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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잡히심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년여의 사역 기간 중 마지막 주간의 교훈들과 사건들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마태는 일곱 장, 마가는 넉 장, 누가는 다섯 장, 요한은 여덟 장).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16절, 공모와 배신, 향유를 부음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人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목요일 밤에 가지셨다면, 이 말씀을 하신 날은 그 이틀 전, 즉 화요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넘기우실 것이다. ‘판다’는 원어(파라디도미)는 ‘넘긴다’는 뜻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주요 절기이다. 유월절에 집 문의 좌우 설주[기둥]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의식은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예표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이미 세 차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다(마 16:21; 17:22-23; 20:18-19).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의 신적인 지식을 증거한다. 또 그가 이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들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당황치 않게 하시고 또 그들 자신도 장차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각오하게 하심이었을 것이다.
[3-5절]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衙門)(아울레)[뜰, 관저]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돌로)[몰래, 은밀히](BDAG, NASB)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다(눅 3:2; 요 11:51). 그는 겉으로는 존귀하게 보였겠지만, 실상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악한 자이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 죽이기를 공모하였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계획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 때문에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일 것을 의논했었다(요 5:16 전통본문; 마 12:14). 또 요한복음 5:18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말함을 인해 그를 죽이려 했다. 또 요한복음 7:7은 그가 그들을 악하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2:19는 온 세상이 그를 따르기 때문에, 또 마태복음 27:18은 그들이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죽이려 했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친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까닭 없이 죽이려고 이렇게 악한 일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훈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지적하고 성경과 이성에 입각한 공정한 비평을 하여야 했었다. 까닭 없이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
[6-7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 나병환자 시몬은 아마 이전에 나병을 앓았다가 고침을 받은 자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 오셨을 때에 아마 그 날에 있었던 일이고, 예수께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은 나사로의 여자 형제 마리아이었던 것 같다(요 11:1-2; 12:1-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머리에 붓고 또 그의 발에도 붓고(요 12:3)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 향유 냄새는 온 집에 가득하였다. 세상에서 귀한 분들은 값비싼 옷이나 신발, 고급화장품이나 장신구로 자기 몸을 단장한다. 그러나 세상에 참으로 값비싼 향유를 발라야 할 분이 계시다면, 그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8-9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가 3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증거한다(막 14:3-5; 요 12:3-6). 그것은 노동자의 3백일 이상의 품삯에 해당한다. 노동자의 품삯을 하루 10만원으로만 잡아도 그것은 약 3,000만원 이상의 가치가 되는 값비싼 향유이었다.
그렇게 분노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요한복음 12:3-6은 이렇게 기록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선한 일에 대해 말하였지만 실상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는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었다.
[10-12절]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葬事)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그가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할 수 있지만, 자기를 위해 향유를 붓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지상 생애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가 죽으시기 전에 아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고 싶어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잡아죽이려 한 그때에,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며 그에게 자기의 귀한 향유를 부어 그의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실상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깨뜨려 그 어떤 향유보다 더 귀한 그의 보배로운 피(寶血)를 다 쏟아주셨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행위가 후시대에도 기억될 만한 일이라고 칭찬하셨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도 귀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쓴 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쓴 돈은 참으로 귀한 돈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쓰는 시간과 돈과 수고는 참으로 귀하다. 주께서는 먼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성체(聖體)를 깨뜨리시고 보혈을 다 쏟아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드려야 한다.
[14-16절] 그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은 30은 아마 30스타테르, 즉 120데나리온을 가리킬 것이다(NBD). 그것은 마리아가 드린 향유 값인 300데나리온(막 14:5; 요 12:5)보다는 못했으나 꽤 큰 금액이었다.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 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으나, 다른 한 사람은 120데나리온을 얻으려고 주님을 배신하였다. 이것은 너무 대조적이다. 지식과 무지, 믿음과 불신앙, 충성과 배신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배신하였다. 사람은 심히 무지하고 악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곁에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그의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체험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고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셨다. 요한복음 6:64,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의 불신앙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 그는 도적이었다. 요한복음 12:6은 그가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고 말한다. 그의 돈 사랑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물질에 대한 탐심은 마침내 그를 멸망케 하였다.
또 사탄의 활동이 강하였다. 누가복음 22:3은,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13:27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의 능력보다 크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려두시면 사람은 누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살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마리아는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인 귀한 향유를 죽음을 앞두신 주께 부어드렸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이 주께서 우리 위해 흘리신 보혈에 감히 비교될 수는 없다.
둘째로, 하나님과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쓴 돈은 가난한 자를 구제한 돈보다 귀하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주셨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드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 짜리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렸으나, 다른 한 사람은 120데나리온을 얻으려고 주님을 배신했다. 지식과 무지, 믿음과 불신앙, 충성과 배신은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닌 생활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17-30절, 유월절 저녁식사
[17-19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예수님의 3년의 공적 사역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의 죽음의 사건, 곧 인류 구속(救贖)의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전 3:1-8).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신 때에 이루신다.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며 유월절 식사를 하면 무교절 첫날이 된다. 본문의 유월절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후 아마 네 번째로 맞는 유월절일 것이다(요 2:13; 4:35; 6:4).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한 큰 다락방을 빌리게 하셨다(막 14:15; 눅 22:12). 제자들은 주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다.
[20-23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그 유월절 저녁식사는 결코 즐거운 식탁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 즉 그의 측근의 제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아주 친하고 믿던 열두 제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배반하고 그를 대적할 것이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 참여했다. 그는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이 분명하다.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빵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으며, 또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고 증거하였다(요 13:27, 30).
[24-25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人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바요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며,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6:64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가 믿음이 없었고 장차 그를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다. 또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주께서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도덕적 책임의 관계는 심오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둘은 다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회개도, 믿음도, 순종도, 끝까지 주를 따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 즉 그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음을 보이며 또 “내니이까?”라는 그의 질문은 주께서 그의 은밀한 계획을 모르시리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신적 지식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가룟 유다는 최종적으로도 구원에서 제외된 불쌍한 영혼이지만, 세상에서도 그의 마지막은 불행하였다. 성경은, 그가 예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마 27:3-5), 또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증거하였다(행 1:18).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믿음 없고 가련한 배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지금 자신을 부정하고 믿음과 순종을 실천해야 한다.
[26-27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 날 밤에 사용된 빵은 큰 한 덩어리의 빵이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 곧 최초의 성찬식에 참여했다(눅 22:21; 요 13:26-27). 비록 그가 그 성찬식에 참여하였지만,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떡을 ‘내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즙을 ‘내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떡과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다. 즉 그 떡은 예수님의 몸과 같고 그 포도즙은 예수님의 피와 같다. 주께서는 이 엄숙한 의식에서 그의 신성(神性)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27은 사람이 주의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28절]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새 언약의](전통본문)57) 피니라.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맺으신 구원의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택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들의 수는 매우 많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또 성경은 피가 생명이며 속죄의 피가 죄를 씻음을 증거한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중요하며 우리에게 있어서 속죄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 요한복음 6:53-5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죄인들에게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속죄 신앙은 기본적인 구원 신앙이다. 그것은 구원의 생명이다.
[29-30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즐거운 식탁교제를 나눌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헛되이 주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열두 제자들의 수에 들었고 3년 동안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의 교훈을 받고 그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지만 그를 헛되이 따르다가 마침내 배신자가 되었다. 가룟 유다의 실패의 원인은 그가 돈 사랑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는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쳤다(요 12:6).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을 부정하고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가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가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이 되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사랑하며 그의 계명만 따라야 한다.
31-46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31-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께서 인용하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이었다(슥 13:7). 그는 그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제자들이 그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고 그가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먼저 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께는 신적 지식이 있으셨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 그들의 말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선한 소원과 참된 고백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없으면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람은 심히 연약한 존재이며 사람의 굳은 결심도 그러하다. 승리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가셔서 기도하셨던 곳이었다(눅 22:39).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증거이었다. 물론 그의 신성(神性)으로도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시겠지만, 그가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은 그의 인성을 나타내셨다고 본다. 그는 잡히시기 전날 기도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과 교훈이 된다. 우리가 큰 일이 앞두고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37-39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좀더 나아가셨다.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최측근의 인물들이었다(눅 8:51; 9:28). 그는 그때 심히 고민하며 슬퍼하셨다. 그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셨다. 그는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으며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증거하였다(눅 22:41, 44). 그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가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를 원하신 ‘이 잔’은 십자가의 못박히심과 죽으심을 가리켰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육신적 고통뿐 아니라, 택자들의 죄책을 담당하는 영적 고통이 있는 죽음이었다.
그의 기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의 신비하고 독특한 인격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참 사람이 되셨다(딤전 2:5). 그는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피하기를 원하셨고 마음의 큰 슬픔과 고통 중에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히브리서 5:7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증거하였다. 그의 기도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보이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으로서 피하고 싶은 일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고집하고 관철하려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를 꺾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완전하시며, 오직 그의 뜻이 땅 위에서 다 이루어지셔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그는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그의 온전함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5:8-9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증거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속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은 의미 곧 속죄적 의미가 있다. 우리의 죄 문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우리는 죄씻음의 길을 얻었다.
[40-41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시간]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토 프뉴마)[영은] 원이로되[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 예수께서는 한 시간 동안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한 시간 동안도,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깨어 기도하지 못했고 피곤하여 잠을 잤다.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길이며 사람이 깨어 기도할 때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바른 것을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다.
[42-46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人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세 번 반복되었다. 그것은 한 시간씩 세 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비슷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이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확신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렇게 하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것이다.
두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아마 3시간 가량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은 그가 얼굴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을 피하고 싶으셨으나, 자기의 뜻을 꺾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결심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그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둘째로,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세상에는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이 있다. 이런 일을 이기려면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에베소서 6:18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싸움을 싸우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교훈했다.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
47-75절, 잡히심, 심문받으심, 베드로의 부인함
[47-49절]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유다는 위선적 입맞춤으로 주님을 잡히시게 했다. 이 세상에는 돈 욕심, 배신, 폭력이 있으나, 천국에는 의와 사랑과 진실이 있다.
[50-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8:10은 칼을 쓴 그 제자가 베드로이며 그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증거했고 누가복음 22:51은 주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증거했다. 기독교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폭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또 기독교는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을 의지하여 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의 실천으로 전한다.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볼 때 무력(無力)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과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53-56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영(營)이라는 원어(레게온)는 6천명 정도의 군인들로 편성된 로마제국의 군대단위이다. 열두 영은 7만 2천명 가량의 군인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수의 천사들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힘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 진영에서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죽게 하신 일이 있으셨다(사 37:36). 그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예수님 잡는 그들을 당장 다 멸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잡혀 죽으셔야 했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에 대한 예언들과 예표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예언들과 예표들은 성취되어야 하였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는 그 예언들과 예표들대로 죽어야 하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셨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 밤,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 고백했던 자들이었다(33, 35절). 그러나 그 결심과 고백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두려워하여 다 도망치고 말았다. 그들은 비겁하고 연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들만의 연약이 아니고 바로 모든 사람의 연약, 곧 오늘 우리의 연약이기도 하다. 우리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실패하고 말 것이다.
[57-58절]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이미 공모(共謀)하였고 그 새벽에 소집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바른 지식이 없는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베드로는 그의 고백대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멀찍이라도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관저의 뜰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주님을 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지난 밤 그가 주와 함께 깨어 기도했더라면 아마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9-61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58)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거짓 증거를 찾으나 얻지 못하였고]59)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두 거짓 증인]60)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나라의 최고의결기관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거짓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악하고 마귀적이다. 의로운 판단은 합당한 증거들과 논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경우같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위해 그럴듯한 증거들을 찾는 일은 매우 악하다.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거짓 증인들을 통해서도 예수를 사형시킬 만한 적절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요 2:19) 그것은 자기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고(요 2:21) 설령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를 죽일 이유는 되지 못하였다.
[62-64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人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즉 재판정에서 자신의 신분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의 예언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시며 엄숙히 증거하셨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공적인 답변이시며 진술이셨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말씀하셨다. 그는 수가성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었다(요 4:25-26). 그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하셨다(마 16:16).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그의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부활을 통해 확증된다(요 20:30-31). 예수님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어야 한다.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는 사기꾼이나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65-66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결코 참람한 말이 아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도 제시함 없이 그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이미 작정하였다. 공회의 재판은 형식에 불과하였다. 공정한 심사가 없는 법정! 이것이 부패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이었다.
[67-68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악한 자들에게 얼굴에 침 뱉음, 주먹으로 침, 손바닥으로 때림을 받으셨고 학대와 조롱을 받으셨다.
[69-75절]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사람도]61)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관저 바깥뜰에서 한 여종과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다른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또 그는 세 번째로 사람들 앞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는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닭이 곧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즉 재판정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엄숙히 증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확신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끝까지 그를 따라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침 뱉음과 주먹으로 침과 손바닥으로 때림을 당하셨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주께서 이런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기억하자.
셋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고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였다. 그들의 연약은 우리의 연약이다. 우리의 온전한 순종과 충성은 우리의 진지한 결심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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