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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형제를 사랑함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10절, 죄를 짓지 말라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7)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 복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빌 3:20-21).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변화를 소망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성도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4-5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는 불법,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죄 없으신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하마르타네이)[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하마르타논)[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계속 범죄치 않아야 한다. 원문에 ‘범죄하지,’ ‘범죄하는’이라는 말은 현재시제로서 계속적 행위를 나타낸다(NIV).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 범죄하거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 주신 구원의 새 생명은 거룩한 성향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실제로 행동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7-8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에크 투 디아볼루 에스틴)[마귀에게서 난 자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성도를 미혹케 하며 범죄케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로우시며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로우나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마귀에게 속한다’는 말은 ‘마귀에게서 난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의 근원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사람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서 난 자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5).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계속 죄를 짓지 않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도 현재시제로 계속적 행위를 나타낸다(NIV). 중생한 자도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계속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을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어지는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는 생명이요 의만을 행하려는 생명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씨가 심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가 있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이 그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때때로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엔 투토)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 점의 실천 여부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몸의 영광스런 변화를 소망한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을 입을 것이다. 우리는 그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둘째로,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천국은 죄가 전혀 없는 곳이며 그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 백성일진대,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중생한 성도의 표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중생한 성도의 표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 표는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11-24절, 형제를 사랑함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1-1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아담의 아들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가 된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위로 드러난다.
[13-15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 아래 있다는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구원받은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일 것이며, 우리는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함은 구원과 새 생명의 증표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함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침략 전쟁이나 폭탄 테러는 살인의 죄악이다. 현대의 매우 심각한 죄의 하나인 낙태도 태아 살해이다. 그러나 이런 죄악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가족 친척이나 친구 동료나 교우를 미워하는 것은 똑같이 살인의 죄악이다. 모든 살인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시고 형제 사랑의 목표는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이다. 예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는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5:13). 그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확증한다. 그것은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18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돈 있는 자가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교훈대로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기를 원한다면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돈보다 더 귀하다. 야고보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5-17).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 그는 앞에서도 진리에 대해 자주 말했다. 진리를 행함에 대해(1:6),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해(1:8; 2:4), 진리를 앎에 대해(2:21) 말하였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형제를 사랑함은 성도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 앞에서 굳세게 된다. ‘굳세게 하다’는 원어(페이도 peivqw)는 ‘확신케 하다, 평안케 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또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해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20-22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보냐 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담력을 가질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잠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잠 28:1).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는 기도의 응답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고(막 1:14-15),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행 16:31). 둘째는 주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 비유에서 그는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라고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우리는 중생할 때 주님과 영적으로 한 몸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었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즉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아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실제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의와 선을 행하고 형제를 사랑함을 실천하는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며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표, 즉 구원의 표를 가진 자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형제 사랑의 목표는 주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바와 같이 우리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며 한 구체적 실천 방법은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하는 행위이다.
셋째로,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을 얻으며, 하나님께 한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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