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간의 10일 일주
.16 ~ .16 써지지 않는 일상의 너머
익숙하고 복잡한 소음을 풍기는 마을버스 안에서 캐리어를 다루는 건 힘든 일이다. 근 칠일 간 내 손을 떠나있었던 캐리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도망가기에 바빴다. 캐리어가 한 번, 두 번, 몇 번이고 내 손을 떠났다가 다시 잡힐 때마다 일상의 시곗바늘도 점점 시차의 각도를 좁혀나갔다. 그렇게 8시간 정도 엇나가 있던 시차는 서서히 제 시간으로 돌아왔다. 캐리어는 더 이상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앉아서 무언가를 써보려 했다. 모니터에든 종이에든 보고, 듣고, 느끼고 먹었던 것들을 써나가려 했다. 하지만 써지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나는 풍경은 많았지만 글로 옮겨지는 순간 묘사된 풍경이 아니라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 그쳤다. 그게 다였다. 무료하고 따분한 글이었다. 이렇게 근 삼십일 간 이탈리아의 풍경들이 내 손을 떠나갔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났을 때 창문 밖은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조용한 바람은 창문을 까칠하게 뚫고 들어왔다. 부드러운 이불 속에 들어갔을 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의 시작이 조용했었나?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계를 보는 순간 맹신했던 오감의 풍경이 달라졌다. 새벽이 아니라 밤이었다. 나는 몇 시간 정도 어긋난 시간으로 같은 풍경을 보았고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나는 왜 글을 쓸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단순한 시차 때문이었다. 내가 기행을 하는 동안 쓰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지금은 그대로 쓸 수 없다. 다시 쓰려고 해도 이미 시차가 생겨 있는 그대로를 쓸 수 없었다. 아마도 그건 8시간 정도, 현실과는 얼추 225도 정도 떨어진 허상을 묘사하는 행위였다. 나는 내 일상의 시계로 돌아왔다. 너무 늦었다. 그때 그곳에서의 그것들은 거기서 썼었어야 했다. 그때의 일상은 그때의 시간과 함께 완전히 내 손을 떠나갔다. 애초에 잡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10일 동안의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갔다 온 후에 30일 동안 남아있는 그을음 같은 추억을 다시 여행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나는 그때의 감정들과 풍경들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 포도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졌다.
.07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건너
세상은 소란스레 단잠을 깨웠고 사람들은 바쁘게 새벽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공항까지 가는 1월의 길은 뻔뻔할 정도로 3월의 등굣길과 닮아있었다. 사람들은 줄 지어 버스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교통 카드 단말기는 단내가 날 정도로 ‘환승입니다.’를 중얼거렸다. 가방에 치여, 사람에 치여 흔들거리는 승객들과 좌석에 앉아 빛을 반사시키는 승객들 모두 각자의 표정을 지으며 목적지로 달리고 있었다.
새하얀 공항의 안은 퍼렇게 빛나던 바깥보다 더 밝게 빛났다. 칙칙하고 깊은 색조가 가득 채워진 바깥과는 다르게 번들거리는 바닥과 회색 철제 의자의 다리 밑 얕은 곳 까지 하얀 조명의 빛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공항의 사람들은 조명을 태양으로 삼는 듯 했다. 활기찬 움직임과 바쁜 움직임이 동시에 공간을 부산한 소리로 메우고 있었다. 공항 안의 카페에서 간식 같은 이른 아침을 먹으면서 가는 길 도중에 아침을 한 번 더 먹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비행기에 오랜만에 발을 들여놓았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만들듯 사람들은 끊임없이 길쭉한 동체 안으로 떠밀려갔다. 나름 편안하지만 빽빽하게 주변을 메운 좌석들과 비좁은 통로를 오고가며 승객들을 챙기는 승무원들의 모습이 묘하게 불균형해 보였다. 동그란 동체가 단숨에 승객 쪽으로 우그러질 것 같아서 눈앞이 흔들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눈을 감고 몇 차례 하품을 했다. 좌석에 셀 수없이 수놓아져 있던 항공사의 문양이 아른거렸다.
베이징에 들어가고 베이징에서 나가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부드럽고 매끈하게 곡선을 이뤘던 비행기의 모습과 다른 불투명하고 각진 검사대의 모습은 똑같은 중국어도 다르게 들리게 만들었다. 공항에서 거의 유일하게 칙칙한 색을 띄고 있던 검사대 직원들의 맑은 웃음이 생각난다. 어렵게 들어간 공항은 친숙한 모습이었다. 기본적으로 많은 조명들, 높고 커다랗게 솟은 유리 벽은 모양을 상상할 수 없는 천장을 받치고 있었다. 유리 벽 밖은 황무지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가게들의 간판은 수수했지만 진열대의 상품들은 마네킹도 없이 홀로 남아 스스로의 가격을 뽐내고 있었다.
피부색이 황색이 아니거나, 머리가 검은색이 아니거나, 혹은 둘 다거나. 내 주변에 낯선 색의 사람들이 가득 차 떠드는 소리를 듣는 건 한 번 쯤 해 볼만 한 경험이다. 피부색은 사람의 사이를 만드는데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걸 실제로 알 수 있다. 다들 안경을 쓰거나, 자기 몸에 조금 작은 티셔츠를 입을 수도 있고, 때가 낀 하얀색 나이키 신발을 신거나, 움직이기 불편한 코트를 벗어 던지고, 우는 아이를 달래 주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 기내식에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특히 10시간이 넘는 비행에서는 모두가 잠을 청한다.
처음에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로마의 밤은 습하기 그지없었다. 착륙하기 시작 할 때 언뜻 보이던 짙은 남색의 바다가 이제는 검은 밤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로마와 공항은 습한 한국이었다. 빨갛고 노란 눈의 차들이 도로를 빠르게 누비고 있었다. 꿉꿉한 매연과 기름 냄새 때문에 아직도 별들은 피신을 금치 못했다. 거식증에 걸린 공항은 항상 사람들을 먹어치우고 토해냈다. 사람들은 버스로, 지하철로, 자가용으로 흘러 도로를 타고 사라졌다. 어둔 밤을 잡아먹는 자동차들의 매서운 불빛과 자주 스쳐 갈수록 도시와 공항의 불빛은 우리를 두려워하며 서서히 문을 닫듯이 사그라졌다. 문득 그들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08 원과 네모
아침에 느껴지는 침대의 감촉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침대 옆의 전등은 머리맡부터 무릎까지 하얀 이불 위에 베이지색 빛을 덧칠했다. 빛이 닿지 않는 방바닥은 신발을 신지 않아도 좋을 만큼 촉감이 좋았다. 검은색인지 초록색인지 알 수 없는 바닥에 깔린 실 뭉치들이 하얗고 부드러운 면의 방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방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 방문은 생각만큼 잘 열리지는 않았다. 은색 손잡이는 한 쪽이 뭉툭하고 몸체는 잡기 좋게 휘어져 손 안에 푹 안겼지만 도어 락의 몸체는 자기 몸을 단단하게 방문에 내맡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친절했던 방과는 다르게 카드를 넣는 입구 부분은 유달리 고압적으로 튀어나와 있어 검문소를 떠올리게 했다. 문을 열면 숫자만 달라진 방문이 내 시야를 가렸다. 주변은 네모난 푸른 문들과 네모난 하얀 벽들이 거울에 비친 듯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문과 벽의 끝에는 방과 엘리베이터를 구분 짓는 검은색 방이 나왔다. 하나의 휴게실처럼 보이기도 하는 공간에는 조용한 복도에서 유일하게 소란스럽던 자판기와 드문드문 놓인 소파 몇 개가 큰 공간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간혹 가다 기지개를 피는 흐리지만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의 소리와 발걸음 소리 빼고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어제 밤에 흘려들었던 버스 기사 아저씨의 이름은 ‘젠나로’였다. 긴 턱수염을 가졌던 가이드 아저씨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저씨의 한국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으로 로마의 아침을 맞이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화감이 들었고 생각했던 만큼의 익숙함이 느껴졌다. 사람에게 집중하면 위화감이 늘었지만 사람들에게 집중하면 익숙함이 늘었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한 긴 줄에서 가만히 서 있을 때, 바쁘게 움직이는 로마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했다. 적어도 우리는 줄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줄마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그림과 석상들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습들은 정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작품들이 갖는 존재감은 공포스러웠다. 박물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작품들보다 더 경이롭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박물관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유혹하고 지배한 것은 살아있지 않은 것들 이었다. 박물관은 사람들로부터 경이로운 그것들을 격리하기 위한 감옥이었다.
감옥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건 말 그대로 ‘최후의 심판’이었다. 물감과 돌덩이들이 살덩이들에게 그들의 아름답지 못함을 심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와있었다. 완벽하게 완전한 하나의 세계였다. 순식간에 동그란 태양이 된 기분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네모난 천장과 사방의 벽이 공전하기 시작했다. 문득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은 만들 수 있지만 불완전한 것은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불완전한 걸 수도 있다.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여운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노란 색은 빵이고 빨간 색은 소스. 다만 불길한 색감과 질감을 가지고 위에 올라간 음식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찌개에 넣고 끓이듯 이탈리아에서는 다양한 음식들을 피자에 넣고 굽고 있었다. 타국인들의 입맛보다는 순전히 자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가게였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는 다르게 현대적인 점포들로 가득 찬 골목길. 이 길에서 익숙했던 건 오직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비둘기들뿐이었다.
웅장했던 콜로세움이나 유적지들보다 오히려 로마의 길거리들이 더 낯설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신기한 목조 악기를 팔거나 자잘한 조명 장난감을 파는 사람들은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대부분 피부가 하얗지 않았다. 로마의 길거리는 걷는 일마저도 파티로 만들만큼 소란스러웠고 활기찼다. 거리에는 항상 낯선 사람들이 오고갔고 유명한 유적지나 건물 앞은 하나의 광장을 연상케 했다. 상가들의 알록달록한 색과 조명들의 은은한 주황빛이 미러볼처럼 각지고 오래된 길과 각지고 색바랜 건물들 위에 둥근 그림자와 빛을 만들어냈다. 창문과 테라스는 각각 빛과 그림자를 키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은 하나의 음악처럼 들렸다. 번화가에 있던 젤라또 가게의 종업원들은 길거리에 있는 모든 국적의 사람들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다양한 색의 젤라또를 고르는 건 어려웠지만 커다란 뭉텅이로 올려 지는 모습만큼이나 맛은 있었다.
.09 언덕 위에 내린 새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원을 감싸고 있는 성당의 분위기는 장엄했다.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을 이루고 있는 하얗고 매끈한 돌조각에서도 신성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평범한 마을 한복판에 있는 하얀 광장은 마을의 영토가 아니라 성당의 영토처럼 보였다.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성당은 광장을 굽어 살피듯 서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보호받을 것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문을 하던 군인들도 이런 광장의 분위기에 동화된 듯 했다. 나무가 양 옆으로 들어선 넓은 땅에서는 선생님과 푸른 모자와 푸른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이 하얗게 뛰어 놀고 있었다.
성당은 엄청나게 거대했지만 막상 기도원은 귀여울 정도로 자그마했다. 어둡고 짙은 빛이 둘러싼 빈 공간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부드러운 노란색의 기도원은 투박할 정도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도원 안으로 모여들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아시시는 언덕을 감싸 안은 하얀 새처럼 부드럽게 올라와 있었다. 도시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처럼 보였다. 하얀 벽돌들은 단단하게 뭉쳐진 깃털처럼 가라 앉아 있었고 멀리에서는 보이지 않을 창문들이 몇 개의 커다란 검은 사각형이 되어 눈과 발을 이뤘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새처럼 고요한 감동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도시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난코스였다. 멀리서 보면 바로 직선으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핸들을 좌우로 무수히 꺾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길과는 다르게 가까이서 본 아시시는 훨씬 더 정갈하고 직선적이었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이끼가 끼어서 얼룩덜룩해진 주황색의 기와들이 겹겹이 쌓여서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벽돌들은 대체로 상아색과 베이지색을 오갔으며 딱 보기에도 까끌까끌해 보이는 얇고 자그마한 벽돌들이 차곡차곡 만나서 하나의 단일한 면을 이뤘다. 건물들의 입구에는 녹슬었지만 먼지는 끼지 않은 철제 문고리들이 달라붙어있었고 어떤 문고리들 근처에는 정말 낡고 오래된 못질의 흔적들이 흥청망청 먼지를 마시고 있었다. 대부분의 창문에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고 화분들은 위태롭게 비를 맞고 있었다. 도시 안의 길바닥들은 전부 다 돌들을 끼워 맞춘 것이었고 끝없이 파인 돌들의 틈새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 혈관처럼 온 도시에 깔려있었다.
아시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피자였다. 아시시의 건물과 사람들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원인은 피자에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피자의 향기를 맡고 피자를 먹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피자의 맛을 떠올릴 수 없는게 너무나 한스럽다. 좀 더 많이 먹거나, 한 번 더 시켜 먹거나, 다른 피자를 먹어봤었어야 했다. 피자를 굽는 향기를 담아왔던가, 다 먹고 남은 피자의 부스러기를 챙겼던가, 주인 아주머니의 웃음소리라도 녹음을 해왔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피자를 잊을 수 있을까. 다시 가서 먹어보지 않는 이상 잊지 못할 것 같다.
피자를 품은 언덕과 새를 떠나보내고 버스는 시에나에 도착했다. 해가 저물어서 대부분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원인 모를 친숙함이 들기 시작했다. 광장으로 나서는 길에서 친숙함은 첫 인상 속으로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시에나 사람들을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시에나 사람들끼리는 서로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거리를 다닐수록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 헤어지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과 더 자주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복잡한 골목길과 이름 모를 카페와 식당에서는 끝없는 말소리와 담배 연기가 오고갔다. 광장에 서서 시계탑과 시청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에나 도시 전체가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이 도시를 어두울 때 처음 만나서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행 중 처음으로 도시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
.10 모든 골목은 아래로 흘러 만났다
한국에서도 종종 빵을 아침으로 먹은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침에 어떤 음식을 먹어도 잘 먹는 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호텔의 아침 식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수많은 빵들과 버터, 잼들이 있었지만 어떤 것도 맛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백치가 된 느낌이었다. 무엇을 먹을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장 익숙한 맛의 시리얼을 우유와 함께 먹었다. 축축하고 느끼한 맛이었다.
오래된 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시에나의 풍경은 길과 걸음이 만든 오래된 풍경이었다. 도시는 태양을 따라 주황색에서 남색으로, 남색에서 회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사람들을 맞이했다. 밤보다는 덜 활발했지만 한층 더 산뜻한 공기가 풍겨왔다. 차분하고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문을 연 가게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옆에는 느지막하게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시의 풍경이 자꾸 내 발목을 붙잡았다. 웃음소리부터 벽돌의 작은 흠집, 책과 신문을 파는 노점상들까지 모두 넘기 힘든 방해물들이었다. 광장으로 가는 길은 즐거움의 수렁이었다.
점심에는 오랜만에 밥 냄새를 맡았다. 내 혀와 위장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한국이라는 환경의 속박이 야속했지만 반가움을 속일 수는 없었다. 완전한 한국 음식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몸의 힘을 북돋았다.
물은 아래로 흘러서 모이고 모인 물이 다시 흘러가듯,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다시 과정을 만들어 낸다. 시에나의 분위기는 콘트라따에서 흘러나와 골목을 거쳐 다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콘트라따는 도시의 중심부에 있지도 않고 눈에 띄는 건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콘트라따는 사람들을 가졌다. 사람들의 역사를 가졌고 사람들의 염원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이런 공동체의 응집된 힘을 광장에서 구현 시킬 수 있었다. 콘트라따의 사람들은 화폐, 직업, 계급등의 소속감 말고도 일차적이고 기본적으로 태어남과 동시에 콘트라따를 통해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 시에나가 가진 여유로움과 친숙함의 원인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11 어디로 가도 좋은 정원
레지오 에밀리아는 텔레토비들이 뛰어 놀아도 좋을 만큼 깨끗했고 순수한 공간이었다. 로비는 깨끗하고 넓은 공간에 밝은 페인트들이 싱싱한 야채들처럼 발랄하게 칠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들을 전시한 여러 가지 아틀리에들은 방문객들이 쉽게 다가가서 체험해볼 수 있었고 항상 깔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작품들도 생각의 표현이 조용하지 않고 직접 만지고 느껴보는 기발하고 개성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해 놓은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다. 아틀리에를 걷는 동안 정말로 신기하고 내가 얼마나 닫힌 존재인지, 그리고 현재 한국의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닫힌 교육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의 노래나 글, 그림이 아니라 조형물을 통해서 예술성을 발휘한 경우를 보는 건 정말로 드물었기에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렇듯 스스로도 비슷한 경험이 전무 했기에 지금의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는 근거 없는 판단이 강하게 박혀있었다. 하지만 같이 온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현장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레지오 에밀리아의 교육이 분명 수준 높고 대안적으로 실행할 가치가 있는 교육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치있는 예술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좁디 좁은 나의 견문과 편견이 참담해지는 순간이었다. 부럽기도 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의 유아기때 이런 교육을 경험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러움과 나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한 새로운 세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안도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내가 유치원에서 레지오 에밀리아식의 예술 교육을 받았어도 지루한 유치원이 끝난 후 놀이터에서 홀로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드는데 더 혈안을 쏟았을 것 같기는 하다.
저녁 식사는 초밥을 먹었지만 기분은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먹는 피자가 이탈리에서 먹는 피자가 다르듯이 한국에서 먹는 초밥과 이탈리아에서 먹는 초밥은 완전히 달랐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양의 음식을 하나하나 국적을 따져가며 먹지 않듯이 서양에서는 동양의 음식들을 굳이 국적을 따져가며 먹을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밥을 먹는 다는 점에서 나도 바로 납득했고 정말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12 사람의 아이들
가끔씩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찍었던 문제가 맞았을 때, 우연히 들린 식당의 밥이 정말로 맛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평소의 예측과 지성을 아득히 넘어선 감탄과 떨림으로 말을 잇지 못하게 된다. 평상시라면 불확실성에 순간을 내맡기는건 두렵고 인지할 수 없는 경험이 되어 불안함에 떨기 마련이지만 앞서 말한 순간에는 불확실성은 기쁨과 놀라움을 더 없이 느끼게 해주는 양념이자 놀라움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이탈리아에서 박물관을 보고, 건축물들을 보고 그림과 석상을 보았을 때는 이런 놀라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이미 예상되었던 놀라움의 순간들은 상상 그 이상이기도 했지만 결국 예측된 순간 안에 존재해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시 가는 길이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초등학생들을 다시 만나는 일이 경이로움의 대상이 되는건 지금껏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압도적이었다. 한 아이, 한 사람이 갖는 경이로움이 빈틈없이 학교를 꽉 메우고 있었다. 화려한 건물도 고풍스러운 그림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더 이상 미술품들의 아름다움에 유혹당하지 않았다. 격리될 수 없고 격리해서는 안되는 놀라움과 아름다움이 학교를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 순수하게 학교에 가보지 않은 내가 부끄러워졌다. 봉사라는 이름으로,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계급지은 채 좁은 틀에 관계를 담아냈었던 시간들이 아쉬웠다. 그저 학교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러 갔었다면, 그런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한국의 학생들을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었다. 학교라는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당연히 환경에 짓눌려 있다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가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약자, 피해자’로 규정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사회복지와 평생교육을 공부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만나는 그룹 외의 보편적인 집단에 대한 편견이 뿌리박혀 있었다-. 분명히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환경 안에서도 여전히 학생들은, 아이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경이로웠다. 경이로운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과 비슷하게 일행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도 두려움보다는 경이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어려있었다.
초코파이 하나를 주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세상을 나눠주듯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의미 부여와 빈약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의 기쁨은 이런 오해가 진실처럼 느껴질 만큼 흥에 겨웠었다. 아이들이 각자 다른 목소리로 같은 순간에 목소리를 낼 때마다 건물의 천장과 벽이 희뿌옇게 떨리며 함께 소리를 냈다.
교장 수녀님과의 만남은 역동적이었던 아이들과의 만남과는 다르게 고요했다. 하지만 사람이 갖고 있는 힘과 경이로움은 여전했다. 무엇을 얻었는지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무엇을 버리셨을까? 또 무엇을 버리시려 이 학교에 오셨을까? 궁금증은 심해졌지만 해소할 기회는 짧았다. 내 질문은 소리보다는 시야에 남아서 답을 기다리고 있다. 교장 수녀님은 질문이자 답이었다.
마침 일행이 학교를 떠날 무렵이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었다. 학교의 정문 앞에는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기다리고 있는 부부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의 대부분 남편과 아내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있는 부부들도 보였다. 아이들의 하교시간이 가족들을 함께 걸을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찬찬히 사람들을 살펴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일식집의 종업원이었다. 얼굴을 안지 24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워낙 동양인을 찾기 힘든 도시여서 그런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종업원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그 집의 아들 또한 이 초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이 도시의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동네에서도 단골집을 만들기 어렵고, 그 집의 아들이 근처 학교를 다녀서 학교 앞에서 마주치는 일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점점 시에나라는 도시와 이탈리아인들에게 친숙감이 들기 시작했다.
.13 딱정벌레는 게걸스레 길 위를 헤매고
이탈리아의 흙에서는 재미난 냄새가 났다. 시큼한 돌 냄새, 쌉쌀한 낙엽과 곰팡이 냄새가 섞여있었다. 냄새와 더불어 모래처럼 손에 묻지 않고 먼지가 나지만 돌처럼 단단해지기도 하고 진흙처럼 점성이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흙 위에서 무뎌진 수도원은 한 송이 꽃처럼 햇볕을 듬뿍 받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 게 해주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습기, 갈매기, 마지막으로 언덕이었다. 시에나 남부의 언덕은 그림과 사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비현실적인 풍경의 절정은 파도가 치다가 그대로 멈춘 듯 부드러운 곡선의 언덕들이었다. 뾰족한 각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 언덕 위에서 파란 물감을 잔뜩 부으면 부드럽게 파도가 칠 것 같았다. 모난 겨울바람마저 시에나의 언덕 앞에서 구르고 굴러 부드럽게 불어왔다.
처음에는 신비롭고 낯설기만 했던 풍경들은 노을이 지면서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묵묵히 빛을 받는 언덕들은 명암으로 인해 굴곡을 더욱더 풍만하게 드러냈다. 모든 것들이 대지의 육체 위에 있었다. 언덕의 그림자들과 나무, 건물들의 그림자들이 이루는 조화는 남성의 선형보다는 여성의 선형에 가까웠다. 왜 사람들이 땅을, 지구를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지구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여성이 생물적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닮아있었다. 지금 지구가 상처 받는건 현재의 인류 문명과 사회가 지구 본연, 자연의 선형과는 상극적으로 다른 선형만을 중심으로 옳다고 여겨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죄책감은 언덕과 노을 사이의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조금씩 심해졌다. 접시 위의 음식을 탐하며 기어 다니는 벌레들처럼 자동차들은 언덕 위를 마음껏 횡단하고 있었다. 곤히 잠든 사람의 몸을 흝고 다니는 모습처럼 보여 눈살이 찌푸려졌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자연의 잠을 방해하고 있었다. 벌레들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애써 끝까지 지켜보았다. 지켜보지 않으면 저 벌레들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 숨어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14 바라봄직한 불빛
피렌체는 비가 올수록 걷고 싶어지는 도시였다. 스펀지처럼 빗물을 빨아들인 피렌체는 정돈된 활기참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과자와 초콜릿을 파는 줄 알았던 노란 전등의 상가들은 알고 보니 세공된 보석이나 악세사리를 팔고 있었다. 초콜릿을 파는 곳이나 보석을 파는 곳이나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었다. 초콜릿 또한 보석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은 점점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드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작품들의 완성도를 뛰어넘어서 왜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예술의 마음이 가이드라인을 넘어 내 눈에 담길 때가 되어서야 작품들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안에 담긴 가치관과 생각들이 현재와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났다. 예술이 나에게 다가올수록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현재와 과거의 차이였다. 되살아난 시간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면 몸서리가 처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박물관은 감옥의 역할도 겸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커피는 마시는 음식에 가깝다. 먹기보다는 커피 하나만 마셔도 부족한 느낌이 들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마시기보다는 먹는 음식에 가까웠다. 물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기 위한 음식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담소를 나눌 때 간단한 음식을 먹듯이 커피를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먹은 커피와 핫 초코는 첫 인상부터 아주 곤욕스러웠다. 예전부터 카페에 잘 들리지 않지만 적어도 커피와 핫 초코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나본 이 조그마한 갈색 음료들은 시작부터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아메리카노는 매우 적은 양이었지만 쓴 맛은 한약 백첩을 다려놓은 맛이었다. 핫 초코는 뜨거운 초코가 아니라 녹아버린 초코였다. 끈적 하고 진하고 달다 못해 쓴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먹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대화가 전적으로 필요했다. 대화를 하면서 쓴 맛은 단 향으로, 단 맛은 쓴 향을 남겼다. 이탈리아의 커피를 마시면 향기로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말도, 생각도 같이 향기로워지면 좋으련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피렌체는 어두운 저녁 하늘과 다르게 밝고 뭉근한 불빛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색종이를 이어 붙인 듯 구름 한 점 없이 도시를 덮은 하늘과 각지고 밝은 색의 건물들은 하나의 정교한 미니어쳐처럼 보였다. 피렌체의 안쪽보다도 피렌체의 바깥쪽이 더 아름다웠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땅과 함께할 마지막 밤이었다. 함께 했던 분들과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같은 걸 보았지만 다른 걸 느낀 분들이었다. 이 모든 개성과 다름이 다시 지금의 기행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인간의 유일한 동질성은 각 개체간의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기 때문에 더 많은 하나를 그려낼 수 있었다.
.15 언제나 언덕 뒤에 자리 잡은 도시
아침에 일어나 호텔을 나서려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용 자세의 두려움 때문에 써보지 못했던 비데도 그렇고 이탈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맥주들을 더 사올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몰라서 나갈 때마다 정리 못하고 아무 곳에나 걸어두었던 수건이나 버렸던 쓰레기들이 가장 아쉬웠다. 호텔에 숙박한 적이 거의 없다보니 어떻게 해야 종업원분들이 편하게 정리를 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팁 같은 경우도 로마에서 묵은 호텔에서는 동전이 없어서 아예 놓지를 못했고 시에나에서는 매일 매일 팁을 놔야하는 줄 알고 첫날부터 동전을 놓고 나갔었다. 마지막 날 전 까지 2유로는 스탠드 아래에서 위치도 바뀌지 않고 그새 먼지가 쌓여있었다. 모욕을 준건 아닌가 괜히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져서 먼지를 닦고 1유로를 더 얹어서 책상의 끄트머리에 다시 놓았다. 이번에는 가져가시기를.
누군가가 엽서 사진이나 달력 표지 사진 속에 들어간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말하면 시에나 남부의 언덕에 오르라고 말하라. 언덕 위에 오르는 순간 그 사람은 누군가의 풍경이 됨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언제나 가까이서만 봤던 시에나의 풍경은 언덕들의 풍경 뒤로 아른하게 자리 잡고 알 수 없는 안도감을 준다. 저 도시는 한결 같이 언덕 뒤에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언덕에 올라 바라보아도 멈춰져 있는 사진처럼 지금과 똑같은 안도감을 줄 것만 같다. 내가 스스로 남긴 풍경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오직 내가 본 언덕의 풍경만이 오래도록 남아 돌아올 나를 반겨 주리라 믿는다.
돌아가는 길에 오래된 고성에 둘러싸인 마을에 들렀다. 떠나기 직전인데도 성벽의 벽돌들은 볼 때마다 감탄을 불러왔다. 경사가 가파른 길목에는 돌들이 생선의 뼈처럼 사선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올라갈 때나 내려갈 때나 미끄러지지 않고 잘 다닐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이탈리아는 거대함과 사소함이 극과 극을 맞추어서 짝을 이루고 있었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정 반대에 있는 요소들이었지만 항상 서로를 끌어당겨서 힘이 합쳐져 있었다. 실용적이지만 투박하지 않고, 웅장하지만 배려가 있는 나라였다. 길에 깔린 돌 하나에도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니 기분이 흡족해졌다.
마지막 날에 가장 재밌던 기억은 고양이였다. 신기하게도 이탈리아에서는 길 고양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다 되자 길 고양이 몇 마리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조금은 붓기가 있는 검은색 고양이를 다독여주면서 집에 있는 고양이 생각이 났다. 쌀밥을 먹었던 것 이상으로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로마로,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은 정말 어색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버스와 함께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결코 어색하지는 않았다. 따져보면 이탈리아에서 보낸 9일의 시간들은 원래의 내 일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들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가야만 하고 갈 수 밖에 없는걸 알면서도 발길이 떠나지가 않았다. 비디오를 되감기하듯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공항을 보면서도 원래대로 돌아 간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비행기를 탈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내 존재도 한없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세상은 내가 있기 전에도 존재했었고, 내가 없어진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란 존재는 원래 없었던, 없어져야 하는 존재고 현재도 천천히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원래’가 비정상적으로 거북해서 견딜 수가 없다. 집에 돌아가야 할 아이가 부모의 혼이 무서워서 발길을 주저하듯이 두려움과 아쉬움이 온 몸을 휘감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탈리아에서 나의 죽음을 한 번 경험했다. 이제 다시 보잘 것 없는 천국을 재발견하러 가는 길에 올라야 했다.
.16 ~ .19 소묘의 허상
버스에서 내려 손에 잡힌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갈 때만 해도 내 시간을 언제든지 다시 되돌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일상은 무섭게 나를 ‘원래’대로 조종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핫 초코를 먹기보다는 마시고 빵보다는 밥을 훨씬 자주 먹으며 초등 학교는 커녕 대학교도 다시 가보지 않았다. 광장과 돌길들은 사라졌고 높은 빌딩과 아스팔트가 내 발 밑을 지배했다. 그동안 내가 없었던 세상을 망각하고 원래부터 그 세상에 있던 것처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비가 내릴 때마다 다시 내가 떠나온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끔씩 흙을 만질 때면 내가 떠나온 시간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피자를 보고,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내가 알게 된 맛과 향을 다시 음미할 수도 있었다. 어둠의 입 앞에 놓여진 골목길을 볼 때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탈리아의 골목과 사람들이 떠올랐다. 친절하고 재밌게 나를 대해줬던 화랑의 화가,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던 나를 찬찬히 기다려주던 기념품 가게의 사장, 항상 아침마다 깔끔한 연미복을 입고 자리를 지키던 호텔의 할아버지, 묵묵히 버스를 운전하던 젠나로까지. 또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나와서 밤낮으로 거리를 풍성하게 만든 사람들. 광장에 누워, 길가의 벽에 기대어 무언가를 열심히 대화하고 함께 하던 사람들의 여유가 떠오른다. 그들이 여유를 즐기고 삶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부자여서 라기보다는 이탈리아 특유의 오래된 생활 습관과 가치관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와 똑같이 자동차도 타고 전자기기를 쓰지만 근본적인 정신과 삶의 기반은 도시국가시절부터 뿌리 깊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톱날이 이들의 기반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웃긴 말일수도 있겠지만 와인과 빠니니는 나와 맞지 않는다. 이 두 음식들 때문에 가끔 곤욕을 치뤘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했을 때가 제일 아쉽다. 광장에서 밤을 보낼 때 빠니니를 먹고 나서 속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맛있었던 칵테일과 맥주를 더 마시지 못했다. 호텔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할 때는 와인을 먹었더니 속이 탁 막혀서 그 맛있던 소고기를 딱 한 점밖에 먹지 못했다. 더 아쉬운 점은 이때까지도 와인과 빠니니가 내 급체의 원인 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점이다. 마지막 날 고성에서 멧돼지 빠니니를 먹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게 모든 후회의 원흉이라는 걸. 이 후회는 마지막 날 근사한 초밥 뷔페에서의 식사도 망쳐놓았다. 한국에 와서도 다시 먹기 힘든 음식들이었다. 생각할수록 우울해진다. 맥주라도 많이 사 놓을 걸 그랬다.
.20 일상 너머의 일상으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 없었다. 좋았다는 느낌과 아쉬운 느낌이 혼재한 복잡한 감정이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 글을 쓰면서 이 기행의 소감을 알 수 있었다. 갔다 오기를 잘 했다. 마지막 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여행이란, 특히 해외 여행은 도피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했었다. 지금도 생각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행인건 이번 해외 여행이 적어도 도피나 일탈이 아니었기에 다녀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있다면 도피가 아닌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과 도피의 차이가 뭐인지 생각해본다면 그건 일상을 외면하는지 직면하는지의 차이인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와서 일상을 사는 데 힘이 된다면 그건 도피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 일상은 혼란스럽고 거북해야 한다. 여행을 다녀온 곳과 현재 일상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무엇이 더 스스로에게 맞는지 찾아내야 한다. 여행에서의 재충전은 일상을 유지하는 힘을 재충전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다시 발견하고 전복하는 힘을 재충전하는 것이다. ‘원래’의 일상에 의문을 품고 불편해 하는 것. 이것이 여행이 가진 힘이다.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 이런 힘에 수없이 이끌려 다녔다. 이런 불편함이 지금까지 이 글을 끌고 나올 수 있게 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의 의뭉스러움을 더 날카롭게 벼릴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나에게 스스로 이럴 힘이 부족했기에 이번 기행이 나에게 힘을 길러 주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저런 공허한 감상과 후회만 쓸데없이 붙잡고 뭐라도 되는냥 써놓았지만 정작 내 생활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평범한 시계는 아무런 오작동도 일으키지 않았고 어떤 차이도 없이 쳇바퀴를 열심히 돌려댔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공허한 글이 나를 살려냈다. 내 수준에서는 이런 사소한 시도도 시차를 만들만큼 충분히 규격 외의 활동이었던 걸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낯선 일상은 나를 매우 충실한 여행의 길로 떠나보냈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다시 익숙함에 젖어버렸다. 만약에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익숙함을 낯설음으로 받아들이고 오만하고 어리석은 편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밤을 새벽으로 착각했듯이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을 기본으로 살다 시간이 지난 후 또 다시 신포도만을 바라보며 신기루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런 불편함과 두려움이 다시 일상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그동안 잊고 있던 시침들을 향해, 시계의 틀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했다. 한순간만 스쳐갈 뿐 끝없이 내게서 멀어지는 시침과 일상의 풍경을 향해서 지금 당장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앞으로 신 포도를 먹지는 않으리, 손에서 캐리어를 떠나보내지 않으리.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쫓아가야 한다.
일상이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비슷하다면 어떨까? 쳇바퀴 돌듯 무료한 생활이 일상을 점철할수록 삶은 더 경직되고 지루해질게 뻔하다. 끊임없는 삶 속에서 소소한 순간과 일상의 관계를 항상 낯설게 바라본다면 이런 생활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설음은 이해와 인지를 위해, 익숙함을 향하기 위해 지속적인 시선을 불러온다. 시선은 기억하고 기억은 써짐으로써 존속한다. 그때, 그곳에서 쓰지 않으면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낯설음은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새로운-혹은 다시 바라본- 시간을 가져다준다. 기쁨은 새로운 시간에서 온다. 기억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쓰지 못했던 것들을 쓰면서 느끼는 위안과 여유는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레니 크레비츠는 ‘나의 모든 밤이 기억될만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밤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기행을 다녀온 후에는, 더 정확히는 글을 다 끝마치고 나는 순간부터 애를 써야 한다.
그 애씀이란 결국 뻔하디 뻔한 일상을 떠나 낯설고 불편한 일상을 향해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그동안 내가 흘려보냈던 밤의 기억할 만한 밤을 찾기 위해서, 지금 타자를 치고 있는 이 밤의 기억할 만한 밤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떠나가야 하는 이상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쳇바퀴에서 다른 쳇바퀴로 건너가야만 하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
글이 다 써지는 대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매순간 미뤄왔던 길을 통해 내 일상을 다시 찾아 가야 한다. 온갖 진부한 묘사와 상투적인 깨달음만을 가진 채 떠날 수 있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행은 얻으러 가는게 아니라 버리러 가는게 아니던가.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생전에 ‘구도’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당신들은 무엇을 얻었는지 보다 무엇을 버렸는지가 궁금했었다. 무엇을 버렸 길래 이토록 큰 세상을 담고 걸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었다. 아직 길의 입구도 찾지 못한 처지에 미래에 거시적인 ‘구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시적인 ‘여행’을 바라는 것 마저 내 욕심일까. 의문의 답마저도 떠나가야 알 수 있음에 두렵던 찰나, 방금 막 일상이 내 손을 가차 없이 떠나갔다.
첫댓글 아, 다녀온 후에 쓴 글 같지가 않네요. 엄청 쓴 초콜릿...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려주는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