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만암공(萬庵公) 소론(所論)
성균생원 자공(自恭)의 17대손이며 통천(通川)군수를 역임한 정상(定相)의 현손이며 승지와 병조정랑과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내고, 영조의 명에 따라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편찬한 학촌공(鶴村公) 휘 창조(昌祖)의 둘째아들인 광조(光肇)는 1747년(英祖 丁卯)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석여(錫汝)이며 호는 만암(萬庵)이다. 그의 집안은 관북을 대표할만한 명문집안이다.
아버지는 물론 백부 영조(榮祖)와 계부 홍조(弘祖) 등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수재 집안이다. 한 문중에 한 사람의 급제가 나오기 어려운데 3형제가 합격했다면 예사가 아니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 이수항(李壽沆)도 꿈에 용을 기르면 좋다고 하더니 그런 길조(吉兆)가 위씨네 집에서 응종했네(嘉徵曾有龍馳夢吉占應符魏大吉)라는 희작시(戱作詩)를 지어 부러워 할 정도였다.
만암은 비범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 재질을 타고나 글을 배우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27세 때(1774년 英祖 甲午)에 사마시에 합격하고도 무려 22년이 지난 49세 때인 1795년(正祖 乙卯)에 문과에 급제, 형조좌랑을 지냈다. 만년에 보의설(譜疑說)과 만암집(萬庵集)을 저술, 세칭 남유계항 북유만암(南有桂巷 北有萬庵)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관북을 대표한 인물이다. 1820년(庚辰)에 타계했다.
문제의 보의설은 1759년 남종(南宗)이 발행한 기묘초보의 사실관계에 대한 고증(考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족보기록 중 사료(史料)가 애매하거나 불확실한 점을 발견해서 기록한 것을 곧 후손들이 보의설(譜疑說)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보의설은 우리 족보 상계(上系)의 잘못된 대목을 지적한 글이다. 만암공이 기묘초보의 의문난 부분으로 여긴 대목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1) 시조(始祖) 회주군(懷州君)의 동래기록(東來記錄)
우리 구보(舊譜․己卯初譜)에는 신라 태종 때 당(唐)나라 대광공주(大匡公主)의 배신(陪臣)으로 따라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주자강목(朱子綱目)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보면 중국의 공주가 외국으로 시집 갈 때는 반드시 기록이 있으나 대광공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태종 재위기간(甲寅 654~辛酉 661)인 갑인(甲寅)년부터 을해(乙亥․675)년까지 22년간은 당나라가 백제를 3번, 고구려를 5번, 신라를 2번 침략했는데 그 때 공이 왔지 않았나 의심스럽다.
(2) 사기(史記)에 등장(登場)한 위씨(魏氏)들
만암공은 여러 사기에 위씨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분들이 왜 족보에는 등재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나타낸 것이다. 기묘초보를 닦을 때까지도 이 분들이 사기에 기록돼 있는지도 몰라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 신라 문성왕이 임술(壬戌 840)년 4월에 아찬 위흔(魏昕)의 딸을 비(妃)로 삼았다.(東國通鑑)
■ 문성왕후비 소명부인(昭明夫人)은 시중 위흔의 딸이라 하고 헌안왕 파계(派系)에는 모(母)인 소명부인은 아찬 충공(忠恭)의 딸이라 하였다.(東國紀年與覽)
■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 국도는 경주라 하고 위영(魏英)을 주장으로 삼았다(與地勝覽 慶州條)
■ 고려 성종 을축(乙丑․989)년 12월에 병부랑중 위덕유(魏德柔)를 송나라에 보냈는데 송제(宋帝)가 광록대부를 제수하였다.(동국통감․高麗史世家)
■ 목종 을유(乙酉․1009)년 1월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魏從)이 쫓겨났다.(동국통감)
■ 문종 기축(己丑․1049)년 3월에 위숭(魏崇)으로 호부상서를 겸임하게 하다.(고려사세가)
■ 문종 신유(辛酉․1081)년 5월에 송제(宋帝) 생신에 보궐(補闕) 위강(魏絳)을 파견하다.(〃)
■ 인종 을유(乙酉․1135)년 윤 2월에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 등에게 병선 50척을 주어 서적 묘청(妙淸)의 여적을 토벌하게 했다.(동국통감․高麗史)
■ 신종 경신(庚申․1200)년 12월에 낭중 위돈겸(魏敦謙)을 경주부유사로 삼다.(〃)
■ 강종 임신(壬申․1212)년 5월에 십운시(十韻詩)로 위대여(魏大與) 등 62인을 취하다.(고려사)
■ 고종 갑신(甲申․1224)년 10월에 검교장군 위소(魏玿)가 허벅지 살을 떼어 모병을 구원함으로 왕이 많은 쌀을 하사하였다.(고려사)
■ 고종 신묘(辛卯․1231)년 9월에 몽고병이 용주를 포위해 魏玿가 잡혔다.(東國通鑑)
■ 고종 갑진(甲辰․1224)년 4월에 위순(魏珣)에게 급제를 내렸다.(고려사)
■ 고종 경술(庚戌․1250)년 7월에 낭장 위공취(魏公就)를 몽고에 파견하였다.(동국통감)
■ 원종 경신(庚申․1260)년 9월에 위문개(魏文愷) 등을 개원로(開元路)에 보내 백성을 추쇄하였다.
■ 원종 기사(己巳․1269)년 1월에 위문개 등을 개원로에 보내 죄 짓고 도망친 백성을 추쇄하였다.(고려사)
■ 원종 신미(辛未․1771)년 6월에 국자박사 위문개 등을 평양에 보내 도망친 백성을 조사하였다.(동국통감․고려사)
■ 충렬왕 임오(壬午․1282)년 9월에 중랑장 위문개를 개원로에 보내 도망친 백성을 무마해 데려오게 하였다.(동국통감)
■ 공민왕 을해(乙亥․1359)년 7월에 고성현령 위양용(魏良用)이 적을 죽이고 잡힌 7인의 포로를 등용하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고려사)
■ 조선 태조 임신(壬申․1392)년 개국원종공신 낭장 위인주(魏仁柱)와 호종공신 낭장 위천주(魏天柱)가 공신록에 기록되다.
■ 예종 기축(己丑․1469)년 함흥분경(分京) 석차강목에 사정(司正) 위흥민(魏興敏)이 있다.
■ 율곡사록(栗谷私錄)에 위한조(魏漢祚)는 북도인이니 백학(白鶴)선생이라 자호하였다. 도술이 높고 토정(土亭) 제공과 종사하였으며 종신토록 숨어살았다.
■ 계항공이 목은집에서 부사 황보덕(皇甫德)의 중령산성 기록에 위씨성(魏氏姓)을 가진 3분이 유사(有司)로 모두 관직에 있었으나 보서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 충정왕(忠定王) 경인(庚寅, 1350)년부터 신유왕(辛耦王) 무진(戊辰, 1388)년까지 39년간 전라일도(남원․순천․장흥) 등의 읍이 여러 번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피난(避難)가면서 문적(門籍)과 가승(家乘)을 분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암공의 지적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족보 상계에는 정확한 역사기록이 결여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위에 열거한 조상들은 이후 관북 정해보(丁亥譜, 1767)와 장흥 임인보(壬寅譜, 1842)에 방조로 등재돼 임자보(壬子譜, 1972)까지에 이르고 있다. 이들 방조들은 사기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어 틀림없는 조상이나 방조로만 등재된 것이다. 공이 밝힌 신라 때의 인물 중 우리 위씨와는 상관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1999년 대동보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고려 성종(成宗) 989년부터 조선 예종(睿宗) 1369년까지 380년 사이에 사서(史書)에 등장한 인물은 모두 14명이다. 즉 위덕유, 위종, 위숭, 위강, 위통원, 위돈겸, 위대흥, 위소, 위공취, 위문경, 위문개, 위양용, 위인주, 위영민 등이다. 만일 영이재(詠而齋)께서 1759년 기묘초보를 편찬할 때 이 어른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모르기는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족보에 반영하였을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 족보 중시조에서 13세까지 상계(上系)의 조상들 11분은 제사조차 드리지 않고 있다. 물론 굳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명백한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은 어쩐지 좋은 모양은 아니다. 일부 선조의 경우는 하다못해 방조란에라도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는 후손들이 마음속으로 "우리 선조들이 아니다"고 스스로 예단한 결과처럼 보인다.
첫댓글
조선개국원종공신에 현재 확인된 분은 위인주 위인보 위신충 총3분이십니다...
확인은
위인주...국보 제250호
이원길 개국원종공신녹권
보물 제437호
김회련개국원종공신녹권
위인보...보물 제1282호
최유련 개국원종공신녹권
보물 제1260호
진충귀 개국원종공신녹권...
위신충...보물 제726호
장관 개국원종공신녹권
등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또한 위천주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특히 위신충은 조선 태종때에 전 호군 또는 함주(현재 함흥)천호의 직위및 직책이었음이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신충은 자공할아버지의 증손자(19세,형 세충)로 족보에 올라 있음에 동명이인이지 아니면 우리 족보의 심각한 오류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재치...
1688년(癸卯 숙종 14) 8월 3일, 8월 22일 승정원일기 근거하면 위정상 선조님의 관직은 통천군수가 아닌 통천현감이 타당하며..
호조참의를 지낸 위창조 선조님의 관직 중, 1739년(己丑 영조 15) 8월 15일 승정원일기 근거하면 병조정랑(정5품)이 아닌 병조좌랑(정6품) 관직에 제수함이 확인됩니다.~
/위성록
예종 기축(己丑 1469)년 함흥분경(分京) 석차강목에 사정(司正) 위흥민(魏興敏)이 있다..에서
위흥민은 관북파 파조인 돈(頓 18세)의 손자, 적개원종공신으로 병조참의에 제수된 세충(世忠 19세)의 아들 극무(克武 20세) 입니다..
기묘보 1권 22p 극무공의 면주를 근거하면 초휘는 흥민으로 확인됩니다.~
/위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