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은 사람은 착한 사람” 인천 낙원제일교회 수련회 (2016.1.12 ,10-12시)
마5:16, 행11:24
제가 한 평생을 살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가장 좋은 사람과 가장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얼굴이 예쁜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도 “착한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착하신”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8,19).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7). 성부 하나님께서는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 사람들과 동물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너무너무 “착하신” 분이셨습니다(욘4:11). 성자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인들과 모든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착하신”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달아 못 박는 로마군인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너무너무 “착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4).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착하신”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행전에 나오는 “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고 성령님의 행전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들”의 행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도들과 성령님께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 이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 이란 돈이나 소유에 집착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돈이나 소유를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 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짓밟는 대신 그들을 변호하고 격려하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 이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 이란 자기를 내 세우는 대신 다른 사람을 내 세우면서 협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 이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기쁘게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유식한 사람도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설교만 잘하는 사람도 진리만을 외치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쓴 것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착한” 일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2-37). 결국 “착한 사람들”의 선행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교회의 집사들이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집사들이 전력을 다해서 힘쓴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착한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6:3-6). 예루살렘교회가 일곱 집사들을 택하여 세우고 저들로 하여금 구제하는 착한 일에 전력을 다하게 한 것은 너무너무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곱 집사들은 구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면서 전도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구제와 함께 전도하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구제하는 착한 일에 힘쓴 스데반 집사의 마음 속에는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이는 사울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악한 세력을 향해서 진리의 칼을 휘두르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착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결국 스데반의 일로 사울이 나중에 회개하게 되었고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전도와 선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착한 일로 인해서 전도와 선교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빌립 집사는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면서 구제하는 착한 일과 함께 전도 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8:6).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가이사랴에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40). 빌립은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넘어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집사들은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수고를 너무 많이 해서 그랬는지 병들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르가의 착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수 많은 욥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결국 도르가의 선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억지로 전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착한 일과 선행과 구제하는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36-42). 온 욥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욥바가 복음화가 된 것은 전도 프로그램이나 행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도르가의 선행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인생관과 신관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비다 즉 도르가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넷째로, 가이사랴에 살던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아직 예수님을 정식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라고 한 것은 고넬료가 유대인들을 보고 믿음의 길로 조금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제하는 착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2). 고넬료가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구제와 착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유대인들의 칭찬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10:3-5).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행10:22). 베드로가 마지못해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을 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가이사랴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10:44). “이에 베드로가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행10:48). 가이사랴에 복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인간관과 신관과 세계관과 선교관도 달라졌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모든 것이 착한 사람 고넬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섯째로,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많은 귀중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나바 때문에 사도 바울이 생겼고 바나바 때문에 안디옥교회가 생겼고 바나바 때문에 소 아시아 선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이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지적했습니다. 어떤 대단한 전도 프로그램이나 행사로 인해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바나바의 착한 모습 일곱 가지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바나바는 돈과 물질에 인색하지 않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7). 둘째로, 바나바는 어려움에 처한 사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를 변호하고 격려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7). 셋째로,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과 신뢰를 받아 안디옥으로 파송 받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넷째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사람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했고 그래서 큰 무리가 주님께 더했다고 했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11:23,24). 다섯째로, 안디옥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는 자기 혼자서 목회를 하려고 하지 않고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를 데려다가 협력 목회한 협력과 동역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5,26). 여섯째로, 바나바는 유대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바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사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일곱째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소 아시아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바나바와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고난과 핍박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착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은 선교사가 될 수도 없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지도 못합니다. 결국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만들어졌습니다.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섯째로, 사도 바울의 후계자가 된 디모데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로 삼았고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는데 디모데는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일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더 돌아본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행16:1,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2:19-21).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그리고 자기 일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더 잘 돌아보는 사람인데 디모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또한 눈물의 사람이었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디모데가 눈물을 지닌 착한 사람이 된 데는 신앙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착한 사람 디모데가 보고 싶다고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고백했습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4,5).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4:21). “착한 사람”은 보고 싶어지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곱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일 사랑하고 제일 보고 싶어하고 제일 귀하게 여기던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4:1).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 사도 바울은 자기가 빌립보교회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려도 즉 자기가 죽어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까? “착한 사람” 루디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영에 이끌려 빌립보 강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기도하던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만났을 때 먼저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시지라”(행16:14). “착한 사람”은 마음을 엽니다. 청종도 잘 합니다. 그래서 그리고 온 집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행16:15). “착한 사람”은 청종도 잘 하고 순종도 잘 하고 결단도 잘 합니다. 그 다음 집을 열고 지갑을 열어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착한 사람”은 집을 열고 지갑을 엽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집도 열지 못하고 지갑도 열지 못합니다. 결국 루디아의 집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이상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교제와 봉사가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한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의 모델을 빌립보교회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착한 사람” 루디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루디아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님들 중에서 대표적인 “착한 사람들” 세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에 나타난
첫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착한” 삶과 “착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기풍은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자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29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28세였습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 투성이가 되어 길 모퉁이에 쓸어졌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양 사람이 교회당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주리 때려 부시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교인들은 너무나 분개하여 모두들 맞서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평양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때부터 평양 시민들은 그를 가르쳐 “마포 선교사”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이기풍이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스왈렌 선교사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를 서양 귀신에 미쳤다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서 활동과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를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 년 9월 이기풍은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선교사님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님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때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라 복음의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떠나기로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제주도 가기를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님은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주저 말고 속히 떠납시다.” 그의 부인 윤함애 사모님은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1903년 마포 삼열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 신학생과 결혼을 한 후 기도와 사랑으로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결국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성을 떠나 인천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 가족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이르렀으나 거센 풍랑으로 사모님은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모와 아이를 목포에 당분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님만 먼저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님은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모래 사장에 쓸어져 있는 이기풍 목사님을 해녀가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서 가까이 하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다라 난다” 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님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이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복음 사역을 마친 후에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광주 순천 고흥 벌교 여수 남면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한국교회를 봉사하다가 성대가 막혀서 말을 못하기도 했고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습니다.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습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목사님의 곁에서 마지막까지 기도와 사랑으로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펴신 보필자였습니다. 얼마나 존경스러운 믿음의 선배님들인지 모릅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이야말로 생명을 다 바쳐 주님을 사랑으로 섬긴 주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들이었고 모두를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기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로, 모두를 사랑으로 품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의 “착한” 삶과 “착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순수한 사랑의 사람들이었고 순수한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서 새벽 기도와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철저했고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도 열심이었으며 신사참배를 철저하게 거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2살 때인 1924년 19살의 정양순양과 결혼을 한 후 두 사람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고 정양순 사모는 남편이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철저하게 하도록 기도와 격려의 손길을 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7월에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9년 7월부터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손양원 전도사를 연행해 갔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경성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전도사가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의 기도와 격려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양순 사모는 남편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아내였고 자식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였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는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채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간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손양원 전도사가 감옥에 있던 1945년 4월 13일 부친 손종일 장로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불효자식” 이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또한 평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과 박관준 장로님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종도 신앙의 진리를 굳게 지켜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이틀 뒤인 17일 청주교도소에서 손양원 전도사가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로 돌아왔을 때 1 천 여명의 나병환자들이 뛰어나와 손양원 전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출옥 후인 1946년 3월에야 비로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무엇보다 먼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병든 육신일지언정 저 바깥의 표리부동한 자들보다 몇 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 하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안 가겠다고 울면서 떼를 쓰는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여 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경 손양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여수 바다에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짐을 다 실었습니다. 부흥 집회에서 돌아온 손양원 목사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자기는 피난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마지막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배에 올라 피난을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자기들도 다 손 목사님과 함께 애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짐을 다시 내려 놓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다가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또한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님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님은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착하게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순교적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를 따뜻하게 품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착함의 삶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떨어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착함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너무나 귀중하고 너무나 보배로운 삶과 죽음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부끄럽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들에게도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이 지니셨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착함의 부스러기를 지니게 하시옵소서.
셋째로, 모두를 사랑으로 품은 그래서 만인의 존경을 받은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의 “착한" 삶과 “착한”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시고 "착한" 사역으로 목회하신 "착한" 분입니다. 조향록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삶과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습니다. 영락교회의 이우근 부장판사도 한경직 목사님은 설교를 삶으로 설교하는 분이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사자 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모르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착함”은 “사랑”과 “봉사”로 나타났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영락교회의 이창로 장로님은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의 특징 중의 하나는 “긍휼”의 목회자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항상 “긍휼하신 주님,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말씀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의 “착함”과 “사랑”과 “봉사”의 삶은 “긍휼”에서 비롯했다고 이창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사실 “긍휼”은 “착함”의 동기이고 “긍휼”은 “사랑”과 “봉사”의 색깔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의 사람, “착함”의 사람, “사랑”의 사람, “봉사”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한국의 슈바이쳐요 한국의 테레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착함”의 사람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기념대회”가 2002년 10월 31일 장신대에서 개최되었는데 부족한 제가 “목회자 한경직 목사” 라는 제목으로 발제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인간 한경직을 3가지로, 목회자 한경직을 4가지로 묘사했는데, 저는 인간 한경직을 “고난과 약함의 사람” “참회와 회개의 사람” “기도와 눈물의 사람”으로 묘사했고 목회자 한경직을 “복음전파의 목회자”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 “화평과 협력의 목회자” “역사 의식의 목회자”로 묘사했습니다. 그 때 발표한 7가지 중의 하나인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돌봄을 쉬지 않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교회의 3대 목표를 전도, 교육, 봉사로 정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섬김과 봉사는 복음의 생활화요 신학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복순이라는 다리 하나 없는 가엾은 어린 소녀를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아이로 시작했습니다. 1939년에는 남 신의주에 땅을 얻어 벽돌집을 신축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습니다. 1942년 일본경찰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된 후에는 보린원 원장으로 그의 모든 시간과 정성을 고아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다 쏟아 바쳤습니다. 그는 넓은 밭을 직접 일구고 분뇨를 나르며 거름을 주었습니다. 보린원에서 보낸 3년은 가난한 고아들의 아버지로, 선생으로, 농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보린원 출신의 사업가 김재걸 집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가 고아원 보린원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복순이라는 다리 하나 없는 여자 아이와 국섭이라는 사내 아이 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린원에 있으면서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5학년 때는 보린원에 50명이나 되는 큰 식구로 불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께서 남 신의주에 터를 장만하고 거기에 고아원과 양로원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를 갔습니다. 목사님께서 아침마다 예배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같이 농사도 지으시고 심지어는 똥통도 같이 메고 저희 원생들과 같이 식사하시며 같이 주무시고 했습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으례히 그러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커서 세상 물정을 알고 나서야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린원 원생 김재걸과 윤승호는 해방직후 함께 월남하여 한 사람은 한 기업의 대표이사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의학박사와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렇게 그의 소감을 피력했다. "나와 윤 박사 부부는 한 피 받은 친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아원에서 자라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긍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1946년 11월 베다니교회는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영락교회는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출발지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영락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3대 목표 중의 하나를 봉사로 정하고 봉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창립 1주년을 맞은 1946년 12월 1일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민중들을 인도하고 돌보는 사회 봉사임을 밝혔습니다. "교회야말로 국가의 정신적 간성이며 황야에 헤매는 대중을 인도하는 진리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며 암야의 행로를 밝히는 광명한 등대이며, 거친 세해, 죄악의 파도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들의 구원선이며, 피곤한 자의 안식처이며, 수난자의 피난처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미 그 해(1946년) 3월 16일 주일 "상부상조의 정신"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가난한자, 병든 자, 나그네 등을 돕는 상부상조임을 강조하며 호소했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우리 신자들은 이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정신이 교회 안에서 언제든지 흐르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제의 대상은 과부와 고아, 무산자, 병자, 나그네, 죄수, 핍박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하여 그들은 사랑으로써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부상조는 첫째로, 참된 사랑의 자연적 발로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이 상부상조의 생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리배여, 이 진리를 아십니까? 피난민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선이 아닙니다. 의무라는 것은 아니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난한 자나 병자를 섬김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부인 집사들이 병자를 심방 할 때 '주님을 뵈러 갑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상부상조의 단체로 인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일곱 집사는 봉사를 위하여 선택되었던 것이요, 교회에서 하는 헌금은 본래 구제 목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와 제직의 근본 사명도 오직 전도와 구제였습니다. 오, 대한 교회여!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초대교회의 상부상조의 정신은 지금 어찌 되었습니까? 오늘날 같이 나그네, 가난한자, 핍박을 당하여 부모 처자를 잃은 불쌍한 자가 많이 생길 때가 어디 있으며 오늘 날 같이 그리스도의 순애의 발로인 상부상조의 정신이 요구되는 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베다니 교회 교우들이 초대교회로 다시 돌아가 깨끗한 생명수를 마시고 상부상조의 생활을 하지 않으렵니까? 물론 우리도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어떻게 하든지 먼저 온 이들이 뒤에 오는 이들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때에 기독신자들이 돈만 많이 모아서 무얼 하시렵니까? 서로 돕고 서로 붙들면 다 살고, 나 혼자만 살려고 하면 다 죽고 맙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픈 자와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이 강제적인 어떤 사상보다 낫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십시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는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대전에서 미군 통역관의 일을 하던 한경직 목사님은 인민군 포로를 심문하는 일을 돕고 있었는데 부상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 인민군을 심문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미군에게 부탁하여 그를 대전도립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기독교구국회” 운동을 벌이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국을 돕고자 부산에 와 있던 밥 피얼스 박사에게 부탁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목회자 가족에게 밀 가루를 배급하는 일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밥 피얼스 목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약한 자들과 함께 한 한경직 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의 삶의 자세는 예수님과 같이 눌린 자의 편에 섰고,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소외되고 병든 자, 외로운 자의 벗이 되어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인생의 삶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항상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이라고 강조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템플턴 수상 연설을 하면서도 결국 사랑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환자들을 사랑으로 섬겼고 자기의 두 아들을 사살한 공산주의자를 용서하고 사랑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를 하므로 그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쳤습니다. "손 목사는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랑의 본보기를 손수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의 실상은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며,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봉사의 마음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마음입니다. … 교회 역사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시설과 성직자 의복이 점점 호화스러워졌어요.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교회가 너무 화려해지고, 의식만 숭상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돌보지 않게 되고, 돈 많은 사람이 득세하게 되고, 이렇게 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그 분이 목사가 되면서 예배당에 있던 호화로운 모든 것을 다 없애고 간소화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늘 기억할 것은, 우리 사회 안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언제나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어려서 부모 잃은 사람, 무의탁 노인, 미망인 가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요 모든 민중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봉사할 때에 축복을 받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돌봄을 쉬지 않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봉사는 이기적인 봉사도 과시적인 봉사도 아니었습니다. 이타적인 봉사였고 드러내지 않는 숨은 봉사였습니다. 자기 과시와 자기 명성을 위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선전시대에 이름도 소리도 없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모두 허비한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님에게서 발견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착함”을 지니고 가난하게 살다가 “착함”을 지니고 청빈하게 죽은, 주님 닮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목회자였습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의 삶과 사역을 살피고 나서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처럼 사신 분이었고 성 프랜시스처럼 사신 분이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친히 가난하게 사셨고 성 프랜시스도 ‘나는 가난이란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친히 가난하게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님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평생 깨끗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한경직 목사님이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15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세상은 입을 모아 그를 가리켜 ‘청빈의 사람’ 이었다고 말하며 그를 높이 기렸다. 명예욕과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부끄러운 오늘의 시대가 가장 보고 싶어한 사람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손봉호 교수는 한경직 목사님처럼 청렴하고 철저하게 절제하는 성화된 삶을 산 사람은 ‘전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 이라고 평했다. 이우근 부장판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 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국민주택[교회사택]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제가 한 평생을 살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가장 좋은 사람과 가장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얼굴이 예쁜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가장 좋은 사람과 가장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히13:16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제물을 많이 드리는 제사도 아니고 소리 지르며 기도하는 제사도 아니고 선을 행하는 착함의 제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도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한 착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착한 사람들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사도 행전에 나타난 착한 사람들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착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착함을 우리 몸과 마음에 지니고 착함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타내 보이는 착한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드리므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39-45).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3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