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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14)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15)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포르네)[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16)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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