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현장에 목회에 지장을 주는 장애 3요소와 해결책
1. 이단 문제
2. 세상에 비친 교회의 부정적 인식
3. 목회자 비인격, 영성과 이성의 빈약한 지식과 불균형
1. 이단 문제
이단 문제는 오늘에 와서 목회 현장에 나타난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담임한 “예루살렘교회”에도 있었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단 문제는 생겨난 것을 해결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이단이 출현하지 않도록 목회자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이 맡겨 주신 예수님의 “양” 들이 갈급해하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성에 대한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성경 외에 기저를 둔 영적 의문에 대하여도 명쾌한 대답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단에 미혹, 또는 유혹되는 성도는 성경 본문의 난해한 말씀과 영성에 관하여 특별히 “신령한 것” 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경우가 대다수의 경우이다.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더욱 풍유나 비유로 말씀하신 성경 구절을 정확하게 주님의 뜻을 간파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목회자는 천지를 다 뒤지거나 성령님께 사정없이 매달려, 최소한의 밝은 답을 도출 해야만 한다.
예컨대, “새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대속하신 궁극의 목적인데, 이에 대한 명료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목회자, 소위 건전한 교단의 목회자는 준비하지 않았고 이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성도에게 정성 되게 해석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만희’를 대표로 하는 대명사처럼 된 이름이 “新天地(신천지)”가 아닌가?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 신학의 어젠다 인가? 그런데 보통의 교회에서는 ‘새하늘 새땅’ 이라는 다섯 음절의 단어를 써서 “新天地(신천지)” ‘이만희’와 애써 구별을 하고자 한다.
이것뿐이 아니다. 특별히 종말론에 관한 신학 주제와 성경 말씀을 애써 피해 왔던 것이 보통의 교회 목회자들의 현실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교회 사적 사건들 때문이다.
시한부 종말론, 자가 계시적 종말론, 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크나큰 폐해를 줬던 경험을 했다.
따라서 성도들은 ‘종말론’에 대한 알래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 목회자가 “종말”이라는 설교의 제목도 제시할 수 없는 일반적 목회 환경이 됐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공부와 연구가 부족하여 종말론에 대한 설교나 성경 공부를 할 수 없어서 이 ‘종말론’에 대한 열망이 있는 성도들의 갈급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일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부단히 성경 연구와 더불어 연관된 지식 추구에 땀을 흘려야 할 때가 됐다.
성경은 다양한 직업군을 비유로 해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농부, 어부, 장사꾼, 군인, 등 이 비유를 해석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간접적 지식으로는 본뜻의 1/100도 이해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이러한 체험에 관한 열정을 도,농 목회자를 아우른 모든 목회자는 쏟아부어야 한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자, 예수님 자신도 인간을 이해하시기 위해 이간의 모든 연약함을 직접 “체휼” 하셨다. 논에 익어가는 벼를 보고 “쌀나무”라고 하는 목회자가, 고구마 캐기 체험 한 번 하지 않는 목사가 ‘씨뿌리는 비유’ 를 바르게 설교할 수 있겠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개역 히 4:1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개역 사 53:3)
목회자는 성도의 영적 목마름과 갈급함을 시원케 하는 영적 지식, 성경적 지식, 교회사적, 신학적, 교리적 지식을 추구함에 부지런하고 충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2. 세상에 비쳐진 교회의 부정적 인식
우리의 사회의 자연인들은 교회에 기대하고 바라는 바가 다른 종교에 비하여 지대하기가 비길 데 없다.
따라서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은 자연인들의 실망을 넘어 분노하기에 충분하다.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보도되는 교회의 분쟁과 법정 다툼의 사건들, 목사들의 ? 실상 목사인지 모르지만 ? 비인격적 사건들 하루가 멀다하고 紙上(지상)과 공중파를 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혹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전도’ 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수가 많아지고 교인의 수가 많아지면, 사회의 자연인들이 교회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 라고 하는이가 있다.
글쎄 참으로 그럴까? 교회의 수가 적었고 교인의 수가 적었던 1900년대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호감을 얼마나 받았던가!
그때에 비할 수 없이 교회의 수가 많아졌고, 교인의 수가 많아진 현재의 교회가 사회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다음의 3가지 해결책을 제시 한다.
1) 교회는 종교법인체라서 ‘정관’에 의해 경영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결코 교회는 “법인체”는 아니다. “예수님의 몸”이다, 결코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유기체’다.
교회가 ‘공동체’라는 인식은 세상에서 인식하는 것이지 교회 내부에서 인식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교회는 “생명체” 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정관’에 의한 최소의 부분이 적용돼야 하고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몸의 각각의 지체로서의 관점에서 경영 되어야 한다.
자신의 몸에 각각의 지체들이 협력하고 아껴주고 보양하며 머리에서 내리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처럼 성경과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과업을 성도가 각기 받은 은사로 각각의 과업을 수행하고 결과는 성령님의 뜻하신 바를 따라 함께 누려야 한다.
2) 교회 내부의 갈등을 결단코 세상 법정으로 가지 않도록 결안 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건에도 절대로 세상 법정에 의한 해결 방법은 안 된다고 대한민국 국내외 교회가 결단해야 한다.
3) 교회의 재정은 투명해야 하고 개교회, 자체 교회를 위한 재정은 최소로 집행하고 대부분 재정을 믿은 이의 가정들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절망 중에 있는 예수 가족들을 위해 집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부끄러운 교회 내 소식을 나팔 부는 이는 세상 자연인들이 아니라 교회내의 불평불만을 품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 그리고 전도자들이 예루살렘과 소아시아와 유럽에 세운 교회들이 얼마 못된, AD 400여 년을 지나자 일시에 이슬람 교회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재정은 최고의 성당을 건설하는데 모두 집행하고 스스로 치리하는데 집행하는데도 모자라 천당 표 까지 팔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십일조를 받는 기관을 따로 두고 그 기관은 그 지역에 무료 병원, 무료 급식소, 고아원, 양로원 등 그들 회교도 중 약한 이들이 이슬람의 혜택을 받고 살게 했기에 이슬람 내부에 있는 이슬람 교인들이 긍정적 나팔을 세상을 향해 매일같이 불어 댔기에 사회의 자연인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이슬람 교회가 됐다.
이로써 100년도 되지 않은 이슬람이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유럽을 접수했던 것이다.
3. 목회자 비인격, 영성과 이성의 비약한 지식과 불균형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과 비판을 받게 된 원인은 전적으로 목회자로부터 이다.
묻지 마 살인자 진술을 들어보자! 왜 죽였어? 하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하죠!
“기분 나빴다는 거죠, 자신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데 고급 승용차에 반쯤은 누워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뻐기고 가는 모습에 피가 거꾸로 올라 온 거죠.”
다시 한 번 주지 합니다. 비판자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교인입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이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생활하는 중에도 최선을 다해 헌금하고 있는 교회 안의 교인입니다.
목사가 어째서, 가난하고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교인에게 기분 나쁘게 하고 분노하게 합니까?
영성과 이성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여주신 오직 人間(인간)만의 품성이다.
영성은 보이지 않는 세계, 이성은 모이는 물리적 세계에 관한 앎의 지적 인지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은 균형을 유지해야 건강한 목회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영역이 균형 잡히지 않고 한 방향으로 치우친 목회자가 대부분이다. 말씀으로만!, 성경으로만!, 주장하는 이성주의가 있고, 은사로, 기적으로, 계시로만 주장하는 영성주의가 있다. 목회자는 어떤 주의도 배격해야 한다.
예컨대, 1906년대 평양 장대현 교회 대 부흥을 시작으로 조선의 교회에는 두 영역의 목회방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길선주 목사님을 계보로 하는 “사경회” 중심, 이용도 목사님을 계보로 하는 “은사 주의”의 두 갈래이다.
사경회 중심의 말씀, 성경 주의는 이성주의에 치우쳐서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는 신신학의 원초가 됐고, 은사 중심의 영성주의는 통일교, 신천지 등 이단으로 고착되는
사단의 집단을 만들었다.
두 영역은 목회자에게 건강한 목회를 할 수 있게 하는 - 평신도에게도 있어야함 = 양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
영성의 영역은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성은 성경과 아울러 하나님의 창조물로부터 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에 적용하면서 성경 외에 자연 만물을 탐구치 않고, 성경 스토리의 배경이 되는 중동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럽에 관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절름발이 병든 목회를 하게 하는 실마리를 가진 ‘나쁜 목사’ 인 것이다.
끝으로 현대 목회자의 선배 길선주 목사님의 말씀을 소개한다.
1. 외쳐도 듣지 않고, 2. 학식이 있으면 학식 자랑한다고 하고 3. 학식이 없으면 무식쟁이라고 하고, 4. 신령하면 신비주의의 미신자라고 하고, 5. 일을 잘하면 사회 객이라 하고, 6. 인자하면 우유부단 자라 하고, 7. 엄격하면 압제자라 하고, 8. 관청 교섭을 잘하면 행세 객이라 하고, 9. 교제에 서투르면 멍텅구리라 하고, 10. 노숙한즉슨 노폐물이라 하고, 11. 청년인즉 경박하다 하고 12. 성경만 가르치면 완고하다고 하고 13. 지식을 말한즉슨 신령하지 않다고 한다.
*이 글을 2007년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연구세미나집에 수록된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
샬롬