨다. 또 속이는 것은 마귀적인 죄악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되고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계 21:8; 22:15).
그런데 당시 교회들 안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해이해진 교회들의 현실이었다.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였다. ‘할례당’은 할례를 주장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없었다. 복음의 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다. 그러나 복음의 바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땅 위의 교회들은 옛날부터 문제가 많은 불완전한 교회들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지식이 부족하고 성화가 불완전하며 사탄의 활동들이 맹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더러운 이(利)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리고 있었다. 복음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물질적 이익이 삶의 전부이며, 하나님 대신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들은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지만, 악한 교사들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렸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그런 일을 했던 것 같다. 말의 영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하고,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반드시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14절] 그레데인[그들 자신들]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신화들](NASB, NIV)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들]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들 자신들 중에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들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름쟁이였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근면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자들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 중에도 그런 기질을 벗어버리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악한 자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하였다(잠 27:5). 우리는 복종치 않는 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랑이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복종치 않는 악한 자들을 책망하라고 교훈한 목적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사람은 책망을 잘 받을 때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이 될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신화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들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잘 받을 때 그런 일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5-16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선한 일에 합당치 않은(NASB), 부적합한(NIV)]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들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상 그들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웠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하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그들은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말과 행위가 일치하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일이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에 부적합한 자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선행처럼 보이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해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믿는 세계에서는 선행이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선한 일을 행치 않고 악한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가 참으로 믿는 자인지 의심해볼 수 있다. 참된 신앙은 선행으로 증거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며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리며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하고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에 부적합한 자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 믿는 자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그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13절,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우리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분별하고 확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들이 그런 악한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말을 조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배반하는 악한 자들의 말을 따르지 말고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한다. 이단들이 퍼지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들이 성경 진리의 지식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지식을 가지지만, 우리가 진리의 온전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모든 헛되고 거짓된 말들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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